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구효서 새 장편 '악당 임꺽정'

  • 입력 2000년 1월 14일 18시 50분


변혁의 꿈은 사람을 끓게 한다. 그 끓어오르는 꿈을 따라 수많은 생명이 무덤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무수한 위패가 모셔진 뒤에도 도취에서 깨지 못한 숱한 들풀들이 있을 때, 무대 뒤에서 걸어나와 딴죽을 거는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다. 문사(文士)라고 자처하는.

‘임꺽정’의 무대 뒤에서도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구효서의 두 권 짜리 새 장편 ‘악당 임꺽정’(해냄).

임꺽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책사(策士) 서림을 안다. 마지막 순간 그의 배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소설은 서림의 술회 형식으로 전개된다. 관군에 체포된 뒤 산채의 일을 밀고해 목숨을 구제받은 서림. 그는 자신의 행위가 온당했다고 변명한다. 그 변명은 당연히 임꺽정의 신화 깨기로 이어진다.

서림의 입을 통한 저간의 사정은 당연히 벽초 홍명희를 통해 정립된 임꺽정 이야기와 사뭇 다르다. 산채 ‘곰섶골’을 몇 년 동안이나 체험한 그에 의하면, 임꺽정의 목표는 신분 차별이 없는 새 세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강 이북을 다스리는 작은 군왕이 되는 데 머물러 있더라는 것.

그의 눈에 비친 곰섶골은 임꺽정 일인의 개인적 욕구에 무조건 봉사하고 복무하는 집단이다.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산채는 어린아이 하나 살려두지 않는 무자비함을 보인다. 저잣거리의 도박과 매음을 보호하면서 돈을 챙기기도 한다.

널리 알려진 임꺽정의 화려무비한 전투신이나 호방한 모험담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행간을 수놓고 있는 것은, 사회와 체제에 대한 작가의 의미있는 상념이다. 권력의 정당성 신화는 어떻게 조작되고 어떻게 공고해지는가. 대의가 무목적한 실용주의로 전락하는 과정은 어떠한가. 대의에 희생되는 개인은 과연 그럴만한 이유를 갖고 있는가. 아니, 인간 자체가 진정 거룩한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인가….

‘임꺽정 추문’의 절정은 책 말미에 전모가 드러나는 조정 간신 윤원형과의 협잡이다. 윤원형은 사회에 위기의식을 불어넣으면서 강권통치를 지속하기 위해 임꺽정을 필요로 한다. 꺽정은 대신 그의 암묵적 보호를 받는다. 계속되는 토벌과 저항은 결국 ‘제스처’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당초 벽초가 가졌던 이미지 창조의 이유와 동기 따위는 간과한 채,독자들이 기성의 이미지만을 무비판적으로 복제하거나 재생산함으로써 임꺽정이라는 인물을 외려 괴물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임꺽정 이미지에 대한 지속적인 반복과 답습은 오히려 벽초의 아름답던 이유나 동기들마저 반감시키거나 무색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작가의 말)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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