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내 친구 빈센트」

  • 입력 1999년 10월 22일 19시 15분


“빈센트 반 고흐가 평생동안 ‘태양을 좇는’ 화가였다고?” 아니 그에게 중요한 것은 태양이 아니라 땅이었다. 그는 삶이 꿈틀대는 대지를 사랑하지 않는 화가를 경멸했다.

어째서 빈센트가 그 냉정한 세잔, 거짓말장이 고갱과 더불어 ‘후기인상파’라는 이름 아래 묶여있단 말인가? 반 고흐가 인상파에 빚진 것이 많다해도 그는 분명히 ‘인상파 이후의(Post)’ 작가다.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는가? 광부들 때문이다. 인생 막장에서 “내 몫의 빵을 달라”고 외치던 저 1879년의 검은 주먹들, 그에게 목회자의 길 대신 붓으로 세상의 슬픔을 그리겠다고 다짐케했던….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반 고흐의 그림이 경매되는 것을 보며 그의 천재성을 칭송하는 사람들이여. 나는 그의 그림을 미치도록 사랑하지만 그 그림이 대단한 가치를 지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노력만하면 그 정도는 그릴 수 있다.”

법학자인 저자의 ‘빈센트 반 고흐 읽기’는 이처럼 도전적이다. ‘스스로 귀를 자르고, 결국엔 자살한’ ‘태양과 같은 정열을 지닌 미친 화가’라는 기존의 반 고흐 신화를 저자는 그가 남긴 편지 등의 사실(史實)자료, 기존 연구서와의 교차비교를 통해 하나씩 부수어간다. 저 높은 곳의 반 고흐를 끌어내려 마치 술친구처럼 “내 친구 빈센트”라고 편안하게 부른다.

저자는 반 고흐를 미술사가 아닌 사회사의 맥락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래서 반 고흐가 산업자본주의가 곪아 문드러지는 19세기를 살며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빈센트의 불행은 예술에의 광적인 몰두 때문이기보다는 그의 사회주의적인 이념, 즉 화가공동체가 실현되지 않은 좌절감 때문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자료만 나열해 놓은 반 고흐의 편지 모음이나 예술지상주의에 입각한 평전들과는 달리 저자 고유의 시각에 힘입어 빈센트 반 고흐를 새롭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민중화가로서의 면모를 지나치게 강조해 반 고흐에 대한 또다른 반쪽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경계도 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출간된 원서와 번역서를 풍부하게 인용하며 기존 연구서의 결점과 오류를 분명하게 지적한 ‘지적 철저함’ 때문에 작가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기 어렵다.

저자는 30여년간 빈센트를 연구해왔다. 현재 영남대 법과대학장으로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흐름으로 부각되는 공동체운동, 아나키즘에도 조예가 깊은 진보성향의 학자다. ‘화가 공동체’를 꿈꾸었던 지성적이고 이타적인 반 고흐의 면모가 미술사가를 능가하는 한국의 법학자에 의해 날카롭게 포착된 것이 흥미롭다. 흑백도판. 259쪽. 7500원.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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