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이진구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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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이진구 기자의 대화’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딱딱하고 가식적인 형식보다 친구와 카페에서 수다 떠는 듯한 편안한 인터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sys1201@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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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 길 먼 홍콩 선거[횡설수설/이진구]

    우리 선거에서 40%대 투표율은 ‘역대 최저’ ‘정치 무관심’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홍콩에서 40%대는 매우 높은 수치다. 역대 홍콩 선거를 통틀어 최고는 58.3%를 기록한 2016년 입법회 의원(우리의 국회의원) 선거였고, 구의원 선거 중에서는 2015년이 47%로 가장 높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투표율은 대선, 총선, 지방선거를 통틀어 2008년 18대 총선의 46.1%였다. ▷홍콩 유권자들의 낮은 투표율은 정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불합리한 선거제도 때문이다. 선거 연령은 18세 이상이지만 자동으로 투표권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인두세를 내야 유권자 자격을 갖는다. 또 복잡한 등록 신청서도 작성해야 한다. 그나마 구의원은 직접 뽑지만 입법회 의원은 70석 중 절반만, 행정장관은 1200명의 선거인단이 간접선거로 선출한다. 투표에 열의를 갖기 힘든 선거구조다. 행정장관 완전직선제를 요구한 2014년 9월 우산혁명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24일 치러진 홍콩 구의원 선거 투표율이 역대 선거를 통틀어 가장 높은 71.2%를 기록했다. 18개 지역구 452석 중 388석을 범민주 진영이 석권했고, 친중 진영은 60석에 그쳤다. 친중파 327석, 범민주파 124석이던 구의회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홍콩 시민들은 올 3월 범죄인 인도법(송환법)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르려는 행정당국과 그 뒤의 중국에 저항해왔다. 그 과정에서 경찰이 시민에게 실탄을 발사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목도했다. ▷투표율이 치솟은 건 분노한 18∼35세 젊은층이 폭발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등록유권자 수는 413만 명으로 2015년보다 44만 명이 늘었고, 투표자도 294만 명으로 가장 많이 투표했던 2016년보다 74만 명이나 늘었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유학 중임에도 투표를 위해 귀국했다. ▷구의회는 1200명의 홍콩 행정장관 선거인단 중 117명을 뽑는다. 이 때문에 2022년 행정장관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 홍콩 행정당국은 별로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기업계, 전문직, 노동 및 종교계, 정치인 등 직능별 4개 분야, 각 300명으로 구성된 선거인단 대다수가 친중 성향 단체에 배정돼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선거인단은 홍콩 시민 전체가 아닌 약 24만 명의 제한된 유권자들이 뽑는다. 캐리 람, 둥젠화, 도널드 창, 렁춘잉 등 역대 행정장관들이 모두 친중파인 것도 이런 불합리한 선거제도가 가져온 결과다. 희망의 싹은 틔웠는데, 갈 길이 아직 너무 멀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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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타면제, 조국 딸 전액 장학금…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나”[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

    《모른 척해도 될 일이었다. 1월 정부의 대규모 개발 사업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를 그가 죄송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장학금 수혜 논란도 그나 환경대학원이 잘못한 건 없다. 하지만 그는 정부가 부정한 방식으로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고, 잘못한 것도 없이 상처받은 학생들에게 미안해했다. 1월과 8월, 그렇게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두 개의 글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장(56)은 “상처받은 학생들이 동요하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 ―올 1월 정부가 23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대한 예타를 면제하자 맡고 있던 4대강 조사·평가위원장을 사임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사리에도 안 맞고 위원들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위원회에 수질과 생태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있었다. 아마도 환경부 복안은 수년간 수질이 악화되고 생태계도 많이 훼손됐으니 원상태로 복구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렇게 결정하려 한 것 같다.” (원래 그렇게 갈 거 아니었나.) “나는 이런 논리로는 백발백중 실패할 거라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환경에 대한 평균 인식이 그 정도 논리로 이미 만들어진 걸 부수는 데 동의할 정도는 아직 아니다. 그리고 난 경제학자인데 그렇게 결정할 거면 있을 이유도 없다. 그래서 그러지 말고 보 해체에 따른 비용과 편익을 분석해 장기적으로 해체가 오히려 이득이라는 점을 제시해야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설득해 예타 조사 방식을 반영시켰는데 정작 정부는 SOC 사업에서 예타 조사를 면제하니 무슨 낯으로 위원들을 보나. 옳은 결정도 아니고.” ※그는 2012년 부산고등법원에 원고 측 증인으로 출석해 이명박(MB) 정부의 4대강 사업은 경제성이 없으며 예타 조사를 안 한 것은 불법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해 문재인 정부에서 4대강 조사·평가위원회 민간위원장에 선임됐다. ―설득했다는 건 반대가 많았다는 건가. “청와대 담당자도, 환경부도 ‘듣고 보니 그렇네’ 하더라. 그런데 위원회에 모인 전문가, 활동가들은 비용 편익 분석에 익숙한 분들이 아니었다. 특히 생태 분야 분들은 ‘생명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하느냐’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그건 학자, 시민운동가로서의 생각이고 국민을 설득하고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경제적 편익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봤다.” (쉽게 동의하지는 않았을 텐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이 방식을 적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는 점도 우려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이 확신하는 것처럼 수질과 생태계가 파괴됐다면 그 결과가 전부 경제적 가치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유지하는 게 더 나았으면 어쩔 뻔했나.) “뭘 어떻게 하나. 지금으로선 해체가 무리이니 좀 더 지켜보며 자료를 축적하자고 했을 거다. 숫자를 조작할 수는 없으니까.” ―보 해체 의견을 발표한 게 2월인데 아직도 해체는 하지 않고 있다. “그 점이 가장 아쉬운데… 정책이란 가치와 전략이 결합돼야 완성되는 건데, 이 정부는 마음만 앞서고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지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많이 미흡했다. 2월에 보 2개 해체, 1개 부분 해체, 2개 상시 개방을 발표했는데 당시에는 6월에 국가물관리위원회를 구성해 최종 결정을 하고 바로 집행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물관리위원회를 빨리 안 만들더라.” (이유가 뭔가.) “잘 모른다. 전반적으로는 해당 지역도, 전국적으로도 해체 여론이 높았다. 대통령 공약이고, 연구 결과도 그렇게 나왔으니 추진할 줄 알았는데 지역에서 좀 반대하고, 선거 얘기 나오더니 갑자기 쑥 들어갔다. 민주당이 안 움직이는 것 같더라. 환경부도 적극적이지 않고…. 그때 이 사람들이 전략만 부족한 게 아니라 정책에 대한 가치관도 확고하지 않다고 느꼈다.”※국가물관리위원회는 당초 계획보다 두 달 늦은 8월에 구성됐다. 하지만 보 해체와 관련해서는 현재까지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정부에 사의를 표명해도 되는데 페이스북에 올린 이유가 있나. “갑자기 화가 나서….” (갑자기?) “그날(1월 29일) 오후 4시인가? 회의가 있었는데 갑자기 예타를 면제할 거라는 뉴스가 나왔다. 그걸 보고 바로 썼다. 굉장히 빨리 썼다.” (사전에 몰랐나.) “전혀 몰랐다. 그 사람들이 나한테 말해줄 의무도 없고. 하지만 우리가 우여곡절 끝에 예타 조사 방식으로 평가하기로 했고, 그걸 (청와대도) 알 텐데 이 방식을 부정하니 우리 위원들은 뭐가 되나. 그렇다고 위원들 개개인에게 일일이 연락해서 알리기도 그렇고… 내가 정부 위원회의 장을 맡고 있는데 죄송하기도 하고… 사실 글을 올릴 때는 그렇게 큰 반향이 있을 거라 생각 못 했다.”―배신감을 느낀 건가. “뒤통수를 맞은 느낌? 좀 심하게 말하면 괘씸하더라. 기분도 많이 상했고… 그래서 (위원장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이 야당일 때는 MB 정부가 예타를 면제해 혈세를 낭비한다고 하다가 이제는 반대가 되니까. 소위 영남권 KTX라는 사업도 들어갔는데 171km에 역이 5개다. 완전히 가다 서다 아닌가. 지역 정치인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지역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4대강 보 해체와 관련된 정부의 태도, 예타 면제 등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이 정부의 가치관에 대한 의심, 회의를 넘어 나중에는 분노까지 일었다.” (며칠 후 철회했는데.) “발표가 코앞인데 위원장이 그만두면 어떻게 하느냐는 위원들의 만류가 많았다. 환경부에서도 계속 가자고 하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일단 하던 일은 잘 마무리하는 게 낫다 싶어 결국 복귀했다.” ―진영 논리 때문인지 시민단체의 반발이 좀 덜하다는 느낌도 있다. “4대강 사업과 예타를 면제한 SOC 사업에 조금의 차이는 있다고 본다. 하천이나 강을 건드리는 사업은 외국에서도 매우 조심한다. 하지만 어쨌든 하나는 강을 파고, 하나는 땅을 파는 거니까, 세금도 들어가고…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본다.” ―경제적 타당성만 고려하면 낙후 지역은 개발 기회 자체가 없지 않나. “지금 예타 조사도 경제적 편익만 갖고 판단하지 않는다. 정책적 평가라고 해서 지역의 낙후도, 지역균형발전 기여도 등을 고려한다. 비용편익비율은 낮지만 꼭 필요한 사업이라면 충분히 검토한 뒤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사업이 아닌데 들고나온 것이다. 영남권 KTX는 이미 박근혜 정부 때도 얘기가 나온 거다. 당시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그쪽이 표밭이라 사업을 하면 좋은데도 워낙 경제성이 없어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런 걸 이 정부는 지역균형발전이라고 들고나오니….” ―조 전 장관 딸의 장학금과 관련해 올린 글도 반향이 무척 컸다. 환경대학원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건가. “이 문제는 많이 조심스럽다. 내가 환경대학원 교수와 원장이 아니었다면 아마 안 올렸을 거다.” (그런데 왜….) “내가 직책에 대해 과도한 책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많이 불편해하겠다고 예상했는데 틀리지 않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도는데… 가장 무서웠던 말은 ‘동료 교수 딸이니까 봐준 거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아, 이거 심각하다.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글을 썼다. 학생들이 동요하고 불만도 쌓일 수 있고… 가장 걱정되는 것은 상처받는 학생들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게 제일 두려웠다.”―어떤 상처를 말하는 건가. “상대적인 박탈감 같은 거…. 환경대학원 석사과정이 200여 명 된다. 한 학기 등록금이 400만 원 정도인데 이런저런 장학금이 있지만 400만 원 전체를 통째로 다 받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외부 장학금도 있어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100만 원 정도면 많이 받는 편에 속한다. 학생들이 넉넉지 않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동장 같은 일을 하면서 근로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연구 일을 도우면서 인건비 명목으로 받아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한다. 오늘도 4명이 외부 장학금을 신청해 추천서를 써주고 있었다. 그런 학생들이 보기에는 이건 너무 쉽고 편했다. 게다가 수업도 거의 안 듣고….”※조 전 장관의 딸은 한 학기에 401만 원씩 두 학기 802만 원을 받았고 수업은 1학기 1과목(3학점)만 들었다. ―환경대학원에 다니다가 다른 곳에 가는 경우가 많나. “법학전문대학원에 가는 경우는 봤는데… 그 학생은 졸업하고 갔다. 환경전문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거였다. 안 그래도 주변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물어봤는데 중간에 다 마치지 않고 의학전문대학원에 가는 건 처음 봤다고 하더라. 환경대학원은 의전원 진학과 관계없는 전공이다. 뭐, 올 수도 있는데 그러면 최소한 수업이라도 좀 듣든지…. 아니면 장학금이라도 안 받거나. 불법은 아니겠지만 보는 사람들 눈살이 찌푸려지니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위법 여부를 떠나 용인되는 어떤 선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 선을 넘었다.” ―마침 지금 내년도 입학생을 전형 중이다. “지난달 시작해 면접까지 치렀는데 이달 말 최종 합격자를 발표한다.” (면접에서 혹시 특별히 당부하거나 물은 건 없나.) “하하하, 특별히 지난해와 비교해 달라진 건 없다. 반 농담으로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인지도가 높아져 올해 경쟁률이 올라가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별 차이는 없더라. 다행히 조 전 장관 딸이 다녔던 전공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원했다. 조 전 장관 관련은 지금 수사 중이고 학교 문제이기도 해 더 말하기가 좀 그렇다. 이해해줬으면 한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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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고 있는 민식이법[횡설수설/이진구]

    9월 중순, 충남 아산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홉 살 난 김민식 군이 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맞은편에는 김 군의 부모가 운영하는 치킨 집이 있었는데 가게에 있던 김 군의 어머니와 두 살 어린 동생은 사고 현장을 다 보았다고 한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시속 30km인 스쿨존 제한 속도를 지키지 않았다. ▷49재도 끝나기 전인 지난달 1일 김 군의 아버지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자식을 지키지 못한 못난 아비가 아들이 가는 길에 마지막이라도 역할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그는 다시는 민식이처럼 억울한 피해자가 없게 스쿨존 안에 의무적으로 신호등과 과속단속카메라를 설치하고, 사고 시 가중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군이 사고를 당한 횡단보도에는 신호등도 과속단속카메라도 없었다.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난달 11일 ‘민식이법’으로 불리는 도로교통법 개정안과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다. 김 군의 부모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 통과를 호소했고, 친인척까지 나서 서명운동을 펼쳤다. 김 군의 어머니는 40여 명의 국회의원에게 손편지를 보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식이법’은 해당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에서 논의 한 번 안 되고 잠자고 있는 상태다. 국민 청원도 11만2789명으로 기준인 20만 명을 못 채워 답변도 받지 못한 채 지난달 31일 종료됐다. 전국 스쿨존 1만6000여 곳에서 최근 5년간 31명이 죽고, 25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스쿨존 중 과속단속카메라가 있는 곳은 4.9%인 820곳에 불과하다. 내년 스쿨존 관련 예산 230억 원이 편성됐지만 모두 새 구역 지정이나 확장일 뿐, 단속카메라나 신호등 설치비는 전무하다고 한다. ▷지난달 21일 국회 앞에서는 민식 군의 부모를 비롯해 6명의 부모들이 마이크를 잡고 법 통과를 호소했다. 모두 ‘하준이법’ ‘혜인이법’ 등 숨진 자녀의 이름을 딴 ‘어린이 생명안전법안’들이 수년째 국회에 계류된 부모들이다. 부모들은 닷새간 의원실 300곳을 돌며 부탁했는데 의원들은 “쟁점법안도 아닌데 왜 계류돼 있지?”라며 오히려 진행 과정을 되물었다고 한다. 국가가 책임을 통감하고 앞장서도 모자랄 판에 거꾸로 피해자 가족들이 부탁하고 호소하는 상황은 정상이 아닐 것이다. 국가만 탓할 일도 아니다. 어린 생명이 희생돼도 반짝 관심뿐인 우리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다. 정기국회는 다음 달 10일 종료된다. 이대로 가면 민식이법은 사실상 폐기될 운명이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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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작된 프로듀스 시리즈[횡설수설/이진구]

    “청각을 잃고 처음에는 아주 작은 소리라도 잡으려고 노력했어요. 손바닥뼈가 상할 때까지 박수를 쳤지만… 들리지 않았죠. 그렇게 포기해 가던 어느 날, 저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고,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때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평생 누워 있거나, 혹은 일어선다. 그리고 달려간다.” ▷2017년 6월 미국의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인 ‘아메리카 갓 탤런트(America‘s Got Talent)에서 맨디 하비(29)라는 청각장애 여성이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가수가 꿈이었지만 선천성 질환으로 18세에 청력을 잃었고, 다니던 음대도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튜너기 바늘을 보며 음정을 맞추고, 바닥의 진동을 통해 반주의 박자와 리듬을 느끼며 노래하는 방법을 연습했다고 한다. 신발을 벗은 맨디는 자작곡 ‘트라이(Try)’를 불렀다.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출연시켜 가공되지 않은 감동을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변두리 휴대전화 가게 영업사원, 자폐증을 앓는 시각장애인, 84세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깜짝 놀랄 실력을 보며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듦을 이겨냈을까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다. 이런 꾸미지 않은 감동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국내에서도 슈퍼스타 K, 프로듀스 시리즈 등 유사 프로그램들이 제작됐다. 초창기에는 노숙인으로 지내면서도 성악가의 꿈을 키운 최성봉 씨 등도 발굴됐으나, 돈과 시청률에 매몰된 관련 업체들로 인해 점차 연예인 지망생들이 재주를 뽐내는 장으로 변질돼 갔다. ▷프로듀스 시리즈를 제작한 CJ ENM의 음악전문채널 엠넷(Mnet)의 PD 2명이 최근 구속됐다. 특정 후보가 합격하게 투표 결과를 조작하고, 연습생을 출연시킨 기획사로부터는 유흥업소에서 수천만 원 상당의 향응을 받았다고 한다. 구속된 PD들은 최종 라운드에 오른 20명의 연습생이 경쟁도 하기 전에 자신들에 의해 이미 순위가 정해진 소위 ‘PD픽(pick·선택)’이었다고 시인했다. 20명을 추리는 과정에서 경연곡을 미리 알려준 정황도 나오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쟁이 있고, 승자보다는 패자가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경쟁이 공정하다면 떨어졌더라도 힘을 내 다시 도전하면 된다. 하지만 그 믿음이 물정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고, 이미 짜인 각본이 존재한다면 누가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을까. 한 연예 관련 회사의 나쁜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청소년들에게 가한 상처가 너무나 크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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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재가 자백한 이유? 여자 좋아하다 휘말려서…”[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

    《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까. 14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을 강간·강간미수했다고 자백한 이춘재가, 안 나와도 그만인 자리에 나와 결국 자백을 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이었을까. 국내 1세대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가)인 이수정 교수(55)는 “조사팀이 면밀히 연구한 뒤 여성 프로파일러를 투입한 게 주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춘재 조사에는 그의 제자인 프로파일러들이 상당수 참여했다.》 ―이춘재가 유전자(DNA) 증거 제시, 프로파일러와의 신뢰 형성 등 때문에 자백했다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휘말려서 그런 거다.” (휘말려서?) “이춘재는 공소시효가 다 끝났기 때문에 자백을 할 이유가 없다. 사실 프로파일러들과의 면담도 안 나오면 그만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백받는 게 쉽지 않을 거라 봤다.” (그런데 왜 나온 건가.) “초반에는 DNA 검사란 게 얼마나 확실한 증거인지를 설명하는 데 시간을 좀 보냈다. 그런 얘기를 주로 여성 프로파일러가 많이 했는데, 여성과 얘기하는 자리가 생겼다는 게 이춘재가 계속 면담에 나온 이유라고 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이춘재는 성도착증으로 연쇄 성폭행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렇게 성적인 관심이 많은 사람이 20여 년간 교도소에 있었다. 그러다 수사관을 떠나 여성과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기니 그것만큼 흥분되는 일이 없었을 거다. 그렇게 자리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말린 거다. 결과적으로…. 그런 부분을 수사팀이 굉장히 열심히 분석하고 준비해서 공략한 게 성공한 것 같다.” ※조사에는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심리분석을 맡았던 공은경 경위(40·여) 등 남녀 베테랑 프로파일러 9명이 투입됐고 이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다. 이춘재는 자백 직전 여성 프로파일러에게 “손 좀 잡아 봐도 되느냐”고 물었고, 프로파일러는 “조사가 마무리되면 악수나 하자”고 응대했다. ―이춘재 같은 희대의 살인마가 어떻게 수십 년간 1급 모범수로 지낼 수 있는 건가. “교도소 안에는 여자가 없으니까…. 물론 체격이 작기 때문에 감방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맞았을 테니 조심도 했을 테고…. 범죄자마다 특성이 있는데 이춘재는 성적인 욕망과 연관된 것이 아니면 온순한 사람이다. 성폭행이 목적이었고, 성폭행을 하다 보니 살인까지 간 경우다. 범죄자들도 일반적인 사고는 보통 사람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단지 자기가 흥미를 갖는 부분에서 아주 다른 양식으로 반응할 뿐…. 교도소 안에서도 음란물을 갖고 있던 걸 봐도 알 수 있다.” (교도소에 어떻게 음란물이 들어갈 수 있는지 의아하긴 하다.) “하하하. 교정본부에서 더 이상 그 얘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더라.” ※최근 출소한 한 수감자에 따르면 편지 왕래가 자유로운 허점을 이용해 마약을 녹인 물에 적셔 말린 종이에 편지를 써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춘재는 범행 시 같은 방식을 거듭 사용했는데 그러면 잡힐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걸 모를 수 없는 것 아닌가. “성도착적인 면도 있고, 시그니처(범행 인증)이기도 한데…. 모르지는 않았을 거다. 검거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알았겠지만 꼭 해야 욕망이 풀리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는 거다. 같은 스타킹도 이춘재는 피해자 손목을 묶을 때 주로 썼는데, 연쇄살인범 강호순은 목을 조르는 데 썼다.” (왜 굳이 스타킹을?) “표현이 적절치는 않지만 스타킹은 느슨하기 때문에 살인에 효과적인 도구가 아니다. 그래서 구치소에서 강호순에게 물었다. 스타킹을 사용한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몰라요’라고 할 게 뻔해 그 대신 ‘목을 묶은 뒤에 뭘 했냐’고 물었다.” (뭐라고 하던가.) “담배를 피우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하더라. 죽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을 보는 게 더 큰 이유였던 거다. 그래서 금방 죽지 않는 스타킹을 선택한 거고….” ―화성 8차 사건의 범인으로 20년간 복역한 윤모 씨(52)가 다음 주 중 재심 청구를 할 예정이다. 가혹행위도 있던 걸로 보이지만 살인을 허위 자백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미국에서도 1980년대 DNA 검사가 일반화되면서 많은 살인 사건의 범인들이 진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인보다 장애인, 미성년자 등에게서 허위 자백이 많이 발생한다. 수사관이 몰아붙이는데 끝까지 저항을 못 하는 거다. 일명 ‘수원 노숙 소녀 살인사건’도 가출 청소년들이 수사기관의 강압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한 경우다.” (한 명도 아니고 어떻게 여러 명이 전부 허위 자백을 할 수가 있나.) “16세 이하 아이들은 의사결정 능력이 성인 같지 않다. 자백하면 집에 보내주겠다는 말에 한 아이가 너무 힘드니까 허위 자백을 했고,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그 허위 진술서를 보여주며 이렇게 답하라고 했다. 그래서 다 비슷하게 된 거다.” ※2007년 5월 경기 수원고에서 10대 소녀가 죽은 채 발견됐다. 검경은 가출 청소년 5명과 지적장애인 2명을 범인으로 몰았으나 모두 허위 자백으로 드러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장애인도 비슷한 이유인가. “수원 사건 당시 경찰은 지적장애인과 조현병 환자 두 명도 범인으로 몰았다. 공범이라고…. 사리분별력이 떨어지는 데다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변호사 도움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계층에서 허위 자백이 많이 생긴다. 윤 씨도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지 않았나.” (국선변호인은 뭐하고 있었기에….) “국선변호인? 윤 씨의 첫 국선변호인은 재판에 나오지도 않았다. 그 다음 국선변호인은 사건 기록도 안 보고 장애인이니 관대하게 처분해 달라고만 하고…. 사비로 변호사를 쓸 수 있었다면 허위 자백을 당할 리도 없다.” ―허위 자백이 아니라면 당시 수사관들이 지금 들고일어났어야 하는데 조용하다. “들고일어나면 자기가 그랬다는 걸 다 드러내는 건데 누가 하겠나. 다 어디에 숨어있겠지. 공소시효도 다 끝났으니까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이나 청구해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지만, 연쇄살인 등 흉악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형 집행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아… 그 질문은 너무 어렵다. 아직도 고민하고 있고…. 내가 천주교 신자고,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단체의 이사를 맡고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사형제에 반대한다.” (그런데 왜 고민인가.) “면담 중에 강호순이 나에게 물어본 게 있다. 그게 잊혀지지 않는다.” (뭘 물었기에….) “우리나라에서 사형을 집행하느냐고…. 그 순간 ‘아, 이 사람들이 남은 그렇게 죽여 놓고도 자기 목숨은 신경을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형제가 폐지되면 이제는 아무 두려움이 없어지는 건데…. 끔찍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그런 공포심마저 덜어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깝게 죽어갔는데…. 사형제 폐지가 과연 정당한 건지 잘 모르겠다.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것과 사형제를 폐지하는 건 다른 것 같다.” ―수많은 범죄자와 흉악범들을 봤는데…. 당신은 사람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나. 교육이나 교화로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믿나. “심리학자 중에는 아마 사람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나도 그중 한 명이고…. 인간의 본능을 인정하는 쪽인데, 인간의 본능 자체는 착한 쪽은 아니고 욕망 충족적이다. 성범죄자는 가장 욕망 충족적인 부류인 거고….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히 범죄자들은 더더욱. 그 대신 관리는 될 수 있다. 그래서 전자발찌 등도 불가피하지만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스토킹방지법이나 인권 침해 논란이 있지만 범죄를 저지른 정신질환자들에 대해서는 강제 치료도 필요하다고 보는 거다. 국가가 공공의 안전을 유지해 주지 않으면 누가 하나.” ―이춘재 같은 흉악범을 막기 위해서라도 스토킹방지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귀가하는 여성을 쫓아가 집에 침입하려고 했던 일명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의 남성이 1심에서 강간미수는 인정되지 않고 주거침입만 실형을 선고받았다. 강간의 착수가 없었기 때문에 강간미수인지 강도미수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거다. 온 국민이 폐쇄회로(CC)TV를 봤는데…. 그래서 스토킹방지법을 만들어 예비 단계에서의 행위도 처벌하자는 거다. 이춘재도 귀가하는 여성 뒤를 쫓아가 범행을 저질렀다. 스토킹방지법이 있다면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잡아서 처벌할 수 있다. 법안은 제출돼 있지만 이번 국회는 사실상 다 끝났고 내년 총선 뒤에 다시 추진할 계획이다.” ―당장 내년 말에 조두순이 출소한다. 이미 얼굴이 공개됐는데 동네 주민들이 불안해서 살 수 있을까. “외국에는 중간처우시설이라는 게 있는데, 출근할 때는 전자발찌 등을 차고 나가고 퇴근 후에는 반드시 들어와서 아침까지 못 나가게 하는 일종의 강화된 기숙사 정도로 보면 된다. 안에서는 술도, 음란물도 금지시키고….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나.”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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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액셀 더 밟는 황색 신호[횡설수설/이진구]

    시민의식을 가늠하는 척도로 빠지지 않는 것이 교통 기초질서다. 황색 신호에 대한 인식이 대표적인데 녹색에서 황색으로 바뀔 때 운전자들이 계속 가는지, 멈추는지를 보면 그 사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영국 운전자들은 황색은 정지 신호인 적색과 동일하게 여긴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황색을 ‘곧 적색으로 바뀌면 못 지나가니 빨리 지나가라’는 것으로 여기는 운전자들이 많다. 황색 신호로 바뀌면 급가속을 해 쏜살같이 사거리를 통과하는 운전자가 빈번하다. 좀 막힐 기미가 보이면 ‘나 하나라도 지나가야 한다’며 꼬리물기를 해 교통 체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녹색에서 황색으로 신호가 바뀌는데 차가 사거리 직전에 있을 때를 ‘딜레마 존’이라고 부르는 운전자들이 있다. 빠르게 지나갈지, 멈출지 순간적으로 고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고민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황색 신호는 녹색의 연장이 아니라 적색의 시작을 의미한다. 단지 갑자기 신호가 바뀌면 사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준비 시간을 준 것뿐이다. 따라서 교차로 입구의 정지선 진입 전이면 반드시 즉각 멈추고, 이미 조금이라도 정지선을 지난 상태라면 신속히 밖으로 나가야 한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은 ‘황색 신호 시 교차로나 횡단보도의 정지선 직전에 정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사 중이어서 정지선이 없는 경우에도 황색 신호가 켜지면 멈춰야 한다. ▷황색 신호에 교차로에 진입하는 것은 법 위반 여부를 떠나 사고를 자초하는 행위다. 특히 좌회전의 경우 교차로를 미처 빠져나가기 전에 적색 신호로 바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다른 방향에서 직진 대기하던 차량이나 오토바이가 녹색으로 바뀌자마자 급출발할 경우 충돌하는 사고가 비일비재하다. 신호 위반 사고는 12대 중과실에 포함돼 경우에 따라 보험 적용도 못 받고 피해자와 합의해도 형사 처벌을 받는 중범죄다. ▷25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한 사거리에서 학생들을 태운 통학버스가 다른 차와 부딪혀 고3 수험생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다쳤다. 신호등이 황색에서 적색으로 바뀔 때 버스가 멈추지 않고 무리하게 직진한 것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한다. 앞서 5월 중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도 청소년들이 탑승한 축구클럽 승합차가 황색 신호에 교차로에 진입했다가 사고를 내 초등학생 2명이 숨지고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너무도 당연하고 간단한 신호 규정을 무시한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채 피어나기도 전에 스러졌다. 사실 신호등이 있든 없든 사거리 진입 시에는 속도를 줄이는 것이 원칙이다. 기본 중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대가가 너무 크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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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이 다르다고… 가게에 침 뱉고, 불매운동은 아니지 않습니까”[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

    《2019년 대한민국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한 사회가 됐다. 다른 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편끼리도 지적을 하면 문자·댓글 공격을 폭탄처럼 쏟아붓는다. 양식 있다던 진보 지식인들도 무서워서인지, 동의해서인지 별말이 없다. 조국 사태로 격화된 이런 상황은 재벌 회장도, 고위 공직자도 아닌 떡볶이 장수에게까지 튀었다. 김상현 국대떡볶이 대표(39)는 15일 “페이스북에 해시태그 하나 올린 게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 ―조국 사태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가 됐는데 어떻게 시작된 건가. “원래 페이스북에 평소 일상이나 신앙, 정치 등과 관련된 이런저런 글을 많이 썼는데 밑에 ‘#코링크는 누구 거’라는 해시태그를 붙였다. 최순실 사태 때 ‘#그런데 최순실은’이란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다 지난달 말 해시태그를 ‘#코링크는 조국 거’로 바꿨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핵심 인물인데 가족들만 조사받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걸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로 보이는 사람이 공유하면서 일이 커졌다. 내 글을 공유해 가면서 ‘국대떡볶이 대표라는 사람이 코링크가 조국 거라고 합니다. 불매운동 갑시다’라고 한 거다.” (문 대통령 지지자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내 글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 사람 페이스북에 가서 게시물을 볼 수 있었다. ‘이니 건드리면 눈알이 터져’ 이런 게시물도 있고….” (본문도 아니고 단지 해시태그 때문에 시작됐다는 말인가.) “그렇게 시작됐다. 단지 해시태그를 보고….” ※‘이니’는 문 대통령 지지자들이 대통령을 부르는 애칭이다. ―이런 논쟁을 겪어본 적이 없었을 것 같은데…. “당연히….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위장약을 먹을 정도였고, 빨리 불을 끄고 싶었다. 가맹점주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니까. 그런데 좀 생각해보니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더라. 누구나 개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그걸 이유로 불매운동을 당해야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 “처음 하루 이틀 정도는 매출이 떨어졌는데 그 다음부터는 구매운동이 일어 지금은 가맹점별로 매출이 평균 50∼100% 정도 늘었다. 가맹점주들이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어했다. 본사는 물론이고 각 가게로 전화를 해 쌍욕을 하고, 가게에 가래침을 뱉고 가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찾아와서 업주를 무섭게 노려보고 가기도 하고…. 겁에 질려 ‘대표 때문에 나 망하게 생겼다. 어떻게 하느냐’고 하소연하는 점주들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 타협을 하는 게 보통 아닌가. “주변에서 사과하고 끝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말했지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더라.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 무릎을 꿇으라는 식인데…. 내 생각을 밝힌 것이 불매운동을 당해야 할 일인가. 그리고 대체 누구에게 사과하라는 건가. 친문 지지자들? 그 사람들은 내 약점이 가맹점에 피해가 가는 거란 점을 알기 때문에 불매운동을 무기로 쓴 건데…. 우리 가맹점주들이 오히려 부당하게 재산권을 위협받은 피해자 아닌가. 보호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그래서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더 강하게 나갔다.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글을 올리고, 불매운동 하자는 사람들 페이스북에 들어가 게시물 캡처해서 내 페이스북에 올렸다. 언론에도 알리고….” (국대떡볶이가 호남에 가맹점이 두 개뿐이라 현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비난도 있더라.) “하하하. 정말 그렇게 말하는 게 잘못된 건데…. 내가 고향이 대구고 보수라 호남에 가게를 안 연다고 한다. 사업하는 데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도 그렇고 모든 사업은 인구 수와 시장 크기에 비례할 수밖에 없는데….” ※국대떡볶이 가맹점 64곳(자체 홈페이지 기준) 중 호남은 2곳, 부산 대구 경남·북은 8곳이다. ―페이스북에 쓴 글 때문에 시민단체에서 고발까지 당했다. “그렇게 알고는 있는데… 나도 언론을 통해 경찰에 접수됐다고 간접적으로 들었을 뿐 아직 고발장을 직접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정확한 내용은 아직 잘 모른다. 단지 고발장을 받으면 대응하려고 변호사는 선임했다. 시민단체에 고발당한 것과는 별개로 나도 악플을 단 사람을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했다.” (어떤 내용인가.) “내가 자유한국당 공천을 받았다고 하더라.” ※시민단체인 ‘적폐청산 국민참여연대’ ‘가짜뉴스 국민고발인단’ ‘자유한국당척결 국민고발인단’ 등은 지난달 27일 김 대표가 문 대통령과 조 전 장관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명예훼손을 통해 노이즈 마케팅을 한다는 등의 이유로 경찰에 고발했다. ―일각에서는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고도 한다. “하…. 정말 앞뒤 안 가리고 하는 무조건적인 비난인데…. 세상에 대통령 걸고넘어지는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회사를 본 적이 있나. 회사는 세무조사 등 권력에 의해 공격받기가 아주 쉽다. 그런데 대통령을 향한 노이즈 마케팅이라니…. 원래 매장도 좀 새롭게 구성하고 사람도 영입하는 리뉴얼을 막 실행할 참이었는데 이 일 때문에 오히려 늦어지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매출 규모는 줄었지만 이 사안이 터질 당시에 회사는 흑자였다. 설사 망하고 있다고 한들 대통령을 걸고넘어지면 더 빨리 망하지 살아나겠나.”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국대떡볶이 가맹점 수는 2015년 99개에서 2017년 74개로, 같은 기간 매출은 80억 원에서 51억 원으로 떨어졌다.―가맹점 중 하나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소속 노조의 압력으로 퇴출될 위기라고 했던데 사실인가. “서울 종로구 서울대 치과병원 지하 1층 구내식당을 위탁운영하는 업체가 있다. 이 업체가 우리와 기본 2년에 이후 1년씩 연장하는 조건으로 가맹점 계약을 맺고 떡볶이를 팔았다. 지난달 16일 문을 열었는데 다른 지역처럼 단독 매장을 차린 건 아니고 주방시설을 이용해 식당 메뉴에 추가해 판 것이다. 병실 배달 서비스도 하고…. 초반에는 하루 50만 원 정도로 매출이 아주 좋았다. 홍보만 좀 더 하면 하루 100만 원까지도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 크기에서 100만 원이면 대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 열고 보름 정도 지났는데… 그때가 내가 문 대통령 비판한 걸로 한창 이슈가 될 때였다. 갑자기 업체에서 면담 요청이 왔다. 병원 측에서 국대떡볶이 상호를 안 보이게 하고, 병실 배달도 하지 말라고 한다고…. 병원 노조가 그렇게 항의한다는 거였다. 이후 매출이 하루 10만 원 정도로 떨어져 계약을 해지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하루 10만 원이면 한 사람 인건비도 안 나오는 수준이니까…. 해지하면 패널티나 비용은 어떻게 되는지 그런 문의를 한 거다.” ※서울대 치과병원 지부는 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소속이다.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가봤는데 아직은 영업을 하고 있던데…. “업체 이야기를 듣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이런 내용을 언론에 제보했다. 그 후 병원과 노조에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자 자신들은 그런 적이 없다며 한발 빼더라. 이 때문에 가맹점은 폐점도 못 하고, 전처럼 제대로도 못 하고 애매하게 영업을 하고 있다. 중간에 낀 가맹점이 사실 제일 불쌍하다. 노조가 겁이 나 폐점도 못 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운영하고 있으니까….” (노조가 폐점을 압박했다면서 업체는 겁이 나 운영을 하고 있다는 게 무슨 말인가.) “처음과 달리 사안이 커져 지금 실제로 폐점을 하면 병원과 노조에 다시 엄청난 비난 여론이 쏟아질 가능성이 크다. 병원 구내식당을 위탁 운영하는 업체 입장에서는 그런 점도 신경을 안 쓸 수 없을 거다. 사실 피해자인데…. 중간에서 곤란한지 ‘우리가 언제 해지한다고 했느냐’라고도 하더라.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가맹점이 피해자이기 때문에 진짜 해지한다고 하면 위약금 같은 건 안 받으려 했다.” ―과거 일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얼굴을 누드화에 합성하고, 잘린 머리를 쇠막대기에 매달아 시위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문 대통령 비판은 표현의 자유를 넘는 것이라며 당신을 비난한다. “나는 이 점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통령 얼굴을 누드화에 합성하고, 머리를 죽창에 매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패륜이고 인격모독이라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나 또한 문 대통령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고…. 하지만 누군가의 사상이나 생각은 비판할 수 있다고 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김상현 대표=대구대 체육학과 재학 중 입대.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몇몇 사업을 했으나 실패한 뒤 고향 떡볶이집 할머니에게 떡볶이 만드는 법을 배워 2008년 12월 이화여대 앞에 포장마차를 차렸다. 이듬해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국대떡볶이 1호점을 냈는데 1년 반 만에 매장이 60여 개로 늘 정도로 성공했다. ‘국대’(국가대표의 줄임말)는 투박하고 한국적이면서 좋은 의미를 가진 이름을 찾던 중 친구와의 대화에서 우연찮게 떠올랐다고 한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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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트리밍 전쟁[횡설수설/이진구]

    “겨울이 왔다.” 지난해 11월 미국 NBC는 ‘스트리밍 전쟁(The Streaming Wars)’이란 기획기사를 보도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앞세운 넷플릭스 디즈니 아마존 워너미디어 등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의 경쟁관계를 다뤘는데, 각 기업을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스타크, 라니스터 등의 가문으로 비유했다. 지난해 8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며 할리우드 싹쓸이에 나선 넷플릭스는 왕국을 삼키려는 ‘백귀(White Walkers)’로 묘사됐다. ▷스트리밍은 인터넷에서 영화나 음악 등을 다운로드 없이 실시간으로 즐기는 기술이다. 전송되는 데이터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처리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 서비스를 통해 영화나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넷플릭스가 대표적이다. 세계 최대의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회사인 넷플릭스의 유료 가입자는 1억5000만 명에 달한다. ▷디즈니와 애플이 넷플릭스에 도전장을 던지면서 온라인 스트리밍 시장이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다음 달 애플이 ‘애플TV+’를 출시하면서 가격을 월 4.99달러 수준으로 책정하자 디즈니도 당초 월 6.99달러였던 ‘디즈니+’의 요금을 월 4.72달러로 대폭 할인한 것. 가장 낮은 넷플릭스 베이직 요금(월 8.99달러)의 절반 정도다. 내년에는 워너미디어의 ‘HBO맥스’와 NBC유니버설의 ‘피콕’도 스트리밍 시장에 뛰어든다. ▷스트리밍 전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가 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오랜 기간 각 기업들이 콘텐츠 제작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 인수합병을 통해 작품과 지식재산권을 확보해 왔는데 이제는 가입자 확보를 위한 출혈 경쟁으로 넘어간 것이다. 좋은 콘텐츠만 갖고 있다면 경쟁자 모두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벌어지는 저가 출혈공세를 보면 시장 지배자가 되지 못하면 죽는다고 보는 쪽이 더 많은 것 같다. ▷미국의 장난감 회사 ‘토이저러스’는 ‘가장 저렴한 곳’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가장 인기 있는 장난감을 공급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팔기도 했다. 그 덕분에 한때 세계 최대의 완구 유통업체로 등극했지만, 이후 아마존 월마트 등 자금력이 더 큰 경쟁자가 나오면서 내리막을 걸었고 2017년 파산 신청을 했다. 전문가들은 스트리밍 시장의 출혈 경쟁이 거의 원가에 근접하는 수준까지 내려갈 것으로 보고 있다. 즐겁게 보고 있는 저 영화 뒤에서 불꽃 튀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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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인 누명 옥살이[횡설수설/이진구]

    2000년 8월 전북 익산에서 발생한 ‘약촌 오거리 살인 사건’은 택시기사 살인범으로 지목된 최모 씨(당시 16세·다방 커피배달원)가 자백해 10년을 복역한 사건이다. 출소한 최 씨는 2013년 재심을 청구했고, 3년 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경찰은 최 씨를 여관으로 끌고 가 자백을 강요했다고 한다. 최 씨는 보상금 8억4000여만 원을 받았지만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재심 증인 출석을 요구받은 수사팀원 한 명은 심리적 압박에 자살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된 이춘재(56)가 모방범죄로 결론 났던 8차 사건(1988년 9월 16일 발생)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당시 진범으로 지목된 윤모 씨(52)는 재판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허위 자백했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 씨는 20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춘재가 자백한 1988년 12월과 이듬해 7월 수원에서 발생한 2건의 여고생 살인 사건도 당시 부녀자 폭행범을 용의자로 모는 등 부실 수사 끝에 미제로 남은 상태였다. ▷화성 8차 사건은 다른 사건과 달리 피해자가 외부가 아닌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옷가지로 결박당하거나 재갈이 물려 있지도 않았다.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에서 중금속이 검출됐는데, 경찰은 이를 근거로 인근 용접공 등 400여 명의 체모를 채취해 피해자 오빠의 친구였던 농기구 수리공 윤 씨를 진범으로 특정했다. 경찰은 검식에 사용한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을 소개하며 과학수사의 쾌거라고 자화자찬했지만, 지금은 허점이 많아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다. 당시 이춘재는 피해자 집 한 집 건너에 살고 있었다. ▷연쇄살인범이나 사이코패스들은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나 영웅심리 때문에 다른 사건도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20명을 살해한 유영철은 2004년 2월 발생한 ‘이문동 살인 사건’을 자신이 했다고 했는데, 2년 뒤 진범이 잡혔다. 하지만 이춘재의 자백은 공소시효가 지나 수사에 혼선을 줄 여지가 없고, 이미 30여 년이 지난 무기수 상태라 영웅심리의 발로일 가능성도 작다는 시각이 많다. ▷억울한 옥살이만큼 사법 정의를 불신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윤 씨가 실제 무고한지는 추후 밝혀지겠지만, 만약 누명이라면 30년간 살인범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은 무엇으로 보상받아야 하나. ‘약촌 오거리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 ‘재심’에는 진실을 찾으려는 한 형사가 “차라리 지옥이 낫지. 거기는 지은 죄만큼만 벌 받잖아”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현실보다 지옥이 더 공정해서는 안 된다.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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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언주 의원 “왜 싸우냐고? 운동권의 위선과 이중성에 화가 나서…”[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

    《지난달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강행하자 야권에서는 삭발 릴레이가 이어졌다. 그 물꼬를 가장 먼저 튼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더불어민주당 출신인 이언주 의원(47)이다. 민주당 재선 의원(19, 20대)이던 그는 2017년 4월 대선을 한 달여 남기고 탈당한 뒤 국민의당, 바른미래당을 거쳐 현재 무소속이다. 속된 말로 참았으면 여당 의원으로서 편했을 텐데 그는 민주당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뛰쳐나왔고, 삭발까지 한 걸까. 지난달 30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만난 그는 “운동권의 위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공교롭게 오늘 인터뷰 전에 문 대통령을 내란선동으로 고발하고 왔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제7차 검찰개혁 촛불문화제’ 이틀 전에 문 대통령이 검찰 개혁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주최 측이 200만 명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참가자가 급증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검찰청 벽을 향해 레이저빔을 쏘며 집단의 위력으로 국가기관의 기능을 방해했다.” (그게 내란선동의 요건이 되나.) “살아있는 권력이 친위대 수만 명을 동원해 검찰의 기능을 마비시키려고 국헌을 어지럽혔다. 시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집회·시위는 약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한 것이다. 서초동 집회는 그런 차원을 넘어 국가기관인 검찰의 수사를 방해하려는 목적이 너무나 분명하다. 대통령은 그걸 선동했고…. 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이인영 원내대표도 검찰에 대한 협박으로 정당한 공무집행을 방해한 혐의로 고발했다.”※우리 형법은 내란을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한 폭동(제87조)으로, 국헌문란은 헌법이나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행위(제91조)로 규정하고 있다. ―정치적 입장 차이 때문에 너무 과하게 보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이 상황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다. 권력이 친위부대를 시위에 나서게 하기 시작하면 이게 바로 중국 문화혁명의 홍위병이 만들어지고, 나라가 파시즘으로 가는 길이다. 문 대통령은 ‘검찰이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수사하고 있는데도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이게 친위 시위를 선동한 게 아니면 뭔가. 대통령이라면 오히려 그런 시위를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국회, 법원 등 주요 시설의 100m 안에서는 집회·시위를 할 수 없다. 그런 것도 다 무너졌다. 대통령이 그래서는 안 된다.” ―진보는 다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했다. 민주당에 있을 때 뭘 봤기에…. “위선…, 그 위선을 너무 많이 봤다.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아무런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혈세로 자기 패거리들을 취직시키고…. 지자체에는 일용직 계약직 등 일자리가 많다. 그런 것도 다 자기 선거랑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준다. 그냥 다 선거 조직이다. 검찰 개혁 방안이라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이유도 듣고 나서 정말 기가 막혔다.” ―뭐라고 하던가. “나도 검찰 개혁은 찬성한다. 하지만 공수처 설치는 진정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공수처장을) 임명하지 않으면 모를까.” (자신들에게 임명권이 없는 공수처를 만들 리가 있겠나.) “그렇겠지. 대통령이 공수처장을 임명하면 공수처가 집권세력에 꼼짝 못하고 줄을 설 수밖에 없지 않나. 그게 국민이 원하는 검찰 개혁 모습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서 만약 내가 틀렸다면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누구한테? 당에서 높은 사람인가.) “그렇지, 높은…. 그랬더니 한동안 억지 주장만 하다가 나중에는 ‘야, 우리가 집권할 거잖아. 이제 그만해’라고 하더라. 아… 정나미가 떨어졌다.” ―민주당에서는 북한 인권 문제를 말하는 것도 일종의 금기 같던데…. “얘기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얘기하는 자체를 굉장히 싫어한다. 아주 불편해하고…. 진보라면 속으로야 어떻든 자유와 인권, 이런 걸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그런지 안 물어봤나.) “물어봤다. 토론도 많이 했고. 내가 원내대변인도 하고, 말을 좀 잘해서 당에서 TV 등 밖에 많이 내보냈다. 근데 내가 수긍이 돼야 무슨 말이라도 할 것 아닌가. 북한 인권 문제는 너무 괴로워서 안 나가려고 피하기도 했다.” ―왜 안 된다고 하던가. “에휴, 그러니까… 북한 인권은 북한 주민들이 잘 먹고 잘살면 나아지는데, 그러려면 우리가 북한에 더 많이 지원해 줘야 한다는 거다.” (그게 뭔 소리인가.) “북한 인권 문제를 지적하면 북한 정권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고, 그러면 남북관계가 안 좋아져 북한 사람들을 도와줄 길이 봉쇄된다는 논리였다.” (인권이 이런저런 이유가 있으면 말 안 해도 되는 가치인가.) “억지스럽고… 뭔가 주객이 전도된 거다. 그런 일이 많아지다 보니 당 안에서 좌충우돌하는 건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운동권에 대해 전혀 모르고 들어간 건가. “처음에 민주당에 들어갔을 때는 그들이 좀 멋있어 보였다. 뭔가 기득권에 분노하고 치받으면서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같은…. 잘 몰랐을 때지. 그런데 지나면서 보니까 운동권들의 특별한 문화가 있었다. 굉장히 획일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자신들이 정한 것을 벗어나면 굉장히 잘못된 것처럼 대하고…. 자신들이 옳다는 것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었다. 논리나 사실로 설명이 안 되는 게 너무 많았다. 조국 사태에서 극명하게 보고 있지 않나. 당 안에서 뭘 좀 변화시켜 보자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비운동권이 민주당 안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민주당에서 비운동권은 일종의 장식품 같았다.” ―여성 의원으로서 삭발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솔직히 당신이 머리 깎는다고 조 장관이 사퇴할 리는 없지 않나. “답답하니까…. 조국 사태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다. 그걸 진영논리로 만들어서 자기편 사람들을 몽땅 비양심적인 전선에 몰아넣는 저 행위에 분개했다. 그게 과연 지도자로서 할 일인가.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냥 ‘와, 저럴 수가…’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도 없었다. 어느 정도는 (운동권의 모습을) 알았기 때문에 탈당했지만 훨씬 더 뻔뻔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저들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더 강한 방법은 생각해 보지 않았나.) “단식도 생각은 했다. 하지만 사퇴까지 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내가 아는 운동권들의 스타일로 보면 아마 끝까지 갈 거다. 누구 하나 굶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잘못하면 (조 장관은) 대법원 확정 판결 때까지 버틸 수 있다고 본다. 누가 구속돼도 아마 탄압받는다며 투쟁할 거다.” ―당신을 시작으로 삭발 릴레이가 이어졌는데 자유한국당이 이어가면서 좀 희화화됐다. “국민이 보기에 그동안 누려왔던 사람들이 머리를 깎는다고 하니까…. 국민들은 문재인 정권을 심판하고 싶어 한다. 또 자격이 되는 곳에 힘을 몰아줄 생각도 있다. 문제는 한국당이 반성이나 쇄신은 안 하고 되레 ‘우리가 (문재인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거다. 국민이 보기에 어이가 없으니 희화화될 수밖에…. 내가 한국당에 안 가는 이유도 그런 거다.” (그래도 당신이 한국당에 갈 거라는 말은 계속 나온다.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현실이 있는데…. 협력하지 않고 어떻게 문재인 정권을 심판할 수 있나. 협력은 해야 하는데 한국당을 쳐다보면, ‘당신들도 똑같은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고…, 너무 괴롭다. 그래서 제발 반성과 쇄신을 좀 하라고 말은 하는데….” ―왜 반성과 쇄신을 안 한다던가. “할 거라고 하더라. 기다려 보라고….”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사람들은 아직도 뭘 얘기하면 친박·비박 탓을 한다. 내가 볼 땐 비슷한데…. 탄핵이란 엄청난 사태가 벌어졌는데 막판에 뒷발로 문 차고 나왔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게 아니지 않나. 좀 덜할 수는 있겠지만….” ―당신도 친문 지지자들의 문자폭탄을 만만치 않게 받았을 것 같은데…. “하하하. 많이 받았다.” (주 내용이 뭔가.) “그냥 쌍욕이 많다. 대부분.” (왜 그러냐고 물어본 적은 없나.) “굳이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고, 한두 명이면 얘기도 해볼 텐데 이게 조직적으로 오니까…. 예를 들어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내가 오전 10시에 했다면, 정상적인 항의라면 시간 차이를 두고 드문드문 와야 하지 않나. 인지하는 시차가 있으니까. 그런데 하루 종일 조용하다가 밤 10시 ‘땡’ 하면 부르르하면서 몇만 통이 온다. 기계를 돌렸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딱 그친다. 일종의 집단 린치이고 협박인데, 자기들이 원하는 행위로 유도하려고 하는 거지. 내가 침묵을 하든 생각을 바꾸든….” ―조국 사태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 서로 끝까지, 갈 데까지 갈 수는 없지 않나. “(보수 쪽에서는) ‘청와대로 쳐들어가자’ 이런 말도 나오던데, 그런 말은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나라가 끝장나니까. 프랑스혁명도 이후 60여 년간 혁명과 반혁명이 이어지며 엄청난 사람들이 죽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시위 당시에 난 민주당 소속이었는데도 사실 막판에는 좀 겁이 났다. 사람들에게서 어떤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도 봤고…. 나를 포함해서, 정치인들도 사람들을 선동했다. 탄핵 반대쪽도 마찬가지였고…. 정말 극단적으로 가기 전에 정신 차려야 한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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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 태풍[횡설수설/이진구]

    1998년 제9호 태풍 ‘예니’는 ‘이상한 태풍’으로 불렸다. 대만 해상부터 한반도를 향해 거침없이 직진하더니 10월 1일 전라남도에 닿자마자 갑자기 물러난 것. 이 정도만으로도 사망·실종 57명, 이재민 4800여 명이 발생했다. 만약 한반도를 관통했다면 최대 규모의 피해를 입힌 태풍 중 하나가 됐을 거라는 분석도 나왔다. ▷언젠가부터 가을이 ‘슈퍼 태풍’의 계절이 되고 있다. 여름 태풍을 능가하는 위력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물폭탄’이 특징이다. 예니는 하루 최대 516.4mm를 퍼부어 역대 태풍 중 세 번째로 많은 비를 내렸다. 올해도 가을 태풍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3일 소멸된 태풍 ‘미탁(MITAG)’은 동해안 지역에 300mm가 넘는 물폭탄을 퍼부었다. 삼척에 341mm가 내려 마을 곳곳이 토사에 잠기는 등 4일 오후 8시 현재 전국에서 12명이 사망하고, 12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태풍 ‘링링’과 ‘타파’에 이어 한 달 새 세 번의 태풍 피해를 입은 전남은 추가 태풍 우려에 전전긍긍하는 상태다. ▷가을 슈퍼 태풍은 인간이 만들어낸 재난이라는 지적이 많다. 가을 태풍이 강한 것은 북태평양의 수온이 8월 말부터 9월 초 사이에 가장 높아지기 때문. 수온이 높을수록 태풍의 힘이 커지는데,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에 따르면 태풍 에너지가 가장 강한 지점이 10년마다 50∼60km씩 적도에서 북상해 지난 30여 년 동안 약 160km를 올라왔다. 환경 파괴가 대기와 해양 온도를 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5년 9월 위르겐 트리틴 독일 환경부 장관은 “도대체 몇 번이나 ‘카트리나’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고 미국을 비난했다. 지구 온난화가 초대형 태풍을 초래한다는 연구가 잇따르는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미국이 산업 보호를 이유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교토의정서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 한 달 전 미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사망자 1600여 명의 피해를 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국이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드는 친환경 에너지보다 화석연료를 써야 한다며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했다. 중국의 화력발전소 건설은 여전하고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할 태세다. 한반도 주변 바다 수온은 10년 전보다 2도가량 높아졌다고 한다. 뜨거워진 바다는 해수면 상승, 태풍과 해일 등 기상이변의 원인이 된다. 이런 추세로 해수 온도가 상승하면 제주도 인근에서 태풍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우려가 기우가 아닐 것 같아 무섭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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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남북 축구[횡설수설/이진구]

    1990년 10월 11일 오후,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렸다. 1929년 시작된 경평(京平)축구가 1946년 중단된 후 44년 만에 평양에서 열린 축구 만남이었다. 당시 세계 최대라는 15만 명 규모의 능라도경기장을 꽉 채운 북한 관중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고향의 봄’을 목이 터져라 불렀는데, 반주를 위해 배치된 악대만 30여 개에 달했다. 1차전은 2 대 1로 북한이, 같은 달 23일 서울에서 열린 2차전은 1 대 0으로 한국이 이겼다. 하지만 민족이 하나 된 감동 앞에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평양에서 열린 첫 남북통일축구대회는 숱한 화제를 낳았다. 한국팀 고문으로 참가한 당시 이회택 포항제철 감독은 경기 전날 6·25전쟁 때 헤어진 아버지 이용진 씨를 40년 만에 만났는데,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의 8강 신화를 쓴 박두익이 주선했다고 한다. 이듬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이 구성됐고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 뉴욕 남북영화제, 남북고위급회담 개최 등으로 이어졌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한국과 북한전이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다. 19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 이후 29년 만의 평양 방문경기다. 조 1위에 오른 북한의 경기력은 물론, 북한 관중의 광적인 응원전도 볼거리다. 북한은 이런 응원에 힘입어 2015년부터 평양에서 열린 7차례의 남자국가대표 축구 경기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한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으로 알려진 김정은이 경기장에 나타날지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기대는 높은데 북한의 태도를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채 보름도 남지 않았는데 2일 오후 현재까지 방북 경로나 인원 등 세부 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확답을 주지 않고 있다. 숙소, 음식, 훈련장, 응원단 참가 여부 등은 물론이고 선수단의 비자 문제조차 아직 해결되지 않아 대한축구협회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도 북한은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로 확정된 대회 장소를 변경한 적이 있다. 2008년 3월 26일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던 2010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 한국과 북한의 경기 장소는 막판에 중국 상하이로 변경됐다. 김일성경기장에서 태극기가 펄럭이고, 북한팀이 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치를 위해 스포츠를 이용하는지, 경기에 이기기 위해 정치를 동원하는지 구별이 안 가지만, 29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날리는 것은 북한에도 도움이 안 될 듯싶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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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셰일가스[횡설수설/이진구]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를 보면 타오르는 불길이 관찰된다고 한다. 미국 텍사스주 이글퍼드와 퍼미언, 노스다코타주 바컨 등 셰일가스전에서 나오는 불길이다.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소비국인 미국조차 다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생산량이 많아, 남는 가스를 태워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장하려면 부피 제약을 극복해야 하는데, 200배 이상의 압력을 가해야 하는 등 비용이 많이 들어 차라리 태워서 재고량을 줄이는 게 낫다고 한다.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가스공사가 2025년부터 15년간 연간 158만 t의 미국산 셰일가스를 수입하기로 했다. 이미 2017년부터 20년간 연간 280만 t의 수입 계약을 맺었는데 또 추가한 것이다. 가스공사는 중동 중심의 수입처 다변화 차원이라고 밝혔지만, 셰일혁명으로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가가 되면서 석유·가스 수출량 늘리기에 골몰해 있는 트럼프 행정부에 선물 보따리를 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셰일은 작은 모래나 점토 크기의 입자로 구성된 층상 구조의 퇴적암이다. 암반 사이사이에 오일(oil)과 천연가스(LNG)를 머금고 있다. 원래 채산성이 낮아 이용되지 않았는데, 2008년 미국에서 새 채굴 기법이 개발되면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양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셰일층이 있는데, 바컨 셰일은 넓이가 한반도의 4분의 1이 넘는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 독주와 자신감은 셰일오일·가스 힘에서 나온다는 분석이 많다. 미국은 2013년 원유 생산량이 수입량을 앞질렀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5년경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를 합한 규모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미국의 해외 원유 수입 중 중동산 비중은 22%에 그쳤다. 더 이상 산유국에 목을 매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6월 오만 해상에서 유조선이 피격되고, 최근 드론 공격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생산이 반 토막이 났음에도 국제 유가가 비교적 차분했던 이유다. ▷미국의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은 저서 ‘셰일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에서 “에너지 수입이 필요 없게 된 미국은 국제사회의 경찰 역할을 포기하고, 세계는 무질서에 빠질 것”이라 전망했다. 스스로 수송로를 확보할 수 없는 국가들이 에너지 수급 불안에 빠지면서, 이를 확보하기 위한 군비 경쟁과 합종연횡을 벌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시리아 철군을 감행하며 “미국은 더 이상 중동의 경찰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70년간 유지됐던 세계 에너지 질서에 셰일혁명이 예기치 않은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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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관 정도 고위공직자라면… 수사 결과 나오기 전에 다 얘기해야”[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우리 정치의 진영 논리를 극명하게 보여준 장이었다. 숱한 의혹을 “불법은 아니다”라며 강변한 여당은 물론이고 이해관계와 진영 논리를 이기지 못한 정의당은 데스노트에 자기 이름을 적고 후회하고 있다. 이런 풍토에서 여당 의원이 실세 후보자를 아프게 지적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그로 인해 3000통이 넘는 문자 폭탄을 맞았지만….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52)은 “국회의원, 청문위원으로서의 의무가 여당 의원에 앞선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 ―먼저, 당신을 공격한 사람들은 이 인터뷰를 보고 청문회 때처럼 또 공격할 수 있다. 대개는 그런 걸 우려해 고사하는데…. “그게 바로 편 가르기인데…, 편 가르기 현상이 나타난 데는 정치권의 책임도 많기 때문에 그분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처음 정치권에 왔을 때 민주당과 진보 쪽에서는 종합편성채널(종편)에 출연하지 않았지만 난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 정도 시달리면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는데 안 바꿨다. 원래 멘털이 강한가.) “강한 건 아니고…. 선거 때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하고, 다 받지는 못해도 가능한 한 답을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 정도로는 바꾸지 않는다.” ―지적이 아프기는 했지만 야당처럼 구체적인 의혹을 일일이 캐물은 것도 아니지 않나. “내가 검사 출신이라 수사도 해 봤지만, 인사청문회에서 사실관계 확인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미 인정된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묻는 식으로 했다.” (그 정도조차 지지층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건가.) “잘했다는 사람도 많지만, 용납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었다. 비록 여당 의원이지만 나는 조 장관에 대한 비판이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공정의 문제는 가장 핵심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질문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당은 후보자를 무조건 방어하는 게 우리 정치 풍토 아닌가. “그런 관행과 문화가 있다. 하지만 나는 국회의원, 청문위원으로서의 의무가 여당 의원의 입장보다 앞선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이렇게 의문을 많이 제기하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후보를 방어하면 자신의 당내 입지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당은 신뢰를 잃는다. 나름대로는 당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정치인이라고 그걸 모를 리는 없고… 현실정치는 그렇게 거룩한 게 아니지 않나. 자기 발등을 찍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당연히 어떤 분들은 ‘금 의원이 정치를 몰라서’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민주당 의원 전부가 방어로만 일관했다면 당 지지율은 더 떨어지고, 한국 정치 전체에 대한 신뢰도 잃었을 거다. 나는 내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소신이 그렇다면 청문회에서의 발언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되지 않나.) “하하하, 예를 들면 조국 장관 퇴진 투쟁을 하라는 건가?” (지적이 목표일 수는 없지 않나.) “청문위원으로서의 책임은 했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거기까지고, 대통령의 인사권은 존중돼야 한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의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정부 감시와 견제이니 그 역할을 하면 될 것 같다.” ―‘청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당신 질문에 조 장관은 ‘있다’고 했다. 청문회 끝나고 지금까지 진심 어린 사과가 있었다고 보나. “음… 앞으로 하시겠지? 전에 우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냥 다 내 책임이라는 식으로 사과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추상적인 사과는 안 된다고…. (조 장관이) 사실관계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하고, 이런 건 잘못됐고… 이렇게 말해주는 게 필요한데… 지금은 수사 중이라 쉽지 않긴 하다. 그런데 나는 기본적으로 장관 정도의 고위공직자라면 수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기 전에 얘기를 해야 한다고 본다.” ―청문회가 끝나고 민주당은 대부분의 의혹이 해소됐다고 했다. 당신이 보기에도 그런가. 해소된 사안이 있다면 설명을 해 달라. “내 생각은 있는데… 답변하기 곤란해서가 아니라, 내가 여당 법사위원이라 수사 중인 상황을 언급하는 건 적절치 않다. 국정감사에서도 원래 재판이나 수사에 영향을 미치는 건 못하게 돼 있다.” (하지만 많이 하지 않나.) “사실 많이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단, 이건 말할 수 있다. 지금 국민이 궁금해하는 건 불법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공정이다. 조 장관이 과거의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한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해명이 없었다고 본다.” ―이번에도 청문회는 무용지물이었다. “자료 미제출이나 증인 불출석같이 청문회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행위를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 검찰이 개입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보수·진보 정부를 가리지 않고 후보자들이 청문위원들에게 자료를 제대로 낸 적이 없다. 의혹을 가리기 힘들다 보니 결국 검찰 손을 빌리게 되고, 검찰의 힘이 점점 더 커진다. 윤석열 검찰총장 청문회에서 그가 거짓말한 걸 문제 삼았다가 (열성 지지자들의 공격으로) 내가 혼이 났는데… 그때 진짜 화가 많이 났다.”―거짓말에 화가 난 건가. “당시 외국에 나간 주요 증인이 검사 출신 변호사였다. 그런 사람이 증인으로 안 나오고 도망가면 변호사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 우리 청문회에는 그런 제재가 하나도 없다. 왜 나가는지 너무나 뻔하지 않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못 하는 사람이 변호사 자격을 갖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그때는 당이 온통 윤 총장 찬사 일색이어서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야당이 문제 삼았지만 우리는 한마디도 대꾸 안 했다. 그러면서 검찰개혁을 하자고 하니 앞뒤가 안 맞는다.” ―청문회에서 “이걸 묻는데 저걸 답하면 화난다. 묻는 사람 바보 취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질문을 이해 못 했을 리 없을 텐데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 “증인 불출석이랑 비슷한 건데… 그런 동문서답에 대한 제재가 우리는 없다. 청문회뿐만 아니라 브리핑, 기자회견에서도 엉뚱한 답을 하면 ‘그건 답이 아니다’라고 질문자가 추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게 약하다 보니 대답이 엉뚱해도 그냥 넘어간다.” (2일 당시 조 후보자가 연 기자간담회에서 그런 대답이 많았다.) “그 기자간담회는 대단히 잘못됐다. 간담회를 여는 유일한 명분이 ‘청문회를 안 열어서 해명할 기회가 없었다’인데 해명은 얼마든지 다른 데서 해도 됐다. 그걸 국회에서 하고, 의원이 사회를 봐주고… 아주 잘못된 거다.” ―개인정보 유출, 피의사실 공표는 당연히 제한돼야 한다. 그런데 여당은 조 장관 관련 정보 유출은 민감해하면서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고교 성적표, 출석 일수 공개는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랬다. 내가 찾아봤는데 우리도 지난 정부 때 상대방의 가족 문제에 대해서 정말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정치인에게 도저히 논리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그냥 가족이 저지른 잘못, 추문만 가지고도 엄청나게 공격했다.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나 피의자를 죄인 취급하는 문화는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추진하기가 어려울 거다. 조 장관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저질렀던 일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공정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과거에 했던 잘못에 대한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하려고 하면 당연히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고 잘되지도 않을 거다.” ※정유라는 고3 때 17일만 출석하고 출결 만점을 받고, 전 과목에서 최하위 성적을 면치 못한 성적표가 2016년 11월 공개됐다. 당시 서울시교육청은 개인정보 유출 조사 대신 고교 졸업 취소가 가능한 근거가 확보됐다고 밝혔다. 반면 조 장관 딸에 대해서는 개인정보 유출이라며 유출 경위를 조사했다. ―우리 정치에 그 정도의 포용력이 있다면 이 지경이 됐겠나. “내가 ‘우리도 과거에 잘못한 적이 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지금 한목소리를 내도 모자란데 왜 방해하느냐’고 하는데…. 난 한목소리를 내자는 사람이 오히려 개혁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상황을 풀려면 상대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화도, 합의도 하는 것 아닌가. 상대가 우리를 불공정하게 보는데 무슨 얘기가 되겠나.” ―조 장관이 박사 지도교수였는데 많이 친했나. “검사 시절 1년간 미국 연수에서 석사를 땄는데 논문을 안 써도 되는 석사였다. 돌아와 박사 지원을 했는데 논문 없는 석사를 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처음 지도교수를 부탁한 분이 안 돼 당시 서울대 신진 교수였던 조 장관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받아줬다. 그 뒤 배려도 많이 해줬고, 우리 집에도 놀러올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그가 지도한 박사 논문이 무엇인가.) “제대로 공부하기가 너무 힘들어 논문을 안 썼다. 그래서 박사가 아니라 박사과정 수료다. 휴학도 많이 하고…. 조 장관은 교수 할 것도 아닌데 너무 어려운 거 말고 내가 소설을 좋아하니까 ‘형법과 문학’ 이런 주제로 따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난 진짜 학술 논문을 쓰고 싶었는데 현실이 안 돼 아예 손을 안 댔다. 일각에서 박사 학위를 못 따서 내가 그에게 심하게 했다고 하는데 전혀 아니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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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가 막힌 의료사고[횡설수설/이진구]

    최근 서울의 한 유명 여성병원에서 영양주사 처방을 받은 임신 6주의 임신부에게 낙태 수술을 하는 의료사고가 벌어졌다. 계류유산으로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야 하는 다른 임신부와 착각했다는 것이다. 영양제 대신 수면마취제를 맞은 피해자는 깨어난 뒤 계속 하혈을 해 병원에 문의했지만, 담당의사가 퇴근해 다음 날 다시 찾아와 검사를 했고 그때서야 아기집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병원 측도 경찰 조사에서 의료사고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황당하기 그지없다. 간단한 건강검진도 맨 처음 하는 게 본인 확인이다. 수면내시경조차 본인 확인은 물론이고 각종 알레르기, 앓는 질환, 마취 거부 반응 유무 등을 묻고 동의서를 받는다. 마취제 투여 시 이름만 물었어도 환자가 다르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수술의사가 환자의 진찰 차트만 봤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묻지도 않고 냅다 주삿바늘을 꽂고, 이후에는 누구 하나 차트 한번 보지 않고 컨베이어벨트 돌아가듯 일사천리로 수술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환자를 의료상품으로 보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은 올 3월 전국 의료기관에 환자안전경보를 발령했다. 황당한 의료사고가 2016∼2018년에만 333건에 달한 데 따른 것이다. 몸 안에 수술 도구 등 이물질을 놔둔 채 봉합한 사고가 48건, 다른 환자를 수술하거나 검사 및 수혈한 경우도 161건에 달했다. 수술 장비가 고장 난 줄 모르고 마취했다 수술을 연기하고, 유방암 검사에서 좌우를 잘못 기재한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조직검사에서 확인돼 바로잡았지만 하마터면 엉뚱한 유방을 절제할 뻔한 일이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은 의료기관이 수술 안전 체크리스트를 마련해 수술명, 기구 개수 등을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 1차 마취 유도 전, 2차 절개 전, 3차 퇴실 전에 본인 확인, 수술 동의서, 수술 부위, 각종 장비 등을 확인하는 타임아웃(Time Out)이란 절차도 있다. 의료진도 실수할 수 있지만, 이런 과정을 하나도 지키지 않아 벌어진 참사를 실수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의 책임감이나 직업적 엄격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화장실 안에도 점검 리스트가 있어 청소를 하고 나면 표시를 하는 세상이다. 병원 측은 “뭔가에 씌었던 것 같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평생 고통을 받아야 할 부모의 마음, 어이없이 박탈당한 태아의 생명의 기회는 무엇으로 달랜단 말인가.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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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미공단 50주년[횡설수설/이진구]

    수년 전 경북 구미공단(현 구미국가산업단지) 명칭을 ‘김대중 국가산업단지’로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2014년 11월 당시 이낙연 전남지사와 김관용 경북지사, 두 지역 국회의원들과 시장·군수들이 모여 경북-전남 상생협력협약을 맺었는데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 이름을 활용한 사업을 함께하기로 한 것. 영호남 화합의 상징으로 전남 광양공단에는 박정희, 구미공단에는 김대중을 붙이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아이디어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두 지역은 화합 차원에서 구미에 ‘전남도민의 숲’, 목포에 ‘경북도민의 숲’을 조성했다. ▷1969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단지로 조성된 구미공단은 70, 80년대를 거치며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가난한 농촌마을이던 구미읍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구미역 앞은 공단 초기 3.3m²(1평)당 6만 원 정도 하던 땅값이 2년여 만에 20만 원이 넘었고 그나마 계속 올라 팔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주택 공급이 따라잡지 못해, 초기 일부 동네에서는 한 집에 평균 16명이 살 정도였다. ▷구미공단은 중국의 덩샤오핑이 경제발전 모델로 삼을 정도로 성공했다. 60년대 일본에서는 전자산업이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이를 본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수출을 주도한 섬유산업과 미래전략산업인 전자산업을 함께 육성할 지역을 찾았는데, 섬유도시 대구에 인접하고 낙동강의 공업용수가 풍부한 구미를 선정했다. 70년대 중반 부산에 있던 금성사(현 LG전자)가 옮겨오고, 1988년 삼성전자가 이곳에서 국내 최초의 휴대전화 SH-100을 개발하면서 구미는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됐다. 1995년 불량 휴대전화 15만 대를 불태우며 ‘애니콜 신화’가 시작된 곳도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이었다. ▷올해 공단 50주년을 맞아 구미시가 제작한 홍보영상에서 박 전 대통령이 빠졌다고 한다. 그 대신 DJ의 구미4공단 기공식 참석,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수출 200억 달러 달성 기념식 참석, 문재인 대통령의 구미형 일자리 협약식 참석 장면이 들어갔다. 시는 제작업체의 실수라고 하지만 두 차례 시사회까지 한 걸 보면 실수만은 아닌 것 같다. 현 구미시장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지난 지방선거에서 육영재단의 불법적 재단 운영에 저항해 (영남대)교수 임용에 탈락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구미시는 22일까지 음악회, 심포지엄 등 공단 50주년 기념행사를 연다. 인정하긴 싫지만 열매는 먹겠다는 걸까. 정치적 입장이 다르고, 호불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조차 외면하려는 ‘편협함’이 씁쓸하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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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의회[횡설수설/이진구]

    영국 하원 회의장 바닥에는 마주 보고 앉은 여야 앞자리 앞에 각각 붉은색 ‘검선(劍線·Sword line)’이 그어져 있다. 과거 토론이 격해져 칼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아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검선을 사이에 두고 100마리의 침팬지가 앉아 상대 쪽을 노려보고 있는 그림이 다음 달 런던 소더비 경매에 나온다. ‘얼굴 없는 예술가’ 뱅크시의 작품인 ‘위임된 의회(Devolved Parliament)’인데 200만 파운드(약 30억 원) 이상의 가격에 팔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의회 민주주의의 산실’로 불리는 영국 의회(하원)는 무척 점잖고 예의바를 것 같지만 실제는 많이 다르다. 발언자 말이 안 들릴 정도로 야유를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답변하는 총리가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삐딱하게 서서 말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지난해 말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당시 테리사 메이 총리를 향해 ‘멍청한 여자’라고 속삭이는 장면이 보도됐는데, 사과를 요구하는 정도로 그쳤다. ▷폭언이라면 현 보리스 존슨 총리를 뺄 수 없다. 그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반대하는 코빈 노동당 대표에게 ‘염소로 표백된 닭’ ‘개똥’이라고 했는데, 거짓말쟁이, 호모 등은 평범한 축에 속할 정도다. 지난해 외교장관 시절에는 같은 당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 협상안에 대해 ‘분칠한 똥’이라며 창의적인 욕까지 만들어냈다. ▷750년 전통의 영국 의회가 ‘최악의, 최후의 정치’로 가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총리의 막말도 문제지만, 그의 역대급 막장 정치 탓이다. 그는 야당 입을 막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앞세워 의회를 정회시켰고, 무려 21명의 같은 당 의원을 노딜 브렉시트 방지법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출당시켰다. 그의 친동생인 조 존슨 기업부 부장관에 이어 앰버 러드 고용연금부 장관도 이런 행태를 보다 못해 사임했다. ▷토론은 격렬하지만 영국 의회는 국가 중대사에서는 서로 화합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특히 여야가 합심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자유로운 토론과 합의로 의회를 운영하는 전통이 깊어졌는데 최근 몇 주간 그런 전통과 문화가 모두 깨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9일 사퇴를 선언한 존 버커우 하원의장은 230년 만에 귀족 작위를 못 받는 하원의장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보수당이 버커우가 브렉시트에 반대했다며 귀족 지위를 주는 전통을 없애는 방안을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 ‘포퓰리즘이 어떻게 의회민주주의를 흔드는지 보여주는 실험장이 됐다’는 자조가 나오고 있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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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도 과일 몇 개, 포, 전만 간단히 드시는데…”[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

    《올 설을 앞두고 한 여대생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명절 폐지를 간청합니다’란 글을 올렸다. 어머니가 30여 년간 수십 명 친인척의 명절 뒤치다꺼리를 혼자 도맡다 보니 너무 힘들어 이혼하고 싶어 할 정도라는 것이다. 명절 스트레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담을 주는 차례상은 어디서 나온 걸까. 퇴계의 17대 종손인 이치억 씨(43·백제충청유교특성화추진단 선임연구원)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紅東白西 棗栗梨시)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며 “저희 집안도 과일 몇 개, 전, 포 정도만 놓고 차례를 지낸다”고 말했다. 》 ―퇴계 선생 댁 차례상은 어떻습니까. “과일 몇 가지, 포, 전 정도만 올리지요. 설에는 떡국이 올라가고요. 그런데 저희 집에서는 추석 때 차례를 지내지 않고 10월에 시제(時祭)를 지냅니다.” (추석 연휴 때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요?) “원래 아주 옛날에는 돌아가신 날 각각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요. 계절의 변화에 맞춰 지내는 사시제(四時祭)가 더 중요했고, 그때 함께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 거죠. 그래서 저희 집안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시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중양절이 연휴가 아니다 보니 10월 셋째 주 일요일에 모여 하는 거죠. 일부 잘못 알려져서 퇴계 선생 집안이 추석 차례 자체를 안 하는 걸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차례를 추석 연휴 기간이 아니라 10월에 한다는 뜻입니다.” (연휴 때는 뭘 합니까.) “명절이 아닌 그냥 연휴로 보내지요. 이번 추석 연휴에도 고향에는 내려가지만 손님 오면 인사드리는 정도지 별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뼈대 있는 집안인데 상차림이 너무 간소한 것 아닙니까. “명절 차례상은 물론이고, 제사상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지는 않습니다. 주자가례에도 제사상에 어떤 과일을 어느 자리에 놔야 한다고 하나하나 지정돼 있지는 않습니다. 가장 앞줄에 과일, 그 뒤는 채소, 그 뒤는 고기 등 반찬, 그 뒤는 식사… 이 정도만 쓰여 있죠. 작년 10월 시제 때는 통닭도 올렸는데요?” (통닭요?) “원래 영남지역에서는 생고기를 쓰는데 그러면 못 먹으니까 익힌 닭고기를 올렸지요.”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늘 홍동백서를 말씀하셨는데요.) “사실 그 말이 어디서 유래됐는지는 알 수 없어요. 애초에는 간소하고 형식도 없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더 정성을 들이려는 마음과 과시 등이 더해져 과해진 게 아닌가 합니다. 퇴계는 항상 간소한 옛날 예법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상에 유밀과를 쓰지 말라고 유훈을 남기셨지요.” ※유밀과(油蜜果)는 밀가루에 기름과 꿀을 섞어 반죽한 것을 기름에 지져 꿀에 담갔다 먹는 과자. 제사상에 과일 대신 올렸는데 퇴계가 유밀과 사용을 금지한 것은 비싸기도 했지만 후대에 제사가 과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중간에 상차림이 바뀌기도 했나요. “저희 집안은 원래 제사상 가장 왼쪽에 대구포를 놨어요. 그런데 퇴계 선생의 손부 때부터 가운데로 바뀌었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읜 손부가 혼자 제사를 지내다 보니 술을 따라 올릴 때마다 자꾸 치마에 대구포가 걸려 쓰러졌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중앙에 놓았는데 그게 계속 이어졌다고 합니다.”―차례, 제사를 간소화하자는 목소리가 많은데, 종손집은 어떻습니까. “종손 모임에도 1, 2부 리그가 있는데, 2부 리그 모임에 가보면 생각이 정말 많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끼죠.” (1, 2부 리그라니요?) “저희 집안에서 종손은 저희 아버지 한 분이고, 저는 아직 종손이 아니에요. 종손이 될 차종손(次宗孫)이죠. 각 집안 종손들의 모임을 우스개로 1부 리그, 저처럼 차종손들의 모임을 2부 리그라고 부르죠. 근데 정말 윗세대와는 많이 달라요. 사실 변하지 않으면 계속 유지할 수도 없고요. 저희 집도 과거에 비하면 절반 정도 줄어서 10여 번만 지냅니다.” ※종손(宗孫)은 불천위를 모신 집안의 봉사손을 말한다. 불천위가 없는 집안의 봉사손은 주손(胄孫 또는 主孫)이다. 불천위(不遷位)는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영구히 제사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로 여기서는 퇴계의 신위다. 종손이 사망하면 길사(吉祀)를 지내고 차종손이 종손을 이어받는다. ―반대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아버님이 무척 열린 분이신데, 할아버지께 강하게 말씀드려 줄였지요. 제사 문제는 집안마다 특징이 있어 쉽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제사가 현대사회에 맞게 바뀌지 않는다면 결국 없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지요.” (제사가 없어질 거라고요?) “옛날 형식 그대로 유지하면 누가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간에 갈등이 계속될 테고, 그러다 보면 힘드니까 아예 ‘이럴 바엔 지내지 말자’ 하겠지요. 부모님이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특별하게 지내고 싶은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제사란 그렇게 시작된 것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형화된 틀을 만들고 형식이 마음보다 위에 있게 된 거지요. 저는 제사는 미풍양속이고 그래서 계속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제사가 변해야 합니다. 예(禮)란 언어와 같아서 사람들과 소통하면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라지고 말죠.” ―10여 번도 적은 수는 아닙니다만…. “퇴계 선생을 기리는 불천위 제사와 종손의 4대조까지 내외분 기일, 설과 추석 차례 등입니다.” (여성들의 명절 스트레스는 없습니까.) “없지는 않지만, 서로 나누려고 노력합니다. 아주 어르신들은 앉아 계시지만 저를 비롯해 다른 남자들은 음식도 나르고, 설거지도 하고 부엌에 들어가서 일을 해요. 여자들에게만 맡겨놓고 놀지 않습니다. 불천위 제사가 아닌 가족끼리 지내는 기제사에는 남녀가 다 제사상 앞에서 절도 하고요. 음식 만드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일을 남녀가 같이 합니다.” (여성들도 절을 한다고요?) “네, 원래 예법이 그래요. 첫 잔은 종손이 올리고, 두 번째 잔은 종부가 올리지요. 단지 불천위 제사에는 손님이 너무 많이 오니까 준비할 게 많아 함께 못 하는 것뿐이지요. 남자들도 손 좀 까딱해야 해요.” ※퇴계의 불천위 제사는 퇴계와 부인 2명 등 세 번이었으나 올해부터 음력 12월 8일 퇴계 기일에 맞춰 함께 지내기로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집안도 매년 8월 15일 광복절에 4대의 기일 제사를 함께 지내고 있다. ―작년 추석엔 일부 벌초를 대행업체에 맡겼다던데…. “산소가 퇴계 선생부터 한 30여 기 되다 보니… 벌초 없이 성묘만 다녀도 닷새가 걸리거든요. 다 돌아보는 게 원칙이기는 하지만 너무 많아서 후손들이 나눠서 살피기도 합니다.” ―실례 같습니다만, 그냥 장남도 결혼하기 힘든데 17대 종손이라 지장은 없었습니까. “하하하, 그런 걸 묻는 기자들은 없었는데… 짚신도 짝은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결혼을 전제로 사귄 것도 아니었고요. 지금의 아내와 만난 뒤 종손이라고는 했는데… 아마 그전부터 주변에서 말해줘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사 같은 문제가 없는 집보다야 신경 쓸 일도 많고 스트레스도 있겠지만 결혼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처가에서 반대를 안 하던가요.) “처가의 큰집도 지역에서 기와집에 사는 유지 집안이라 아내도 그런 문화에 좀 익숙한 것 같더라고요. 좀 힘들긴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결혼을 안 하지는 않겠다는 사람이니까요.” ―어릴 때는 좀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고교 졸업 때까지 안동 종택에 살았는데…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의관을 갖추고 사당에 참배한 후 식사를 하셨지요. 문안 인사 드리듯이… 외출도 사당에 제를 올린 후 하셨고요. 아버지도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 걸 지키는 게 힘들었나요.) “하하하. 그것보다는… ‘너는 다른 사람하고 다르니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압박 때문에 좀 숨이 막혔죠. 유교문화가 종손에게 주는 무게라고 할까…. 그래서 고교 시절까지는 유교를 싫어했고, 유교는 정말 없어져야 하는 거라고 생각까지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래서 탈출도 할 겸 겸사겸사해서 일본 대학으로 진학해 동아시아 지역문화를 전공했는데 그때 논어 장자를 배우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요.” ―퇴계 종손이어서 갖는 전통이 또 있습니까. “글쎄요… 돌림이 아닌 글자에 마음 심(心)자를 꼭 넣는 게 전통이라면 전통이지요. 그래서 제 이름 치억(致億)과 제 아들 이름 이석(怡錫)에 ‘심’자가 들어 있고요. 퇴계 선생의 학문을 심학(心學)이라고 하잖아요. 그 의미를 기리자는 뜻에서 종손이 될 맏아들 이름에 꼭 넣고 있습니다.” (아들이 있다고요?) “네, 둘 있는데 큰애는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죠. 퇴계 이황의 18대 종손이 될 놈이죠. 하하하.” (아… 괜찮겠습니까.) “하하하.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종손인 게) 좋은 점이 더 많은 세상이 올 수도 있고요.”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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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도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는데, 우리는…”[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

    《최근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집(‘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제4집·2001년 출간)이 18년 만에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됐다는 뉴스가 났다. 이 보도를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동안 번역이 안 됐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참상을 가장 생생하게 알릴 수 있는 증언집이 번역되지 않았다니,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세계에 알린 걸까. 번역 팀장을 맡은 양현아 교수(59·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는 “생각은 했겠지만 인력과 재원이 부족했기 때문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증언집의 특성상 외국어 번역은 당연한 것 같은데 18년이나 걸린 이유가 있나. “우리도 지금 번역을 해놓고 보니 ‘왜 그랬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했을 거다. 단지 그걸 감당할 인력과 재원 등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책의 성격상 출판사가 관심을 갖기도 쉽지 않았고….” (다른 책들은 번역된 게 있나.) “증언집이 모두 6집인데 1집은 1995년 영국 교수가 번역해 출간됐다. 이번에 번역된 4집은 현재 초벌 번역 상태인데 이렇게 둘뿐이다.” (영국 교수가 했다고?) “음악과 한국학 전공자인 키스 하워드 교수다.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영화감독 대실 김 깁슨이 ‘깨진 침묵(Silence Broken)’이란 책에서 증언을 넣었지만 증언집은 아니다.” ※키스 하워드 영국 런던대 명예교수는 국내에 국악 전도사로도 알려져 있다. ―우리가 평소 일본군의 만행에 분개한 것에 비하면 좀 부끄러운데…. “왜 이 책을 번역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는 했다. 그때 ‘이렇게 어려운 한국말을 누가 번역하겠느냐’고 답했던 것 같다.” (번역이 그렇게 어려운가.) “여기 이 구절을 봐라. ‘그놈 인자 풀국 쪼깨 해가꼬 자강자강 볼바서 파싹 몰라서 주므는 한 오십 전쓱 줘.’(최갑순 증언 153쪽) 우리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완전한 구어체로 담았다. 한국인도 이해하려면 한참 읽어야 한다. 또 성폭력 경험이기 때문에 직설적인 답 대신 행간의 의미가 많다. ‘하루에 몇 명 상대했어요?’라고 이렇게 대놓고 물을 수가 없었다. 에둘러 물으면, ‘그게… 뭐더라…’ 하고 딴청 피우다 ‘이것 좀 드셔’ 하며 회피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작업을 한 우리들은 증언집을 글이자 동시에 소리집이라고 불렀다. 이런 글을 누가 영어로 제대로 번역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고…. 보수 정부 시절에는 ‘위안부’ 운동과 연구에 대한 사기가 많이 떨어져서 일부러 찾아다니며 번역하자고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위안부(慰安婦)’란 말은 일본군의 만행을 축소하는 면이 있는데 여전히 쓰는 이유가 뭔가. “사실 극심한 성폭력에 ‘위안’이라고 쓰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일본군이 그런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역사성도 갖고 있고, 처음에는 이 용어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적었을 수 있다. 1990년대 들어 유엔에서 공식적으로 일본군 성노예제(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고 불렀는데, ‘위안부’라는 말을 지금도 사용하는 것은 관성도 있지만, 심각한 성폭력을 은폐하고 사소화하려는 기막힌 역설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 용어가 괜찮아서가 아니다. 그래서 ‘이른바’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 ‘위안부’라고 작은따옴표를 붙여 쓰고 있다.” ※증언 4집은 ‘위안부’를 ‘comfort woman’으로 번역했다. ―이번 번역은 어떻게 이뤄지게 된 건가. “번역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있었다. 마침 작년에 여성가족부에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가 창립됐는데 그때 해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연구소에서 용역사업으로 발주했는데 우리 팀이 선정됐다. 7팀이나 지원해서 좀 놀랐다.” (7팀이나?) “국내 출판사, 대학 연구소 등에서 지원했던 것 같다. 의미 있는 사업이라 참여한 게 아닌가 싶다.” ※양 교수 팀은 서울대 여성연구소와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 소재 한국학센터 연구자들로 구성됐다.―단순히 한국말을 영어로 옮기는 차원이 아니라고 하던데…. “예를 들어 ‘보국대에 끌려갔다’ ‘방적공장에서 일했다’는 증언을 번역할 때, 당시에 보국대 제도가 실재했는지, 피해자가 있던 방적공장이 어디에 있었는지까지 확인했다.” (왜 그런 건가.) “영문 증언집이 출간되면 외국인들이 보고, 특히 일본에서도 볼 수 있다. 사실이 아니면 증언의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일본군을 Customer, 손님으로 번역했는데 오해의 소지는 없나.) “피해자들이 그렇게 증언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바꿀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 번역을 보고 ‘위안소가 민간이 설립한 성매매업소와 비슷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군 허락 없이 위안소를 설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군인들만 이용했고, 성병 검진은 군의관들이 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맥락을 알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외국인들은 배경을 모르니 오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한 설명과 지배자의 언어로 현실을 이해해야 했던 피해자 입장에 대한 각주를 달았다.” ―일본어 번역은 어디서 했나. “지난해 용역사업을 발주하면서 일본어 번역도 같이 하려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됐다. 그래서 김부자 일본 도쿄외국어대 교수와 다른 연구자들이 자체적으로 올 4월에 번역을 끝냈다. 지금 한일 관계를 생각하면 어쩌면 우리 정부 지원을 안 받은 게 일본에 있는 학자들에게 더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일본에는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많은가.) “사실 ‘위안부’ 연구나 식민주의 책임에 대한 연구가 한국보다 일본이 더 많은 것으로 안다. 식민주의와 가부장제 문제에 깨어 있는 지식인도 많다. 마쓰이 야요리 같은 분은 히로히토 일왕의 책임을 지적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지낸 마쓰이 야요리(68·사망)는 퇴직 후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하며 도쿄에서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실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서 일왕과 일본 정부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내려졌는데, 이로 인해 그는 일본 사회에서 많은 핍박을 받다가 2002년 12월 암으로 사망했다. ―미 캘리포니아주가 2016년 중등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됐는데…. 미국 안에도 일본 지지 그룹이 있어서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소됐다’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도 함께 가르치도록 했다. 역사 교육을 놓고 외국에서 한일이 경쟁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영문 번역에 참가했던 캘리포니아대 한국학연구센터 연구원들은 미국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위안부 문제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정말 얼마나 아는지 되돌아 봐야 한다. 증언 4집이 거의 10년 전에 개정판을 냈지만 아직도 시중에 남아 있다는 게 우리의 관심 부족을 방증하는 것 아닌가 한다.” ―일각에서는 ‘위안부’ 대다수는 계약에 의한 관계였다고 주장하는데…. “일본 정부 주장인데…. 강제의 등급에는 납치 같은 좁은 것도 있지만, 제도화된 넓은 의미의 강제도 있다. 어떤 마을에 ‘10명을 모집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이장이 나섰다면 이는 행정적으로 강제된 동원이다. 동행한 군인도 총칼을 휘둘러야만 강제가 아니다. 있는 것만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데…. 일본군 성노예제를 ‘체계적 강간’이라고 부르는데, 법과 정책에 의해 성노예제를 수립하고 광범위한 피해자를 양산한 강간을 의미한다. 피해자의 동의나 가해자의 물리적 폭력, 강요 여부와는 무관하다.”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 제기를 반일 종족주의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식민주의(colonialism)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반(反)일본을 하자는 게 아니다. 광복 후 일제의 잔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탓에 식민주의 유산이 너무나 많이 답습됐다. 우리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해 얼마나 배웠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가르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 첫걸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식민주의 영향을 직시하자는 거다.” ―우리 사회가 호주제 폐지에 담긴 큰 의미를 직시할 기회를 놓쳤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인가. “호주제는 우리 전통이 아니고 일제가 식민 통치를 위해 도입한 가족제도다.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하면서 여성 차별과 함께 식민주의 법제도라는 점이 중요한 논거였는데 헌법재판소 결정에서는 후자가 빠진 것으로 보인다. 그걸 보면서 우리 법 안에 녹아 있는 식민지성을 직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웠다.” ―‘위안부’도, 호주제도 일제 때 일인데… 이 분야에 관심 갖는 이유가 뭔가. “일제 식민주의 역사를 모르면 어떻게 그로부터 빠져 나와야 하는지 길을 찾기 어렵다. 탈식민주의는 우리 안에 내재한 식민주의의 영향을 직시하고, 하나의 민족이라는 허상 속에서 차별당한 여성과 민중을 조명하자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와 가족제도는 서로 다르지만 내게는 ‘포스트식민 페미니즘(postcolonial feminism)’의 문제의식을 일깨우면서 함께 다가왔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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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체정보의 명암[횡설수설/이진구]

    올 4월 미국의 한 정보기술(IT) 전문지가 최신 스마트폰의 지문 잠금 기능이 위조 지문에 의해 해제되는 과정을 보도했다. 첩보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와인 잔에 묻은 지문을 카메라로 찍어, 이를 3D프린터로 인쇄한 것. 위조 지문을 갖다댄 지 세 번 만에 스마트폰의 지문 잠금 기능은 간단히 해제됐다. ▷쓰려고 하면 갱신해야 하는 공인인증서, 하도 바꿔 기억도 나지 않는 비밀번호, 어디 뒀는지 모르는 보안카드… 관리하기 어려운 본인인증 시스템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게다. 생체정보인증 시스템은 이런 분실이나 도용 위험이 없어 차세대 보안 기술은 물론 여러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다. 이미 국내 공항에서는 지문과 손바닥 정맥을 등록하는 생체정보 사전등록제도를 시행하고 있고, 현금인출기에서 손바닥 정맥, 지문, 홍채인식을 통해 예금을 찾는 서비스도 시작됐다. 내년부터는 전자발찌 착용자의 땀 등 체액정보를 전송받아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하는 기술도 반영된다. 지난해 전 세계 글로벌 바이오 인증 시장은 약 168억 달러(약 20조4000억 원)에 달하고 매년 20%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생체정보는 한 번 유출되면 바꿀 수가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2015년 미국 연방 인사관리국(OPM)에서는 해킹으로 전현직 공무원 2000만 명의 개인정보와 지문정보가 유출됐는데, 미국 행정부 시스템이 지문인증 방식이었다면 해커들 손에 장악됐을 거란 지적이 많다. 나시르 메몬 뉴욕대 교수는 8200개의 지문 패턴을 분석해 소위 ‘마스터 지문’을 만들었는데, 지문인증 스마트폰의 65%를 열 수 있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시는 지난해 5월 미국에서 처음으로 행정당국의 얼굴생체정보인식기술을 이용한 감시를 금지시켰다. 잦은 오류로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모는 데다, 조지 오웰의 ‘1984’처럼 감시사회를 부른다는 지적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은 아마존의 얼굴인식 소프트웨어로 2만5000명의 범죄자 사진과 모든 미 상하원 의원의 얼굴을 대조했는데 의원 28명이 범죄자로 지목됐다. ▷한 국내 생체인증기술 기업이 갖고 있던 수백만 건의 지문과 얼굴 정보가 인터넷에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나마 자체 발견도 아니고 이스라엘 보안 전문가가 발견해 알려줬다고 한다. 비밀번호라면 바꾸기라도 할 텐데, 생체정보 유출은 성형수술 외에는 방법이 없다. 통제할 수 없는 기술의 발달이 주는 그림자는 너무도 짙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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