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방북기③]「나무바다」위로 우뚝솟은 「白頭」

  • 입력 1998년 9월 10일 19시 29분


이번 우리 방북 대표단은 ‘백두산 답사’에 주목적이 있었다.

베개 두개가 나란히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베개봉이라 이름 붙여진 봉우리 맞은편에 자리한 천지연읍 베개봉호텔에서 나흘째 밤을 보냈다. 천지에서 46㎞ 떨어진 곳이다.

백두산은 하나의 홀산이 아니다. 그야, 금강산 묘향산도 마찬가지다. 가령 금강산이 1만2천봉이라 하는데 묘향산은 8만4천봉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백두산은 몇십만 봉우리나 될까하고 궁금하게 여길 사람이 있겠지만, 천만에, 백두산은 해발 2천m까지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원 평원지대의 이깔나무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봇나무들의 커다란 숲, 수해(樹海)일 뿐이다.

그 수해 속에 드문드문 몇몇 봉우리가 솟아있고 그 북쪽 끝머리에 백두산이 의젓하게 앉아 있다. 그러니까 개마고원 중턱부터 이미 백두산 자락인 것이다. 산이라기보다는 그 어떤 ‘무한천지’라는 느낌쪽이 더 가깝다.

이번 답사에서 즐거운 추억중의 하나는 동훈(董勳)전통일원차관이란 좋은 길동무를 만난 일이다.

경협문제 협의차 입북한 동전차관은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인 실향민. 우연히 우리와 조우해 백두산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답사팀의 눈을 깨우쳐 주었다.

답사의 첫 발을 떼자 마주친 것이 삼지연(三池淵) 못가에 세워진 ‘삼지연 대기념비’였다. 15m 높이의 김일성 동상을 포함해 면적은 6만㎡.

맑은 호수와 멀리 백두산의 웅자가 조화된 삼지연 못가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다만 ‘이런 천혜의 균형잡힌 아름다움이 혹여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털끝만큼이라도 훼손돼서는 안될텐데…’라는 일말의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부근의 베개봉은 1937년5월20일, 항일 무장부대가 숙영(宿營)했다는 곳. “항일 유격대가 이튿날 종토장과 칠토장에 있는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해 그 곳의 우리 노동자들에게 정치 선전사업을 하고 돌아와, 다시 1박을 한 자리”라는 것이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이어 마주친 곳은 일본군이 항일 유격군에 골머리를 앓다 못해 막대한 인력을 동원해 원시림을 마구 잘라내고 뚫었다는 무산(茂山)∼갑산(甲山)을 잇는 백리길 도로. 일본군은 이 도로를 ‘갑무 경비도로’라고 불렀다.

1953년 5월. 처음으로 항일유격군의 숙영지 자리에서 구호나무 20그루와 항일유격대가 쓰던 도마 일곱개가 발견된후 63년 8월부터 총 84점의 유물이 엄격히 보존, 전시되고 있다고 안내원들은 전했다.

베개봉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노정의 중간에 위치한 ‘정일봉’(옛이름 장군봉)의 높이는 해발 1천7백90m. 정일봉 밑에는 귀틀집이 있었는데 안내원들은 김정일 총비서가 1942년 6월에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집 안팎은 깔끔하게 온존돼 있었다.

이 곁을 흐르는 소백산에서 발원한 소백수. 풍부한 수량의 맑은 개울물이 그지없이 싱그러웠고 김정일의 어머니(김정숙)가 아침 저녁으로 떠왔다는 샘물도 있었다. 게다가 그 일대는 곰취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곰취밭이었다.

이곳에서 선물로 받은 천연죽(天然竹)지팡이는 재질이 돌처럼 단단해서 장수(長壽)용이라던가. 희한하게도 물에 집어 넣어 보니, 듣던대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들쭉 따는 때여서 가는 곳마다 들쭉 알들을 포식하여 입가생이며 입성이며 벌겋게 물들인 채 돌아다녔다. 두만강이 시작되는 이명수(鯉明水)에서 잡은 ‘사루기’라는 민물고기의 매운탕 맛도 그만이었다.

이호철(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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