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끄는 2권의 시집「답청」「시인선 200호 기념시집」

  • 입력 1997년 6월 10일 10시 12분


정희성 시인
정희성 시인
시는 죽었는가. 80년대 「시의 시대」가 가고 90년대 끝자락, 신세기를 앞두고 과연 시는 죽었는가. 여기 아니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와 혁명을 꿈꾸며 역사의 격랑과 정면으로 맞섰던 70,80년대를 지나 삶의 내면과 서정성을 탐구하는 지금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의 물줄기는 의연히 굽이쳐 흐르고 있다고. 이 시대 시의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집 두권이 있다. 하나는 다음주 출간될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2백호 기념시집. 77년 첫호 이후 90년에 1백호를 돌파했고 이제 1백1호부터 1백99호까지의 시집에서 한편씩을 골라 엮은 것이다.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 원숙기의 시인에서부터 이윤학 장석남 박청호 등 서른 안팎의 젊은 시인에 이르기까지, 90년대를 읽기에 손색이 없다. 80년대 그 누구보다 현실을 직시한 시를 써왔던 한 시인의 목소리는 이제 삶을 바라보는 여유로 가득하다. 「언젠가 왔던 길을 누가/물보다 잘 기억하겠나/아무리 재주껏 가리고/깊숙이 숨겨놓아도/물은/어김없이 찾아와/자기의 몸을 담아보고/자기의 깊이를 주장하느니/…/물과 함께 아니라면 어떻게/먼 길을 갈 수 있겠나」(김광규, 「물길」에서). 이 시집의 시편들은 대체로 자연과 생명의 경외, 인간의 원형탐구 등을 차분히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시에 목숨 걸고」 청춘을 다바친 시인의 절창도 들어있다. 「1977년 여름/九鶴寺에서 훔친 쌀을 지고/…/허겁지겁/폭우가 그친 새벽 산을 내려왔습니다//얕은 마음에/인적드문 샛길로 한번 더 접어들다/그만 길이 끊긴 안개의 무덤 사이로/밤 이슬에 젖은 불온삐라같은/오르지못할 나무들의 군락을 보았습니다//언젠가는 실수없이/그 장대하고 아름다운 숲에 묻히기를 바랐습니다」(이창기, 「진술서」에서). 74년 출간 직후 절판된 것을 다시 펴낸 정희성의 「답청」(문학동네 발행)은 시가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고 역사 속에 살아남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유신시절,그 황폐함을 딛고 부활을 노래했던 시인의 치열함이 지금 읽어도 그모습 그대로이다. 「풀을 밟아라/들녘엔 매맞은 풀/맞을수록 시퍼런/봄이 온다/봄이 와도/우리가 이룰 수 없어/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풀을 밟아라/밟으면 밟을수록 푸른/풀을 밟아라」(「답청」). 「예언하지 않아도 죽음은 다가오고/예언하지 않아도 강이 흐른다/네 죽음은 하나의 실수에 그치겠지만/밖에는 실패하려고 더 큰 강이 흐른다」(「병상에서」일부). 겨울철 시린 벌판, 홀로 펄럭이는 깃발처럼 당당하다. 저 강물보다 깊게 흐르는 시인의 시정신, 어수선한 세기말에도 여전히 유효하리라.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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