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씨『「실증」의 잣대로 「민족뿌리」재지말라』

  • 입력 1999년 8월 17일 19시 19분


《상고사(上古史) 바로 세우기’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김지하가 단군조선과 단군정신을 통해 민족정신의 근원적 동질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자 역사학계는 김씨가 학문적 근거없이 ‘민족구심점’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같은 논란이 11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되자 김지하는 자신을 비판한 역사학자들을 강도높게 비판하는 ‘반박문’을 보내왔다.》

지난 11일자 동아일보의 ‘김지하의 단군인식 문제 없나’라는 기사를 보면서 우선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상고사 문제에 관한 한 가장 큰 문제는 일반화된 세상의 무관심과 그 중에도 소위 이병도계열의 자칭 전문가들의 저 악명 높은 ‘음산한 침묵’이었기 때문이다.

▼ 일제식민사관 되풀이

민족정신의 뿌리는 올바른 상고사와 그 교육에 있으므로 당연히 활발한 토론에 이어 엄중한 공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15세된 일본 소년이 미국 한국 러시아에 침략당한 우리 영토를 탈환하자는 요구를 내걸고 인질극을 벌였다. 일본은 지금 극단의 우경화와 재무장 소동으로 야단법석이다. 그런데 그 뿌리가 오랜 동안의 엉큼한 국수주의 군국주의 역사교육에 있었던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되풀이하고 있는 현행의 반미족적 상고사 교육을 강행해 온 그들이 지금 침묵할 권리가 있는가?

그래서 반가워한 것인데 겨우 입을 연다는 것이 기껏 또 그놈의 ‘실증’이니 ‘엄밀성’이니 하는 타령이다.

역사도 학문이니 ‘실증’타령을 원천적으로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실증’ ‘엄밀성’ ‘전문성’ ‘진리’ ‘과학’을 운운하며 애써 가리고자 하는 식민사관의 실체가 지금의 민족위기적 현실에서까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역사’는 해서 뭣하자는 것인가?

▼ 고대는 현대의 원천

나와 벗들은 최근 ‘마고(麻姑)를 찾아서’라는 메타포 밑에 상고사에 대한 총체적 탐구열풍으로 민족정신과 그로부터 미래 세계의 큰 비전을 찾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전문가는 ‘학문의 진리나 이치를 무시하고 신화에서 사상을 찾는다’고 나무란다. 학문이 곧 진리라는 우스꽝스런 캐캐묵은 등식도 문제지만 신화가 사상과 무관하다는 무식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또 어떤 전문가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문제의 대안을 고대에서 찾겠다는 것은 너무 소박하고 현실성도 없다’라고 질타한다.

그렇다면 묻자! 역사전문가들, 지식인들이 그처럼 흠모해 마지 않는 마르크스, 니체, 푸코, 한나 아렌트가 창조적 현대 담론을 끌어내기 위해 돌아가고 또 돌아가는 희랍과 발칸의 고대는 고대가 아니고 현대인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아렌트의 시민공공영역이론이 현실성 없는 공론에 불과하며 니체의 초인이나 푸코의 앙띠 휴머니즘이 그렇게도 소박하단 말인가?

또 한 가지, 기사에서는 내가 마치 과학을 기피하는 것 같이 내 말을 짜집기 했다. 그것은 내 뜻이 아니다. 나는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과학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낡은 과학은 언제나 비판받아야 할 체계이기 때문이다.

▼ 낡은 과학은 비판 마땅

또 마고성(麻姑城)이 곧 신시(神市)라고 한 적도 없고 이분법이나 현세의 대립을 넘어서는 꿈같은 유토피아 따위는 전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단군조선이 홍익인간의 이상이 실현된 고대국가란 말은 한 적이 없으며 새로운 정착적 노마디즘의 비전을 함축한 첫 고대국가라 했다.

마지막으로 또 한 마디.

부디 침묵을 깨뜨리자.

그리고 가능하다면 오류를 인정하라. 이병도박사의 말년처럼! 지금은 그렇게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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