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규인]오타니의 태극기, 손흥민의 일장기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21일 2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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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Let’s go to France together(프랑스에 함께 가자).”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스 ‘붉은악마’가 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한일전이 열린 1997년 11월 1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 내건 응원 문구다. 한국은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한 상태로 이 경기를 치렀다. 반면 일본은 이 경기를 꼭 이겨야 사상 첫 본선 진출 희망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결과는 일본의 2-0 승리였다.

붉은악마와 일본 서포터스 ‘울트라 닛폰’은 경기가 끝난 뒤에도 응원전을 이어갔다. 울트라 닛폰이 “한국! 한국!”이라고 연호하자 붉은악마도 북소리로 화답했다. 당시 붉은악마 회원 한 명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한국이 완패해 속상하기는 하지만 먼 길을 달려온 울트라 닛폰 친구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위안을 삼기로 했다”고 말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에는 스즈키 이치로를 비판하는 기사도 실렸다. 이날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일프로야구 골든시리즈 1차전에 출전한 이치로는 수비만 한 뒤 타석에는 들어서지 않고 경기에서 빠졌다. 동아일보는 “6일 전 다친 허리 상태가 악화됐다”고 전하면서도 “한국 투수에게 자칫 삼진이라도 당한다면 일본 최고 스타의 자존심이 구겨지기 때문에” 교체를 자청한 것이라고 의심했다. 기사 제목부터 ‘오만한 이치로’였다.

이치로 이후 일본 최고 스타는 단연 오타니 쇼헤이다. 이치로와 달리 오타니는 ‘한국에서 이렇게 사랑받은 일본인이 또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기가 좋다. (걸그룹 ‘트와이스’ 일본인 멤버 사나 팬 여러분 쉿!) LA 다저스 소속인 오타니는 2024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개막 2연전 ‘서울시리즈’를 앞두고 태극기 이모티콘 앞에서 한국 팬들에게 ‘손하트’를 날리는가 하면 입국 후 기자회견에서도 “한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라고 말해 팬심을 더욱 들끓게 했다.

만약 손흥민이 토트넘 선수 대표 자격으로 일장기 이모티콘 앞에서 손하트를 날리고 “일본은 내가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라고 인터뷰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한국 팬들은 손흥민을 응원해줄 수 있었을까. 오타니의 태극기는 느낌표로 끝나지만 손흥민의 일장기에는 물음표가 남는다.

한국과 일본은 결국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 함께 갔다. 월드컵이 끝나고 석 달 뒤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국회에서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김대중 정신’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인 가운데 총선을 앞두고 반일 정서를 부채질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붉은악마가 프랑스에 함께 가자고 일본을 응원할 수 있었던 건 한국이 그 경기를 내줘도 별 타격이 없었기 때문이다.이제 손흥민이 일장기 앞에서 웃어도 ‘자본주의의 미소’라고 넘길 수 있을 만큼 우리 국력도 강해지지 않았나. 일본 언론에서 ‘일본 없는 반일(日本のいない反日)’이라고 표현하는 일방적인 반감을 버리지 못하는 게 이제는 더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닐까.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


#오타니#태극기#손흥민#일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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