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

  • 입력 2000년 9월 1일 19시 58분


네루다
“시란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본 사람이라면 네루다(1904∼1973)의 이 말을 기억할 것이다. 네루다의 문학 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이 말은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될 수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 네루다가 국내 민중문학가들의 우상이 되었을 때 이 말은 시의 사회적 역할을 뜻했다. 그러나 영화 ‘일 포스티노’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네루다는 우정과 사랑의 시인으로 탈바꿈하여 우리에게 다시 다가온다. 그러면서 이 말은 그의 시가 사랑에 빠진 연인의 마음을 표현해 주는 언어로 사용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문학 사조와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른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네루다의 작품은 정치에 대한 사랑과 남녀의 사랑, 그리고 시에 대한 강한 애착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 번역된 ‘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 (문학과지성사, 고혜선 옮김)는 랑군과 실론과 자바에서 영사로 근무했던 네루다가 동양에서 쓴 시와 동양을 주제로 쓴 시를 모아놓은 선집이다. 1933년의 ‘지상에서의 거처’부터 1964년의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에 이르기까지 다섯 개의 시집에서 발췌한 이 선집은 특히 사랑과 존재에 대한 고통이 전반적으로 주를 이루고 있다. 그는 말도 안 통하는 동양이라는 미지의 세계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독을 느꼈고, 그런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런 동양에서의 경험은 그의 시를 심오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고독을 이기는 방법은 사랑을 찾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네루다는 가는 곳마다 사랑을 찾는다. 사랑은 항상 그곳에 있었고, 그를 노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미얀마 출신의 조시 블리시라는 한 여자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는 질투심에 불타 살인까지 저지르려고 하고, 네루다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랑군에서 도망친다. 그러나 그녀의 뜨거운 키스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1964년에 발표된 시집에서 “어쩌다 알게 된 머리칼/ 순수한 젖가슴, 황홀한 엉덩이를 통해/ 비너스는 거품이 없음을 알게 되었지요”(초행)라고 시인은 회상한다.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처럼 동양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시학을 구축한 많은 시인들이 있지만, 네루다에게는 그런 것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동양이건 칠레건 그에게 사랑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루어진 동일한 우주였다. 비록 이 선집은 동양을 주제로 모아놓은 선집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지역적 한계를 초월한 한 시인의 사랑과 번민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이 네루다 시의 본질이며, 바로 네루다의 노래가 우리 모두의 노래가 되고, 우리 모두의 노래가 그의 노래가 되는 이유인 것이다.

송병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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