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 그러나 아직은 총대위의 평화

  • 입력 2000년 11월 1일 19시 08분


평양은 평화를 원하고 있었다. 한국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 김용순·이하 아태)의 단독 초청을 받아 7박8일(10월14∼21일) 동안 평양을 취재한 소감은 ‘평양은 평화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이 예정된 상황에서 기자와 만난 아태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초청자인 아태를 대표해 10월18일 기자의 숙소인 평양 양각도국제호텔(1427호)로 찾아와 한 시간 남짓 비공식 인터뷰(의례 면담)를 가진 이 고위관계자는 남북 및 북미관계 현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두루 언급하는 가운데 이같이 밝혔다(다만 익명을 전제한 비공식 인터뷰이기에 이 고위관계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우선 이 고위관계자는 “조-미관계도 (북-남관계처럼) 정상화됩니다. 올브라이트도 23일 오기로 돼 있고 클린턴도 인차 올 겁니다”고 말해 북-미관계 정상화에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이 관계자가 올브라이트의 방북 일정이 10월23일로 확정된 사실을 밝힌 10월18일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올브라이트의 방북 날짜를 모르고 있었다(올브라이트가 10월23일 방북한다는 사실은 미국측의 공식 발표로 국내 언론에서는 10월20일자 조간부터 보도되었다). 따라서 북-미 고위급 회담 시점과 전망을 한국 기자에게 먼저 알려준 셈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클린턴도 인차 온다’는 대목이다. ‘인차’는 ‘이제’ 혹은 ‘금방’을 뜻하는 사투리다. 이는 곧 클린턴 대통령의 11월 방북을 의미한다. 그는 클린턴의 방북 여건과 직결된 북-미관계 개선의 3대 현안인 핵-미사일-테러지원국 해제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잘 될 겁니다”고 말해 미국과 이미 상당한 수준의 의견접근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 북-미관계 개선에 나선 배경에 대해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하는 거지만 미국은 ‘유관국가’ 아닙니까. 통일을 하자면 그런 나라(유관국가)들과의 문제를 풀어야 하니까 관계를 정상화하는 겁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아태가 민간단체지만 북남 최고위급(정상) 회담에도 관여를 했다”(아태 송호경 부위원장과 국정원 김보현 3차장이 비밀접촉을 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고 밝혀 현재 진행중인 북-미 고위급회담에도 상당 부분 관여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또 그는 대미관계 개선에서도 ‘자주와 친선 그리고 평화의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이같은 대외정책 이념은 적대국이 아닌 ‘선린우호국’의 관계 설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주는 친선과 평화의 기초이자 그것들을 규정짓는 것”이라면서 “(미국에) 친선과 평화를 구걸하지는 않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북-일 수교에도 관여하고 있는 이 고위관계자는 일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북-일관계 정상화는 서두르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물론 이런 입장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면 일본은 따라온다는 북한 당국의 주미종일(主美從日)이라는 기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사일 문제에 대해 “미국도 갖고 있고 다른 많은 나라들도 갖고 있는데 일본이 우리 미사일만 문제삼는 것은 우리를 적대시하기 때문”이라면서 “일본이 우리와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있으면 우리 미사일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북-일관계의 경우 아직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이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통미봉남’은 모르는 소리 …북-일 수교 서두르지 않겠다△

평양 체류기간에 남한에서 논란이 된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 및 ‘속도조절론’에 대한 북한 당국의 인식도 엿볼 수 있었다. 이 관계자는 “남측에서 통미봉남이라고 하는데 6·15 공동선언이 뭡니까.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 아닙니까”고 일축하면서 북-미관계 개선은 남북관계의 기초 위에서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다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므로 일단 시동단계인 북미관계 개선에 속도를 낸 다음 이미 궤도에 오른 남북관계 개선에 가속도를 낼 것임을 시사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 전래의 미풍양속에 따라 명절(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행사)을 함께 즐기자고 남측 정당-사회단체를 초청했는데 3당 대표단이 빠져 아쉽다”며 정치권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남측에서 (관계 개선이) 급진적이다, 속도조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55년이란 세월이 어디 짧은 세월입니까. (관계 개선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북이 합의한 일정이 지연되고 있는 데는 북한의 전문인력난과 행정망의 미비라는 속사정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통일을 위한 대의명분에는 공감하면서도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면서 “정치권이 앞장서야 6·15 북남선언의 실천이 앞당겨지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한 정치권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 요새 여러 가지 생각이 많다”며 “그래서 우리도 관망중이다”고 밝혔다. 남측이 속도조절을 요구하면 북측도 서두르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는 “북남선언은 이제 아무도 되돌릴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역사적인 북남 공동선언을 수표(서명)한 사람이 누굽니까. 최고위급 두 분, 그쪽말로 하면 정상이 한 것인데, 그걸 누가 막습니까?”고 되물었다.

사실 6·15 공동선언의 ‘위력’과 그 이후 달라진 북한의 대남 인식은 평양 시내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 발간되는 각종 화보와 호텔이나 공공장소에 붙어 있는 벽보판을 보면 빠짐없이 선전되는 ‘일대 사변’은 △북남 최고위급 상봉을 포함한 6·15 공동선언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조-러 최고위급회담 △비전향 장기수 석방의 세 가지 소식이었다. 노동당 창당 55돌을 기념해 10월12일부터 매일 저녁 7시에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한 차례씩 공연되고 있는 집단체조에서도 참가자들은 ‘축 6·15 북남선언’이라는 구호를 몸으로 연출했다(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참관한 이 집단체조는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4장 ‘삼천리 강산에 울리는 민족의 환호’의 한 장면이었다).

△“6·15선언은 민족적 행운 … 원위치는 절대로 없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미 방북단과 서방 기자단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0월23일 저녁 5·1 경기장에서 관람한 이 ‘조선로동당 창건 55돌 경축 10만명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이었다. 구소련과 동구에도 이런 공연은 있었지만 ‘진영으로서의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금, 북한의 집단체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조직된 집단공연’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충격적인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마치 컴퓨터그래픽을 보는 듯한 배경대(카드섹션) 연출과 형형색색의 옷과 깃발로 장식한 수천명의 군중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장면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물론 기자가 집단체조를 참관한 10월16일에도 똑같은 공연이 연출되었고 기자가 앉은 초대석 아래의 주석단에는 라오스 국회의장 등 방북 외교사절단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공연이 끝나자 기립박수로 찬사를 보냈다. 그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혼연일체의 기예(技藝)에 대한 찬사였다.

사실 이 공연은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는 아니다. 이 공연은 그들의 구호처럼 ‘고난의 행군에서 강성대국으로’ 전환하는 ‘꺾어지는 해’에 당 창건 55주년을 자축하는 예정된 행사였다. 실제로 매일 수만명의 평양 시민들은 저녁 7시부터 시작하는 이 공연을 보기 위해 4시부터 줄을 섰다. 따라서 북한 당국이 올브라이트에게 이 공연을 참관케 한 것은 ‘계획’적일 수 있어도 집단체조는 예정된 행사였다. 올브라이트가 평양에 오지 않았어도 이 ‘지상 최대의 쇼’는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외국인의 눈에 비친 집단체조는 역시 달랐다.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기자단은 거의 한 목소리로 “어린 학생들이 핵개발을 연상시키는 핵분열 모습을 연출하고, 학생들의 카드섹션에서 장거리 미사일 발사 장면을 보여주는 대목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밝혔다. 심지어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한국 기자도 “북한은 회담장보다 수백배 웅변적으로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학생들은 핵개발을 연상시키는 핵분열 장면을 연출했고, 카드 섹션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그려냈다…대표단과 기자단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침묵 속에서 눈앞의 행사를 응시했다”고 참관기를 썼다.

그러나 집체 공연은 핵분열 모습을 연출했지만 실상은 ‘당의 사상 중시, 총대 중시, 과학기술 중시 노선’ 중에서 과학기술 중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방북 대표단에게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거나 ‘한 대 얹어맞은 듯한 충격’을 주려고 연출한 장면은 더더욱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올브라이트가 오기 전부터 이 ‘지상 최대의 쇼’는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명성1호’라고 적힌 인공위성 발사를 상징하는 장면은 있었다. 이것이 장거리 미사일인지 인공위성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올브라이트 장관은 10월24일 방북 결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어제 저녁 관람한 집단체조에서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장면이 나오자 김위원장은 즉시 내게 몸을 돌려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인공위성 발사’라고 말했다.”

김위원장이 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오늘 북한이 처한 현실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북한 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6·15 선언은 ‘민족의 행운’이다. 이 행운을 못잡으면 민족 간에 크나큰 불행이다. 두 정상이 약속한 것을 못 지키면 그 후과를 누가 원위치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 그로 인한 반작용의 여파는 감당하기에 너무 클 것이다”고 밝혔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구호대로 아직 ‘총대 위의 평화’다. 올브라이트는 “많은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평양은 아름답고 인상적인 도시다. 풍경과 기념물이 좋고 집단체조도 웅장하고 경이로웠다”고 방북 소감을 밝혔다. 올브라이트의 말대로 평양시는 일종의 ‘건축 전시장’이라고 부를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운 기념비적인 건물이 많다. 그러나 돌로 지은 건물이 많아 더러는 이국적이기까지 한 웅장한 잿빛 건물과 도로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입성은 ‘국방색’ 일색이다. 평양을 상징하는 회색건물과 국방색 입성은 밤이면 무채색으로 잠긴다. 어둠이 내리면 빛(색)은 수령과 당의 상징물에만 쏘여진다.

△평화를 원하는 우리의 ‘가난한 이웃’△

사실 북한 어느 지역을 가든 ‘병영국가’임을 실감하게 된다. 평양 시내에서든 시외에서든 심지어 관광휴양지 어디를 가든 군인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묘향산에서 상원암을 가는 길에도 무장 군인들이 경비를 서며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했다.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군사시설이 아닌 휴양지인데 왜 군인들이 지키냐고. 답변은 간단했다. ‘국가적 명소이기 때문에 총검으로 지키는 것’이란다.

주민들 또한 군이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군인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이질감은 엿볼 수 없었다. 그것은 뒤집어보면 ‘외세의 침탈’에 대한 근심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그만큼 무력을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총대 위에 평화 있다’는 선군영도(先軍領導)의 구호는 상당 부분 대내외적인 방어기제에서 나온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집권당인 조선노동당의 총비서이자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원수)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군에 복무한 경력은 없다. 그러나 주민들은 다들 김위원장을 ‘장군님’이라고 부른다. 국제친선전람관의 종합선물관에 가면 한 해외동포가 선물한 ‘3대 장군 위인상’이 걸려 있다. 3대 장군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김정숙(생모)이다. ‘장군님’의 의미를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이해할 수가 없다.

북한 인민들은 이 ‘장군님’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다고 말한다. ‘고난의 행군’ 기간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자료로 접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평양 시민들은 식량난을 99년까지 2∼3년간 겪었다. 물론 지방은 더했다. 평양특별시는 그래도 식량난이 지방보다는 늦게 와 함께 끝났으니 그 기간이 훨씬 더 짧았다. 그들은 내게 물었다. “기자 선생님은 혹시 대용식품이나 풀죽을 드셔본 적이 있습니까?” 말이 ‘대용식품’이지 이것은 벼의 열매(쌀) 대신에 줄기와 뿌리를 갈아서 먹는 것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 위궤양, 소화불량 증세를 앓아야 했다.

호텔의 한 여성 복무원은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식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쌀 배급은 몇 달 전의 일이다”고 털어놓았다. 이 여성의 세대주(남편)는 평양방어사령부에 근무(출퇴근)하는 계급이 중좌(대위)인 군관이었다. 군인가족들도 똑같이 굶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원 식량의 군량미 전용(轉用) 논란은 한가하고 무의미한 것이었다. 기자가 본 평양 시민의 3분의 1은 군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접한 생활상은 대부분 ‘그때를 아십니까’류의 방송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60∼70년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국제호텔의 위생실(화장실)에 휴지가 없었을 때 당혹감을 느끼고, 시내 공중전화에 줄지어 늘어선 평양 시민들을 볼 때 안타까움을 가졌지만 돌이켜보면 남쪽의 공중 화장실에 휴지가 풍족하고 집집마다 전화가 놓인 것은 불과 10년 어간의 일이다. 또 남쪽에서는 발에 차이는 것이 휴대폰이지만 아침이면 공동 화장실이나 공중전화를 이용하느라 줄을 서는 것이 얼마 전까지 서울의 달동네 풍경이 아니었던가.

가난한 사람은 부자 동네에 살 수 있어도 부자는 달동네에 못 산다는 얘기가 있다. 부자들이 느끼는 위화감과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 가난한 이웃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한 이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북한은 우리의 가난한 이웃일 뿐이다. 다만 ‘집단적인 가난’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그들이 평화를 원하고 있다. 평화(平和)는 그 본뜻이 그렇듯, 벼(禾)를 사람들 입(口)에 고루 나눌(平) 때 오는 것이다. 棟

평양=글·사진 김 당 기자 dangk@donga.com

▲열린 문틈, 바깥소식에 갈증▲
만나는 사람마다 남한에 대한 호기심…'통일강성대국'기대와 열망

해외 어디를 가든 여행하려는 나라의 국적기를 타면 맨 먼저 접하는 것이 비행기 승무원이다. 북한의 국적기는 고려항공(전 조선민항)인데 베이징-평양을 오가는 비행기(TU-154B)에 탄 여성 승무원은 5명이었다. 서울-베이징을 오가는 제트여객기(보잉 747)에 견주면 단출한 식구다. 하긴 기내의 중앙통로를 중심으로 좌석이 앞뒤로 24열이고 좌우로 3개씩(일반석)뿐이니 승객수도 130명에 불과하다.

평양 시내를 가로지르는 대동강의 하중도인 양각도에 ‘양의 뿔’처럼 삼각형으로 높이 선 호텔이 양각도국제호텔이다. 아침은 대개 호텔에서 먹었는데 미국식 조찬으로 죽과 달걀 프라이를 곁들인 토스트, 그리고 커피가 나온다. 남조선 기자를 처음 접한다(많은 남한 기자들이 각종 남북회담을 수행 취재하러 평양에 갔지만 대개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고려호텔에 묵었음)는 복무원들은 아침을 특히 적게 먹는 기자가 무척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한 사흘 지나자 낯을 익힌 복무원이나 의례원들은 기자에게 “기자 선생님은 사업을 참 효율적으로 성과 있게 하십니다”고 말을 건넸다. 다른 사람들보다 적게 먹고 일은 똑같이 하니 경제적인 인간이라는 유머였다.

우스갯소리로 배를 ‘인격’이라고도 하지만 평양에서는 확실히 인격이 나온 체격 좋은 사내를 만나기가 어렵다. 거개가 단단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는데 이는 지난 3년여의 ‘고난의 행군’과, 차를 타기보다는 걷는 것이 일상화된 생활상을 반영한 것처럼 보였다. 주체사상탑을 참관할 때 여성해설원은 탑 주변의 각종 군상 조각들을 소개하며 그 중에서 농민군상의 크기가 최대라고 했다. 해설원은 그만큼 먹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김일성 주석이 의식주(衣食住)라는 용어를 식의주(食衣住)로 고쳐 부른 것도 그런 연유라고 설명했다.

7박8일 일정의 대부분을 평양 시내에서 체류했지만 묘향산과 단군릉에 갈 때는 교외의 가을걷이 풍경을 살펴볼 수 있었다. 추수가 대부분 끝난 탓도 있지만 아직 벼가 서있는 논에서도 대규모 기계농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거개가 5∼10명 단위로 손으로 추수를 했고 트랙터는 아주 가끔 보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는 가끔 이삭줍기를 하는 주민들도 보였다.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에너지난과 식량난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평양의 기점인 김일성 광장에서 묘향산까지의 거리는 136km인데 왕복 4차선 고속도로에서 마주치는 차량은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역시 심각한 에너지난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시내에서 교외로 갈수록 우리 일행이 탄 벤츠 승용차와 주민들의 남루한 입성이 부조화를 연출했다. 벤츠가 등짐과 배낭을 멘 사람들이 끊임없이 걸어가는 도로를 시속 100km 이상으로 쌩쌩 달리는 속도의 부조화 속에서 차창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구호는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다”였다.

△한적한 거리, 이삭줍기 등 에너지-식량난 여전△

그들은 마치 내세를 위해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는 길 험해도 웃으며 살자’ ‘미래를 위해 살자’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무조건 따른다’등과 같은 구호들이 바로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그들의 정신력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한국 축구가 투지만으로 국제 무대에서 경쟁할 수 없듯이 이들 또한 정치-사상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정신력만으로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평양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2층버스는 어쩌면 그런 고민과 변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2층버스는 평양 당국이 명절(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해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북한 당국은 지난 6월 중국에서 2층버스를 생산하는 업체로 유명한 남경금릉쌍객공사(南京金陵雙客公司)로부터 2대를 구매해 시험 운행한 뒤 지난 9월 이 회사로부터 2층버스 100대와 단층버스 200대를 구매했다. 당 창건 55주년 기념일(10월10일)을 계기로 울긋불긋한 색칠을 한 차체에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비정치적인 구호를 옆구리에 달고 광복-통일거리를 달리는 2층버스는 평양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7박8일 동안 둘러본 평양 시내에는 단독주택보다 아파트가 더 많아 보였다. 평양의 대표적인 아파트촌은 89년 청년학생축전(13차)을 계기로 만경대구역에 건설한 3만 세대와 92년 낙랑구역의 10차선 통일거리 주변에 건설한 2만 세대다. 지은 지 10년 어간인 이 아파트들은 비교적 튼튼해 보였다. 그래서 참 잘 지었다고 운전사에게 인사를 건네자 “이만하면 세계적 수준 아닙니까”고 반문했다.

일반 가정을 들러볼 기회는 없었지만 김장김치를 보존하는 법을 통해 아파트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북한은 일찍이 가사일을 공장화해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김장도 그중 하나다. 평양 시내에서는 김치라는 글씨를 쓴 탑차를 가끔 볼 수 있다. 이것은 각 구역마다 있는 김치공장에서 아파트 세대들에 한해 공장김치를 배급하는 차량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공장김치는 손맛으로 내는 가정김치보다 맛이 덜해 일반 가정에서는 다들 제집 김치를 조금씩 담가 먹는다고 한다.

평양의 아파트에서는 아파트 베란다에 판자를 깔고 그 위에 김장독을 올려놓고 신문지를 물에 적셔 다섯 겹 정도 붙여 김장김치를 보관한다. 독이 얼지도 않고 적당히 온도를 유지해 김치가 시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김치독을 넣을 만한 크기로 나무상자를 짜 그 안에 김치독을 넣고 상자 안을 겨로 채워 놓는다. 역시 김치가 얼지도 시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아파트에 사는 평양 시민들은 다들 이렇게 집에서 김장김치를 담가 먹는다며 서울 가서 해보라고 권했다.

북한 주민들은 기자가 북한 체제에 대해 갖는 호기심보다 더 큰 호기심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서 온 기자임을 밝혀도 피하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우연히 말문을 트게 된 호텔의 여성 복무원들은 두 시간 남짓 대화를 가진 뒤 기자가 자리를 뜨려 하자 오히려 “기자 선생님, 남조선 얘기 좀 더 해주고 가세요”라며 옷소매를 잡기도 했다. 아이 엄마인 이들은 남한이 북한이나 중국보다 더 잘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점을 부러워했다. 또 기자가 전한 남한의 생활상을 행여 놓칠세라 호기심 많은 소녀들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 받은 것을 아느냐고 묻자 십중팔구는 모르고 있었다. 북한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은 탓이었다. 노벨상 소식을 전하자 “두 분이 함께 받아야 하는데 혼자만 받아 장군님이 안타깝다”는 반응도 있었고 “노벨상을 받아도 김대중 대통령이 변치 말고 남북관계가 잘 되기를 바란다”는 반응도 있었다. 김대통령에 대한 일반 주민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기대는 6·15 공동선언에 대한 기대와 통일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장군님이 서울 가시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지만 ‘미국놈들’ 때문에 (신변안전이) 걱정된다”는 여성도 있었다.

△정치 구호 뺀 울긋불긋한 ‘2층버스’는 변화의 상징△

기자가 만난 일반 주민들은 거개가 통일이 안 되는 이유를 미국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의 주적은 남한이 아닌 미국인데 왜 남한은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다. 왜곡 과장된 현실 인식도 적지 않았다. 평양 시민들은 광주에서 수천수만명이 학살당했으며, 서울에서는 미군범죄가 끊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기자는 “주한미군 범죄가 문제되고 있지만 선량한 미군도 많다”며 “남한이 미제의 식민지이고 통일이 안 되는 이유도 미국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는 취지로 진지하게 설명하자 놀라면서도 거짓말은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곤혹스런 질문은 “남조선에서도 우리 장군님을 우러러 받든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물을 때였다. 기자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을 얘기하면 그렇지 않다. 그 누가 되었든 북한에서처럼 우러러 받드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이미지는 많이 좋아졌다.” 그러자 처음에는 깜짝 놀라다가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북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대화가 통했다. 경제강국 남한과 정치-사상강국 북한이 힘을 합치면 ‘통일 강성대국’을 이룰 수 있다는 그들의 낙관적 전망이 오히려 부담스러울 만큼 그들의 통일 열망과 기대는 크고 강했다.

▲꾸미지 않아도 고운 평양 여성들▲
수수한 옷차림 순박한 자연미인 활보…버버리코트 멋쟁이 눈길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같은 언어를 쓰는 것만큼 친근감을 갖게 하는 요소를 찾기는 드물다. 55년 동안 남북이 서로 갈라져 사는 동안 언어의 동질성이 사라졌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나 평양에서 7박8일 동안 체류하면서 아직도 남북한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음을 확인했다. 호상(상호) 발족(족발)처럼 뜻은 같으나 음절이 바뀐 단어도 있고, 오징어(낙지) 낙지(오징어)처럼 뜻이 서로 뒤바뀐 단어도 있으나 뜻과 음이 서로 통하지 않는 경우는 생각처럼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반가운 것은 남남북녀라는 한자말이었다. 북한에서는 한자말을 잘 쓰지 않지만 이 말은 널리 통용되는 것처럼 보였다. ‘남남’인 기자가 북쪽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이었다. 평양에서 만난 호기심 많은 여성들은 대개 “남쪽 남성들은 다 기자 선생님처럼 잘 생겼냐”고 분에 넘치는 인사말을 건네곤 했다. 그런 ‘호감’ 덕분에 일상생활에 대한 대화는 자연스레 남자들보다는 여성들과 나눌 기회가 더 많았다.

익히 아는 바이지만 북쪽 남자들은 남한 남자에 비해 까무잡잡한 얼굴이 더 많아 보였다. 도회지보다는 농촌에 피부가 검게 그을린 사람이 많은 것이나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 반대였다. 북한 여성들이 남한의 도시 여성보다 더 백옥처럼 하얗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화장을 안해 피부가 살아 숨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안내·해설원 ‘여성은 꽃이라네’ 노래가사 실감△

북한에는 ‘일 잘하는 처녀가 제일 곱대요’라는 노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유행하는 노래는 ‘여성은 꽃이라네’였다. 예로부터 평양에는 미인이 많다고 했는데 곁눈질로 언뜻 보기에도 ‘꽃보다 더 귀한 여인’들이 적지 않았다. 입성은 가꾸거나 꾸미지 않은 평상복 차림이든 치마 길이가 발목 위로 껑충 올라오는 개량한복 차림이든, 모두 수수하고 표정이 맑아 보였다. 인상적인 것은 머플러를 두른 버버리코트 차림의 멋쟁이 여성이 예상보다 더 많았다는 점이다.

평양에는 수많은 기념비적 건물이 있지만 그런 건물을 둘러보거나 참관할 때마다 만나는 이가 바로 여성 안내원이나 해설원들이다. 대개는 대학을 나온 듯한 인텔리 기혼 여성인데 교양 있는 말씨에 일사천리로 나오는 해설이 무척 인상적이다.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에서 만난 50대 초반의 해설원, 개선문에서 만난 키 작은 40대 해설원,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을 안내한 20대 후반의 안내원 등이 모두 그랬다.

이들 대부분은 한복 입성이었고 추운 날에는 살짝 코트를 걸치기도 했으나 주체사상탑 해설원만은 머플러가 나부끼는 버버리코트 차림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북에서는 보기 드물게 안경을 낀, 차가운 느낌을 주는 인상이면서도 부드러운 미소가 지성미를 풍겼다. 해설 경력을 묻자 “주체탑 완공과 함께 시작했다”고 한다. 완공 시점이 그쪽 연도로 ‘주체 71년’(1982년)이니 19년 동안 한 곳에서 안내와 해설을 해온 셈이다.

그런 경력에 걸맞게 그녀는 지난 8월 당시 박지원 문화부 장관과 언론사 사장단을 안내했다고 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인사가 누구냐고 묻자 선뜻 박지원 장관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종합대(김일성종합대)에서 조선문학을 전공한 이 인텔리 여성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손녀딸이었다.

평양에서 승용차로 두 시간 거리인 묘향산(향산이라고도 함)의 국제친선전람관 안내원 중에는 순박한 자연 미인들이 더 많았다. 기자를 안내한 리종임 안내원(28)에 따르면,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외국에서 받은 선물을 전시해 놓은 이 전람관의 여성 안내원은 30명쯤 된다고 했다. 김일성 주석의 밀랍상이 안치된 곳이어서 그런지 안내원들은 절도가 있어 보였고 일이 없는 안내원들은 건물 한쪽에 다소곳이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역시 지난 8월 언론사 방북 대표단을 안내한 리종임 해설원은 이곳이 일제 강점기부터 금광으로 유명했던 곳이나 김주석이 ‘금과 인민의 휴식을 바꿀 수 없다’며 금광 개발을 반대하고 인민의 휴양지로 가꿀 것을 지시해 국제친선전람관도 여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했다. 수십만 점의 진귀한 선물이 전시된 전람관을 대충 관람한 뒤 안내원이 “통일을 위해 좋은 글을 남겨 달라”며 감상문을 청했다. 그래서 김주석이 이곳에 와 남긴 ‘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구를 흉내내 ‘향산 가을날에’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을 남겼다.

만수대를 찾기 전에 ‘대동강 꽃상점’에 들렀다. 북쪽에서는 생화보다는 조화가 더 흔해 보였다. 생화가 드문 이유를 묻자 수줍음을 무척이나 많이 타는 김금순-리현희 판매원은 기념일을 앞두고는 생화를 많이 찾지만 평시에는 조화를 많이 찾는다고 했다. 평양 남자들은 애인에게 생화를 선물로 주는데 결혼을 앞둔 연인에게는 주로 순백색의 화관(조화)을 건네준다고 한다. 한복을 입은 이곳 신부들이 부케 대신에 흰꽃 화관을 머리에 얹고 결혼식을 올리기 때문이란다 .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환대 … 때묻지 않은 女心△

김주석의 동상이 서 있는 만수대 언덕은 온통 신랑신부 천지였다. 안내원에 따르면 평양 시민들은 결혼식을 올릴 때 이곳에 와서 헌화와 절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나이는 신랑이 25~27세쯤이고 신부는 23~25세쯤인데 남한보다 조혼이지만 대개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더러는 학교 공부를 마친 학생들이 동상 앞에서 절을 하며 ‘어버이’한테 감사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만수대의 김일성 동상은 평양 시민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장소였다.

평양에는 신호등이 없다. 대신 여성 교통안전원이 ‘인간신호등’ 역할을 한다. 평양 남성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교통안전원은 ‘평양의 명물’이지만 사진을 찍기는 힘들었다. 교차로의 한복판에 서 있는 데다 차들이 다가올 때마다 고개를 좌우전후로 돌리는 바람에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는 눈을 맞추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대개 20~30대의 여성으로 한시간마다 교대근무를 한다고 했다. 기자의 호기심으로 평양에서 눈독을 들인 여성 중 대화를 나눠 보지 못한 유일한 여성이 교통안전원이었다.

안내원은 평양의 여성 교통안전원을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교통단속과 같은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때때로 완력이 필요하지만 꽃다운 여성의 손끝 하나로 수많은 남성 운전자들이 순응하는 것은 제도가 부여한 권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농촌의 ‘영예군인’에게 시집가는 도시 처녀들도 마찬가지다. 북한에서는 전상을 당한 상이군인을 영예군인이라고 한다. 대학 나온 도시 처녀들이 시골의 영예군인에게 시집가는 것을 영예로 아는 것은 남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제도의 우월성’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같은 설명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기도 했다.

호텔에서 접한 복무원들도 싹싹하고 친절했다. 하루는 기자가 묵었던 방 관리원 여성이 벗어둔 양말을 빨아 놓았기에 관례대로 ‘외화와 바꾼 돈표’ 10원(약 5달러)을 놓고 나갔는데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다음날 방 청소하러 들어온 관리원에게 감사를 표하고 연유를 묻자 “일 없습니다. 돈 받자고 한 일이 아니고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인데, 내 집처럼 생각하고 속옷도 내놓으십시오”라고 했다. 평양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 만난 김경선 의례원은 친절하게도 기자에게 안내를 자처하며 “통일이 되면 인천에서 배를 타고 남포 갑문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 옥류관 앞에서 내려 연회를 즐기고 가십시오”라고 했다. 결코 허투루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제도와 이념의 우월성'을 떠나서 북쪽 여성들이 때묻지 않고 순박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7박8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통일이 되면 이 순박한 평양 여성들이 남쪽 남정네들에게 홀리지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안내원과 운전수에게 “북쪽 여자들이 남쪽 남자들을 선망하는데 통일되면 북쪽 남자들은 어떡하냐”고 슬쩍 농담을 건넸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남쪽이 인구가 더 많은데 무슨 걱정입네까, 우리야 남쪽 여자하고 결혼하면 되기요.”

평양=글·사진 김 당 기자 da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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