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섭의 시네월드]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 입력 1996년 12월 4일 20시 10분


프랑스 파리, 현대의 어느 겨울날 오후, 텅빈 아파트, 아내의 급작스러운 자살로 중년의 벼랑에 선 45세의 미국인 남자와 결혼을 앞둔 20세의 프랑스 여자가 만난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두 사람은 몸을 섞는다. 여자가 이름을 묻자 남자가 말한다. 『이름은 필요없어. 우리는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해, 모든 것을』 그 남자, 폴. 바로 20세기의 배우 말론 브랜도가 일갈하는대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이름이 없는 영화, 아니 이름을 거부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음란하기 그지없는 포르노 영화가 아니다. 그런 유의 호기심으로 영화를 선택하는 관객이라면 차라리 요즘 해금되기 시작하는 플레이보이사 제작의 소프트 포르노영화를 보는 게 좋을 것이다. 「파리…」는 단 한순간도 관객의 흥미진진한 훔쳐보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섹스는 에로틱하기보다는 고통이고 자기 파멸로 그려진다. 그때 고작해야 32세의 청년이었던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상영시간(1백25분)동안 줄기차게 관객을 고문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주제면에서 현대인의 커뮤니케이션 단절을 그리는 영화이거나 파산한 무정부주의자와 방종한 제국주의 프랑스 대령의 딸을 주인공으로 한 20세기 이데올로기 투쟁사의 축소판인가. 그렇지 않다. 영화는 섣부른 지성을 거부한 채 수많은 상징과 은유의 황금가지로 한낮의 태양을 가려버릴 정도다. 「파리…」는 볼 때마다 그리고 보는 각도에 따라 영화의 의미가 새로워지는 어마어마한 수수께끼의 영화다. 한없이 음탕하고 끝없는 지성의 해석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차라리 그렇게 구분짓고 나누고 편가르는 행위를 우습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한마디로 현대의 걸작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우선 성과 정치 이데올로기가 숨막히게 갈등하는 치밀한 형식을 기반으로 연기와 실재의 차이(브랜도의 긴 회고담은 각본에 없는 즉흥연기다), 픽션과 기록영화의 차이(여자의 약혼자가 찍는 황당한 다큐멘터리)를 묻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감독의 모든 관습과 금기에 도전하는 실험정신. 베르톨루치는 이 작품으로 현대영화의 모습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제작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영화는 한국에서 금기의 장면을 「보카시(화면을 흐릿하게 가리는 방법을 가리키는 일본어)」하여 상영된다. 한국은 왜 아직도 이렇게 유치한가. 강 한 섭<서울예전 영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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