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시대]기업 살리되 '재벌시스템'은 해체

  • 입력 2002년 12월 20일 19시 27분


▼경제 어떻게 되나▼

“재벌은 재벌이고, 대기업은 대기업이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가 20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밝힌 이 한마디는 노 당선자의 기업관을 압축하고 있다. 시장원리를 살려 기업의 활력은 살려나가겠지만 ‘재벌 시스템’은 손대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지금까지 그가 공 사석에서 밝혀온 말을 종합해보면 무게는 후자 쪽에 좀 더 실려 있다.

노 당선자는 선거기간 중 ‘골고루 잘 사는 튼튼한 경제’를 내걸었다. ‘성장’과 ‘분배’를 조화한다는 뜻이지만 상대적으로 ‘분배’를 중시한다는 것이 경제전문가들의 대체적 시각이다. ‘튼튼한 경제’를 만들기 위한 선결과제를 규제완화보다 대기업 총수의 지분구조 개편에 두고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노 당선자의 경제정책 기조〓노 당선자는 연간 7%의 경제성장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여성인력을 경제인구로 적극 활용하고 불합리한 경제시스템을 바꿔 7%를 달성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노 당선자 본인이나 그를 도와온 경제브레인들의 성향을 감안하면 성장률 자체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많다. 현실적으로 7% 성장은 쉽지도 않다.

그보다는 중소기업과 근로자들의 세금부담을 줄이는 등 서민과 중산층 위주의 정책이 잇따라 제시될 가능성이 높다. 또 노 당선자가 비정규직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만큼 ‘동일노동 동일임금’ 정책도 추진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기업 정책〓노 당선자의 경제정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재벌개혁’이다.

그의 경제브레인 가운데 한 명인 민주당 김효석(金孝錫) 제2정조위원장은 20일 본보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해 이후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이 후퇴했다”며 “집단소송제를 도입해 기업의 책임경영제를 정착시키겠다”고 밝혔다.

이 부분은 노 당선자와 브레인들이 여러 차례 토론을 거치면서 확고하게 정립된 당선자의 견해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사외이사를 더 늘린다는 정책 및 출자총액제한제를 현재대로 유지한다는 정책과 함께 산업계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손병두(孫炳斗)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재벌개혁’ 문제와 관련해 “지난 5년간 충분히 개혁됐으며 오히려 지나치게 개혁된 부분이 있다”면서 “노 당선자의 의지는 기업 현실과 다소 시각차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가 임기 초 대기업 정책에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 경우 재계와의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넘어야 할 산 많아〓노 당선자 앞에는 집권 후 풀어야 할 경제현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채(內債) 위기’라는 말까지 나온 가계부채 및 국가채무 급증, 조흥은행 하이닉스반도체 등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 및 기업 매각,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등 하나같이 쉽지 않다.

게다가 노 당선자는 경기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 임기를 시작해야 하는 어려움도 안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에 대한 ‘개혁의 칼’은 자칫 경제계를 위축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대기업을 ‘개혁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다가는 국내 기업의 해외탈출에 따른 산업공동화(空洞化)를 가속화할 가능성도 있다.

▽눈앞에 있는 현안〓대선 이후로 미뤘던 경제현안은 앞으로 가속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조흥은행 매각을 위한 우선협상자 대상 선정, 하이닉스 처리 문제 등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주5일 근무제도 공약대로 조기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계부채 대책 △재정악화 대책 △한전 자회사 매각 등 공기업 민영화 △경기 활성화는 노 당선자의 의지만으로 쉽게 풀리기 어려운 문제로 꼽힌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경제관련 주요 공약
분야주요 내용
거시경제-국민총생산(GDP) 연평균 7%성장 달성 -여성과 고령자의 경제활동 참가 적극 유도-동북아·북방특수 적극 개척 -매년 50만개씩 5년간 250만개 일자리 창출-집값·전월세 안정 최우선 추진 -서민생활과 밀접한 공공요금 인상 최대한 억제
대기업정책-인허가 등 기업관련 규제 전반적으로 재검토 -재벌계열 금융기관에 대한 ‘계열분리 청구제’ 도입-상속·증여세에 대한 ‘완전 포괄과세’도입 -재벌금융회사의 계열사에 대한 주식 의결권행사 엄격 제한-출자총액제한, 계열회사간 상호출자, 채무보증 금지 등 대기업 집단에 대한 규제 지속추진
금융 정책-한국은행 총재 임기보장 -‘개인신용 갱생프로그램’ 활성화 -지속적인 금융개혁 -공적자금 투입 금융기관 조기 민영화 -연금, 기금 등의 주식투자 규제 완화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도입
조세정책-택시운임에 대한 부가가치세 50%경감 3년 연장 -중소기업 최저한세율 현행 12%에서 10%로 인하 -연소득 3000만원 이하 봉급생활자의 근로소득세 공제 확대-중소기업의 생산성향상 시설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현행 7%에서 10%로 확대

김광현기자 kkh@donga.com

▼당선회견 경제계 반응▼

국내 주요 대기업과 경제단체 관계자들은 20일 TV를 통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의 기자회견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이들은 특히 그동안 대기업에 대한 시각이 비교적 차갑다는 평가를 받아온 노 당선자가 기업정책과 관련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경제계 인사들은 “경제성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업의 활력을 키우고 시장경제 원칙을 지키겠다”는 노 당선자의 발언에 일단 안도했다. 그러나 이어 “대기업 정책과 재벌 정책에 분명한 선을 긋겠다”고 하자 긴장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삼성의 고위 임원은 “지금 대기업들은 경영 투명성이 강화되는 등 과거 ‘재벌’의 행태는 거의 사라졌다”면서 “끊임없는 구조조정 노력을 통해 세계적 경쟁력을 키운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에서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말했다.

LG의 한 임원도 “경제 정책의 기조는 지금 정부와 크게 달라지지 않기를 기대한다”면서 “시장의 감시 기능이 커졌고 기업간 경쟁도 심해져 비합리적인 경영체제를 유지하는 기업은 자연히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통적으로 노동조합의 입김이 센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일부 대규모 노동조합은 노동 유연성이 경직돼있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노 당선자의 발언에 고무된 모습도 보였다.

각 기업은 노 당선자가 실제로 대통령 업무를 시작하면 기업의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한편 경제계 원로인 남덕우(南悳祐·전 국무총리) 산학협동재단이사장은 이날 전경련 최고경영자 월례 조찬회에서 “많은 기업인이 노 당선자에 대해 반(反)기업적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지만 서민 출신일수록 현실 감각을 익히면 친(親)기업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말 없는 국민 다수가 경제 안정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행정수도 이전 어떻게▼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의 핵심 공약 가운데 하나인 ‘행정수도 이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노 당선자는 대통령 임기 시작 1년 이내에 후보지를 고르고 2년 이내에 토지 매입 및 보상을 끝낸 뒤 임기 중에 본공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눈에 띄는 조치가 뒤따를 전망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분석도 만만찮다.

민주당에 따르면 새 행정수도 후보지는 △군사분계선에서 150㎞ 이상 떨어지되 △서울에서 지리적으로 멀지 않고 △청주국제공항과 경부 및 호남고속철도에 인접해 있으며 △고속도로를 통해 전국으로 쉽게 오갈 수 있는 지역이 유력하다.

이런 조건을 갖춘 곳으로는 1970년대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행정수도 후보지로 거론됐던 장기지구(충남 연기군과 공주시 장기면 일부) 천원지구(충남 천안시와 연기군 및 충북 청원군 일대) 논산지구(충남 논산과 공주, 부여 일부)가 있다.

또 내년 말 개통될 경부고속철도 노선상에 있는 아산신도시, 오송·오창과학단지도 검토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민주당은 새 행정수도의 수용인구를 50만∼100만명 수준으로 책정해 놓고 있다. 인구 40만명 규모의 경기 분당신도시가 600만평인 점을 감안할 때 행정수도의 규모는 1000만평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역대 정권에서도 수도 이전 문제가 몇 차례 거론됐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고 행정수도 이전은 신도시 건설과는 차원이 다른 복합적인 ‘메가톤급 사안’이어서 선결과제가 적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국회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수도권 공동화(空洞化)와 막대한 이전 비용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고 서울시 등 수도권 지자체도 반대하고 있다.

또 수도 이전의 장단점이나 파급효과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도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이번 대선에서 당초 예상보다는 수도권 주민들의 ‘표심(票心)’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되지만 막상 본격 거론될 경우 이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힐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행정수도 이전 구상 방안
구분주요내용
사업 규모·인구 50만∼100만명 수용 규모
입지 조건△서울에서 근접 △청주국제공항, 고속철도, 고속도로 등을 이용하기 쉬운 곳△토지 구입 및 인프라 건설비용 적게 드는 곳 △개발잠재력 높은 곳△자연재해 대비하기 쉽고 국가안보상 안전한 곳
추진 일정·후보지 선정위원회 구성→1년간 현장조사 통해 후보지 선정→2년간 토지 보상 및 매입→3년간 부지 조성 및 인프라 건설→4년간 청사 건축 및 이전
사업비 및 조달방안·4.5조원〓수도권 공공청사 매각대금 및 개발토지의 매각 이익으로 충당

황재성기자 jsonhng@donga.com

▼경제 브레인-인맥▼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의 경제 브레인에는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포진해 있다. 그러나 공직이나 기업에서 풍부한 실무 경험을 쌓은 인재는 드물다.

이 때문에 경제 전문가들은 물론 노 당선자의 핵심 참모들도 “지연과 학연, 논공행상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에 따른 ‘탕평인사’를 해야 제대로 된 ‘경제팀’을 짤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경제 브레인〓민주당 내에서는 정세균(丁世均) 경제특보와 김효석(金孝錫) 제2정책조정위원장이 공약 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정책자문단인 국가비전21위원회를 이끌면서 선거대책위원회 정책기획위원장을 겸임한 정 특보는 경제분야 정책개발을 총괄 지휘했다. 김 위원장은 정부와 정책조율 창구를 맡으면서 각종 정책토론회에서 노 당선자의 경제분야 ‘입’ 역할을 했다.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과 재정경제부 및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강봉균(康奉均) 민주당 의원과 경제기자 출신인 이병완(李炳浣)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도 경제 공약을 만들고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다.

비공식라인에서는 노 당선자의 ‘경제 가정교사’인 유종일(柳鍾一)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최측근으로 꼽힌다. 그는 지난해 봄부터 최근까지 주 1회꼴로 노 당선자에게 경제 전반에 대해 ‘강의와 토론’을 했다. 유종근(柳鍾根) 전 전라북도 지사의 친동생으로 분배 및 정부역할을 비교적 중시한다는 평.

이정우 경북대 교수, 김대환 인하대 교수, 이진순 숭실대 교수, 윤원배 숙명여대 교수, 윤영민 한양대 교수, 신봉호 서울시립대 교수, 장하원 KDI 연구위원, 임원혁 KDI연구위원, 이동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 김정훈 조세연구원 연구위원도 직간접적으로 노 당선자에게 공약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이밖에 김종인(金鍾仁)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과 최수병(崔洙秉) 전 한국전력 사장도 많은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금융계 인맥〓노 당선자가 졸업한 부산상고 출신들이 거론되지만 중량급 인사들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노 당선자의 고교 1년 선배인 이학수(李鶴洙)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이 본부장이 삼성화재 대표이던 92∼95년 노 당선자는 이 회사 법률고문을 맡은 인연이 있다. 당시는 노 당선자가 통합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해 정치적으로 어렵던 시절이었다.

석유화학업계의 원로인 황두열 SK㈜ 부회장과 윤청목 제일엔지니어링 대표, 박득표 포스코건설 회장, 박안식 대창단조 회장도 부산상고 출신이다.

금융계에서 노 당선자와 가장 친한 인사로는 이충정 제일은행 지점장이 꼽힌다.

한국은행 이성태 부총재보, 증권거래소 옥치장 감사, 김대평 금융감독원 비은행검사국장, 김지완 부국증권 사장, 안시환 안진회계법인 부회장, 미국계 퍼스트유니온내쇼날뱅크 김충곤 서울지점장도 부산상고 출신이다.

노 당선자의 처남인 권기문씨는 부산상고 동문으로 현재 우리은행 부산 범천동 지점장으로 일하고 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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