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성의 세상읽기]비디오 고르기

  • 입력 1996년 11월 25일 20시 21분


유럽 예술영화의 대가로 알려진 잉그마르 베리만 감독은 목사의 아들이었는데 일요일마다 교회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마술에 빠져들었다가 결국 영화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나도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데 대학시절 우연히 본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 빔 벤더시의 영화가 영화사랑의 계기가 되었다. 영화사랑은 요즈음이야 아주 진부한 취미지만 예전에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볼 만한 영화가 없었고 그저 책에서만 좋은 영화들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영화를 만들어 볼 꿈까지 꾸고 몇몇 동료들과 어쭙잖은 일을 벌이기도 했다. 유학을 떠나 다른 공부를 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사랑 꿈 미련을 버리지 못해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했거니와 결국 재주도 모자라고 기회도 닿질 않아 이 시대의 모범관객으로 남기로 하고 엄청나게 영화를 보았다. 돌아와서는 우연한 기회에 다시 영화판에 어울리게 되었고 팔자에도 없는 TV 영화교양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 1년 남짓 영화에 묻혀 살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으로서는 너그러운 편인 나는 영화에 관해서는 사뭇 짜다는 평판을 받는다. 영상이 우리 시대의 매체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영상문화, 특히 영화보기 문화는 사실 형편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면 다양하기 짝이 없는 형식과 내용을 특징으로 하고 그만큼 볼거리도 많지만 우리는 한사코 편식을 고집한다. 늘 그렇고 그런 이야기, 배우얼굴, 신나고 즐겁고 야한 그림… 마치 인스턴트 식품만 먹어보고 음식을 다 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다양한 음식을 먹고 자라야 튼튼하듯이 영화도 다양한 맛을 보고 자라야 눈도 뜨고 또 앞으로 영상산업을 키울 인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부모들이 먼저 영화에 대해 제대로 보기, 뜯어보기, 비판적으로 읽기 등을 공부해야 한다. 그저 심심풀이로 함부로 골라 아무렇게나 누워서 보는 비디오 문화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영상에 대해 꼭 그만큼의 이해밖에는 가질 수 없다. 가짜 그림이 판치는 세상에 진실된 영화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애써서 찾아보고 함께 나누어야 한다. 사전검열 폐지라든가 영화계 비리로 시끄러운 요즘, 관객들이 그 권리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를테면 오늘저녁 비디오 하나 고를 때라도 진정한 영화사랑의 계기가 될 작품을 고르는 것처럼 정성을 들여 해보자. (서강대교수·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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