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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무언가를 만드는 뿌듯함을 어디 비할까. 제품을 직접 만들어 쓰며 생산자로 변하는 소비자들이 점차 늘고 있다.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손수 하기에는 힘든 일이 많다. 어느 정도 손질된 재료나 ‘반(半)제품’을 활용해 수고는 최소화하고 만드는 기쁨은 최대한 누리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중간부터’ 만드는 셈이다.》 2년 전부터 취미로 전통 목공을 배우는 김상진 씨(58)는 식탁, 사방탁자(사방이 트이고 여러 층으로 된 전통 탁자), 의자, 휴대전화 거치대, 좌탁(坐卓) 등 웬만한 목조 가구를 만들었다. 초심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난관은 단연 나무를 정확히 재단하는 것. 마름질이 잘못되면 ‘짜맞춤’(못을 쓰지 않고 목재를 연결)을 하는 건 바라기 어렵다. 그래서 재료는 마름질한 채로 공방 ‘난가소목’(경기 과천시)에서 받는다고 한다. 난가소목의 정종상 소목장(51)은 “개인이 기계톱을 갖고 있기는 어려우니,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기까지는 다듬은 재료를 활용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했다. 요즘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클릭 몇 번 하면 원하는 치수에 맞춰 재단한 목재를 배달해주기도 한다. 역시 목재로 쓰레기통, 수납장 등을 만들어 쓰는 송인석 씨(40)는 “원목부터 손질하면 가장 좋겠지만 다듬어진 목재로 만들어도 내 손으로 가구를 만들었다는 기쁨은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 다듬어진 재료나 반제품 시장은 자수, 액세서리, 인테리어 소품, 옷, 데스크톱 컴퓨터 등 생활용품 전반에서 형성돼 있다. 만드는 ‘손맛’을 알게 되면 기성품의 품질을 뛰어넘는 심오한 세계에 들어서기도 한다. 약 10년 전부터 취미로 천체망원경을 만들고 있는 한승환 씨(44)가 그런 경우다. 한 씨는 해외에서 렌즈용 특수 유리를 구입해 반사망원경의 핵심 부품인 반사경을 20nm(나노미터) 단위의 정밀도를 얻을 때까지 손수 오목하게 깎는다. 최대 직경 355mm(약 14인치)의 반사경을 만들고 경통 등 다른 부속을 결합하는데, 초점 조절 장비는 기성품을 쓰고, 망원경 앞뒤를 막는 금속 부품은 온라인으로 도면을 보내면 배달해준다. 이렇게 만든 망원경은 보급형보다 정밀도가 높고, 행성 사진을 고배율로 촬영할 수 있다. 한 씨는 “상상하던 망원경을 정성 들여 현실로 만들면 희열과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마저도 귀찮은 소비자를 위해 80∼90% 완성된 제품에 약간의 수고만 더하면 되는 제품 시장도 활짝 열리고 있다. ‘만드는’ 느낌만 주는 것이다. 워킹맘 이연서 씨(36)의 집에는 요즘 아침마다 갓 구운 빵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한 냉동생지(빵 반죽)를 에어프라이어로 굽는 냄새다. 빵 만들기를 좋아해 베이킹을 배우기도 했지만 시간을 내기 어렵던 차에 아쉬운 대로 ‘굽는다는 느낌’이라도 즐긴다는 것이다. 이 씨는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어느 세월에 반죽을 하고 있겠나”라며 “특히 갓 구운 향과 바삭한 느낌이 중요한 크루아상의 만족도가 높다. 때로 반을 잘라 햄, 치즈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면 느낌만은 마치 처음부터 손수 빵을 만든 듯하다”고 했다. 냉동생지 소비가 늘자 대형마트의 상품 출시도 잇따르고 있다. 롯데마트에 따르면 집에서 간편히 조리해 먹을 수 있는 가정간편식(HMR)의 매출이 올해 11월 20일까지 전년 동기보다 7.4% 늘었다. 호떡 등을 만드는 믹스 제품도 마찬가지다. 반제품 시장은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배경에는 취미와 여가로 ‘DIY’를 즐기는 층의 확대와 불경기 속 ‘가성비’ 소비문화가 맞물려 있다. 한국소비자원장을 지낸 이승신 건국대 글로벌비즈니스학과 교수는 “다듬은 재료나 반제품을 공급하는 틈새시장에서 다양한 창조적 스타트업 기업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인 이들을 위한 시장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조종엽 jjj@donga.com·김기윤 기자}

손수 무언가를 만드는 뿌듯함을 어디 비할까. 제품을 직접 만들어 쓰며 생산자로 변하는 소비자들이 점차 늘고 있다.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손수 하기에는 힘든 일이 많다. 어느 정도 손질된 재료나 ‘반(半)제품’을 활용해 수고는 최소화하고 만드는 기쁨은 최대한 누리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중간부터’ 만드는 셈이다. 2년 전부터 취미로 전통 목공을 배우는 김상진 씨(58)는 식탁, 사방탁자(사방이 트이고 여러 층으로 된 전통 탁자), 의자, 휴대전화 거치대, 좌탁(坐卓) 등 웬만한 목조 가구를 만들었다. 초심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난관은 단연 나무를 정확히 재단하는 것. 마름질이 잘못되면 ‘짜맞춤’(못을 쓰지 않고 목재를 연결)을 하는 건 바라기 어렵다. 그래서 재료는 마름질한 채로 공방 ‘난가소목’(경기 과천시)에서 받는다고 한다. 난가소목의 정종상 소목장(51)은 “개인이 기계톱을 갖고 있기는 어려우니,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기까지는 다듬은 재료를 활용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했다. 요즘에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클릭 몇 번 하면 원하는 치수에 맞춰 재단한 목재를 배달해주기도 한다. 역시 목재로 쓰레기통, 수납장 등을 만들어 쓰는 송인석 씨(40)는 “원목부터 손질하면 가장 좋겠지만 다듬어진 목재로 만들어도 내 손으로 가구를 만들었다는 기쁨은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 다듬어진 재료나 반(半)제품 시장은 자수, 액세서리, 인테리어 소품, 옷, 데스크톱 컴퓨터 등 생활용품 전반에서 형성돼 있다. 만드는 ‘손맛’을 알게 되면 기성품의 품질을 뛰어넘는 심오한 세계에 들어서기도 한다. 약 10년 전부터 취미로 천체망원경을 만드는 한승환 씨(44)가 그런 경우다. 한 씨는 해외에서 렌즈용 특수 유리를 구입해 반사망원경의 핵심 부품인 반사경을 20nm(나노미터) 단위의 정밀도를 얻을 때까지 손수 오목하게 깎는다. 최대 직경 355mm(약 14인치)의 반사경을 만들고 경통 등 다른 부속을 결합하는데, 초점 조절 장비는 기성품을 쓰고, 망원경 앞뒤를 막는 금속 부품은 온라인으로 도면을 보내면 배달해준다. 이렇게 만든 망원경은 보급형보다 정밀도가 높고, 행성 사진을 고배율로 촬영할 수 있다. 한 씨는 “상상하던 망원경을 정성 들여 현실로 만들면 희열과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마저도 귀찮은 소비자를 위해서 80~90% 완성된 제품에 약간의 수고만 더하면 되는 제품 시장도 활짝 열리고 있다. ‘만드는’ 느낌만 주는 것이다. 워킹맘 이연서 씨(36)의 집에는 요즘 아침마다 갓 구운 빵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한 냉동생지를 에어 프라이어로 굽는 냄새다. 빵 만들기를 좋아해 베이킹을 배우기도 했지만 시간을 내기 어렵던 차에 아쉬운 대로 ‘굽는다는 느낌’이라도 즐긴다는 것이다. 이 씨는 “잠 잘 시간도 부족한데 어느 세월에 반죽을 하고 있겠나”라며 “특히 갓 구운 향과 바삭한 느낌이 중요한 크로아상의 만족도가 높다. 때로 반을 잘라 햄, 치즈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면 느낌만은 마치 처음부터 손수 빵을 만든 듯 하다”고 했다. 냉동생지 소비가 늘자 대형마트의 상품 출시도 잇따르고 있다. 롯데마트에 따르면 집에서 간편히 조리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대체식품(HMR)의 매출이 올해 11월 20일까지 전년 동기 대비 7.4% 늘었다. 호떡 등을 만드는 믹스 제품도 마찬가지다. 반제품 시장은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배경에는 취미와 여가로 ‘DIY’를 즐기는 층의 확대와 불경기 속 ‘가성비’ 소비문화가 맞물려 있다. 한국소비자원장을 지낸 이승신 건국대 글로벌비즈니스학과 교수는 “다듬은 재료나 반제품을 공급하는 틈새시장에서 다양한 창조적 스타트업 기업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인 이들을 위한 시장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경영인을 위해 스마트팩토리(제품 생산의 전 과정을 무선통신으로 연결해 자동화한 공장)의 개념과 기술, 혜택과 구현 방법 등을 풀어 썼다. 공장 자동화와 스마트팩토리는 어떻게 다를까. 전자가 정해진 개념과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초기 설정값에 따라 동작한다면, 후자는 데이터와 인공지능(AI)에 바탕을 두고 실시간 데이터를 활용해 움직인다. 기존의 자동화는 미리 알고 있던 정보에 한정돼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이 정체하지만 스마트팩토리는 모르던 지식까지 새로 수용하기에 데이터가 쌓이면서 계속 발전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포스코ICT와 KT의 사장을 지낸 전문경영인으로, 2014년 포스코ICT에서 얻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그는 “경영자는 첨단 기술에 매몰되지 말고, 어떤 가치를 창출할 것인지에 집중하라”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조치는 부당하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2008년 방통위가 출범한 이래 방송의 객관성 공정성 등에 대한 방통위 제재의 적절성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단한 것은 처음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21일 백년전쟁을 방송한 시민방송(RTV)이 방통위를 상대로 낸 제재조치 명령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다수의견 7명(김명수 대법원장, 김재형 박정화 민유숙 김선수 노정희 김상환 대법관)은 이 다큐멘터리가 “공정성 객관성 균형성 유지 의무 및 사자 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수의견은 “사실상 주류적인 지위를 점한 역사적 사실과 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다양한 여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라며 “그 자체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고 했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묘사도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되므로 명예훼손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반대의견 6명(조희대 권순일 박상옥 이기택 안철상 이동원 대법관)은 “방대한 자료 중 제작 의도에 부합하는 자료만 선별해 객관성을 상실했고, 제작 의도와 상반된 의견은 소개하지 않아 공정성 균형성을 갖추지 못했다”며 “저속하고 모욕적인 표현으로 사자 명예존중을 규정한 심의규정도 위반했다”고 밝혔다. 또 “다수의견을 따르면 편향된 일부 자료만을 근거로 특정 역사적 인물을 모욕·조롱하는 방송을 해도 ‘역사 다큐’ 형식만 취하면 아무런 제재조치를 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신철식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은 “일방적으로 건국 대통령을 폄하, 모욕하는 소설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만든 것을 방송해도 좋다는 결정은 납득이 안 된다”고 말했다. 2012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은 이 전 대통령 편인 ‘두 얼굴의 이승만’과 박 전 대통령 편인 ‘프레이저 보고서 제1부’ 등 두 편으로 이뤄졌다. 이 전 대통령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려 독립운동을 했고, 박 전 대통령은 한국 경제성장의 업적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챘다는 주장이 담겼다. 시민방송이 이 다큐를 55차례 방송하자 방통위는 2013년 8월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처분을 내렸다. 시민방송은 이에 불복해 방통위에 재심 청구를 했지만 기각되자 소송을 냈다. 1, 2심은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 재구성해 사실을 오인하도록 조장했다”며 방통위 제재가 적법했다고 판단했다.이호재 hoho@donga.com·조종엽 기자}

오성부원군 이항복(1556∼1618) 종가가 보물급 공신교서 등 유물 17점을 20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종가를 대표한 기증자는 15대 종손 이근형 씨(47)다. 박물관은 “호성공신(扈聖功臣·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한 공신) 1등 교서로는 유일한 것으로 보물급 문화재”라고 21일 밝혔다. 호성공신 교서는 이항복의 공적을 “대사마(大司馬·병조판서)에 발탁돼 홀로 수년간이나 그 책임을 맡고 있어서 사람들이 든든히 믿고 마음을 차츰 떨치게 하여 조정에서도 그에 의지하며 소중히 여겼다”고 적었다. 공신 책봉 시 하사한 초상화를 18세기에 베껴 그린 후모본(後模本) 이항복 초상화 2점, 이항복이 5세의 장손 이시중(1602∼1657)의 교육을 위해 1607년 손수 쓴 천자문도 기증했다. 이항복은 천자문에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라고 적었다. 손으로 쓴 천자문 가운데 가장 시기가 이른 것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고 박물관은 설명했다. 후손들은 6·25전쟁 때도 유품을 지니고 피란을 다니며 지켰고, 평소 정기적으로 그림과 글씨를 햇볕과 바람에 말리며 보관에 힘썼다고 한다. 박물관은 기증 기념 전시를 2020년 3∼7월 상설전시실 서화관에서 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중원 고구려비’로 알려진 국보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사진)에서 ‘영락칠년(永樂七年)’이라는 글자를 판독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영락’은 광개토왕의 연호다. 이 판독이 옳다면 이 비가 또 다른 광개토왕비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22일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고대사학회가 여는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이 같은 연구를 발표한다. 미리 공개한 발표문에서 고 연구위원은 “비석 정면 상단 부분에서 ‘영락칠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문구를 확인했다”며 “비석이 397년(영락칠년)이나 그와 멀지 않은 시점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연호와 간지를 기재한 방식이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영락오년세재을미(永樂五年歲在乙未)’와 같다. 충주 고구려비는 마멸이 심해 읽어내기 힘든 글자가 많다. 모두 500여 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이지만 판독된 건 200여 자에 불과하다. 학계에서는 장수왕(재위 413∼491)이나 문자왕(재위 491∼519)대에 건립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 왔다. 고 연구위원은 고해상도 디지털 사진과 양질의 탁본, 3차원(3D) 스캐닝 데이터, RTI 촬영(다양한 각도에서 조명을 비춰 사진을 찍는 촬영기법) 자료를 확보해 글자를 종합 분석했다. 이번 분석을 통해 이 비석이 4면 모두에 글자가 새겨진 ‘4면비’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본문에서 ‘십이월이십삼(오)일갑인(十二月廿三(五)日甲寅)’으로 판독되던 부분은 ‘십이월이십칠일경인(十二月七日庚寅)’이라고 봤다. 397년 음력 12월 27일의 간지가 ‘경인’이다. 고 연구위원은 “이번 건립 연대 추정에 따라 충주 고구려비가 세워진 뒤 나중에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며 “충주 고구려비는 신라를 ‘형제’ 관계로 표현했고, 광개토왕비는 ‘속민’으로 표현한 것에서 정치적 관계의 변동을 유추할 수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간송미술관의 현대식 수장고(가칭 ‘훈민정음 수장고’) 신축에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44억여 원을 투입한다는 소식이 지난달 전해졌다. 앞뒤 다 잘라 놓고 보면 사립미술관에 이 정도 규모의 지원을 하는 건 특혜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의를 찾기 어려운 건 약관을 갓 지난 나이에 조선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富)를 물려받아 민족문화유산의 보존에 털어 넣은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의 정신이 지금도 간송 가(家)에 이어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팔아서 사익을 챙길 수도 없는 보물창고의 문지기랄까. 지난해 별세한 전성우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아들인 ‘간송 3대’ 전인건 간송미술관장(48)을 18일 서울 송파구 보성고에서 만났다. ―2014년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연 전시가 올해 초 끝났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5년 동안 58만9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 주셨다. ‘간송문화전’ 시리즈는 고미술 전시로는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미디어나 현대미술과 고미술의 협업도 DDP에서만 가능했던 새로운 시도였다고 본다.” 간송미술관은 오랫동안 법적 지위가 없는 ‘임의단체’였다. ‘박물관미술관법’에 따라 미술관으로 등록하려면 1년에 300일 이상 일반 공개해야 했는데(현재는 90일 이상) 이를 충족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간송 가는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한 데 이어 지난달 미술관의 법적 등록을 마쳤다. 간송이 1938년 보화각을 세웠고 ‘간송 2대’인 전성우 전 이사장과 전영우 현 이사장이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1971년 간송미술관을 출범시킨 데 이어 약 50년 만에 다시 일대 전기를 맞은 것이다. 전 관장은 “미술관은 출범 이후 연구와 교육, 그리고 보존을 중심으로 운영해 왔지만 앞으로는 수장고 공사를 마치는 대로 법에 따라 봄, 가을에 적어도 한 달 반 이상씩 전시를 열 것”이라며 “지금 시대는 국민께 더욱 적극적으로 보여 드리고 알리는 게 간송의 뜻에 맞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축 수장고의 세미나실에서는 일반인 대상의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간송 컬렉션은 99% 이상, 거의 전부를 비영리 공익법인인 간송미술문화재단으로 귀속했다고 한다. 전 관장은 “재단이 취득한 데 따른 세금을 내야 하는데 부담이 작지 않지만 잘 풀어 가고 있다”고 했다. 세무당국에 신고하기 위해 문화재의 가치 평가를 올해 진행했는데 문화재위원급 인사들도 평가를 못 하고 손을 든 문화재가 딱 하나 있다. 국보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실로 ‘무가지보(無價之寶·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인 셈이다. 지정문화재여서 얼마로 평가하든 법에 따라 과세되지 않는다. ‘대구 간송미술관’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미술관과 정부, 지방정부가 협력한 ‘루브르 아부다비’나 ‘빌바오 구겐하임’ 같은 모델로 국내에서는 새로운 시도다. 이달 말 설계공모에 들어가 이르면 2022년에는 문을 열 계획이다. ―어떤 문화재가 대구로 내려가나. “프로젝트에 따라 다르지만 간송의 컬렉션을 100% 활용할 것이다. 대구에 안 내려 보낸다고 정한 것도 없고, 반대로 대구에만 가 있는 유물도 없을 것이다. 대구 시립미술관의 운영을 간송 측이 위탁받는 형식이다. 대구 문화계의 일부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이사장실의 가운데 의자에 잠깐 앉아달라고 하니 전 관장이 머뭇거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앉던 자리”라는 거다. ―아버지 전성우 이사장은 어떤 분이었나. “간송의 정신을 오롯이 지켜내려 노력하셨고, 예술가로서도 많은 것을 이룬 분이었다. ‘휘트니 비엔날레’(미국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리는 세계 3대 비엔날레 가운데 하나)의 ‘영 아메리카’ 행사에 네 번이나 초대됐다. 백남준 이전 우리나라 화가 최초로 미국에서 성공 가도를 달렸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아와서 귀국전을 열 때 신문기사 제목은 ‘간송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1964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와 보화각을 정리하고 미술관을 출범하지 않았으면, 미술관과 보성중고교도 지금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故) 전성우 이사장은 귀국 뒤 이화여대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잠시 일했다가 쭉 보성고 교장, 이사장을 맡았다. 학교와 미술관 업무에 전념하느라 이후 작가로서 활동은 방학 때 동인 그룹전에 작품을 내는 정도에 머물렀다고 한다. 우리는 간송미술관을 얻은 대신, 전도유망했던 한국인 화가 한명을 잃은 셈이다. 전 관장은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자’ 간송의 손자라는 게 부담이 되느냐고 묻자 “안 되겠습니까” 하며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는? “집안에서는 굉장히 자상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자랄 적 화가의 꿈을 꾸는 것을 알고 할아버지가 유화 화구 세트를 사 왔다. 한데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다가 뒷정리를 안 하고 공을 차다 왔다. 유화는 뒷정리를 안 하면 물감이고 붓이고 다시 쓸 수가 없다.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가 다 정리해 놓으시고,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고 한다. 그 뒤로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조수를 두지 않고 직접 붓을 정리하셨다.” ―간송이 남긴 ‘무가지보’는 무엇인가. “할아버지가 문화재와 보성학교를 가족을 위해 남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문화가 빼어난 민족은 잠시 다른 민족에게 복속될 수는 있지만 반드시 빛을 되찾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언어까지 빼앗으며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 했던 일제로부터 독립한 이후를 준비했던 거다. 할아버지의 유산은 문화보국(文化保國)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전 관장은 “간송이 중국 일본과 확연히 구분되면서 우리 문화 황금기를 보여주는 것을 근간으로 수집해 지켜낸 것을 봐도 일제가 파괴한 우리 문화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보성고 행정실장이기도 한 전 관장은 “3·1운동 당시 중학생이던 할아버지는 종로에서 보성학교 학생들이 전면에 나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는 것을 다 봤다”며 간송이 총독부의 탄압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보성학교를 인수한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우수성, 문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평생을 노력한 간송의 정신을 잇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숙부(전영우 이사장)가 한 일도, 내가 할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전 관장)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중국이 대국으로 굴기(굴起)하고자 하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가운데,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질서였던 ‘천하’ 개념을 최근 정치적 담론으로 소환하는 것을 경계한 중국 석학의 저술이 번역 출간됐다. 중국 사상사와 문화사의 석학으로 꼽히는 거자오광(葛兆光) 중국 푸단대 교수의 2016년 저서 ‘전통시기 중국의 안과 밖’(소명출판·사진)이 최근 국내에 번역됐다. 거 교수는 책에서 “현대 국가의 개념으로 고대 제국의 역사를 이해해서는 안 되고, 현대 중국의 영토로 고대 중국의 강역을 이해해서도 안 된다”고 밝혔다. 거 교수는 책에서 전통시대 ‘중국’은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우(禹) 임금 시절부터 청대까지 살폈다. 그리고 비록 현대 중국의 국경선 안에 있는 지역과 민족이라고 해도, 전통시대에는 중국의 ‘주변’이었음을 밝혔다. 서부와 북부의 흉노 선비 돌궐 토번 거란 여진 몽고 만주와 남방의 만(蠻) 등 상당히 많은 비(非)한족 민족과 이들이 차지했던 지역은 중국의 외부이자 주변이었다는 것이다. 지난날 ‘중국’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한족(漢族)의 정치 문화 공동체였을 뿐이었다. 또한 저자는 천하에는 ‘우리’(중국)와 타자의 경계가 늘 존재했고, 중국의 안과 밖은 평등하거나 조화를 이루는 국제관계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저자의 시각과 달리 중국 학계는 대체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따라 현대 중국 내부의 민족들은 과거에도 중화민족의 일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이 주제에 천착한 건 중국 학계에서 ‘천하주의’가 부상하는 걸 비판하기 위해서다. 중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대체하고자 하며, 그를 위해서는 경제력이나 군사력뿐 아니라 보편성을 갖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소환된 중국의 천하주의는 서구적 민족국가 체제와 달리 “대국과 소국의 구분도, 문명과 낙후의 구별도 없는 ‘천하’”를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거 교수는 “점점 더 빗나가는 ‘천하’의 과도한 해석”이자 “역사적 맥락에서 이탈시키는 상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천하’라는 수사 뒷면에는 약육강식의 냉혹한 역사가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재청이 4년 동안 논란이 이어진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와 태평무, 살풀이춤의 보유자(8명) 인정을 15일 의결했지만, 탈락한 인사들과 무용계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승무(이매방류)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씨(62)는 “이매방 선생(1927∼2015)이 생전 승무를 계승해야 한다고 한 검증된 전수조교는 떨어뜨리고, 불공정 논란으로 발표도 못했던 4년 전의 심사 결과를 반영한 이번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17일 밝혔다. 보유자는 이수자에서 전수교육조교를 거쳐 인정되는 게 통상적 과정이었다. 김 씨는 9월 문화재청이 발표한 보유자 인정 예고 명단에서 빠진 뒤 청와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여 왔다. 무용계 원로 등이 구성한 ‘무용 분야 무형문화재 보유자인정 불공정심사에 대한 비상대책위’도 “9월 무형문화재위 심의는 태평무 의결 시 위원 11명 가운데 5명만 참석해 정족수 미달이었고, 정작 무용 전공 위원은 자리에 한 명도 없었다”고 14일 주장했다. 문화재청은 승무에 채상묵 씨(75), 태평무에 이현자(83) 이명자(77) 양성옥(65) 박재희 씨(69), 살풀이춤에 정명숙(84) 양길순(65) 김운선 씨(60)의 보유자 인정을 15일 의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진보적 문화이론과 비판적 문화연구를 소개해 온 계간지 ‘문화/과학’이 2019년 겨울호로 100호(사진)를 맞는다. 시대 변화 속에서 문화운동 담론이 필요하다는 공감에 바탕을 두고 1992년 창간호를 낸 지 27년 만이다. 이 계간지는 창간호 특집 주제인 ‘과학적 문화론을 위하여’를 시작으로 육체, 욕망, 문화공학, GNR(생명 나노 로봇공학) 혁명, 문화행동, 동물문화연구, 페미니즘2.0, 플랫폼자본주의, 인류세 등을 다루며 학제적 접근으로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현상을 해명해 왔다. 100호 특집 주제는 ‘인간의 미래’다. 이동연 편집인은 “기술 혁명과 점증하는 ‘혐오’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윤리를 다시금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01호부터는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와 박현선 서강대 연구교수가 공동편집인을 맡아 편집진도 일신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군인과 그 가족을 위한 ‘작은도서관’ 2곳이 잇따라 개관했다.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은 12일 경남 김해시 제5공중기동비행단에 ‘꿈마루 작은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부산 육군53사단에도 ‘북적북적 작은도서관’을 개관했다. 두 도서관은 관사 아파트의 편의시설 내에 그간 활용하지 않았던 유휴 공간을 이용했다. 열람실과 원목서가, 어린이방을 설치하고 각각 장서 3300여 권을 비치했다. 이정규 제5비행단 부사관은 “아이들이 독서 습관을 기를 수 있는 도서관이 생겨 너무나 반갑다”고 말했다. 개관식에는 ‘책 읽는 버스’가 찾아와 동화 구연을 했다.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은 KB국민은행, 국방부와 함께 문화시설이 부족한 군 관사에 작은도서관을 조성하고 있다. 올해만 경남 진해시와 경북 예천군 등에 4개관이 새로 독서가를 맞이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8∼1893)이 만년에 그린 노송도(老松圖)가 새로 공개됐다. 허련은 추사 김정희가 높이 평가했던 제자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내년 3월 15일까지 서울 용산구 박물관에서 여는 ‘손세기·손창근 기증 명품 서화전 3·안복(眼福)을 나누다’에서 노송도를 전시한다. 열 폭 병풍에 소나무 한 그루를 가득 그린 대형 작품이다. 박물관은 “눈 덮인 산속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소나무의 모습에서 허련의 완숙하고 거침없는 필력을 느낄 수 있다”며 “거대한 규모, 둥치의 껍질과 구불거리는 가지의 역동적 표현은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이룬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전시에서는 민영익(1860∼1914), 장승업(1843∼1897), 오세창(1864∼1953) 등 19세기 서화가들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작품 15점도 공개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해제를 쓴 장대익 서울대 교수는 저자들을 “무신론을 지키려는 ‘어벤져스’”에 비유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의 저자이고, 다른 이들도 무신론 설파로 손꼽히는 철학자, 신경과학자, 저널리스트다. 네 사람이 2007년 한자리에 모여 벌인 대담과 나중에 쓴 글을 엮었다. 샘 해리스는 “종교의 독단이 정직한 지식의 성장을 방해하고, 인류를 쓸데없이 갈라놓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논리보다 더 와 닿는 것은 ‘신이 없는 세상의 공허’에 대한 도킨스의 답이다. 도킨스는 말한다. “무신론적 세계관에는 도덕적 용기도 필요하다”고. ‘하늘의 아버지’라는 버팀목을 포기하고, 세상을 떠나면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려주는 신성한 책’이 존재하지 않는 삶에서도 “당신이 살아갈 유일한 인생을 온전하게 살 도덕적 용기, 당신이 왔을 때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떠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원제는 ‘네 기사(Four Horsemen)’.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과 연합국의 강화조약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국제학술대회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가 개최된다. 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강제병합 조약은 원천 무효’라고 했던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계승해 4번째 열리는 것이다. 동북아평화센터는 8, 9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이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미리 공개한 발표문에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을사늑약과 한일강제병합은 불법·무효였음에도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는 이를 외면한 채 한국은 ‘일본 영토의 일부’였다고 보고 조약 당사자에서 배제했다”며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제의 전쟁 범죄를 묻는 조약이 아니라 냉전체제에 대응하는 전략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을 서두르도록 만든 건 6·25전쟁이었다. 중공군의 전쟁 개입에 직면한 미국은 소련군의 일본 영토 진입을 우려했다. 이 조약 체결로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며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거점이 됐다. 그러나 한국이 당사자에서 배제되면서 한반도 침략 배상 문제 등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양국의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개번 매코맥 호주국립대 교수가 기조연설을 하고 △후더군 우한대 교수, 양찬 상하이자오퉁대 교수, 쉬융 베이징대 교수, 스위안화 푸단대 교수(중국)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도쓰카 에쓰로 류코쿠대 교수(일본)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 찰스 암스트롱 컬럼비아대 교수(미국) △하라 기미에 워털루대 교수(캐나다) 등이 참석한다. 동북아역사재단과 도담문화재단이 후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세종의 위대함’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혹시 막연하게 ‘성군’으로 칭송하며 그를 왕조시대라는 과거에 묻어둔 건 아닐까. 한국사학계 원로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81)가 세종실록을 바탕으로 사건과 업적을 조명한 ‘세종 평전―대왕의 진실과 비밀’(경세원)을 최근 출간했다. 1일 서울 관악구의 개인 연구실 호산재에서 만난 한 교수는 정치와 경제, 문화 강국을 이룩한 세종의 통치 비결을 설명하면서 “민주주의 제도라는 하드웨어의 약점을 ‘세종 스타일’의 소프트웨어로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민주주의 제도의 큰 문제가 소수의견을 묵살하니, 소수자가 승복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후유증이 생겨요. 다수결과 투표라는 게 사실 숫자놀음이지요. 51% 찬성으로 결정했으면 반대한 49%는 잘못된 의견을 가졌던 건가요? 심지어 보통 40%대, 때로 30%대 득표를 하고도 대통령이 됩니다. 독재는 1인 독재건 다수독재건 나쁜 겁니다. ‘세종 스타일’에서 배워야 해요.” 한 교수가 말하는 ‘세종 스타일’이란, 먼저 토론과 여론을 존중하는 소통정치다. 세종의 통치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은 무한권력을 발동할 수 있는 군주지만, 의정부와 육조 대신이 여는 합동회의의 사회자로 머무르고자 했다. 소통의 테크닉이 절묘했다. “상대의 발언을 묵살하는 법이 없어요. 대신이 말하면 일단 ‘네 말이 옳다’며 기를 꺾지 않고 존중하며 의견을 말하도록 이끌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만약 대통령이 면전에서 핀잔을 하면 누가 직언하겠어요. 세종은 그걸 아는 겁니다.” 찬반이 엇갈려도 숫자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반대 의견을 보완하며 “실록을 읽다 보면 답답증이 날 정도”로 회의를 했다. “그러니까 신하들이 뒷말이 없고, 정책에 자신도 참여했다는 책임의식이 커지지요. 세종 재위 33년간 반역으로 죽은 이가 없습니다. 대화와 소통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를 한 덕입니다.” 신하뿐 아니라 백성들의 의견도 존중했다. 조세제도인 ‘공법(貢法)’을 만들 때는 시안을 만들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전국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라 볼 수 있다. 조사 결과 찬성이 많았는데도 바로 실시하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 먼저 시험하고 반대론자가 제기한 문제를 수정 보완해 14년 뒤 최종 결정했다. 이렇게 만든 ‘전분6등 연분9등’의 공법은 이후 수백 년간 이어졌다. 적지 않은 반대에도 새 제도를 덜컥 시행해놓고 예상됐던 부작용은 감추려 안달하고, 집권 뒤 상대 당파 숙청을 반복하는 오늘날 정치는 세종 대보다 후퇴한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에 토론이 제대로 이뤄집니까? 숫자로 밀어붙이고 국회가 의결하면 끝나지요. 반대파는 물리력으로 막으려 하고. 이게 뭡니까.” 반면 나라의 백년대계는 일시적인 원망이 있더라도 꾸준히 밀고 나갔다. 대표적인 게 충청 경상 전라 등 ‘하삼도(下三道)’ 주민의 북방 이주정책이다. 4진을 새로 설치한 함길도는 야인의 침략 등으로 인구가 적은데, 하삼도는 인구가 조밀하고 향리(鄕吏)의 횡포도 적지 않았다. 주요 이주 대상은 경제력이 있는 향리층이었다. 그러나 정책에 반발한 백성이 스스로 손을 자르거나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졌다. 세종은 “내 마음이 매우 괴롭다”면서도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하기만 하고, 장래를 생각지 아니하여 한갓 세월만 허비한다면…”이라며 이주정책을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한 교수는 “세종의 사민(徙民)과 사군육진 개척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동강-원산 북쪽은 중국 땅이었을 것”이라며 “세종은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세종은 ‘외교의 대가’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게 대명 사대외교로 북방영토 회복을 뒷받침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군육진 개척은 당시 당당한 명나라 백성이었던 여진족을 토벌했던 겁니다. 여진족은 명 황제에게 조선이 괴롭힌다고 호소하지요. 명은 조선이 명나라 땅을 침략한 거라고 볼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사대에 충실하고, 두만강 이북 700리까지는 조선의 땅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명의 간섭을 막았던 겁니다.” 개방적 인사정책으로 ‘흙수저의 전성시대’를 만들기도 했다. 관노비 출신으로 종3품 벼슬을 한 장영실뿐이 아니다. 24년간 정승을 지낸 황희는 서얼 출신이었고, 성균관 사성(司成)이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무당의 자식이 집현전 학사가 됐고, 아전이 종2품에 올랐으며, 노비 출신이 형조참판을 지내고, 궁궐 춤꾼의 자식이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유소년 시절 왕자 충녕(세종)을 가르친 이들의 지위가 낮았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 교수는 분석했다. 세종을 가르친 이로는 이수(1373∼1430)와 김토가 꼽힌다. 김토는 생몰연도, 본관도 모른다. 문과에 급제한 적도 없는 의관 출신이었다. 역시 평민 출신으로 보이는 황해도 봉산 사람 이수는 나중에 봉산 이씨의 시조가 됐다. 한마디로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얘기다. 한 교수는 “세종처럼 노비의 인권을 보호한 임금이 없다”며 “신하들의 주장을 따랐다가, 나중에 다시 아버지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종부법’으로 바꿨다. 세종이 노비 수를 늘렸다는 주장은 사료를 제대로 보지 않아 생긴 오해”라고 말했다. 세종도 끝까지 완벽하지는 못했다. 말년에 다섯째와 일곱째 아들, 왕비 소헌왕후를 잇달아 먼저 떠나보낸 뒤에는 매우 불행했다. 불사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두고 ‘쓸모없는 유자(儒者)’라고 부르며 멸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상태를 알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이 세종의 비범함이었다. 재위 31년 1월에는 세종이 대신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털어놨다. “내가 기뻐하고 노여워함이…요즘에는 공사(公事)한 사이에도 발작하기를 무상하게 하고…만약 한두 해가 지나면 정신이 어두워져서 전연 모를 것으로 생각한다. 경들은 알고 있으라.” 한 교수는 “세종의 명언처럼 ‘신당기로 이일유후(身當其勞 以逸遺後·내가 고통스러운 일을 감당해 뒷사람에게 편안함을 줌)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루브르 아부다비에는 거장들이 그린 명화도 있지만 여러 인류 문명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물도 굉장히 많습니다. 문명을 탐험하는 타임머신을 타고자 한다면 꼭 와보시기 바랍니다.” 아랍에미리트(UAE)가 ‘루브르’라는 브랜드 사용과 작품 대여료 등을 더해 프랑스에 1조5000억 원 넘게 지불하고 개관한 ‘루브르 아부다비’의 마누엘 라바테 관장(43)이 5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보와 만났다. 루브르 아부다비는 루브르 박물관의 첫 번째 해외 분관으로 ‘포스트 오일(Post-oil) 시대’를 대비하는 UAE의 특급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개관 당시 대여해 전시했던 다빈치, 모네, 반 고흐 등의 명화가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제작한, 세계 최고(最古)의 항아리 역시 이 박물관에 있다. 라바테 관장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존 아시아관을 개편한 ‘세계문화관’ 개관을 앞두고 이날 연 국제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다. 프랑스-박물관 기구(Agence France-Mus´eums)의 최고경영자를 지내기도 한 라바테 관장은 “프랑스 기메박물관에서 대여한 동아시아 문화재를 포함해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예술품을 루브르 아부다비에서 만날 수 있다”며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예술품을 하나의 공간에 담으면서 여러 문화와 문명 간의 연결을 보이는 게 우리 박물관의 전시 포인트”라고 했다. 관장이 가장 좋아하는 미술품도 ‘고대 요르단의 머리가 둘 달린 인물상’이라고 한다. 루브르 아부다비는 2017년 11월 개관 이후 최근까지 관람객 200만 명이 다녀갔다. 박물관의 개관 즈음 “‘오일 달러’로 문화를 살 수는 없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라바테 관장은 “지금은 프랑스 박물관계에서 우리 박물관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참신한 실험적 전시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이날 국립중앙박물관을 둘러본 라바테 관장은 특히 ‘천흥사 종’(1010년 제작)에 유난히 끌렸다고 했다. 그는 “용 모양 장식(종뉴·鐘紐)과 전체적인 볼륨감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며 “빌려가서 우리 박물관에 전시하고 싶다”고 농담을 던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2월 16일 개관하는 세계문화관은 해외 유수 박물관과 소장품을 교환 전시해 다양한 세계문화를 소개한다. 배기동 관장은 “세계 각지 문화의 고유성과 우리 문화의 가치를 더욱 확실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첫 전시로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 박물관과 협력해 ‘문명의 얼굴-이집트 문명관’을 선보일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이었던 농촌운동가 최용신(1909∼1935·사진)을 재조명한 심포지엄이 열린다. 최용신기념관은 동국대 역사교과서연구소 주관으로 8일 경기 안산시 기념관에서 최용신 탄생 11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최용신, 기억과 계승’을 개최한다. 정혜정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교수는 발표문 ‘일제하 사설교육기관과 샘골학원’에서 “일제강점기 최용신의 천곡학술강습소는 크리스천 브나로드 운동으로서 무산자 교육을 위한 계급적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의 안산시 상록구에 1929년 설립된 샘골강습소는 1932년 최용신이 당국의 인가를 받아 천곡학술강습소가 됐다. 정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학술강습소와 야학, 개량서당은 일제의 제도권 교육 사이에서 그나마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할 수 있는 틈새공간이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수가 늘어났다. 학술강습소는 농민운동과 연계됐고, 일제강점기 내내 탄압을 받았다. 기독교계 학술강습소는 탄압이 비교적 덜했지만 최용신이 운영했던 천곡학술강습소는 일제가 보기에 불온성이 강했다. 이는 신간회 수원지회 부회장이던 애국지사 염석주가 강습소 설립을 도운 것에서도 나타난다. 천곡학술강습소는 수업 시간에 민족관념을 교육하고,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를 국어라고 가르쳤다. 결국 1933년 4월 총독부는 사상운동의 진원지로 생각되는 사설 학술강습소 800여 곳과 농민조합 1100여 개를 폐쇄하기로 했다. 학술강습소가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사상의 주입’ 혹은 ‘실행소’라고 본 것이다. 최용신 사후 동생 최용경이 사업을 이어가던 천곡학술강습소도 1936년 6월 당국의 폐쇄 명령을 받았다. 당국은 강습소 폐쇄에 ‘교육의 결여’ ‘불완전한 교육’이라는 핑계를 댔다. 정 교수는 “1920년대 교육문화운동은 무산자에게 초점을 둔 인간해방의 맥락을 내포한 것이었고 1930년대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 역시 빈민, 농민, 민족을 구하는 민족해방, 계급해방의 목표를 담아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나는 … 만국기자대회에서 조선민족도 타민족에 비하야 별로히 손색이 무(無)하다는 실지의 증명을 표(表)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 동아일보 창간멤버 가운데 한 명인 김동성 기자(1890∼1969)가 1921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차 만국기자대회에 ‘코리아 대표’로 참석하고 이듬해 2월 연재한 기사의 첫머리다. 나라 없는 민족의 기자 대표로 참석한 셈이다. 김 기자는 “각국 대표석 가운데 ‘코리아’라는 이름의 좌석이 있는 것을 보고 감격했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김 기자와 같은 한국 언론학의 선구자를 조명한 ‘한국 언론학 선구자: 김동성과 김현준’(차배근 박정규 김영희 박선희 지음, 서울대출판문화원·사진)이 발간됐다. 김 기자는 1909년 미국에 유학해 신문학과 신문만화, 농학 등을 공부하고 귀국한 뒤 조사담당 기자로 본보 창간에 참여했고, 첫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신문에 만화를 도입했고, 영문 추리소설을 번역 연재해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특히 1924년 그가 펴낸 ‘신문학(新聞學)’은 미국의 실천적 저널리즘의 기초를 한국 사례와 함께 설명한 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 관련 전문도서로 평가된다. 광복 뒤에는 합동통신사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을 지냈다. 또 다른 언론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현준(1898∼1949)은 한국인 최초의 신문학 박사다. 독일 라이프치히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28년 귀국해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박사 논문인 ‘동아시아에서 근대 신문의 양태’는 한중일 신문의 모습을 개괄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동아일보의 예를 들며 “한국인에 의해 발행되고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신문은 (1면을) 국내외 정치내용의 주 사설로 시작한다”고 썼다. 잘못 알려진 김현준의 생애도 바로잡았다. 책에 따르면 김현준은 전남 나주 태생이며, 문학박사가 아닌 신문학 전공의 철학박사였고, 1949년 광주 서석동 자택에서 담석증으로 사망했다. 저자들은 “김동성과 김현준이 뿌린 신문학의 씨앗은 광복 이후 한국 언론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됐다”고 발간 취지를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아편에서 모르핀을 분리해낸 지 71년이 지난 1897년 독일 바이엘사(社)의 연구진은 모르핀을 변화시켜 새로운 물질을 만들었고, 약국에서 기침 억제제로 팔았다. 질병을 치료하는 데 영웅적인 효과를 내라는 기대를 담아 지은 이 약의 이름은 ‘헤로인(heroin)’. 이 마약이 완전히 금지되기까지는 30년 가까이 걸렸다. 대형 제약회사가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 14년 동안 15억 달러(약 1조7500억 원)가 든다고 한다. 아직도 해마다 3만 t 넘게 팔리는 아스피린은 개발 과정에서 유망하지 않다고 판단돼 그냥 묻힐 뻔했지만 연구팀이 몰래 연구를 계속해 성공했다. 35년 경력의 미국 신약 연구자와 과학 전문 작가가 공저한 책이다. 신약 발견의 역사 속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897년 설립한 회동서관의 출판물부터 오늘날까지 근·현대 주요 출판사 37곳의 출판물 110여 점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삼성출판박물관(관장 김종규)은 기획전 ‘책을 펴내다―우리 근·현대 출판사 100년’을 12월 10일까지 서울 종로구 박물관에서 개최한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근대적 체계를 갖춘 최초의 한자 자전인 지석영의 ‘자전석요’(1909년·회동서관), 희귀본으로 꼽히는 이광수의 ‘무정’ 제5판(1924년·〃) 등이 있다. 일제 당국의 검열에서 대사의 주요 부분을 삭제당한 조명희 희곡집 ‘김영일의 사’(1923년·동양서원), 불온하다는 이유로 경찰 당국이 발행인과 시인을 검찰로 불구속 송치한 임화의 시집 ‘찬가’(1947년·백양당) 등도 볼 수 있다. 김종규 관장은 “출판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전시”라고 소개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