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의 아버지들 ①]「아빠」의 눈물

  • 입력 1998년 5월 3일 19시 56분


바람처럼 거닐다 만취해 귀가한 아버지. 그 큰 그림자가 문지방에 우뚝 서면 가족들은 숨을 죽였다. 집안의 절대군주. 그 힘은 돈에서만 나온 건 아니었다. 평생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밥벌이 한번 해본 적 없어도 아버지의 힘은 셌다.

바로 한세대전까지의 얘기다. 그러나 IMF시대, 아버지들은 작아지고 외로워진다. 쫓겨나듯 집을 나와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홈리스 아버지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저무는 거리,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문득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그 무거운 시선.

▼ 어려지는 아버지들 ▼

경기 안양시의 개천변 둔치. 일요일마다 무선 모형 헬리콥터가 날고 스포츠카가 쌩쌩 달려 시끌벅적하다. 아이들의 놀이판이라 생각하면 오산. 조종사는 대부분 30대중반, 40대초반의 남자들. “안팎이 스트레스뿐인데 한번 무선조종 놀이를 해보니 너무 재미있어 취미를 붙였다”는 김민석씨(43·경기 과천시 부림동). “아이는 점점 반항하고 아내는 고집세고 뻔뻔해져요. 회사 일은 점점 과중해지는데 체력은 약해져만 가고. 늘어나는 건 콜레스테롤뿐이지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에서 여주인공 샹탈은 해변에서 연을 날리고 노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년 남성들이라는데 놀라며 “아기와 부인들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아빠들, 그들은 이제 정부(情婦)의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해변에서 논다”고 탄식한다.

‘아빠화’된 아버지들. 남성의전화 이옥소장은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마땅히 마음 둘 곳이 없어진 아버지들이 마음 편히 몰두할 수 있는 어린시절의 놀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서울 청계로에서 공구 납품업을 하는 김재수씨(34·경기 고양시 후곡동). “인생이 아기로 태어나 노인으로 늙어가는 대신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어려지는 것이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종종 든다.”

▼ 깊어지는 외로움 ▼

29일 밤10시경 서울 종로의 한 당구장. 40대중반의 직장인 한 팀이 보인다. 20년간 놓았던 큐대를 요즘 다시 잡았다는 김모씨(45·P개발부장). “집에 가봤자 잠옷 입고 애들 문열어주는 역할밖에 못해요. 중학교 다니는 아들놈은 나를 먼 친척 대하듯 하지요. 그렇다고 매일 술을 마시려니 주머니가 여의치않아 운동(?)을 시작했어요.”

서울 광화문의 N카페 여주인 배모씨(33). “거의 매일 출근부를 찍는 점잖은 남자손님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한결같이 재담을 잘하고 그렇게 다정다감할 수가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집에 가면 무뚝뚝한 가장으로 변한다고 생각하면 참 안타까워요.”

점점 틀이 꽉 조여지는, 직장내에서 상승할 수 있는 한계가 눈에 빤히 보이는 사회분위기. 아버지들의 눈은 일에서 점점 가족으로 옮겨갈 수밖에.

그러나 현실은?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결과. 아버지 중엔 자신이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92%. 그러나 자녀들 중에 의논상대로 아버지를 꼽은 사람은 4.6%에 불과했다.

미국의 남성학전문가인 낸시 메이어는 저서 ‘아버지 마인드 스토리’에서 “아이만 사춘기를 겪는 게 아니다. 아이가 그 연령대에 있을 때 그 아버지역시 사춘기 못잖게 고민이 큰 인생의 과도기를 통과하고 있다”며 “부자 또는 부녀간의 상호관계가 단절될 때 겪는 고통은 아이들보다 아버지쪽이 훨씬 크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시인 김현승은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다…’(‘아버지의 마음’중)라고 안타까워했을까.

〈이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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