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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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4~202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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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복을 빕니다]시사만화가 김성환 화백, 촌철살인 ‘고바우영감’ 네컷만화의 전설

    고바우 영감이 영원불변한 바위로 돌아갔다. 한국 최장수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을 통해 신문의 시사만화 시대를 연 김성환 화백이 8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87세. 황해도 개성 출신인 고인은 17세에 연합신문 만화가로 데뷔했다. 고인은 1955년 2월 1일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 첫 회를 실은 것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신문 네 컷 속에 한국 현대사를 짚으며 권력에 대한 촌철살인과 세태 풍자,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냈다. 대표작의 주인공 이름인 고바우는 바위처럼 단단한 민족성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1980년 9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했으며, 조선일보와 문화일보를 거치며 2000년 9월까지 45년간 총 1만4139회를 연재했다. 1958년 1월 ‘경무대(현 청와대)의 변소 치우는 인부’는 고인의 시사만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당시 자유당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가 ‘허위 보도’로 몰려 즉심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국내 시사만화가 최초로 사법 처리된 사례로 남아 있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정권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나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고인은 “시사만화에 대한 항의는 사회적 아량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풍자가 없는 만화는 독자가 먼저 용서하지 않는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런 고인의 정신은 고바우 영감이 세간에서 입소문을 타고 아이들 노래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국민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고인은 “고바우는 내가 낳았지만 그가 내 반평생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고바우 만화상’이 제정되기도 했으며 고바우 영감의 원화 1만743장이 2013년 2월 근대 만화 최초로 등록문화재(제538호)가 됐다. 일본에서도 2003년 ‘만화 한국 현대사―고바우 영감의 50년’이라는 단행본이 출간됐다. 2014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올해의 기부왕’ 대상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허금자 씨와 아들 규정 씨, 딸 규희 규연 씨가 있다. 빈소는 경기 성남시 분당제생병원. 발인은 11일 오전 9시. 031-708-4444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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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지독하고 파괴적인 사랑의 증상들

    “섹스죠. 우린 항상 그걸 했어요.” 영국의 베테랑 임상심리학자인 저자를 당황하게 만든 답은 이랬다. 우울증이 심한 70대 초반 여성이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원인은 1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남편. 매일 죽은 남편을 생각한다고, 남편이 사무치게 그립다고 했다. 가장 그리운 것이 무엇이냐는 저자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심지어 여성은 남편의 유령을 몇 번이나 만났다고 털어놨다. ‘사별 후 환각 경험’은 흔한 현상이라고 한다. 저자는 썼다. “상실은 개인의 고유한 경험이므로 사람마다 의미도 결과도 다를 수 있다. … 올바른 애도 방법이라는 것도 없다.” 병적 의심이나 집착 등 ‘사랑을 앓는’ 12가지 상담 사례를 통해 인간 마음의 심연과 근본적 취약성을 흥미롭게 드러낸다. 구역질이 날 듯한 사례도 없지 않으니, 그런 어둠이 궁금하지 않고 몰라도 상관없다는 독자에게는 ‘비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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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토건업자의 착취-수탈 보도, 총독부에 큰 골칫거리”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보도들은 조선총독부가 한국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일본 토건업자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매진했다는 도리우미 유타카 박사의 저서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여러 차례 근거로 제시됐다. 동아일보는 1931년 12월 13, 15일자 ‘공평한 안녕수조(安寧水組) 공사입찰’ 기사에서 일본인 건설업자들이 조선인 업자들을 입찰에서 배제하려고 수리조합 이사들에게 압력을 가했다고 고발했다. 또 1932년 2월 14일자에선 ‘궁민구제공사’가 일본인 건설업자들에게만 이익을 주는 건 잘못됐다는 지적이 평안남도 평의회에서 나왔다는 걸 보도했다. 도리우미 박사는 또 일본인 건설업자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거나 매우 적게 지불해 큰 이익을 얻었다고 지적했다. 그가 국사편찬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 결과 토목건설업자의 임금 미지급 문제를 다룬 신문 기사는 38건으로 이 가운데 31건이 동아일보 기사였다. 1931년 3월 1일자에 게재된 ‘노임 수입은 불과 팔분일, 팔분칠은 모두 중간서 착취’ 기사는 궁민구제사업이란 미명 아래 공사비의 6, 7할이 토목 건설업자의 이윤이 되고, 노임으로는 8분의 1밖에 지출되지 않아 “궁민구제라기보다 청부(건설)업자만 살리자는 운용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도리우미 박사는 책에서 “동아일보 등 매체가 일본인 건설업자의 행동을 문제 삼아 조선인의 손해나 불평불만을 연이어 보도하는 상황은 총독부의 큰 골칫거리였다”고 설명했다. 창간 직후인 1920년 4월 8∼10일 동아일보는 연속 사설을 통해 총독부 예산에는 납세자인 조선인의 의사가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예산에서 교육비와 산업비를 합쳐도 헌병비 경무비 수감비 재판비와 같은 경찰 관련비의 7분의 1에서 8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총독부 예산이 한국인의 생활수준 향상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독립운동 탄압을 위해서만 사용된 걸 꼬집은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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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년 인구 2.45%의 일본인이 우편저금의 86% 소유”

    최근 한일 갈등 때문에 새삼 대중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근대화론)은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가 발전했고 근대화가 이뤄졌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대표적으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등이 꼽힌다. 1910년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서 토지 수탈이 거의 없었거나 과거 통념보다 훨씬 적었다는 내용은 학계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식민지 근대화론은 민족 간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딱히 힘 있는 분석을 내놓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비판한 신간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지식산업사·1만8000원)은 조선총독부의 재정을 분석해 그 원인을 밝힌 책이다. 특히 조선총독부와 유착한 일본인 토목청부(건설)업자들이 철도 제방 등의 건설 과정에서 한국인을 배제하고 이익을 독점해 나가는 한편 조선인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하는 과정을 조명했다. 저자 도리우미 유타카 서울대 박사(57·한국역사연구원 상임연구원)를 5일 만났다. ―식민지 조선은 경제가 발전했나. “발전하기는 했다. 그러나 근대화론의 성장률 추계는 일제가 과장한 통계에 근거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이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공업화해 일본과 경쟁하는 걸 막기 위해 공업 발전을 억제했다. 한정된 수준의 공업화도 만주국이라는 시장을 확보한 뒤인 1930년대 후반부터다.” ―대다수 조선인이 빈곤했던 원인은…. “일제가 공업화 대신 쌀의 ‘모노컬처’(단일작물 농업) 경제를 강제했기 때문이다. 쌀값은 1918, 19년경 고점을 치고 장기간 하락한다. 궁핍한 게 당연하다. 수탈도 빈곤의 원인이지만 이게 가장 크다. 근대화는 일그러진 것이었다.” ―수탈이 있었는가. “강제로 빼앗는 것뿐 아니라, 무력이나 권력을 이용해 대가를 조금밖에 지불하지 않고 재산을 가져가거나 부당 이익을 챙기는 것 또한 수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수탈은 많았다. 총독부 예산에서 토목 관련비가 재정 지출의 약 20%다. 한데 총독부는 겉으론 공정한 토목 정책을 표방하면서 제도적으로는 조선인 업자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업자 밑에서 저임금으로 일했다. 하루 임금은 총독부 공식 통계(1엔)의 절반 이하였고, 그나마도 지불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착취다.” ―대표적 ‘수탈론자’인 허수열 충남대 명예교수는 수탈이란 용어는 더 이상 쓰지 않지만 “일본인들이 토지, 자본 같은 생산수단을 집중 소유해서 소득 분배가 불평등했다”고 주장했는데…. “그런 결과를 낳은 과정의 설명이 충분치 않다. 가난한 일본인도 한국에 와서 경제적으로 성공했고, 조선인 지주도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가 의도해 이런 결과를 낳았다. 일본이 조선에 투자한 자금의 대부분은 다시 일본인들이 장악했다. ‘주권 침탈은 문제지만 일본이 경제적으로 조선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김낙년 교수 등의 근대화론 주장도 잘못이다.”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국내 학자를 ‘매국노’ 취급하기도 한다. “근대화론은 비판자인 내가 보기에도 매우 강력한 주장이다. 그러나 인터넷 등에서 제대로 된 비판 논리를 찾아보기가 힘들고 감정적인 대응이 다수다. 그런 식으로는 ‘어쨌든 일본이 조선을 발전시킨 것 아니냐’는 일본 우익의 논리를 깨기 힘들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경제력 격차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1928년 통계를 보면 당시 조선 인구의 겨우 2.45%인 일본인이 우편저금의 86%를 갖고 있었다. 1인당 조선인보다 245배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일본의 잘못을 연구하고 들춰내게 된 동기는…. “(일제를 비판한 법학자) 사사가와 노리카쓰 일본 국제기독교대 명예교수님의 말씀처럼 ‘더 좋은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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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위한 큰 걸음… 영광의 얼굴들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5일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33회를 맞은 올해 인촌상은 교육, 언론·문화, 인문·사회, 과학·기술 4개 부문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4명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심사는 부문별로 권위 있는 외부 전문가가 3, 4명씩 참여해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진행했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공적을 소개한다.》 ▼ 이론-경험 겸비한 대표적 교육철학자 “교육은 백년대계 의미 명심해야할 때” ▼[교육]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일반적으로 교육 부문은 정치와 경제 문화 등의 다음에 위치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촌상은 수여하는 상 가운데 교육 부문을 가장 앞세웁니다. 망국의 시기, 교육으로 나라를 구하려 했던 인촌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상을 받게 돼 영광입니다.”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82)는 4일 인촌상 수상 소감으로 “교육계의 일원인 저는 누구보다도 이 상을 무겁게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수상 사실을 통보받은 뒤 내가 인촌상을 감당할 정도로 교육 분야에 기여한 것이 있었는지 되돌아봤다”며 “앞으로도 인촌의 정신을 기리고, 교육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명예교수는 한국 교육학계에서도 대표적인 교육철학자로 평가받는다. 30년 동안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를 지내며 교육철학과 교육정의론 등을 연구했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은 전국 각 대학에 포진해 한국 교육계의 핵심 학자로 성장했다. 더불어 이 명예교수는 이론과 현장을 모두 아우른 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본인 스스로 “초등학교 외에 거의 모든 교육현장을 경험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교수를 지내며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3년간 한국교육개발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2003년 서울대 교수직을 퇴임하고 강원 횡성군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전직 교육부 장관이 일선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건 처음이어서 당시 큰 화제가 됐다. 여기에는 이 명예교수의 ‘철학’이 숨어 있다. 그는 “김대중 정부 당시 새교육공동체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자립형사립고 도입을 주창했고 장관이 돼서 실제로 도입 방안을 연구했다”며 “과학자가 실험실에 가듯 교육학자로서 내가 만든 정책이 반영되는 현장을 찾아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3년에는 숙명여대를 운영하는 숙명학원 이사장을 맡아 재단 경영에 참여했다. 2016년부터 2년 동안 전문대인 김포대 총장을 맡기도 했다. 자립형사립고의 주창자였던 이 명예교수는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자율형사립고의 일반고 전환 정책에 대해 쓴소리를 남겼다. 그는 “교육은 학생들의 다양한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정책은 이를 역행하고 있다”며 “획일화된 교육 방식으로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다양한 분야의 영재를 발굴하고 양성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립학교 정책에 대해서도 “사학마다 각자의 건학 이념이 있는데 이를 지나치게 평준화시키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는 “교육에 정치 이념이 개입돼 정권에 따라 주요 정책이 수시로 바뀌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기 어렵다”며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불렀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고 교육계에 당부했다.● 공적서울대 교육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미국 웨인주립대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부터 30년 동안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를 지냈다. 한국교육개발원장(1995∼1998년), 교육부 장관(2000∼2001년), 민족사관고 교장(2003∼2008년), 숙명학원 이사장(2013∼2017년) 등을 역임했다. 1980년대 이후 근대 학문으로서 한국의 교육철학을 이끈 주도적 학자이면서 동시에 장관과 고교 교장, 학교법인 이사장 등의 직책을 맡아 자신의 교육철학을 현장에 접목시켰다. 자립형사립고 도입을 직접 발의해 현실화하기도 했다. ▼ 역사-폭력 탐구… 한국문학의 지평 넓혀 “박경리-박완서 선생님과 같은 상 기뻐” ▼[언론·문화]한강 소설가“박완서 박경리 선생님 같은 훌륭한 작가들이 수상한 상을 받게 돼 기쁩니다.” 인촌상 언론·문화 부문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49)은 최근 인터뷰에서 “인촌상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자세히 찾아봤다”며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그는 1993년 11월 계간지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는 정교한 시선으로 세상을 탐구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와 폭력성을 깊이 있게 사유한 작품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2016년 장편 ‘채식주의자’로 영국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문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한국인으로서 처음 이 상을 받은 그는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밀려드는 업무를 차분히 잘 헤쳐 나가자는 생각뿐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어 “그 뒤로 (집필 활동을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려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소설가 한승원(80)의 딸이다. 어린 시절 지천에 널린 아버지의 책과 더불어 자랐다. “책 속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니 현실의 세계가 절대적이지 않았고, 그렇게 두 세계에서 살 수 있었던 점이 유년기의 나를 도와줬다”고 한다. 소설을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무렵. 대학 시절 습작기를 거쳐 출판사에 취직한 뒤 3∼4시간씩만 자면서 글을 썼다. 뜨거움이나 열정보다 끈기로 소설을 써왔다고 자평했다. 그는 현재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2015년), ‘작별’(2018년)에 이은 ‘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집필 중이다. “‘여수의 사랑’에 실린 단편을 쓰던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을 쓰던 2015년 초까지 비슷한 밀도의 끈기로 작업해 온 것 같습니다. 최근 4년여 동안은 개인적 위기를 지나고 있어서 더 강한 끈기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세간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은 느낄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 수년째 붙들고 있는 이 소설은, 지극히 사적인 방식으로 돌파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올 6월 서울국제도서전을 끝으로 그는 칩거해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소설 생각뿐이다. 그는 “지금까지 쓰고 싶은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왔다. 그 결과는 통제 밖의 영역”이라며 “오직 쓰는 과정에 있는 사람만이 작가이며, 다행히 지금 쓰고 있으니 나는 아직 작가”라고 말했다. 이따금 그는 소설 밖을 꿈꾼다. “전에 만들고 불렀던 노래들을 담담하게 다시 녹음해보고 싶습니다. 그 사이 새로 만든 노래들도 넣고요. 음반 제목은 오래전 보았던 연극의 대사인 ‘안아주기에도 우리 삶은 너무 짧잖아요’로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백일몽일 뿐이지만 언젠가 그런 여유가 찾아올 수도 있겠지요.”● 공적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 ‘검은 사슴’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와 소설집 ‘노랑무늬 영원’ ‘내 여자의 열매’ ‘여수의 사랑’,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을 냈다.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채식주의자’의 영미판이 해외 언론에서 호평을 받고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 ‘몽골제국의 역사’ 연구서 세계적 성과 “중앙유라시아史로 韓 문화채널 확장” ▼[인문·사회]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인촌상을 받을 만큼 학문적 성과를 냈는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더욱 근실하게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64)는 수상 소식을 듣고 숙연해졌다고 했다. 김 교수는 국내 중앙유라시아사 연구의 선구자이자 몽골제국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연구 성과를 쏟아낸 석학이다. 몽골제국의 제도와 정책을 분석해 제국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유지된 단일한 실체로 입증했다. 1980년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당시 국내에서 불모지와 다름없던 이 분야 연구에 뛰어들었다. 중앙유라시아에서 명멸한 여러 민족의 역사를 그들의 입장에서 조명하기 위해 중국인의 시각이 반영된 한문 사료가 아니라 원 사료를 분석했다. 언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1980년대 중앙유라시아는 거의 공산권이어서서 현지 방문도 불가능했다. “15∼18세기 위구르 말은 미국에도 가르치는 분이 없어 독학했지요. 중세 텍스트는 현대어 사전에는 없는 어휘가 있어 여러 사전을 찾아보기를 되풀이했습니다.” 그가 해독할 수 있는 언어는 몽골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튀르크어, 위구르어 등 10개 정도 된다. 세계에 흩어진 사료를 수집하는 것도 난관이었다. 요즘은 웬만한 사료의 사본을 온라인으로 구할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만 해도 현지에 가서 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김 교수의 서울대 연구실에는 유라시아 각지의 박물관에서 복사하거나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해 인쇄한 자료들이 빼곡하다. 한때 중앙유라시아를 누비며 찬란한 문화를 만들었지만 현대에는 위축됐거나 다른 나라의 구성원으로 살았던 유목 민족의 역사가 객관적인 시선에서 되살아났다. 19세기 중반 중국 서북부 신장(新彊)지역 무슬림의 혁명운동을 다룬 연구서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사계절)은 미국 스탠퍼드대가 ‘Holy War in China’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몽골제국과 고려’(서울대출판부), 몽골제국의 역사를 페르시아어로 기록한 ‘집사(集史)’의 역주서, 교양서 ‘황하에서 천산까지’(사계절),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돌베개) 등 여러 저서를 냈다. 2017년부터는 국제역사학회 한국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정년을 맞는 그는 연구에 집중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가 세계 학자 약 40명의 글을 모아 출판하는 ‘몽골제국사’의 책임편집을 계속하는 한편 몽골제국의 군사, 민정, 교통, 통신 등 ‘제국적 제도’를 몽골인의 관점에서 총괄하는 책을 쓸 계획이다. “우리의 문화적 관심과 지식이 지역적으로 편향돼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중국 일변도였고, 현대에는 서구 일변도지요. 신라부터 조선 초까지 우리의 문화 채널은 초원과 유라시아 멀리까지 연결돼 있었어요. 우리 문화의 또 다른 근원이자 역동성의 원천이죠. 중앙유라시아사 연구를 통해 우리의 문화적 채널도 다양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적 중앙유라시아사 연구에 40년 가까이 천착하며 이 분야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유목 소수민족의 역사를 그들의 주체적인 시각으로 서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6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제자들을 양성했다. 1993년 중앙아시아연구회를 창설했고 2002년 중앙아시아학회장을 지냈다. 대중성을 갖춘 여러 저술도 이 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지적 영역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 데이터로 미래 예측하는 통계학 석학 “길을 잃은 시대,불확실성 줄여나갈것” ▼[과학·기술]박병욱 서울대 통계학과 교수“큰 상을 받아서 놀랍고 감사합니다. 통계의 중요성을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박병욱 서울대 통계학과 교수(58)는 한국 통계학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학자 중 한 명이다. 전 세계 통계학자 및 통계 전문가들의 국제기구인 국제통계기구(ISI)의 부회장에 8월 취임했다. 지난해에는 세계 수학자들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수학자대회에서 통계학자로는 이례적으로 초청강연을 했다. 학문적 성과를 수학자들도 인정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통계학자로서 한국사회에서 큰 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데이터의 시대지만, 역설적으로 데이터를 다루는 통계학이 설 자리가 그렇게 넓지만은 않다는 생각에서다. “통계에 대한 조예 없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다루는 사례를 많이 봅니다. 이에 따라 왜곡된 사실이나 잘못된 정보가 퍼지기도 하지요. 전문가인 통계학자에게 검토만 받아도 되는 일인데, 잘 안 됩니다. 몸이 아플 때 의사를 찾는 일은 상식이 됐지만, 통계 분석이 필요할 때 통계학자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의사를 찾지 않는 사람은 자신만 손해지만, 통계학자를 찾지 않는 사회는 그 피해가 사회 전체에 미친다. 그 폐해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게 박 교수의 생각이다. 데이터의 양이 방대해졌고 복잡해진 반면 옥석을 가리기는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잘못된 분석이나 여론조사에 의한 가짜뉴스도 횡행한다. 포털 뉴스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잘못된 정보에 따른 편 가르기 싸움으로 늘 시끄럽다. 그는 “길을 잃은 시대에 통계와 데이터 분석으로 진실을 찾아나가고자 한다”고 했다. 데이터에서 법칙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이론을 연구한다. 특히 데이터가 추출된 곳(모집단)의 특성과 관계없이 데이터를 분석하는 ‘비모수 추론’이 그의 전문 분야다. 박 교수는 2017년 대선 데이터를 분석하는 연구를 하기도 했다. 전국 지역구별로 평균 나이와 교육 정도, 주거지 시세, 보험료 액수, 직전 총선에서의 정치 성향별 후보자 득표수 등을 바탕으로 대선에서 지역구별 득표를 예측하는 모형을 개발했다. 모형 예측치는 실제 득표 결과를 비교하니 정확히 들어맞았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가 많거나 돈이 많으면 보수화되고, 교육수준이 높으면 진보 성향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통계로 검증해 보면 조금 다릅니다. 나이는 정치 성향과 연관성이 있는데, 경제력은 영향이 없더군요. 교육은 오락가락합니다.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을 때까지는 보수 성향을 띠다가도 교육수준이 높아지면 진보 성향으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미래 예측은 틀릴 가능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통계학이 유용한 것은, 바로 그 불확실성을 계량화하고 조금이라도 줄여 나가려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공적 고통스러운 이론 증명 과정을 마치고 그 내용을 논문으로 쓸 때 어떤 취미보다 큰 즐거움을 느낀다는 천생 학자다. 서울대 계산통계학 학사,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통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를 거쳐 1988년부터 서울대 통계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통계학 분야 양대 학술지로 꼽히는 ‘미국통계학협회저널(JASA)’과 ‘통계학 연보(Annals of Statistics)’ 등에 발표한 논문 30여 편을 포함해 총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이설 기자 snow@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 제33회 인촌상 심사위원(가나다순)▽교육 △위원장 김도연 서울대 명예교수·전 포스텍 총장 △위원 김경성 서울교대 총장, 김성훈 동국대 교수, 백순근 서울대 교수 ▽언론·문화 △위원장 윤영철 연세대 미래캠퍼스 부총장 △위원 김은미 서울대 교수, 왕은철 전북대 교수, 최맹호 전 동아일보 부사장 ▽인문·사회 △위원장 박찬욱 전 서울대 총장직무대리 △위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이재열 서울대 교수 ▽과학·기술 △위원장 국양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 △위원 김성근 서울대 교수, 김승환 포스텍 교수, 전호환 부산대 총장}

    • 201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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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장안성 건축양식, 유목민족 영향받은 것”

    유목민족이 중국의 전통적인 도성 형식에 미친 영향을 조명한 연구서 2권이 나왔다. 박한제 서울대 명예교수(74·동양사학)는 ‘중국 중세도성과 호한체제’(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중국 도성 건설과 입지’(〃)를 최근 출간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수·당대 장안성이 앞서 북중국을 통치한 유목민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주장했다. 당대 장안성에서는 곽(郭·도읍을 둘러싼 외성) 안을 가축우리처럼 담 벽(墻·장)으로 분할하는 방장제(坊墻制)를 실시했다. 장안의 주민은 ‘방’의 문이 열리는 낮에는 자유롭게 외부에서 활동할 수 있었지만 문이 닫히기 전 모두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방장제를 통해 적은 인력으로 다수의 적대적인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는데, 이는 유목민족이 가축을 기르는 것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장안성의 궁성이 한족의 전통처럼 도성의 중앙에 자리하지 않고 북쪽에 치우친 것 역시 유목민족의 유산이라고 한다. 황제가 사는 궁성이 적대적인 백성에게 포위당하는 걸 막기 위해 도성 북쪽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궁성과 접한 드넓은 후원은 유목민 출신 황제가 반란이 일어났을 때 피할 수 있는 장소가 됐다. 저자는 이처럼 장안성은 한족의 전통과 오랑캐(胡族·호족)로 불리던 유목민족의 영향이 뒤섞인 ‘호한(胡漢)체제’적 성격이 강하다고 주장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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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인들, 日 강제징용에 목숨걸고 저항

    “일제의 강제동원에 조선인들은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혼자 탈출하거나 읍·면 직원과 경찰에게 보복했고, 집단 탈출과 비밀 결사를 비롯한 조직적 징용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과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 등 주요 역사연구기관은 일제 식민지 피해 실태와 과제를 조명하는 심포지엄을 4일 서울 서대문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공동으로 개최한다. 미리 공개한 심포지엄 발표문에서 노영종 국가기록원 연구관은 “조선인은 파업, 태업, 무력행사 등의 노동쟁의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강제동원에 저항했다”고 말했다. 노 연구관은 발표문 ‘충남지역 강제동원 현황과 거부투쟁’에서 “조선인은 강제동원 현지뿐 아니라 숙박지와 기차역, 달리는 열차 등 동원 과정에서 끊임없이 탈출했다”면서 “집단 탈출은 일제의 전력(戰力)을 약화시키기 위한 독립운동 방략으로 적극적인 저항의 형태였다”고 밝혔다. 그는 충남 출신이 주도적으로 이끈 노동쟁의로 1941년 10월 시즈오카 도이광업소와 1942년 4월 야마구치현의 히가시미조메 탄광, 홋카이도 아사지노 비행장, 1943년 8월 야마구치현 일본광업 산요무연탄광업소에서 벌인 무력항쟁, 1944년 효고현 가와사키조선소에서벌인 집단항쟁 등을 꼽았다. 민족운동 성격의 노동쟁의로는 1944년 5∼9월 홋카이도 북해도철도공업의 이와다구미 조선인 토공(土工) 민족주의그룹사건과 1945년 2월 홋카이도 후지와라구미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1944년 8월∼1945년 8월 아사히카와 토공그룹의 독립운동 사건 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이밖에도 남상구 동북아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장이 ‘일본의 전후 처리와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인식’을, 박정애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이 ‘조선총독부 자료를 통해 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발표한다. 박정애 연구위원은 발표문에서 일본군 ‘위안부’ 자료 연구에 대해 조언했다. 그는 “‘위안부’ 피해가 반드시 위안소나 ‘위안부’라는 용어와 함께 자료에 기록된 것은 아니고 관할 경찰이나 헌병대에 대좌부(貸座敷), 요리점으로 등록돼 관리됐어도 사실은 공공연하게 위안소라 인식된 경우가 있다”며 “시기, 지역, 정치 상황별 실정을 이해하고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치밀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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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생 일군 재산 민족교육 희사… 목숨마저 조국독립에 바쳐

    “원래 의술을 잘 아시니까, 일 년에도 수천 원을 버시지마는 그 돈을 한 푼도 내게 주시지 아니하고 전부 학교에 기부하시면서,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나는 나 할 일이 있으니까’ 하십니다.”(동아일보 1920년 5월 4일자)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3대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사진)가 사형선고를 받은 뒤 아들이 옥중의 아버지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의 한 대목이다. 2일 의거 100주년을 맞아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일군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민족 교육 사업에 희사한 강 의사의 면모가 주목받고 있다. 강 의사의 삶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1855년 평남 덕천군에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누나의 집에서 자랐다. 생계를 위해 한의학을 배운 뒤, 함남 홍원군에서 아들과 잡화상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논문 ‘한말 홍원지역 계몽운동 전개와 강우규의 현실인식’과 ‘강우규 의사 평전’(박환 지음·선인) 등을 통해 그의 삶을 살펴봤다. 강 의사가 민족의식에 눈을 뜬 건 함경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1935)를 만난 뒤로 보인다. 이동휘는 한국인의 정치활동이 봉쇄되자 대중 계몽운동을 펼쳤고, 이에 감화된 강 의사 역시 학교 설립에 나섰다. “홍원군 사립 영명학교는 임원 박치영 강찬구(姜燦九) 신영균 리기수 제씨가 열심 시무한 결과로 학도가 일진(日進)하여 70여 명에 달하였는데…”라는 대한매일신보(1909년 11월 24일자) 보도에서 강찬구가 강 의사다. 교육 사업은 만주에서도 이어졌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분개한 강 의사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연해주 하바롭스크를 거쳐 1917년에는 중국 길림성 요하현에 신흥동(新興洞)을 개척했다. 유랑 중이던 동포를 끌어들여 마을에는 한두 해 만에 100여 호가 자리를 잡았다. 1917년 봄 그는 신흥동에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돼 민족 교육에 전념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며 민족의식과 항일정신 고취에 앞장섰다고 한다. 한의업으로 번 수입은 거의 학교 운영에 투자했다. 신흥동은 나중에 러시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주민들을 규합해 만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그는 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결심했다. 그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자 자식들이 사식을 넣어주기 위해 일제의 감시 속에 친척 일가에게 돈을 빌리려 애쓰는 모습을 동아일보가 자세히 보도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평전에서 “강우규는 재력가였지만 돈을 모두 나라를 위한 일에 썼기 때문에 남겨진 가족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강 의사가 법정에서 설파한 ‘동양평화론’ 역시 새삼 주목된다. 그는 상고취지서에서 “동양 분쟁의 씨를 거두어 평화회의를 성립시켜야 한다. 그리고 동양 3국을 정립(鼎立)하게 하여 견고히 자립한 후”라고 썼다. 또 “내가 죽은 뒤에라도 동양평화를 위하여 깊이 생각할지어다. 동양 즉 한중일 삼국이 정립한 동양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라. 내가 죽은 뒤에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독립신문 1920년 5월 6일자)고 말했다. 김형목 연구위원은 “일제의 고문과 회유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민족지도자, 선각자로서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는 2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 대강당에서 의거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  ▼강우규 의사 순국때까지 재판과정-인생역정 집중보도▼ “만일 네가 내가 사형 받는 것을 슬퍼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면 나의 자식이 아니다. …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이번에 죽으면 내가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강우규 의사를 면회한 아들이 전한 강 의사의 유언과 같은 말이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 기사 “강우규는 결국 사형, 작일(昨日) 오전 고등법원에서 마침내 상고를 기각하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유언은 강 의사가 얼마나 간절히 조선 청년의 교육을 염원했는지 그대로 전해준다. 기사는 또 “한평생 북조선 남만주로 돌아다니시면서…당신(강 의사)이 설립하신 학교가 여섯 군데요, 예수교회가 세 군데”라고 아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창간호(1920년 4월 1일자)에 실린 “강우규 공판은 금월 오일 개정” 기사를 시작으로 그해에만 19개의 기사를 통해 강 의사의 재판과 인생 역정을 집중 조명했다. 한기형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최근 저서 ‘식민지 문역’에서 동아일보의 강우규 의사 보도가 “식민지 내셔널리즘의 극적인 확산을 유도했다”고 설명했다. 강 의사가 법정에 등장하는 모습을 “강우규는…얼굴에는 여전히 붉으려한 화기를 가득히 띠었으며 위엄 있는 팔자수염을 쓰다듬으며 서서히 들어오더니….”(1920년 4월 15일자)로 묘사한 것은 조선 대중에게 익숙한 중세 영웅전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는 분석이다. “재등(사이토 총독)이는…동양평화를 깨트리는 사람이며 인도정의를 무시하는 자임으로 나는 죽이려 한 것이오.…검사의 말에 나를 매명한(賣名漢)이라 하나 나는 죽어도 매명한은 아니오. 인도정의와 동양평화와 조국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친 자요”라는 강 의사의 법정 선언도 “강의(剛毅·강직하여 굴하지 않음)한 최후의 일언, 강우규의 목적은 총독을 살해, 동양평화를 위하야 몸을 바침”(1920년 4월 16일자) 기사로 전했다. 옥바라지하는 아들의 동정에도 지면을 할애했다. 사형이 확정된 날 저녁 “부친의 사형 결정을 듣고 치밀어 올라오는 효성과 진정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진정하지 못하던 강우규의 아들 강중건은 종로네거리에 나와서 하늘을 우러러 ‘주여 우리 민족도 모든 세계 각국에 있는 각 민족과 같이 행복 얻게 하여 주소서’ 기도를 하는 것을…”(1920년 5월 29일자 ‘종로에서 기도, 강우규의 아들이’)이라고 보도했다. 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위원은 논문에서 “동아일보사는 기획기사로 인간적인 강 의사의 생애를 보여줬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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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총독에 폭탄 던진 강우규 의사, 민족 교육에 평생 일군 재산 희사

    “원래 의술을 잘 아시니까, 일 년에도 수천 원을 버시지만은 그 돈을 한 푼도 내게 주시지 아니하고 전부 학교에 기부하시면서,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나는 나 할 일이 있으니까’ 하십니다.”(동아일보 1920년 5월 4일자)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3대 조선총독에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아들이 옥중의 아버지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의 한 대목이다. 2일 의거 100주년을 맞아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일군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민족 교육 사업에 희사한 강 의사의 면모가 주목받고 있다. 강 의사의 삶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1855년 평남 덕천군에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누나의 집에서 자랐다. 생계를 위해 한의학을 배운 뒤, 함남 홍원군에서 아들과 잡화상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논문 ‘한말 홍원지역 계몽운동 전개와 강우규의 현실인식’과 ‘강우규 의사 평전’(박환 지음·선인) 등을 통해 그의 삶을 살펴봤다. 강 의사가 민족의식에 눈을 뜬 건 함경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1935)를 만난 뒤로 보인다. 이동휘는 한국인의 정치활동이 봉쇄되자 대중 계몽운동을 펼쳤고, 이에 감화된 강 의사 역시 학교 설립에 나섰다. “홍원군 사립 영명학교는 임원 박치영 강찬구(姜燦九) 신영균 리기수 제씨가 열심 시무한 결과로 학도가 일진(日進)하여 70여 명에 달하였는데…”라는 대한매일신보(1909년 11월 24일자) 보도에서 강찬구가 강 의사다. 교육 사업은 만주에서도 이어졌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분개한 강 의사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1917년에는 중국 길림성 요하현에 신흥동(新興洞)을 개척했다. 유랑 중이던 동포를 끌어들여 마을에는 한두 해만에 100여 호가 자리를 잡았다. 1917년 봄 그는 신흥동에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돼 민족 교육에 전념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며 민족의식과 항일정신 고취에 앞장섰다고 한다. 한의업으로 번 수입은 거의 학교 운영에 투자했다. 신흥동은 나중에 러시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주민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벌인 그는 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결심했다. 그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자 자식들이 사식을 넣어주기 위해 일제의 감시 속에 친척 일가에게 돈을 빌리려 애쓰는 모습을 동아일보가 자세히 보도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평전에서 “강우규는 재력가였지만 돈을 모두 나라를 위한 일에 썼기 때문에 남겨진 가족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강 의사가 법정에서 설파한 ‘동양평화론’ 역시 새삼 주목된다. 그는 상고취지서에서 “동양 분쟁의 씨를 거두어 평화회의를 성립시켜야 한다. 그리고 동양 3국을 정립(鼎立)케 하여 견고히 자립한 후”라고 썼다. 또 “내가 죽은 뒤에라도 동양평화를 위하여 깊이 생각할지어다. 동양 즉 한중일 삼국이 정립한 동양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라. 내가 죽은 뒤에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독립신문 1920년 5월 6일자)고 말했다. 김형목 연구위원은 “일제의 고문과 회유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민족지도자, 선각자로서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는 2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 대강당에서 의거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 ▼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 ▼ “만일 네가 내가 사형 받는 것을 슬퍼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면 나의 자식이 아니다.…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내가 이번에 죽으면 내가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강우규 의사를 면회한 아들이 전한 강 의사의 유언과 같은 말이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 기사 “강우규는 결국 사형, 작일(昨日) 오전 고등법원에서 마침내 상고를 기각하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유언은 강 의사가 얼마나 간절히 조선 청년의 교육을 염원했는지 그대로 전해준다. 기사는 또 “한평생 북조선 남만주로 돌아다니시면서…당신(강 의사)이 설립하신 학교가 여섯 군데요, 예수교회가 세 군데”라고 아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창간호(1920년 4월 1일자)에 실린 “강우규 공판은 금월 오일 개정” 기사를 시작으로 그해에만 19개의 기사를 통해 강 의사의 재판과 인생 역정을 집중 조명했다. 한기형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최근 저서 ‘식민지 문역’에서 동아일보의 강우규 의사 보도가 “식민지 내셔널리즘의 극적인 확산을 유도했다”고 설명했다. 강 의사가 법정에 등장하는 모습을 “강우규는…얼굴에는 여전히 붉으려한 화기를 가득히 띠었으며 위엄 있는 팔자수염을 쓰다듬으며 서서히 들어오더니….”(1920년 4월 15일자)으로 묘사한 것은 조선 대중에게 익숙한 중세 영웅전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는 분석이다. “재등(사이토 총독)이는…동양평화를 깨트리는 사람이며 인도정의를 무시하는 자임으로 나는 죽이려 한 것이오.…검사의 말에 나를 매명한(賣名漢)이라 하나 나는 죽어도 매명한은 아니오. 인도정의와 동양평화와 조국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친 자요”라는 강 의사의 법정 선언도 “강의(剛毅·강직하여 굴하지 않음)한 최후의 일언, 강우규의 목적은 총독을 살해, 동양평화를 위하야 몸을 바침”(1920년 4월 16일자) 기사로 전했다. 옥바라지하는 아들의 동정에도 지면을 할애했다. 사형이 확정된 날 저녁 “부친의 사형결정을 듣고 치밀어 올라오는 효성과 진정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진정하지 못하던 강우규의 아들 강중건은 종로네거리에 나와서 하늘을 우러러 ‘주여 우리 민족도 모든 세계 각국에 있는 각 민족과 같이 행복 얻게 하여 주소서’ 기도를 하는 것을…”(1920년 5월 29일자 “종로에서 기도, 강우규의 아들이”)이라고 보도했다. 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위원은 논문에서 “동아일보사는 기획기사로 인간적인 강 의사의 생애를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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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공감’을 경계하라, 공정한 세상을 원한다면

    원제는 ‘Against Empathy(공감에 반대하며)’다. 공감에 반대한다는 게 말이 되나? 타인에게 공감하는 덕에 사람은 고통을 겪거나 불행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데 말이다. 혹자는 “악은 공감의 침식(侵蝕)”이라고도 주장한다. 보통 ‘공감’이라는 단어는 “배려하고,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능력”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물론 이런 능력에 저자가 반대하는 건 아니다.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공감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도덕적 행동이 공감에만 의존할 때 생기는 부작용을 지적한다. 첫 번째 문제는 공감이 ‘스포트라이트’와 같아서 조명받지 못한 이들의 고통과 불행을 가려 버린다는 데 있다. 저자는 2012년 미국 코네티컷주 뉴타운의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총기난사로 아이 20명이 살해당하자, 전 미국이 슬픔에 빠졌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해 시카고(범죄율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에서 살해당한 아동들은 이 사건 피해자보다 수가 더 많지만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한 실험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불치병에 걸린 아이들이 고통을 덜어주는 치료를 기다리고 있다는 상황을 설정한 실험이었다. 특정 소녀에게 공감을 유도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소녀의 치료를 앞당겨야 한다고 답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만큼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걸 인식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더구나 공감이라는 스포트라이트의 기준은 사람의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다. 백인은 흑인보다 백인의 입장에 공감하기 쉽다. 다른 공동체의 고통은 관심 밖의 일이 된다. 그 결과 수단 다르푸르에서 벌어진 학살보다 한 미국인 학생이 휴가 중 실종된 사건을 TV에서 더 많이 보도한다. 미국에서 교도소의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렇게 당해도 싼’ 이들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기부 프로그램의 연출자들이 외모가 반듯한 출연자를 선호한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다. 끔찍한 전쟁에 뛰어드는 일도 공감에 혐의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본인이 속한 공동체 속 소수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정이 다수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공감에 바탕을 둔 행동은 ‘패거리 짓기’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도덕, 연민, 친절, 사랑, 선량함, 정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감에 의존하는 건 잘못됐으며 이성적 판단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을 모색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효율적 이타주의’다. 하지만 공감만큼 사람을 열정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동인(動因)이 또 있을까 싶다. 무분별한 감정 이입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주장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저자 말마따나 제목을 ‘Against the Misapplication of Empathy(공감의 오용에 반대하며)’라고 짓는 게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지 않았을까.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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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30년 관료명단 ‘경주부사선생안’ 등 3건 보물된다

    문화재청은 고려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630년 동안 경주부(慶州府)에 부임한 관리들의 명단을 기록한 ‘경주부사선생안(慶州府司先生案)’을 비롯한 전적류(典籍類) 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28일 밝혔다. ‘선생안’은 조선시대 관서에서 전임(前任) 관원의 성명 관직명 생년 본관 등을 적어놓은 책으로 보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경주부사선생안은 1281∼1910년 호장(戶長·향리직의 우두머리)들의 명단을 망라했으며, 현존 선생안 가운데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르다. 이 밖에 고려와 조선시대 경상도에 부임한 관찰사 명단을 담은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1244년(고려 고종 31년)에 판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출한 것으로 보이는 불교 경전 ‘재조본 대승법계무차별론(再雕本 大乘法界無差別論)’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보물 지정은 의견 수렴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결정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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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가에 발 묶인 고전 번역서… 온라인에선 왜 못 보나

    삼국사기에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수록한 ‘동국통감(東國通鑑·고대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1485년 편찬한 사서)’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교육부 지원을 받아 약 20년 전 국역해 출판했다. 하지만 현재 대학도서관에나 가야 찾아볼 수 있다. 세금을 들여 우리 고전을 번역한 결과물 상당수가 이처럼 온라인 데이터베이스(DB)에서 누락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고전종합DB’에 서지정보가 등록된 고전 번역 자료는 대략 6423책. 이 가운데 정부가 번역예산을 지원한 사실이 확인되는 자료는 약 2772책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약 24.1%에 해당하는 669책은 온라인DB에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고전에서는 ‘책’이 오늘날 ‘권’과 같은 개념이며, ‘권’은 책을 내용으로 구분한 단위다. 이처럼 번역, 출판만 되고 온라인으로는 공개되지 않은 고전으로는 김시습 시문집인 ‘매월당집(梅月堂集)’,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조선후기 생활사를 보여주는 ‘이재난고(이齋亂藁)’ 등이 있다. 고전번역 관계자는 “정부 예산 지원 여부가 확실치 않은 3600여 책까지 포함하면, 실은 훨씬 더 많은 번역서를 정부 예산으로 번역했는데도 DB서비스는 안 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온라인에 공개되지 않은 고전을 번역예산 지원 주체별로 나눠 보면 한국연구재단이 지원한 번역서가 427책으로 가장 많다. 한국국학진흥원 간행 87책, 교육부 보조금 지원 74책, 한국학중앙연구원 번역 25책 등으로 나타났다. 번역된 고전을 원문과 함께 접할 수 있는 시스템은 이미 마련돼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뿐 아니라 ‘한국문집총간’ 등의 번역 결과물을 제공한다. 실제 온라인으로 공개된 것으로 분석된 2079책은 포털 지식백과나 한국국학진흥원의 ‘유교넷’ 등에 올라와 있는 일부 자료를 빼면 대부분 이 DB에 있다. 말 그대로 ‘종합DB’여서 고전번역원에 번역 결과물을 보내기만 하면 구축과 공개가 이뤄지는데도 실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식이 부족하던 1990년대까지야 그렇다 쳐도 인터넷이 대중화된 2000년대 이후 번역 결과물도 온라인으로 공개되지 않는 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번역사업 예산 지원을 신청할 때는 결과물의 DB 구축 계획을 포함시켜 놓고도 이행하지 않는 사례도 종종 있다고 한다. 학술지 ‘민족문화’ 최근호에 실린 ‘중국 고적의 개념과 규모’에 따르면 중국 고전의 규모는 대략 18만여 종으로 추산되며 약 17개의 분야별 DB를 통해 대대적으로 전산화가 이뤄지고 있다. 한국 고전적의 총 규모는 2만9252종으로 추산된다. 고전번역원 관계자는 “번역 결과물을 DB로 구축하면 공개 그 자체로도 대국민 서비스의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자동번역을 위한 코퍼스(corpus·연구를 위한 말뭉치) 구축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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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이상, 조선인 엔지니어 모임 ‘조선공학회’ 임원 활동”

    “일본 고등계 경찰의 비밀 보고 문서를 하나 찾았어요. 시인 이상이 조선인 엔지니어들이 결성한 ‘조선공학회(朝鮮工學會)’에서 1930년 임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이상, ‘날개’에서)에 날개를 다는 건 후인들의 몫일 게다. 문학평론가인 권영민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석좌겸임교수(71)가 2020년 이상(1910∼1937) 탄생 110주년을 앞두고 ‘이상 연구’(민음사)를 다음 달 중순 출간한다. 이상을 23년 동안 연구한 결과를 결산한 책이다. 권 교수는 책 머리말에 “그(이상)의 글들은 … 텍스트의 상호연관성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산한다”고 썼다. 이상은 죽었지만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한 권 교수를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이번 책 ‘이상 연구’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이상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질적인 세계를 융합한 21세기형 지식인이다. 20세기 초 과학기술의 획기적 발달, 미술에서 표현주의 이후 입체파의 등장, 문학의 심리주의적 경향 등 문명의 전환기적 상황을 깊이 있게 관찰하면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일례로 연작 시 ‘오감도’는 정서적 요소를 제거하고 핵심 개념만 아주 단조로운 문장으로 남겼는데, 이는 미술의 추상 기법과 연결된다. 단편 ‘지도의 암실’ 등에서는 자신이 본 영화의 에피소드나 장면 전환 기법을 소설에 도입했다. 이런 면모를 텍스트를 통해서 확인했다.” ―이상 문학의 위상은…. “이상은 문학적 감각, 감성을 변혁하고자 했다. 그의 문학은 전통적 문학 형식과 결별하면서 개인적 주체로서 작가 자신을 타자처럼 객관화해 그 내면 의식을 보여준다. 한국문학의 모더니티 인식은 이상 문학의 등장과 함께 성격과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대 독자들은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상은 개인의 삶이 식민지 지배 권력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고, 가치가 전도되는지를 흥미롭고 파격적으로 드러냈다. ‘작은 알갱이의 문학’을 한 것 같지만 그를 통해 보이지 않는 전체를 드러냈던 것이다. 당대 독자뿐 아니라 작가들도 이상을 낯설어했다.” ―‘식민지 근대’의 문화적 특징은…. “호미 바바(70·인도 출신의 문학평론가) 같은 탈식민주의 문학론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식민지 문화는 숙명적으로 양가성을 가진다. 지배 권력과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지향이 한 축 위에서 팽팽히 긴장하며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가성을 인정하는 통합적 안목이 필요하다.” 이상은 일본인 학생들을 제치고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공) 건축과를 수석 졸업한 뒤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사로 채용됐다. 권 교수는 1930년 6월 26일 종로경찰서장이 경성지방법원 담당 일본인 검사에게 보낸 ‘경종경고비(京鍾警高秘)’ 문서에 이상의 본명 ‘김해경’이 조선공학회 임원으로 등장한다는 걸 새로 밝혀냈다. 권 교수는 “이상이 일본인 중심의 조선건축회에 정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중에 조선공학회에 가담한 사실은 조선인 건축기사로서 지니던 자기 정체성의 인식과 연관되는 문제여서 주목된다”고 말했다. 조선공학회는 어떤 단체였기에 일경의 감시 대상에 올랐을까. 1929년 2월 3일 발기인총회를 열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공학회의 설립―조선인 공업 발전에 진력하라’(1929년 2월 12일)라는 사설을 쓰며 특별한 기대를 표시했다. 중외일보 보도에는 조선공학회가 1930년 8월 연 평안북도 선천(宣川) 강연회에서 “그중 연사 유용선 군은 경관의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강연을 끝맺지 못하고 부득이 중지하고 말 때에 일반 청중은 박수갈채로 강연을 계속하라고 소동하였다”고 나온다. 조선공학회가 공학과 기술의 실력 양성을 주장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했을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권 교수는 2014년부터 버클리대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대학 동아시아어문학과 내에 2023년 정식으로 한국학 전공을 개설하는 게 권 교수의 목표다. 어쩌다 종일 우리말을 한마디도 못 하는 날에는 혼잣말로 “이 형(이문열 소설가)” “윤 형(윤후명 소설가)”을 부르며 그들과 소설에 대한 상상의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왜 고생을 사서 하시느냐’고 묻자 “한국문학의 좁은 영토를 넓히고자 한다”며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깊이 있게 공부한 고급 독자층의 저변을 넓혀야 한다”고 답했다. 권 교수는 그간 한국문학 수업에 영어 교과서로 쓸 만한 책을 집필해왔다. 그 성과로 브루스 풀턴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와 공저한 ‘What Is Korean Literature’(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올가을 버클리대에서 출판한다. 권 교수가 같은 목적으로 집필하고 있는 ‘Modern Korean Literature’(한국 현대문학)는 하버드대에서 출간이 결정됐다고 한다. 권 교수는 “한국문학이 본격 번역되기 시작한 것도 불과 20년 정도고, 해외 일반 독자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면서 “한국 독자가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읽고 지지해줘야 글로벌 작가가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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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문화재 반환 갈등 왜 해결되지 않나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에는 실물 크기에 가까운 나무 호랑이가 전시돼 있다. 호랑이가 누워 있는 영국 군인의 목을 물어뜯는 형상이다. 영국군이 1799년 인도 남서부 마이소르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약탈한 물건으로 원래 왕국의 지배자 티푸 술탄(재위 1782∼1799년)의 소유였다. 술탄의 이름을 따 ‘티푸의 호랑이’라고 불린다. 영국은 당시 이 조각품을 런던으로 옮긴 뒤 다른 전리품과 함께 인도 정복의 첨병인 동인도회사 인도관에서 전시했다. 티푸 술탄은 평소 자신을 호랑이와 동일시했고, 조각의 형상은 술탄의 용맹함과 영국군의 패배를 상징했다. 영국은 이런 ‘티푸의 호랑이’를 전시하면서 자국의 승리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관람객이 ‘동양의 야만성’을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전시는 영국이 티푸 술탄과 ‘인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지배하는 상징적 행위였던 셈이다. 제국의 문화재 약탈이 어떤 맥락에서 자행됐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문화재 약탈의 역사를 다루는 한편 문화재 개념의 등장부터 반환을 둘러싼 논쟁까지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약탈당한 나라의 문화재 반환 요구를 지지하면서도, “반환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해결이 어렵다고 본다. 사실 약탈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가 “돌려주지 않겠다”고 하면 별다른 방법이 없다. 반환 거부 논리를 치밀하게 반박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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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개토대왕 묻힌 곳은 태왕릉 아닌 장군총”

    출토된 와당(瓦當·지붕 기와 끝을 막는 막새기와)을 근거로 광개토대왕이 묻힌 왕릉이 태왕릉이 아니라 장군총일 가능성을 뒷받침한 연구가 나와 주목된다. 공석구 한밭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학술지 ‘고구려발해연구’ 최근호에 실은 논문 ‘연꽃무늬 와당으로 본 광개토왕릉 비정’에서 “여러 와당과 명문(銘文) 기와 등의 유물을 종합해 보면 광개토대왕이 태왕릉에 묻혔다고 보기 어렵다”며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일 것”이라고 밝혔다.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안(集安)시에는 고구려 왕릉이 산재해 있다. 대중적으로는 광개토왕릉은 태왕릉, 장수왕릉은 장군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학계에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중국 학계는 광개토왕릉은 태왕릉이라고 보는 편이지만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태왕릉설과 장군총설이 경쟁하고 있다. 공 교수는 중국 측이 출간한 발굴보고서를 통해 출토 유물을 비교 분석했다. 그는 먼저 지안시에 있는 또 다른 고구려 고분인 천추총을 광개토대왕이 개·보수했다고 봤다. 천추총에서 광개토대왕의 생전 연호 ‘永樂(영락)’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또 천추총에서 함께 출토된 이파리 6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의 제작 시기 역시 광개토대왕 때라고 봤다. 광개토대왕이 천추총을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영락’ 명문 기와와 이 와당을 함께 제작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공 교수는 이 기와에 등장하는 ‘未(미)’자를 간지로 보아 제작 시점은 광개토대왕 재위 17년인 407년(정미년)이라고 봤다. 문제는 태왕릉에서도 이 와당과 문양의 구성 방식 등 모양이 거의 같은 이파리 6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이 출토됐다는 점이다. 공 교수는 “이는 천추총과 태왕릉을 비슷한 시기 개·보수했다는 뜻이고, 태왕릉 역시 광개토대왕 시절인 ‘영락’ 연간에 개·보수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태왕릉은 광개토왕릉이 될 수 없다. 왕의 사후, 장례의 일환으로 왕릉이 건설됐다고 볼 때 살아있는 광개토대왕이 생전에 무덤을 개·보수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공 교수는 태왕릉에 묻힌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의 선대왕인 고국양왕일 것이라고 봤다. 그럼 광개토대왕은 어디에 묻혔을까. 이 역시 또 다른 와당에 힌트가 있다. 태왕릉과 장군총에서는 모두 이파리 8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이 출토됐다. 이 역시 서로 모양이 거의 같아 같은 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공 교수는 “장수왕이 아버지의 무덤인 장군총을 축조하면서 이 와당을 썼고, 할아버지의 무덤인 태왕릉 역시 이 와당으로 함께 개·보수했던 것”이라며 “결국 장군총의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이라고 밝혔다. 장군총에서 연꽃무늬 와당이 한 종류만 출토된 것 역시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장군총은 축조된 이후 개·보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공 교수는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왕실이 직접 제사를 받들기 어려워진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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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자리-고임금 독점 386세대, 자식세대에 기회-자원 이전해야”

    “왜 한국 사회는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했는데도 갈수록 악화되는 불평등과 ‘갑질’, 불공정의 폭력으로 고통받는가. 왜, 어떻게 약속은 위반됐고, 권력은 공정하게 향유되고 행사되지 않는가.” 신간 ‘불평등의 세대―누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었는가’(문학과지성사·1만7000원·사진)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386세대 정치인들은 소득 불평등, 높은 비정규직 비율, 낮은 최저임금, 재벌의 이윤 추구 탓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저자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48)는 ‘386세대와 산업화 세대가 함께 만든 위계구조 탓’이 크다고 주장한다. 요약하자면 “청년 세대가 불행한 건 그 부모인 386세대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양질의 일자리와 높은 임금,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386세대가 각자 열심히 밥그릇을 챙기며 도생한 결과지만 다음 세대의 고통을 인정한다면 386세대가 앞장서서 노동시장과 정치권력의 운용 시스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386세대 역시 연공제 속에서 그저 과실을 차지할 ‘자신들의 차례’가 된 것뿐 아닌가. “386세대는 인구 규모가 크고, 잘 조직화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연공제,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와 맞물리며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성과를 냈다. 이 거대한 코호트(인구 집단)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업은 채용 인원을 줄이거나 비정규직을 뽑았다. 그 결과 청년 세대는 얼마 안 되는 정규직을 두고 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정규직이 너무 잘 싸워서 임금을 올린 폐해가 하층 비정규직과 청년에게 돌아간 것이다. 산업화 세대는 386세대에게 완전 고용에 가까운 정규직 일자리를 물려줬다. 한데 왜 그들은 자식들에게 질 나쁜 노동시장을 물려주는가.” ―이 교수의 주장은 기업에서 386세대의 퇴출을 가속화하는 명분이 되는 것 아닌가. “386세대가 직장에서 나가야 한다거나 고용의 유연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조직에 숨통을 틔우고 청년의 고용을 늘리자는 거다. 유럽식으로 다 같이 조금 덜 받고, 조금 덜 일하면서 일자리를 나누자는 것이다. 상층 정규직들은 지나친 임금 상승 투쟁을 자제하고, 사회적 협약을 통해 ‘세대 간 연대 임금’을 도입하자는 거다. 독일 스웨덴 등은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누굴 위해서?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다.” ―임금피크제 한다고 기업이 청년 고용을 늘릴까. “국가가 선례를 보여줘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내 임금을 깎아서 청년 사회복지사 한 명을 더 채용하는 데 쓰자’고 했으면 좋겠다. 장차관도 임금의 1%씩을 줄여서 세금을 올리지 않고 고용을 늘리는 걸 보여줘야 한다. 공기업에 확산시키면 사기업도 따라올 것이다. 기업은 위에 쓸 것을 줄여 신규 고용에 쓰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선례를 통해 룰을 만들면 사회가 바뀔 수 있다. 노사정위원회에 가서 이런 주장을 했는데 반기지 않더라.” ―현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추진했는데…. “자본에게 돈을 더 쓰라고 강제하는 것인데, 이게 386세대 진보 진영의 이념이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이 경쟁국과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분석은 논란이 있다. 자본이 추가 지출할 여력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기업에 덮어놓고 정규직화하라고 하면 오히려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결과만 낳는다. 1970, 80년대까지의 자본은 노동을 쥐어짰지만 오늘날의 자본은 자본 증식에 유리하면 우수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주지 말라고 해도 임금을 더 지출한다.” ―‘정년 65세 연장’이 추진되고 있다. “연장 논의를 하려면 386세대의 임금 삭감 논의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연봉 1억 원 근로자 고용을 5년 연장하면 5억 원이 더 든다. 기업은 당장 연봉 3000만 원인 청년 고용을 몇 자리 줄여야 한다. 단순한 산수다. 정년 연장을 하려면 자식 세대 눈치를 먼저 보는 게 염치다.”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올리려고 하는데…. “그러면 386세대는 지금부터 5∼10년만 연금을 더 붓고, 이후 30∼40년 동안 많이 받게 된다. 그 ‘땜빵’은 인구가 반밖에 안 되는 자식 세대가 해야 한다. 자식 세대는 동의 못 할 거고,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 연금은 낸 만큼 받는 식으로 세대별 연금 불입률과 수혜율을 조정해야 한다.” ―‘한국형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는데…. “지난 20년 동안 안전망 없는 고용유연화의 후과는 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노동권이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였다면, 앞으로는 일할 권리로 다시 규정해야 한다. 국가와 노조가 협력해서 일찍 퇴직하는 이들이 다른 일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을 책임지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 같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대해 기존 진보진영은 고용유연화가 가속화된다며 썩 반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연화의 비용을 비정규직과 젊은 세대가 계속 지도록 할 것인가.” 이 교수는 “386세대가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첫 번째 희생에 이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두 번째 희생’을 하라”고 말했다. 특정 세대가 손에 쥔 것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386세대는 자식 세대의 몫을 자신들이 끌어 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자산과 기회를 자기 자식에게만 물려주려 하지 말고, 자식 세대 전체에게 물려주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이 교수) ▼외환위기가 386세대 권력강화 낳았다▼‘불평등의 세대…’는 청춘을 희생해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화를 이끈 386세대가 오늘날 세대 간 불평등의 정점에 있다는 게 주된 요지다. 1997년 외환위기는 386세대가 ‘저절로’ 권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산업화 세대가 일찌감치 정리해고에 내몰리는 동안 기업의 밑바닥부터 허리를 구성하고 있던 386세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업들이 10년 가까이 신규 채용을 줄여 아랫세대의 비중 역시 줄었다. 살아남은 386세대와 노조는 ‘사회 연대’ ‘사회 개혁 투쟁’ 대신 ‘전투적 경제주의’에 입각해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데 몰입했다. 또한 386세대는 산업화 세대가 만든 부의 불평등을 물려받았고, 2000년대 중반 부동산 폭등 시기에 자산을 축적할 기회를 얻었다. 세대 간 불평등과 386세대 비판은 기존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데이터를 통해 정밀하게 이를 보여준다. 국회의원 입후보자 및 당선자 수, 기업 이사진 점유, 대기업 및 정규직 등 상층 노동시장의 점유율, 근속연수, 인구 대비 소득 점유율, 소득 상승률 등 386세대의 독점과 상대적 장기 집권을 그대로 보여주는 각종 지표가 책에 빼곡하다. 이철승 교수는 386세대는 “다른 세대가 취할 수 없는 지위를 통해 뭉친 배타적 권력·이익 독점체”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묻는다. “이 세대가 오늘날 노동시장에서 고통받는 20, 30대 청년세대와 바로 아래에서 희생한 40대, 그리고 위계구조의 최대 희생자 집단인 여성과 비정규직을 대표하지 못한다면, 산업화 세대의 정치권력과 무엇이 다른가?”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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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승 교수 “청년 세대가 불행한 건, 부모인 386세대의 권력 독점 때문”

    “왜 한국 사회는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했는데도 갈수록 악화되는 불평등과 ‘갑질’, 불공정의 폭력으로 고통받는가. 왜, 어떻게 약속은 위반됐고, 권력은 공정하게 향유되고 행사되지 않는가.” 신간 ‘불평등의 세대―누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었는가’(문학과지성사·1만7000원)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386세대 정치인들은 소득 불평등, 높은 비정규직 비율, 낮은 최저임금, 재벌의 이윤 추구 탓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저자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48)는 ‘386세대와 산업화세대가 함께 만든 위계구조’ 탓이 크다고 주장한다. 요약하자면 “청년 세대가 불행한 건 그 부모인 386세대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양질의 일자리와 높은 임금,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386세대가 각자 열심히 밥그릇을 챙기며 도생한 결과지만 다음 세대의 고통을 인정한다면 386세대가 앞장서서 노동시장과 정치권력의 운용 시스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386세대 역시 연공제 속에서 그저 과실을 차지할 ‘자신들의 차례’가 된 것뿐 아닌가. “386세대는 인구 규모가 크고, 잘 조직화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연공제,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와 맞물리며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성과를 냈다. 이 거대한 코호트(인구 집단)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업은 채용 인원을 줄이거나 비정규직을 뽑았다. 그 결과 청년 세대는 얼마 안 되는 정규직을 두고 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정규직이 너무 잘 싸워서 임금을 올린 폐해가 하층 비정규직과 청년에게 돌아간 것이다. 산업화세대는 386세대에게 완전 고용에 가까운 정규직 일자리를 물려줬다. 한데 왜 그들은 자식들에게 질 나쁜 노동시장을 물려주는가.” ―이 교수의 주장은 기업에서 386세대의 퇴출을 가속화하는 명분이 되는 것 아닌가. “386세대가 직장에서 나가야 한다거나 고용의 유연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조직에 숨통을 틔우고 청년의 고용을 늘리자는 거다. 유럽식으로 다같이 조금 덜 받고, 조금 덜 일하면서 일자리를 나누자는 것이다. 상층 정규직들은 지나친 임금 상승 투쟁을 자제하고, 사회적 협약을 통해 ‘세대 간 연대 임금’을 도입하자는 거다. 독일 스웨덴 등은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누굴 위해서?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다고 기업이 청년 고용을 늘릴까. “국가가 선례를 보여줘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내 임금을 깎아서 청년 사회복지사 한 명을 더 채용하는 데 쓰자’고 했으면 좋겠다. 장차관도 임금의 1%씩을 줄여서 세금을 올리지 않고 고용을 늘리는 걸 보여줘야 한다. 공기업에 확산시키면 사기업도 따라올 것이다. 기업은 위에 쓸 것을 줄여 신규 고용에 쓰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선례를 통해 룰을 만들면 사회가 바뀔 수 있다. 노사정위원회에 가서 이런 주장을 했는데 반기지 않더라.” ―현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했는데…. “자본에게 돈을 더 쓰라고 강제하는 것인데, 이게 386세대 진보 진영의 이념이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이 경쟁국과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분석은 논란이 있다. 자본이 추가 지출할 여력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기업에 덮어놓고 정규직화하라고 하면 오히려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결과만 낳는다. 1970, 80년대까지의 자본은 노동을 쥐어짰지만 오늘날의 자본은 자본 증식에 유리하면 우수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주지 말라고 해도 임금을 더 지출한다.” ―‘정년 65세 연장’이 추진되고 있다. “연장 논의를 하려면 386세대의 임금 삭감 논의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연봉 1억 원 근로자 고용을 5년 연장하면 5억 원이 더 든다. 기업은 당장 연봉 3000만 원인 청년 고용을 몇 자리 줄여야 한다. 단순한 산수다. 정년 연장을 하려면 자식 세대 눈치를 먼저 보는 게 염치다.”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올리려고 하는데…. “그러면 386세대는 지금부터 5~10년만 연금을 더 붓고, 이후 30~40년 동안 많이 받게 된다. 그 ‘땜빵’은 인구가 반밖에 안 되는 자식 세대가 해야 한다. 자식 세대는 동의 못 할 거고,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 연금은 낸 만큼 받는 식으로 세대별 연금 불입률과 수혜율을 조정해야 한다.” ―‘한국형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는데…. “지난 20년 동안 안전망 없는 고용유연화의 후과는 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노동권이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였다면, 앞으로는 일할 권리로 다시 규정해야 한다. 국가와 노조가 협력해서 일찍 퇴직하는 이들이 다른 일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을 책임지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 같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대해 기존 진보진영은 고용유연화가 가속화된다며 썩 반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연화의 비용을 비정규직과 젊은 세대가 계속 지도록 할 것인가.” 이 교수는 “386세대가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첫 번째 희생에 이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두 번째 희생’을 하라”고 말했다. 특정 세대가 손에 쥔 것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386세대는 자식 세대의 몫을 자신들이 끌어 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자산과 기회를 자기 자식에게만 물려주려 하지 말고, 자식 세대 전체에게 물려주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이 교수)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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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지혜와 통찰 담긴 황현산의 짧은 글

    8일 1주기를 맞은 고 황현산 문학평론가(1945∼2018)의 트윗 모음집(‘내가 모르는…’)과 평론집(‘잘 표현된…’)이다. 고인은 2014년 11월 8일부터 2018년 6월 25일까지 자신의 계정(@septuor1)에 분야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트윗을 올렸다. “내 책 제목 ‘밤이 선생이다’는 프랑스의 속담 ‘La nuit porte conseil’을 자유 번역한 말이다. 직역하면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오지’라는 말로 어떤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한밤 자고 나면 해결책이 떠오를 것’이라는 위로의 인사다.”2015년 8월 3일 트윗이다. 어느 날 아들이 트위터를 왜 하느냐고 묻자 고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잘 표현된…’은 절판됐던 고인의 2012년 문학평론집으로 제20회 대산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시와 끊임없이 교섭했던’ 고인의 애정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나에게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이다.…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책머리에’에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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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현판 ‘검정 바탕 금박 글씨’로

    광화문 현판이 바탕은 검은색, 글자는 동판 위에 금박으로 다시 제작된다. 단청은 전통 소재 안료를 사용한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 보고를 거쳐 최종 결정을 했다”며 “원형 고증과 제작 방침은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소장 사진(1893년경 촬영)과 지난해 발견된 일본 와세다대 소장 ‘경복궁 영건일기’(1902년)를 참고했다”고 14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2010년 8월 광화문 현판을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복원했다. “다른 궁궐 전각 등에 비춰 볼 때 색깔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이어졌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6년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본명 김영준) 대표가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자료에서 검은 바탕에 밝은 글씨의 현판이 걸린 광화문 옛 사진을 찾아내 본보에 공개했다. 이후 문화재청은 연구 용역을 거쳐 지난해 1월 현판 바탕색이 검은색, 글자색이 금색이라고 인정했다. 지난해에는 ‘경복궁 영건일기’ 등의 사료를 통해 원래 현판 글자가 동판에 도금된 것이 추가로 밝혀졌다. 궁궐 현판에 동판을 쓴 사례는 경복궁 근정전과 덕수궁 중화전 정도이며, 현판 동판을 제작한 경험이 있는 장인이 현재 없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이번 동판의 시범 제작은 국가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가구에 덧대는 금속 장식을 만드는 장인) 보유자 박문열 씨와 문화재수리기능자 박갑용 씨(도금공)가 함께 맡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광화문 현판은 현재 글자를 새기는 작업까지 마쳤고, 연말까지 채색을 마무리할 예정”이라며 “새 현판을 내년 이후 걸 예정인데, 정확한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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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 “개인청구권 인정 韓 대법 판결, 日 헌법 정신과도 부합”

    “일본 헌법 전문은 일본에 의한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를 반성하고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전 세계의 평화를 실현하고자 한다. 오늘날 피해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배상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헌법의 취지에 반해 식민지 시대와 침략전쟁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문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낸 피해배상 소송이 일본의 법정에서 ‘딱 한 번’ 1심에서 일부 승소한 적이 있다. 1992년 12월 제소해 1998년 4월 1심 판결이 난 이른바 ‘관부(關釜·부산―시모노세키) 재판’이다. 이 소송을 비롯해 30년 가까이 일본의 과거사 관련 재판에서 피해자 원고를 대리하고 있는 야마모토 세이타(山本晴太·66) 변호사는 14일 이렇게 말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날 제2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국제학술회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적 과제’를 열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관부 재판과 헌법재판소 결정, 일본국 헌법과 대한민국 헌법’을 발표했다. 그는 “배상이 실현되지 못한 건 일본 법체계와 헌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와 국민의 과거 역사 인식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전후 배상 문제는 아시아의 피해자들에 대한 입법이 결여된 ‘입법부작위’의 문제”라며 일본 헌법을 근거로 정부 책임을 추궁한 관부 재판 당시의 논리를 설명했다. 그는 “한국 헌법의 근본이념을 근거로 식민 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한일 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 한국 대법원 판결과 일본 헌법의 이념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한국과 일본 헌법은 개인의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며 “한국 대법원 판결과 관부 재판 판결 역시 궤를 같이한다”고 덧붙였다. ‘관부 재판’ 이야기는 김희애 김해숙 등이 출연한 영화 ‘허스토리’로 제작돼 지난해 개봉됐다. 그러나 야마모토 변호사는 이날 “영화가 피해자 원고는 물론 재판 관계자를 취재하지 않은 채 만들어졌고, 재판의 실상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며 “픽션이라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영화를 비판했다. 그는 영화 속 피해 사실은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집에서 모아 창작한 것일 뿐 실제 재판 원고들과는 다르다고 했다. 일례로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박소득 할머니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는 성폭행을 당하고 위안부가 됐다는 픽션이 첨가됐다는 것이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영화는 재판을 대체로 고립된 투쟁으로 그렸지만 실제 당시 언론과 일본 사회는 피해자들에게 호의적이었다”고 말했다. 왕쭝런(王宗仁)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둥닝(東寧)현의 둥닝요새박물관 연구원은 이날 발표에서 소련 국경에 투입된 일본 관동군 진지 부근 위안소의 실태를 밝혔다. 둥닝요새는 1934년 6월 설치됐으며, 3개 사단과 국경수비대 등이 둥닝에 주둔했다. 1941년 대규모 훈련 때는 이 지역 국경선에 병력 13만 명이 투입되기도 했다. 왕 연구원은 “국경 진지 부근 ‘위안소’는 50여 곳이었다”며 “일본군은 1945년 패망 당시 ‘위안부’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위안부가 소련군에게 정보를 제공할 것을 우려해 독약이나 폭탄으로 살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1946년 둥닝현 정부 조사에서 귀향하지 못한 위안부 가운데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고 덧붙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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