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숙 사장, '지식의 젖줄' 역활 54년… 출판계의 산 역사

  • 입력 1999년 11월 16일 19시 58분


“늙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번잡함을 피해 미국 아들집에 가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 미수연을 준비하고 여기저기 초청장까지 보냈다고해서 하는 수 없이 돌아왔다오.”

원로 출판인인 을유문화사의 은석(隱石) 정진숙사장. 17일 낮 12시 서울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미수(米壽)잔치상을 받는 일을 겸연쩍어 했다. 88세 생일(양력 11월5일)은 이미 지났지만 후배출판인들이 그냥 넘어가주지 않았다. 45년 을유문화사의 창업동인으로 출판계에 입문, 52년 이후 사장을 맡고있는 그의 이력은 ‘개인사’를 넘어 한국의 ‘출판사’이기 때문이다.

“40년 이상된 출판사가 서른곳도 안되는 풍토에서 은석선생은 존재 그 자체로 귀감이 되는 분입니다.”(문예출판사 전병석사장)

40,50대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을유세대’로 부르곤 한다. ‘한국문화총서’ ‘세계문학전집’ ‘세계사상교양전집’…. 을유의 책들은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의 ‘교과서’였고 예비문인들의 ‘경전’이었다.

“해방 직후 척박한 풍토에서 어떻게 ‘조선문화총서’(이후 ‘한국문화총서’로 개칭)같은 책을 기획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습니다. 은석선생은 아무리 어려워도 출판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고 한국의 얼굴이 될만한 책을 만들어 왔어요.”(민음사 박맹호사장)

신문조차 마분지의 일종인 선화지에 인쇄되던 해방 직후 정사장은 이곳저곳 ‘종이동냥’을 다녀 깨끗한 양지로 ‘큰사전’을 발간했다. 조선어학회가 옥고를 치르며 일제하에서도 지켜낸 원고였다.

“평생 수지를 따져보고 출판을 결정한 일은 없어요. 팔리든 안 팔리든 누군가 내야 할 책이라는 판단이 서면 우선 만드는 겁니다.”

정사장은 12년간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30년간 한국출판금고이사장을 지냈으며 대형서점의 원조격인 ‘종합도서전시관’을 만드는 등 출판계의 맏어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지금 그는 ‘21세기에도 을유문화사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숙제를 가슴에 무겁게 안고 있다. 뒤를 이을 편집인을 양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제 뒷방지기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혁명적으로 나서서 변화되는 시대에 걸맞게 ‘을유’를 이끌고 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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