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문화 진단/갈곳없는 아이들]호프집 안가보면 '따돌림'

  • 입력 1999년 11월 1일 19시 07분


지난달 31일 오후9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유흥가’의 L소주방.

이미 술집 안은 손님들로 30여개 테이블에 거의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업소를 가득 메운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첫눈에도 고교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들이 절반 가까이나 됐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술을 마시던 고교생 L군(17) 등은 “일주일에 두세 번은 친구들과 이런 곳에 와서 술을 마신다”고 말했다. L군 등은 “인천 호프집 화재소식을 들었지만 학교 밖에서는 술집이나 게임방 아니면 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이런 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인근에서는 3년전 12명이 숨지는 대형화재참사가 일어났던 지하카페 ‘롤링스톤즈’도 간판만 바꿔단 채 성업 중이었다.

30일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참사가 일어난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신촌과 대학로, 영등포 강남역 일대와 성신여대앞 등 유흥가는 초저녁부터 이들 10대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이들은 생일과 써클모임, 이성친구와의 만남 등을 위해학교주변과유흥가 술집을 거리낌없이 찾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10대들은 “어른들은 우리가 무조건 공부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성인의 세계에 호기심을 갖기 쉬우면서도 달리 갈 곳이 마땅치 않은 10대들이 골목마다 넘쳐나는 술집과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음주문화에 자신을 쉽게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서울 신촌 K호프집을 찾은 한 학생은 “술이 좋아서 술집에 간다기보다 어른들 흉내도 내고 ‘분위기’도 찾기 위해 간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출입이 일부 허용된 노래방 등에서도 술을 구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노래방에서 나온 정모양(16)은 “콜라텍이나 노래방에 가서 ‘있어요’라고 물으면 맥주와 소주 등을 음료수캔 등에 몰래 담아 갖다준다”고 말했다.

최근 사회문제화된 ‘왕따현상’도 이들 또래의 음주문화와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서울 강북의 K고교 3학년 양모군(18)은 “우리 반에서 호프집 소주방에 가보지 않은 애들은 손꼽을 정도”라며 “남들 다가는데 혼자 안가면 따돌림 당할까봐 가는 애들도 많다”고 말했다.

물론 ‘술 마시는 10대’들 뒤에는 ‘술 권하는 어른’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 인천의 라이브Ⅱ 호프집처럼 축제나 모임 때면 10대들이 전세를 내다시피 해 술을 마실 수 있는 카페나 호프집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게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현행 청소년보호법의 처벌규정이 너무 약하다보니 벌금을 내는 한이 있어도 위험부담을 안고 계속 청소년들에게 술을 파는 게 차라리 이익이라는 업주들의 ‘지극히 타산적인 장삿속’이 10대들의 음주를 부추기는 가장 큰 제도적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한다.

YMCA 청소년 약물상담실 장지현(張芝顯)실장은 “기본적으로 술에 관대한 사회분위기가 바뀌어야겠지만 우선 정부가 장삿속에 눈이 먼 업주들을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처벌규정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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