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부격차-상대적 박탈감 영향 가족해체 가속화

  • 입력 2000년 5월 1일 19시 35분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이모씨(44). 그의 ‘집’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허름한 여인숙이다. 지난달 중순 경매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집을 비워준 뒤 아내 아들 딸 등 네 식구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열흘 남짓 여인숙에서 생활하던 이씨는 방을 비워달라는 주인의 성화를 견디다 못해 지난 주말 사당동에 있는 ‘성공회 살림터’를 찾았다. 성공회 살림터는 일가족 노숙자를 수용하는 사회복지시설. 그러나 이씨는 “정원이 차 수용하기가 곤란하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여인숙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인숙 주인에게 “2주일만 참아달라”고 사정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했던 이씨는 98년 회사가 부도난 뒤 택시회사에 취직했지만 빚은 늘어만 갔고 지난달 집까지 경매에 넘어갔다.

“어떻게든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보려고 하는데 방법이 없군요….”

IMF경제난으로 촉발된 중하류층의 가족 해체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경기회복의 수혜 대상에서 제외된 저소득층 가정의 상당수가 버틸 수 있는 한계에 이른데다 빈부격차의 확대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가정불화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실태▼

최근 사회복지기관에는 이씨처럼 ‘가족이 함께 입소할 수 없느냐’는 문의가 늘고 있다. 성공회 살림터 남철관(南喆寬)총무는 “가족 입소 상담이 지난해에는 월 20∼30건이었으나 올해에는 60여건으로 늘었다”며 “저축과 퇴직금, 집을 줄여 마련한 돈으로 버텨오다 그것마저 바닥난 중하류층 가정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가계가 웬만큼 회복된 중산층에서도 가족 해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대기업에서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뒤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전세놓고 연립주택으로 이사갔던 김모씨(47)의 경우 보험설계사로 취업전선에 나섰던 부인이 옷가게를 낼 정도로 경제난을 극복했다.

하지만 밤늦게 귀가하는 부인과 잦은 말다툼 끝에 손찌검까지 하게 된 김씨에게 부인이 이혼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김씨 가정은 심각한 해체위기에 직면했다.

한국여성개발연구원 장혜경(張惠敬)박사는 “경제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경제권을 아내에게 넘겨준 가장들이 자존심에 상처받거나 가족이 실제로 가장을 무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이런 갈등이 심해지면 중산층도 심각한 가정해체 위기를 맞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상담원은 “경제적 문제를 이유로 이혼을 고려하는 상담자가 98년 379명에서 99년 412명으로 11.3% 늘었고 올해는 이런 현상이 더 뚜렷하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엄명용교수의 ‘IMF 전과 후의 가정폭력 추이 변화’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국 27개 사회복지기관의 가정폭력과 관련한 상담 건수가 기관별로 97년 평균 335건에서 98년 721건, 99년 1171건으로 늘었다.

▼원인과 대책▼

전문가들은 중하층 이하 가정의 해체위기가 심화된 데는 계층간 빈부격차가 커진 데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金勝權)박사는 “공동체 내에서의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적 빈곤에 시달릴 때보다 가족관계에 더 악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성공회 살림터 남총무는 “생활여력이 바닥난 극빈층 가정을 보호하고 자활교육을 시킬 수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