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찻잔 이야기

  • 입력 1996년 12월 11일 20시 17분


오랫동안 차(茶)를 즐기다 보니 찻잔을 보는 눈이 조금 있다. 간혹 「햐!」하고 탄복할 정도로 사람을 사로잡는 그런 찻그릇을 보게 된다. 그럴 때는 그냥 몸살이 날 지경이다. 갖고 싶은 욕심이 발동해 얼마냐고 물으면 대개가 녹록찮게 높은 값이어서 아쉽게 발길을 돌리기가 일쑤다. 수년 전 서울 인사동엘 갔을 때였다. 아내와 둘이 진열된 골동품과 고서화들을 기웃거리며 별뜻도 없이 어슬렁 거렸다. 그러던중 한 찻그릇 가게 앞에서 우리는 문득 발길을 멈추었다. 한동안 꼼짝않고 정지된채 유리 너머에 다소곳이 자태를 뽐내고 앉아 있는 이도찻잔(井戶茶碗·정호차완)을 보았다. 이도찻잔이란 경남 하동 세밋골에서 만든 뛰어난 찻잔을 일본에서 이르는 통칭이며 16세기이후 일본인들이 국보급으로 높이 평가해오고 있다. 당연히 골동은 아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섰다. 주인이 다가서고 나는 감히 손가락이 아닌 오른손을 펴서 아주 정중하게 찻잔을 가리키며 값을 물어보았다. 역시 대단한 값(2백만원)이었다. 우리는 입맛만 다시고 아쉬움을 안은채 그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두 주일쯤 후 다시 서울에 간 기회에 예의 그 찻잔이 보고 싶어 일부러 짬을 내어 그 가게에 들렀더니 보이지가 않았다. 이미 일본으로 입양이 되었다는 주인의 설명이었다. 일순 나는 목이 말랐다. 그런데 더욱 애석한 것은 그 찻잔이 일본사람에게 양도된 후 찻잔을 만든 사람으로부터 돌려달라는 전갈이 왔었다는 것이다. 그 후 나는 틈만 나면 버릇처럼 전통 가마를 찾아다녔다. 전국 방방곡곡. 그러다 남쪽 바닷가 어느 시골에서 찻잔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는 「ㅎ」이라는 도공을 만났다. 그 덕에 솜씨 좋은 정말 기차게 멋진 찻잔을 소장하게 되었다.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가 만든 찻잔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보면 그 고졸(古拙)함이 무엇으로도 비길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값도 적당했고 그의 무욕(無慾)함이 더욱 좋았다. 나는 더 바랄게 없다. 좀 엉성하고 뭔가 부족한 듯하면서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터억 놓게 하는 분청찻잔(粉靑茶器). 그 찻잔에 향기로운 차 한잔을 우려 내어 지그시 음미하고 있노라면 잡다한 세사(世事)따윈 훌쩍 뛰어넘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황 우 정(경남 창원시 사림동 33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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