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東亞 신춘문예/시나리오 심사평]이창동 영화감독

  • 입력 1999년 1월 3일 19시 18분


응모작 중에 동성애를 다루거나 연쇄살인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아마도 정체성의 심각한 혼돈과 세기말적 위기감의 반영인 듯하다. 그런데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 대부분은 자기 성(性)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접점, 즉 ‘커밍 아웃’의 필연적 계기가 설득력있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웠다.

남상국 박미영 공동창작인 ‘룸’과 문준기의 ‘처형’은 만만찮은 구성과 영화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극단적 소재를 택한 작품이 흔히 그렇듯 군데군데 억지스런 이야기 전개를 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끝까지 우열을 가리지 못해 고심하게 한 작품은 이동하의 ‘나는 너다’와 민병관의 ‘엔터’였다. 현실과 가상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 ‘엔터’는 차가운 사이버공간의 세계와 따뜻한 인간적 체온을 적절하게 배합한 작품이지만 굳이 흠을 잡자면 사건의 결말이 다소 싱겁게 느껴진다. ‘나는 너다’는 작자가 스스로 밝혔듯이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 영화 자체로부터 멀어지는’영화의 위기에 대해 질문하면서 삶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요즘 세대의 비극성을 보여주고 있다. 평자가 대중적이고 쉬운 문법을 택한 ‘엔터’보다 굳이 ‘나는 너다’를 택한 것은 보다 도전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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