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집터 밑엔 왜 도자기들이 묻혀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오영인씨 ‘매납 도자기’ 논문

한강문화재연구원이 2012년 공개한 서울 종로구 서린동 유적 건물지에 매납돼 있는 도자기의 모습. 건물을 세우기 전 기초공사 때 도자기를 묻었음을 알 수 있다. 오영인 씨 제공
한강문화재연구원이 2012년 공개한 서울 종로구 서린동 유적 건물지에 매납돼 있는 도자기의 모습. 건물을 세우기 전 기초공사 때 도자기를 묻었음을 알 수 있다. 오영인 씨 제공
“조선시대 건물 바닥에 왜 도자기가 묻혀 있지?”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강문화재연구원이 2012년 발표한 서울 종로구 서린동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묘한 유물들이 눈길을 끈다. 건물 터 곳곳 12군데에 도기나 자기들이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수가 항아리인데 접시를 뚜껑처럼 덮어 놓은 형태로 미뤄 건물 축조 당시 의도적으로 매납(埋納·목적을 갖고 땅에 묻음)한 것이 분명하다. 보물단지도 아니고 꺼낼 수도 없는 곳에 선조들은 왜 굳이 이런 걸 묻었을까.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학술지 ‘고고학지’에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오영인 씨(37)가 게재한 논문 ‘조선시대 건물 축조 과정 중 매납된 도자기에 대한 일고(一考)’는 이런 매납 도자기의 성격 규명에 초점을 맞췄다. 도자기 매립이 주로 확인된 서울 종로구와 중구 일대 124건을 토대로 했다.

묻은 이유를 알려면 먼저 매납 위치를 살펴봐야 한다. 대부분이 건물 적심(積心·초석 아래 돌로 쌓은 기초 부분) 부근에 묻혀 있다. 특히 안방이나 사랑방처럼 여러 공간으로 분할된 조선 건물에서 중심에 해당하는 대청마루 적심에 위치했다. 이 밖에 건물을 바깥과 차단하는 담 아래에서 자주 발굴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이 2012년 발행한 ‘도성 발굴의 기록 Ⅱ’에 따르면 중구 회현동 한양도성 유적의 성벽 부근에서도 매납 도자기가 나온 바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초석을 박기 전 지낸다는 ‘모탕고사’(집을 짓기 전 올리는 제사)와의 관련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전남 고흥군 거금도에는 건축 직전 제수(祭需) 일부를 땅에 묻는 풍습이 현재도 이어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건축 과정에서 사고가 없고 집안도 무사안녕하기를 ‘성주신’(집 지키는 신)에게 비는 뜻이 담긴 것이다.

이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유구에서 발굴되는 지진구(地鎭具)나 진단구(鎭壇具)와는 닮은 듯 다르다. 둘은 건물이 무탈하길 기원하는 뜻은 같지만, 철저히 불교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묻은 장소도 사찰이나 탑과 같은 종교 건축물로 한정됐다. 오 씨는 “유교 사회인 조선의 매납 도자기는 민간 신앙의 전통으로 파악해야 옳다”며 “진단구나 지진구와 다른 새로운 명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이한 점은 묻힌 도자기 시기가 대부분 15∼17세기고 이후는 지금까지 딱 1점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17세기부터 조선은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해 정부 공물이 쌀로 통일돼 도자기 공납이 크게 줄어든 사실과 관련 있어 보인다. 또 여러 전란을 겪으며 경제적 부담을 피하려 옛 건물 터에 다시 건축물을 세우는 경우가 잦아졌다. 오 씨는 “도자기 유통량이 감소했고 신축 건물의 기초시설 조성도 불필요해지면서 자연스레 도자기 매납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