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불온한 날씨

  • 입력 2001년 4월 6일 18시 59분


◇불온한 날씨/최순희 장편소설/405쪽, 8000원/동아일보사

밸런타인 데이, 여자는 두 세트의 초콜릿을 준비한다. 한 세트에는 ‘세상에서 제일 가는 남편에게’라는 쪽지가, 다른 하나에는 ‘내 생애 최고의 남자에게’라는 헌사가 붙어 있다. ‘최고의 남자’와 ‘제일 가는 남편’이 같은 인물이라면? 여자는 행복할 것이다. ‘내 생애 최고의 남자’가 남편 아닌 연하의 총각이라면? 여자가 그 총각과 육체의 깊은 환락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물론 불륜이다. 불륜에 빠진 대부분의 여자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는다. 사랑만이 불륜에 심리적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다.

2001년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 당선작인 최순희의 ‘불온한 날씨’는 그 제목처럼 불륜에 빠진 한 여자의 사랑에 대한 섬세한 내면 심리를 다룬 불온한 소설이다.

30대 후반의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어머니인, 그러면서 번역 일을 하는 한 여자가 있다. 13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 여자는 불만이 없다. 비행기 조종사인 남편은, 듬직했고 가정에 충실했고, 무엇보다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다. 은사였던 시아버지 역시 친아버지처럼 그녀를 자애롭게 대했다.

그런데 어느 겨울 초입에 폭풍우처럼 한 남자가 다가왔다. 30대 초반의 화가였다. 화가는 섬세하면서도 열정적인 손길로 그녀의 내부에 잠자고 있었던 욕망 혹은 사랑의 뇌관을 터뜨렸다.

그녀는 한 겨울 내내 화염에 휩싸였다. 남편에게는 불감증이었던 여자가 화가에 의해 성의 엑스타시를 맛보았다. 화가가 부르면 여자는 그에게로 달려간다. 부르지 않아도 시아버지의 생일 음식을 그에게 먼저 먹이기 위해 달려간다.

만약 이 소설이 이렇게 단순하게 구성되었으면 전형적인 대중적 불륜소설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하지만 작가는 철저한 계산 하에 몇 가지 소설적 장치를 마련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여자의 과거의 상처이다.

여자는 대학 재학 시절 ‘형요’라는 남학생과 서로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같이 유학갈 계획을 세웠고, 결혼을 생각했다. 그것이 어긋난 것은 그녀가 존경했던 교수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부터이다. ‘형요’를 사랑했기에 그녀는 유린된 자신의 몸을 줄 수 없었다. 그는 인내하지 못하고 떠나가고 그녀는 현재의 남편의 집요한 구애에 의해 선택되어 진다. 그러니까 여자는 화가를 만나기 전까지 남자나 성에 대해서는 언제나 수동성의 극치를 달려왔다.

그러나 화가에게만큼은 당당하게 자신의 육체를 행사한다. 그녀 몸의 주인은 그녀다. 그녀의 불륜은 육체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인 것이다. 물론 이 주체성 찾기에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 남편에게 행한 인간적인 배신에 대한 고뇌, 남편의 죽음 등등. 하지만 그 희생을 넘어 여자들은 몸의 주체성을 찾으려 하고 있다.

남자들이여, 그대들은 신예작가 최순희의 전언(傳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자 몸의 주인은 그대가 아니라 바로 여자다.

하응백(문학평론가·국민대 문창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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