[문학/보스턴에서]푸이그의 정신세계 "허구속에 살았노라"

  • 입력 2000년 9월 22일 18시 45분


마누엘 푸이그와 그가 남긴 문화적 생산품들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여러 가지 지적 문제들과 관련해 흥미롭다.

그가 보여준 대중문화와 문학의 결합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도 헥터 바벤코의 영화로 잘 알려진 그의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가 보여준 세계는 특히 잊을 수 없다.

거기서는 오로지 이념만 알고 사랑에는 무지했던 한 혁명가와, 이념 따위는 아랑곳 않고 오로지 사랑만을 추구했던 동성애자간의 정신적 교류가 그려져 있었다.

종국에 이르러, 혁명가는 사랑을 깨달으며 죽어가고, 동성애자는 혁명가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러 달려가다 죽어 가는, 다시 말해 사랑이 혁명이 되고 혁명이 사랑이 되는, 이 경이로운 역설과 화해의 드라마가 이념에서 탈이념으로 널뛰기 해 온 한국사회에서 왜 보다 더 중요한 텍스트로 기능하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이 마누엘 푸이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로 오래 남을, 뛰어난 전기 한편이 출간됐다.

‘그의 생애와 픽션’이라는 부제의 이 책에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전문가이자 마누엘 푸이그 소설의 뛰어난 번역자이기도 한 수잔 질 르빈이 묘사한 그의 생애는 위에서 말한 것과 또 다른 차원에서 흥미롭다.

그는 작가이기에 앞서 비디오를 3000편 이상 소장할 정도로 영화에 미친 할리우드 키드였으며, 놀랍게도 그의 문학적 여정은 영화작가로서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나아가 이 책은 영화관람이야말로 엄혹한 세계에 둘러싸인 영혼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느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게 된 예민한 소년 마누엘에게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지만 불가피하게 주어진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방식이었다. 영화가 가진 뛰어난 현실 묘사력 덕에 그는 영화를 통해, 이 세계 안에 머무르되 이 세계를 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마침내 이 현실의 세계로부터 제일 세계의 지위를 박탈하고, 대신 그 지위를 영화에서 구성되는 허구의 세계에게 헌정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배우를 흠잡았다는 이유로 절친한 친구 알멘드로스를 한밤중에 찬 바람 부는 길거리로 내쫓고, 한동안 소원하게 지내기까지 했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에피소드로 점철된 그의 생은 그저 하나의 괴짜 인생이 아니라, 환상의 세계에 정신의 안방을 내 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예민한 영혼의 징후로 이해되어야 한다.

김연<하버드대 대학원 중국사상사 전공·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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