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춤은…」연재마치며]「억압으로부터의 자유」그려

  • 입력 1996년 12월 30일 20시 20분


「끝」이라는 글자를 치면서 내 손목이 조금 흔들렸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무대를 떠나는 복합적인 희비의 감회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끝내 사랑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 대한 쓸쓸함 때문이기도 하다. 진희를 통해 그리려고 한 것은 자유와 인간성이다. 진희의 편견 없는 사고방식은 획일화된 가치나 허위의식에 냉소를 보낸다. 또 억압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기존질서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므로 성(性)에 대해서도 도덕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거기에 대해 독자의 반응은 민감했다. 주부들의 항변은 물론이고 인기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야하게 쓴다는 비난도 들었으며, 어느 단체로부터는 그렇게 쓰도록 종용을 당하고 있지 않으냐는 동정어린 질문까지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성은 이 소설에서 다루었던 여러 가지 억압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른 억압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쓰면서 굳이 성적 억압만을 은유적으로 다루고 넘어간다면 오히려 신문소설에 대한 일반의 편견대로 성을 상업적 장치로 이용하는 꼴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포착하려고 긴장했고, 그렇기 때문에 「술에 많이 취했을 때면 그가 그립다」를 「술에 어설프게 취했을 때나 그가 그립다」라고 고쳐 썼던 것이다. 격려와 질책을 함께 주셨던 독자들 중에 진희가 유부남에게 품는 감정에 공감한다고 털어놓았던 회사원, 진희에게 빠져 있다는 대법관, 진희가 중절 수술한 날 술을 많이 마셨다는 40대 자영업자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소설만 봤을 때는 작가가 덩치가 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너무 조그맣다고 말하던 선배 시인도, 그리고 무엇보다 상투성을 경계한답시고 내가 일일이 꼬아놓은 매듭을 풀어가며 수고스럽게 소설을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를 드린다. 아쉬운 점이라면 80년대 젊은이였던 경애의 90년대 삶, 그리고 건강한 신세대의 이미지로 설정했던 애리를 지면형편상 충분히 그리지 못하고 끝낸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앞부분에 쳐놓은 복선을 다 알아챌 만큼 성실하게 읽어주셨던 몇몇 독자에게 항변을 들었는데, 책으로 묶으면서 보완하는 방법으로 무책임함을 벗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듣곤 했다. 나중에 폴 앵카가 좀더 호소력있게 부른 것도 있지만 나는 경쾌한 드립터스의 원곡을 더 좋아한다. 빠른 리듬이 오히려 역설적인 슬픔을 진하게 느끼게 한다. 마치 진희의 역설적 사랑의 방법처럼. 소설 속의 인물은 작가의 실험적인 자아다. 어떤 의미로는 분신이라 하겠다. 나는 이제 나의 분신을 눈 내리는 연말의 썰렁한 카페에서 전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술을 마시게 만들어 놓고 떠난다. 진희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감상적인 첫사랑의 얘기를 무심히 떠들어대는 뒷자리의 남자들이 있을 뿐이다. 그처럼 타인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진희가 선택한 사랑의 방식, 그것이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인간 사이에 사랑을 가능하게 할까. 이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한 것으로 그동안 소중한 지면을 소모한 데 대한 용서를 구할까 한다. 은희경(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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