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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짓밟히고 있는 반도 만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파고든 일본의 문학가 모리야마 게이(1904∼1991)가 1928년 5월 ‘센키(戰旗)’ 창간호에 발표한 소설 ‘불’의 마지막 문장이다. 소설의 무대는 1919년 3월 3일 경기 수원 인근. 일본에서 탄광 광부로 일하던 주인공 이진유는 귀향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이야기를 듣고, 소학교 운동장에서는 집회가 열린다. “나는 한 시간 전에 경성에서 급히 달려왔소! … 누구나 다 마지막 한 명까지 나아가려 했다. 누구나 모두 오랫동안 기다렸어. … 젊은 몇백 명의 여자들이 말이야. … ××를 향해 기가 꺾이지 않고 맨 앞에서 행진했다.” 명백한 3·1운동 묘사다. 이진유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목구멍이 마를 때까지” 만세를 불렀지만 군중은 속아서 교회 안으로 몰려들고, 경관들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복병처럼 나타난 ‘××’들이 총질을 시작한다. “거기에는 독살스러운 연기와 불길이 날아올라 가는 교회 건물 안에서, 몇백 명의 사람들이 소리를 내고 있는 아비규환이 아닌가. 세찬 바람이 부추겨서 불은 의기양양한 듯이 건물과 건물 안의 사람을 불태우고 있었다. … 그리고 이러한 잔악함을 계획한 인귀(人鬼)들을 보라. 그들은 창문으로 빠져나가려 하는 사람을 ××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접근하는 마을사람들을 같은 마지막으로 내몰고 있었다.” 검열 탓에 주요 단어가 ‘×’로 표시되기는 했지만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지금의 화성시)에서 자행한 집단학살의 현장이 문학 작품으로 변형, 재현된 것이다. 한국 문학 연구자인 세리카와 데쓰요 일본 니쇼가쿠샤대 명예교수는 3·1운동 101주년을 앞두고 일본 작가들이 3·1운동을 표현한 문학 작품을 번역하고 해설한 ‘일본 작가들의 눈에 비친 3·1독립운동’(지식산업사)을 최근 출간했다. 여러 작품들은 식민 지배를 받는 한국인의 울분과 독립 의지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다. 소설 ‘조선의 여인’(스미 게이코·1920∼2012)에서 ‘희열 할머니’는 장날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헌병에 끌려간다. 처참한 고문을 당한 끝에 돌아오지만 끝내 목숨을 잃는다. 작가가 일본의 조선인 마을에 살면서 만난 여인들의 삶이 창작의 동기가 됐다고 한다. 세리카와 교수는 “조선 여자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가 된 민족의 비애와 통분을 꿰뚫어 보고자 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책에는 모두 10편이 실렸다. 광복 전 작품으로는 ‘불’을 비롯한 소설 ‘불령선인’(나카니시 이노스케), ‘간난이’(유아사 가쓰에)와 시 ‘어떤 살육사건’(사이토 다케시), ‘살육의 흔적―사이토 다케시 씨의 어떤 살육사건을 읽고’(사이토 구라조), ‘간도 빨치산의 노래’(마키무라 히로시)가 담겼다. 광복 후 작품은 ‘조선의 여인’을 비롯한 소설 ‘이조잔영’(가지야마 도시유키), ‘조선·메이지 52년’(고바야시 마사루)과 시 ‘수양버들처럼 흔들린 손’(아키노 사치코)을 다뤘다. 일부 작품에는 한국에서 살며 한국을 고향이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체험이 반영됐다. ‘간난이’는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살던 작가 유아사 가쓰에(1910∼1982)가 목격한 수원의 3·1운동이 담겼다. 이 소설은 한국인들에게도 비교적 널리 읽혔다고 한다. 세리카와 교수는 “‘독립을 바라는 조선인들의 마음에 감동받아 울면서 썼다’는 작가의 진지한 자세와 골목골목까지 잘 알던 수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에 끌렸을 것”이라며 “소설 속 간난이의 죽음은 유관순의 이미지와도 겹친다”고 설명했다. ‘수양버들처럼…’과 ‘이조잔영’, ‘조선·메이지 52년’ 등도 마찬가지다. 세리카와 교수는 “10편 가운데 5편이 3·1운동 탄압의 상징적 사건으로 제암리 학살을 직간접적 테마로 다루고 있어 인상적”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현재 남아 있는 3·1독립선언서 원본(보성사판)에 민족대표 33인 명단 위치가 조금씩 다른 까닭은 막판까지 수정한 명단 부분만 연판(鉛版·활자를 짠 원판에 대고 지형(紙型)을 뜬 뒤 납 등의 금속을 녹여 부어서 뜬 인쇄판)을 새로 만들어 붙였기 때문이라는 연구가 나왔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 101주년을 앞두고 출간되는 학술지 ‘동아시아문화연구’ 80호에 싣는 논문 ‘3·1독립선언서 인쇄 과정과 판본의 검토’에서 이같이 밝혔다. 보성사판 3·1독립선언서는 33인 명단 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간 것과 아래로 내려간 것 등 세 가지 부류가 있다. 논문에 따르면 1919년 2월 27일 오후 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직원들은 사장 이종일의 지시에 따라 인쇄기 3대에 걸기 위해 연판 3개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3·1운동의 주도자 가운데 한 명인 오세창이 민족대표 성명을 변경해 달라고 전화로 요청했다. 이에 만들어놓은 연판 가운데 본문을 살리고, 명단 부분만 잘라낸 다음 연판 3개를 새로 만들어 본문에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인쇄기에 본문과 명단을 이어 고정하는 과정에서 명단이 어떤 것은 약간 올라가거나 내려갔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27일 밤 2만1000부가 인쇄됐고, 그 전에는 인쇄된 적이 없다”고 논문에 밝혔다. 독립선언서가 여러 차례에 걸쳐 모두 3만5000부 인쇄됐다는 설은 오늘날도 꽤 퍼져 있다. 이는 앞선 2월 20∼25일 선언서 1만여 부를 인쇄했다는 ‘묵암비망록’ 내용에 기인한 것이다. 이 비망록은 이종일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것이 2월 24일 밤이었고, 25∼27일 민족대표의 명단을 정했는데 그 전에 민족대표의 명단이 들어간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논문은 밝혔다. 논문은 또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돼 있는 독립선언서 2종 가운데 이른바 ‘신문관판’은 당시 인쇄된 게 아니라 이병헌이라는 인물이 적어도 광복 이후 뒤늦게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잘못 걸리면 죽어요, 아주. 호되게 맞고….” 충남 청양군에 사는 일제 말기 인천조병창 강제동원 피해자의 증언이다. 인천조병창은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1941년 인천 부평지역에 세운 무기제조 공장이다. 적어도 1만 명 이상이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인천조병창에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2명의 생생한 구술 증언을 담은 ‘일제의 강제동원과 인천조병창 사람들’을 최근 간행했다. 조병창은 높은 담장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군인들이 항상 엄격하게 단속했다. 공장을 감시하는 헌병대는 “(군 내무반 같은 규율을 어기면) 데리고 가서, 죽는 소리 나게 때렸다”고 한다. 배고픔에 시달린 것은 물론이고, 부상이나 사고를 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피해자들은 회고했다. “기계 일하는 데서 어떤 사람은 다리가 잘려서 오고, 손목도 잘려서 왔다”고 했다.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을 비롯해 나이 어린 학생들의 사고도 잦았다. 한 피해자는 “어떤 아이가 옷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팔 하나가 떨어졌다”고 증언했다. 그만둘 자유는 없었다. 12명의 구술자 중 3명은 광복 이전에 조병창을 탈출했다고 증언했다. 경기 여주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병창에 동원된 한 증언자는 “붙들리면 죽지 않으면 영창”인 상황에서도 죽기 살기로 탈출했다. 밤에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빠져나온 뒤 철조망을 뜯고 탈출해 산길을 열흘쯤 걸어 도망쳤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휴가증을 위조해 탈출한 구술자도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국내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인천조병창 관련 강제동원 진상 규명에 기여할 것”이라고 발간의 의미를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이하다. 은둔한 선비의 원림(園林)에 들어선 듯 댓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리다가도 어떻게 보면 마치 조선판 ‘돈키호테 쇼핑’의 문을 연 것 같다. 매우 실용적인가 하면 쓸데없는 ‘고퀄’의 물건들이 이어지고, 고졸(古拙·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한가 하면 장식적인 물건들이 책 속에 가득하다. 풍류가 밴 물건과 매우 기능적인 물건들이 함께 등장하는 이 책은 조선의 실용지식 대백과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가운데 ‘이운지(怡雲志)’다. 임원경제지는 농학의 대가인 실학자 서유구(1764∼1845)가 홍문관 부제학에서 물러난 뒤 손수 농사를 짓고 은거하면서 18년 동안 편찬, 집필한 책이다. 113권 54책으로 250만 자가 넘는다. 이 책을 번역 중인 임원경제연구소가 총 16개 부분(志·지) 가운데 다섯 번째로 선비들의 취미생활을 소재로 한 ‘이운지’를 최근 번역 출간(풍석문화재단)했다. 총 4권. ‘이운(怡雲)’은 “산중에서 구름을 즐기는 일은 혼자만 할 수 있다”는 중국 남조 대 인물인 도홍경(456∼536)의 시에서 따 왔다. “맑은 마음으로 고상함을 기르고 한가로이 소요하며 유유자적하는” 서유구의 이상이 담긴 이운지에서 조선 선비들이 꿈꾼 ‘웰빙’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책은 선비가 은거할 곳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은거할 집은 “크거나 넓게 짓지 않는다”, “무궁화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고, 띠를 엮어 정자를 만든다”는 시작 부분은 오늘날의 통념 그대로다. 그러나 여러 건축물과 정자 소개는 선비들의 이상적 은거생활이 과연 소박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바람이 잔잔하고 볕이 좋을 때마다 차를 담은 병이나 술동이를 가지고 정자에 이르러 난간에 기대고 낚싯대를 드리우며…새벽에는 오리가, 저녁에는 기러기가 물 위에 넘쳐나고….” 저수지에 짓는 정자인 ‘수사(水榭)’에 대한 설명이다. 이 밖에 강가, 채소밭, 시냇가에 딸린 정자가 따로 있다. 휴식공간인 원실을 비롯해 습기를 막는 온각(溫閣), 차 마시는 공간, 금(琴) 연주실, 서재, 약제실, 장서각(藏書閣), 응접실, 서당, 활 쏘는 정자, 누에 치는 방, 길쌈하는 방이 잇달아 소개된다. 웬만큼 여유 있는 사대부도 따라 하기 어려울 정도다. 연구소는 “이런 건물을 다 갖추라는 게 아니라 처지에 따라 용도에 맞게 세우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소확행’의 방법도 알려준다. 선비가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는 일’을 즐길 형편이 안 되면 어떻게 할까. 이운지는 “혹시 사는 곳이 낮고 좁거나 거처를 자주 옮겨야 한다면 ‘담병(膽甁·목이 길고 배가 불룩한 병)’에 꽃을 꽂아두었다가 수시로 바꿔준다”고 했다. 그러면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 더구나 “이 즐거움은 가진 자들이 탐하지 않고, 얻으려는 자들이 다투지 않음에도 잠시라도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은거지에 연못을 팔 처지가 아니라면 항아리로 ‘분지(盆池·항아리를 이용한 못)’를 만들 수 있다. “큰 항아리를 줄 세워서 땅에 묻고 항아리 사이사이 틈에 갈대와 부들을 심으면” 진짜 연못처럼 보인다고 한다.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운 다음 수면에는 개구리밥 잎을 던져 띄우고, 연 따위를 심으며 그 속에는 물고기를 기른다.” 오늘날 캠핑용품 못지않은 도구도 많다. ‘택승정(擇勝亭)’은 이동식 정자다. 기둥과 도리(기둥 위를 건너지르는 나무), 장막을 필요한 곳에서 조립하는 방식이다. “봄날 아침 꽃이 핀 교외나 가을날 저녁 달 밝은 마당”에 세우면 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을 때 장정 1명이면 이 정자를 가지고 갈 수 있다”고 했다. 휴대용 찬합인 ‘제합(堤盒)’에서 술잔과 호리병, 젓가락과 접시를 꺼내 술을 마시고, 휴대용 화로인 ‘제로(堤爐)’에서 숯불을 피워 물을 끓이면 금상첨화다. 이것저것 다 귀찮으면 휴대용 술통인 ‘생황호(笙簧壺)’ 하나만 챙겨도 된다. 술을 담는 대나무통 아래 안주와 과일을 담는 나무통이 악기 생황처럼 일체화된 모양이다. 이 밖에도 임원의 즐길 거리인 차(茶)와 향(香), 금(琴)뿐 아니라 서재와 도서 관리, 골동품과 예술품 감상법 등을 꼼꼼히 소개한다.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은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며, 가정용품이나 음식을 만들고 직물을 염색하는 임원경제지 속 선비의 모습은 기존 통념과는 전혀 다르다”며 “이운지에서는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즐기려 했던 여가의 경지와 품격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죽음이 임박한 사람은 시간 감각도 변하고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도 약해진다. 그러나 오는 사람마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라고 묻는 건 의식이 있는 환자를 지치게 만들 수 있다. 그냥 “저 누구예요”라고 밝히는 게 좋다고 한다. 의학정보를 대중화하는 데 힘쓰는 요양병원 원장이 고독사 존엄사 치매 간병 장례 사별 같은 각종 죽음에 관한 지식을 담았다.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임종 과정에서의 자기 운명 결정권은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등의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저자는 말기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호스피스는 단순한 간병과는 다르다고 했다. 의료와 사회복지,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의학적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아직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얘기다. 부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근대적 독립주권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고종의 의지가 담긴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와 영조대 제작한 효종 어보(御寶)가 해외로 반출된 지 약 70년 만에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국새와 어보를 19일 공개했다. 고종 지시로 1882년 만든 대군주보는 1876∼1889년 제작한 외교용 국새 6종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이 확인돼 가치가 있다. 조선은 외교문서에 중국에서 받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사용했으나 고종대에 여러 국새를 만들어 썼다. 대군주보에 황제의 도장에 쓰는 ‘보(寶)’를 새긴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은으로 주조한 뒤 수은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했다. 몸체(印板·인판)에 은색 거북이 모양 손잡이(龜紐·귀뉴)가 달렸다. 효종 어보는 1740년 효종에게 ‘명의정덕(明義正德)’이라는 존호를 올리며 제작됐다. 문화재청은 “조선의 국새와 어보는 모두 412점 제작됐는데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혼란, 6·25전쟁을 거치며 흩어져 73점은 소재를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국새와 어보는 미국 뉴저지의 교포 이대수 씨(84)가 1990년대 후반 경매로 구입해 이번에 기증했다. 이날 공개회에 온 이 씨의 아들은 “아버지는 구입했을 때부터 한국에 돌려보낼 생각이 확고했다”고 말했다. 국새와 어보는 20일부터 다음 달 8일까지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물컹.’ 왜 ‘바스락’도 아니고 물컹인가. 지난해 봄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40)은 압수수색하던 집에서 침대 밑에 손을 넣었다가 예상치 못한 감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색을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난 시점. 막노동하러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던 문화재 은닉범이 침대 아래 높이 30cm도 안 되는 공간에서 욕설을 내뱉으며 기어 나왔다. 범인을 추궁한 결과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의 벽과 벽지 틈에서 국내 현존하는 서양식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앞선 보물 ‘만국전도(萬國全圖)’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문중에서 보관해 오다 1994년경 도난당한 물건이다. 앞서 전국을 돌며 탐문하던 단속반에 지난해 초 만국전도가 매물로 나왔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단속반은 매매업자 두어 명을 추적한 끝에 만국전도를 가지고 있다는 범인이 누군지 확인했다. 문제는 ‘범인이 순순히 이 지도를 내놓을 것인가’였다. 최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한 반장은 “문화재 도난 사건은 도난품을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다른 사건과 비교가 안 된다. 이 때문에 절도, 은닉 혐의자들과의 기 싸움도 심하다”고 말했다. 범인도 처음에는 “내가 가진 건 보물이 아니라 다른 지도”라고 주장했다. 단속반은 “무슨 헛소리냐. 얼른 가져오라”고 했지만 범인은 “(지도를) 태워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단속반이 설득과 회유를 거듭했지만 범인은 끝내 지도를 내놓지 않았다. 결국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아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압수수색에 나섰던 것. 침대 밑에서 나타난 범인은 뒤늦게 “한 반장님, 지금이라도 내놓으면 좀 봐줍니까”라고 물었다. 이미 범인의 차량 트렁크와 방에서 지도와 함께 도난당한 문중의 고서적 100여 권을 찾아낸 상황이었다. 도난당했던 조선 중기 문신 권도(1575∼1644)의 ‘동계문집’ 목판이 최근 회수된 일을 계기로 문화재 절도 범죄와 추적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1809년 간행된 이 목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교 책판’들과 비슷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사 결과 2016년 종중 장판각(藏板閣·인쇄용 책판을 보관하는 전각)에서 목판을 훔친 범인은 이 종중 사람으로 매매업자에게 1000만 원에 팔아넘겼다. 범행 동기는 ‘생활고’였다. 한 반장에 따르면 동계문집 절도범은 순진한 경우에 속한다. 문화재 사범은 대략 자금책(유통책)과 절도책, 판매책이 팀으로 움직인다. 자금책이 의뢰해 절도책이 유물을 훔쳐 오면 판매책을 거쳐 또 다른 매매업자나 수집가의 손으로 넘긴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대표적인 사례가 해저 문화재 도굴범이다. 자금책이 선박과 진흙을 빼는 장비를 임대하고 절도책의 숙박비 유류비 일당(日當) 등을 댄다. 현장에서는 선장과 잠수부, 조수가 일한다. 근래에는 아예 인근 양식장을 빌린다. 도굴한 도자기를 망에 담아 양식장 바닷물 속에 숨겨 놨다가 ‘고객’이 찾아오면 판매책이 늘어뜨린 끈을 감아올려 도자기를 보여준다. 도굴꾼들끼리도 속고 속인다. “어마어마한 보물이 잠들어 있으니 자금을 대면 건져 주겠다”며 자금책의 돈만 챙기고는 자취를 감추는 사기꾼도 있다. 2015년 충남 태안군 당암포구 앞바다에서 고려와 조선시대 도자기를 건져낸 일당은 자신의 몫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은 잠수부의 제보가 계기가 돼 붙잡을 수 있었다. 최근 문화재 범죄는 지능화, 음성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장물인 게 뻔한 불화(佛畵)를 화기(畵記)를 훼손한 채 경매에 내놔 마치 정상적인 물건인 양 세탁한다는 얘기다. 해외 밀반출 시도도 꾸준하다고 한다. 석물 같은 경우 수사망이 좁혀지는 데 압박을 느낀 절도·은닉범이 인적이 드문 도로가에 버려 놓고 공중전화로 위치를 통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정문화재는 ‘장물인 줄 모르고 샀다’고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른바 ‘선의 취득 배제’다. 비지정문화재는 도난신고가 됐는지,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는지를 확인해 형사처벌 여부를 따진다. 그와 무관하게 원소유자가 반환소송을 낼 수도 있다. 한 반장은 “선의의 구매자라면 최소한 사려는 물건이 장물은 아닌지 지역 박물관이나 문화재청 등에 확인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안에서 물려받은 문화재를 지키고자 한다면 “적어도 사진과 수량 기록을 남기고 가치가 있는 물건은 국공립 박물관에 기탁하는 게 좋다”고 덧붙였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물컹.’ 왜 ‘바스락’도 아니고 물컹인가. 지난해 봄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40)은 압수수색하던 집에서 침대 밑에 손을 넣었다가 예상치 못한 감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색을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난 시점. 막노동하러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던 문화재 은닉범이 침대 아래 높이 30㎝도 안 되는 공간에서 욕설을 내뱉으며 기어 나왔다. 범인을 추궁한 결과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의 벽과 벽지 틈에서 국내 현존하는 서양식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앞선 보물 ‘만국전도(萬國全圖)’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문중에서 보관해 오다 1994년경 도난당한 물건이다. 앞서 전국을 돌며 탐문하던 단속반에 지난해 초 만국전도가 매물로 나왔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단속반은 매매업자 두어 명을 추적한 끝에 만국전도를 가지고 있다는 범인이 누군지 확인했다. 문제는 ‘범인이 순순히 이 지도를 내놓을 것인가’였다. 최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한 반장은 “문화재 도난 사건은 도난품을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다른 사건과 비교가 안 된다. 이 때문에 절도, 은닉 혐의자들과의 기 싸움도 심하다”고 말했다. 범인도 처음에는 “내가 가진 건 보물이 아니라 다른 지도”라고 주장했다. 단속반은 “무슨 헛소리냐. 얼른 가져오라”고 했지만 범인은 “(지도를) 태워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단속반이 설득과 회유를 거듭했지만 범인은 끝내 지도를 내놓지 않았다. 결국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아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압수수색에 나섰던 것. 침대 밑에서 나타난 범인은 뒤늦게 “한 반장님, 지금이라도 내놓으면 좀 봐줍니까”라고 물었다. 이미 범인의 차량 트렁크와 방에서 지도와 함께 도난당한 문중의 고서적 100여 권을 찾아낸 상황이었다. 도난당했던 조선 중기 문신 권도(1575~1644)의 ‘동계문집’ 목판이 최근 회수된 일을 계기로 문화재 절도 범죄와 추적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1809년 간행된 이 목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교 책판’들과 비슷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사 결과 2016년 종중 장판각에서 목판을 훔친 범인은 이 종중 사람으로 매매업자에게 1000만 원에 팔아넘겼다. 범행 동기는 ‘생활고’였다. 한 반장에 따르면 동계문집 절도범은 순진한 경우에 속한다. 문화재 사범은 대략 자금책(유통책)과 절도책, 판매책이 팀으로 움직인다. 자금책이 의뢰해 절도책이 유물을 훔쳐 오면 판매책을 거쳐 또 다른 매매업자나 수집가의 손으로 넘긴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대표적인 사례가 해저 문화재 도굴범이다. 자금책이 선박과 진흙을 빼는 장비를 임대하고 절도책의 숙박비 유류비 일당(日當) 등을 댄다. 현장에서는 선장과 잠수부, 조수가 일한다. 근래에는 아예 인근 양식장을 빌린다. 도굴한 도자기를 망에 담아 양식장 바닷물 속에 숨겨 놨다가 ‘고객’이 찾아오면 판매책이 늘어뜨린 끈을 감아올려 도자기를 보여준다. 도굴꾼들끼리도 속고 속인다. “어마어마한 보물이 잠들어 있으니 자금을 대면 건져 주겠다”며 자금책의 돈만 챙기고는 자취를 감추는 사기꾼도 있다. 2015년 충남 태안군 당암포구 앞바다에서 고려와 조선시대 도자기를 건져낸 일당은 자신의 몫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은 잠수부의 제보가 계기가 돼 붙잡을 수 있었다. 최근 문화재 범죄는 지능화, 음성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장물인 게 뻔한 불화(佛畵)를 화기(畵記)를 훼손한 채 경매에 내놔 마치 정상적인 물건인 양 세탁한다는 얘기다. 해외 밀반출 시도도 꾸준하다고 한다. 석물 같은 경우 수사망이 좁혀지는 데 압박을 느낀 절도·은닉범이 인적이 드문 도로가에 버려 놓고 공중전화로 위치를 통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정문화재는 ‘장물인 줄 모르고 샀다’고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른바 ‘선의 취득 배제’다. 비지정문화재는 도난신고가 됐는지,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는지를 확인해 형사처벌 여부를 따진다. 그와 무관하게 원소유자가 반환소송을 낼 수도 있다. 한 반장은 “선의의 구매자라면 최소한 사려는 물건이 장물은 아닌지 지역 박물관이나 문화재청 등에 확인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안에서 물려받은 문화재를 지키고자 한다면 “최소한 사진과 수량 기록을 남기고 가치가 있는 물건은 국공립 박물관에 기탁하라”고 덧붙였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터키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의 무덤은 새알처럼 둥근 모양이다. 유골은 마치 엄마 배 속의 아기처럼 허리를 접고 팔과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망자가 다시 태어나리라는 재생의 소망을 담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해뚫음무늬 금동관 장식에서 용 두 마리와 봉황이 둘러싼 원은 해다. 그 안에는 태양 속에서 산다는 세 발 까마귀가 힘 있게 버티고 서 있다. 하늘신의 아들이 세운 나라에 산다는 고구려인의 자부심을 보여 준다. 각종 유물과 유적 등을 소재로 한반도와 주변에서 살던 고대인들의 생각과 사상으로 안내하는 책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암각화를 깊이 연구한 울산대 교수가 가족과 대화하는 형식을 빌려 비교적 쉽게 썼다. 저자는 사람이 세상을 보고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이 선사시대와 과연 얼마나 크게 다를지 묻는다. 부제는 ‘동굴벽화에서 고대종교까지’.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유부(有夫) 겁탈하는 것은 죄 아니고 무엇이오. … 팔자 좋은 춘향 몸이 팔도 방백 수령 중에 제일 명관 만났구나. 팔도 방백 수령님네 치민(治民)하러 내려왔제, 악형하러 내려왔소.”(춘향전 ‘완판 84장본’에서) 춘향이 수청을 강요하는 신관 사또에게 대거리하며 맞서는 ‘춘향전’ 대목이다. 당대의 백성은 이 대목에서 얼마나 통쾌했을까. 춘향전은 조선 후기의 신분 질서를 부정하면서 근대적 이념과 논리를 제시했다는 해석이 자리 잡고 있다. 정반대의 해석도 있다. 하층민에게까지 열녀가 되기를 요구하는 춘향전은 지배계층의 통치 논리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중후기 정치사회를 연구하는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62)가 최근 ‘춘향전, 역사학자의 토론과 해석’(그물)을 출간하며 새로운 해석을 내놨다. 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오 교수는 “지금까지의 상반된 두 가지 해석은 각각 속류 민중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지켜졌느냐는 별도로 하고 조선시대 수령이 기생(관기)을 포함한 읍비(邑婢·지방관아의 노비)와 동침하는 건 엄연한 불법이었습니다. 춘향이 표방한 정렬(貞烈)은 체제가 기생에게 허락한 범위 안에 있었고 춘향은 사또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한 것뿐이지요.” 오 교수는 “그런 면에서 춘향이 질적으로 새로운 논리를 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럼 춘향은 그저 지배체제의 이념에 순응한 것일까. 오 교수는 “사회 최하층의 나이 어린 기생이 관아 마당에서 지방의 최고 권력자와 정면으로 대결한 것 자체가 조선후기 국가권력의 불법과 폭력에 맞선 민(民)의 실천을 상징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한문본에서 매우 부드러웠던 대결 장면은 한글 이본(異本)들에서 점점 격렬하게 그려진다. 사또도 단순한 탐관오리가 아니라 체제의 대표자 성격이 뚜렷해진다. 춘향의 행동에 대한 기존의 상반된 해석 두 가지는 500년을 지속한 조선이라는 나라와 체제의 세련됨, 뒤집어 말하면 교활함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오 교수는 “민본주의를 표방한 조선의 지배층은 전근대사회임에도 특권을 상당히 억제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억압했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봐야 통치 이념의 보편성을 끌어다 자신의 가치를 천명한 춘향의 저항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당대 민중이 춘향전을 열렬히 지지한 것도 처절하고도 찬란한 저항의 모습에 반해서였다는 얘기다. “계몽주의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근대가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세상을 바꾼다는 통념이 있지만 역사를 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춘향전이 보여주듯 민(民)의 저항과 실천은 새로운 이념에 앞서 나타납니다. 낡은 질서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날 ‘법과 상식을 지키라’는 운동이 비록 논리적으로는 새로울 게 없다고 해도 이미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있다고 봅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영화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의견을 말씀해 주신 한국 관객들에게 감사하다. 덕분에 안주하지 않고, 감독과 창작자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9일(현지 시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62)이 말했다. 남동생인 이재현 CJ 회장(60)에게도 “불가능한 꿈일지라도 우리가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맙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기생충’ 책임프로듀서(CP)로 기생충의 해외 진출과 수상 캠페인을 전폭 지원했다. 영화계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힘썼다. 이 부회장은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은 영화 ‘마더’(2009년)의 제작투자를 맡으면서 봉준호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CJ는 봉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마더’, ‘설국열차’ 등의 투자, 배급을 맡았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은 이 부회장의 꿈이 이뤄진 것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은 이날 “봉 감독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 미소, 머리 스타일, 그가 말하고 걷는 방식, 특히 그가 연출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건 그의 유머 감각이다”라고 말했다. 곽신애 바른손이엔에이 대표(52)는 아카데미 92년 사상 처음으로 작품상을 받은 아시아 여성 제작자가 됐다. 그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지금 이 순간 굉장히 의미 있고 상징적인, 그리고 시의적절한 역사가 쓰인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곽 대표는 키를 쥐고 제작한 영화가 단 한 편뿐인 자칭 ‘초짜’ 제작자다. 봉 감독과의 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5년 봉 감독이 ‘기생충’ 트리트먼트(시놉시스보다 좀 더 구체화된 개요)를 보내 오면서부터다. 당시 ‘작품에 폐가 될까 봐 너무 두렵지만 설레기도 합니다’라고 봉 감독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뭘 또 두렵기까지씩이나’라는 답변이 왔다고 한다. 곽 대표는 봉 감독에 대해 “상대방이 최선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주는 감독”이라고 했다. 대표적인 ‘영화인 가족’이기도 하다. 곽 대표의 오빠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고, 영화잡지 ‘월간 키노’ 기자 시절 만난 남편은 영화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뭘 해도 다 받아줄 것 같은 예술가.”(배우 송강호가 봉준호 감독에게) “영화 전체의 흐름을 규정해버리는 선배님.”(봉 감독이 송강호에게) 영화 ‘살인의 추억’(2003년)을 시작으로 ‘괴물’(2006년)과 ‘설국열차’(2013년)를 거쳐 ‘기생충’까지 봉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작품들의 포스터 전면에는 예외 없이 배우 송강호의 얼굴이 있다. 송강호는 봉 감독이라는 선장이 모는 배의 균형추다. 뚜렷한 메시지를 제시하는 선장이 얼핏 작위적일 수 있는 설정을 흔들어대도 영화가 가라앉지 않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는 얘기다. 형사와 한강 둔치의 매점 주인, 열차를 멈추려는 보안기술자와 백수라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특유의 존재감으로 관객이 긴장을 풀지 않게 만들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는 명대사가 그의 애드리브란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 그래서 ‘봉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표현이 송강호에게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봉 감독은 지난해 5월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소감으로 “위대한 배우가 없었다면 한 장면도 찍지 못할 영화였다”며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석권은 송강호와 봉 감독의 작고 아름다운 첫 만남이 맺은 세계적인 결실이다. 무명 시절 송강호가 단역 오디션에서 떨어진 뒤 당시 조감독이던 봉 감독이 “언젠가 꼭 함께하자”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 ‘반칙왕’(2000년)과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 등으로 인기 배우 반열에 오른 송강호는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년)의 흥행에 실패한 봉 감독의 캐스팅을 선뜻 받아들였다. 그렇게 ‘살인의 추억’이 탄생했다. 송강호는 지난해 제7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엑설런스 어워드’를 받았다. 아시아 배우 가운데 첫 수상이었다. 지난해 12월에는 미국 LA비평가협회상 남우조연상도 받았다. 이번 아카데미에서는 연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호호 브러더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송강호는 봉 감독과 함께 ‘오스카 캠페인’ 여정에서 ‘기생충’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선생님 앞. … 일전에 송금하신 200원은 영수하여 가지고 경영하는 일은 그래도 진행이 되어 가오며 … 이쪽에서는 뱃사람을 교섭하여 놓았사오니 곧 물품과 사람을 보내주시길 바라오며, 일자가 오래 걸리지 않도록 곧 회답하여 주시옵소서. … 5월 28일. 최흥식 상서(上書).” 1932년 청년 최흥식(1909∼1932)은 중국 다롄에서 상하이의 곽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마치 상인이 투자자에게 중간보고를 한 듯하지만 백범 김구 전집에 수록된 편지다. 수신자인 곽윤은 백범 김구의 가명이다. 최흥식은 김구가 일본 수뇌를 암살하고자 비밀리에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1931년 가입했고, 일제의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를 처단하기 위해 다롄에 잠복해 있다가 김구에게 이 편지를 보냈다. 보내달라는 ‘물품’은 거사용 폭탄, ‘사람’은 거사를 함께할 사람, ‘뱃사람’은 현지 조력자를 가리키는 암호였다. 거사 준비가 어느 정도 진행됐음을 보고하는 동시에 조속히 실행하자고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 편지를 비롯한 ‘한인애국단원 편지 및 봉투’ 7점 등 모두 5건의 항일유산을 문화재로 최근 등록했다. 등록된 한인애국단원 편지 가운데는 김영구가 곽윤(김구)에게 보낸 것도 있다. “선생님 … 입학참고서와 옥편은 구하였으나 … 입학은 … 자신을 하옵기에 … 대략 학비는….” 필적과 정황으로 보아 발신자 김영구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1910∼1945)으로 추정된다. 거사 실행을 ‘입학’으로, 거사용 폭탄과 권총 등을 ‘입학참고서’와 ‘옥편’으로, 거사 비용을 ‘학비’로 바꿔 쓴 것이다. 이와 함께 한인애국단 유상근, 이덕주(1909∼1935), 유진식(1912∼1966)의 ‘한인애국단원 이력서 및 봉투’ 6점도 문화재로 등록됐다. 문화재청은 “해당 유물은 대일 의열 투쟁 거사의 최일선에 나섰다가 체포된 청년 독립투사의 신상을 새롭게 밝혀줄 원본들”이라며 “한인애국단 활동은 비밀스럽게 전개됐기에 편지와 이력서는 매우 드물고 귀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독립운동가 이교재(1887∼1933)가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국내에 들여온 문서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이교재 위임장 및 상해 격발(檄發·격문, 선언)’도 문화재로 등록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은 제1회 한국학 저술상 수상작으로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89·사진)의 ‘김용섭 저작집 1∼9’를 최근 선정했다. 김 교수는 조선 후기 농업사를 연구해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을 제시한 학자로 평가된다. 수상작인 저작집은 ‘조선후기농업사연구’와 ‘한국근대농업사연구’, ‘한국중세농업사연구’ 등으로 이뤄져 있다. 상금은 3000만 원이고, 1000만 원 상당의 수상작이 전국 도서관에 배포된다. 시상식은 12일 오후 4시 경기 성남시 연구원 소강당에서 재단법인 산기 관계자들과 이만열 심사위원장(숙명여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다. 한국학 저술상은 우수한 한국학 도서를 발굴해 학문 발전과 출판을 장려하고자 재단법인 산기의 후원을 받아 제정됐다. 재단법인 산기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국내 최고(最古) 서점 ‘통문관’의 창업주인 산기(山氣) 이겸노 선생의 뜻을 이어 설립한 비영리법인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17∼2019년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에세이 모음집이다. 전북대 영문과 교수인 저자는 성서와 불경, 소설, 시, 철학을 오가며 환대의 윤리를 탐구한다. ‘수대나태자경’에서 석가모니의 전생인 수대나태자는 일종의 ‘보시 성애자’다. 당대의 전략 병기인 최강의 코끼리를 적국에 스스럼없이 내 줘 산으로 쫓겨 가더니, 급기야 가족을 종으로 내 달라는 사제의 말을 따른다. 사실 사제는 태자를 시험하려는 제석천의 현신. 가족은 다시 모이고, 태자의 조건 없는 보시는 적국의 왕도 변화시킨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이 비린내 나는 저잣거리의 어수룩한 호구들에게도 천사가 ‘짠’ 하고 나타날까. 저자는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환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역설적으로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갈 때 삶이 더 윤리적인 것이 된다”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의 간도 출병은 명백한 계획적 제노사이드(집단학살)입니다.” ‘간도출병사’를 번역 출간한 김연옥 육군사관학교 교수(42·사진)는 동아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간도출병사를 읽으면 일본 군부가 외무성과 ‘투 트랙’으로 움직이면서 출병 계획을 입안한 것이 드러난다”면서 “간도학살 역시 군부가 단독 행동으로 현지에서 벌인 게 아니라 일본 정부 차원에서 결정하고 자행한 학살”이라고 말했다. 간도출병사는 1920년 청산리전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돼 당시의 실시간 전황(戰況)을 전해주는 1급 자료다. ‘간도출병사’에 기록된 비밀작전 지령을 보면 일본군이 애초부터 한국인 마을을 초토화하려 했다는 걸 시사하는 명령이 드러나 있다. 이들의 토벌 목표는 이른바 ‘불령선인’뿐 아니라 ‘가담하는 세력’ ‘반대되는 자’까지 포함해 뿌리를 뽑는 것이었다. 일례로 자료에 담긴 ‘군 참모본부 작전명령 57호’는 “1. 조선군사령관은 …혼춘 및 간도지방에서 불령선인 및 마적과 그에 가담하는 세력을 초토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육군성 송달 ‘육밀(陸密)’ 제218호도 “불령선인의 무리들을 단순히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불령단으로 보지 말 것. …반대되는 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타격을 가해 제국이 받게 될 수도 있는 화근을 근절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은 민간인을 학살했으면서도 독립군에 큰 타격을 가하는 데 실패했다. 간도출병사는 “여러 요인에 의해 그들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김 교수는 “독립군이 일본군 대부대를 어떻게 잘 피하면서 신출귀몰 했는지를 드러내는 점 역시 읽는 묘미”라고 말했다. 간도출병사가 청산리전투 당시 일본군 사망자를 11명으로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일제 측이 사상자 자료를 누락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간도출병사’는 실제 적지 않은 피해가 생긴 봉오동전투의 일본군 사상자 역시 ‘약간 명’으로 쓰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일본군은 ‘출병’ 당시 국경을 넘어 군사작전을 벌이는 불법성을 희석하고 민간인 학살의 만행을 가리기 위해 일종의 방패막이로 형식적으로나마 중국 측의 ‘양해’를 얻었다”면서 “일본군이 중국과의 공동 토벌이라는 협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쓴 협상 과정이 간도출병사에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간도참변(간도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외부의 현장 조사를 막기 위해 기독교장로회 선교사에게도 “현장에 가면 죽여 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간도출병사’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1920년 10월 31일 장암동 참변을 조사한 푸트(W R Foote) 선교사는 다른 현장을 조사하러 가기 위해 그해 11월 2일 간도 용정촌에서 병참사령관 쓰쓰이(筒井) 소좌와 만났다. 일본군이 장악한 도로의 통행증을 요청했지만 답변은 이랬다. “병졸이 귀하에게 하는 행위에 대해 나는 책임질 수 없다. 귀하는 …사살 당할 위해에 접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우리 병졸 중에는 인민의 불량(不良) 계급에 속하는 자도 일부 있으므로…즉, 만에 하나 귀하가 사살 당할 경우에는 많은 문제가 야기되며….” 국제 여론 때문에 일본군이 중요시하는 서양인 선교사에게도 이렇게 대응했으니 조선인 기자에게는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이자 논설기자로 간도참변을 취재하러 떠났다가 현지에서 피살된 장덕준 선생(1892∼1920·건국훈장 독립장·사진)은 더 센 협박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신문은 그의 최후에 관해 “밤중이 되어 …일본군은 말(馬)까지 가지고 다시 와서 가자고 강요하여 하는 수 없이 따라간 것인데 그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은 장덕준을 미워하고 기피하여 그날 밤 밖으로 유인하여 암살한 것이 틀림없다”고 보도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날이 밝을 무렵 무장한 일본 보병의 일대(一隊)가 기독교 마을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짜기 안쪽 방향에 있는 볏단을 쌓아놓은 곳에 방화하고 촌민 일동에게 집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사살했고, 반사(半死)인 채로 쓰러져 활활 타오르는 건초 더미에 덮여 금세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타 버렸다. 그사이 어머니도, 아내도, 자녀들도 마을 내 성년 남자 모두가 강제 처형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푸트(W R Foote) 선교사와 함께 간도참변 현장을 목격한 용정촌 제창병원장 S H 마틴 선교사가 1920년 10월 31일 장암동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쓴 ‘장암동 도살 사건’이다. 김연옥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최근 번역해 펴낸 ‘간도출병사’에 부록으로 실렸다. 마틴은 “가옥은 전부 불타버리고 일대가 연기로 뒤덮여 당시(當市·용정촌을 가리킴)에서도 그 불길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며 “나는 불탄 가옥 19채, 무덤 및 시체 36구를 목격했다”고 썼다.○일본군, 학살 뒤 천장절 축하 마틴 선교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곡지(谷地)와 본가도(本街道) 사이 촌락 중 기독교도가 있는 집을 전부 불태워 버린 뒤 천장절(당시 다이쇼 일왕의 생일인 10월 31일) 축하연에 갔다. 용정촌으로 돌아온 그는 만취한 일본 병사와 마주쳤다. 시가지에는 일장기가 펄럭였다. 마틴 선교사는 이 같은 학살은 “중국 지린(吉林)성 남부의 간도 모든 지역에 적용된다”며 “촌락은 매일 조직적으로 소각됐고 청년들은 사살됐다”고 적었다. 두 선교사의 조사 내용은 그동안 부분적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일본군이 입수해 일본어로 번역한 전문이 그대로 소개된 건 간도출병사가 처음이다. 제창병원 간호부의 엠마 엠 페르소프 주임도 ‘성서(聖書) 행상인 이근식 및 동촌(同村) 조선인 4명 참살(慘殺)’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10월 29일 이른 아침, 일본 병사 약 40명이 용정촌에서 불과 5리 떨어진 마을에 도착해 성서 행상인 이근식이 이웃집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위 사람을 포박했다.” 이근식은 머리가 거의 잘린 채 땅 속에서 발견됐다. 일제 조선군사령부가 기밀문서인 간도출병사에 부록으로 선교사들의 증언을 남긴 의도는 이어지는 ‘변박(辨駁)자료’에서 알 수 있다. 학살을 무조건 부인하는 변박자료는 “기독교 신도들의 집 혹은 교회라고 칭해지는 것을 불태우긴 했으나, 우리 군의 토벌 행동은 국가의 자위(自衛)상 조선의 치안을 소란시키는 불령자를 응징하는 데 있고…” 등으로 일관한다.○생존자에게 반성과 청원 강요 “교회 겸 학교 및 가옥 수채가 소각되고 30명 살해됨. 그중 23명은 사살되고 나머지 7명은 각자 집에서 타 죽음.” 푸트 선교사가 일본 도쿄의 신학 박사 올만에게 보낸 편지에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이 패한 뒤 청산리에서 벌어진 학살을 기록했다. 그러나 변박자료는 “패잔병(독립군)이 저항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소각한 것 등으로 고의로 조선민을 괴롭게 하려고 소각한 사실은 없다”고 변명했다. 교회와 학교가 불타고 80명이 사살됐다는 ‘운통자’ 마을 학살에 관해서는 “지점이 명료하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없었다”고만 적었다. 변박자료에서는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주민들에게 오히려 사죄하고 일본군의 주둔을 청원하도록 강요한 일도 드러난다. “장암동 주민 십여 명은 연이어 서명하여 귀순의 뜻을 표하고, 기존의 마을사람 일동이 이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했음을 사죄했다. … 죽은 자는 그들이 이전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응징이므로 불가피한 것이었고 … 우리 군대의 토벌 행위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변박자료는 주민들이 이 같은 청원서를 냈다고 주장했다.○ 간도 독립군 6000명 이상 간도출병사는 일본군 시각에서 작성한 일종의 전쟁백서다. 당시 작전 개요, 의도, 전황 등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도 기존 자료와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을 다수 보여준다. 부록 ‘간도지방 불령선인단체 개황도’에는 일제가 밀정을 통해 파악한 간도지방 독립운동 세력이 병력과 함께 나열돼 있다. 특히 홍범도 장군이 이끌던 ‘대한독립군(도독부)’ 근거지 바로 옆에 ‘무관학교’가 표시된 점이 눈길을 끈다. 김연옥 교수는 “대한독립군이 운영하던 무관학교로 추정할 수 있다”며 “대한독립군이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것은 기존에는 몰랐던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동안은 정확히 몰랐던 북로군정서 무관학교 위치도 지도에 표시됐다. 다른 부록인 ‘불령선인 토벌계획 요도’는 1920년 8월 하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전 지도다. 역시 밀정 등에게서 파악한 독립군의 병력과 총기 등 무장 규모가 작전구역별로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일본군이 파악한 독립군 병력은 모두 6000명 이상이다. 김 교수는 “두 지도를 종합하면 당시 서간도에 있던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북간도로 많이 이동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황도 속 독립운동 단체 설명 (1920년 5월 말 시점) ::[1] 군정서(軍政署): 대종교(大倧敎)의 교도들을 주체로 하고, 가장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상을 가졌으며, 군비(軍備)도 비교적 완비됨. 병력 600명, 소총 800정, 탄약 총 한 자루당 200발, 기관총 2정, 권총 폭탄 약간.[2] 독립군(도독부·都督府): 구(舊) 폭도파에 속하며 무력으로 한국의 독립을 기도하는 단체로 세력 범위가 가장 넓음. 병력 약 1000명, 소총 1000정, 탄약 총 한 자루당 50∼100발, 기관총 권총 탄약 약간.[3] 광복단(光復團): 이씨조선(李朝)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며, 공자회 계통과 구학파 계통에 속함. 병력 200명, 소총 150정, 탄약 총 한 자루당 50발.[4] 신민단(新民團): 성리교(聖理敎) 교도들을 주체로 함.[5] 의민단(義民團): 천주교 교도들을 주체로 한 것으로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연료를 사체 위에 둘 때 어떤 부상자가 일어서려고 시도했으나 곧바로 총검으로 찔러 화염 속에서 타 죽게 했다고 합니다.” 이는 캐나다 기독교장로회 푸트 선교사가 1920년 10월 30일 중국 지린(吉林)성 용정(龍井)촌 인근의 한국인 마을 장암동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학살 현장을 조사해 기록한 것이다. 일본군이 저지른 간도참변(경신참변)에 대한 캐나다 선교단의 보고서 등이 100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 공개됐다. 김연옥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최근 번역 출간한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를 통해서다. 김 교수는 “간도출병사는 조선군사령부가 1920년 ‘간도 작전’의 전모를 담아 1926년 일본 육군성에 보낸 비밀문서”라며 “그동안 일부만 알려졌던 선교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어 독립운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그 젊음은 죽음을 껴안으면서 다시 찾아지는 젊음이다. … 그리하여 이제 나는 문명의 참다운 단 하나의 진보는 … 스스로 뚜렷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하는 것임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 알베르 카뮈(1913∼1960)는 1937년경 산문 ‘제밀라의 바람’에 이렇게 썼다. 제밀라는 알제리 북쪽에 있는 고대 로마 유적. 카뮈는 이 폐허를 보며 필멸의 운명을 직시한 고대인들의 순수한 정신을 떠올렸다. 저자는 이곳을 찾아 카뮈의 글을 곱씹었다. 그리고 인간이 존재의 하찮음을 명징하게 의식하면서, 순간마다 힘을 다해 열정을 바치는 데 위대함이 있다는 뜻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여러 차례 손꼽히는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이자 카뮈의 ‘이방인’을 손수 번역했던 저자가 카뮈의 발길이 닿았던 곳을 여행하며 독자를 카뮈의 삶과 작품으로 이끈다. 부제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만난 영원한 이방인’.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