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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국립자연사박물관을 만드는 데 필요한 조언요? 호호, 20년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는데…. 일단 ‘저질러라(Do it)’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만난 미국 뉴욕자연사박물관의 로럴 켄들 박사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한국통’ 인류학자다. 1960년대 말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파견됐던 인연으로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한국 무속신앙을 다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한국말로 대화하는 데 거의 불편이 없다. 켄들 박사는 7일 국립생태원과 민속박물관이 공동 주최한 국제융합학술대회 ‘인간 동물 관계의 이미지와 재현’에 참석차, 같은 박물관 동료인 동물학자 로스 맥피 박사와 함께 방한했다. 세계적 자연사박물관 학자들로서 이 학술대회에서 논의하는 자연과 문화의 융합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나누기 위해서다. 특히 국내에서 20년간 지지부진했던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 재추진 목소리가 최근 다시 나오고 있어 이들의 발언에 상당한 관심이 쏠렸다. “전 세계 자연사박물관이 요즘 추구하는 지향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생태학이나 동물사(史)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거죠. 인류학자인 제가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에요. 자연사박물관은 자연과 인간, 예술이 총체적으로 녹아들어야 합니다.” 두 박사는 뭣보다 ‘흥미로운 전시(exciting exhibition)의 지속적인 개최’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힘을 합쳐 자연사 전시의 가치를 국민에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 켄들 박사는 “작아도 내실 있는 전시를 열면 관객들이 스스로 ‘이래서 자연사박물관이 필요하구나’ 하고 깨닫는다”며 “정부의 정책추진보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뉴욕자연사박물관에서 기획한 특별전 ‘말(The Horse)’은 상당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 전시는 6000년 전부터 말이란 동물을 가축화한 과정과 함께 인류 문화 형성에 말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되짚은 전시였다. 맥피 박사는 “몽골의 경마대회나 서양의 승마치료처럼 자연과 인류의 역사가 현대에 어떤 자산을 남기고 있는지 주목했다”고 말했다. “뉴욕자연사박물관은 요즘 자연사에서 학문 영역 파괴는 물론이고 지정학적 구분도 지워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과 중국, 일본으로 갈라졌던 상설전시관을 아시아관으로 통합하는 거죠. 크게 보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잖아요. 국경도, 학문 경계도 인간이 만든 잣대죠. 그 틀을 깨는 게 자연사박물관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김시영 작가(56)와 제자인 두 딸이 선보이는 흑자(黑磁) 도예전 ‘흑유명가 가평요-검은 달 항아리와 그 이후’가 17일까지 서울 중구 롯데갤러리에서 열린다. 흑자란 검은빛을 머금은 도자기로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때까지 성행했으나 조선 시대부터 차츰 사라졌다. 김 작가는 1980년대 초반부터 흑자 되살리기에 투신해 “검은 대지에 잔잔히 피어나는 꽃”(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란 극찬을 받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이화여대 조소과를 졸업한 큰딸 자인 씨(28)와 서울대 조소과 학생인 경인 씨(24)도 참여해 총 7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김 작가가 달 항아리나 다완(茶碗·찻그릇)처럼 전통적 분위기가 짙은 작품에 초점을 맞췄다면, 두 딸은 사과 모양 자기나 흑자 하이힐 등 신세대다운 창의적인 시도가 눈길을 끈다. 무료. 02-726-443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시복시성(諡福諡聖)은 가톨릭에 익숙지 않은 이에겐 낯선 용어다. 한자 그대로 풀자면 ‘복자(福者·Blessed)와 성인(聖人·Saint) 칭호를 올린다(諡)’라고 직역할 수 있다. 시복시성은 가톨릭에서 순교했거나 덕행이 뛰어났던 인물을 사후에 신앙의 모범으로 삼아 공경하도록 특별 지위에 추대하는 것을 일컫는다. 먼저 복자에 올라야 다음에 성인(혹은 성녀)으로 추대할 수 있다. 복자로 추대하려면 엄정한 조사를 거친 신청서류를 로마 교황청의 시성성(省)에 제출해야 한다. 여기서 기적심사가 이뤄지는데 일반적으로 두 가지 기적이 입증돼야 하나 순교자는 순교 사실만으로 심사가 면제된다. 단, 사망 5년 이내에는 요청할 수 없다. 후보자는 복자나 성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따지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한다. 성자는 복자 가운데 성성의 장관이 교황에게 윤허를 요청하는데, 최종심사위원회에 자문을 한 뒤 추대한다. 한국 가톨릭은 현재까지 성인 103위를 배출했다. 1925년 기해박해(1839년)부터 병오박해(1846년) 사이에 희생된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이 열렸고, 1968년에는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 24위의 시복식이 거행됐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에서 시성식을 갖고 103위를 모두 성인으로 추대했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와 다산 정약용의 조카였던 정하상 바오로(1795∼1839)가 대표적이다. 가톨릭에서 시복시성은 1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졌는데, 성인으로 대접하는 성서 속 인물이나 기록이 사라진 초기 교회 성인까지 포함하면 성인은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51번과 시복식 147번을 거쳐 성인 482명과 복자 1342명을 배출했다. 자신도 선종 6년 만인 2011년 복자로 추대됐다. 가톨릭 역사상 가장 빨리 시복된 경우다. 당시 가톨릭계의 염원에 따라 5년의 유예 기간 없이 선종 후 바로 시복 절차에 들어갔고 한 프랑스 수녀의 기적 증언이 이어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변호사가 욕(辱)을 미화한다? 좀 헷갈린다. ‘변호사가 욕먹는다’는 얘긴 들어 봤다. 그런데 욕을 종합 연구했단다. 그 결과 우리 모두 ‘욕해야 사는 인간’, 호모욕쿠스라 결론 내린다. 다섯 문장 쓰는 데 거의 욕이 들어가니 덜컥 욕지기가 치민다. 에라이, 연수차 미국에 가 있다는 이병주 변호사(50)에게 욕먹을 각오로 한밤에 전화를 넣어 봤다. ―욕 찬양 및 고무는 국가보안법은 아니어도 풍기문란죄에 안 걸리나. “어찌 알았나. 서울대 물리학과 다니다 1986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개월 투옥됐다. 그때 가슴에 울분 많이 쌓였다. 욕 안 하곤 못 살겠더라. 변호사란 직업도 그렇다. 서로 욕하면서 옳네 그르네 따지는 일이다. 욕 없이 사는 인생이 없더라. 그럼 차라리 제대로 파헤치고 싶었다. 아참, 당연히 욕이 지나치면 법에 걸릴 수 있다.” ―연구해 보니 욕에 좋은 점이 있던가. “소통과 정화 작용을 한다. 촛불시위를 보라. 답답한 현실에서 욕은 하나의 출구를 찾는 방법이다. ‘싸워야 정 든다’는 말도 있다. 내 속내를 털어놓고 다른 이를 읽는 도구로서 욕은 거칠지만 효과를 발휘한다. 다만 실컷 하되 상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지는 말길. 내게 욕할 자유가 있다면 상대 역시 권리가 있다.” ―저자의 욕은 상욕하곤 개념이 다른 것 같다. “그렇다고 수준이 높지도 않다. 한국인에게 욕은 독특한 의미를 지녔다. 영어나 라틴어에선 똑 떨어지는 말이 없다. 비판(criticize)보단 강하고 저주(curse)보단 약하다. 그런데 보통 욕한다고 해석하는 ‘swear’엔 맹세한단 뜻도 있다. 맹세란 자기 말이 진심임을 약조하는 거 아닌가. 욕에 내포된 진실을 볼 필요가 있다.” ―욕에도 철학이 있단 소린가. 애들 들을까 겁난다. “하나 묻자. 어릴 때 적당한 욕은 친밀감의 표시였다. 그리고 말린다고 안 하나. 다 누구한테 배웠겠나. 욕 나올 현실도 어른들이 만든 거다. 물론 긍정적 방향으로 분출하도록 만들어야지. 욕이 가진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사회의 몫이다.” ―물리학도가 데모하다 감방 가고, 노동운동하다 변호사 되고…. ‘욕보신’ 인생이더라. “좋은 자세다. 살아 보니 그리 남 신경 긁어야 할 때가 있다. 이건 선택의 문제다. 욕 안 먹겠다고 움츠린 삶과 다소 생채기 나도 부대끼는 인생. 난 후자가 더 건강하다고 본다. 욕에는 죄가 없다. 점잖게 정답만 따지면 개인도 사회도 경직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1908년 제작된 최초의 근대식 궁궐측량도인 ‘창덕궁 창경궁 수도철관배관도’가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조선왕실 건축도면’(42건 60장)에 포함된 이 도면은 대한제국상수도회사 기술고문을 지낸 영국인 토목공학자 포스터 바함이 만들었다. ■ 2·8독립선언 95주년 기념식이 7일 오전 10시 반 서울 종로 서울YMCA 2층 강당에서 열린다. 2·8독립선언문 낭독과 기념사에 이어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기념강연 ‘2·8독립선언 역사적 의미와 한국사회’도 열린다. 참가 문의 02-732-2941}
“정말 난처해졌습니다. 이러려고 이 책을 쓴 게 아닌데….” 평소 점잖은 학자풍이란 소릴 듣는 최종덕 문화재청 정책국장. 하지만 5일 오후 직위 해제가 알려지자 전화로 전해지는 목소리에 가느다란 떨림이 역력했다. 전날 서울 광화문에서 만나 “시기가 민감하다고 책 출간을 말리는 이도 많았지만 정확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며 책을 펴낸 이유를 설명할 때의 차분함은 이미 사라졌다. 최 국장의 뜻과 달리 최근 출간한 ‘숭례문 세우기’(돌베개)는 후폭풍이 일어날 여지가 컸다. 숭례문은 최근 논란이 지속되며 어느 때보다 예민한 이슈였다. 게다가 책을 통해 상당한 혼선과 잡음이 있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내에 준공 행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당한 진통도 있었다. 그는 “공사 기간을 앞당겨 2012년 8월 15일로 맞추라는 주문이 있었다.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박범훈)도 현장을 방문해 ‘금년 내에 준공식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고 썼다. 윗선의 주문은 관계 기관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새 대통령 취임 후인) 2013년 4월 말 이후라야 준공이 가능하다는 보고에 청장(김찬)은 난감해하며 ‘정무적인 차원’의 걱정을 했다”거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최광식)은 준공 행사가 현 정부 문화행사의 대미를 장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의 (준공 지연) 보고에 늦추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때는 개막 열흘을 앞두고 준비단 측이 공사 중인 숭례문 앞에 가설 덧집(문화재를 덮어씌우는 가설물) 설치를 요구했다. 각국 정상이 지나가는데 공사판이 보기 싫다는 이유였다. 바로 허물 가건물에 돈 들일 필요 없다는 청장(이건무)의 결정에도 결국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듯이” 가설 덧집을 만들어야 했다. 전통 방식으로 숭례문을 복원하지 못한 점과 현장의 시행착오도 밝혔다. 전통 철을 사용하겠다고 대장간까지 차렸는데 제철 작업으로 생산된 양이 너무 적었고 품질도 나빴다. 1998년 경회루 수리 때 나온 전통 철이 있어 이를 제련해 재사용하고, 일부 부족분은 현대 철로 대체했다. 최 국장은 “대장간에서 전통 철을 생산한 것처럼 국민을 오해하게 만든 점은 죄송하다”며 “대장간을 철수할 때도 전문가에게 자문해 실행했고 전통 철을 최대한 재활용했다”고 설명했다. “전통 방식으로 치목(治木·나무를 다듬고 손질함)하겠다”던 약속을 못 지킨 과정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통나무를 들여와 탕개톱으로 켜는 방식을 시도했으나 이를 처음해 보는 목수들로선 공사 기일을 맞출 수 없었다. 결국 용도에 맞게 현대식 톱으로 자른 제재목을 사용했다. 최 국장은 숭례문 논란의 단초가 된 단청 균열에 대해선 “우리도 모두 단청장(홍창원)을 믿었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숭례문 복구 전체가 부실과 비리로 물들었다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최 국장은 “잃어버린 전통 기법을 단 한 번의 시도로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해 이해를 구하려고 책을 펴냈지만 파문만 더 키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부실 논란이 끊이지 않던 숭례문 복구공사를 책임졌던 최종덕 문화재청 정책국장(사진)이 직위 해제됐다. 문화재청은 5일 국가공무원법에 따른 인사발령으로 최 국장의 현 직위를 해제하고 별도 조치가 있을 때까지 대기 근무할 것을 지시했다. 최 국장은 2008년부터 숭례문복구단 부단장과 단장을 역임하며 숭례문 복구공사를 지휘했다. 문화재청은 따로 입장을 밝히진 않았으나 그가 최근 숭례문 복구 과정을 담은 책 ‘숭례문 세우기’를 출간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숭례문 부실 복구 논란으로 인해 감사원 감사를 받고 있는 시점에 논란이 될 수 있는 책을 펴낸 것이 적절치 않고 ‘조직에 분란을 끼쳤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최 국장은 인사 발령 후 본보와의 통화에서 “본뜻이 왜곡되고 일이 의도치 않게 흘러갔다”며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니시진오리(西陣織)는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京都)에서 발흥한 수제품 가운데서도 가장 명성이 높다. 5세기 말 바다를 건너 간 도래인(渡來人)에서 유래해 한반도와도 인연이 깊은 비단직조산업으로, 주로 기모노 제작에 쓰이는 일본의 대표적 문화자산이다. 하지만 이 1500년 전통의 일본 전통 비단산업의 불씨가 사그라지고 있다.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최근 국립민속박물관 학술지 ‘국제저널 무형유산’에 게재한 논문 ‘일본 교토 니시진 비단직조산업이 직면한 과제’에서 “현재 니시진 가족기업이 속속 문을 닫아 해당 기술과 노하우가 영구히 사라질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2008년 총 판매량이 1990년의 20% 수준으로 떨어졌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200여 개가 성업하던 염색공장은 20여 년 만에 60군데로 줄었다. 그나마 남은 곳도 사업을 계승할 이가 있는 공장이라고는 10%가 채 되지 않는다. 니시진오리의 몰락은 비싼 가격과 취향 변화, 경기 불황처럼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나 가장 큰 문제는 그동안 일본이 자랑해 왔던 장인의 대물림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이다. 박봉에 시달리며 오야카타(親方·우두머리 장인) 밑에서 몇 년씩 고생해야 하는 도제시스템을 견뎌낼 청년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문 교수는 “일본 비단직조산업이 처한 실정은 바다 건너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한국은 전통무형유산을 박물관 전시품처럼 ‘과거의 잔존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것. 전통기술과 문화산업 활성화를 모색하지 않고 특정 기술을 지닌 몇몇 인물만 무형문화재로 대우하고 마는 현재의 정책부터 재고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 의미에서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니시진오리의 부활을 활발히 모색하고 있는 최근 일본의 노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직조기술로 만든 비단을 유럽의 유명 패션업체에 공급하거나 소비자가 가지고 온 옷감을 병풍이나 핸드백 등 원하는 소품으로 다시 만들어주는 사업을 벌이며 난국을 타개하려고 노력한다. 문 교수는 “현대적 감각이나 유행을 읽어냄으로써 전통산업의 활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한국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강원 원주시 치악산 명주사 부설 고판화박물관의 한선학 관장은 참 부지런한 이다. 지난해 10주년을 맞은 박물관은 그간 국내외에서 한국 중국 일본 티베트 몽골 작품 4000여 점을 수집했다. 그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때를 잘 맞춘 알찬 전시도 자주 펼쳐 놓는다. 최근 개막한 특별전 ‘행복의 전령자-판화로 보는 아시아 말의 세계’도 올해 갑오년(甲午年) 말띠 해를 맞아 마련했다. 제목 그대로 이번 전시에선 말과 관련된 목판화 100여 점을 볼 수 있다. 한국 판화로 경기 남양주시 불암사 판 석씨원류(釋氏源流·석가모니 일대기)가 소개된다. 그 가운데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은 부처가 출가를 결심한 뒤 말을 타고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민간에서 주로 부적으로 사용한 ‘신마(神馬)’ 판화, 진성여왕(?∼897)과 김유신 장군(595∼673)의 묘에 새겨진 12지신 탁본도 만날 수 있다. 중국 판화 ‘천관사복(天官賜福)’과 ‘선화복수(善火福水)’는 박물관이 처음으로 공개하는 명품이다. 천관사복은 정월대보름 옥황상제가 말을 타고 내려와 복을 내려주는 장면을 담았고, 선화복수는 섣달그믐 부엌신이 복을 내려준다는 풍속을 판화로 새겼다. 한 관장은 “아시아에서 말은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해주고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전령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4월 30일까지. 홈페이지(www.gopanhwa.or.kr) 참조. 033-761-7885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디 서울만 사람이 사나. 지방 곳곳에서도 놓치기 아까운 민속행사들이 쏠쏠하다. 경기 여주시에 있는 문화재청 세종대왕유적관리소는 30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영릉(英陵) 광장 및 재실에서 투호나 윷놀이 같은 전통 민속놀이 체험 행사를 개최한다. 설날을 맞아 한글로 소망을 써주는 프로그램도 있다. 충남 금산군 칠백의총과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서도 30일∼다음 달 1일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다. 칠백의총에서는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복조리도 나눠준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9일부터 닷새 동안 ‘설맞이 한마당’을 연다. 창작 마당극 ‘신흥부놀부전’과 가족 영화를 관람할 수 있고, 전통놀이와 음식을 즐길 시간도 갖는다. 국립공주박물관도 30일∼다음 달 2일 연하장 만들기를 비롯해 다양한 행사를 펼친다. 다음 달 1일 옥외마당에서는 전통문화예술단 ‘논두렁 밭두렁’이 풍물 공연을 한다. 국립광주박물관도 빠지지 않는다. 대나무로 제작된 ‘도롱테(굴렁쇠의 삼남지방 사투리) 굴리기’ 행사가 관심을 끈다. 30일 동물 그림과 풍속화를 목판으로 찍어 보고, 다음 달 1일엔 서예가가 가훈을 써 준다. 국립김해박물관은 판화로 ‘만복(萬福) 부적’을 만들어 찍어 보는 프로그램을 개최하고, 윷점과 연하장 만들기도 진행한다. 국립나주박물관에서는 30일∼2월 1일 오후 2시마다 가족대항 윷놀이 경기가 열리며, 죽마놀이와 공기놀이도 할 수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1일 컨벤션홀에서 ‘솟대 만들기’ 체험 행사를 개최하고, 국립전주박물관은 ‘금동관모 만들기’와 ‘맷돌 지게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바다 건너 국립제주박물관은 제주의 전통 떡 ‘빙떡’을 만드는 체험 행사를 연다. 31일 오전 9시부터는 선착순으로 말띠 관람객 200명에게 복조리를 나눠준다. 국립진주박물관은 30일부터 ‘갑오년 희망나무’를 설치한다. 다음 달 13일까지 소망종이를 모아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 때 함께 태우며 소원을 빈다. 경주 김유신묘 십이지신상 가운데 마신(馬神)을 목판으로 찍어 보는 순서도 있다. 국립춘천박물관은 다음 달 1, 2일 강원서학회에서 입춘첩이나 가훈을 써 준다. 30일 떡메치기도 체험할 수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은 30일∼다음 달 2일 해솔관에서 귀신을 물리친다는 ‘짚말’을 볏짚으로 만드는 행사를 연다. 야외마당에서는 국악과 널뛰기 공연도 펼쳐진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설이나 추석 명절 서울에 남아 운전하는 이들은 자주 되뇌는 말이 있다. “아, 평소에도 길이 이렇게 잘 뚫렸으면!” 기왕지사 어디든 편히 갈 수 있다면 가까운 궁궐이나 박물관을 찾아보자. 알찬 행사들이 대체로 무료고, 돈을 받더라도 가벼운 경비로 한나절을 즐길 수 있다. 특히나 올해는 갑오년(甲午年) 말의 해가 아닌가. 마구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말은 신나게 뛰어다녀야 제맛이다. ‘명절 행사의 강자’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은 올해도 풍성한 놀이마당을 많이 준비했다. 30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나흘 동안 40개가 넘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일부 복주머니나 대나무 단소 만들기 체험은 재료비 차원에서 1000∼7000원 돈이 들기도 한다. 개중에는 청마(靑馬)의 해에 맞춰 다양한 말 관련 행사들이 눈에 띈다. 나흘 내내 배움터 앞마당에서 조랑말 타기 체험 행사가 있다. 물론 기념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오촌댁 앞마당에서는 ‘죽마(竹馬·대나무 말)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죽마는 삼국유사 탑상편(塔像篇)에 관련 기록이 나올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전래놀이.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를 뜻하는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사자성어도 있지 않나. 자녀와 함께 동심의 세계로 떠나 보자. 같은 장소에서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사가 하나 더 있다. ‘추억의 말 장난감’으로 흔들 목마나 ‘호핑(hopping) 말’ 같은 말과 관련된 장난감 놀이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밖에 △청말 무늬가 있는 한지로 쟁반 만들기 △말 모양 캐릭터 선착순 선물 △말띠 관람객을 위한 복조리와 군것질 거리 증정 △마구간을 주제로 한 관람객 쉼터도 말의 해를 맞아 특별히 준비한 민속행사다. 그밖에도 다양한 행사가 즐비하다. 윷점이나 토정비결도 볼 수 있고, 연과 복조리 배씨머리띠를 만들어 보는 과정도 있다. 거피시루떡과 약과 식혜도 맛볼 수 있는가 하면, 제기차기를 비롯해 팽이치기 투호놀이 널뛰기 고누놀이도 즐길 기회를 제공한다. 30일 국악과 서양음악이 어우러진 공연 ‘오색찬란’을 시작으로 사자춤과 매사냥(31일), 임실필봉농악과 전통 공연(2월 1일), 평택농악(2일)도 차례로 구경할 수 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은 다음 달 1일 하루 오후 2시부터 ‘2014 설날한마당’을 개최한다. 열린마당에서 진행하는 제1부 ‘취고수악대(吹鼓手樂隊)의 행진과 전통 문화체험’에선 취고수악대와 사물놀이 팀이 악기를 연주하며 신명나는 풍물 공연을 선보인다. 취고수악대란 조선 후기 군영에서 연주하던 병사들로 지금의 ‘군악대’를 뜻한다. 버나놀이와 죽방울놀이 사자탈춤 상모돌리기로 이어지는 기예들이 펼쳐지고, 관객들과 한바탕 어우러진 강강술래로 마무리한다. 오후 3시부터 대강당에서 개최되는 ‘절대가인의 한판수다’는 창극 형태의 공연.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만난 며느리들이 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엮었다. 명절 때 여느 가족이라도 겪을 법한 진솔한 이야기가 공감대를 자극한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극장 용 홈페이지(theateryong.or.kr)에서 사전 예약해야 하며, 무료지만 만 7세 이상만 입장이 가능하다. 궁궐 행사도 챙겨 보자. 31일 설날 당일에는 창덕궁 후원을 제외한 서울의 모든 궁궐과 종묘를 무료 개방한다. 30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경복궁 함화당과 집경당에서 ‘온돌 체험 및 세배 드리기’ 프로그램이 개최된다. 창경궁은 30일 오전 9시부터 숭문당에서 ‘설맞이 무의탁 홀몸어르신 초청’ 행사를 열고, 덕수궁 함녕전 앞에서는 30일∼다음 달 2일 전통 민속놀이 체험을 할 수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조선시대 건물 바닥에 왜 도자기가 묻혀 있지?”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강문화재연구원이 2012년 발표한 서울 종로구 서린동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묘한 유물들이 눈길을 끈다. 건물 터 곳곳 12군데에 도기나 자기들이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수가 항아리인데 접시를 뚜껑처럼 덮어 놓은 형태로 미뤄 건물 축조 당시 의도적으로 매납(埋納·목적을 갖고 땅에 묻음)한 것이 분명하다. 보물단지도 아니고 꺼낼 수도 없는 곳에 선조들은 왜 굳이 이런 걸 묻었을까.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학술지 ‘고고학지’에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오영인 씨(37)가 게재한 논문 ‘조선시대 건물 축조 과정 중 매납된 도자기에 대한 일고(一考)’는 이런 매납 도자기의 성격 규명에 초점을 맞췄다. 도자기 매립이 주로 확인된 서울 종로구와 중구 일대 124건을 토대로 했다. 묻은 이유를 알려면 먼저 매납 위치를 살펴봐야 한다. 대부분이 건물 적심(積心·초석 아래 돌로 쌓은 기초 부분) 부근에 묻혀 있다. 특히 안방이나 사랑방처럼 여러 공간으로 분할된 조선 건물에서 중심에 해당하는 대청마루 적심에 위치했다. 이 밖에 건물을 바깥과 차단하는 담 아래에서 자주 발굴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이 2012년 발행한 ‘도성 발굴의 기록 Ⅱ’에 따르면 중구 회현동 한양도성 유적의 성벽 부근에서도 매납 도자기가 나온 바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초석을 박기 전 지낸다는 ‘모탕고사’(집을 짓기 전 올리는 제사)와의 관련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전남 고흥군 거금도에는 건축 직전 제수(祭需) 일부를 땅에 묻는 풍습이 현재도 이어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건축 과정에서 사고가 없고 집안도 무사안녕하기를 ‘성주신’(집 지키는 신)에게 비는 뜻이 담긴 것이다. 이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유구에서 발굴되는 지진구(地鎭具)나 진단구(鎭壇具)와는 닮은 듯 다르다. 둘은 건물이 무탈하길 기원하는 뜻은 같지만, 철저히 불교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묻은 장소도 사찰이나 탑과 같은 종교 건축물로 한정됐다. 오 씨는 “유교 사회인 조선의 매납 도자기는 민간 신앙의 전통으로 파악해야 옳다”며 “진단구나 지진구와 다른 새로운 명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이한 점은 묻힌 도자기 시기가 대부분 15∼17세기고 이후는 지금까지 딱 1점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17세기부터 조선은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해 정부 공물이 쌀로 통일돼 도자기 공납이 크게 줄어든 사실과 관련 있어 보인다. 또 여러 전란을 겪으며 경제적 부담을 피하려 옛 건물 터에 다시 건축물을 세우는 경우가 잦아졌다. 오 씨는 “도자기 유통량이 감소했고 신축 건물의 기초시설 조성도 불필요해지면서 자연스레 도자기 매납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국립문화재연구소 천연기념물센터가 최근 경기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412호 ‘물거미 서식지’에서 크기 3.3mm의 어린 물거미가 육상과 수중에서 동면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물거미(학명 Argyroneta aquatica)는 전 세계에 딱 1종밖에 없는 희귀종. 주로 물에서 공기주머니를 만들어 숨을 쉰다. 2010년 육상에서 동면하는 성체 물거미가 발견된 적은 있으나 어린 개체의 동면은 처음 확인됐다. 사진은 물거미가 물속에서 거미줄로 공기주머니 집을 만들고 안에서 잠자는 모습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갤러리에서 열리는 ‘본업: 생활하는 예술가’는 기획 의도가 독특한 전시다. 타이틀에서 연상되듯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 본업인 작품 활동에 대한 고민이 가득한 20, 30대 작가 4명이 참여했다. 권용주와 안데스 이수성 이우성 작가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위해 간이 벽을 세우거나 설치를 대신하고, 성인을 대상으로 미술지도 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작품들에선 페인트가 아직 덜 마른 것 같은 묘한 불안함이 묻어난다. 왠지 ‘작업 중’이란 팻말을 걸어놓아도 어울릴 것 같다. 이수성 작가의 ‘노동예술 2012-13’은 디자인의 초벌 드로잉으로 보이는 스케치 50점을 한데 모았는데, 제목 그대로 예술보단 실제 노동 현장을 엿보는 기분이 든다. 정진우 큐레이터는 “88만 원 세대라 불리는 청년층의 불안한 일상은 동년배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라며 “엇비슷한 처지의 작가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예술로 확장시켜 나가는지를 작품에 투영시켰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신진 큐레이터 양성 프로그램인 제3회 두산 큐레이터 워크숍에 참가한 이성희 장순강 홍이지 씨가 공동 기획했다. 다음 달 22일까지. 02-708-505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50년대 초반 어린이 미술 교과서엔 6·25전쟁이란 민족상잔의 아픔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1952년 문교부가 발행한 ‘도화공부 초등미술4’를 보면 전쟁 상황을 묘사한 그림들이 눈에 띈다. ‘집을 찾아서’란 그림은 봇짐을 지고 피란길에 오른 국민이, ‘강을 건너 돌진’과 ‘시가전’은 전투를 벌이는 군인들의 모습이 담겼다. 함께 전시된 ‘미술과 그림5’(1954년 발행)는 제일 뒷면에 문교부 장관 명의로 한글과 영어로 제작 배경을 밝히는 글이 실렸다. 전쟁은 끝났으나 절대적으로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유엔 한국재건위원단이 기증한 종이로 교과서가 만들어졌다는 내용이다. “고마운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 한국을 부흥 재건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자”는 훈시가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라, 일제강점기엔 어린이 미술 교과서가 남아용 여아용이 따로 있었어?” 서울 마포구 창전동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한국 근·현대 미술교과서’는 소규모지만 참 흥미로운 전시다. 20세기 초부터 최근까지의 미술 교과서 210여 점을 모았는데, 어느 세대라도 어린 시절 배우던 교과서를 마주하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1950년대 교과서는 엮은이 이름에서 시인 이상의 친구였던 서양화가 구본웅(1906∼1953)이나 장면 총리의 동생인 서양화가 장발(1901∼2001) 같은 예술가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1900∼40년대 어린이 교과서들이다. 한국 최초의 국정교과서가 나온 게 1907년.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초창기 미술 교육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살필 수 있다. 근대 미술 교과서를 연구해 온 김향미 숙명여대 교수는 “서구에서 유입된 근대 교육과 식민지 치하라는 시대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사료”라고 평가했다. 첫 교과서의 이름은 ‘도화임본(圖畵臨本)’.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림을 보고 베끼는 견본 성격이 강했다. 이는 근대교육에서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예술보다 실용 중심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과과정에는 미술이란 명칭이 없었고, ‘수공(手工)’ ‘도화’처럼 기능적 측면을 강조한 과목만 존재했다. 도화임본에서는 서글픈 우리 역사의 흔적도 묻어난다. 1907년판 교과서엔 자랑스러운 ‘태극 문양’이 수록돼 있다. 하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 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정정(訂正) 도화임본’을 보면 딱 하나만 바뀌었다. 태극은 사라지고 일장기가 실렸다. 정정이 ‘잘못된 것을 고침’이란 뜻인 걸 생각하면 더욱 분통이 터진다. 이후 줄곧 일본식 교과서가 통용됐으나 1920년대에 등장한 ‘보통학교도화첩(普通學校圖畵帖)’은 기억해 둘 만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의식이 만연하자 총독부는 ‘문화정치’라는 유화 노선을 폈다. 미술 교과서도 이런 영향 아래 한복을 입은 조선인이나 전통 화풍의 그림이 보인다. 김 교수는 “그나마 한국적 색채가 드러난 시기라는 점에서 보통학교도화첩은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1930, 40년대 ‘심상소학도화(尋常小學圖畵)’나 ‘초등도화(初等圖畵)’는 교과서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당시 총독부의 교육 취지가 “충량한 황국신민의 연성을 위한 예술 교육”이었다. 첫 장부터 만주국 국기가 나오고, 군인과 전차 같은 전쟁 소재 그림이 많다. 일반 회화도 명치절(메이지유신 기념일)이나 후지 산을 다룬 작품으로 교체됐다. 군수물자나 공산품 위주의 그림이 담긴 남아용과 의복 및 생활용품이 많은 여아용으로 교과서의 ‘남녀 차별’이 강조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정치적 성격과는 별개로, 성인 작품 위주이던 어린이 교과서에 이때부터 같은 또래의 그림들이 게재된 건 인상적이다. 1920년대 말 일본에서 퍼진 ‘자유화 운동’의 영향으로,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교육을 강조한 흐름이 반영된 것. 야외에서 실물을 보고 그리는 ‘사생화’ 개념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김달진 박물관장은 “일제강점기 모방에 가까운 한계를 지녔던 미술 교육은 광복 뒤 미국 교육 시스템의 영향을 받아 학생의 개성과 정서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4월 30일까지. 무료. 02-730-6216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무식한 소리일 텐데, 네팔이란 나라는 묘하게 ‘야릇한’ 기운을 풍긴다. 히말라야 칸첸중가…. 이름은 들어 봤지만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들의 땅. 왠지 그곳 사람들은 청렴결백, 안빈낙도할 것 같다. 맑은 공기와 천혜의 자연에 둘러싸여 나쁜 생각은 티끌만큼도 안 하겠지. 가난할지언정 물욕도 없고, 행복지수는 세계 상위권을 차지할 거야. 그래, 그곳은 신들의 영역이리라. 허나 막상 되짚어보면, 지옥 없이 홀로 존재하는 천국은 없다. 분명 좋은 이들이 수북하겠지. 다만 가파른 오지는 누릴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이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산두크 루이트가 의사가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일주일 가까이 걸어야 닿는 병원, 약 한 첩 제대로 못 쓰고 숨진 여동생, 요즘 유행인 ‘1일 1식’을 강제로 해야 하는 삶. 그는 척박함이 결코 미덕이 아님을 온몸에 문신처럼 새기며 자라났다. 루이트 박사와 또 다른 주인공 제프리 태빈을 다룬 ‘두 번째 태양’은 줄거리만 요약하자면 간단명료하다. 네팔 출신 안과의사와 그의 의협심에 공명한 미국인 의학교수가 네팔을 중심으로 제3세계 빈민들의 눈을 공짜로 치료하는 얘기다. 이쯤에서 뻔한 스토리라고 여길 사람도 있겠다. ‘역시 이런 착한 분들이 있어 세상은 살 만한 곳이야’ 하며 어디 기부할 곳 좀 뒤져 보다 다시 바쁜 생활에 쫓기며 살면 되겠다. 끝. 자, 떠난 사람은 할 수 없고 왠지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이들은 페이지를 넘겨 보자. 사실 논픽션 작가인 저자도 처음부터 맘먹고 두 사람을 취재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에베레스트 산에서 활동하는 셰르파(등반 도우미)에 관심을 갖다 ‘열정적인’ 태빈 박사의 너스레에 휩쓸려 자기도 모르게 빠져든다. 괜히 그런 척한 것 같긴 해도, 그럼 또 어떤가. 두 사람의 행보를 듣다 보면 누구라도 어느새 입이 떡 벌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텐데. 이들은 그냥 ‘훌륭하다’라는 표현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삶을 산다. 괴나리봇짐을 지고 위험천만한 고갯길을 넘어 백내장이란 말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이들의 눈을 수술한다. 그것도 하루에 수백 명씩, 잠과 끼니는 물론 오줌도 참아 가며. 실제로 산두크가 제프리에게 ‘참을성(?)을 기르라’며 책망하는 대목도 나온다. ‘수백 명’이 거짓말 같다고? 이들은 헛간과 다름없는 임시 진료실의 침침한 백열등 아래에서 보통 10분 내외로 수술을 끝마친다. 루이트 박사는 실제로 열악한 환경에서 순식간에 끝내는 수술을 창안한 주인공. 2006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과 지난해 ‘안과 의학계의 노벨상’ 참팔리마드 비전상을 받은 위대한 의사다. 태빈 박사도 못지않다. 원래는 예일대와 하버드대 의대를 제집처럼 들어간 천재지만 산에 미쳐 일곱 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반했다. 우연히 히말라야에서 한 소녀의 눈 수술을 목도하고 안과로 전과한 뒤 운명처럼 루이트 박사와 조우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HCP(히말라야 백내장 프로젝트)’를 이끄는 주역이 된다. 루이트 박사가 이 위대한 여정의 물꼬를 튼 이라면, 태빈 박사는 서구의 자본과 관심을 끌어들여 개울물을 대하로 퍼뜨린 인물이다. 아까 떠났던 사람도 돌아오게 ‘미끼’ 좀 던져보자. 이 책, 되게 재밌다. 눈물과 감동만 가득한 게 아니라, 꽤나 낄낄거리게 만드는 유머코드가 야채 빵 양파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특히 루이트 박사에게 배우러 그 오지까지 유학 온 북한 의사 2명은 큰 비중은 없으나 상당히 ‘웃프다(웃기지만 슬프다)’. 산두크가 수술한 한 78세 목동은 몇 년 만에 눈을 뜬 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외친다. “태양을 볼 수 있는 걸 넘어서 내가 바로 태양입니다.” 실명방지국제협회에 따르면 세계에서 시력 장애를 겪는 이는 1억6100만 명인데, 4분의 3 이상이 제3세계 빈민이다. 그들에게 태양을 찾아주는 일이 얼마나 급박하고 중요한 문제인지, 두 사람은 오늘도 말없이 천길 낭떠러지를 오르며 온몸으로 웅변한다. 지옥? 참 태양은 그곳마저 깃들어 천국으로 인도한다. 가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도기(陶器)로 만든 요고(腰鼓·허리가 잘록한 장구)가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국내 처음으로 발굴됐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3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진도군 오류리에서 진행한 수중발굴 조사에서 요고를 비롯해 고려청자와 용무늬 청동거울, 임진왜란 포탄 등 유물 500여 점이 쏟아졌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유물들은 삼국시대 초기 토기부터 고려와 조선 유물까지 다양한 시대를 아우른다. 장구의 원형으로 알려진 요고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사용되던 악기. 중국 지린 (吉林) 성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5회분 4호묘와 5호묘 벽화에도 등장한다. 지금까지 2009년 충남 태안군 마도 해역에서 발굴된 청자 요고를 포함해 나무나 청자로 만든 요고는 있었으나 도기 요고는 처음 나왔다. 이번에 발견된 요고는 전체 길이 25cm에 양쪽 울림통의 지름은 12와 11.2cm. 이날 발굴 유물을 바탕으로 요고의 모습을 재현한 이복수 악기장(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2호)은 “양쪽 울림통의 지름이 다른 이유는 음폭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라며 “울림통 내부에 소리의 공명을 위한 울림테가 있어 확실한 악기의 증거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번 수중발굴의 또 다른 특징은 오리와 원앙 모양 향로, 참외 모양의 정병, 베개와 같은 고려청자(265점)가 다수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이날 특별 해설을 자청한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수준 높은 청자 작품이 많아 도자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발굴 해역이 운반선이 지나다니던 항로로 추정돼 당대 해상무역의 역사도 아울러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고려 청동거울인 쌍룡운문대경(雙龍雲紋帶鏡)과 조화문경(鳥花紋鏡), 11∼13세기 중국 송나라 동전인 원풍통보(元豊通寶)와 가태통보(嘉泰通寶), 임진왜란 때 썼던 천자총통(天字銃筒)과 지자총통(地字銃筒)의 포탄인 석환(石丸)도 다수 발견됐다. 연구소는 2012년 제1차 조사에서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과 기린 모양 고려청자향로를 찾은 바 있다. 제3차 수중발굴은 올해 5∼10월 진행될 예정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영국 대영박물관에 한국관이 조성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한광호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인은 자수성가한 기업가의 전형이었다. 1923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얼빈(哈爾濱)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945년 광복 때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왔다. 화공약품 점원으로 출발해 1968년 작물보호제 제조업체인 한국삼공을 세웠으며, 1972년에는 독일 제약회사 베링거인겔하임의 한국 합자회사인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을 설립했다. 한 이사장이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다. 한 독일 사업가가 겸재 정선의 그림을 사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유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고인은 거의 매달 외국 출장을 가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중국 베이징 등 세계 곳곳에서 부지런히 문화재를 수집했다. 1988년 일본 고대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1906∼2002)의 영향을 받아 티베트 불화인 ‘탕카’ 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고인의 컬렉터 인생에 큰 전기가 됐다. 이후 세계적인 탕카 수집가로 이름을 알리며 9000점에 이르는 탕카 작품을 모았다. 티베트 미술품은 정치적인 이유로 다수가 티베트에서 반출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어 이를 한데 모은 한 이사장의 컬렉션은 그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받는다. 대영박물관도 이런 고인의 노력을 높이 사 2003년 박물관 개관 25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티베트의 유산-한광호 컬렉션의 회화’를 개최했다. 고인이 40년 넘게 열정을 바쳤던 한빛문화재단의 소장품은 탕카와 국내외 미술품을 비롯해 2만 점이 넘는다. 중국 미술품에도 조예가 깊어 도자기와 금속공예 회화를 아우르는 여러 미술품을 모았다. 1999년 개관해 2006년 서울 종로구 평창동으로 옮겨간 화정박물관에서 고인의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다. ‘탕카를 배우려면 화정박물관으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외국 연구가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997년 고인은 대영박물관에 100만 파운드(당시 약 16억 원)를 기부해 주목받기도 했다. 외국 박물관을 자주 찾던 그가 중국관이나 일본관에 비해 초라하거나 아예 존재조차 없는 한국관을 보고 안타까워하다 기부하게 된 것이다. 박물관은 고인이 기부한 돈으로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비롯한 여러 한국 문화재를 구입했고, 이는 한국관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에 1999년 한국을 방문한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은 한 이사장에게 ‘영국명예시민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대영박물관 입구 기증자 명단에는 고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유족은 부인 박하순 한빛문화재단 이사장(79)과 한태원 한국삼공 사장을 비롯해 1남 3녀. 삼성서울병원, 발인 25일 오전 8시. 02-3410-6917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벌써 3년이나 됐네요. (기사 나가면) 새삼 관장을 오래했다고 사람들이 타박하려나, 호호.”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63)은 만날 때마다 유쾌하다. 실례지만 ‘소녀’ 같다고나 할까. 다음 달 7일이면 취임한 지 3년째. 그간 한국의 대표 박물관을 ‘무탈하게’ 끌어온 수장다운 권위적 태도는 엿볼 수 없다. 21일 집무실에서 만난 ‘국박’의 김 관장은 여전히 웃음이 잦고 솔직했다. 별 탈 없다는 게 성과가 적었다는 뜻은 아니다. 크고 작은 전시를 알차게 진행했고, 박물관을 관람객 중심으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지난해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해외 반출 여부로 시끄러웠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메트) 특별전이 현지에서 ‘대박’을 터뜨려 김 관장도 상당히 고무된 모습이었다. ―메트 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의 인기가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센세이션’이에요. 19일까지 메트 정회원 관람을 빼도 14만 명이 넘었습니다. 한국 문화재 해외 전시 역대 최고기록이죠. 폐막일(다음 달 23일)까지 꽤 남아 20만 명도 가능해 보입니다. 현지 전문가들도 연일 호평이에요. 그들에게 생소했던 신라라는 왕국을 확실히 각인시켰어요. 현대 미술가들도 ‘신라인의 감각이 21세기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놀라워했습니다.” ―막상 나가기 전엔 논란이 컸습니다. 전 문화재청장과의 불화설도 있었죠. “입장 차를 대립으로 보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국보를 아끼는 마음에 그런 거 아닐까요. 국민들이 ‘국박과 문화재청이 각을 세운다’고 오해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평소엔 서로 얼마나 상의를 많이 하는데요. 열심히 하려다 보니 그런 일도 생기는 거죠.” ―그게 3년 동안 박물관을 이끌며 겪은 제일 큰 풍파였나요. “어이구, 얼마나 한 일이 많은데…. 호호, 그만큼 내실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가장 뿌듯한 점을 꼽자면, 박물관을 공부하는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거예요. 이런 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죠. 하지만 해외에서 차세대 한국학 전문가 양성에 주력했고, 내부에서도 지속적인 연구 성과를 내놓도록 주문했습니다. 무슨 분야 전문가 하면 ‘국박의 누구’를 떠올리도록 만드는 게 제 목표예요.” ―그래도 역시 박물관은 관람객이 우선 아닙니까. “그건 당연한 거죠.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박물관은 누구나 편하게 찾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취임 당시 ‘어린이 관람문화 정착’을 내세운 이유가 그거예요. 우리의 미래들이 부담 없이 즐겨야 살아있는 공간이 됩니다. 외국도 마찬가지지만, 박물관에서 애들이 좀 시끌벅적해도 돼요. 어린이들에게 문화재를 소개하는 ‘대학생 멘토 제도’를 운영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아버님(김재원 제1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초석을 쌓은 박물관이라 사명감도 클 텐데요. “관장 회의실에 역대 관장님들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아버지 사진이 딱 머리 뒤에 있어 지켜보시는 기분이 들어요. ‘1’과 ‘11’(김 관장은 제11대) 숫자도 묘하죠? 매일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관장님들과 마주하면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최근 김달진미술연구소에 갔더니 몇 년 전 방명록에 ‘한 일도 많으시지만 할 일도 많으십니다’라고 쓰셨더군요. “어머, 제가 꽤 근사한 글을 남겼네요. 호호. 그 말은 저 스스로에게도 들려주고픈 말입니다. 박물관이 우리 것을 아끼는 마음을 배우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디딤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뜻에서 해외 문화재 전시에도 더욱 애쓸 거고요. 박물관은 관람객에게 우리와 세계를 이어주고 들여다보게 하는 하나의 창이어야 합니다.” ▼ 관람객 14만 돌파… 해외전시 사상 최대 흥행 ▼뉴욕 메트 ‘황금의 나라, 신라’전지난해 11월부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황금의 나라, 신라’는 한국 문화재의 해외 전시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게 확실하다. 지금까지 우리 문화재 전시에 관람객이 10만 명을 넘은 경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2008년 10월 벨기에 브뤼셀의 보자르예술센터에서 개최됐던 특별전 ‘부처의 미소’는 당시 엄청난 관심을 끈 성공 사례로 꼽힌다. 4개월 가까이 이어진 전시의 관람 인원은 5만8791명이었다. 이것도 적지 않은 숫자다. 2011년 호주 시드니 파워하우스박물관에서 열린 ‘장인정신-한국의 금속공예’ 역시 호평이 이어졌는데 3만8038명이 다녀갔다. 메트에서 현재 기록 중인 14만여 명이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지 가늠할 수 있다. 물론 한 해 평균 650만 명이 찾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박물관인 메트가 갖는 후광도 크다. 김 관장은 “그렇기에 더더욱 메트 전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며 “메트의 메인 전시를 우리 문화재가 차지한 전례를 이번에 만든 만큼 앞으로 해외에서 전시되는 우리 문화재의 위상이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