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키드]"유행에 뒤처지면" 업그레이드…업그레이드

  • 입력 2000년 4월 23일 21시 39분


"아니 컴퓨터가 무슨 자동차나 되는 것 같더라니까요.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요? "

주부 양모씨(44·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는 계속되는 중학생 막내아들의 컴퓨터 업그레이드 요구에 두 손을 들었다.

엔진오일을 갈고 온갖 액세서리를 새로 달듯, 이런저런 잔고장에 따른 컴퓨터 수리비 물류비용도 만만치 않거니와 변화하는 디지털 환경에 맞춰 항상 '최적'의 하드웨어를 필요로 하는 아들에게 지쳤기 때문.

▼또다른 사교육비▼

양씨는 막내아들에게만 영어 논술 과외비용 50만원에다 휴대전화 사용료를 포함한 '디지털화 비용'으로 매달 30만원씩은 쓰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일주일에 5만원씩의 그야말로 순수한 용돈을 합하면 월 100만원은 정말 우습게 '원천징수'당하는 느낌.

"그나마 지금은 인터넷 전용선을 깔아서 많이 줄어들었지, 전에 모뎀쓸 때는 한달 전화비만 20만원이 기본이었어요. 앞서가는 세상에 합류할려면 어쩔수 없겠구나 싶었지만 갈수록 잘하고 있는건가 하는 회의가 들어요."

결국 디지털 세계를 풍요롭게 향유하려면 그 세계 나름의 흐름에 발을 디뎌야 하고, 그러자니 어쩔수 없이 오프라인에서의 경제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형편. 학부모들에게 디지털은 상당부분 '또 다른 사교육비'를 추징하는 애물단지 혹은 밑빠진 독인 셈이다.

▼돈 쓸 일이 많다▼

친구들 사이에서 '왕발'로 통한다는 장모군(16·서울 송파구 A중3)의 사교활동은 이미 어른 뺨치는 수준이다. 학교친구, 기껏 벗어나봐야 골목의 또래친구들이 고작이었던 이전의 청소년문화와는 거리가 있어도 한참이다. '노는 무대'가 광역화되는 탓에 발품만큼의 돈은 기본으로 소비된다.

장군이 속한 동호회는 무려 7개. 그 중 농구와 게임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한 온라인 동호회의 정기모임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참가한다. 오프라인상에서 한달 1∼2만원씩 내는 회비를 합치면 10만원씩 깨지는 것은 잠깐.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적어도 반년에 한번씩은 신형 휴대전화를 구입하기 위해 부모님을 졸라야한다. 옛날 수업시간 교사 몰래 글써서 돌려보던 '쪽지메모'가 '문자메시지'로 변한 탓에 친구들과 같이 호흡하려면 역시 학교에서건 학원에서건 몇십개씩 메시지를 날려보내는 수 밖에 없다.

"엄마한테 미안해서 PC방에서 알바(아르바이트)하겠다고 그랬어요. 근데 공부 방해된다고 하지 말래요."

▼형식만 디지털-내용은 생아날로그▼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프로게이머 에이전시 '유니비드코리아'에서 활동하는 프로게이머 장모군(17·J고2년).

"시합에 열중하려면 개인 키보드, 개인용 마우스는 기본이죠. 두명 이상 멀티플레이로 게임하려고 집에 컴퓨터 두 대 설치한 애들도 많아요. 돈이요? 뭐 아직까진 엄마가 주세요…."

이렇듯 문제는 디지털키드의 '디지털화'로 인해 기존의 한국형 아날로그 생활패턴 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디지털화로 인한 선진문화 도입은 커녕 부모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만 나날이 더해가고 있다. 이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돈의 가치와 합리적인 소비에 대한 가치관을 갖지 못하게 되는 기형적 사회구조를 굳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고려대 심리학과의 권정혜 교수는 "어느범위 안에서 10대들에게 디지털은 게임과 채팅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권교수는 "생활의 본질은 그대로인데 디지털이란 형식 혹은 현상에 부모들이 과잉집착해서는 안된다"며 "고액과외로 단기간에 성적향상이 나타나는게 아니듯, 디지털화 인프라 구축을 위한 초기 비용도 아이들의 희망대로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울대병원 아동정신과의 조수철교수는 "기본적인 가치야 불변하는 것이지만 디지털 시대에 걸맞는 생활 양식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의견.

"디지털이 정보와 문화수용에 필요한 하나의 '도구'로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진 바에야 부모 입장에서 단편적인 실물경제만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을까요."

디지털문화의 발달에 따라 소비패턴도 아날로그시대와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얘기. 어쨌든 돈먹는 디지털키드 덕분에 정보의 '부익부 빈익빈'은 갈수록 심화될 전망이다.

<조인직기자>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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