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 설치미술화 경향 뚜렷』…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성황

  • 입력 1996년 12월 7일 20시 11분


판화는 인간의 삶과 가장 밀착된 예술중의 하나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목각활자나 판본인쇄물은 물론 떡살무늬에 이르러서는 음식물을 장식하는 수단으로 우리의 삶과 함께 해 왔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에 의한 창작판화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 대에 접어들면서다. 양화의 도입과 더불어 1921년 「개벽(開闢)」지 13호에 실린 나혜석의 목판화 「개척자」는 창작판화의 효시로 꼽힌다. 해방후 판화가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장르로 자리잡아 오면서 많은 화가들이 유화작업외에도 판화에 적지 않은 관심을 쏟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판화는 판을 찍는 방법과 판의 재료 그리고 찍어내는 기계에 따라 독특한 맛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판화는 목판 석판 동판 아연판 아크릴판 실크 스크린 등 판의 재료와 기법에 따라 그 명칭이 달라진다. 이번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거평그룹 협찬)에는 모두 45개국에서 5백99점이 출품됐으며 이중 81점의 입상 입선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한마디로 이번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는 전세계의 판화가들이 지닌 판화의 예술성과 다양성을 가늠해볼 수있는 의미있는 행사라 할 만하다. 대상을 받은 한국작가 이인현의 판화 「카베르네 소 비뇽1」은 타원형의 검은 흑점의 둘레로 먹물이 배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우주적인 형태와 유출된 자연의 기(氣)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동양의 정신성을 바탕에 깔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석판화로서는 상당히 절제된 방식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마치 침묵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독백의 소리를 들려주는 듯하다. 우수상을 수상한 일본의 다케미 아주마야의 「일식(日蝕)」은 우주공간의 적막감을 표현한 작품이며 캐나다의 월터 주레의 「단순한 도식」은 물질의 공간감과 움직이는 물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 밖에 캐나다의 다비다 키드 작 「하늘과 땅: 종이영혼」은 무용을 소재로 한 존재의 가벼움을 나타냈다. 2층에 전시된 한국작가 판화들과 역대 수상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현대판화의 실험성과 에술적 특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다듬게 된다. 특히 컴퓨터를 판화적 방법으로 도입한 정성곤의 「방사현상53」이나 김현실의 「96코러스」와 같은 종이부조판화는 여러개로 분할된 화면을 지닌 설치미술적인 판화로 젊은 작가들의 판화개념에 상당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예감하게 된다. 이번 전시회는 전세계 판화가들의 예술적 기량을 겨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판화가 결국은 민족성과 삶의 환경을 반영하는 적극적인 매체일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전시는 15일까지 세종로 일민문화관. 장 동 광<일민문화관 학예연구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