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유럽연극기행]獨 도이치극장

  • 입력 1997년 1월 20일 20시 13분


독일에는 국립극장이니 시립극장이니 하는 공식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나 시로부터 100% 지원을 받고 대규모 극장과 자체 소극장(Kammerspiele)을 겸비한 극장을 슈타트 테아테(StaatTheater:국립성격, StadtTheater:시립성격)라 일컫는다. 이런 국립 혹은 시립 성격의 대표적인 유럽 극장으로는 오스트리아의 빈 부르크 테아테, 스위스의 취리히 극장, 프랑스의 코메디아 프랑세즈 등과 역시 베를린에 위치하고 있는 도이치극장이 있다. 도이치극장은 1883년 개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베를린 연극무대로 자리잡았고 1905년부터 막스 라인하르트가 극장 작업을 주도하면서 이 극장을 독일 연극의 중심으로 발전시켰다. 전형적인 레퍼토리극장으로 12월 한달 공연 레퍼토리만 대극장 공연 20편, 소극장 공연 20편 등 40여편의 연극을 소화해 낸다. 베를린 앙상블이 브레히트와 하이너 뮐러의 연극을 주축으로 공연하고 민중극장(Volksbuhne)이 사회성과 실험성을 강조한다면, 도이치극장은 한 마디로 백과사전적인 중산층연극의 중심이다. 그러나 12월 한달에 희랍극 「오이디푸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괴테의 「탓소」, 레싱의 「현자 나탄」,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고리키의 「최후」, 카뮈의 「칼리큘라」,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 호프만슈탈의 「탑」, 몰리에르의 「딸뚜프」, 호르바트의 「숲 속의 이야기」, 하우프트만의 「평화의 축제」, 다리오 포의 「열린 부부」까지 다 볼 수 있는 기회는 세계에서 도이치극장밖에 없을 것이다. 베를린 앙상블의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이 무너지면서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것이 도이치극장 연극인 듯하다. 원로에서 중견에 이르기까지 독일 정상급 연기자들이 집결하고 1천석이 넘는 극장에 연일 관객이 가득차는 이곳은 연극인들에게는 꿈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당국의 100% 지원에 힘입어 연기 연출 무대 스태프는 마음껏 하고 싶은 연극을 할 수 있고, 관객들은 싼 값으로 다양한 연극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소수의 의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연극은 더 이상 발 아래 흙이 없다. 그래서 연극의 뿌리들이 건조한 공기 속에 걸려 있는 듯이 보인다』고 어느 연극 전문기자가 지적한 도이치극장 「오이디푸스」에 대한 촌평은 유럽 중산층 연극의 현 주소를 날카롭게 꼬집어 낸 시각처럼 느껴진다. 좋은 극장, 수준높은 미학, 세련된 연기가 지향하는 방향은 어디인가. 여기에 대한 명확한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이 결여됨으로써 도이치극장 연극은 백과사전적 레퍼토리의 숙명적 한계 또한 동시에 안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장충동 국립극장 규모 이상을 넘지 않는 도이치극장이 월 40여편의 연극을 소화해 낸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런 국립 시립극장이 왜 연극을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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