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사회의 새좌표]정치학/직접 민주주의 시대로

  • 입력 2000년 6월 5일 19시 25분


지난 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총선시민연대의 홈페이지인 ‘www.ngokorea.org’가 네티즌으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결사체 민주주의와 전자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결합이었다. 이제 한국 정치에서도 디지털 혁명은 미래학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

디지털사회를 가져온 지식정보화혁명이 정치와 정치학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고 있다. 현재 정치학의 분석 대상은 ‘영토 국가’ 시대의 정치다. 베스트팔리아 체제(1648) 수립 이후 대외적 주권을 가진 영토국가 내에서 시민이 선출한 대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기본적 정치 지배구조를 형성해 왔다. 영토국가 체제 아래서는 고대 아테네에서 실시됐던 직접적이고 참여적인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았다. 영토국가의 방대한 영토와 수많은 인구가 시민들이 직접 지배하는 데 필요한 의사소통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시민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고안할 수밖에 없었다.

▼시민 정치참여 제약 해소▼

그런데 디지털혁명이 영토국가의 이 모든 제약을 해제시키고 있다. 이제 원거리에 흩어져 있는 일반 시민들도 디지털화한 통신매체를 이용해 직접 공공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인터넷을 통해 정부나 정치인과 직접 대화하며, 전자매체가 제공하는 토론장을 통해 공적 토론에 참가할 수 있게 됐다.

산업화 시대의 정치가 지식정보화시대의 정치로 변모하면서 정치를 이끌어 가는 주요 행위자의 교체가 일어나고 있다. 산업화시대에 정치의 주역은 계급이었다. 산업화시대의 부와 소득을 결정한 것은 자본과 노동이었고, 정치는 기본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간에 형성된 계급갈등을 해결 처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자연히 정치조직은 계급균열 라인을 따라 형성 조직됐다. 그런데 디지털 사회에서는 부와 소득을 결정하는 기본 인자가 생산수단과 노동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다. 지식과 정보의 격차가 소득의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지식 정보 전문가인 ‘골드 컬러’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하고 있는 반면, ‘정보 이용능력’이 없는 디지털 빈곤계급도 양산돼 소위 ‘정보양극화의 사회’(digital divide)가 출현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자본과 노동을 따라 형성됐던 전통적인 계급균열 라인이 약해지는 대신 지식과 정보를 소유 이용하는 데 능한 디지털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간의 균열라인이 지배적 균열라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의 민주주의 위기 올까▼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가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올 것인가? 현재의 양상을 보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전자민주주의는 아직까지는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대체하려고 하기보다는 대의제의 개선과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자민주주의 운동은 대표와 유권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대표와 유권자간에 더 많은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고, 사이버 공간을 통해 항시적 접촉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로써 대표로 하여금 시민의 요구를 더 잘 대표할 수 있게 하고, 시민의 요구에 더 충성스럽게, 더 빨리 응답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시민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대표에 대해 시민들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장치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학 패러다임 바꿀 때▼

그럼에도 거대 영토국가의 시공간적 제약을 해제시킨 디지털 혁명이 전자민주주의를 단순히 대의제 민주주의를 개선 보완하는 수준에서 머물게 할 것 같지는 않다. 전자 민주주의는 결사체 민주주의(associative democracy) 또는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와 결합하면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아테네의 직접적 참여적 민주주의를 탈산업화된 지식정보화 시대에 재현한다는 ‘전자 아테네’ (Electronic Athena)의 구상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디지털화된 정보가 전 세계를 폭발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제 미래학적인 꿈이 아니라 곧 다가올 현실일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의 정치학은 디지털시대의 정치를 분석할 수 있는 패러다임적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임혁배(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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