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파업]중병 조기진단 마비…환자-가족 발동동

  • 입력 2000년 9월 7일 18시 50분


《광주 동구 운림동의 고정숙(高貞淑·51·초등학교 교사)씨는 요즘 불안과 고통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뒤척이고 있다. 그는 두 달 동안 식은땀에 기침 미열 한기 등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의료공백 사태로 검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8월초 대학병원에 찾아가 간신히 X선 촬영은 했지만 더 이상 정밀검사를 받지 못했다. 병이 생긴 것은 분명하고 증세는 심해지는데 병명조차 알 수 없다. 회사원 이윤희(李允姬·35·여)씨는 6월초부터 자궁 출혈이 있어 동네의원에서 주사를 맞으며 치료를 받았지만 낫지 않아 8월초 종합병원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종합병원 의사는 “단순한 부인과 질환은 아닌 것 같으니 정밀검사를 받자”고 통보했을 뿐이다. 이씨는 ‘혹시 자궁암이 아닌가’하는 불안 속에서 하루 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다. 》

▼서울대병원 위암진단 손놔▼

장기화된 의료공백 사태로 병원에서 초기에 병을 발견해 치료하는 ‘조기 진단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 조기 진단 시스템은 암이나 뇌졸중 등 방치하면 사망에 이르는 중병을 제때 치료함으로써 완치율을 높여 환자의 고통은 물론 환자의 사회적 의료비 부담도 줄이는 것. 서울대병원의 경우 의료대란 이전에는 한 달에 15명 정도의 조기위암환자를 치료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기위암환자를 찾아내 치료하는 일에는 거의 손을 놓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의 경우 파업 전인 5월 1∼23일 조기위암환자 20명을 치료했지만 파업 중인 8월 1∼23일 12명으로 뚝 떨어졌다. 자궁암 환자는 5월 42명에서 8월 10명으로, 협심증 환자는 79명에서 12명으로, 뇌졸중 환자는 118명에서 38명으로 줄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경우 하루 40∼50명의 환자가 지역 병의원에서 ‘중대한 질병’으로 의심해 진료의뢰를 해왔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

국내 암 사망자가 연간 5만여명에 이르고 있는 실정을 감안할 때 줄잡아 최소 1000여명에서 2500여명의 암환자가 조기진단과 치료의 기회를 잃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동네 병원에서 암이 의심된다는 진료결과가 나오더라도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에서 확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증세에 따른 치료에 그칠 뿐 완치할 수 있는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는 불가능한 상태다.

▼"2000여명 암치료 기회상실"▼

S대 흉부외과 박모교수는 “전공의들이 8월1일부터 2차 파업에 들어가면서 교수들만으로 밀려올 심장병 환자를 어떻게 볼까 걱정했는데 지금은 환자들이 다 어디로 갔나 의문이 들 정도로 환자가 격감했다. 병의 전조 증세가 있는데도 집에서 병을 키우다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오지 않을까, 병명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했다.

최재천 의료전문 변호사는 “지금까지 의료계에서는 응급실과 중환자실 운영에는 신경써 왔지만 국민의 ‘의료접근권’이 무시되고 있고 조기진단 및 치료가 되지 않아 국민보건에 위해요소가 되고 있다”며 “환자들의 의사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의사의 사회적 지위도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주기자>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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