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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경임 논설위원입니다.

woohaha@donga.com

취재분야

2025-12-17~2026-01-16
칼럼100%
  • [횡설수설/우경임]세계 최고 수준 인정받은 한국 의료, 하지만…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월드 베스트 전문 병원(World’s best specialized hospitals)’ 명단에 한국 병원이 대거 선정됐다. ‘월드 베스트 전문 병원’은 의사, 의과학자 등 전문가 대상 설문조사, 환자 만족도, 치료 성공률 등 의료 성과 지표 등을 종합해 순위가 결정된다. 암, 신경과, 내분비과, 소아과, 정형외과 등 12개 임상 분야에서 각각 최고 병원의 순위를 매겼다. 한국은 암 치료 상위 300위 안에 16곳이, 내분비과는 150위 안에 21곳이, 소아과는 250위 안에 25곳이 포함됐다. 나머지 임상 분야에서도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암 분야에선 삼성서울병원이 3위, 서울아산병원이 5위, 서울대병원이 8위를 차지했다. 메이오 클리닉, MD앤더슨 암센터 등 세계적인 병원에 뒤지지 않는다. 암 치료를 잘하는 덕분에 우리나라 암 환자 10명 중 7명은 암을 진단받고 5년 이상 생존한다. 사실상 완치라는 판정을 받는단 뜻이다. 우리나라 위암 생존율은 68.9%로 미국의 2배, 영국의 3배 정도다. 대장암 생존율도 71%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 병원의 경쟁력은 공보험 체제 아래서 민간 병원이 경쟁하는 독특한 의료 시스템에서 나온다. 암 환자의 경우 진료비의 5%만 낸다. 나머지는 국민건강보험에서 부담한다. 환자가 쉽게 병원을 찾을 수 있으니 병원에는 그만큼 많은 임상 데이터가 축적된다. 서울 대형 병원들은 한 해 1만∼2만 건씩 암 수술을 한다. 환자 유치를 위한 민간 병원의 치열한 경쟁도 실력이 뛰어난 이유다. 로봇 수술 등 새로운 치료법에 적극적으로 도전한다. 우수한 인재들이 꾸준히 유입된 덕분도 있다. ▷이런 비약적인 발전이 약 70년 동안 이뤄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놀랍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의료의 씨앗이 뿌려진 건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1955년 서울대 의대 소속 의사 12명이 미네소타대 의대로 건너가 연수를 받았다. 이들이 돌아와 심장병 수술을 했고, 감염병 퇴치에 나섰다. 지금은 해외에서 우리나라에 의술을 배우러 온다. 이번 뉴스위크 순위에서 서울대병원은 상위권에 올랐지만 미네소타대병원은 아예 순위 밖이었다. ▷하지만 의정 갈등의 장기화로 한국 의료가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 상급종합병원의 암 수술 건수가 급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7월 위암 대장암 간암 등 6대 암 수술 건수는 3만8000여 건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17%가량 줄었다. 전문의는 진료와 수술에 지쳐 연구를 할 수 없는 처지다. 수련받는 전공의가 없으니 대단한 술기가 전수되지 않는다. 힘들게 쌓은 탑이 무너질 판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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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트럼프도 해리스도 “US스틸, 일본에는 못 준다”

    미국 노동절인 2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를 유세차 찾은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겸 부통령의 첫마디는 “US 스틸은 미국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기업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였다. 이어 “언제나 철강 노동자들을 지키겠다”고 했다. 1901년 US스틸이 탄생한 곳이 피츠버그이고, 지금도 본사가 자리한다. 피츠버그를 통틀어 가장 높은 건물이 US스틸 타워다. 노동절에 ‘러스트벨트(Rust Belt·쇠락한 공업지대)’ 한복판인 피츠버그에서 노조 표심을 향한 구애를 펼친 것이다. ▷펜실베이니아주는 11월 미국 대선의 핵심 경합지 중 하나다. 2020년 대선에선 조 바이든 대통령이, 4년 전인 2016년 대선에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신승을 거뒀다. 노조원 120만 명인 철강 노조의 지지 없이는 펜실베이니아주서 승기를 잡을 수 없고, 대선 승리도 장담할 수 없다.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끔찍한 일”이라 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도 지난달 펜실베이니아주 요크를 찾아 “일본이 사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제철이 ‘미국 산업화 100년의 역사’ 자체인 US스틸을 149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건 지난해 12월이다. 관세 등 무역장벽이 높고 단단해지자, 미국 시장을 직접 뚫고 세계 3위 철강 기업으로 올라서겠다는 전략이었다. 곧장 전미철강노조가 들고일어났고 의회는 “국가 안보에 핵심적인 사안”이라며 거들었다. 결국 재무부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에 회부됐다. 여기선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의 투자를 제한할 수 있다. ▷그간 US스틸에 대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강경한 태도는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쳐 온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해리스 후보의 노동절 발언은 그 연장선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4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본제철의 인수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어진 국빈 만찬에는 전미철강노조 위원장을 초청해 기시다 총리를 대놓고 불편하게 했다. ▷트럼프와 해리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는 무산될 위기다. 국내에선 세계화에서 낙오해 일자리를 잃은 백인 노동자의 좌절이 분출되고, 국외에선 중국이 미국의 리더십에 도전해 오면서 ‘아메리카 퍼스트’가 초당적인 합의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급해진 일본제철은 펜실베이니아주와 인디애나주 2곳의 US스틸 제철소에 13억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사실상 US스틸의 일자리 보존을 약속한 셈이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 전 장관을 고문으로 영입하며 치열한 로비전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의 거센 흐름을 거스르긴 어려워 보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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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현수막 260개로 남은 아버지

    “죽더라도 찾고 죽어야지, 그냥 죽을 순 없다”던 아빠였다. 25년간 전국 방방곡곡에 ‘실종된 송혜희를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을 걸었던 송길용 씨(71)가 결국 딸을 찾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숨졌다. 지난달 26일 현수막을 싣고 나갔다가 덤프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송 씨는 25년간 매주 전단 4000장을 뿌렸고, 매달 현수막 300개를 걸었다. 평소와 달리 연락이 뜸한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현수막 업체가 실종자 가족 단체에 연락하면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 ▷송혜희는 17세가 되던 1999년 2월 학교에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행방불명됐다. 경기 평택시 집으로부터 1km가량 떨어진 버스정류장에 내린 후 흔적이 사라졌다. 당시 버스 운전사가 30대 남성이 따라 내렸다고 증언했으나 용의자를 잡지 못했다. 현수막 속의 딸은 여전히 교복을 입은 앳된 모습이다. 배움이 짧은 아버지는 전교 1, 2등을 다투고 서울대를 가고 싶다던 딸 혜희를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딸이 실종되고 처음 3년간은 부부가 함께 전국을 돌며 전단을 뿌렸다. 도대체 맨정신으로는 다닐 수가 없어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전단을 나눠주고, 또 마시고 나눠주곤 했다. 그동안 엄마는 뼈만 앙상히 남은 채로 몸과 마음에 병을 얻었다. 결국 엄마는 딸이 실종되고 7년이 지났을 때 전단이 흩어진 방에서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아내 장례를 치르고 따라가겠다고 결심했던 송 씨의 마음을 돌린 건 남은 자식이었다. 큰딸은 “아빠 죽으면 같이 죽겠다”며 오열했다. ▷‘신장 163cm, 얼굴이 둥글고 검은 피부, 흰 블라우스 빨간색 조끼 파란색 코트.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이 현수막은 늘 새로 단 듯했다. 송 씨는 한 달에 현수막을 300개가량 걸었다. 달이 바뀌면 혹시 찢어졌을까, 떨어졌을까 첫 현수막부터 점검을 하거나 교체했다. 현수막을 걸다 낙상을 당해 허리를 다쳤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최근엔 몸이 온전치 못했다. 주변에선 그만하라고도 했다. 그래도 “자식이라 포기를 못 하겠다”며 다시 집을 나섰다. 지금도 전국에 현수막 260여 개가 걸려있다. ▷2022년 기준 실종 당시 18세 미만이던 1년 이상 장기 실종 아동은 981명이다. 송 씨의 딸 혜희처럼 20년 이상 장기 실종 상태인 아동이 859명을 차지한다. 최근엔 유전자검사, 폐쇄회로(CC)TV 등 기술의 발달로 실종 아동 수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송 씨 가족처럼 실종 아동을 둔 가족의 삶은 아이를 잃어버린 날에 멈춰 버린다. 실종 가족을 찾는 방송에서 송 씨는 딸을 향해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돌아와만 달라”고 했다. 시청자에겐 “연락 주시면 신장이라도 떼어 드릴게요”라고 했다.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지, 그 비통함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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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초중고까지 덮친 딥페이크 성범죄

    자기 얼굴이 나체에 합성된 ‘딥페이크’ 사진과 함께 공개된 신상 정보를 보고 여성들이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다. 공포는 나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 그 본질이다. 유명 공포 영화 속 샤워실 살인 장면처럼 가장 사적인 공간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친밀한 누군가가 나를 벌거벗겨 능욕할 수 있고, 일상을 공유하는 SNS가 위험천만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국 초중고교에서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으로 확인돼 교육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 가해자들은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셀카를 인공지능(AI)으로 음란물과 합성해서 유포했다고 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주로 10대다. 현재 피해 상황을 취합 중인데, 피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학교는 450곳에 육박한다. ‘지능방’(지인능욕방) ‘겹지인방’(겹치는 지인방) 등으로 검색한 방의 숫자가 이런 정도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따르면 이 중 40곳에서는 실제 피해가 확인됐다. 피해자 중에는 여교사도 있다고 한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최근 주목을 받게 된 발단은 인하대 사건이다. 텔레그램에 자신의 딥페이크 음란 사진이 유포됐다는 것을 알게 된 인하대 졸업생 유모 씨는 해외에 서버가 있다는 이유로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자 자신이 직접 추적에 나섰다. 딥페이크가 올라온 방을 찾아 들어갔더니 자신의 음란 사진, ‘주인님’이라 하는 음성 파일, 이모티콘까지 공유되고 있었다. 이 사건이 보도되자 ‘나도 혹시’ 하며 불안감을 느낀 10, 20대 여성들이 자신도 피해자가 된 것은 아닌지 텔레그램을 뒤지기 시작했다. ▷유 씨가 1년 넘도록 끈질기게 증거를 모았지만 처벌을 받은 사람은 그 방 참여자 1200명 중 단 1명에 그쳤다. 붙잡히긴 했지만 “우연히 봤다”고 주장해 풀려난 참여자도 있었다. 성폭력처벌법이 허위 영상물을 제작·유포하는 것은 처벌해도 단순히 시청만 하는 것은 죄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직접 연락하고 딥페이크를 유포한 1명만 징역형을 받은 것이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이번에 초중고에서 피해 사례가 확인돼도 처벌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사건도 유 씨 사례처럼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경우다. 딥페이크 사진이 유포된 방을 찾아 증거를 수집하고 학교 명단을 작성했다. 소셜미디어 계정을 비공개하고 사진도 감췄다. 확인된 피해가 늘어나고 여론이 들끓자 그제야 경찰은 대대적인 단속을 약속했다. 국회에선 처벌을 강화하는 입법이 쏟아진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모욕이 놀이가 되고, 혐오를 과시하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평범한 하루가 언제 공포로 뒤덮일지 모를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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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환경미화원 死傷 연 6000명

    2일 새벽 서울 중구 숭례문 지하보도서 작업 중이던 60대 환경미화원이 흉기에 찔려 살해당했다. 그는 밤이면 인적이 드물어 무서운 험지였던 이 구역을 계속 맡아 왔던 ‘반장 언니’였다. 노숙인이 자고 난 자리도 내 집 청소하듯 쓸고 닦던 그의 황망한 죽음에 동료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료 누군가는 그가 쓰러진 구역을 청소해야 했을 것이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일하는 환경미화원의 작업 환경은 위험천만하다. 숭례문 지하보도 사건이 있은 지 5일 만인 7일에도 충남 천안시 30대 환경미화원이 음주운전 단속을 거부하고 도주하던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지난달에는 경남 양산시 60대 환경미화원이 운행 중인 재활용품 수거 차량 발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어둠 속에서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들을 피해 작업 속도를 올리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보도나 시설 등을 물걸레질하는 여성 환경미화원들은 보통 혼자 일한다. 범죄에 노출될 우려가 크다. 으슥한 골목을 청소할 때면 겁이 나기 마련이고, 취객의 욕설이나 시비에 시달리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한다. ▷지난해 환경미화원 사상자는 ‘6439명’이다. 전국 환경미화원은 약 4만 명으로 집계되는데 연간 6명 중 1명이 산재를 당하는 셈이다. 2019년(5078명)에 비해 21%가 늘었다. 다른 직종에 비해 유독 산재 발생 비율이 높다. 사고뿐만 아니라 질병에도 시달린다. 일단 혹독한 바깥 날씨를 견뎌야 하고, 무거운 짐을 옮기느라 근골격계 질환을 달고 산다. 먼지를 많이 마시다 보니 폐질환도 흔하다. ▷환경미화원의 일터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것은 결국 비용이다. 환경미화원은 지방자치단체에 직접 고용된 공무직과 용역업체에 고용된 근로자가 있다. 저가로 입찰에 응해야 하는 용역업체일수록 안전 장비 지급이나 안전 수칙 준수에 소홀하다. 정부는 심야나 새벽 근무를 지양하고 ‘2인 1조’ ‘3인 1조’ 근무를 권고하지만, 영세한 용역업체에선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번에 피살된 60대 환경미화원도 용역업체 소속이었다. 고령자처럼 노동시장 약자들이 주로 속해 있다 보니 ‘오전 중에 1km를 청소하라’는 터무니없는 업무량도 묵묵히 견디곤 한다. ▷남들이 잠든 시간에,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환경미화원의 조용한 노동 덕분에 우리는 아침에 깨끗한 거리를 지나 출근을 한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이들의 귀한 노동을 이토록 함부로 써도 되는 것일까. 이웃인 우리의 반성도 필요하다. 종량제 봉투를 넘치게 채워 무겁게 만들고, 깨진 접시 같은 날카로운 물건을 아무렇게나 봉투에 담는 등 사소한 습관이 환경미화원을 크게 다치게 만든다고 한다. 환경미화원 연간 사상자 ‘6439명’. 이 숫자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짜 안전 성적표란 생각이 든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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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어린이집 22% 줄 때 영어유치원 37% 증가

    보통 5세부터 다니는 영어유치원에 입학하려면 아이가 ‘4세 고시’라 불리는 레벨 테스트를 봐야 한다. 그런데 실력이 있다고 4세 고시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먼저 ‘입금 전쟁’을 치러야 한다. 영어유치원 입학 대기 줄이 길다 보니 원비를 선착순으로 입금받아 레벨 테스트 대상자를 정한다. 3초 안에 입금이 마감된다고 해서 ‘3초 컷’이다. 부모가 선착순 입금에 성공해야지 아이가 4세 고시를 볼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1000명 넘게 레벨 테스트를 치른 한 영어유치원은 응시료 수입만으로 서울 강남 월세를 냈다는 이야기가 돈다. ▷조기 영어 교육 열풍을 타고 전국 영어유치원은 지난해 843곳으로 일반 유치원(8441곳)의 10% 수준까지 불어났다. 2019년(617곳)에 비해 37%가 늘었다. 저출산 여파로 일반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급감한 것과 달리 영어유치원은 ‘저출산 쇼크’에서 비켜나 호황을 누린다. 지난해 어린이집은 2만8954곳으로 4년간 23%나 주는 등 줄폐업이 이어졌다. ▷똑같이 3월에 새 학기를 시작하고 유치원이라는 이름을 강조하지만, 영어유치원은 사실 영어학원이다. 학원법 적용을 받아 교습비 상한선도 없고, 학원이 정하기 나름이다. 전국 평균 월 교습비는 141만6000원이다. 서울만 보면 200만 원에 가깝다. 요즘 영유아 공교육(유치원)과 공보육(어린이집)은 정부 지원이 늘어 거의 무상이다. 그런데도 비싼 영어유치원이 필수 코스가 되어 버린 건 공교육이 충족시킬 수 없는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는 일찍 배울수록 좋다’는 경험칙을 믿는 부모들은 아이가 어린 나이에 영어에 노출되기를 바란다. ▷‘영유’(영어유치원)냐, ‘일유’(일반 유치원)냐. 아이를 첫 교육기관에 보내는 엄마는 공교육과 사교육을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 선다. 일반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놀이 위주로 학습하고 뛰어노는 시간도 보장이 된다. 그 나이에 꼭 배워야 할 생활 습관이나 사회성도 가르친다. 이와 달리 영어유치원은 교육 과정이 영어 학습에 치우쳐 있어 아이의 균형 있는 발달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많다. 영어유치원 일평균 교습 시간은 4시간 57분으로 중학교 수업 시간과 비슷했다. ▷일단 영어유치원 경로로 들어서면 공교육 이탈이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소수를 대상으로 한 맞춤형 교육을 기대하고 사립초나 국제학교 진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자녀 수가 줄어들수록 다양한 교육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틀에 갇힌 공교육은 이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이들을 사교육으로 자꾸 밀어낸다. 외동이를 최고로 키우고 싶은 부모의 동기와 공교육의 무기력, 학원의 상술이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영유아 사교육비도 폭증했다. 평등한 출발선이어야 할 영유아 교육도 사교육이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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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한 발 승부의 순간, 수만 시간 훈련한 나를 믿으면 이긴다”[월요 초대석]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2024년 파리 올림픽을 100일 앞둔 5월부터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으로 매주 출근했다. 사격, 배드민턴, 수영, 유도, 펜싱 사브르 대표팀 지도자와 선수를 대상으로 ‘팀 분석’을 하고 훈련과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심리 코칭을 했다. 하나같이 파리 올림픽 초반 메달을 휩쓸며 우수한 성적을 냈던 종목들이다.고교 입학 전까지만 해도 테니스 선수를 꿈꿨던 한 교수는 프로 운동선수를 하기엔 실력이 부족하다 싶어 진로를 바꿔 의대에 진학했다. 직접 선수로 뛰는 대신 전공의 시절부터 우리나라에선 불모지였던 스포츠 정신의학을 개척해 왔다. 6일 중앙대 의대 연구실서 만난 그는 “국가대표 선수들은 건강한 마인드의 모범과도 같았다”고 했다.》―파리 올림픽에서 ‘스포츠 팀 분석’이 처음 도입됐다. “이번 올림픽 목표가 금메달 5개일 정도로 선수들은 최약체로 평가받았다. 마지막까지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보자며 대한체육회 훈련본부와 의무본부가 심리 코칭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다. 우선 파리 올림픽을 위한 심리검사 도구를 따로 만들었다. 개인마다 인지 능력, 성격 등을 먼저 검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감독, 코칭 스태프, 선수들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한 요령을 알려줬다. A 종목을 예로 들자면, 선수들은 상당히 외향적인데 코치들은 내향적이었다. 코치들이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오히려 선수들이 편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새로운 자극을 좋아하는 B 선수에겐 똑같은 훈련을 반복하면 지루하니 훈련법을 바꿔보라고 했다. 팀을 모아두고 속된 말로 ‘툭 까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팀워크가 저절로 좋아졌다.” ‘팀 분석’의 성과를 물으니 “내담자와의 상담 내용은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진 않았다. 메달 2개를 수확한 남자 펜싱 사브르팀은 “서로 믿어주고 끌어주는 신구 조화가 훌륭했다”고, 깜짝 반전을 일군 사격팀은 “경쟁을 시키기보다 ‘원팀’을 만들려는 감독의 리더십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마인드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가. “국가대표는 운동선수 중에서도 0.1%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일반인도 성공한 0.1%의 마인드는 다르지 않겠나. 20세, 30세 어린 선수들인데도 대단하다고 느낀다. 첫째,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의 장단점이 무엇이고, 실력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고, 심지어 ‘이번 대회에선 은메달을 딸 것 같다’ 정도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둘째,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동안 성과를 발휘한 훈련법을 바꾸려면 저항이 따르기 마련인데 새로운 훈련법, 새로운 지식에 열려 있다. 셋째,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도적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예측 가능성이 커진다. 어떤 훈련을 했을 때 적중률이 올라가고, 메달 색깔이 바뀌는지 정확히 맞힐 수 있다. 입력값에 따른 결괏값이 일정해지므로 훈련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사격 반효진 선수는 슛오프 접전 끝에 0.1점 차로, 김우진 선수 역시 슛오프 동점에서 4.9mm 차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단 한 발로 승부가 갈리는 순간, 그 긴장감을 어떻게 견디는 건가. “선수들에게 훈련한 만큼, 실력만큼만 하고 오자고 이야기한다. 불안을 숨기거나, 자신을 속이면 밖으로 불안이 뛰쳐나온다. 실력이 8이면 8만 하고 오자, 3이면 3만 하고 오자고 한다. ‘더 잘해라’ ‘더 열심히 해라’ 하지 않는다. ‘그대로만 하고 오자’고 한다. 아, 양궁은 다르다. 양궁은 30발 쏘면 30발 전부 10점인 선수만 뽑아 가니까.” ―경기에 뛰는 선수라면 누구나 잘하려고 하지 않나. “잘하려고 하면 나를 잃어버리고, 그러면 진다. 배드민턴을 칠 때 짧게 치려고 손목을 빨리 꺾는다. 잘하려고 하면 평소보다 더 빨리 꺾게 되고 네트에 걸린다. 다음에는 더 늦게 꺾어 보는데 그럼 아웃이 된다. 평소 익힌 감을 믿어야 한다. 매일 땀 흘려 훈련하는 이유다.” ―아무리 평소 훈련한 대로 경기에 임한다 해도 지고 있을 때 흔들리지 않는 건 경이롭다. 탁구 신유빈 선수가 내리 3세트를 졌을 때나, 유도 안바울 선수의 투혼을 보면 보는 사람도 눈을 질끈 감게 된다. “그 순간 나를 얼마나 믿느냐의 문제이다. 평소 역전당하는 상황을 가정해서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맞춰 훈련한다. 열심히 훈련한 나를 믿어야 한다. 사격할 때 총을 쏘는 리듬이 있다. 평소 ‘탕탕탕’ 쏘는데 ‘탕탕탕탕’ 쏘고 있다면 긴장해서 리듬을 잃은 거다. ‘리듬이 달라지는 상황에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리듬을 찾는다’ 이런 연습을 하고 출전하는 거다.”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라고 적은 반 선수의 쪽지가 화제가 됐고, 펜싱 도경동 선수는 “질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태권도 김유진 선수는 “이거 하나 못하겠어”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나는 나를 알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인 동시에 자신의 수행 능력을 점화시키는 큐(cue·신호) 단어라고 할 수 있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펜싱 박상영 선수가 상대 선수를 공격하기 전에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를 주문처럼 외웠다. 민첩하게 칼을 찌를 수 있는 수행 능력을 불러오는 큐 단어인 거다. 선수마다 각자의 큐 단어가 있다.” ―힘든 훈련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최고가 되고 싶은 동기는 어디서 나오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그걸 연구한 적이 있다. 선수들에게 메이저리그를 열망한 이유를 물었더니 ‘먹고살기 위해서’를 첫손에 꼽았다. 그다음으로 ‘명예를 드날리는 게 좋아서’ ‘내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순이었다. 놀런 라이언의 공을 쳤다,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으로 잡았다는 만족감을 좇는 거다. 세 가지 이유가 섞여서 강력한 동기가 된다.” ―보통 직장인들도 같은 이유로 회사에 다니지 않나. “안세영 선수와 비슷한 배드민턴 실력을 갖춘 선수가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안 선수의 동기 부여가 더 강력하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는 타고난 기질도 있는 것 같다.” ―국가대표 선수 중에서도 감탄할 만한 마인드를 가진 선수가 있었나. “국가대표 선수들은 거의 그렇다. 탁구 현정화 감독이나 농구 하은주 선수는 그동안 만난 어느 의사나 교수보다 똑똑했다.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미래의 계획이 뚜렷했다. 실제 은퇴 이후에도 훌륭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만난 쇼트트랙 김아랑 선수도 기억에 남는다. 첫 상담에서 금메달을 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케이트 왜 탔어요’ ‘앞으로 목표가 뭐예요’ ‘스케이트를 타면서 가치를 두는 건 뭐예요’ 이런 질문을 던졌는데 19세 소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술술 답했다. 일주일 뒤, 한 달 뒤, 일 년 뒤 목표를 세워 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왔다고 했다. 미래와 연결될 때만이 지금 이 순간 힘든 훈련이 가치를 갖는다. 정신과 의사가 해 줄 조언이 없었다.” ―줄곧 계획을 강조하는데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했더니 메달을 땄다’는 선수도 있었다. “참 겸손한 말이다. 선수들 마음속에는 365일 전부 계획이 있고 그중 하루를 열심히 살고 ‘×’ 표를 한 거다. 성공한 선수들은 다 계획이 있다.” ―선수들의 발랄하고 기발한 메달 세리머니에 즐거웠다. “준비하고 나온 것일 텐데….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 정말 건강해 보이지 않나.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누군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미야’는 기억할 것이다. 금메달이 아니더라도 선수들이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했는지 국민이 알아보고 열광했다. 평창 올림픽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가 결과보다 과정에 관심을 갖고 스포츠를 즐기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런 변화를 지켜보는 건 의사로선 행복한 일이다.” ―우리는 메달을 딴 순간에만 주목하지만, 선수들은 ‘포스트 올림픽 증후군’을 겪는다고 한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허무감이 크다. 선수 인생 전체로 보면 올림픽은 한 계단이다. 인생 목표가 계단 10개라고 치자. 금메달을 따서 3계단을 올라가려고 했는데 못 따서 1계단만 올라갔다. 다음에 2계단 더 올라가면 된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다. 양궁 김우진 선수가 ‘메달 땄다고 젖어 있지 마라’, 사격 김예지 선수가 ‘0점 쐈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처럼 인생을 이런 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한덕현 중앙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54)중앙대 의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와 보스턴대 연구 전임의로 각각 뇌과학과 스포츠 심리를 연구했다. 현대유니콘스, FC서울, KT 위즈, LG 트윈스 등 프로야구단에서 스포츠심리 닥터를 지냈다.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을 시작으로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2024년 파리 올림픽까지 국가대표 선수들의 심리 코칭을 담당했다. 미국 정신의학회 젊은 연구자상, 한미자랑스러운의사상, 유한의학상 등을 수상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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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연금 수령자 800만 명 시대… 절반이 월 50만 원 미만

    캐나다와 미국 북부 등 북미 지역에서 미국 플로리다, 하와이, 푸에르토리코 등 이른바 선벨트(Sun belt) 지역으로 이동해 겨울을 나는 은퇴자들을 철새에 빗대 ‘스노버드(Snowbird)’라 부른다. 겨울철, 여름철 주택 2채를 사용하는 것은 ‘스노버딩(Snowbirding)’이다. 캐나다는 공적연금이 탄탄하고, 미국은 퇴직연금 부자가 많다. 덕분에 연금이 두둑한 은퇴자들이 스노버드가 되어 여유로운 노후 생활을 누린다. ▷연금 선진국에는 미치진 못하지만, 우리나라도 연금 후진국에선 차츰 벗어나고 있다. 연금을 받는 노인이 받지 않는 노인을 처음 앞지른 게 지난해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5월 연금을 받는 고령층(55∼79세)이 처음으로 800만 명을 넘어섰다. 고령층 인구 2명 중 1명이 공적연금(국민·기초·공무원 연금 등)과 사적연금(퇴직·개인·주택 연금 등) 중 1개 이상의 연금을 받고 있었다. ▷연금 수령자도 많아졌지만, 연금 수령액도 늘고 있다. 월평균 수령액이 82만 원인데 지난해 대비 10% 가까이 늘었다. 10년 전(42만 원)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통계청은 연금 수령자와 수령액이 동시에 늘어난 이유로 국민연금을 꼽았다. 국민연금이 전국적으로 도입된 1999년 40대였던 ‘베이비붐’ 세대가 연금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초연금 수급자도 올해 7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연금 수령자 절반은 한 달 연금액이 50만 원도 되지 않는다. ▷공적연금 제도가 성숙하면서 노후 안전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사적연금은 성장 속도가 다소 느리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령이 시작된 개인형 퇴직연금(IRP) 53만 계좌 중에 단 10%만 연금으로 받았다. 나머지는 모두 일시금으로 찾아갔다. 쌓인 연금액이 적은 데다 수익률도 낮은 탓이다. 최근 5년간 퇴직연금 수익률은 2%로 정기적금보다도 못했다. 직장인 ‘백만장자’를 만드는 미국 퇴직연금 ‘401(k)’에 비할 수 없고, 국민연금(7%)과도 차이가 크다. 우리나라 노후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이지만 주택연금 가입자는 12만 명이 조금 넘는다. ▷지난해 기준 적정 노후 생활비는 월 324만 원이다. 현재 월평균 연금 수령액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고령층 10명 중 7명이 “더 일하고 싶다”고 했다. 연금 인프라가 깔렸으니 가입자와 가입 기간이 늘어나면 우리나라도 겨울마다 남쪽 나라로 떠나는 ‘스노버드’가 보편화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연금 제도의 내실을 다져야 한다. 적자가 예고된 국민연금은 개혁으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 하고, 퇴직연금은 낮은 수익률과 가입률을 개선해야 한다. 일자리가 불안정해 연금을 꾸준히 적립하기 어려운 사각지대 지원도 중요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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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 제도에 사람 끼워 맞추는 저출산 정책, 삶의 질 악화시킬 뿐”[월요 초대석]

    《5월 출생아 수가 지난해 대비 두 달 연속 늘어났다. 내리막을 걷던 출생아 수가 두 달 연속 증가세를 보인 건 8년 6개월 만이다. 코로나19로 미뤘던 결혼과 출산이 재개되면서 깜짝 반등한 것이다. 2020년부터 20만 명대로 추락한 출생아 수가 바닥을 찍은 것 아니냐는 ‘출산율 바닥론’도 흘러나온다. 조영태 서울대 인구정책연구센터장은 이와 관련해 “아직 장기적인 추세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필요한 인구 정책은 인구를 늘리려고 하기보다 인구가 줄어도 사회가 잘 작동하도록 제도와 정책을 손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와 16일 만나 한국의 미래를 결정할 인구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민간위원을 1월 “더는 할 일이 없다”며 사퇴했다. 그러면서 “현 정부가 이전 정부의 실패를 답습하고 있다”고 했는데….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당장의 출산율 제고가 아닌 인구 감소에 대비한 사회 전반의 연착륙을 준비할 것을 제안했다. 현 정부에서 부처마다 미래 대응 전략이 ‘주르륵’ 나올 줄 알았는데 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역대 정부마다 활동했던 비슷한 전문가들이 다시 모여 복지 중심의 저출산 정책만 논의했다. 복지 확대만 논의한다면 내가 할 일은 없다고 봤다.” ―복지 중심 저출산 정책이 왜 문제인가. “복지 확대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인구 정책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출산율이 낮아진다고 하면 가깝고 즉각적인 결정 요인부터 멀고 근본적인 결정 요인이 존재한다. 육아휴직 확대, 아동수당 지원 등은 가깝고 즉각적인 결정 요인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 정책이다. 복지 정책은 결혼, 출산, 육아를 왜 힘들어하는지를 묻는 설문조사를 근간으로 만들어진다. 당연히 ‘어렵다’ ‘지원이 필요하다’는 답변이 나온다. 인구 정책이라면 인구의 구조적 변동을 이해하고 예측해야 하는데 그런 근본적인 접근이 없었다. 이를 복지 정책이라고 하면 되는데 자꾸 인구 정책이라고 하니 문제가 생긴다.” ―복지 정책과 인구 정책을 혼동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 “예를 들어 육아휴직을 계속 확대해도 출산율이 반등하지 않는다면 다른 결정 요인이 있는 것이 아닌지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데 ‘아직 혜택이 부족하구나’ 하고 육아휴직 대상을 늘리고 급여를 올린다. 어린이집이 늘고, 아동수당을 주는 등 양육 환경이 계속 좋아졌는데도 정책 수요자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한다. 주택 문제도 서울에선 심각하지만, 지방은 그렇지 않다. 저출산 정책이 20년간 그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은 인구 정책이라는 큰 그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책 결정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는데…. 인구 정책으로 과감히 전환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다. 첫째, 정책에 관여했던 정부 관료나 전문가, 언론이 기존 프레임에 갇혀 과감한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특정 부처나 전문가 집단이 ‘정책 기득권’이 되어버린 거다. 둘째, 대통령 임기 중에 성과를 내고 싶어 한다. 근본적인 대응을 제안하면 맞는 얘기라고 하면서도 너무 먼 이야기라 당장 정책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고들 하더라.” ―최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기존 정책에 대한 반성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부는 대학 학부부터 박사까지 5.5년에 마치게 하겠다고 했다. 빨리 사회에 나가면 빨리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교육부는 사실 제일 할 일이 많은 부처다. 교실에 30명 놓고 가르칠 때와 10명 놓고 가르칠 때는 교육 방식이 달라야 하지 않겠나. 3년 후면 한 해 20만 명 태어난 아이들이 학교를 간다. 이 아이들을 지금껏 해 온 것처럼 일렬로 줄 세울 건가. 교실에 10명도 앉아 있지 않는데 9등급으로 나눠야 하느냐 말이다.” ―대통령저출생대응수석비서관이 임명됐고, 앞으로 인구전략기획부가 신설된다. “우리 사회 전반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저출산은 풀리지 않는다. 2030년, 2040년 우리 사회 모습을 그려보고 현재 정책과 제도가 그때 제대로 작동할 것 같은지부터 물어야 한다. 저출산대응기획부에서 인구전략기획부로 바뀐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저출산 대응으로 가는 순간 이 부처는 보건복지부나 여성가족부 역할밖에 못 하는 것이고 기획이 아니라 사업 부처가 된다. 그렇다면 이 부처는 필요 없다.” ―어떤 정책이 미래에 작동하지 않을 정책인가. “현재 기초지자체가 226곳이다. 한 해 80만 명 이상이 태어날 때는 지자체마다 사람도 있었고, 공통적인 행정 기능이 필요했다. 3년 전부터 한 해 출생아 수가 20만 명대로 주저앉았다. 게다가 절반 이상 수도권에서 태어났다. 과연 226곳 모두 유지할 필요가 있나. 한 곳, 한 곳마다 행정 비용이 상당한데 감당할 수는 있나. ‘지방 소멸론’의 해결책이 지자체 226곳을 유지하는 것인지, 미래 인구 수에 맞춰 지자체 수를 줄여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행정안전부는 지방소멸기금 10조 원을 89곳에 나눠주며 인구를 늘리라고 한다. 과거에 만든 제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데 인구를 늘려 그 제도를 다시 작동하자는 것이다. 제도를 사람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제도에 맞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문화 지체 현상에 빗대 인구 지체 현상을 설명했다. 한국은 지금 인구 지체 현상을 겪고 있는 건가. “아이 낳는 연령이 20대부터 40대에 걸쳐 있고, 가구는 1인부터 다둥이까지, 외국인도 섞여 살고, 사는 모습이 굉장히 다양해졌다. 그런데 사회제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으니, 사람들이 한 꼭짓점을 향해 일렬로 달리는 거다. 대입, 노동시장, 사회보험 제도 등이 과거 그대로이다. 인구 구조에 맞지 않는 제도가 사람들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 저출산 고령화가 문제가 아니라 이 변화에 맞지 않는 제도가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생존 본능이 재생산 본능을 누르고 있다. 이를 인구 지체 현상이라고 봤다.” ―출생아 수가 지난달부터 지난해 대비 반등했는데…. 인구 지체 현상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는 뜻인가. “인구 그래프는 직진이 아니라 진동하며 움직인다. 그 진폭 가운데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경쟁이 줄면 모든 에너지를 생존에 쓰지 않고 재생산에 쓸 가능성이 생긴다. 또 여성의 수가 줄면 분모가 줄어들어 출산율이 올라간다. 일본의 출산율 반등이 그런 경우다.” ―이민이 대안이 될 순 없나. “이민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제대로 받아야 한다. 지금은 지난 수십 년간 제조업 공장을 유지했는데 당장 일할 사람이 없으니 공장을 돌릴 외국인을 뽑아 달라는 것이다. 경쟁력도 낮고 내국인이 오지 않을 것이 정해진 산업에 싼 노동력을 구해 과거로 회귀하자는 식이다. 이래선 안 된다. 인구가 줄어드는 2030년, 2040년 대한민국이 비교 우위에 있을 산업이 뭔가를 찾아내고 여기에 필요한 인재를 받아야 한다. 경쟁력 있는 산업도 내국인만으로 유지가 어려운 시점이 온다. 특히 연구개발(R&D) 인력난이 심각해질 것이다. 인구가 줄고 취업이 쉬워지면 석박사 학생이 급감한다. 두뇌 유치를 위해 미국 일본 중국과 경쟁해야 할 시점이 올 거다. 지금부터 우수한 외국인 학생들을 유치할 수 있는 제도를 준비해야 한다. 기득권을 가진 기성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이민 정책을 펴야 한다.”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지 않고는 저출산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70만 명대가 태어난 1990년생 청년보다 40만 명대가 태어난 2010년생 청년이 체감하는 경쟁 압박이 줄지 않았다. 인구가 줄었으면 경쟁이 주는 것이 당연한데 왜 그럴까. 서울, 딱 한 곳에만 경쟁 피라미드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경쟁 피라미드가 여러 곳에 분산돼 있었다. 지금은 서울로 대학 가고, 서울에서 직장 잡고, 서울에서 집을 사야 하니 경쟁이 줄지를 않는다. 연령별로 스마트폰 동선을 분석했는데 25∼34세 청년의 동선은 서울 강남 종로 영등포 마곡, 경기 성남시 판교에만 몰린다. 서울이라는 꼭짓점만 바라보는 청년을 대상으로 일과 삶의 균형이나 보육을 지원해도 그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지난해 출생아 수가 23만 명이다. 합계출산율은 어느 날 갑자기 2.0이 되지 않는다. 2035년에 출산율 1.0이 된다 하더라도 출생아 수가 30만 명이 안 될 것이다. 인구 감소세에 맞춰 국방, 교육, 산업 모조리 바뀌어야 한다. 인구의 거대한 흐름이 단기간에 바뀌지 않으므로 인구 흐름을 예측해 미래를 새롭게 그려 나가자는 거다. 개인적으로 ‘인구개발 5개년 계획’이라도 세워야 한다고 본다. 쌍팔년도식이라고 비난만 할 게 아니다.” 조영태 서울대 인구정책연구센터장(52)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대에서 사회학 석사, 인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로 인구학을 가르치고 있다. ‘정해진 미래’ ‘인구 미래 공존’ 등의 저서를 통해 인구 구조 변동에 따른 한국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 전략을 제시해 주목받았다. 베트남 정부 인구 정책 자문,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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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의료개혁특위원장, 차라리 금융위원장이 어떤가

    필수의료 공백을 해소할 해법을 두고 정부와 의료계는 줄곧 평행선을 그려 왔다. 정부는 의대 증원을 통해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고, 의료계는 수가 인상을 통해 필수의료 인력 유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사가 늘고, 수가가 오르면 정말 호흡기를 단 필수의료를 살릴 수 있을까. 정부나 의료계 스스로도 회의적일 것이라고 본다. 정부-의료계 암묵적 담합 속 비급여 팽창 현재 필수의료 붕괴의 근저에는 ‘제2 건강보험’이 된 실손의료보험이 있다. 감기로 의사를 만나면 급여 진료이고, 수액을 맞으면 비급여 진료다. 건강보험이 가격을 정하지도, 지불하지도 않는 비급여 진료 시장은 실손보험 확대와 맞물려 급속히 팽창했다. 그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팀의 보고서가 보여준다. 한국의 국민 의료비는 2022년 처음으로 200조 원을 넘어섰다.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육박하는 총액도 놀랍지만, 증가 속도는 더 놀랍다. 국민 의료비는 2000년대까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이후 급증해 OECD를 앞질렀다. 경제 성장, 고령화라는 변수를 고려해도 한국은 특이 사례로 분류된다. 주요 원인은 17조 원에 달하는 실손보험 지출이다. 실손보험 확대 시기와 의료비 급증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이는 ‘공유지의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동네 의원이 수액주사, 도수치료 등 비급여 진료로 쉽게 돈을 벌자 의사들이 응급실, 수술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보상이 적고, 워라밸까지 형편없는 필수의료 분야는 그야말로 파탄이 났다. 실손보험의 의료 시스템을 위협할 지경에 이른 데는 정부와 의료계의 암묵적인 담합이 있었다. 의사들은 진료를 볼수록 손해인 저수가를 벌충하기 위해 비급여 진료를 늘려 왔다. 보험료 인상 역풍이 두려운 정부는 사실상 이를 묵인했다. 그동안 의사는 과잉 진료로 돈을 벌고, 환자는 의료 쇼핑을 다녔다.‘꼬리’ 실손보험이 ‘몸통’ 건강보험 흔들어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는 왜곡된 의료 시스템을 바로잡기 위한 의료 개혁 과제를 발표하고 있다. 우선 건강보험 수가를 개편해 중증·응급 환자를 다루는 필수의료에 대한 보상을 늘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수가를 아무리 올린다 한들 비급여 진료로 인한 수익을 따라잡을 수 없다. 보험료 부담과 의료 접근성을 고려하면 그 한계도 분명하다. 기형적인 의료 보상 체계로 인해 의사가 아예 필수의료에 남으려고 하질 않는다면 상급종합병원의 체질 개선도 요원해진다. 병원에 의사가 없는데 중증 환자 비율을 높이고 전문의를 늘리겠다는 건 공상에 가깝다. 전공의들이 5개월 넘도록 복귀하지 않는 배경에는 굳이 응급실, 수술실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개원하면 된다는 선택지가 남아 있어서다. 실손보험을 그대로 두고는 필수의료 살리기도, 의대 증원의 효과도 미미할 것이다. 꼬리인 실손보험이 몸통인 건강보험을 흔들고 있는데도 정부는 비급여 진료 시장을 통제하는 데 손을 놓고 있었다. 수액주사, 도수치료 같은 비급여 진료비는 병원마다 천차만별이다. 의사가 마음대로 가격을 정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불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간 보건복지부는 권한이 없다며 물러서 있었고, 금융위원회는 보험료를 높이거나 지급 대상을 축소하는 미세 조정으로 손해율을 맞추는 데만 급급했다. 이제는 보건의료 체계 전반을 살피는 다른 접근이 요구된다. 의료계와 보험업계의 반발이 따를 것이다. 의료개혁특위를 금융위원장이 맡든지, 복지부가 실손보험을 맡든지 부처 간 칸막이를 넘지 못했던 관성적인 논의를 벗어나야 한다. 과감한 상상력과 실행력으로 실손보험 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의료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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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아침이슬’ 남기고 떠난 김민기

    ‘이날까지 그처럼 결 좋은 인간을 만나 본 적 없다.’ 2007년 동아일보에 실린 ‘내 마음속의 별’ 시리즈에서 가수 조영남은 21일 세상을 떠난 고 김민기를 자신의 스타로 꼽았다. 바로 그런 이유였다. 돈 있는 친구를 불러 술이라도 사면 벼락같이 화를 냈을 만큼 “어설픈 돈 자랑, 힘자랑을 싫어한다. 바른 결을 타고났다”고 했다. 고인의 삶을 한 단어로 응축한다면 그의 말처럼 ‘좋은 사람’ 아닐까. ▷1970년 서울대 미대 재학 중에 만든 노래 ‘아침이슬’이 군사정권 시절 광장의 노래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되고 고인은 정보 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가 다시 노래를 부른 건 생계를 위해 취업했던 피혁 공장의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서였다. 그가 노동자 합동결혼식의 축가로 만든 곡이 ‘상록수’다. 현실을 노래할수록 그는 시대의 한가운데로 소환돼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1970, 80년대 저항의 상징이었지만 그는 정작 “제 노래를 싫어한다”며 부르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한 젊은 날, 음악으로 시려웠던 젊은 날. 그 시절에 대한 애증이 묻어난다. ▷1991년 ‘저항의 상징’이라는 틀을 깨고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며 연출가로 변신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공연되는 29년 동안 국내 창작뮤지컬 시장이 성장했고, 현재 영화계 주역인 배우들이 배출됐다. 배우들과 투명하게 수익을 나누는 등 공연계의 악습도 바꿔 나갔다. “소극장은 농사로 치면 못자리 농사”라더니 고인은 걸출한 농사꾼이었다. 그가 33년간 고집스레 지켜 온 학전은 지금 만개한 우리 문화예술의 못자리였다. “내가 뭐라고 이름을 남기겠나”라고 했지만 빈소에는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다며 흐느끼는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월 문을 닫은 학전 경영이 어려워진 건 2004년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수익이 되지 않는 어린이 공연을 꾸준히 올렸던 때문도 있다. 아이들이 웃는 모습이 좋다며 자주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고인은 야학에서 달동네 아이들을, 공장에서 어린 노동자를 가르칠 적부터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해 왔다. 민중가요 가수와 어린이극 연출자, 평생 자신보다 타인의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고인이었기에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을 것이다. ▷때론 가혹했을 세상에 고인이 남긴 마지막 말은 “그저 고맙다”였다고 한다. 배우들을 향해 “나는 뒷것, 너네들은 앞것”이라며 빛나기를 거부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가지고 뭘 안 해도 된다”며 뒷것을 자처했고 가족과 지인에게는 “고맙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는 말을 남겼다. 김민기. 향년 73세. 좋은 사람으로 살았기에 고단했을 그의 평안을 기원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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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서울은 ‘불장’ 조짐, 지방은 ‘미분양’ 적체… 양극화 심화되나

    서울 아파트 가격이 슬금슬금 오르며 ‘불장’ 조짐을 보이지만 지방 주택시장은 여전히 냉기가 돈다. 최근 전국 아파트 평균 가격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서울 아파트 한 채(12억9967만 원) 가격이 지방 아파트 3.7채 값이다. 10년 전만 해도 지방 아파트 두 채면 서울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서울 입성’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서울과 지방 부동산의 ‘초양극화’ 현상은 분양 시장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른바 악성 미분양으로 분류되는 준공 후 미분양은 5월 말 기준 1만3230채로 최근 10년간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방이 80%를 차지한다. 공사가 끝난 뒤 사용 승인이 나고도 안 팔린 아파트를 떠안은 건설사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조달한 자금을 갚을 수 없다.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산이라도 하면 가뜩이나 침체된 지역 경제에 이런 악재가 없다. 올해 상반기 부도를 맞은 건설사는 20곳으로 이미 지난해 1년 치 수준과 맞먹는다. ▷도산 위기에 직면한 지방 중소 건설사들은 원금 보장, 할인 분양 등 ‘미분양 떨이’로 유동성 확보에 나서고 있다. 전국 시도에서 미분양 물량이 가장 많은 대구의 경우 전체 분양가의 15%를 깎아주고 2500만 원을 환급해 준다는 아파트가 등장했다. 이 아파트는 입주 2년 후 시세가 떨어지면 원래 매입 가격에 다시 사 주겠다는 약속도 내걸었다. 기존에 분양받은 입주민들과의 갈등도 심해지고 있다. 할인 가격에 분양받은 입주민의 이사를 막으려고 정문을 지키거나 아예 철조망을 두른 곳도 있다. 할인 분양받은 입주민에게는 관리비를 비싸게 물리기도 한다. ▷지방 미분양 재고가 좀처럼 줄지 않는 현상은 고금리로 집 살 사람은 줄었는데 분양가는 높게 책정된 탓이 크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치솟은 자재값, 임금 등이 분양가에 반영됐다. 건설사의 자구 노력도 부족했다. 정확한 수요 예측 없이 아파트부터 지었고 원가 절감을 통해 상품성을 높이려 하지 않았다. 수요가 몰리는 서울은 그 격차가 덜하지만 지방 아파트 분양가는 매매가보다 ㎡당 평균 163만 원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서울의 똘똘한 1채로 투자 쏠림이 더욱 심해지면서 지방 건설업 생태계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지방 곳곳에 철근을 드러낸 채 공사가 멈추거나 입주가 지연되는 아파트가 늘고 있다. 자금력이 달리는 지방 중소 건설사와 그 협력업체들이 줄도산 위기에 처해 있고 인근 상권들도 맥을 못추고 있다. 서울과 지방 주택 시장의 초양극화가 심화하면 지방의 박탈감이 커지고 지방 소멸은 가속화할 우려가 크다. 서울과 지방의 부동산 정책을 달리 쓰는 세심함이 필요한 시기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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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악성 임대인 절반이 ‘임대사업자 혜택’ 누린다니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안심 전세 포털’을 통해 전세 보증금을 상습적으로 돌려주지 않은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지난달 기준으로 127명이다. 그런데 이 중 절반이 넘는 67명이 임대사업자 자격을 유지하며 취득세·재산세, 양도소득세 감면 같은 각종 세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UG가 악성 임대인의 전세 보증금을 대신 갚아주고, 정부는 세금까지 깎아주고 있으니 기막힌 일이다. ▷임대사업자 등록이 취소되지 않은 악성 임대인이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HUG가 대신 반환한 금액이 무려 7124억 원에 이른다. 1인당 평균 106억 원씩이니 이들이 얻은 경제적 이득이 막대하다. 그 피해자만 3000명이 넘는다. 전세사기를 예방하겠다며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고도 국토교통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임대사업자 취소 같은 후속 조치를 제때 하지 않았다. 명단을 공개했으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일하는 척하는’ 행정이다. ▷지난 3년간 전세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아 임대사업자 자격이 취소된 건 7명에 불과하다. 악성 임대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려면 떼어먹은 전세 보증금이 3년간 2건 이상, 2억 원 이상이고 채무 상환 의지가 없음을 확인해야 한다. 이처럼 악성 임대인 지정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임대사업자 자격을 취소시키려면 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임차보증금 반환 소송에서 세입자가 승소했거나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조정이 성립했는데도 반환하지 않는 경우 등으로 한정돼 있다. 세입자 스스로 전세사기를 당했음을 입증하는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임대사업자 등록을 취소시킬 수 있는 구조다. 엄격한 규정이 피해자를 보호하기보다 재량과 책임을 줄여 공무원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HUG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사고액은 2조6500억 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동기 대비 사고액이 43%나 폭증했다. 전세사기로 빌라 기피 현상이 뚜렷해진 데다 집값이 정점이던 때 계약한 빌라, 연립 등에서 역전세난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 금액을 올리고 가입 대상을 늘리는 등 섣부르게 전세 시장에 개입했던 대가를 이제사 호되게 치르고 있는 셈이다. ▷나랏돈이 아니라 내 돈을 떼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뻔히 갚지 않을 돈을 빌려주거나, 버젓이 임대 사업을 계속하도록 하면서 세제 혜택까지 줄 수 있을까. 이러니 호텔 가서 밥 먹고, 차를 몇 대씩 굴리는 악성 임대인을 마주치고 사기를 당한 세입자들이 가슴을 친다. 악성 임대인의 임대사업자 자격이 유지되는 동안 어떤 세입자가 추가로 피해를 당할지 모를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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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36주 낙태’라며 영상 올린 유튜버… 진짜라면 ‘살인’

    24세 만삭 임신부라고 주장하는 유튜버가 낙태 시술을 받은 과정을 담은 영상을 올려 충격을 주고 있다. 36주가 된 태아를 지우려 병원을 찾아다니고, 그 과정을 정성스레 편집해 공개하는 발상이라니…. 비윤리적이라기보다 윤리적 감각이 아예 작동하지 않는 듯해 보인다. 현재 이 영상은 삭제된 상태다. 경악스러운 내용에 논란이 확산하면서 유튜브 구독자는 2만4000명으로 20배 넘게 늘었다. ▷우리나라 산모의 평균 출산 주수가 37주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뿐이지 36주면 온전한 아기라고 볼 수 있다. 영상에서 유튜버의 수술을 거절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의사는 “심장이 잘 뛴다. 낳아야 한다”고 했다. 해당 유튜버는 병원 2곳에서 거절당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900만 원을 주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의사들은 유튜브 내용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보고 있다. 누리꾼들 사이에선 만삭이 되도록 임신을 몰랐다는 점, 임신이나 수술로 인한 신체적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점, 수술 3일 만에 영상을 제작했다는 점 등을 들어 ‘조작설’에 무게가 실리는 양상이다. ▷보건복지부는 해당 유튜브 영상의 사실관계를 파악해 처벌해 달라며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2019년 형법상 낙태죄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다. 하지만 유튜브 내용대로라면 살인죄 적용이 가능하다. 영상에서 유튜버는 개복 수술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만약 사실로 밝혀진다면 낙태가 아닌 신생아 살인이다. 이미 34주 된 태아를 낙태한 의사가 살인죄로 처벌받은 판례도 있다. 다만 해외에 서버가 있는 유튜브 특성상 해당 유튜버와 수술 의사를 아직 특정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자살을 시도하거나 칼부림 끝에 살인이 일어나는 장면이 그대로 생중계되더니 진위를 떠나 ‘36주 낙태’ 영상이 버젓이 노출됐다. 선정적인 막장 콘텐츠도 자극이 약한 것인지 이제는 폭력, 살인 등 반사회적인 콘텐츠가 유튜브에서 판을 친다. 상식이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알고리즘을 타고 이런 자극적인 유해 콘텐츠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중독을 낳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조회 수, 구독자 수가 곧 수익으로 직결되는 구조 안에서 돈벌이 경쟁을 벌이는 유튜버들의 자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튜브는 국내 사용자 1위 앱이다. 1인당 월평균 사용 시간도 40시간을 넘어섰다. 어린이, 청소년도 별다른 제한 없이 접근 가능하다. TV 방송처럼 국민 누구나 사용하는 보편적인 공간이 유해 콘텐츠로 도배가 됐는데도 정부는 해외 플랫폼이라는 이유로 규제에 손을 놓고 있다. 불법 콘텐츠에 대한 정보와 이를 삭제할 기술까지 독점한 플랫폼에 책임을 지우지 않고는 유해 콘텐츠의 범람을 막을 길이 없다. 정부가 더 이상 플랫폼 규제를 망설여서는 안 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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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물에 타서 쓰는 피? 인공 혈액 개발 각축전

    미국 국방부 산하 연구개발 기관인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실온에서 보관 가능한 분말 형태의 인공 혈액을 개발하는 데 지난해 4600만 달러(약 634억 원)를 지원했다. 군사용 신기술을 연구하는 DARPA가 인공 혈액에 투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쟁뿐만 아니라 대형 재난으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태를 대비해 혈액의 안정적인 보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2022년 코로나19가 한창일 당시 혈액 보유량이 급감해 국가 혈액 위기를 선포한 적이 있다. ▷DARPA가 투자한 프로젝트는 산소를 구석구석 나르는 적혈구 속 헤모글로빈 대체재를 만드는 것이다. ‘에리스로머(Erythromer)’라고 하는데 혈액에서 헤모글로빈을 추출해 지질 막을 씌운 입자다. 혈액은 최장 42일간 냉장 보관이 가능하지만, 동결 건조된 분말인 에리스로머는 2년간 실온 보관이 가능하다. 냉장 시스템이 없어도 되고, 식염수와 섞어 쓰므로 보관과 배달이 용이하다. 혈액형과 상관없이 투여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일본에서도 최근 에리스로머와 같은 원리의 인공 혈액이 개발됐다. 나라현립 의과대 교수팀은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진 혈액에서 헤모글로빈을 추출한 뒤 역시 지질 막으로 씌운 입자를 만들었다. 폐혈액을 활용하고 혈액 보관 기간이 15∼16배 늘어난다는 점에서 혈액 부족을 해결할 획기적인 연구로 평가받는다. ▷헤모글로빈을 대체한 인공 혈액은 산소 공급만 가능한 ‘반쪽’ 혈액이다. 몸속에서 진짜 혈액이 충분히 생성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인공 장기보다 인공 혈액 개발이 뒤처진 것은 혈액의 구성이 그만큼 복잡해서다. 혈액의 절반은 액체인 혈장, 절반은 고체인 혈소판 적혈구 백혈구 등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진짜 혈액을 모방한 인공 혈액은 추출한 줄기세포로 적혈구를 배양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2022년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가 이 방법으로 건강한 성인 2명에게 찻숟가락 정도의 수혈에 성공한 적이 있다. ▷선진국은 저출산 고령화로, 저개발국은 헌혈 인프라 부족으로 전 세계 국가의 60%가 만성적으로 혈액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인공 혈액 연구는 임상실험 전 단계로 10년 이내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헤모글로빈의 잠재적인 독성을 해결했는지가 상용화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지난해 범부처 ‘세포 기반 인공 혈액 제조 사업’이 출범하는 등 국내서도 인공 혈액 개발에 시동이 걸렸다. 인공 혈액 개발에 성공한다면 장기 이식용 혈액, 항암제용 혈액 등 맞춤형 혈액이나 희귀 혈액 생산까지도 가능해진다. 보건 안보로 접근해도, 인공 혈액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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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수백 채 빌라 굴리며 정부 보증금 떼먹는 악성 임대인들

    ‘빌라왕’ 60대 사모 씨가 전국에 보유한 주택은 718채, 전세보증금은 1874억 원이다. 채당 2억6000만 원꼴이다. 사 씨는 ‘동시 계약 진행’이란 악질적 전세사기 수법을 썼다. 공인중개사 등과 짜고 전셋값을 부풀려 매매가와 똑같이 맞춘 뒤 같은 날 세입자에게 받은 보증금으로 그 집을 사는 방식이다. 집주인으로는 명의만 빌려온 가짜를 내세웠다. 이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가짜 집주인은 파산시키고, 돈은 다른 데 써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세입자는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없게 된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올해 4월까지 약 7년간 사 씨를 대신해 세입자에게 돌려준 보증금이 546억 원인데, 경매를 통해 회수한 건 2억 원에 불과하다. 더욱이 사 씨 보유 주택 중 전세 만기가 안 된 주택이 200채가 넘고, 보증금도 557억 원 남아 있다. 수사 중인 사 씨가 제때 보증금을 돌려줄 리 없으니 HUG가 변제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범죄 수익을 HUG와 피해자가 나눠서 부담하는 셈이다. ▷사 씨 같은 악성 임대인이 늘면서 HUG가 대신 변제한 금액은 3조 원에 가까워졌다. 회수된 금액은 10%에도 못 미친다. 돈을 빌려주는 은행, 보증금 반환 보증을 서는 HUG 모두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줄 능력이 있는지 따지지 않는 게 전세자금 대출의 구조적 허점이다. 악성 임대인들이 이 틈새를 파고들어 세입자에게 전세대출을 권유하며 수백 채씩 ‘갭 투자’를 벌였다. 정부가 사실상 전세사기를 방조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사회적 재난’이 된 전세사기에 대응해 정부는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한다. HUG가 보증금을 대신 갚아준 주택이 3건 이상인 임대인 가운데 상환 의지 등을 고려해 지정한다. 문제는 심의를 거쳐 공개하는 데 수개월이 걸리고, 그사이 애꿎은 피해자가 계속 발생한다는 점이다. 4월 기준으로 악성 임대인 664명이 공개됐는데 이 중 HUG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거나 형사 고소·고발을 한 악성 임대인은 42명뿐이다. ▷‘주택도시기금’은 국민들이 집을 살 때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국민주택채권, 내 집 마련을 위해 붓는 청약저축 등으로 조성된 자금이다. 원래 임대주택을 짓거나 낮은 금리로 서민들에게 주택 구입, 전월세 자금을 지원하는 데 써야 할 돈인데 ‘빌라왕’ 같은 악성 임대인이 떼어먹은 돈을 갚는 데 뭉텅이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전세사기를 당한 세입자는 피해자로 인정받는 절차가 까다롭고, 구제 방안도 대출 지원 중심이어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이쯤 되면 대체 누가 정부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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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반부패 청렴 기관 권익위의 일탈

    국민권익위원회가 김건희 여사의 명품 백 수수와 관련해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 처리한 이튿날인 11일부터 청탁금지법 질의응답 게시판에는 500여 개의 조롱성 질문과 항의성 글이 올라왔다. 청탁금지법상 공직자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다는 결론에 대해선 “선생님인데 배우자는 명품 백을 받아도 되나”, 외국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대통령기록물이라는 설명과 관련해선 “외국인 친구를 통해 선물을 전달하면 되냐”고 묻는 조롱성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꼬박꼬박 답변을 달아야 하는 권익위 직원은 울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명품 백-출산지원금 등 상식 밖 행보 권익위는 잘못된 행정이나 제도로 인한 국민 고충을 처리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정부 안 ‘내부 고발’ 조직이다. 당연히 공무원 입장에선 껄끄럽고 불편하다. 그렇다 보니 인력도, 예산도 넉넉한 적이 없었지만 2016년부터 시행된 청탁금지법, 이른바 ‘김영란법’ 주무 부처로 접대 문화를 바꾸는 등 그 역할을 다해 왔다.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우리 사회 구석구석 뿌리 내린 나쁜 관행을 근절해야 한다는 상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법을 만든 권익위가 명품 백 수수 건 처리 과정을 통해 합법적인 청탁 통로를 온 나라에 공표했다. 이런 자기부정이 없다. 반부패 청렴 기관이라는 정체성을 헷갈리는 듯한 권익위의 행보는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권익위는 출산지원금 1억 원을 주면 아이 낳을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응답자 63%가 긍정적이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저출산 제도 개선을 권고하기 위해 필요한 사전 작업이라고 설명했지만 ‘뜬금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유철환 국민권익위원장의 1월 취임사를 보면 그 배경이 짐작된다. 유 위원장은 “노동·교육·연금의 3대 구조 개혁, 저출생 문제 등 국정 현안 등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져 달라”며 윤석열 정부 3년 차 성과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동기이고, 명품 백 수수 건으로 열린 전원위원회의 표결에 직접 참석했다. 최근에는 권익위가 전국 대학교 기숙사에 1인실을 확대하도록 권고할 것이란 보도도 있었다. 민간 대학에 ‘감 놔라, 배 놔라’ 주문하는 것이라 행정기관을 상대하는 권익위 업무와는 거리가 있다. 대학생의 사생활 보호 차원이라면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해야 맞을 것이다. 2000원 생일 케이크도 금지했는데 명품 백 수수에 면죄부를 주는 논란의 결정이 있기 전 청탁금지법 질의응답 게시판을 훑어봤다. 드문드문 올라온 게시글 중에 고등학생의 질문이 있었다. ‘저희 반 친구들이 담임쌤 생일 때 2000원씩 모아서 생일 케이크를 사드리려고 한다. 김영란법에 걸릴 것 같아 케이크를 선생님과 학생들이 나눠 먹을 계획이다’라고 쓴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선생님이 이로 인해 많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까요.’ 선생님을 걱정하는 기특한 질문에 권익위의 답변은 야박했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직무 관련성이 인정되므로 원칙적으로 청탁금지법상 허용되기 어렵다.’ 아마도 선생님의 생일 파티는 열리지 않았지 싶다. 당시 상심했을 학생들이 명품 백 수수 건에 대한 권익위의 답변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체 우린 이들에게 뭘 가르치고 있는 건가. 권익위는 이번 명품 백 수수 건을 종결 처리로 손을 털 일이 아니다. 현재 배우자는 금품을 받을 수 없지만 이에 따른 처벌 조항이 없어 김 여사는 면죄부를 받았다. 이제라도 청탁금지법의 빈틈을 메우는 개정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 2000원 생일 케이크조차 선생님께 누가 될까 봐 걱정하는 학생들이 지금 권익위의 존재 이유를 묻고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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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전세사기’ 반지하에 묶여 잠 못드는 피해 청년들

    “불안하지만 별수 있나요. 그저 버틸 수밖에요.” 동아일보가 장마철을 앞두고 전세사기 피해 건물을 돌아봤더니 임대인이 잠적해 방치된 탓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한 건물이 수두룩했다. 전국적인 전세사기 피해가 공론화된 지 2년이 되어가지만, 피해자의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 보증금을 떼이고 빚더미 수렁에 빠진 피해자는 하루하루를 정말 어렵게 버티고 있다. 지긋지긋하지만 집을 떠날 수도 없다. 피해자 대다수가 관리되지 않는 부실 건물에서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인천 계양구 하모 씨의 반지하 집은 문을 열면 복도에 물이 찰랑거린다. 하루 3번 펌프를 돌리며 버티고 있다. 그는 전세사기로 보증금 8000만 원을 떼이고 투잡, 스리잡을 하며 빚을 갚고 있다. 돈이 드는 수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부산 수영구 정모 씨는 오피스텔 현관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놓고 산다. 지난해 장마 당시 배수시설이 미흡해 물이 넘쳤던 악몽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다. 그 역시 대출금을 고스란히 날리고 갈 곳이 없어 버티고 있다. 전국 곳곳에 소방관로가 터졌거나 외벽 마감재가 떨어졌는데도 임대인이 잠적해 관리가 중단된 건물이 있었다. ▷5월 기준 전세사기 피해자는 1만6606명이고, 이들의 10명 중 7명은 2030 청년층이다. 사기를 당한 것도, 그래서 집주인 빚을 떠안은 것도 억울한데 누수, 균열, 승강기 고장 등 건물 관리 부실의 피해까지 감내하고 있다. 전세사기 전국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피해자 절반 이상이 열악한 주거 환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사기가 사회적 재난 수준으로 번진 것은 제도적 맹점을 방치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한 다가구의 경우, 등기부 등본을 봐도 선순위 대출이나 다른 전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전세보증보험도 허술하게 관리돼 피해를 키웠다. 나태한 행정으로 전세사기를 방치한 정부가 장마철 홍수 피해가 걱정되는 위험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17개 시도 중 피해자가 사는 건물에 대한 실태조사가 일부라도 이뤄진 곳은 5개 시도뿐이었다. ▷사회에 갓 진출한 2030 청년들이 저축을 깨고 대출을 받아 마련한 집이었다. 그 집은 이제 ‘전세 지옥’이라고 불린다. 반지하나 옥탑방을 벗어나 그저 조금 햇빛이 잘 들고 깨끗한 보금자리를 꿈꾼 대가로서는 너무 가혹하다. 피해자들은 “승강기, 소방시설, 전기 설비 등의 안전 관리를 지자체가 지원해 주거나, 비용 보조를 해 줬으면 한다”고 했다. 혹시 무너질까, 물이 넘칠까 하는 걱정에 피해자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지 않도록 지자체가 최소한 시설 안전만큼은 지원에 나섰으면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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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SNS에도 술·담배처럼 경고문 붙여야

    올해 1월 미국 상원 법제사법위원회는 아동 성 착취물 확산에 대한 빅테크의 책임을 추궁하는 청문회를 열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방청석을 향해서 “누구도 겪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날 방청석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우울증이 유발돼 자살한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앳된 모습의 자녀 사진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었다. 기절할 때까지 숨을 참는 ‘블랙아웃 챌린지’ 영상을 찍다 사망한 자녀를 둔 부모도 있었다. 울음을 삼킨 채 방청석을 지킨 부모들은 SNS가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 침묵으로 증언했다. ▷2010년대 들어 미국에선 10대 청소년의 우울, 불안, 자해가 급증했다. SNS가 대중화된 시기와 일치한다. SNS의 위험성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며 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미국 공중보건 최고책임자인 비벡 머시 의무 총감은 17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술과 담배처럼 SNS에 청소년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경고를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주치의’로 불리는 의무 총감의 이 같은 발언은 빅테크에 아동 보호 책임을 부과하는 법안 통과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청소년 정신 건강도 응급 상황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그 원인 중 하나로 SNS가 지목된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우리 청소년 10명 중 7명이 SNS를 사용한다. 청소년기는 전두엽이 완성되지 않아 충동이나 감정 조절에 미숙하다 보니 SNS의 부정적인 영향이 극대화된다. 하루 3시간 이상 SNS를 사용하는 청소년은 우울증, 불안과 같은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두 배로 늘어난다. 또래 압력에 취약해 마른 몸을 동경하며 거식증을 앓거나, 자해나 자살 같은 유해 콘텐츠에도 쉽게 중독된다. ▷3년 전 메타가 10대 여학생들에게 인스타그램이 악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내부 연구 보고서를 은폐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사실이 내부 고발로 폭로됐다. 청소년 정신 건강에 덜 해로운 알고리즘 모델을 적용하면 이용자 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는 미국 42개 주가 메타를 대상으로 ‘청소년 중독을 유도하도록 설계했다’며 소송에 나선 배경이 됐다. ▷SNS를 끊을 수 없는 건 개인의 의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 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알고리즘 탓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빅테크들이 돈벌이를 포기하고 스스로 알고리즘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머시 의무 총감은 “자동차 사망 사고가 늘자 안전벨트를 도입했던 것처럼, SNS에도 안전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SNS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할 방안을 공론화할 때가 됐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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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갈수록 ‘수포자’도 늘고 ‘국포자’도 늘어서야

    요즘 입학 대기 줄이 가장 긴 학원은 독서·논술 학원이다. 국어는 사교육비가 두 자릿수씩 증가하는 과목이기도 하다.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데도 문해력이 떨어지는 ‘국포자’(국어를 포기한 자)가 늘고 있어서다. 상수나 함수 같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를 만들기도 한다. 17일 발표된 지난해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에선 학생 10명 중 1명이 ‘국포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실시되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는 중3, 고2 학생을 대상으로 국어, 수학, 영어 과목별 기초학력 도달 여부를 측정하는 시험이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진단하는 것이라 문제 자체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국어라면 비유법에 해당하는 문장을 고른다거나, 수학이라면 기본적인 인수분해를 하는 정도다. 따라서 ‘기초학력 미달’에 해당한다면 교실에 앉아 있어도 아예 수업을 이해 못 한다고 보면 된다. 그 위 단계로는 기초→보통→우수 학력 순으로 나눈다. ▷특히 고2 학생의 기초학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국어 8.6%, 수학 16.6%를 기록했다. 표집 조사가 시작된 2017년 이후 가장 높았다. 중3 학생은 국어, 수학, 영어 모두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약간 줄긴 했지만 덩달아 보통학력 이상인 중상위권 학생도 급감했다. 기초학력이 개선됐다기보다 하향 평준화에 가깝다. ▷교육 당국은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늘어난 건 코로나19 유행 동안 학교가 문을 닫은 탓이 크다고 분석한다. 그 기간 사교육 참여 시간, 스마트폰 사용 시간, 학습 공간 확보 등 개인적인 환경에 따라 학력 격차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지나가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음에도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되레 늘어났다는 점이다. 학교가 ‘코로나 후유증’을 치유하고 교육 사다리를 재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코로나 세대’의 학력 격차가 평생에 걸친 직업과 소득 격차로 이어질까 봐 우려스럽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대부분이 학업성취도 평가를 시행한다. 학생들의 실력을 제대로 진단해야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처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 평가를 하고 학교별, 과목별 점수뿐만 아니라 성별, 인종별, 부모의 소득에 따른 점수까지 공개한다. 이 점수가 낮은 학교일수록 예산을 더 지원해 코로나19 학력 격차 해소에 나서고 있다. 국내서는 학업성취도 평가를 두고 ‘학교 줄 세우기’라는 교육계의 거부감이 큰 탓에 전국 학생의 3%만 표집 조사를 한다. 사실상 학교 간 비교는 불가능해 맞춤형 지원이 이뤄질 수 없다. 경쟁을 터부시하며 무기력증에 빠진 학교부터 바뀌어야 ‘국포자’ ‘수포자’ 학생도 줄어들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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