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

  • 입력 2000년 5월 12일 19시 14분


‘1979년 10월30일 늦은 밤. 죽음같은 정적을 깨고 청와대 집무실에서 한발의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대통령 박정희의 자살이었다.’

자살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 책 첫대목에 나오는 하나의 가정이다. 만일 10·26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박정희는 당시의 혼란과 갈등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는…. 집착이 강한만큼 체념도 빠른 인물이었기에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은 정신과 전문의가 5·16을 앞두고 내놓은 박정희 정신분석서. 저자가 바라보는 박정희의 성격은 모순 덩어리다. 대담하면서 소심했고 공격적이면서 한없이 유약했던 박정희. 그 극단적인 모순은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고 본다. 이 모순된 성격이 어떻게 형성됐고 어떻게 삶과 정치에 투영되었는지. 경제와 독재에 대한 집착, 성적(性的) 방황에 감춰진 무의식은 무엇인지. 저자는 이것을 읽어내려 한다.

유신 전까지만 해도 실패한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언급에서 드러나듯 저자의 시각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박정희의 출생과 유년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로부터 “널 떼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말을 적잖이 들었던 박정희. 이 때 형성된 것은 유기(遺棄)불안과 죽음의 공포였다. 이 상처는 가난, 형의 죽음, 아버지의 권위, 강제 결혼 등과 맞물리면서 불안 억압 의심 그리고 공격적 충동적인 성격을 형성했다.

이 불안과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그것은 메시아적 갈망으로 나타났다. 이순신 신격화가 대표적 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유기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영원불멸의 삶을 획득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였다. 이것이 결국 망상의 수준까지 나아갔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박정희의 삶에서 부인 육영수는 의미심장한 존재였다. 육영수는 박정희의 충동적인 면을 조절해주는 강력한 초자아(超自我)이자 구강기적(口腔期的) 욕구를 채워주는 어머니였다. 그런 육영수가 세상을 떠나자 박정희의 무의식 속에 담겨있던 유기 불안, 죽음의 공포는 다시 증폭되었다. 육영수라는 초자아가 사라짐으로써 충동 조절 능력, 융통성과 유연성을 상실하고 독단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저자의 분석은 전체적으로 대담하고 과감하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힌다. 육영수의 죽음 이전과 이후, 박정희의 성적 방황을 비교하는 대목이 특히 흥미롭다. 육영수와의 결혼생활 기간엔 다른 여성과 ‘지속적’ 관계를 맺었던 박정희가 부인의 사후(死後)에 오히려 ‘일회적’ 여성관계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육영수의 죽음은 박정희에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또다시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일회적 관계로 바뀐 것이다. 또다시 버림을 받느니 상대를 먼저 버림으로써 유기불안을 극복하려했던 것이다. 여성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이 책이 박정희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약점도 있다. 박정희를 만나지 못하고 2차 자료에 의존한 것이 많아 정보의 객관성을 100% 장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경제개발에 대한 집념 등 그의 정신세계가 긍정적으로 투영된 부분에 대한 분석은 없거나 미약하다. 그럼에도 역사적 인물 박정희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분석은 그 자체로 의미있고 이 책도 그같은 노력의 하나일 것이다. 303쪽, 9500원.

▼용어해설▼

△유기(遺棄)불안〓누군가에 의해 버림 받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메시아적 갈망〓구세주 혹은 위대한 영웅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욕망.

△초자아(超自我·Superego)〓윤리적 도덕적 자아. 성적 충동이나 공격적 충동을 제어함으로써 준법적인 사회구성원으로 만들어준다.

△구강기적(口腔期的) 욕구〓0∼1세 정도의 아기가 입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성적 쾌락이나 정신적 위안. 이 쾌락이나 위안은 어머니가 제공한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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