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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세기 경산 압독국(押督國) 지역 지배층의 무덤이 발견됐다. 압독국은 진한(辰韓) 소국 중 하나로 경산지역을 지배하다 신라에 복속됐다. 한빛문화재연구원은 “경북 경산시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사적 516호) 내 임당 1호분에서 옛 압독국 지역 지배층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22일 밝혔다. 무덤 안에서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와 ‘가는고리 금귀고리’ 같은 최고 지배층의 장식품이 발견됐다. 무덤 주인은 허리띠와 귀고리를 착용하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채 누워 있었고, 발치에서는 순장자로 추정되는 어린아이 인골이 나왔다. 임당동 구릉 끝부분에 있는 임당 1호분은 무덤 5기가 연이어 축조된 연접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발굴 결과 대형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로 구성된 목곽묘(木槨墓)들이 발견됐다. 무덤에서 나온 토기 양식을 감안할 때 5세기 말∼6세기 초에 축조된 걸로 파악된다. 무덤에서는 금동관모와 관장식, 은장식 고리자루큰칼도 같이 나와 무덤 주인이 압독국 지배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또 무덤 주인이 가는고리 금귀고리를 착용했고, 고리자루큰칼이 부장된 점으로 미뤄볼 때 남성인 것으로 추정된다. 딸린덧널은 큰항아리와 짧은목항아리, 긴목항아리, 굽다리접시 등 다양한 토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딸린덧널 가장자리에서는 금동귀고리를 한 순장자의 인골이 발견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울산박물관이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이집트 보물전―이집트 미라 한국에 오다’ 특별전을 국군 장병들에게 무료로 개방한다. 8월 27일까지 진행되는 이집트 보물전에선 미국 브루클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대 이집트 미라와 관(棺), 조각, 석물, 보석을 비롯해 고양이, 매, 따오기 등을 담은 동물미라까지 총 229점의 진귀한 보물이 전시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반영된 미라를 직접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지난해 12월∼올해 4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이집트 보물전에는 총 34만3547명(하루 평균 3123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휴가를 나온 군 장병들의 관심도 뜨겁다. 육군 53사단 소속 최승언 일병(21)은 “영화와 책에서만 접하던 귀중한 이집트 보물들을 무료로 볼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러웠다”며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이 빚은 예술적 성취가 놀라웠다”고 말했다. 이달 1∼30일 한 달간 군인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휴가증이나 군 복무증을 제시하면 본인에 한해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일반 관람료는 성인 1만원, 초등학생 5000원. 자세한 내용은 전화(1688-9891)나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주 도심 남천(南川)을 건너 남산(南山) 방향으로 차를 몰자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물 댄 논 사이로 황구가 어슬렁거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탑동이다. 그런데 마을 입구를 지키는 육중한 조선시대 기와 건물이 범상치 않은 포스를 내뿜는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6부 촌장(村長)의 위패를 봉안한 양산재(楊山齋)다. 그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니 소나무 숲 속에 감춰진 공터가 나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기록된 나정(蘿井)이다. 나정과 불과 500m 떨어진 거리에 경애왕이 살해당한 곳이자, 신라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이 있다. 월성과 황룡사지 등 경주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 천년왕국 신라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런 걸까. 2002∼2005년 윤세영 당시 중앙문화재연구원 원장(현 고려대 명예교수)과 함께 나정을 발굴한 이문형 책임조사원(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기획실장)과 이지균 조사원(현 천년문화재연구원 단장)이 살짝 성토된 땅을 손으로 가리켰다. “신라시대 ‘팔각 건물터’가 발견된 곳입니다. 신화가 역사로 바뀐 순간이죠.”○ 작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역사적 발견 “아니, 이게 왜 이런 각도로 꺾이지?” 2002년 5월 하순 경주 나정 발굴 현장. 조선시대 건립된 비각(碑閣) 주변을 시굴하는 과정에서 건물 기단 석렬(石列)을 발견한 이문형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연히 사각형 모양의 평면을 머리에 그리고 가장자리를 팠는데, 위로 꺾인 석렬의 각도는 수직이 아닌 둔각을 이루고 있었다. 서둘러 반대편 가장자리를 파보니 마찬가지였다. 석렬 주변에서는 신라시대 기와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며칠 뒤 이문형은 후배 조사원들을 조용히 주말에 불러냈다. 경주시가 본래 요청한 발굴조사 내용에서 벗어나 기와 건물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앞서 경주시는 낙수 피해를 막기 위해 담장 이설 공사를 추진하면서 연구원에 주변 발굴을 요청한 터였다. 갑자기 발견된 기와 건물터에 대한 성격 규명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주말 이틀 동안 쉴 새 없이 노출시킨 기단 석렬은 상상을 뛰어넘는 독특한 구조였다. 경주에서 지금껏 한 번도 발굴된 적이 없는 팔각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 더구나 팔각 건물터에서 ‘義鳳四年(의봉 4년·679년)’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에 따라 문무왕의 삼국통일 직후 증축이 이뤄진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 석렬 내부에서는 3열에 걸쳐 초석(礎石) 40개가 발견됐다. 지표가 지속적으로 깎인 탓에 초석은 불과 20cm 깊이에 묻혀 있었다. 팔각 건물터 외곽을 둘러싼 담장도 발견됐다.○ 나정인가 신궁(神宮)인가 “고허촌(高虛村) 촌장이 양산 밑 나정 우물가에 무릎을 꿇고 우는 흰말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커다란 붉은 알만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온 사내아이를 촌장이 데려와 길렀다. 아이는 이미 13세에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매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탄생 신화에 등장하는 나정은 조선시대부터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역사가 아닌 허구로만 여겼다. 그러나 신라시대 팔각 건물이 발굴되면서 나정은 역사적 실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나정에서 추정 우물터를 중심으로 한 초기철기시대 ‘제의용 환호(環濠·마을이나 제단을 둘러싼 도랑)’가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건국 연대(기원전 57년)와 비슷한 시점에 나정이 신성시됐음을 보여주는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발굴단이 우물터로 지목한 유구가 사실은 기둥구멍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청동기시대 소도(蘇塗)처럼 환호 중앙에 커다란 나무장대를 꽂은 흔적이라는 것이다. 단, 통일신라시대 팔각 건물이 국가 제의시설이라는 발굴팀 의견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학술원 회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나정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박혁거세를 기리는 시조묘 혹은 김씨 시조를 기리는 신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북 고령군에서 대가야시대 토성(土城)과 해자(垓字)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다. 가야시대 토성과 해자가 발견된 것은 처음으로,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연구, 복원지시와 맞물려 주목된다. 발굴기관인 가온문화재연구원과 고령군청에 따르면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구릉에서 폭 5m의 성벽과 폭 6~8m의 해자가 함께 발굴됐다. 대가야 궁성 추정지와 가까운 곳이어서 왕성 방어시설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발굴결과 성벽은 해자에서 2~2.5m가량 떨어져 있다. 돌을 2~3단 쌓고 흙을 채운 뒤 다시 2m 밖에 돌을 쌓고 흙을 다지는 방식으로 조성됐다. 현재 확인되는 바깥 성벽의 폭은 5m이며, 본래 폭은 최소 6~6.5m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성벽 안에서는 인근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양식의 토기들이 출토됐다. 해자 안에서도 대가야 토기와 기와, 목재 등이 확인됐다. 해자는 구덩이를 파고 가장 아랫부분에 돌들을 쌓은 뒤 흙을 채우는 방식으로 조성됐다. 해자 서쪽에서는 지름 1.3m의 둥근 기둥구멍이 확인됐는데 목책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발굴단은 토성이 5세기에 지어져 6세기까지 존속했을 가능성이 높은 걸로 보고 있다. 발굴단 관계자는 “인근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 등과 비교를 통해 대가야 성립과 멸망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설명했다. 김세기 대구한의대 교수(고고학)는 “대가야 궁성의 토성과 해자가 확실하다면 대가야가 고대국가 단계까지 진입했다는 학설에 힘이 실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해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나는 난생처음 경복궁 앞 왕경대로(王京大路)의 웅장함을 잠시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 경찰 통제에 따라 10차로 도로가 차단되면서 광화문과 광장은 하나로 연결됐다. 광화문에서 광장 끝 이순신 장군 동상까지 약 600m에 이르는 거대한 주작대로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평소 광화문 앞 차로에 가로막힌 경복궁은 마치 박제된 섬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광화문 앞 육조대로(六曹大路)는 최고 권부와 서민들이 함께 어우러진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앞 대로의 연원을 다양한 문헌을 통해 추적하고 건축사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통상 건축사 책은 궁궐 전각이나 고택(古宅)처럼 건물 자체에 주안점을 두기 마련인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궁궐 문을 둘러싼 거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화재위원을 지낸 건축사 분야 권위자가 쓴 책답게 역사와 건축을 함께 아우르는 혜안이 돋보인다. 고대부터 도성 내 도로는 왕성과 관청, 주거지 등을 일정한 체계에 따라 구획하는 핵심 시설이었다. 최근 경주 왕경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에서 황룡사지 주변 도로망이 신라시대 방리(方里)제를 반영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는 “궁궐 앞길은 궁궐과 도시를 연결하는 숨통 같은 존재다. 담장 바깥 세계까지 살펴봐야 궁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썼다. 직장이 광화문에 있어서 그런지 육조대로의 변천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육조대로는 말 그대로 경복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최고 관부였던 이·병·호·예·형·공조 청사들이 좌우로 늘어선 큰길을 뜻한다. 조선 정궁(正宮)의 위상에 걸맞게 경복궁은 나머지 궁궐들보다 훨씬 큰 앞길(육조대로)을 거느렸다. 왕이 선왕들의 능을 참배하거나 중국에서 온 사신을 영접하고 과거시험을 거행할 때마다 육조대로는 주된 무대였다. 이런 행사에선 왕과 관료들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구경꾼으로 참여했다. 경복궁을 지을 때 고려시대나 중국처럼 폐쇄적인 황성(皇城) 구조를 따르지 않고 종묘와 사직단, 육조를 일반 주거지와 분리하지 않은 사실도 주목된다. 중국은 종묘와 사직단을 황성 안에 설치해 황제가 제의를 지내러 이동하는 모습이 백성들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또 최고 관부도 서민들과 분리돼 황성 안에 따로 뒀다. 그러나 조선은 종묘와 사직단이 민간 주거지 안에 있어 국왕의 행차를 누구나 지켜볼 수 있었다. 육조도 저잣거리와 연결돼 고관대작의 움직임이 모두 드러났다. 최고 지배자의 동선이 투명하게 노출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역사의 부침에 따라 광화문과 육조대로에 영광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나 위기에 봉착한 1894년 육조 명칭이 바뀐 데 이어 일제강점기 들어 육조 대신 식민 통치기관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현재는 ‘세종대로’로 불리는 광화문 앞 큰길의 운명은 한반도의 그것과 함께했던 셈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조그마한 단추 안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있었다. 12일 다녀온 국립중앙박물관의 ‘프랑스 근현대 복식, 단추로 풀다’ 특별전은 전시 대상과 기법이란 측면에서 참신한 시도가 돋보였다. 전시를 보기 전 품었던 “단추는 옷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편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각양각색의 단추를 통해 프랑스 근현대사를 조망하겠다는 박물관의 기획 취지는 충분히 전달됐다. 박물관은 프랑스 장식예술박물관과 손잡고 18∼20세기 프랑스 단추와 옷, 그림, 책, 사진 등 약 1800건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 기념 전시로 준비됐지만, 프랑스 측과의 견해차로 우여곡절 끝에 올해 열리게 됐다. 아마 이번 특별전에서 전시팀이 맞닥뜨린 최대 난관은 시각화였을 것이다. 그림이나 조각과 달리 크기가 5cm도 안 되는 단추를 관람객에게 제대로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전시장 입구 ‘프롤로그’에 18세기 이후 프랑스 단추들을 진열한 유리장과 특수 돋보기를 설치한 건 매우 적합한 선택이었다. 살짝 누르면 빛이 들어오는 돋보기를 진열장 위에 들이대자, 정교하게 다듬어진 단추들의 속살이 훤히 비쳤다. 이 중 18세기 말∼19세기 초에 강철로 만든 단추는 자개나 보석류로 만든 화려한 단추들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단추 안팎을 정교한 방울모양으로 장식한 게 신라 금관의 누금(鏤金·미세한 금 알갱이를 하나씩 붙이는 장식 기술)을 연상시켰다. 만약 육안으로만 관찰했다면 놓쳤을 디테일이다. 13세기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유럽에 들어온 단추는 신분을 상징하는 대표 수단이었다. 왕이나 귀족들은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려고 금과 루비,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단추를 앞다퉈 사용했다. 16∼17세기 프랑스 국왕들이 단추에 사치스러운 보석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수차례 내릴 정도였다. 분홍색과 녹색, 파란색 인조 다이아몬드(스트라스)와 금, 은, 크리스털로 치장된 단추는 보석 목걸이를 빼닮았다.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한 18세기 후반 유럽 자유주의 사상은 단추에도 깃들었다. 무릎을 꿇은 노예 그림과 함께 ‘나는 사람이 아니고 형제가 아닙니까?’라는 문구가 적힌 18세기 후반 단추가 눈길을 끈다. 이 문구는 1785년 창설된 ‘노예무역 철폐를 위한 협회’가 즐겨 사용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격언을 새겨 놓은 단추도 있다. 유럽 역사에서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은 영국의 산업혁명 파고가 대륙을 휩쓴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영국에서 도입돼 프랑스에서 유행한 강철 단추는 산업혁명의 강렬한 흔적을 보여준다. 당시 강철 생산량은 산업혁명의 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였다. 입체감 없이 평면의 기하학 무늬로 전면을 가득 채운 이른바 ‘아르누보’(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장식을 특징으로 한 새로운 미술양식) 단추도 눈여겨볼 만하다. 백승미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일본 우키요에(목판화) 영향을 받은 19세기 말 프랑스 아르누보 양식이 단추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요즘 페이스북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고대사 전공 학자들의 글과 댓글 때문이다. 얼마 전 그가 한 매체와의 통화에서 “일본의 연구비 지원으로 임나는 가야라는 주장을 쓴 국내 역사학자들의 논문이 많다. 여기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문득 지난해 8월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주류·재야 사학자들이 중국 요서지역을 함께 답사한 일이 떠올랐다.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삼좌점(三座店) 석성과 랴오닝(遼寧)성 갈석궁(碣石宮) 등을 둘러보며 양측은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답사 마지막 날 저녁식사 때 감정이 폭발했다. 한 재야 사학계 인사가 작심한 듯 특정 학자의 일본 유학 경력을 언급하며 ‘식민사학’을 운운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 따라 다른 역사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반일 정서에 기대 연구자들을 압박하고 학문 성과를 왜곡하는 행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0여 년의 오랜 기간 동안 조선 독립을 꿈꾸며 용맹무쌍하게 활동한 조선 치안의 암(癌)이다.” 조선총독부가 만주에서 활동한 무장투쟁 세력인 ‘조선혁명군’을 평가한 내부 문건이다. 불치병에 비유할 정도로 일제는 조선혁명군 처리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앞마당이 된 만주에서 10년 가깝게 무장투쟁을 벌인 조직은 한국과 중국을 통틀어 조선혁명군이 유일하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장은 최근 내놓은 ‘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 양세봉’(역사공간·사진)에서 조선혁명군 장기 투쟁의 원동력으로 사령관 양세봉(1896∼1934)의 탁월한 지도력과 한인 동포들의 절대 지지, 중국인들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꼽았다. 양세봉은 민족주의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모두에서 추앙받는 독립운동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그의 업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데 이어 1974년 국립현충원에 가묘를 세웠다. 북측에서는 1986년 9월 평양 애국열사릉에 그의 시신을 안장했다. 이는 그가 일제에 맞서기 위해 좌우를 떠나 중국 국민당, 공산당과 손잡는 등 광폭 행보를 보인 사실과 무관치 않다. 장 소장은 “지주나 지식인이 다수였던 무장투쟁 지도자들 가운데 소작농 출신은 양세봉이 거의 유일했다”며 “소작농으로 생계를 잇던 간도 이주 조선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힘써 사회주의자들한테도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만주뿐만 아니라 국내까지 잠입해 독립운동을 벌인 양세봉의 대담성도 빼놓을 수 없다. 조선혁명군은 1932∼33년 250여 명의 대원을 국내로 침투시켜 군자금 모집과 일본 관공서 습격 등의 활동을 펼쳤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신임 국사편찬위원장(차관급)에 임명된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72·사진)는 진보 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앞장서 반대해왔다. 조 위원장은 2015년 10월 사학계 원로들과 함께 “유신 독재체제에서 국정제가 도입돼 역사교육이 황폐화됐다”며 국정화 철회를 촉구했다. 한때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대를 다닌 연유로 현재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조 교수는 조선후기 사상사(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서 권위자로 통한다. 라틴어와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에 두루 능통하며, 학계에서 탈권위적이고 합리적인 인품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 위원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교육부 폐기로) 이제 일단락된 문제”라며 “지난 정부의 방침에 따라 국정 교과서 편찬에 참여한 편수관들에 대해 특별히 책임을 물을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한국사 관련 사실을 수집하는 국편 본연의 설립 취지에 충실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72) △가톨릭대 신학부, 고려대 사학과 졸 △고려대 한국사 석·박사 △한국사연구회장 △한국고전문화연구원장 △고려대 문과대학장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역시 믿고 보는 메리 비어드의 로마사 책이다. 전작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에서 보여준 상상력과 탁월한 미시사적 접근은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폼페이…’가 로마 변방도시 주민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렸다면, 이 책은 로마세계 심장부에서 벌어진 권력자와 시민들에게 초점을 맞춰 대조를 이룬다. 이 책과 함께 ‘폼페이…’를 읽는다면 로마 중심과 주변 속주의 실태를 폭넓게 파악하는 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비어드는 고대 라틴어를 전공한 영국인 여성 고전학자로, 로마사 연구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발굴 현장을 누비는 연구자답게 방대한 문헌과 고고 자료를 인용하며 로마인의 삶을 복원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마치 영화나 소설을 보듯 역사 현장에서 관련 인물들의 움직임과 주변 정황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책의 서두를 열고 있는 ‘카틸리나 음모 사건’이 대표적이다. 로마 공화정을 이끈 대정치가 키케로와 그의 숙적 카틸리나가 처한 상황과 이들의 선택이 구체적으로 묘사됐다. 특히 일반적인 통사(通史)류가 그러하듯 로마 기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로 페이지를 열지 않고 카틸리나의 반란을 끌어들인 게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은 대량살상무기와 테러로 얼룩진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 즉 ‘국가 안전을 위해 개인의 기본권은 어디까지 침해될 수 있는가’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명문가 후손 카틸리나는 집정관 선거에서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도 지방도시 출신의 신출내기 키케로에게 지고 만다. 연이은 선거 패배로 파산한 카틸리나는 사병을 동원해 키케로를 암살하고 로마공화정을 전복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한 뒤 반란 가담자들을 재판도 없이 모두 처형한다. 그러나 키케로는 ‘로마시민은 누구나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대원칙을 저버렸다는 반발에 부닥쳐 결국 로마에서 추방되고 만다. 로마공화정 말기 일어난 카틸리나 사건은 이후 로마제정기 황제들에 의해 원로원의 위상이 형편없이 추락했다는 점과 맞물려 적지 않은 상징성을 갖는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거라.” 책 마지막 장 할머니 해녀가 엄마 해녀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깊은 울림을 준다. “왜 산소호흡기로 편하게 작업하지 않느냐”는 손녀의 질문에 할머니는 욕심 얘기를 꺼낸다. 기계 도움 없이 오직 내 숨(들이켤 수 있는 폐활량)만큼만 해산물을 채취하는 게 해녀의 법이라는 거다. 적정량만 건지고 어린 것들은 놓아줘 바다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삶의 지혜다. 사십 줄 넘어서야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가고 있지만 마음속 욕심은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다. 좋은 동화책 한 권에 위안을 얻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발아래 금강은 유유히 흐르는데 백제 700년 역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꼭대기 정자(亭子)에 오르자, 공북루(拱北樓)로 뻗어 내린 성벽 옆으로 금강이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서기 660년 이곳에서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벌인 의자왕도 저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까…. 475년 한성(현 서울)에서 천도한 이후 64년 동안 백제 도읍이었던 웅진(공주)은 백제 부활과 멸망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공북루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최근 발굴을 마친 공터가 보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 민가 7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성안마을’이다. 여기서 백제시대 건물 터를 비롯해 ‘옻칠 갑옷’ 등 각종 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발굴단은 당초 견해를 바꿔 백제 왕궁 정전(正殿) 터가 성안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故) 이남석 공주대 교수(발굴단장)와 함께 오랫동안 공산성 발굴에 참여한 이훈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스승을 회고했다. “사람이 세상 떠날 때를 택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30년 넘게 공산성 발굴에 매달린 분답게 마지막 9차 발굴까지 모두 마친 직후에 돌아가셨어요.”○ 당나라 연호 적힌 옻칠 갑옷 출토 “아 행정관(行貞觀) 명문이다!” 2011년 10월 중순 성안마을 내 저수지 발굴현장. 지표로부터 6.5m 깊이 바닥에 깔린 풀을 대나무 칼로 조심스레 떼어내던 이현숙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행여나 유물을 밟을까 오랜 시간 쪼그린 자세로 까치발을 한 탓에 그의 탄성엔 고통이 배어 있었다. 햇볕에 노출된 직후 감청색 빛깔을 드러낸 옻칠 갑옷 조각 위로 빨간색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행정관’ 뒤로 ‘十九年四月卄一日’(19년 4월 21일) 글자도 있었다. 행정관이 무슨 뜻인가. 전화로 보고를 받은 이남석이 급하게 현장으로 뛰어왔다. 명문을 유심히 들여다본 스승이 제자를 슬쩍 나무랐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 정관(貞觀)으로 읽어야지. 당나라 연호 아닌가.” 백제시대 유물에서 당나라 연호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정관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 태종의 연호로, 정관 19년은 서기 645년(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 문헌 기록이 절대 부족한 고대사에서 연대가 적힌 명문은 역사 해석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핵심 자료다. 명문도 명문이지만 옻칠 갑옷 발굴도 대단한 성과였다. 가죽에 10여 차례 이상 옻을 덧바르는 갑옷은 삼국시대 최고 사치품으로 통한다. 더구나 옻칠 갑옷과 함께 쇠 갑옷, 마갑(馬甲), 대도(大刀), 장식칼 등 기마병의 화려한 말갖춤이 한 세트로 묻혀 있었다. 백제시대 공산성의 위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1급 유물들이다. 주변 발굴을 끝낸 직후 발굴단은 갑옷 발견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게 됐다. 이현숙의 기억. “성안마을 주민들이 저수지에만 우물 5개를 팠습니다. 그런데 이 중 관정(管井) 하나가 옻칠 갑옷과 불과 20cm 떨어진 곳에 설치됐더라고요. 조금만 옆쪽으로 뚫고 지나갔다면 갑옷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누가 왜 최고급 갑옷을 저수지에 묻었나 고고 유물은 발굴 못지않게 해석이 중요하다. 관련 역사 기록과 연관성은 기본이고 때론 문헌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공산성 발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옻칠 갑옷 등이 불탄 기와와 화살촉이 가득한 지층 바로 아래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말 탄 기병을 연상시키듯 갑옷, 무기, 마갑 순으로 유물들이 층위를 이루며, 물건을 감추듯 1m 두께의 풀을 갑옷 위에 덮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긴급 상황에서 옻칠 갑옷 등을 저수지 한가운데 놓았다는 얘기인데 왜 그랬는지가 미스터리다. 이를 놓고 학계에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된다. 우선 “백제는 간지(干支)를 사용했다”는 중국 역사서 한원(翰苑) 기록을 토대로 당나라 연호가 적힌 옻칠 갑옷은 중국에서 만든 거라는 견해가 있다. 당군이 웅진도독부에서 철수하면서 버린 갑옷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에 중국 연호가 새겨진 사실이 있으므로 백제가 외교용으로 갑옷을 만들었다는 반론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 “645년 5월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했을 때 백제가 금색 칠을 한 갑옷과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을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옻칠 갑옷에 적힌 645년 4월과 시기도 비슷하다. 발굴단의 해석을 이현숙이 정리했다. “백제가 당나라에 외교용으로 갑옷을 보내면서 국가기록물 차원에서 추가로 제작한 게 출토품인 걸로 보입니다.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앞두고 갑옷을 저수지 아래 묻으며 승전을 기원한 의례를 올린 게 아닐까요.”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가야사(史) 연구와 복원을 지시한 것에 대해 학계에서는 연구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와 유적 복원 속도전이 돼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학계의 가야사 연구 현황과 이후 방향을 알아본다.○ 호남 동부도 가야 영역으로 밝혀져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야사는 연구의 변방이었다. 고대 한반도의 가라(加羅·가야)국을 일본이 정복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 내용 등을 근거로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1977년 경북 고령군 지산동 44호, 45호 고분의 발굴은 가야사 연구의 전환점이 됐다. 이 고분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로 뼈와 함께 토기, 철기가 대규모로 쏟아졌고, 이를 계기로 ‘가야 고고학’이 성립됐다. 비슷한 시기 일본서기를 우리 입장에서 해석한 천관우(1925∼1991)의 연구도 나왔다. 1990년대 중반에는 대왕(大王)이나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라고 새겨진 대가야계 토기가 발견돼 가야의 정치 체제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기도 했다. 호남 동부의 대부분이 한때 가야의 영역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건 1990년대 이후다. 일제강점기에는 한 일본인 학자가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등 이른바 ‘임나4현’의 위치를 섬진강 유역으로 봤지만 이후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김태식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 지역이 전남 여수, 순천, 광양 일대일 것이라고 봤고, 2006년 순천에서 가야 고분군이 발굴되면서 설득력을 얻었다. 근래에는 전북 남원 장수 진안 임실 고분군이 가야의 것으로 드러났다. 김 교수는 “삼국사기에 우륵이 지은 가야금 곡 12개의 이름 중 10개는 사실 지명(地名)인데 그중 4개는 호남 지방”이라고 말했다.○ 섣부른 복원보다 발굴과 연구가 먼저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가야사는 고고학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아 문헌사와 고고학을 결합하는 학제적인 연구가 중요하다”며 “새로운 고고학적 자료의 증가에 따라 가야인의 삶과 죽음을 밝혀내는 연구가 필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산하 가야문화재연구소가 현재 가야사 관련 발굴조사 중인 곳은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과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이다. 금관가야의 왕궁 추정지로 여겨지는 봉황동 유적은 2015년 9월부터 발굴하고 있다. 비화가야 최고지배층이 묻힌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2014년 3월부터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연구소는 비화가야와 아라가야 등 권역별 고분문화의 특징을 규명하는 한편 출토 유물을 분류해 신라, 백제 등 다른 문화권과 비교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금관가야 시대 당시 고도(古都)를 재현하는 복원 연구도 계획하고 있다. 김세기 대구한의대 교수(고고학)는 “남원, 진안, 장수, 순천 등 호남지역에도 규모 있는 가야유적들이 산재한 만큼 가야사 연구, 복원을 폭넓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학계는 가야사 복원은 발굴조사와 같은 기초연구가 제대로 이뤄지는 게 우선이라고 보고 있다. 섣부른 복원은 유적의 의미를 훼손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고고학자는 “기초연구에 비해 복원에 더 중점을 두면 속도전 논란을 빚은 경주 월성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고대사학회장인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 연구가 현실문제 해결의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며 신중한 접근을 강조했다. 조종엽 jjj@donga.com·김상운·김배중 기자}

마치 탐정소설이나 치밀한 탐사보도 기사를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미술사 책이다. 미술사 이론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도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세계를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무려 7년에 걸쳐 고흐의 자해에 숨겨진 팩트들을 집요하게 추적한 저자의 열정에 존경심마저 일어난다. 1888년 12월 23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건 그로테스크한 사건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당시 한 지방신문에 짧게 소개된 이 사건은 나중에 고흐의 예술세계를 규정 짓는 위력을 발휘한다. 정신분열과 충동에 지배된, 광기 어린 예술가의 이미지 말이다. 프랑스로 이주한 영국인 저자가 편견을 깨고 고흐의 진짜 모습을 쫓게 된 건 아주 단순한 의문에서 비롯됐다. ‘그의 자화상에서 붕대로 감긴 귀는 어느 정도나 잘린 것인가?’ ‘잘린 귀를 매춘부에게 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많은 미술사학자가 고흐를 연구했지만 아무도 정답을 주지 못한 내용들이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의문이지만 문제를 풀기 위한 저자의 접근방식은 놀랍도록 철저했다. 고흐의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1880년대 당시 그의 이웃 주민 1만5000명의 신상정보를 모았다. 또 매춘부로 알려진 여성을 비롯한 주민들의 후손을 만나 인터뷰하고 방대한 분량의 19세기 말 공문서를 샅샅이 뒤졌다. 고흐가 동생 등 지인과 나눈 800여 통의 편지도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고흐의 귀가 몇몇 미술전문가의 주장처럼 일부만 살짝 잘린 게 아니라, 아래 귓불 약간을 제외한 전체가 잘린 사실을 알아낸다. 이와 함께 매춘부로 알려진 여성이 사실은 공창가(公娼街)에서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해주던 젊은 여성이었음을 밝혀낸다. 어려운 삶을 근근이 이어가던 여성과 고통을 나누고 싶었던 고흐의 의도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표출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흐와 그의 광기에 대한 단순화된 이미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고흐의 창작능력은 힘든 정신상태 덕분이 아니라 그것에도 불구하고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립경주박물관이 광복 직후 일본인들로부터 압수한 문화재 2600여 점에 대해 진위 감정에 나서기로 했다. 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중국 북위(北魏)시대 불상 압수품이 일제강점기 복제품으로 드러난 데 따른 조치다. (▶ , 기사 참조) 유병하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압수품들 가운데 일제강점기 민간업자들이 제작한 유물 복제품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조사할 계획”이라며 “당시 복제품이 어떻게 활용됐는지도 구체적으로 파악할 것”이라고 1일 밝혔다. 이에 따라 박물관은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전체 압수품을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앞서 경주박물관은 광복 직후 압수한 가시 겐타로 수집품 가운데 이 북위 불상에 대한 성분 분석을 실시해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전효수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최근 발표한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복제 고찰’ 논문에서 “1915년 충남 홍성군에서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가 촬영한 흑백사진 속 불상이 경주박물관 소장품과 똑같은 형태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흑백사진에 찍힌 불상은 당시 홍성에 거주한 일본인 판사가 소장한 것으로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 산둥성 린수현박물관에도 같은 모양의 북위 불상이 소장돼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들 불상의 광배 뒷면에는 “정광 6년(525년) 6월 10일 베이징에 사는 선경건 부부가 미륵불상 한 구를 삼가 만들다. 위로는 국가와 사방이 안정되고 만민의 바람을 널리 쓸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라는 내용의 명문이 똑같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는 분명 한 구를 만들었다고 돼 있는데 불상은 최소 3점이 발견된 것이다. 전 연구사는 “적어도 중국 박물관 혹은 흑백사진 속 불상 중 하나는 복제품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진품의 소재는 현재로선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이와 관련해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교토제국대 교수의 제안으로 1920, 30년대 일본 우에노 제작소가 만든 유물 복제품들이 주목된다. 그는 한반도 고분 발굴에 참여한 일본 고고학자다. 최근 경주박물관이 입수한 1931년 ‘고고학 관계자료 모형 도보’에 따르면 우에노 제작소는 교육·전시용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 유물 400여 점을 정밀 복제했다. 이 중 한국 문화재는 고려시대 인종 시책과 경주 입실리 청동기를 비롯해 총 17건 53점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한국 문화재의 복제품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 연구사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훼손해 일제 식민사관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깔려 있었다고 분석한다. 평양 낙랑무덤 출토 유물처럼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흔적이 짙은 유물들이 복제 대상으로 많이 선정됐기 때문이다. 실제 모형 도보가 일제강점기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교육 자료로 배포된 사실이 확인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국면에서 약간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발언 말미에 뜸을 들이면서 ‘가야사(史)’ 얘기를 꺼냈다. 문 대통령은 “지금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국정과제를 정리하고 있는데, 지방 공약에 포함됐던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꼭 좀 포함시켜 주면 좋겠다”고 지시했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등 회의 참석자들은 대통령의 언급을 예상치 못한 듯 “아, 가야사…”라고 되뇌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가야사 연구와 복원이 영남과 호남 간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사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 고대사가 삼국사 중심이라 그 이전 가야사는 신라사에 덮여서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야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북까지의 역사로 생각하는데, 사실 섬진강과 광양만, 순천만, 심지어 남원 일대와 금강 상류 유역까지 유적들이 남아 있다”며 “가야사 연구 복원은 말하자면 영호남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발언 말미에 “국정자문위가 국정과제를 정리하고 나면 기회를 놓치고, 그 뒤로는 다시 과제로 삼기 어려울 수 있으니 이번에 충분히 반영해 주시길 바란다”며 해당 사안을 관철하려는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부산경남 지역 공약으로 ‘가야 문화권 개발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약속한 바 있다. 실제로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는 영호남의 길목인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영남·호남 공동선대위 발족식과 같은 행사를 추진하다 일정상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어려서부터 역사를 좋아해 역사 공부가 가장 즐거웠고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다’고 적을 정도로 역사에 관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새 정부 출범 후 영남 인사들은 대통령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지냈고, 호남 출신 중용이 계속되면서 지역민들은 약간 서운한 감정을 느낀 것도 사실”이라며 “이번 가야사 발언은 영남 지역 지지자들에 대한 선물인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해에 지역구를 둔 민주당 민홍철 의원은 “가야 문화권 복원은 단순 지역 공약이 아니고, 일본이 고대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에 맞서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는 사업”이라며 “경남·북, 전남·북에 걸친 가야 유적지를 관광벨트화해 낙후지역 소득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역사학계는 “신라사에 비해 연구자 수와 지원이 부족했던 가야사 관련 연구 기반이 확충될 기회”라며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가야 유적지가 밀집한 경남 지역 지방자치단체들은 올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힘이 실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문화유적 복원사업을 주도하면 자칫 속도전으로 흐르면서 부실 발굴이 초래될 수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유근형 noel@donga.com·김상운 기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중국 북위시대 불상이 일제강점기 복제품인 것으로 확인됐다. 전효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27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린 동원학술대회에서 “1945년 광복 직후 압수한 가시이 켄타로 수집품 가운데 북위시대 불상에 대한 성분분석을 실시한 결과 복제품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전 연구사에 따르면 1915년 충남 홍성군에서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가 촬영한 흑백사진 속 불상이 경주박물관 소장품과 똑같은 형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흑백사진에 찍힌 불상은 당시 홍성에 거주한 일본인 판사가 소장한 것으로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흥미로운 건 중국 산둥성 임술현박물관에도 같은 모양의 북위 불상이 소장돼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 불상의 광배 뒷면에는 “정광 6년(525년) 6월 10일 베이징에 사는 선경건 부부가 미륵불상 한 구를 삼가 만들다. 위로는 국가와 사방이 안정되고 만민의 바람을 널리 쓸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라는 내용의 명문이 똑같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는 분명 한 구를 만들었다고 돼 있는데 불상은 최소 3점이 발견된 것이다. 전 연구사는 “적어도 중국 박물관 혹은 흑백사진 속 불상 중 하나는 복제품임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한반도 고분 발굴에 참여한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 교토제국대 교수(고고학)의 제안으로 1920~30년대 우에노제작소가 제작한 유물 복제품들이 주목된다. 최근 경주박물관이 입수한 1931년 ‘고고학 관계자료 모형 도보’에 따르면 우에노제작소는 교육·전시용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온 400여점의 유물을 정밀 복제했다. 이 중 한국 문화재는 고려시대 인종 시책을 비롯해 총 17건 53점을 차지하고 있다.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2007년 논문에서 복제품으로 지목한 ‘입실리 청동기(국립경주박물관 소장)’도 모형 도보에 포함돼 있다. 이에 따라 경주박물관 소장 북위시대 불상도 일제강점기 문화재 복제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전 연구사는 “일본 민간업자들이 만든 불상이 한반도를 거쳐 중국까지 유통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일제강점기 수집 문화재에 대해 세심한 관찰이 요구된다”고 설명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백제 왕성인 서울 풍납토성에서 레미콘공장 영업을 허용한 법원 판결에 대해 역사·고고학계가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고고학회와 한국고대사학회, 백제학회 등 16개 학회와 전국고고학교수협의회는 30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풍납토성을 지켜야 합니다’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앞서 삼표산업이 제기한 레미콘공장 터 사업인정고시 취소소송에서 대전지방법원이 올 초 피고(국토교통부, 문화재청, 서울시) 패소 판결을 내린 데 따른 것이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풍납토성은 국내외 학술지와 대중서에 백제 왕성으로 기술된 중요한 국가사적”이라며 “법원 판결은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가 결여돼 있다”고 지적했다. 대전지법은 판결 이유에 대해 “수용 대상 터에 서쪽 성벽이 존재한다는 개연성이 없거나 매우 낮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고학회는 “매장문화재는 지하 8∼10m 아래 묻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지상에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성벽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고고학 기본 상식에 배치된다”고 반박했다. 풍납토성은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건물 터와 도로, 우물뿐만 아니라 11m 높이의 성벽이 발견돼 한성백제시대(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왕성으로 확인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장세담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일본을 거스르는 불량한 조선인) 청년들 사이에서 유력한 자로서 경성(현 서울)과 안동현(중국 단둥), 봉천(선양) 등을 왕래하며 불평(不平) 동지를 규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 헌병대가 1914년 10월 24일 작성한 정보보고 문건이다. 헌병대는 “장세담의 용건은 청년들을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장세담은 단국대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범정 장형 선생(1889∼1964)의 가명. 그는 서울에서 만주에 이르는 일제의 촘촘한 감시망을 뚫고 신흥무관학교 입학생 모집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1914년 보성전문학교 재학생이던 김연우와 고정식이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을 비롯한 신민회원들이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중국 지린(吉林) 성 류허(柳河) 현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무려 3500명의 독립군을 양성한 항일 무장투쟁 전초기지였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주요 간부들도 이 학교 출신이다. 그런데 역사학계에서는 엄혹한 일제강점기 신흥무관학교가 많은 학생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모집했는지 미스터리였다. 박성순 단국대 교수는 최근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 발표한 논문에서 서간도에 산재된 비밀 거점을 통해 신흥무관학교 입학생을 모집한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입학생들은 서울에서 평양, 신의주를 거쳐 안동현에 1차 집결했다. 여기서 일부는 환런(桓仁), 퉁화(通化)를 거쳐 류허 현(신흥무관학교)으로 들어가거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번화한 선양(瀋陽)을 거쳐 메이허커우(梅河口)를 통과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미곡상과 무역상, 숙박업자 등으로 위장한 안동현 내 비밀 연락거점의 역할이 중요했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넘어온 입학생이나 독립운동가들을 신흥무관학교와 연결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예컨대 경기 용인에서 태어난 유학자 맹보순은 1910년 안동현으로 망명한 뒤 상점을 운영하며 신흥무관학교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당시 안동현에는 1911년 일본 동양척식회사의 토지 강탈을 계기로 이주한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역이 있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가까운 친척이 무리해서 서울 목동으로 이사를 갔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들 때문이다. 친척은 “동네 재개발이 지지부진하면서 덩달아 인근 A고교의 명문대 진학률도 크게 떨어졌다”고 푸념했다. 그는 “대학 입학사정관들이 전국 고등학교를 서열화하는 게 현실이니 이사라도 가야 한다”고 했다. 20여 년 전 A고교를 졸업한 나는 적잖이 놀랐다. 실제로 불과 20년 사이에 A고교의 대학 진학률에 큰 변동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주거 여건의 변화에 따른 사회 계층화가 교육에 끼치는 ‘살벌한’ 영향에 소름이 끼쳤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교육과 시험 제도를 사회사 관점에서 집중 연구해온 학자다. 책은 대학입시와 국가고시 등 각종 시험 제도가 극심한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 주목한다. 능력에 따라 보상하는 게 정의라는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에서 시험은 마치 일상의 공기처럼 당연한 걸로 여겨진다. 저자가 상세히 설명하는 중국 수나라 이래 1000년 넘게 이어진 과거제 역사는 시험의 뿌리 깊은 연원을 보여준다. 그러나 철학자 존 롤스가 주장한 것처럼 현실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능력주의의 함정이다. 실제로 이른바 ‘강남 3구’ 출신의 명문대 및 로스쿨 입학 비율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최근 학생부종합전형이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전제하고 있다는 지적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제는 능력주의를 앞세운 시험 지상주의가 엘리트주의와 결합해 ‘불합리한 차별’을 정당화한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예컨대 정규직,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 못지않게 명문대와 비명문대 출신 사이의 임금격차도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미국에서도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평균 연봉이 노동자들의 20배(1965년)에서 276배(2015년)로 크게 벌어져 사회문제가 됐다. 비상식적인 차별이라는 지적에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의 대응은 어쩌면 무책임할 수 있다. 저자는 “엘리트들이 권력자들과 야합해 점점 더 폭리를 취하는데도 그들을 비판할 주체도 근거도 사라지고 있다”고 썼다. 시험 지상주의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악용돼 민주주의에 역행할 수 있다는 지적도 눈여겨볼 만하다. 예컨대 과거제도는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성리학 지배질서를 사회적으로 확대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국에 과거제를 뿌리내린 당 태종이 “천하의 영재가 모두 내 올가미에 걸려들었다”고 큰소리를 친 이유다. 일본 제국주의도 제국대학과 각종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식민주의에 적극 활용했다. 1934년 경성제국대 예과 입시에서 수학, 영어 과목은 200점 만점이었던 데 비해 일본어는 무려 600점이나 배점됐다. 일본어보다 한국어 교육에 힘쓴 뜻있는 조선인들을 고등교육에서 배제하고 내선일체를 강요한 조치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