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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경임 논설위원입니다.

woohaha@donga.com

취재분야

2026-05-30~2026-06-29
칼럼94%
문학/출판3%
사건·범죄3%
  • “한 번도 너를 포기한 적 없었다”…희귀병 딸 안고 태평양 건넌 아빠

    2014년 10월 저자 김윤환 씨의 딸 채은이가 태어났다. 이듬해 봄, 조금 느린 아이인 줄 알았던 채은이가 척수성 근위축증(SMA)이라는 희귀난치성 질환 진단을 받는다. 근육이 점점 위축되다가 자력으로 숨을 쉬기도, 음식물을 삼키기도 어려워지는 병이다. 논술 일타 강사로 바쁘게 살던 저자는 ‘왜 우리인가’를 물으며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아빠는 딸을 포기할 수 없었다. 국내에선 치료법이 없었다. 밤마다 의학 논문을 뒤지고 정보를 찾았다. 미국에서 진행되는 신약 임상시험을 발견했고 UCLA 의료진에 직접 이메일을 보내 임상시험 참여를 타진했다. 그리고 2015년 8월 채은이를 안고 태평양을 건넜다. 낯선 곳에서 채은이는 고통스러운 투약을 견뎌냈다. 휠체어를 타야 하지만 채은이는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다. 아빠를 한 번 부르게 해달라, 위루관(위에 약물이나 영양제를 주입하는 튜브관) 없이 식사하게 해달라, 호흡기 없이 숨 쉬게 해달라는 저자의 간절한 기도는 이뤄진 것이다. ‘기적처럼, 채은이’는 1년간의 임상시험 참여 과정을 세세하게 담고 있다. 그런데 저자와 저자의 아내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발병 이전의 평온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투병 생활 속에서 가족 간의 사랑, 두려움을 다루는 태도를 얻었다. 그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고 한다. 김윤환 지음, 삼인, 1만9000원.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 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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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젊은 치매’

    2024년 영국에서 안드레 야르함이라는 22세 청년이 초로기 치매 진단을 받았다. 성격 변화와 언어 장애가 두드러지는 전두측두엽 치매였다. BBC 등에 따르면 영국에서 보고된 최연소 치매 환자다. 고교 시절 럭비와 축구를 즐기는 수다쟁이였던 그는 급격히 말수가 줄었고 나중엔 식사, 샤워도 혼자 할 수 없게 됐다. 치매는 노화에 따른 퇴행성 질환으로 알려졌지만, 야르함처럼 65세 이전에 발병하는 ‘젊은 치매’ 환자가 전체 치매 환자 10명 중 1명꼴이다. 2024년 기준으로 국내 초로기 치매 및 그 전 단계인 경도인지장애 환자는 10만3491명이다. ▷일반 치매와 65세 이전의 초로기 치매는 초기 증상이 다르다. 초로기 치매는 인지 기능보다 공간 인식이나 언어 기능이 먼저 손상된다. 길을 찾을 수 없고 운전에 지장이 생긴다. 침대, 의자 같은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말이 어눌해진다. 젊은 나이일수록 가족력의 영향이 크고 진행이 무척 빠르다. 이 때문에 조기 진단이 중요한데, 환자들은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 탓이려니 하고 무심코 넘기다가 뒤늦게 병원을 찾곤 한다. 정신 질환으로 오인되기도 쉽다. ▷암을 만성 질환처럼 관리할 만큼 의학이 발전했어도, 치매는 여전히 미궁에 빠진 난제다. 원인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마땅한 치료제도 나오지 않았다. 알츠하이머 치매는 신경세포에 축적된 ‘아밀로이드 베타’와 ‘타우’라는 독성 단백질이 뇌 기능을 손상한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는 이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독성 단백질을 제거하는 치료제는 치매 증상만 완화할 뿐 완치하지 못해 임상적 효과가 제한적이다. 영국인 야르함이 진단받은 전두측두엽 치매는 아예 치료제 자체가 없다. 치료될 희망이 없다는 것, 결국 기억을 잃고 남에게 의존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 젊을수록 받아들이기 힘들 수밖에 없다. ▷치매가 진행되면 초로기 치매 환자는 경제활동을 그만둬야 한다. 당장 생계가 어려워지므로 20, 30대 자녀에게 돌봄 부담이 전가된다. 이들 자녀가 학업, 취업, 연애, 결혼 등 응당 누려야 할 기회를 포기하고 부모를 돌보는 딱한 사연이 넘친다.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15∼34세 가족 돌봄 청년 약 10만 명 중 11.7%가 치매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간병에 가정이 무너지고 빈곤에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안타깝게도 초로기 치매 환자는 공적 돌봄에서 완전히 소외돼 있다. 초로기 치매 환자는 치매가 지적 장애로 인정되기 어려워 중증장애인 활동 지원에서 배제된다. 장기요양서비스는 치매 환자에게 제공되지만 신체가 건강하기 때문에 등급을 받기 쉽지 않다. 초로기 치매를 방치하면 가족 2, 3명이 경제활동에서 탈락하고 고립된다. 개인의 불운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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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참교육’

    참교육에 쓰이는 접두어 ‘참’은 ‘진정한’ ‘올바른’이란 뜻이다. 그래서 참교육은 입시 위주 경쟁 교육, 권위적인 학교 문화를 바꾸려는 교육 운동을 지칭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응징하고 인과응보를 구현한다는, 엉뚱한 뜻을 내포한 용어로 널리 쓰인다.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드라마 ‘참교육’도 그런 의미다. 교육부에 교권보호국이라는 조직이 신설돼 교권 침해, 학교폭력, 악성 민원 등 교육 부조리를 폭력까지 동원해 초법적으로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드라마는 학생 인권만 강조되면서 교권이 추락하고, 내 자식밖에 모르는 부모가 극성을 부리고, 범죄가 판을 치는 교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결코 드라마가 현실보다 더하지 않다”며 “울면서 봤다”는 교사들도 있다. ‘부모 찬스’로 면죄부를 받고 반성하지 않는 학교폭력 가해자, 뒷돈을 받고 시험지를 판 교사, 악성 민원으로 교사를 괴롭힌 학부모, 불법 도박과 마약 조직의 조직원이 된 학생 등 뉴스에서 접했던 익숙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삐뚤어지고 엇나간 학생들을 ‘참교육’하는 줄거리지만 사실 문제 학생 뒤에는 문제 어른이 있었다. 학폭을 무마시키는 국회의원 아빠와 그 앞에서 비굴하기 그지없는 교장, 정신과 약을 복용시키며 공부를 강요하는 엄마, 학생과의 갈등을 회피하기만 하는 교사 등 붕괴된 교실에선 ‘참어른’이 보이지 않는다. 교권보호국 감독관 ‘나화진’이 학폭에 시달리는 학생에게 “어른한테 얘기해”라고 타이르자 “얘기해도 소용없다”는 무력한 답이 돌아온다. 맞폭력, 사적 제재 같은 비교육적인 내용에도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건 나화진이라는 ‘참어른’이 나타나 힘없는 학생을 구하는 영웅 서사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가 신드롬을 일으키자 안민석 경기교육감 당선인이 교권보호국 신설을 제안했다. 해병대, 특전사 출신 교사들이 ‘나화진이 되겠다’고 연락을 해온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하지만 교육시민단체, 교원단체 등 교육계는 이를 두고 ‘교육의 사법화’ ‘교실의 신뢰 붕괴’를 가속화해서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우려한다. 교권보호국이라는 행정조직을 만들어 한 방에 풀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2023년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숨진 서이초 교사 사건 이후 교권 보호를 위한 대책이 줄줄이 나왔지만 교사들은 바뀐 것이 없다고 한다. 책임지는 어른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교육청에 미루고, 교육청은 학교에 미루고, 학교장은 교사에게 미룬다. 결국 교육 현장에 있는 교사들이 오롯이 감당할 몫이 된다. ‘참교육’을 연출한 홍종찬 감독은 “드라마의 본질적인 메시지는 좋은 어른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교권보호국이 신설된다 한들, 좋은 어른을 대체할 수는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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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고객 돈으로 고리 장사한 증권사

    초보 주식 투자자라면 주식을 매도한 대금을 거래일 이틀 뒤 받는다는 사실을 깜빡한 경험이 있을 터다. 휴일이라도 끼면 4, 5일 뒤에 매도 대금을 받기도 한다. 만약 올해 4월 30일에 주식을 팔았다면 노동절부터 어린이날까지 이어지는 ‘황금연휴’가 끝난 5월 6일에 매도 대금이 들어왔을 것이다. 부동산 계약일, 등록금 마감일처럼 꼭 그 돈을 써야 했다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때 이틀 뒤 들어올 매도 대금을 담보로 맡기고 증권사로부터 빌리는 것을 매도 대금 담보 대출이라고 한다. 결국 내 돈을 담보로 맡기고 다시 이자를 내고 빌리는 셈인데 증권사들이 매도 대금 담보 대출에 연율 10% 안팎의 고금리를 적용하고 있다. ▷증권사 10곳이 매도 대금 담보 대출로 벌어들인 이자 수익이 3년간 1805억 원이다. 주식시장이 활황이었던 올해 1∼4월에는 이자 수익으로 이미 약 536억 원을 벌어들였다. 물론 증권사는 정산이 끝나지 않은 매도 대금에는 손을 댈 수 없고, 자산을 빌려줘야 하므로 이자를 물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돈을 갚지 못할 가능성이 ‘0’에 가까운, 위험이라곤 없는 매도 대금 담보 대출에 두 자릿수 금리를 물릴 이유는 없다. ▷증권사가 이런 ‘땅 짚고 헤엄치는’ 대출 상품을 운용할 수 있는 건 국내 주식시장이 매매일(T)로부터 2영업일(T+2)에 거래대금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3월 ‘자본시장 안정과 정상화 간담회’에서 “오늘 주식을 팔았는데 돈은 왜 모레 주냐는 얘기가 있다”며 매도 대금 결제 주기를 단축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증권사들은 수조 원대 거래 내역을 대조하고, 증권사 간 주고받을 차익을 정산하는 일에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국거래소, 한국예탁결제원과 연계된 전산 시스템도 재설계해야 한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매도 대금 지급 기간을 이틀에서 하루로 줄였다. 인도는 2023년부터 이를 시행하고 있고 유럽은 내년 10월부터 도입하기로 했다. 결제 시스템이 기술적으로 발전하자 투자자의 편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개선된 것이다. 우리도 유럽과 보조를 맞춰 내년 하반기 도입을 준비한다고 한다. ▷거래 대금 지급 기간을 이틀로 유지하면 증권사는 촉박한 정산으로 생기는 위험, 인력과 인프라 투자 등 비용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개인 투자자는 매도 대금을 즉각 받지 못해 이자를 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증권사의 위험과 비용을 개인 투자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거래 대금 지급 기간 단축까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매도 대금을 고금리로 빌리는 일만큼은 없도록 서둘러 개선해야 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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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고1 자퇴생 1만 명

    한국방송통신고는 원래 생업에 바빠 정규 교육의 기회를 놓친, 주로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요즘 교실에 가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경기를 뛰면서 출석 관리를 해야 하는 골프, 승마, 탁구 등 운동선수들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학교를 자퇴하고 주중에는 수능 학원, 주말에는 방통고를 다니는 학생이 늘었다고 한다. 내신 따기가 비교적 쉽고, 수능 공부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처럼 이런 편법을 규제하는 지역도 있지만, 고교생 학업 중단 비율을 낮추기 위해 아예 방통고 전학을 권유하는 지역도 있다. ▷지난해 학업을 중단한 고1이 1만450명으로 처음으로 1만 명을 넘었다. 전체 일반고 학업 중단 고교생(1만8661명) 중 고1 비율이 56%까지 올랐다. 자퇴나 퇴학, 제적 등으로 인한 학업 중단자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였지만 지난해 유독 고1 숫자가 튀어 오른 건 내신 5등급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내신 9등급제가 5등급제로 바뀌면서 1등급(상위 10% 이내)에 들지 못하면 상위권 대학 진학이 어렵다고 보고 전략적으로 자퇴를 선택하는 것이다. ▷요즘 자퇴는 성적이 전교권일 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질병이나 부적응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선택만은 아니다. 지난해 고1 학업 중단자가 많은 고교는 경기 소재 비평준화 지역이나 서울 강남·서초구에 몰려 있었다. 내신 경쟁이 치열해 수시로 상위권 대학에 가기 힘들고, 부모가 월 수백만 원인 재수 학원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지역이다. 자퇴하고 수능 학원을 다니다 대학 정시에 도전하는 것이 새로운 입시 전략으로 통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대입에 성공하려면 내신 성적도 완벽하고, 수행평가도 척척 해내고, 수능 점수까지 우수한 완벽한 3박자 포트폴리오를 완성해야 한다. 부모도 예전 같으면 학교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며 자퇴를 말렸겠지만, 아이가 울면서 밤을 새우다 지쳐 수능 하나에만 집중하겠다고 하면 말릴 수가 없다고 한다. 자퇴생이 늘어나니 검정고시생도 증가했다. 지난해 수능 신청자 중 검정고시 출신은 최근 30년 동안 최다였다. ▷내신 한 번 삐끗했다고 자퇴까지 고민하는 현실은 대입을 위한 성적표 발급 기관으로 전락한 공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 대학처럼 과목을 선택해 듣는 고교학점제를 도입하고도 이와 맞지 않는 상대평가를 유지하면서 불협화음이 커졌다. 부모와 학생의 불안감을 포착한 사교육은 학교 자퇴와 수능 학원 입소를 부추긴다. 학생이 2, 3년 수능 학원을 다니면 수강생이 2, 3배 늘어나는 효과일 터다. 하지만 대학들이 정시 모집 인원을 줄이고 정시에 내신을 반영하는 등 입시 요강을 바꾸고 있다. ‘현실 회피성’ 자퇴가 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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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노인 자살 1위 나라에서 ‘존엄한 죽음’이란

    정부가 연명의료 중단 시기를 ‘임종기’에서 ‘말기’로 앞당기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한다. 연명의료법은 임종이 임박한 ‘임종기’와 수개월 내 사망이 예상되는 ‘말기’를 구분하고 있지만 임상적으로는 그 경계가 지극히 모호하다. 상식적으로 사망 시점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의사는 임종기를 엄격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제출한 10명 중 2명만 연명 중단의 뜻을 이루는 이유다. 법과 현실의 괴리를 해소해 제도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손질하는 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죽음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던 우리 사회가 죽음을 하나의 선택지로 수용하는 그 속도가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연명의료 중단 시기: 임종기→말기 연명의료 중단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환자가 직접 또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실행하면 존엄사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 요구가 분출하고 있는 만큼 연명의료 중단의 범위가 확대된 다음은 필연적으로 존엄사가 논의될 것이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성인 10명 중 8명이 의사 조력을 받는 적극적 존엄사 합법화에 찬성했다. 보통 회복이 불가능한 질병과 오랜 시간 싸울 때, 통증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질병이 고통만을 연장할 때 죽음을 선택할 정당성이 생긴다. 난치성 질환자나 말기 환자 상당수는 보통 요양병원에서 지내다 상태가 악화하면 병원 응급실로 간다. 응급실에서 요양병원으로 돌아오거나 중환자실로 옮겨진다. 생애 말기 병원을 전전하는 ‘뺑뺑이’를 반복하다 보면 질병 못지않은 고통을 겪게 된다. 병원은 죽음에 이르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단순히 연명의료 중단 시기를 확대한다고 병원에서 맞는 죽음의 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만약 호스피스 병상이 충분해 통증을 조절할 수 있다면, 인공호흡기로 강제호흡을 당하지 않는다면, 영양관을 주렁주렁 매달지 않고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다른 대안이 없어 선택한 존엄사가 온전히 자기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 집에서 죽는 것도 쉽지 않다. 해당 조사에서 좋은 죽음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통증 없는 죽음’이 1위로 꼽혔다. 이어 ‘가족이 병수발을 오래 하지 않는 것’, ‘가족의 간병 과정에서 경제적 부담이 줄어드는 것’ 순이었다. 배우자나 자식이 간병으로 지쳐가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면, 간병비 부담을 지우지 않아도 된다면…. 자율성을 잃고 가족에게 짐이 된 환자가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을까. 죽음의 질은 삶의 질에 달려 있다. 죽음의 과정에서 극심한 고통을 주는 의료, 가족을 저당 잡는 돌봄 등 제도의 실패를 그대로 두고 환자의 자기 결정권만 강조하는 지금의 논의가 불편하고 껄끄럽다. 존엄한 죽음의 뒷면, 존엄하지 않은 삶 더욱이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이 압도적 1위인 나라다. 2023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40.6명이다. 60대부터 연령이 높아질수록 자살률이 올라가는데 80대는 인구 10만 명당 59.4명, 80대 남자로 좁혀 보면 115.8명까지 치솟는다. 오래 살수록 자살률이 치솟는 건 빈곤, 질병, 고립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비극이다. 이를 방치한 채 가치 중립적이지도 않은 ‘존엄사’라는 용어로 죽을 권리만 강조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 연명의료 중단 확대도, 존엄사도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돌봄과 고통 없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의료가 전제돼야 한다. 정부가 존엄한 삶을 보장할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은 채 존엄한 죽음부터 얘기한다면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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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AI 시대엔 제너럴리스트

    앤스로픽 공동 창업자인 다니엘라 아모데이 사장은 스스로를 제너럴리스트로 부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미국 의회에서 일했고 금융 스타트업, 오픈AI를 거쳐 오빠 다리오 아모데이와 앤스로픽을 창업했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내 경력을 보면 뭘 잘하는 사람일까 싶을 것”이라며 “호기심을 갖고 여러 분야에 걸쳐 배우는 능력,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의지야말로 과소평가되는 자질”이라고 했다. 이는 그가 만난 재능 있는 인재들이 공통으로 가진 자질이기도 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KBS 다큐멘터리 ‘인재 전쟁 2’에 출연해 AGI(범용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인간 간의 지식 격차가 줄어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너럴리스트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AI와 공존할 수 있는 법과 제도 같은 시스템을 새로 설계해야 하는 미래 사회에선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무언가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없고가 큰 차이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20세기는 ‘한 우물만 파는’ 스페셜리스트의 시대였다. 1913년 미국에서 헨리 포드가 자동차 생산에 분업을 도입한 이래로 기업에선 전문성을 가진 스페셜리스트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학문 역시 같은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과학의 발달로 지식의 총량이 급증하자 학문은 쪼개지고 나뉘었다. 장기나 세포 단위로 전문의를 배출하는 현대 의학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변리사 등 각종 자격증의 위력도 막강했다. ▷스페셜리스트는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극도의 효율을 발휘한다. 하지만 AI 등장과 같은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큰 환경에선 제너럴리스트의 적응력이 월등하다. 사실 인류 역사상 스페셜리스트가 대접받던 시기는 매우 짧다. 철학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과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아이작 뉴턴까지 문명사를 바꾼 거인들은 본래 제너럴리스트였다. 산업혁명 이후 분업이 가속하고 지식이 폭증하면서 ‘융합형’ 인재가 탄생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육은 AI와 공존하는 법에 취약한 스페셜리스트만 길러내고 있다. 지식을 달달 외워 객관식 문제를 풀고, 함정을 피해 정답을 고르는 방법을 배운다. 인간의 지식 독점이 깨진 미래에는 크게 쓸모가 없어질 정보와 지식을 위해 집집마다 사교육비를 쏟아붓고 있다. 다니엘라는 “AI가 똑똑해질수록 인간적 역량이 중요해진다”고 했다. AI보다 잘 외우지는 못해도 질문하는 능력, 타인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능력, 도덕적 감수성과 윤리적 판단력…. 인간은 갖고 AI는 갖지 못한 이런 ‘초능력’을 뺏는 우리의 교육부터 서둘러 바꿔야 하지 않을까.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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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서울 광장시장 노점 실명제

    멸치 육수에 펄펄 끓여낸 칼국수, 기름에 튀기듯이 부쳐낸 녹두전, 겨자에 찍어 먹는 한입 크기 김밥…. 외국인 관광객이 서울 종로5가 광장시장을 찾아 상인과 일꾼들의 허기를 달래던 서민 음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한 건 2019년 넷플릭스에서 아시아의 길거리 음식을 소개한 다음부터다. 광장시장 노점 요리사들의 ‘희로애락’이 버무려진 맛깔난 음식 영상을 보고 한국 방문 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저장됐다. 요즘은 가볍고 따뜻한 이불이 한국 쇼핑 ‘필수템’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이불집들이 붐빈다. ▷어른 세대가 장을 보러 가서 드센 흥정을 하는 곳으로 익숙했던 광장시장은 외국인의 시선으로 재발견된 곳이다. 한 끼 대충 때우는 음식이 싸고 푸짐한 음식으로, 시끌벅적한 활기가 시장의 바이브로, 즉석조리가 손맛으로, 불편한 포장마차 좌석이 민주적인 공간으로 해석된다. 외국인 관광객에 이어 젊은 세대가 광장시장을 궁금해하고 찾기 시작하면서 요즘은 성수동 못지않게 ‘힙’한 장소가 됐다. 스타벅스, 올리브영에 이어 K패션 브랜드인 마뗑킴, 코닥어패럴 등이 들어섰다. ▷광장시장의 인프라와 주 고객이 바뀌었지만, 아직 그에 걸맞은 상도덕이 정착되진 않은 것 같다. 상인들의 불친절과 바가지요금이 끊임없이 논란이 된다. 곁가지 반찬으로 줄 만한 양의 모둠전을 1만5000원에 판 전집, 고기만두를 시켰는데 두 배 값의 모둠만두를 건넨 만둣집, 외국인에게만 비싼 가격제를 운용한 순댓집이나 물값을 2000원 따로 받은 분식집 등이 공분을 샀다. 최근에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료 컵 속 얼음을 씻어 재사용한 것이 적발돼 불량한 위생도 논란이 됐다. ▷서울 종로구는 해당 사고마다 과태료, 영업정지 같은 행정처분을 내렸고 상인회는 자정을 다짐했지만 잊을 만하면 사고가 터지곤 했다. 광장시장 노점상은 지난해 11월 도로법에 따라 점용 허가를 처음 부여받았다. 그 이전까지는 사실상 제도권에 편입되지 않은 영업이었던 셈이다. 정식으로 허가받고 영업하던 일반 점포 상인들은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노점의 상식 밖 영업 행태가 논란이 되면서 피해를 봤다는 불만이 컸다. ▷종로구는 다음 달부터 노점 실명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노점 실명제는 바가지 판매나 음식 재사용 등 불법 영업으로 적발된 노점상에 대해 영업정지와 벌점을 부과하고, 1년간 4회 이상 위반하거나 벌점이 120점을 넘으면 영구 퇴출하도록 한 것이다. 광장시장은 1905년 조선인 자본으로 설립된 조선 최초 민간 시장이다. 6·25전쟁 당시 폐허가 됐다가 재건돼 한때 전국 물류망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젠 전통과 가치를 재평가받아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광장시장이 그 역사성에 어울리는 시장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를 바란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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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외로움’ 담당 차관

    사회적 고립이란 사회적 관계가 부족하거나 단절된 상태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3명 중 1명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잠깐 집안일을 부탁하거나 이야기할 상대가 필요할 때 도움받을 만한 사람이 없다면 ‘사회적 고립’으로 판단한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고독사다. 해마다 늘어 2024년 사망자 100명 중 1.09명이 고독사였다. 홀로 사망하더라도 가족이나 지인이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거나 뜸하게 왕래가 있었다면 통계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실제 고독사는 이보다 많을 것이다. ▷사회적 고립이라는 물리적 상태에서 느끼는 감정이 외로움이다. 미 공중보건 최고책임자인 비벡 머시 전 의무 총감은 외로움을 감염병으로 정의하면서 마음뿐만 아니라 몸을 병들게 한다고 했다. 마약 중독자부터 심혈관 질환자까지 질병의 기저에는 외로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뇌에서 외로움과 배고픔은 동일한 부위에서 처리된다. 음식에 대한 욕구만큼 관계에 대한 욕구도 본능적이란 뜻이다. 집단생활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외로움은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된다. ▷SNS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쉽게, 많이 연결을 경험할 수 있는 ‘초연결 사회’에 살고 있다.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친구와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외롭다고 느낀다. SNS에선 가장 보여주고 싶은 나를 순간 포착해 올리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관계는 쉽게 차단한다. 갈등 없는 피상적인 관계만 맺다 보니 정작 내적 감정을 공유할 사람은 없다.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이른바 인공적 친밀감(Artificial Intimacy)도 문제가 되고 있다. AI가 심리상담사를 자처하고 친구나 연인을 대체한다. 인간 대신 기계와의 관계로 도피하지만 거절도, 상처도 없는 안전한 관계에서 오는 인공적 친밀감은 결코 외로움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 ‘인공적 친밀감’을 연구하는 셰리 터클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 사진을 건네는 격”에 비유했다. 인간의 취약성을 이용해 감정을 조종하는 알고리즘은 진짜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없다. ▷외로움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 필요해지면서 보건복지부 제1차관이 한국의 초대 ‘사회적 고립 전담 차관’으로 지정됐다. 2018년 영국이 세계 최초로 외로움 담당 장관을 임명했고, 2021년 일본이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신설한 데 이어 우리도 범부처 대응을 선언했다. 전담 차관을 복지부에서 맡은 건 복지 자원을 동원해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취약 계층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뜻일 터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외로움의 질이 달라지고 있다. 생계 지원 같은 복지 정책을 넘어선 공동체 복원을 위한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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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늘어나는 수업 방해 ‘금쪽이들’

    직장인 커뮤니티에서 회자됐던 초등 교사들의 경험담을 보면 ‘설마…’ 싶을 만큼 경악스럽다. 수업 시간에 활동을 시작할 때마다 “아,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김을 빼고는 “응, 내가 (활동) 안 해도 (선생님은) 아무것도 못 하죠?”라고 빈정대는 학생도 있었다. 교실을 자꾸 돌아다니고 소리를 지르거나 수시로 음란한 대사를 읊는다.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을 쉬는 시간에 불러 훈계했더니 “쉬는 시간에 놀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한 아동 학대”라고 응수한다. 아이를 가르치려 하면 교사에게 욕설을 하고, 옥상에 올라가 죽겠다고 위협한다. ▷교사들은 실제 교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아이들은 악의를 품고 무례하게 군다기보다 정서적으로 아픈 아이들인 경우가 많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연구에 따르면, 서울 초중고 교사 10명 중 절반은 최근 1년간 정서·행동 위기 학생에 의한 수업 방해와 교권 침해가 증가했다고 답했다. 학교급이 낮을수록 빈도도 높았다. 초교 교사가 58.6%로 가장 높았고, 중학교 54%, 고교 42.8% 순이었다. ▷교육부는 매년 초등 1, 4학년과 중1, 고1 학생을 대상으로 정서·행동 특성 검사를 시행한다. 정서·행동 위기 징후가 있는 학생을 파악해 지원하려는 것이다. 교사 절반은 검사 결과보다 교실에서 체감하는 정도가 더 심각하다고 답했다. 문제는 교사가 학생의 이상 징후를 발견하더라도 치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로는 ‘보호자의 동의나 협조 부족’(78.6%)이 첫손에 꼽혔다. 학부모가 “집에서는 안 그런다” “어려서 산만하다”며 아이의 어려움을 부정하고 검사나 치료를 거부하면 학교가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서·행동 위기를 겪는 학생은 학교 안에서 기피 대상이 되곤 한다. 누구도 담임을 맡으려 하지 않고, ‘수업 방해하는 애’ ‘친구 괴롭히는 애’로 낙인이 찍혀 교우 관계도 원만하지 않다. 그런데 이들을 지원할 교내 인프라는 부족하다. 학교의 목표는 교육이 아니라 ‘큰 사고 없이 잘 달래 집으로 보내는 것’이 된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아이의 상태는 갈수록 악화된다. ▷교사들은 정서·행동 위기 학생 1명을 돌보다 보면 나머지 19명에게 쓸 시간이 부족해진다고 한다. 학부모의 무책임 탓만 할 수도 없다. 내 자식밖에 모르는 일부 학부모도 있지만, 부모가 우울증을 앓는다거나 다문화가정이라 소통이 어렵다거나 하는 사정 있는 집들이 많다. 그래서 미국, 영국 등에선 의학적 진단이 없더라도 교사의 관찰과 상담으로 위기 학생을 찾아내고 개입이 필요하면 담임·상담·특수 교사와 학부모가 팀을 꾸려 학생을 지원한다. 교사 한 명에게만 맡겨두지 않는다는 뜻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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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여행수지 ‘만년 적자’ 반전시킨 한류의 힘

    6일 오후 5시경 대통령궁 발코니에 방탄소년단(BTS)이 모습을 드러내자 ‘아미밤’ 응원봉이 반짝이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북미 투어 중인 BTS가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과 환담한다는 소식에 대통령궁이 보이는 소칼로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BTS 팬 5만 명이 운집했다. 이들의 떼창과 춤으로 소칼로 광장은 마치 거대한 공연장 같았다. 멕시코 상공회의소는 세 차례 BTS 공연으로 인한 경제적 파급 효과가 1억750만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3월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BTS의 복귀 공연 당시에도 외국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이들은 평균 8.7일을 머물며 1인당 353만 원을 썼다. 올해 1분기 외국인 관광객보다 평균 2.6일을 더 체류하고, 108만 원을 더 소비한 것이다. 이 영향으로 3월 여행수지가 2014년 11월 이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만성적인 여행수지 적자국이었는데 136개월 만에 반전을 쓴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 관광의 주 손님은 쇼핑하러 오는 유커들이었다. 한중 관계에 훈풍이 불었던 2014년 여행수지가 반짝 흑자를 냈던 이유다. 2016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로 한중 관계가 얼어붙자 관광업계는 직격탄을 맞았고, 그 여파가 오래갔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K팝, K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아시아뿐만 아니라 북미, 유럽, 중동에서도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급증했다. 식도락 관광, 한류 스타 관련 장소 방문 등 한국 관광의 내용도 달라졌다. ▷2024년 외래관광객조사에 따르면 ‘한류 콘텐츠를 접하고 나서’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1위로 꼽혔다. 3월 방한한 외국인들은 BTS 공연 전후로 서울 용산, 홍대, 성수 일대를 방문했다. 용산은 BTS 소속사인 하이브 사옥이 있고 인근은 ‘하이브 거리’로 불린다. 성수에는 SM엔터테인먼트 사옥이, 홍대에는 YG엔터테인먼트 사옥이 있다. 이 지역들은 아이돌 팝업스토어, 화보 촬영의 성지로 특유의 ‘힙’한 분위기가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인 레딧을 보면 K팝, K드라마로 한국을 알게 됐지만 굴곡진 역사와 이를 극복한 끈질긴 한국인, 한국에 오는 비행시간 동안 배울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인 한글, 맛있고 푸짐한 한식, 개인주의 문화권에선 느끼기 힘든 친밀한 정서 등이 점점 궁금해졌다는 외국인이 많다. 과거 우리가 서구의 삶의 방식을 동경했듯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 매력적이라는 뜻이다. 2000년대 초반 드라마 ‘겨울연가’가 인기를 끌고 그룹 ‘H.O.T.’가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한류는 짧은 유행으로 끝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 전망과 달리 이제는 한국 문화가 품은 가치관과 정서가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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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나는 선생님이다”

    기자로 일하며 풀지 못한 질문이 하나 있다. 왜 어떤 사람은 남을 돕고, 어떤 사람은 남을 해칠까. 이를 설명하려는 철학적, 종교적, 과학적 이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잔혹한 범죄자부터 ‘생면부지’ 남을 구하는 의인까지, 그간 겪은 모든 사례에 꼭 들어맞진 않았다. 최근 삼성꿈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을 멘토링하는 선생님에게 주는 ‘교육상’ 심사 과정에 참여했다. 후보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장학금은 선생님 멘토와 학생 멘티가 짝을 지어 신청해야 한다. 학생은 장학금을 받지만 선생님은 아무런 보상이 없다. 그런데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찾아내고, 장학금 관리를 돕고, 정서적 지지자를 자처하는 선생님이 많았다.대가 없이 학생을 돕는 이유 ‘워라밸’을 반납하고 성과급도 없는 봉사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멘토링에 헌신적인 이유를 물었다. 특성화고에 근무하는 A 선생님은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남을 돕고 싶어서”라고 했다. 학교 특성상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많아 쌀을 사다 주거나 학부모 장례식을 같이 치른 적도 여러 번이었다. 꿈을 포기하는 학생들을 돕고 싶었지만 학교 예산도, 사비도 부족했던 탓에 장학금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혼 가정에 방치된 아이, 암 투병 아버지를 돌보는 아이가 웃음을 찾기 시작했고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찾아온다. 그는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느낀다”고 했다. B 선생님은 외부 장학금과 사업을 필사적으로 찾아 아이들과 연결해 주고 있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나이에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게 진심이 담긴 사랑을 알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10년간 학원 강사를 했던 C 선생님은 “보람은 있을 거다, 돈은 못 벌어도…”라는 은사의 말이 자꾸 생각나 교사로 전직했다. 그는 바리스타, 승강기 기능사, 지게차 기능사 등 본업과는 무관한 자격증을 5개나 땄다. 노후 준비겠거니 했는데 “학생들에게 ‘자격증을 따 보라’는 한마디를 하고 싶어서”라는 뜻밖의 답을 들려줬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위축된 학생들에게 ‘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인 것이다. 이날 만난 선생님들은 아이의 집을 찾아가고, 밥을 해 먹이고, 아이와 밤새 연구하고, 함께 여행을 가서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요즘 교실에선 드문 일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묻자 “나는 교사라서 행복한 사람”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행운”이라는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교사가 존경받지 못하는 시대라고 말하면서도 자부심이 묻어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인생이 올바로 갈 때 행복하다 선생님들이 항상 보람만 느꼈던 건 아니다. 선생님들은 공통으로 ‘장학금이 왜 늦어지냐’며 마치 빚 독촉하듯 찾아오는 학생이나 부모를 마주했던 경험이 있었다. 섭섭하기도, 좌절하기도 했지만 벼락같은 선물을 받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차츰 이해했다고 했다. 그런 성찰을 통해 “아이를 바꾸려는 욕심을 버렸다”, “믿음으로 기다리면 꽃이 핀다”며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지만 과거와 달리 그 의미가 퇴색했다. 교사와 학부모 간의 불신이 커지면서 학교는 자꾸 움츠러들고 학생은 배울 기회를 잃어 간다. 그래도 소명을 다하는 선생님들이 있기에 교실이 지탱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D 선생님은 12년간 멘토링을 통해 “인간의 행복이란 인생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스스로 변화할 기회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고 했다. 여전히 어떤 사람이 남을 돕고 어떤 사람이 남을 해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올바른 인생을 선택한 선생님들을 만나고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돕는 사람과 해치는 사람, 누가 행복할지는 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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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고1 男 173cm, 女 161cm… 미국만큼 큰 키

    키는 유전일까, 환경일까. 개인으로 보면 유전의 영향이 우세하겠지만, 집단의 평균 신장은 환경적인 영향이 크다. 200개국 아동 및 청소년(5∼19세) 6500만 명의 평균 키와 체질량지수(BMI)를 장기간 추적한 연구 결과가 2020년 의학 저널 랜싯(Lancet)에 실렸다. 1985∼2019년 35년간 한국은 세계에서 평균 신장이 가장 빠르게 자란 나라 중 하나였다. 한국 남학생은 세 번째, 여학생은 두 번째를 기록했다. 한국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이 최상위권을 휩쓸었는데 모두 급속히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들이다. 충분한 영양, 깨끗한 위생 등 환경적 요인이 아이들을 쑥쑥 자라게 한 것이다. ▷요즘 거리마다 외국인 관광객이 붐빈다. 그런데 생각보다 키가 크지 않아서 뜻밖이었다. 과거 올림픽, 월드컵에서 우리를 이긴 외국팀 선수들을 보며 ‘서구형 체형’ ‘타고난 체력이 다르다’는 말을 듣고 자란 세대로선 놀랍기도 하다.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학생 건강검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고1 학생의 평균 키는 남학생 173cm, 여학생 161.3cm였다. 고1이면 연간 몇 cm씩 크는 성장 급등기가 거의 지난 다음이라 성인까지 비슷한 수준이 유지된다. ▷고1 학생의 평균 키는 일본을 3∼4cm가량 일찌감치 따돌렸고 미국 학생들과도 비등비등하다. 지난해 미국 국립보건통계센터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1에 해당하는 16∼17세 남학생 평균 키는 174.4cm, 여학생은 161.1cm다. 여학생은 오히려 한국보다 작았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인의 평균 신장이 정체되면서 양국의 키가 비슷해졌다. ▷35년간 아동과 청소년의 키는 거의 자라지 않고 몸무게만 늘어 건강이 악화한 나라가 있다. 미국, 뉴질랜드, 멕시코 등이다. 소득이 낮은 계층에서 ‘고열량 저영양’ 식단을 많이 섭취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분쟁을 겪은 콩고, 수단, 에티오피아 등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선 아이들의 평균 신장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작아졌다. 영양 공급이 충분하지 못하고 식수가 부족한 탓이다. ▷이처럼 평균 신장은 그 나라의 경제력 총량과 불평등 정도, 복지 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고1 남학생 키가 170cm를 넘고, 여학생은 160cm를 넘어선 건 1997년이었다. 경제 호황기를 지나며 영양, 위생, 의료가 크게 개선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론 고1 남학생의 평균 키가 3cm가량 자랐을 정도로 증가 속도는 둔화됐다. 유전자에 숨어 있던 키는 다 자란 것 아닐까 싶다. 문제는 앞으로 미국을 따라가지 말란 법이 없다는 점이다. 학생들의 신체 활동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고1 남학생 100명 중 6명이 소아 대사증후군을 앓고 있다. 이젠 키에 집착하기보다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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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구두 대신 운동화 신는 승무원

    승무원들은 평소 항공 사고가 나면 골든타임인 90초 안에 승객을 기내에서 탈출시키도록 훈련받는다. 이른바 ‘90초 룰’이다. 2024년 1월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던 일본항공(JAL) 여객기가 이륙 대기 중인 항공기와 충돌했다. 벌건 화염이 치솟았으나 승무원의 침착한 안내에 따라 탑승자 379명 전원이 탈출했다. ‘90초 룰’을 지켜 대형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사고를 겪은 JAL은 지난해부터 승무원이 운동화를 신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2020년부터 여성 승무원이 굽 높은 구두 대신 단화를 신을 수 있도록 한 데 이어 아예 구두를 벗도록 한 것이다. ▷대한항공도 승무원이 운동화를 신을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기로 했다. 창립 이래 57년간 고수했던 3∼5cm 굽 있는 구두 의무 착용 원칙 폐지를 논의한다고 한다. 이스타항공, 제주항공 등 저비용항공사가 운동화를 허용한 데 이어 승무원만 1만 명인 대형 항공사도 동참함으로써 항공업계의 엄격한 복장 금기가 깨질 것으로 보인다. 대한항공은 2월부터 안경 착용도 허용했다. ▷장거리 비행 승무원들은 기내에서 하루 1만5000보 이상을 걷고 14시간 이상 서서 일한다고 한다. 비행기를 타 보면 그 불편한 복장으로 어떻게 강도 높은 노동을 소화하는지 딱할 정도다. 특히 여성 승무원의 달라붙는 유니폼과 굽 높은 구두는 능률을 떨어뜨리고 만성피로를 불러오는 원인으로 꼽힌다. 구두를 신고 종종걸음 하는 승무원들은 직업병처럼 근골격계 질환을 앓는다. 몸매가 드러나는 유니폼을 입고 허리를 숙이거나 짐을 올리면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속살이 보이기도 쉽다. 이 때문에 성희롱이나 몰카 촬영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건강 고려 없이 여성성을 강요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복장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현재 유니폼은 좁은 기내에서 일하기에 불편할 뿐 아니라 안전을 책임지는 승무원이 입기에도 부적절하다. 2023년 5월 대구공항에 착륙하려던 아시아나 여객기에서 한 승객이 “답답하다”며 213m 상공에서 비상문을 열어젖혔다. 승객들의 비명 소리 속에서도 무사히 착륙했지만, 나중에 공개된 사진 한 장이 논란이 됐다. 꽉 끼는 치마 유니폼을 입은 채 구두를 신은 여성 승무원이 두 팔을 벌린 어정쩡한 자세로 비상문을 막고 있었다. ▷승무원의 용모와 엄격한 복장 규정은 항공업계의 브랜드 전략이다. 델타항공 복장 규정은 ‘승무원이 유니폼을 입는 순간부터 고객 서비스가 시작된다’고 적고 있다. 국내 항공사 승무원도 한파에도 빳빳이 다린 유니폼을 입고 출근하고, 머리핀 같은 액세서리까지 규칙에 따라야 한다. 비행기를 대중교통처럼 이용하는 시대다. 항공업계의 브랜드 전략도 고급 서비스 제공을 강조하기보다 안전에 대한 신뢰를 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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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학폭 변호사’, ‘학폭 보험’

    학교폭력 변호사가 학폭 대응 수칙을 알려주는 영상을 보다가 기함했다. ‘선생님을 믿지 마라’ ‘사과문을 받아 증거로 모은다’ ‘진실은 없다. 승자만 있다’ 등 너무 비교육적인 내용이었다. 다른 학폭 변호사는 증거 수집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줄을 서 있다가 새치기를 당하면 ‘왜 새치기를 하냐’고 묻고 ‘그냥’ ‘네가 싫어서’ 같은 대답을 녹음해 두라고 했다. 수업 중에 콕콕 찌른다면 그 상황을 카카오톡 ‘나와의 대화방’에 구체적으로 기록하라고도 했다. 날짜와 시간이 남아 신빙성 있는 증거로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학폭 변호사의 조언대로 증거를 수집해 학폭대책심의위에서 이기면 깔끔하게 해결될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올해 서울 주요 10개 대학 입시에서 학폭 이력이 있는 지원자 150명 중 149명이 탈락했다. 학폭이 대입 당락을 결정짓게 되자 ‘맞폭’으로 신고하거나 학폭위 처분에 수긍하지 않고 소송으로 간다. 학폭 피해자의 40%가 맞신고를 당했다는 설문도 있다. 소송을 질질 끌어 학폭 처분 기재를 미루려는 시도도 한다. ▷가해자들이 법 기술을 부리니 피해자들도 변호사를 찾게 된다. 제때 대응하지 못하면 피해 인정을 못 받는 것은 물론이고 가해자로 몰릴 위험마저 있기 때문이다. 학폭 변호사들은 “신속히 법률 조력을 받아야만 피해자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며 의뢰인을 모집한다. 변호사 상담과 서면 대응은 100만∼300만 원, 학폭위 대응은 300만∼700만 원, 행정소송은 800만∼1500만 원이 시장 가격이라고 한다. 학폭 변호사 시장이 수천억 원대라는 법조계의 비공식적인 분석도 나온다. ▷수임료를 마련할 형편이 안 되면 피해자는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 부모의 이런 불안을 노린 학폭 보험 시장이 급성장했다. 학폭 보험은 피해자 치료비, 변호사 선임비를 보장한다. 가해자라도 고의가 아니면 배상하는 상품, 학폭위 갈등에 휘말린 교사의 소송 비용을 지원하는 상품도 있다고 한다. 지난해 주요 5개 손해보험사의 학폭 관련 보험금 지급 사례는 3443건이었다. 2021년(231건)에 비해 15배 가까이 늘었다. ▷출석정지(6호), 학급교체(7호), 전학(8호) 처분을 받는 중대한 학교폭력은 10건 중 1건도 되지 않는다. 과거라면 교사의 중재 아래 화해를 하거나 반성문을 썼을 법한 가벼운 다툼으로 학폭위가 열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학폭위가 강화되고 교사 개입이 힘든 엄벌주의로 흐르면서 학폭을 교육적으로 해결하기 힘들어졌다. 소송으로 번지면 가해자는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는다. 사과를 받지 못한 피해자는 실질적인 치유와 회복이 어렵다. 이렇게 아이들을 망치면서 법률, 보험 시장만 팽창한다니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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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잊어라

    지난해 말 예정됐던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인 ‘서울대 10개 만들기’ 발표가 미뤄지고 있는 가운데 교육부가 최근 지방대 지원 방안인 앵커(ANCHOR·지역성장 인재양성체계) 사업 방향을 공개했다. 윤석열 정부의 라이즈(RISE·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 사업을 개편해 ‘5극 3특’에 맞춰 광역 단위로 공유대학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단 1년 만에 라이즈 사업을 손질하기 머쓱했던지 교육부는 반성문을 썼다. 대학 선정 과정에서 예산 나눠 먹기는 없었는지, 지방정부와 대학이 적극 소통하며 사업을 추진했는지 집중 점검해서 앞으로 지원할 대상을 선정하겠다고 했다. 결국 성과 없이 예산만 증발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비단 라이즈 사업뿐일까. 역대 정부마다 지방대 지원 사업을 추진했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보는 대로다.간판만 바꿔 달아 온 지방대 사업 본격적으로 지방대 육성 사업이 시작된 건 노무현 정부부터였다. 당시 누리 사업(지방대학 혁신역량 강화 사업)을 시작하며 “지방대의 경쟁력 저하와 그에 따른 우수 학생 인력 유출로 지역 산업이 침체하고 일자리가 부족해져 수도권 편중이 심화되는 악순환 구조”를 언급했다. 지금의 현실과 꼭 닮았다. 5년간 총 1조4200억 원이 투입됐다. 이명박 정부는 대학 경쟁력을 강조하면서 지방대 지원에는 거리를 두었다. 그럼에도 광역경제권 선도 사업과 링크(LINC·산학협력선도대학) 사업을 통해 1조 원 훌쩍 넘게 지원했다. 박근혜 정부는 아예 ‘지방대학 및 지역균형인재 육성법’을 법제화했고, CK 사업(대학 특성화 사업)을 추진했다. 문재인 정부에는 RIS(지역혁신 사업), 국립대 육성 사업, 지역선도대학 육성 사업이 있었다. 두 정부에서 각각 1조 원가량 투입했다. 윤 정부가 5년간 대학 30곳에 3조 원을 지원하기로 했던 글로컬 사업은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지방 명문대라는 말이 사라졌을 만큼 지방대는 추락했다. 교육부의 반성대로 ‘선택과 집중’ 없이 예산 흩뿌리기가 됐고, 선거를 앞두고는 지원 대학 수가 급증하는 일이 반복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을 뒤집으며 지속성도 떨어졌다. 대학은 자구 노력보다는 예산 따기에 급급했고 지역 기업과 협력할 역량도 부족했다. 최저임금 1만 원 실패 답습할라 지방대 지원 사업은 하나같이 이름이 복잡하고 어렵다. 우리 사회가 학벌에 민감하다 보니 대학 순위나 지역 격차 등이 드러나지 않게, 공정성을 의심받지 않게 작명했다. 이에 비해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뇌리에 쏙 박힌다. 하지만 5년간 4조 원이라는 예산만 늘어났을 뿐 역대 정부의 지방대 지원 사업과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토 공간 대전환’이라는 범정부 차원 과제 아래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할 순 있겠으나, 20여 년 전 누리 사업부터 지방대 육성이 지역 살리기와 별개였던 적은 없다. 2012년 당시 문재인 대선 후보의 교육 공약은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비슷한 ‘세계적 수준 지방대 만들기’였다. 이를 제안했던 류장수 국립부경대 교수는 저서 ‘교육 불평등과 지역 불균형’에서 ‘서울대 10개 만들기’에 대해 “예산만 충분하다면 수십 개를 만들어도 좋지만 전례 없는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불가능하다”며 “초광역권별로 3, 4개의 지역선도대학을 선정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했다. 더욱이 ‘서울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국립대만 지원하는지 합의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10개를 채우려고 집착해선 안 된다. 선거용 구호였던 ‘최저임금 1만 원’이 무리한 속도로 추진되면서 얼마나 탈이 났던가. 교육부의 반성문이 진정성이 있으려면 ‘서울대 10개 만들기’라는 그 이름부터 버려야 한다. 적당히 예산을 나눠 주고 생색 내기에는 지역 청년의 삶이 너무 척박하다. 교육부는 절박함을 가져야 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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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달의 하늘에 뜬 지구

    우리가 지구에 사는 한 절대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 달의 자전 주기와 지구를 도는 공전 주기가 똑같아서 항상 같은 면만 보게 된다. 지구와 달은 마치 마주 보고 왈츠를 추는 것처럼 움직인다. 54년 만에 발사된 유인 우주선 아르테미스 2호가 달의 뒷면에 6일 도달했다. 지구에서 약 40만 km 벗어난 지점이다. 1970년 유인 우주선인 아폴로 13호가 세운 최장 기록보다 6600km를 더 멀리 갔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아르테미스 2호가 달에 근접 비행을 하는 6일 오후 1시부터 8시간가량 교신 장면을 생중계했다. 지구 밖에 있는 우주비행사의 영상과 소리를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다니 놀라웠다. 아르테미스 2호가 달의 뒷면을 도는 약 40분 동안만 통신이 끊겼는데 지구와 우주선 사이를 달이 막아서면서 전파가 차단됐기 때문이다. 그사이 우주비행사들은 달의 뒷면 분화구, 용암, 협곡을 맨눈으로 관찰하고 기록했다. ▷달의 뒷면을 돌아 앞면으로 온 아르테미스 2호는 달의 하늘에 뜬 지구, 이른바 지구돋이(Earthrise) 장면을 촬영했다. 인류 최초의 지구돋이 사진은 1968년 12월 24일 아폴로 8호가 찍었다. 온통 암흑인 우주에서 달 위로 푸른빛의 지구가 솟아올랐고 우주비행사들은 그 경이로운 장면을 보며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남겼다. 이번 아르테미스 2호의 지구돋이 사진에선 지구가 초승달 모양으로 떠 있다. 달에서부터 약 6400km 떨어진 거리에서 촬영해 아폴로 8호가 찍은 지구보다 아담하다. ▷아르테미스 2호는 달에 착륙하지 않고 지구로 귀환길에 올랐다. 지구를 오가는 셔틀 노선처럼 달을 방문할 수 있는 궤도를 여는 임무를 맡아서였다. 아르테미스 계획은 최종적으로 달에 인간이 상주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주선의 생명 유지 시스템 등 인간의 우주살이 가능성을 검증했다. 우주선 내부에 화장실이 생겼고 태양광 패널을 달았고 광통신이 연결됐다. NASA는 2028년 아르테미스 4호가 달 착륙을 시도할 것이라고 했다. 우주 영토를 두고 본격적인 패권 경쟁이 시작된 셈이다. ▷58년 전 첫 지구돋이 사진을 찍은 아폴로 8호 우주비행사 윌리엄 앤더스는 “우리는 달을 탐사하러 갔지만, 가장 중요한 발견은 지구였다”고 했다. 아르테미스 2호에 탑승한 첫 여성 우주비행사인 크리스티나 코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지구가 아낌없이 준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라며 “그 기적은 다른 관점(우주)으로 지구를 바라보기 전까지는 결코 진정으로 깨달을 수 없다”고 했다. 광대한 우주에서 유일하게 푸르게 빛나는 작은 지구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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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봄꽃 지고서야 맞는 식목일

    아직 쌀쌀한 듯하여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섰더니 어느새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의 봄꽃 개화일은 20년 동안 평균 2주가량 빨라졌다. 올해 서울 벚꽃은 3월 30일에 처음 피었는데 2000년에는 4월 10일 피었다. 매화는 2000년보다 19일 이른 3월 11일에 개화했다. 서울에 비해 기온이 온화한 부산에선 매화는 2월 초면 피는 ‘겨울꽃’으로 통한다. ▷경남 창원의 진해군항제는 올해 64회째 열리는 국내 최대 벚꽃 축제다. 1963년 처음 군항제가 열린 날은 4월 5일이었다. 올해는 3월 27일 시작했다. 그만큼 벚꽃이 빨리 피고 빨리 지는 것이다. 2024년 진해군항제는 이른 개화 시기에 맞춰 앞당겨 개최했지만 이상 저온으로 꽃이 모두 떨어져 ‘꽃 없는 꽃 축제’가 됐다. 진해군항제만의 고민이 아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갈수록 개화 시기를 예측하기 어려운 탓에 상춘객을 놓치지 않으려는 지방자치단체들은 묘안을 짜내고 있다. 실시간 개화율을 공개하고, 생중계를 통해 먼저 꽃 상태를 확인한 뒤 방문하도록 한다. ▷꽃이 일찍 만개할 만큼 봄 시계가 빨리 돌자 4월 5일 식목일 날짜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원래 식목일은 24절기 중 청명(淸明)과 겹친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春分)을 지나 낮이 점점 길어지는 시기다. 국립산림과학원은 나무 심기에 적절한 지표 온도를 평균 6.5도로 제시한다. 이제 3월 중순이면 그 온도에 도달한다. 그래서 식목일을 3월 20일경인 춘분으로 옮겨야 나무가 잘 자랄 환경이 된다고 한다. 이보다 늦게 나무를 심으면 잔뿌리가 자라 수분과 영양을 충분히 흡수하기도 전에 잎을 틔우며 뿌리가 말라버린다. ▷한반도는 달궈지는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다. 지난해 서울 평균 기온은 식목일이 처음 지정됐던 1949년보다 3도가량 올랐다. 과거 3월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 외투를 여미던 시기였다. 요즘은 3월에 반소매 차림도 흔하게 본다. 뚜렷한 사계절은 옛말이고, 이제 겨울이 봄을 건너뛰고 여름으로 직행한다. 봄철 평균 기온이 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더웠다, 추웠다 기온 변동도 심해 나무가 뿌리 내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우리나라는 나무 심는 날을 공휴일로 정했던 유일한 나라다. 덕분에 민둥산을 울창한 숲으로 가꿨다. 2008년 식목일 날짜 변경을 국무회의서 논의한 적이 있으나 이런 역사성을 고려해 무산됐다. 또 평균 기온이 오를 때마다 식목일을 다시 정할 것이냐는 반론도 있다. 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지구 온도를 낮추는 데도 기여한다. 식목일 날짜를 옮기든, 지역별 기후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하든 기후 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다면 식목일은 그 소명을 다하는 것이겠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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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안녕, 서울. 우리 돌아왔어”

    “안녕, 서울. 우리 돌아왔어(We’re back).” 3년 9개월 만에 다시 뭉친 방탄소년단(BTS)의 복귀 공연은 리더 RM의 간결한 인사로 시작했다. 이어 경복궁, 광화문, 그리고 그 앞 월대까지 ‘왕의 길’이 비치고는 민요 ‘아리랑’ 선율이 삽입된 신곡 ‘보디 투 보디(Body to Body)’가 흘렀다. 태극기의 건곤감리를 응용한 미디어아트도 화려했다.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힙하게 소화한 이들을 보며, ‘국뽕’이라고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신곡 ‘에일리언스(Aliens)’에는 ‘김구 선생님, 어떠신가요(Tell me how you feel)’라는 소절이 있다.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는 ‘문화의 힘’을 갖기를 꿈꿨던 김구 선생에 대한 헌사로 들렸다. 한국적인 것을 숨긴 채 세계적인 것을 따라 하기에 급급했던 우리였다. 이날 190여 개국에 생중계된 BTS 무대는 우리가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가 한국을 보고, 한국을 입고, 한국을 즐겼다. 한국적인 것이 매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를 품은 광화문 일대는 주말 동안 BTS 팬들의 놀이터였다. 광화문 거리는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전광판을 통해 BTS 영상과 음악이 흘렀다. 어디서나 응원봉을 흔들며 춤을 추는 BTS의 팬클럽 ‘아미(ARMY)’ 회원들을 볼 수 있었다. 신문의 특집 섹션도 여럿 발행됐다. 동아일보도 ‘BTS 컴백 기념 특별판’을 배포했는데 아미들은 호외를 굿즈처럼 소중히 챙겨 갔다. ▷‘문화의 힘’이란 단지 K팝, K드라마의 성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민 의식 같은 우리 사회의 소프트파워가 뒷받침돼야 한다. 뉴욕타임스는 “광화문광장은 놀랍도록 질서정연했다”고 보도했다. 시민들은 안전한 축제를 위해 협조했다. 관객들은 공연 입장과 퇴장 시 검색으로 시간이 지연돼도 동요 없이 차분히 움직였다. 아미들은 ‘쓰레기를 치우고 떠나자’는 게시글을 공유했고, 자원봉사단을 구성해 공연이 끝난 뒤 청소를 했다. 그 덕분에 서울시 예상보다 쓰레기가 적었고 행사장은 깨끗했다. ▷BTS는 정규 5집 ‘아리랑’ 발매에 앞서 최초 아리랑 녹음본에 대한 사연을 담은 애니메이션 예고편을 공개했다. 1896년 5월 8일 자 워싱턴포스트에는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하워드대로 유학 간 한국 청년 7명이 아리랑을 불렀고, 이를 인류학자가 축음기로 녹음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영감을 받아 당시 태평양을 건넜던 한국인 유학생 7명과 광화문광장 공연을 위해 경복궁 앞에 선 BTS 7명이 교차하는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BTS는 한이 서린 슬픈 아리랑을 신나고 진취적인 노래로 다시 불렀다. 지금의 아리랑은 그래야 맞을 것 같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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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의정 갈등’ 흙탕물이 가라앉은 자리

    내년 의대 정원이 490명 늘어났고, 32개 의대에 정원 배분까지 마무리됐다. 1년 반 동안 나라를 뒤흔든 의정 갈등을 떠올리면 어리둥절할 만큼 조용한 마무리다. 의정 갈등이라는 흙탕물은 그렇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뒤틀린 우리 의료 시스템은 방향을 바꾸지 못한 채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 의대 증원 당시의 명분은 지역·필수 의료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응급실 뺑뺑이’가 사회적 문제가 됐고, ‘출산 난민’ ‘소아과 원정’처럼 지역 의료는 무너지고 있었다. 의료계 역시 해법은 달랐지만 그 명분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의대 정원을 늘리고 지역 의사를 뽑는다고 해서 지역·필수 의료가 저절로 살아나진 않는다. 의정 갈등 속에서 드러난 의료 시스템의 고질적 병폐도 바뀐 것이 없다. 지역·필수 의료의 붕괴는 원가에 못 미치는 낮은 수가, 수술보다 비싼 검사 수가 등 왜곡된 제도의 결과다. 의사들이 실손보험을 통해 수익 보전에 나서면서 거대한 비급여 시장이 형성됐다. 의료비는 매년 급증한 반면, 환자들의 만족도는 떨어졌다. 그런데 정부도 의료계도 내상이 큰 탓인지 의대 증원 이후 의료 개혁 논의는 실종된 상태다.의정 갈등에 휘발된 신뢰 자본 의정 갈등 동안 정부, 의사, 환자 사이에 불신이 쌓인 것도 의료 개혁의 동력을 살리기 어려운 이유다. 정부와 정책 파트너인 의료계는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이제는 물밑 소통도 거의 사라진 듯하다. 환자들은 의사의 직업윤리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병원에 가면 과잉 진료부터 의심한다. 의사들은 “환자 대면이 두려워졌다” “수술실을 지키는 데 힘이 빠진다”며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모두가 좌절감에 허우적대는데 의사, 환자, 시민단체가 만나 의료 시스템을 고쳐 보자는 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정 갈등이 한창이던 2024년부터 의료 공급자인 의사, 의료 소비자인 환자와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모인 의료공동행동이 출범했다. 이들은 그간 논의를 최근 ‘위기의 한국의료, 함께 다시 그리다’라는 책으로 펴냈고 ‘환자중심의료학회’를 출범시켰다. 의사와 환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의료계 학회는 처음이다. 병원과 학교를 이탈한 전공의·의대생을 향해 “진짜 피해자는 외면당한 환자”라고 일침했다가 의료계 내부에서 지탄을 받았던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 4명이 주축이 됐다. 당시 험한 비판을 쏟아냈던 대부분의 의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은 의정 갈등을 촉발한 시스템을 바로잡자며 환자와 손을 잡았고, 올바른 정책의 근거를 쌓아가기로 했다. 무의미한 싸움으로 남지 않으려면 환자중심의료학회 출범을 보며 의정 갈등 당시 전공의가 병원을 뛰쳐나가기보다 환자와 연대해 정부에 맞섰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대 2000명 증원을 두고 의사들은 ‘수능 성적 좋은 의사에게 진료받고 싶을 것”이라고 했다. 환자들의 요구는 달랐다. 학회에 합류한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장은 2014년 식도암을 진단받고 투병해 왔다. 그는 6일 출범식에서 “한국 의료는 질병을 고치는 기술은 뛰어나지만 환자의 삶을 돌보는 데는 실패했다”며 자신의 생명이 걸린 결정과 치료 과정에서 소외되는 환자의 고통을 전했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고 정부에 잘못된 의료 시스템을 바꾸자고 요구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말이지 않았을까. 1년 반 의정 갈등이 무의미했던 싸움으로 끝나선 안 된다. 환자가 치료받기 좋은 환경은 곧 의사가 일하기 좋은 환경이다. 의대 증원, 수가 인상 같은 지엽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환자 중심’이라는 원칙으로 돌아갈 때 의료계의 복잡한 난제들도 실타래를 끊듯 풀 수 있을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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