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길]국내 최초 북디자이너 정병규씨

  • 입력 1997년 11월 8일 09시 23분


『이 사진집 안의 사진, 다 외울 정도야, 몇십번은 봤으니까. 그러고 나서 표지가 나왔어. 수많은 사진의 주제가 뭘까. 성(聖)과 속(俗)이다. 그렇다면 앞 뒷면은 성과 속을 상징하는 디자인으로 하자. 이렇게 된거지』 국내 최초의 북디자이너 정병규(鄭丙圭·51)씨는 지난 4일 오후 9시 서울 신촌부근의 한 문화강좌에서 사진집을 손에 든 채 북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었다. 한세대 아래의 스무명 남짓한 젊은 출판사 편집자와 디자이너들을 향해 그는 디자인 기술이 아닌 표지에 관한 「사상」을 말했다.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사진의 의미가 달라져. 전시회장에 홀로 걸려 있던 사진도 책속에 들어오면 딴판이 되지. 그게 책의 힘이야』 15년전 책표지는 출판인이 대충 만들면 그만이던 시절에 북디자이너란 외로운 길을 나섰던 그인지라 「책의 힘」을 말할 즈음 톤이 올라갔다. 일과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모여든 후배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실감한다. 그러나 「책사랑」정신 하나로 살아온 그에게는 오늘의 젊은 편집자들이 맘에 안들 때가 많다. 문학도로, 편집자로 시작해 디자인에 들어선 그에게는 손끝 재주만으로 승부하려는 자세가 못마땅한 것이다. 한마디로 기본이 안돼 있단 생각이 든단다. 문화가, 책이, 문화를 생산한다는 것이 뭔지를 고민하지 않으려한다는 말이었다. 『확실히 국내출판의 역량은 크게 늘었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인프라로서 책의 문화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만한 국민소득에 이처럼 책문화가 황폐한 나라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매킨토시만 사용할 줄 알면 아무나 디자인할 수 있다는 생각, 책 내용과 관계없이 예쁘고 팬시한 책 표지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을 그는 경계했다. 경북중 야구부원, 경북고 미술부장, 서라벌 예술대 문예창작과 진학, 그리고 다시 고려대 불문과 진학. 다양한 경력같지만 언제나 머릿속에는 책이 있었다. 군인으로 전근이 잦았던 부친과 떨어져 할머니 곁에서 자라면서 책은 친구가 되었고 문학지망생으로 소설가를 꿈꾸었다. 디자인과의 만남은 고려대시절 신문편집장을 하면서 이뤄졌다. 『디자인 책이라곤 신문디자인 책밖에 없었어요. 대학신문 8면은 실험무대였던 셈이지요』 70년대초로는 획기적이었던 가로쓰기 형태의 교지도 만들었다. 그때의 경험이 오늘의 북디자이너 정병규를 만들어내는데 거름이 됐다고 믿고 있다. 대학을 나와서는 바둑지인 「기도(棋道)」 「월간 문예」를 거쳐 민음사 홍성사 신구문화사 열화당 등 출판사에서 명편집자로 이름을 날렸다. 77년 민음사 편집장시절에 그가 디자인한 한수산의 소설 「부초(浮草)」는 한국의 표지문화에 충격을 주었다. 알록달록한 바탕에 금색 글씨가 일반적이던 때에 그는 과감히 푸르스름한 단색조(單色調)의 바탕에 판화를 연상시키는 구성과 한자제목을 넣었다. 출판사 사장의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의 새로운 시도는 장쾌하게 이뤄졌다. 곧이어 친구와 함께차린 홍성사는 안팔리는 인문사회과학 서적만으로 성공해 「홍성사 시대」란 말이 지금도 출판계에 회자될 정도. 이처럼 편집과 디자인에 자신이 넘치던 그가 북디자이너란 외길을 추구하게 된 것은 일본 도쿄에서 보낸 2개월의 「유네스코 편집자 훈련 연수」 충격 때문이었다. 『북디자인의 중요성을 깨달은 거지요. 그곳에서 곧바로 몸담고 있던 출판사에 사표를 보냈지요』 그리고는 36세 때인 82년 프랑스 유학을 떠나 타이포그래픽을 배우면서 책 잡지 신문 포스터 등 비주얼커뮤니케이션 공부에 빠졌다. 귀국 후 84년 2월 문을 연 「정 디자인실」은 국내 최초의 편집 기획 및 디자인 회사로 기록된다. 요즘에는 줄잡아 1백개쯤 될 만큼 흔한 게 북디자인실이지만 당시는 일감을 주는 사람도 드물었고 그나마 거저 해달라는 식이었다. 작년 그는 20여년간 디자인했던 작품 2천여점 중 5백여점을 골라 「정병규의 북디자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는 단지 표지 디지인뿐만 아니라 구성, 본문의 글씨체까지도 책의 즐거움을 주는 요소라고 믿는다. 「탈명조체」란 글체를 만드는데에도 직접 나섰다. 『새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문화의 때가 묻을 만큼 묻고 살아남은 것, 그것이 진짜 우리 것으로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일과 홍익대 시각디지인과의 강의, 문화강좌에 바쁜 그는 요즘 관심사라면서 「활자 생태학」에 관해 길게 말했지만 그는 결국 한국 대중문화 전반을 말하고 있었다. 〈조헌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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