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권터 그라스 '나의 세기'

  • 입력 1999년 10월 8일 17시 54분


▼ '나의 세기' / 권터 그라스 지음 /민음사

우리에게 20세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대부분이 처음 세상의 광명을 대했고, 고난과 행복을 경험했으며 이제 그 사위어가는 빛꼬리를 잡고 있는 한 세기. 진보와 파괴가, 해방과 미증유의 살륙이 공존한 시대.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독일)의 소설 ‘나의 세기’(Mein Jahrhundert). 7월 독일에서 간행된 최신작으로 대문호가 소설이라는 형식의 거대한 화폭 위에 마음껏 붓을 휘둘러 20세기의 몸통과 손발을 마음껏 펼쳐보인다. ‘양철북’으로 20년 동안 노벨문학상의 ‘단골후보’였던 그라스를 20세기 마지막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들어준 ‘결정적인 작품’이다.

빌헬름 황제, 잡지 편집자, 촌부, 공장노동자…. 천차만별이라 할 만큼 다양한 1인칭 화자. 코난 도일 작품 ‘시리우스 선장’의 주인공 '시리우스 선장'까지 ‘나는…’하며 끼어든다. 1900년을 시작으로 100개의 장(章)마다 저마다의 체험을 토로하며 시대의 풍경을 엮어나간다.

“종군기자, 조개탄과 계란을 들고 암시장을 헤매는 아낙. 그들은 위대한 행적을 남긴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의 들러리인 그들의 입을 빌려, 무미건조한 역사를 형형색색의 이야기로 전해주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20세기는 권력가만의 세기가 아니었듯, 전쟁과 대사건만의 세기도 아니다. 음반의 대량보급(1907) 아디다스와 푸마사의 경쟁(1960) 펑크족 확산(1978) 등 문화 경제적 함의를 지닌 수많은 사건이 장면장면을 수놓는다.

1차대전의 참혹상(1914∼1918)은 문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와 에른스트 윙어의 대화로 다뤄지고, 빌리 브란트 지지유세(1965) 등에서는 그라스 자신이 화자(話者)로 나선다.

물론 작가는 일화만을 나열한 회색의 역사서를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1938년 장에는 1989년의 초등학생이 등장해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말한다.

역사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51년전 오늘 수많은 유대 교회당이 불탔다”고 상기시켜준다. 학부모들은 “온세계가 독일을 축하하는 이마당에….”라며 항의하지만, 교사는 항변한다. “언제 불의가 시작되어 마침내 독일이 분열되었는지 아이들이 모른다면, 장벽 붕괴의 뜻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통일의 열광이 또다른 망각과 비극의 시작일 수 있다는 경고다.

이 ‘세기의 소설’은 살아있다면 103세가 됐을 작가의 어머니가 화자로 등장하면서 막을 내린다. “단지 전쟁만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느 곳이던지….”라는 소박한 평화에의 희구가 작품의 끝을 이룬다. 1900년 ‘나’라는 단어로 소설이 시작돼 1999년 ‘어느 곳이던지’로 끝나는 형식이다. ‘작가인 나는 어느곳이던지 모두 그려냈다’라며, 그라스는 이 작품이 가진 한 세기의 총체성(總體性)을 자신하는 것일까.

하나하나의 풍경으로서는 담아낼 수 없었던 한 세기의 스펙터클한 벽화. 조금 떨어진 지점에서 조망하자 어렴풋하나마 확신을 주는 인상이 다가온다. 인간의 이성은 결국 신뢰할 만하다는 것, 굴곡많은 인류 역사에도 언제나 희망은 자리하고 있다는 긍정의 세계관이다.

그라스가 “나는 의혹과 회의가 많은 사람이지만, 또한 기꺼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뜻에서 였을 것이다.

독일어 원본에서는 그라스 자신이 각 장의 삽화를 수채화로 그렸다. 한국어판에도 일곱장이 실렸다. 안삼환 장희창 김형기 한성자 공역. 전2권 각 288쪽 8000원.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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