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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7월 4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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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물고기는 물 속에 사는 데다 말도 할 줄 모른다. 그들의 생태를 이해하려면 전문가의 지도와 자연도감이 필수이고, 촬영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또 말이 없는 물고기의 행동에서 진실을 파악하려는 부단한 노력, 열린 마음, 담백한 시각, 이런 것들이 총 동원돼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방송인들에게는 사람보다 물고기가 더 취재하기 쉬운 대상인 것 같다. 적어도 지난주 KBS가 내보낸 두 개의 프로그램 ‘자연 다큐멘타리-가시고기’와 ‘취재파일 4321’을 보면 그렇다.
부성애의 상징이라는 가시고기의 생태를 조명한 ‘자연 다큐멘타리-가시고기’는 ‘물고기의 얼굴을 한 휴먼 다큐’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잘 만든 수작이었다. 물고기를 지칭하는 말로 ‘녀석’을 선택한 이 프로그램은 “암컷이 둘로 늘어나면서 수컷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 누구를 신부로 맞을 것인가”, “수컷이 아비가 되는 순간이다”, “녀석이 경계근무 중이다” 같은, 사람한테 걸맞는 수사법을 사용해 가시고기의 의인화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꼼꼼한 취재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개가도 올렸다. 수컷이 구애한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암컷이 구애한다는 것, 두 종류 이상이 함께 서식하지 않는다는 통설과 달리 연곡천에서 세 종류가 같이 서식한다는 사실 등을 밝혀낸 것이 이에 속한다. 고성 산불의 영향으로 황폐해진 송지호의 물밑 생태계가 전해주는 섬뜩한 영상은, 어떤 환경 프로그램보다도 더 효과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카메라는 갈대 군락의 한 가시고기 아비를 선택, 그가 부화 5일째 되는 날 장렬한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포착했다. 대단한 근성이고 끈기다. 그 결과, 조그만 물고기 한 마리가 나레이터의 표현대로 ‘장엄한 사랑의 역사’를 전하며, 인간인 나까지 감동하게 했다.
‘가시고기’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취재파일 4321’은 방송사의 취재 능력을 전면적으로 회의하게 만들었다. ‘심판대에 선 언론탈세’라는 제목으로 요즘 최대 이슈인 국세청의 언론사주 고발 문제를 다룬 이 프로그램에서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그 어떤 끈기도, 근성도 감지되지 않았다.
며칠 전 뉴스에서 본 국세청 발표내용을 되풀이하는 장황함과 정부 쪽 입장만 부각시킨 단선적 시각, 그리고 ‘이래서야 되겠는가’식의 훈계성 마무리만 있었을 뿐이다. ‘취재파일’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리만큼 새로 취재된 내용이 없었다. 얄팍하고 헐렁한 파일이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드러났듯, 언론사 세무조사를 정치권의 언론탄압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궁금해하는 시청자를 위해, 그리고 취재의 깊이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 문제도 꼼꼼하게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물고기 한 마리의 움직임을 잡기 위해 몇 개월이고 물 속을 꼼꼼이 들여다보는 끈기와 장인정신이 있는 방송사라면, 그 대상이 사람으로 바뀔 때 오히려 훨훨 날아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 현안 앞에만 서면 방송사들이 왜 갑자기 깊이를 잃고, 뻔한 사람의 생태를 물고기의 생태만큼도 취재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shpark1@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