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그뤼미오,물감이 번지듯 아늑한 선율

  • 입력 1997년 8월 8일 07시 26분


『능숙한 연주만을 생각하는 상태란 가장 불행한 것이다』(아르투르 그뤼미오, 1921∼86) 칼끝같은 절도, 현란한 기교… 바이올린이 요구하는 수많은 덕목들. 그중에서도 우선 따스함과 단아함을 말해보자. 그뤼미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와 오랫동안 화음을 맞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을 함께 떠올려 보자. 언제부터인가 두사람은 닮은꼴이 되어 있었다. 노을속에 저물어가는 꽃밭처럼, 우수에 찬 그리움 속에서도 풋풋한 향내가 그들의 앙상블에 담겨 있다. 지극히 섬세한 속에서도 불필요한 장식과 과장을 피했던 그뤼미오의 연주는 다른 동시대 명인들을 때로 옭아맸던 감정과잉이나 차디찬 기교주의와 분명하게 구별된다. 그의 예술이 한 장 가격의 CD 두장에 담겼다(필립스). 비탈리와 바흐가 작곡한 두곡의 유명한 「샤콘」, 크라이슬러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 하스킬이 반주한 베토벤 「봄」소나타 첫악장 등이 실렸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음반 한장을 완전히 차지하는 텔레만의 무반주 바이올린 환상곡집. 음반 카탈로그에서 자취를 감춘 뒤 23년만에 부활되는 연주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활달하면서 풍부한 선율과 장식미가 귀를 사로잡는다. 같은 시대 바흐의 무반주소나타에서 엿보이는 엄정함과 건축적인 아름다움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 곡의 경쟁음반으로는 95년 비버의 바이올린 소나타로 그라머폰상을 수상했던 고악기(古樂器)바이올리니스트 앤드루 맨지의 연주(하모니아 문디)가 유일하다. 맨지는 화려한 기교와 발랄한 리듬감, 악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연주로 최근 명성을 얻고 있다. 텔레만의 환상곡에서도 그는 장식적 부분을 최대한 강조하는 한편 확연하게 밀고 당기는 활긋기와 유연한 호흡으로 활기넘치는 연주를 들려준다. 이에 비해 그뤼미오의 무기는 매끈한 음색과 아늑한 표정. 악장 첫부분의 빠르기는 대개 끝까지 유지되며 장식음의 해석도 지극히 모범적이다. 짙은 색채를 펴바르듯 하기보다는 연한 색상이 서서히 번지게 만드는 연주이지만 뒤에 남는 감흥은 결코 연한 빛으로 머물지 않는다. 〈유윤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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