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이윤기 문화비평집 '잎만 아름다워도…'

  • 입력 2000년 8월 4일 19시 03분


‘소설가’ 이윤기는 사실 번역가나 신화연구가로 더 유명했다. 등단 20년만인 1996년부터 소설쓰기에 전념했건만 사람들의 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오죽하면 스스로 “신화는 밑반찬, 소설이 주요리”라고 주장했을까. 이번 산문집으로 그는 본의 아니게 문화 에세이를 디저트로 올려야할 듯하다.

97∼98년 종합월간지 ‘신동아’에 ‘작가 이윤기의 문화칼럼’이란 간판을 단 연재물을 묶었다. 글감의 주재료는 한국 미국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사소한 개인적 경험들이다. 여기에 속담이나 동서양 고전의 양념을 쳐서 ‘고단백 주전부리’를 만들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회색분자’임을 고백한 인문주의자는 주로 ‘공정함’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다. 지역감정, 패거리 문화, 전근대적 권위주의, 여성 차별, 배타적 민족주의 등 공정치 못한 삶의 급소를 ‘슬쩍’ 건드린다.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아프게’. 선진국에서 체험한 일화를 자주 적자 ‘양놈 똥구멍 빨다 온 놈’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그의 비교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에 뿌리를 둔다.

그의 화두라는 ‘버그(bug)’에 대한 단상을 훔쳐보자. 그가 말하는 ‘버그’는 기독교에서는 에덴 동산의 비극이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프로메테우스 같은 것이다. 모두 기존 지배자를 ‘열 받게 만든다’(bug)는 공통점이 있다. 인류 정신사에서는 버그는 정론(正論·orthodox)에 딴죽을 걸고드는 ‘이론’(異論·paradox)이다. 예컨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한점의 의혹도 없는 믿음’이란 악마는 바로 ‘버그 없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결국 “인류 문명이건 개인이건 발전은 버그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책을 읽어가면 행복한 책읽기와 글쓰기가 주는 쾌감에 뿌듯한 지적 포만감을 갖게 만든다. 자신은 공부하고 싶은 책 보고, 한글로 옮겨 돈을 받는 직업을 행운이라 했다. 베트남전에 보병으로 참전해서도 얼마간 현지 도서관의 사서를 맡았을 정도였다니…. ‘운수 좋은 과부는 넘어져도 가지밭에만 넘어진다’나.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지만 잡문만 유려해도 문장가 대접을 받을 일이다.

▼'입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 이윤기/ 동아일보사/ 271쪽 7500원▼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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