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언어기호학 정면 비판 '존재와 언어'

  • 입력 2002년 9월 6일 17시 33분


□존재와 언어 / 마루야마 게이자부로 지음 고동호 옮김 / 276쪽 1만2000원 민음사

“말은 문화이며 존재자체이다”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다. 신기하게도 내가 하는 말을 강아지는 알아듣지 못하는데 사람은 알아듣는다. 왜 그럴까? 어떻게 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질까? 저 밖의 꽃밭에 있는 ‘대상으로서 장미’와 내 입으로 말해지는 ‘언어로서의 장미’는 어떤 관계일까? 이러한 의문을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언어철학이다.

상식인들은 우리 밖의 저 세계에 장미가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지시하기 위해 비로소 ‘장미’란 말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거나 생각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요 기호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이다.

정말 그럴까? ‘존재와 언어’는 바로 정설이 되어버린 언어 기호학을 비판하고 있는 언어철학서이다. 이 책의 저자 마루야마 게이자부로는 일평생 소쉬르의 언어학 연구에 매달리 언어학자이다. 하지만 그는 소쉬르의 언어철학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여 언어 상대주의에서 벗어나 관계론적 상대주의에로 언어철학의 방향을 돌려, “말이 곧 문화이며 인간 자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새로운 언어철학을 정립하고 있는가? 그는 먼저 언어와 존재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존재의 세계에 눈을 돌려 실재론이나 관념론 등의 실체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대상이든 관념이든 언어를 떠나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반대로 언어가 존재를 창조하는가? 일부 언어학자들은 문화 내의 모든 존재를 산출하는 것은 언어이라는 유언론을 주장한다. 소쉬르의 언어 우선성이나 “존재는 말이다”라는 불교의 유식론(唯識論)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역시 존재와 언어라는 이항 대립 도식에서 존재에서 언어에로 그 우선성을 바꾼 것에 불과한 또 하나의 실체론적 접근이 아닌가?

이렇게 언어와 존재, 모두의 실체성을 부정한 후 그는 소쉬르의 언어학뿐 아니라 프로이드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 개념을, 그리고 니체 철학에서 영원 회귀 사상 등 동서양의 다양한 자료를 끌어들어 언어와 존재 간의 관계론적 상대주의를 전개하고 있는 셈이다. 말은 외재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자체 속에 표현과 의미를 동시에 갖춘 양면체이다. 이 언어가 곧 문화인 셈이다.

언어학자답게 번역에는 빈틈이 찾을 수 없으며, ‘번역은 또 하나의 창작’이라는 사실을 이 책은 실감나게 보여준다. 다만 랑그 랑가주 시니피앙 등 언어학의 전문 용어가 우리말화되지 않고 있어 언어학에 대한 선이해가 없는 초보자가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끝까지 정독을 하게 되면 독자는 역자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역자는 원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문학 음악 미술 철학 심리학 언어학 등에 관한 방대한 자료, 그것도 독어 영어 일어 불어 라틴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여진 자료들을 일일이 관련된 국내 문헌을 찾아 번역어를 선택하고, 심지어 한국어 번역서까지 꼼꼼이 챙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언어와 존재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소득이 될 것이다. 언어학이나 언어철학에 관심있는 자는 ‘존재와 언어’라는 산맥을 넘을 필요가 있다.

김상득 전북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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