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문예사조]자기상실-집단광기 뚜렷

  • 입력 1997년 10월 6일 20시 24분


19세기말과 20세기말. 1백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두 세기말(世紀末)은 혼돈과 불안, 그리고 새시대에의 두려움 따위가 흐르는 면에서 유사하다. 그 시간대의 넓이만큼 위기의식이나 분위기도 편차가 크다. 지난 세기말의 논의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구미(歐美) 지성계만의 관심사였다면 20세기말의 그것은 지구촌 인류가 함께 피부로 문명사적 전환을 느끼고 담론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19세기말 유럽은 산업화와 도시로의 인구집중이라는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을 맞고 있었다. 인간 노동이 단순한 상품으로 전락하고 자본증식의 논리는 인간을 짓눌렀다. 니체의 「신(神)의 죽음」으로 대변되듯 전통적 권위가 힘을 잃었고 새로운 시대윤리는 똬리를 틀지 못한 채였다. 사회의 풍경도 전환기의 혼돈 그 자체였다.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소설을 보면 도시는 갑자기 밀려든 사람들의 물결로 아수라장이 됐다. 거리에는 알코올중독자와 정신병자들이 활보했다. 성도덕의 붕괴로 성병이 공포의 대상이 됐다. 지식인들은 새로운 질서의 틀을 헤아리지 못한 채 문명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의 폭탄선언과 자본주 착취의 추악성을 고발하며 「공산당선언」을 발표한 마르크스 앞에서 19세기말의 지성들은 기존의 믿음과 가치체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이들은 카페 등에 끼리끼리 모여앉아 진보 사랑 희망 따위의 말을 냉소하며 허무와 악마주의를 노래했다. 방탕한 생활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악마적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를 지으며 시대를 비웃었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퇴폐적인 행태는 「데카당스」로 불렸다. 폴 부르제(1852∼1935)라는 프랑스의 소설가가 1888년에 출간한 심리분석소설 「거짓말」에서 처음으로 「세기말」이라는 단어를 선보인 것은 이러한 시대의 의식세계를 내비친 것이었다. 그러나 혼돈과 비관만은 아니었다. 새질서에 대한 희망과 비전으로 세기말은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로 불릴 만한 여지도 있었다. 절대신을 대신해 자신들을 구해줄 「대체신」(代替神)으로서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낙관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술가들 사이엔 일체의 전통과 단절된 새로운 미학을 구축한다는 야심도 움텄다. 문학에서는 19세기 리얼리즘을 부정하는 상징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이후 모더니즘을 형성하는 여러 작품들이 꽃피어났다. 미술에서는 마네 모네 르누아르처럼 기존의 원근법과 명암법의 법칙을 뛰어넘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는 대로」 붓을 움직여 그림세계의 폭을 넓혔다. 음악에서는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가 고전과 낭만주의로 면면히 계승돼온 형식미를 버리고 꿈꾸는 듯한 덧없는 선율, 모호한 화성을 작품에 도입했다. 오늘날 20세기말은 어떠한가. 현대과학은 결정론과 예측 가능성육商笞 분석의 틀을 상실, 신비주의적 요소에 흔들리고 현실의 불확실성에 답하지 못하는 허약한 모습을 보인다. 대중은 전통적 개념의 이성이나 문화에서 벗어나 외계인,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 오락 등에 빠져들고 있다. 19세기말 「드라큘라」가 부활하고 신비주의와 악마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문예물이 대두했던 것처럼 오늘날 밑도 끝도 없는 종말론이 컴퓨터란 첨단 이기(利器)를 통해 확산되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다. 지난 봄 UFO교리를 떠받들며 39명이 집단자살극을 벌인 미국 캘리포니아의 사교집단 「천국의 문」. 이들의 포교수단은 인터넷이었다. 그야말로 세기말적 콘트라스트인 것만 같다. 예술가들은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현실속에서 더 이상 그들의 작품이 예언과 상상력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자기상실감을 앓고 있다. 문화의 상품화 오락화는 또한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고급문화와 싸구려 대중문화라는 기존의 이분법을 해체해버렸다. 위기의식이 극점에 달한 분야는 문학. 인류학자 마셜 맥루한이 20세기 후반 「활자시대의 종말」을 예언하고 비평가 레슬리 피들러가 「소설의 죽음」을 선언한 이후 최근까지 문학의 위기는 심화되고 있다. 일군의 작가들은 새로운 인간성을 찾기 위해 사실성을 내팽개치고 영성 선(禪)을 탐구한다. 로버트 퍼시그의 「선을 찾는 늑대」는 그 대표적 작품. 다이애나 영국왕세자비의 죽음을 둘러싼 세계적 추도물결은 이 시대를 특징지우는 「집단광기 신드롬」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이애나의 생전에는 그녀의 불륜행각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즐기던 대중. 그녀의 사후에는 「불가침으로 여겨져오던 왕실권위에 도전하고 내면적 고통을 자선사업을 통해 승화시켰다」는 동정론에 빠지고 「성녀 다이애나」를 무비판적으로 좇고 있다. 이 시대 20세기말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정은령·한정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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