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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투자가 앤드루 베벨은 20세기 초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를 호령했다. 앤드루는 1929년 경제 대공황 시절, 주가가 떨어졌을 때 수익을 내는 공매도(주식을 빌린 뒤 매도하고 미래의 가격에 주식을 되사서 갚는 매매 기법으로 향후 주가 하락에 베팅해 수익을 내는 방법)에 투자해 큰 이득을 얻었다. 대공황 직후엔 망한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고 경제가 회복된 뒤 비싼 값에 팔았다. 공격적인 주식 투자로 떼돈을 번 수완가인 셈이다. 반면 앤드루는 시장 붕괴를 주도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공매도를 정확한 시점에 성공한 데엔 ‘주가 조작’ 세력과의 결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앤드루는 또 1933년 뉴딜 정책 때 공매도를 시도했다가 대중으로부터 비난도 받는다. 나라가 망하는데 투자한 것에 대한 반발 심리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앤드루를 ‘투자의 귀재’와 ‘투기꾼’ 중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그 둘을 구분하는 게 가능은 할까. 아르헨티나 출신 미국 작가 에르난 디아스(50)는 올 2월 국내 출간된 장편소설 ‘트러스트’(문학동네)에서 이처럼 돈에 대한 민감한 문제를 다룬다. ‘트러스트’는 지난해 미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올해의 책에 선정됐고, 에르난은 이달 8일(현지시간) 미 퓰리처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미국에선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으로 금융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이 퓰리처상 수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나오며 화제를 끌고 있다. 에르난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난 경제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라 SVB 파산이 수상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며 “다만 ‘트러스트’를 읽으며 금융권의 신뢰에 대해 생각하게 된 사람이 많다. 소설의 힘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금융 시스템을 완벽히 알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간극에 대해 알고 싶었죠.” 에르난이 소설 제목을 ‘트러스트’로 정한 건 돈이 곧 신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르난은 “모든 금융 시스템은 신뢰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돈은 사람들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짜”라고 했다. 에르난은 또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많은 금융 위기를 생각해 보라”며 “신뢰가 무너진 뒤 우리는 얼마나 비참해졌나. 우리의 삶이 가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라고 되물었다. 에르난은 소설에서 ‘투자 귀재’ 앤드루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룬다. 예를 들어 1부는 한 소설가의 시선에서 진행되는데, 소설가는 앤드루의 공매도를 ‘장난질’로 규정한다. 반면 앤드루가 쓴 자서전 버전인 2부에선 앤드루가 자신은 투자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스스로 변호한다. 독특한 건 앤드루의 비서가 집필한 버전 3부와 앤드루 아내가 쓴 버전인 4부에서 숨겨진 ‘비밀’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소설의 끝에 이르렀을 때 우린 앤드루를 단순히 지지 혹은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에르난은 “세상의 진실은 복잡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만을 신뢰한다. 선입견이 무너진 뒤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다”며 “내가 사랑하는 일본 영화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의 영화 ‘라쇼몽’(1950년)처럼 관점에 따라 진실이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뒤 에르난은 일약 영미 문학의 ‘스타’가 됐다. 소감을 묻자 소박한 답변이 돌아왔다. “전 그동안 고독하게 혼자 일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계속 작품을 쓰겠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엉뚱한 소리 하나는 잘해. 암기는 꼴찌인 녀석이.” 한 프랑스 소년은 학창 시절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소년은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너처럼 형편없는 녀석은 커서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고 잔소리했다. 글쓰기 숙제에 대해선 “이렇게 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소년은 주눅 들지 않았다. 제멋대로 살고, 쓰고 싶은 대로 썼다. 소년은 커서 전 세계에 3000만 부의 책을 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이 책은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에세이다. 그는 장편소설 ‘신’(2004년) ‘파피용’(2006년)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소설을 꾸준히 펴냈지만, 자전적 이야기를 책에 털어놓은 건 처음이다. 어린 시절부터 유명 작가가 된 지금까지의 삶의 여정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그가 이야기를 처음 쓴 건 여덟 살 때다. 자유로운 소재로 글을 써오는 학교 과제에 그는 ‘벼룩의 추억’이란 짧은 소설을 썼다. 소설에서 벼룩은 인간의 발에서 머리까지를 여행한다. 벼룩은 양말을 빠져나온 뒤 장딴지 털을 헤치고 기어오른다. 배꼽에 빠지고, 새끼손가락의 공격을 받지만 끝내 머리 꼭대기에 도착한다. 환한 빛이 비치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벼룩은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누군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어린 시절 그는 개미를 관찰하는 게 취미였다. 가끔은 개미를 유리병에 가둬 놓은 뒤 개미가 불쌍하단 생각이 들 때 풀어주곤 했다. 그때마다 ‘난 왜 개미의 생사를 선택할 수 있을까’ ‘거대한 존재가 인간을 관찰하고 있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상이 커져 장편소설 ‘개미’(1991년)를 쓰게 됐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로 성실함을 꼽는다. 오랫동안 앉아 있기 힘든 강직성 척추염에 시달리면서도 수십 년간 매일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7시까지 자료조사와 집필을 지속해 왔다. “책을 읽어줄 독자가 존재하는 한 계속 글을 쓸 생각”이라는 그가 후속작에서 어떤 기막힌 상상력을 풀어놓을까. 다음 달 한국에 출간되는 장편소설 ‘꿀벌의 예언’이 벌써 기대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먹고살기 힘들어 문학판을 떠나려고 했어요.” 천명관 작가(59)는 최근 전화 통화에서 장편소설 ‘고래’(2004년)로 올해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기 전까지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그가 2016년 장편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예담) 이후 책을 펴내지 않다가 지난해 3월 영화 ‘뜨거운 피’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왜 그는 먹고살기 힘들었을까. 2015년 출범한 문학잡지 ‘악스트’의 창간호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천 작가는 악스트에 “글을 써서 자기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어야 한다”며 “문학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는 밥벌이가 돼야 한다”고 토로했다. 또 천 작가는 “한국에서 문학은 종교처럼 숭고한 태도와 정신적 가치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며 “밥벌이는 천한 일이고 예술은 숭고하다는 식의 분위기가 문제”라고 했다. 천 작가는 대학 국문학과 교수 등 한국 문단을 주도하는 이른바 ‘선생님’들을 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천 작가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왜 선생님들의 지도편달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며 “대중 위에 군림하는 대신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걸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도 했다. 사실 천 작가는 ‘선생님’들이 외면한 작가가 아니다. 천 작가는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 2004년 문학동네 소설상, 2014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고래’가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걸 보면 사실 ‘선생님’들의 판단이 시장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보긴 힘들다. 출판계의 오랜 불황을 오롯이 ‘선생님’들 탓으로 몰 수도 없다. 다만 요즘 영국 ‘선생님’들은 변화하는 독서 시장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부커상 홈페이지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에 번역된 소설을 구매한 독자 중 35세 이하가 절반(48.2%)에 달한다. 반면 60세 이상 독자는 13.2%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젊은 독자가 좋아할 만한 신선한 작품을 소개해 출판계를 부흥시키자는 게 영국 ‘선생님’들의 전략이다. 부커상은 이 전략을 홈페이지에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출판계가 나아갈 방향으로 제시한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지목된 후 ‘고래’는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북스에서 ‘신작 코미디 드라마’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국내 서점 베스트셀러에도 올랐다. ‘고래’가 비록 최종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영국 ‘선생님’들 덕에 천 작가는 일단 먹고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문학의 모든 걸 시장에 맡길 순 없다. 다만 한국 ‘선생님’들도 영국 ‘선생님’들처럼 변화하는 독서 시장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면 어떨까. 젊은 독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신선한 작품을 ‘선생님’들이 발굴한다면 독자가 유튜브가 아닌 책과 가까워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이 팔리면 작가의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다. 그래야 능력 있는 작가가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문학판을 떠나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제1회 백릉 채만식문학상 수상자로 심아진 작가(51)가 선정됐다. 상금은 700만 원이다. 시상식은 다음 달 3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다. 1999년 계간지 ‘21세기문학’에 중편소설 ‘차 마시는 시간을 위하여’로 등단한 심 작가는 소설집 ‘숨을 쉬다’, ‘그만, 뛰어내리다’, ‘여우’와 장편소설 ‘어쩌면, 진심입니다’를 펴냈다.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가벼운 인사’가 당선됐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젊은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24일 열린 계간 ‘창작과비평’ 200호 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남주 창작과비평 편집주간(58·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이 말했다. 젊은 세대에게 ‘창작과비평’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지적에 대한 답이었다. 이 편집주간은 “온라인 독서 모임 ‘클럽 창작과비평’을 운영하며 20, 30대 독자와 소통하고 있다”며 “200호에 실린 인터뷰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하는 등 젊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1966년 창간된 ‘창작과비평’은 1970, 80년대 한국 문학과 사회에 관한 담론을 주도한 계간지 중 하나다. 1980년 강제 폐간됐다가 1988년 복간됐다. 최근에는 발행부수가 줄어들면서 영향력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편집주간은 “종이 잡지는 계속 발간할 것이다. 다만 종이 잡지와 뉴미디어를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 달 1일 출간되는 200호의 주제는 ‘새로운 25년을 향하여’다. 해마다 4차례 발간하는 만큼 25년 후 300호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뜻이다. 200호엔 문태준 박연준 등 시인 30명과 김금희 장류진 등 소설가 4명이 ‘미래’를 주제로 쓴 작품을 실었다. 장애, 플랫폼, 기후 위기 등 8개 주제에 대한 전문가 인터뷰도 담았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천명관 작가(59·사진)의 장편소설 ‘고래’(2004년)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을 하지 못했다. 23일(현지 시간) 부커상 운영위원회는 ‘고래’를 비롯해 올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편 가운데 불가리아 작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55)의 장편소설 ‘타임 셸터(Time Shelter)’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천 작가는 시상식 직후 “나온 지 거의 20년 된 ‘고래’로 갑자기 여기까지 왔다. ‘고래’는 굉장히 한국적이지만 누구나 겪는 일과 감정 같은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면이 있다고 깨닫게 됐다”고 했다.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출판계에선 ‘고래’가 비록 수상은 못 했지만 한국 문학의 세계화 가능성을 확인해 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정보라 작가의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에 이어 한국 작가의 작품이 2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고래’는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 독일어 튀르키예어로 번역 출간됐고, 이탈리아어 번역이 진행 중이다.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은 “2016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2007년)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이후 한국 문학의 국제적 인지도와 영향력이 높아졌다”며 “‘문학 한류’가 도입기를 거쳐 성장기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김용택 시인(75)은 요즘 매일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 어귀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를 걷는다.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나무 그늘에 숨어 흐르는 땀을 식힌다. 나무 곁에 서면 그네 타고, 씨름하고, 낮잠 자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겨 세상의 이치를 다 알게 된 것처럼 우쭐하다가도, 평생 자신을 지켜본 나무 아래에서 그는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김 시인은 나무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이제 생각하니/나는 작고 못났다/그런데다가/성질도 못됐다/나무야/근데 내가 인자/어찌하면 좋을까”(‘나무에게’에서) 김 시인이 14번째 시집 ‘모두가 첫날처럼’(문학동네·사진)을 최근 펴냈다. 그가 시집을 낸 건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2021년·문학과지성사) 이후 2년 만이다. 22일 전화로 만난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탓에 외부 강연을 못 다녀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했다. 2년 동안 쓴 글이 500편인데 이 중 55편을 골라 신작에 담았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1948년 섬진강 변 진메마을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살았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39년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는데, 이 중 31년을 진메마을 덕치초에서 근무했다. 시집 ‘섬진강’(1985년·창비) 산문집 ‘섬진강을 따라가 보라’(1994년·한양출판) 등으로 널리 알려진 ‘섬진강 시인’이지만, 젊은 시절엔 교사로 일하고 은퇴 후엔 시인으로 강연을 다니느라 섬진강과 가깝게 지내지 못하기도 했다. “섬진강 변을 이렇게 자주 걸은 적이 어릴 적 빼고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코로나19가 저를 섬진강과 다시 가깝게 만든 거죠.” 신작 시집엔 그가 섬진강에서 길어 올린 시로 가득하다. 그는 “아침 이슬을 달고 있는 산앵두꽃의/앙증맞은 저 집중은/나를 바꿀 만하다/지금을”(‘산앵두꽃’에서)이라고 자연에 감탄한다. 또 “떨어진 꽃잎을/주우며 생각한다/누구나 다 견디지 못할/삶의 무게가 있다고”(‘조금 더 간 생각’에서)라며 삶을 돌아본다. “자연은 정체되지 않아요. 꽃은 피고 지고, 바람은 불다가도 멈추고, 새는 나무에 앉아 있다가도 곧 날아가죠. 시집 제목을 ‘모두가 첫날처럼’이라 지은 것도 독자가 자연처럼 모든 걸 새롭게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일을 첫날처럼 생각하면 삶이 지루하지 않거든요.” 그는 나비를 바라보며 시인의 삶도 성찰한다. “나비는 날개를 펼 때/권력을 이용하지 않는다”(‘시인’에서)라고 생각하고, “나비는 시에서 태어났다/말로 날개를 단 것들의 괴로움을 알고 있는 그 나비는/다시는 시에 앉지 않는다”(‘다시는, 다시는’에서)라고 고백한다. “나비는 바람(권력)을 타고 날기보단 스스로 바람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 같아요. 저는 나비를 보며 시를 쓰지만, 나비는 제가 쓴 시(말)와 상관없이 날아다니기도 하고요.” 김 시인은 낮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옛집을 개조한 진메마을 ‘임실 김용택 시인 문학관’에 머물며 글을 쓰고, 밤엔 문학관 뒤편 자택에서 잔다. 고향을 떠날 계획이 없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40년 가까이 학교 선생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섬진강이 저의 선생이더라고요. 전 죽을 때까지 고향에서 글 쓰며 늙어가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이에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김용택 시인(75)은 요즘 매일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 어귀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를 걷는다.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나무 그늘에 숨어 흐르는 땀을 식힌다. 나무 곁에 서면 그네 타고, 씨름하고, 낮잠 자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겨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것처럼 우쭐하다가도, 평생 자신을 지켜본 나무 아래에서 그는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김 시인은 나무에게 고해성사한다. “이제 생각하니/ 나는 작고 못났다/ 그런데다가/ 성질도 못됐다/ 나무야/ 근데 내가 인자/ 어찌하면 좋을까”(시 ‘나무에게’에서)김 시인이 이달 10일 14번째 시집 ‘모두가 첫날처럼’(문학동네)을 펴냈다. 그가 시집을 펴낸 건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2021년·문학과지성사) 이후 2년 만이다. 22일 전화로 만난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탓에 외부 강연을 못 다녀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했다. 2년 동안 쓴 글이 500편인데 이중 55편을 골라 신작에 담았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는 1948년 섬진강 변 진메마을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살았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39년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는데, 이중 31년을 진메마을 덕치초에서 근무했다. 그는 시집 ‘섬진강’(1985년·창비) 산문집 ‘섬진강을 따라가 보라’(1994년·한양출판)로 알려진 ‘섬진강 시인’이지만, 젊은 시절엔 교사로 일하고 은퇴 후엔 시인으로 강연을 다니느라 섬진강과 가깝게 지내지 못하기도 했다.“섬진강 변을 이렇게 자주 걸은 적이 어릴 적 빼고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코로나19가 저를 섬진강과 다시 가깝게 만든 거죠.”신작엔 그가 섬진강에서 길어 올린 시로 가득하다. 그는 “아침 이슬을 달고 있는 산앵두꽃의/앙증맞은 저 집중은/나를 바꿀만하다/지금을”(시 ‘산앵두꽃’에서)이라고 자연에 감탄한다. 그는 또 “떨어진 꽃잎을/주우며 생각한다/누구나 다 견디지 못할/삶의 무게가 있다고”(시 ‘조금 더 간 생각’에서)라며 삶을 돌아본다.“자연은 정체되지 않아요. 꽃은 피고 지고, 바람은 불다가도 멈추고, 새는 나무에 앉아있다가도 곧 날아가죠. 시집 제목을 ‘모두가 첫날처럼’이라 지은 것도 독자가 자연처럼 모든 걸 새롭게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일을 첫날처럼 생각하면 삶이 지루하지 않거든요.”그는 나비를 바라보며 시인의 삶도 성찰한다. 그는 “나비는 날개를 펼 때/ 권력을 이용하지 않는다”(시 ‘시인’ 에서)라고 생각한다. 그는 또 “나비는 시에서 태어났다/ 말로 날개를 단 것들의 괴로움을 알고 있는 그 나비는/ 다시는 시에 앉지 않는다”(시 ‘다시는, 다시는’에서)라고 고백한다.“나비는 바람(권력)을 타고 날기보단 스스로 바람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나비를 보며 시를 쓰지만, 나비는 제가 쓴 시(말)와 상관없이 날아다니기도 하고요.”그는 낮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옛집을 개조한 진메마을 ‘임실 김용택 시인 문학관’에 머물며 글을 쓰고, 밤엔 문학관 뒤편 자택에서 잔다. 고향을 떠날 계획이 없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40년 가까이 학교 선생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섬진강이 저의 선생이더라고요. 전 죽을 때까지 고향에서 글 쓰며 늙어가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이에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전자책(e북)이 해킹됐다. 해커는 35억 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알라딘은 22일 “e북 상품이 유출돼 경위와 피해 규모를 파악 중이다”라고 밝혔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알라딘 e북 100만 권을 탈취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출판계에 따르면 해커는 알라딘을 해킹해 e북을 가로챘고, 알라딘에 100BTC(비트코인의 화폐단위·약 35억 원)를 요구했다. e북이 불법 유통되면 저자와 출판사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박용수 대한출판문화협회 상무는 “e북이 온라인에 무분별하게 유통되면 저작권 침해가 급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알라딘은 “무단 배포된 불법 e북을 신고할 경우 포상금을 지급하고 e북의 불법 배포와 다운로드를 모니터링하겠다”고 밝혔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인공지능(AI)이 출판 산업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한국출판인회의는 25일 서울 마포구 마포중앙도서관에서 ‘2023 출판 인사이트 포럼’을 연다. 주제는 ‘대화형 AI 챗GPT가 출판에 미치는 영향’이다. 김대식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전미정 마이크로소프트(MS) AI 개발자가 강연한다. 한국문학번역원은 26일 ‘AI 번역 현황과 문학 번역의 미래’ 심포지엄을 연다. AI가 문학 번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논의한다. 정과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신중휘 네이버클라우드 파파고 이사가 각각 문학, 법, 기술적 관점에서 강연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넷플릭스, 유튜브보다 더 재밌는 콘텐츠를 제공해 고객의 ‘시간’을 가져오는 것이 목표입니다.” 온라인서점 예스24의 최세라 대표(50·사진)는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1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다른 서점이 아니라 콘텐츠 회사와 경쟁하겠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누구나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게 될 때 찾는 것이 책”이라며 “책을 파는 게 어려운 상황이지만 예스24는 책을 접점으로 한 ‘문화 플랫폼’이 되겠다”고 했다. 2003년 예스24에 입사한 최 대표는 올해 3월 대표에 선임됐다. 예스24에서 사원 출신으로 대표까지 오른 첫 사례다. 예스24를 포함해 교보문고, 알라딘까지, 3대 서점 중 여성이 대표가 된 것도 처음이다. 최 대표는 지주사인 한세예스24홀딩스의 김석환 부회장(49)과 각자대표다. 최 대표는 온라인서점만 운영하던 예스24가 2016년 서울 강남구에 중고서점을 내며 오프라인으로 확장하는 것을 주도했다. 최 대표는 “일하면서 유리천장을 느끼지 못했다”면서도 “2018년 도서사업본부장을 맡을 당시 사내 유일한 여성 본부장이라 회의에 참석했을 때 (생소함을)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숙명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올해 창립 24주년이 된 예스24는 3월 ‘예스24 오리지널’을 출범하고 정보라, 천선란 작가의 신작을 먼저 공개하며 콘텐츠 확보에 나섰다. 최 대표는 “이르면 올 9월 독자가 서평과 평점을 쓰고, 독자끼리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애플리케이션을 선보일 계획”이라며 “독자의 만남을 주선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겠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미국 서부에 주로 서식하는 ‘캘리포니아 해달’은 종종 일탈을 즐긴다. 무시무시한 백상아리 수백 마리가 가득한 바다에 놀러 가는 것이다. 이 바다엔 먹이가 많지 않다. 백상아리에게 목숨을 잃을 확률도 높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위험천만한 놀이를 즐기는 해달은 모두 태어난 지 8개월∼4년 6개월 된 개체였다. 인간으로 치면 청소년기에 해당했다. 언뜻 보기엔 쓸모없는 짓 같지만 살아남은 ‘청소년’ 해달은 독립성이 뛰어난 어른 해달로 자라났다. 부모에게서 독립해 홀로서기도 무사히 성공했다. 미국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부 교수인 바버라 내터슨 호러위츠와 미국 과학 전문기자인 캐스린 바워스는 모든 동물이 청소년기인 이른바 ‘와일드후드’를 겪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동안 동물의 유년기와 성년기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청소년기는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동물의 청소년기와 인간의 청소년기를 비슷한 선상에 두고 비교한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동물이 청소년기에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안전이다.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험준한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가젤은 생후 9개월부터 치타가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배운다. 태어난 지 1년 6개월이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어엿한 어른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이를 알지 못하면 야생에서 도태되기 때문이다. 무리 지어 행동하는 동물이라면 지위를 얻는 방법도 습득해야 한다. 대표적인 동물이 하이에나다. 하이에나 집단은 철저히 모계사회다. 태어날 때부터 서열이 높은 암컷이 어미의 지위를 물려받는다. 사람으로 치면 출생과 함께 ‘흙수저’와 ‘금수저’가 나뉘는 셈이다. 하지만 지위는 영원하지 않다. 다른 무리와 싸울 때, 사냥할 때 앞장선다면 지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지위가 높아지면 좋은 음식을 먹고, 짝짓기를 할 때 우선권을 가진다. 생존 수업엔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태어난 지 4년이 지난 수컷 혹등고래는 이른바 ‘수컷 합창단’에 들어간다.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노래를 선배 수컷에게 배우기 위해서다. 혹등고래가 훌륭한 가수가 되려면 몇 년이 걸린다. 합창단에선 어른 혹등고래가 종종 텃세도 부린다. 하지만 연애의 기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청소년 혹등고래는 이를 참는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동물은 자립한다. 수명이 가지각색인 만큼 독립 시기도 모두 다르다. 평균수명이 50일밖에 안 되는 초파리는 태어난 지 14일 만에 청소년기를 벗어난다. 400년을 사는 그린란드 상어는 180세에 독립한다. 물론 모든 동물이 성공적으로 자립하는 건 아니다. 양육자의 보호에서 벗어나려다가 다치거나 동료끼리 싸우다 죽는 동물이 적지 않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지만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든 동물은 청소년기에 홀로 서는 연습을 해야 제대로 된 어른이 된다. 인간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 올해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장편소설 ‘고래’(2004년)의 첫 문장이다. 이를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에게 ‘천명관 작가(59)의 문체를 반영해 영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챗GPT는 이렇게 번역했다. “In the days to come, it was the architect, the mastermind behind the grand theater, who unveiled her existence, introducing her to the world as the oft-revered ‘Queen of Crimson Bricks.’ Her name, resonating with a whisper of enchantment, is Chunhee(春姬).” 번역문에는 천 작가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묻어난다. 원문의 ‘붉은’은 색깔 ‘진홍색’뿐 아니라 ‘피비린내’라는 뜻을 함께 지닌 ‘Crimson’으로 번역됐다. ‘이름은 춘희이다’를 번역할 땐 원문에 없던 ‘황홀하게 울려 퍼지는’(resonating with a whisper of enchantment)이란 수식을 더했다. 이름을 번역할 때 한자 ‘春姬’를 병기한 점도 눈길이 간다. ‘고래’의 번역자인 김지영 번역가(42)가 춘희의 뜻인 ‘봄의 여자’(girl of spring)를 병기한 것만은 못하지만, 고유명사를 고려했다. 최근 출판계에서 문학 번역가를 AI가 대체할 수 있는지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이달 26일 관련 심포지엄을 열 정도다. 본보는 번역가들 사이에서 종종 쓰인다고 알려진 3대 AI 번역기와 챗GPT를 활용해 유명 문학 작품 일부를 번역해 봤다. 한국의 ‘파파고’, 미국의 ‘구글번역기’, 독일의 ‘딥엘’을 사용한 결과 직역은 나쁘지 않았지만, 문학적 표현은 살리진 못했다. 이민진 작가(55)의 장편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에서 ‘fail’은 2018년 문학사상 판에선 ‘망쳐 놓다’, 2022년 인플루엔셜 판에선 ‘저버리다’(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번역됐을 정도로 함축적인 문맥을 담은 표현이다. 하지만 구글번역기 등 AI 번역기 3개는 ‘실망’ ‘실패’ 같은 직역을 내놓는 것에 머물렀다. 챗GPT의 번역 수준은 개중 높아 보였다. 번역할 때 추가적인 요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에 실린 단편 ‘저주토끼’의 첫 문장을 정보라 작가(47)의 문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하자 챗GPT는 ‘더’(The more)를 2차례 사용하며 대구법을 썼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원문)가 “The more cursed an object, the more beautifully it should be crafted”(챗GPT)로 번역된 것. 챗GPT는 ‘파친코’의 첫 문장에서 ‘fail’을 ‘배신’이라고 그럴듯하게 번역하기도 했다. 정과리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AI를 거부하기보단 인간 번역가와 AI 번역기가 공생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며 “다만 AI의 저작권과 역할을 어디까지 인정할지는 논의할 과제”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In the days to come, it was the architect, the mastermind behind the grand theater, who unveiled her existence, introducing her to the world as the oft-revered ‘Queen of Crimson Bricks.’ Her name, resonating with a whisper of enchantment, is Chunhee(春姬).” 올해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장편소설 ‘고래’(2004년)의 첫 문장을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가 영어로 번역한 결과물이다. 원래 문장은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 챗GPT에게 ‘천명관 작가(59)의 문체를 반영해 번역해달라’고 요청한 덕인지 문장에서 문학성과 천 작가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묻어난다. 원문의 ‘붉은’은 색깔 ‘진홍색’뿐 아니라 ‘피비린내’라는 뜻을 함께 지닌 ‘Crimson’으로 번역됐다. ‘이름은 춘희이다’를 번역할 땐 챗GPT가 스스로 ‘황홀하게 울려 퍼지는’(resonating with a whisper of enchantment)이란 수식을 더해 감칠맛을 더했다. 이름을 번역할 때 한자 ‘春姬’를 병기한 점도 눈길이 간다. ‘고래’를 영어 번역자인 김지영 번역가(42)가 춘희의 뜻인 ‘봄의 여자’(girl of spring)를 병기한 것만은 못하지만, 챗GPT는 고유명사를 고려했다. 챗GPT는 자신의 실력이 못 미더웠는지 의견도 함께 내놓았다. “참고: 특정한 예시나 추가적인 맥락 없이 천 작가의 독특한 스타일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최근 출판계에서 문학 번역가를 AI가 대체할 수 있는지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이달 26일 심포지엄을 열고 AI가 번역가를 대체할 수 있을지를 논의할 정도로 관심이 모이고 있다. 본보는 번역가들 사이에서 종종 쓰인다고 알려진 3대 AI 번역기와 챗GPT를 활용해 유명 문학 작품 일부를 번역해봤다. 한국의 ‘파파고’, 미국의 ‘구글번역기’, 독일의 ‘딥엘’을 사용한 결과 직역은 나쁘지 않았지만, 문학적인 표현은 살리진 못했다. AI가 1차 번역을 하더라도 인간 번역가의 손을 다시 거쳐야 할 정도로 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한 예로 이민진 작가(55)의 장편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에서 ‘fail’은 2018년 문학사상 판에선 ‘망쳐 놓다’, 2022년 인플루엔셜 판에선 ‘저버리다’로 번역됐을 정도로 함축적인 문맥을 담은 표현이다. 하지만 구글번역기 등 AI 번역기 3개는 “실망” “실패” 같은 직역을 내놓는 것에 머물렀다. 그러나 챗GPT의 번역 수준은 비교적 높았다. 번역할 때 추가적인 요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에 실린 단편소설 ‘저주토끼’의 첫 문장을 정보라 작가(47)의 문체로 번역해달라 요청했다. 이에 챗GPT는 ‘더’(The more)를 2차례 사용하며 대구법을 사용했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원문)가 “The more cursed an object, the more beautifully it should be crafted”(챗GPT)로 번역된 것이다. 챗GPT는 ‘파친코’의 첫 문장 중 하나인 ‘fail’을 ‘배신’이라고 그럴듯하게 번역하기도 했다. AI는 이미 일부 번역가의 초벌 번역을 돕고 있다. 정과리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AI를 거부하기보단 인간 번역가와 AI 번역기가 공생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며 “다만 AI의 저작권과 역할을 어디까지 인정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작품명원문인간 번역파파고 번역챗GPT 번역천명관 장편소설 ‘고래’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chunhui-or girl of spring-was the name of the female brickmaker later celebrated as the Red Brick Queen upon being discoverd by the architect of the grand theater.Later, the woman bricklayer, whose existence was first known by the architect who designed the large theater and introduced to the world as the “Queen of Red Bricks,” was named Chun-hee. In the days to come, it was the architect, the mastermind behind the grand theater, who unveiled her existence, introducing her to the world as the oft-revered ‘Queen of Crimson Bricks.’ Her name, resonating with a whisper of enchantment, is Chunhee(春姬).정보라 단편소설 ‘저주토끼’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When we make our cursed fetishes, it’s important that they’re pretty.The more things used in curses, the prettier they should be.The more cursed an object, the more beautifully it should be crafted.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역사는 우리를 실망시켰지만, 상관없습니다.역사는 우리를 배신했지만, 아무 상관 없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이코패스라고 의심했지만 그건 아니더라고요. 전 전 대통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잘하고 가족을 대단히 아끼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대면하고 과오를 성찰해 ‘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정아은 작가(48)는 16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사이드웨이·사진)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전 대통령을 분석한 논픽션인 이 책의 부제는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신간에서 그는 전 전 대통령이 1980년 5·18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것을 ‘특별한 가벼움’이라고 정의했다. 정 작가는 “핵심을 파고들어 진상과 대면하며 괴로워하는 대신, 현상의 표면에 머물다가 내상을 입기 전에 철수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어 “전 전 대통령은 소탈하고 친화력이 좋았지만 5·18민주화운동이 폭동 혹은 북한 소행이라는 식으로 아이처럼 (잘못을 회피하고) 자신의 행동에만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정 작가는 2013년 등단해 ‘맨 얼굴의 사랑’(민음사) 등 장편소설 5권을 냈다. 이번 책을 쓴 건 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정치적으로만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 전 대통령이 퇴임한 1988년부터 사망한 2021년까지 33년 동안 정치적 논란은 많았지만 학술적으로 분석한 책은 별로 없었어요. 왜 객관적 평가가 안 됐는지 궁금했습니다.” 정 작가는 참고문헌 100여 권을 읽고, 육군사관학교 출신 등 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인물들을 수소문해 인터뷰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 전 대통령이 1979년 12·12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건 군사정권을 용인하던 시대상과 관련돼 있다고 분석한다.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서든 우격다짐으로 하던 시대였잖아요. 자기 성찰보단 카리스마가 강한 리더를 선호하는 시대상이 전 전 대통령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 겁니다.” 정 작가는 또 전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 씨(27)가 최근 전 전 대통령 일가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고 5·18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유족을 만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점에 주목했다. 33년 동안 이뤄지지 않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한 단죄가 후손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추징금 환수처럼 제도적인 영역에서 불충분했던 단죄가 전 씨의 고백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큽니다.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일에 대한 관련자의 고백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전 전 대통령이 생존했을 때 이뤄지지 않은 연구가 이제라도 진행돼야 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세계적 생태문화학자로 꼽히는 스테이시 얼라이모 미국 오리건주립대 교수가 2016년 펴낸 환경정치학 연구서 ‘노출―포스트휴먼 시대 환경 정치학과 쾌락’(사진)이 최근 번역 출간(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됐다. 이 책은 몸과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을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인간을 우위에 놓는 사고는 인간 종(種)이 지구를 지질학적 규모로 변형시킨 이른바 ‘인류세’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 기후 위기 등의 문제에 직면한 인류에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몸, 장소, 통제 불능의 물질이 서로 횡단하는 교차로에 거주한다’는 윤리학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또 모든 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조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노출’은 인류가 위험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것과 동시에 위험에 저항하는 나체 시위 등을 의미한다. 나체는 존재의 취약함과 자연과의 친밀성, 감각과 쾌락의 회복을 상징한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야생이 숨 쉬는 마당 만들기 같은 소박한 활동도 인류세를 바로잡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김명주 김정숙 충남대 교수, 이연숙 CNU 여성젠더연구소 연구원, 지명훈 동아일보 기자(철학 박사)가 함께 번역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도망치고 싶어요.” 지난해 초 이묵돌(필명·29) 작가는 마감을 재촉하는 출판사 편집자에게 이렇게 토로한 뒤 러시아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반복되는 일상, 기계적인 원고 마감, 나아지지 않는 경제 형편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그해 2월 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정처 없이 서쪽으로 나아갔다. 설원에서 얼어 죽으면 어떠랴 싶었다. 그러나 여행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택시기사에게 사기당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일주일간 격리됐다. 그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그제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28일 출간된 여행 에세이 ‘여로’(김영사·사진)의 이야기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8일 만난 이 작가는 “지난해 3월 8일 귀국했다. 한 달 만에 멀쩡히 살아왔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저는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절 말릴 가족도 없었거든요.” 이 작가는 2013년부터 페이스북에 ‘김리뷰’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영화 게임 책 등 주제와 형식에 제한이 없는 독특한 리뷰는 큰 인기를 끌어 구독자가 한때 45만 명에 달했다. 2016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리뷰 리퍼블릭’을 만들었으나 수천만 원의 빚을 지고 실패했다. 이후 이묵돌이라는 이름으로 에세이 ‘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메가스터디북스·2020년) 등 10권 이상의 책을 냈지만 그에게 글쓰기는 점점 노동으로 변해갔다. “먹고살려고 책을 썼어요. 스스로 작가라고 부르기 낯부끄러웠죠.” 여행 중 그의 마음을 바꾼 건 ‘사람’이다.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던 도어맨, 서류를 잃어버려 허둥지둥하던 그를 관공서에 데려다준 중년 여성,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을 좋아하던 숙소 주인 등 낯선 이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모습에 그는 삶의 이유를 조금씩 찾게 됐다. “횡단열차에서 만난 중년 남성 안드레이가 ‘더 배워야 한다. 그래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9년 전 자퇴했던 대학에 재입학했습니다.” 여행이 무엇을 바꿨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어느 새벽, 시베리아 한복판의 간이역에서 끊임없이 눈을 치우는 한 남자를 봤어요. 그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여행에서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적이고 가혹해 보이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다신 삶에서 도망치지 않을 용기도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도망치고 싶어요. 기왕이면 아주 먼 곳으로요.” 지난해 초 이묵돌 작가(필명·29)는 자신에게 마감을 재촉하는 출판사 편집자에게 이렇게 토로한 뒤 러시아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반복되는 일상, 기계적인 원고 마감, 나아지지 않는 경제 형편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2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정처 없이 서쪽으로 나아갔다. 목적지도 경유지도 정하지 않았다. 설원에서 얼어 죽으면 어떠랴 싶었다. 공들여 쓴 유서도 남겼다. 그러나 여행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낯선 택시기사에게 사기를 당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일주일 격리됐다. 이르쿠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시비르스크처럼 이름 낯선 도시를 거치며 별별 사람을 만났다. 그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그제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로로 핀란드 헬싱키에 간 뒤 비행기를 타고 급히 귀국했다. 지난달 28일 출간된 여행 에세이 ‘여로’(김영사)의 이야기다. 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이 작가는 “지난해 3월 8일 한국에 돌아왔다. 약 한 달 만에 멀쩡히 살아왔다”며 허탈하게 웃었다.“젊은 사람이 죽을 생각을 했다고 하면 보통 삶이 너무 고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전 살 이유가 없어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 해야할 지도 몰랐고, 절 말릴 가족도 없었거든요.” 이 작가는 2013년부터 페이스북에 ‘김리뷰’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영화 게임 책 등 주제와 형식에 제한이 없는 그의 독특한 글은 인기를 끌어 페이스북 구독자가 한때 45만 명에 달했다. 2016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리뷰 리퍼블릭’을 만들었으나 수천만 원의 빚을 지고 처절하게 실패했다. 이후 이묵돌이라는 이름으로 에세이 ‘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메가스터디북스·2020년) 등 10권 이상의 책을 냈지만, 그에게 글쓰기는 점점 노동으로 변해갔다.“먹고 살려고 책을 썼어요. 스스로 작가라고 부르기 낯부끄러웠죠. 도망치고 싶었던 곳이 왜 시베리아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생명의 흔적도, 살아갈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는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죽음을 찾아 떠난 그의 마음을 바꾼 건 사람이다.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던 도어맨, 서류를 잃어버려 허둥지둥하는 그를 관공서에 데려다준 중년여성,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을 좋아하던 숙소 주인 등 낯선 이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모습에 그는 삶의 이유를 조금씩 찾게 됐다.“횡단열차에서 만난 중년남성 안드레이가 제게 ‘더 배워야 한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땐 인생의 선배라도 되는 것처럼 훈계하는 안드레이의 태도가 싫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죠. 결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9년 전 자퇴했던 대학에 재입학했습니다.” 여행이 무엇을 바꿨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어느 새벽, 시베리아 한복판의 간이역에서 끊임없이 눈을 치우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모두가 동경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그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전 이번 여행에서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적이고 가혹해 보이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다신 삶에서 도망치지 않을 용기도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340만 년 전 깨진 돌조각으로 짐승의 고기를 잘랐다. 최초의 직립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먹 도끼를 사용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9만 년 전엔 송곳 작살 등 간단한 도구, 4만 년 전엔 바늘 같은 정교한 도구를 만들었다. 이제 인간은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처럼 복잡한 도구를 사용해 문명을 발달시킨다. 반면 인간과 유전자가 98.5% 같은 침팬지는 거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돌로 견과류를 쳐서 깨 먹거나 나무 막대기를 개미집에 쑤셔 넣었다 뺀 뒤 개미를 훑어 먹는 정도에 불과하다. 일부 도구를 사용하는 다른 동물도 수준이 지극히 낮다. 왜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엔 이런 차이가 발생한 걸까.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 진화생물학과 교수인 저자는 다른 개체가 서로 영향을 끼치며 진화하는 ‘공진화(共進化)’를 인간이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은 동물이 기후, 포식자, 질병에서 강한 자만 살아남는 ‘자연 선택’에만 의존해 진화했다고 봤지만, 인간의 공진화는 간과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랑이들 사이에선 빨리 달리고 힘이 센 호랑이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비해 인간은 힘이 부족하거나 지능이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 타인에게 생존 비결을 물어 배우거나, 여럿이 함께 뭉쳐 다니며 서로 도우면 생존하고 후손을 낳을 수 있었다. 저자는 특히 공진화에 문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책을 집필하고, 언어로 소통하는 문화적 능력을 바탕으로 인간이 지식을 공유하고 축적해 왔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인간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문화를 만든 게 아니라, 문화 덕에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인공지능(AI) 시대, 인간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적지 않다. 어쩌면 ‘자연 선택’에서 인간은 빅데이터를 학습한 AI에게 밀릴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스스로를 빚어내는 독특한 종”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소통할 줄만 안다면 인간은 다시 한번 ‘자연 선택’을 벗어나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 소설에는 내가 쓴 문장도 있고 챗GPT가 쓴 문장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소설가 정지돈은 최근 단편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발표하며 이렇게 썼다. ‘끝없이…’는 정지돈이 챗GPT를 활용해 썼다. 챗GPT는 혼자 단편소설을 완성할 능력은 되지 않았다. 다만 챗GPT가 만든 짧은 문장을 정지돈이 연결하고, 배열해서 소설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정지돈은 챗GPT와 자신이 쓴 문장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쓴 것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건 ‘원고료’의 주인이었다. 정지돈이 소설을 잡지에 기고한 만큼 원고료를 받았을 텐데 챗GPT는 원고료를 받았을까. 만약 ‘끝없이…’가 책으로 묶여 출간된다면 인세는 정지돈이 다 가져가는 게 맞을까.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창작자를 위한 챗GPT 저작권 가이드’를 읽게 됐다. ‘창작자를…’은 현직 변리사가 저작권법 측면에서 인공지능(AI)의 창작을 들여다본 책이다. 저자는 먼저 챗GPT가 ‘저작권자’가 될 수 있는지 들여다본다.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저작권자로 인정돼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한국에선 챗GPT가 저작권자가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현행 저작권법은 저작권자가 권리를 지니는 저작물의 범위를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끝없이…’의 원고료를 챗GPT가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다. 그런데 정말 인간만 저작권자가 될 수 있을까. 2020년 중국 법원은 세계 최초로 텐센트사의 AI ‘드림라이터’가 쓴 기사에 대해 저작권을 인정하면서 해당 기사를 무단 사용한 상하이잉쉰과학기술이 텐센트사에 1500위안(약 29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올해 2월 미국 저작권청은 만화 작가 크리스 카슈타노바가 AI를 활용해 만든 만화의 저작권을 판단할 때, 작가가 그림을 선택하고 배치한 부분에 대해서만 저작권을 인정했다. AI를 활용했다면 인간이 모든 권리를 다 가져갈 수 없다는 해석이다. 문제는 창작 윤리 문제가 생겼을 때다. 만약 챗GPT가 다른 인간의 창작물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드러난다면 누가 책임져야 할까. 또 표절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된다면 인간과 AI 중 누가 배상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현 법률상 챗GPT는 권리가 없기에 배상 의무도 없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챗GPT에 속은 챗GPT 이용자와 작품을 표절당한 소설가 모두 손해를 보지만 누가 이를 책임져야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셈이다. 저자는 저작권법에서나마 AI를 인간으로 인정하거나, AI 개발자에게 표절을 막는 기술을 포함하는 의무를 부여하는 식으로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한다. 다만 법 개정 전까진 챗GPT를 사용해 소설을 썼다고 명시해야 윤리적 논란이 없을 것 같다. 인간도 종종 표절했는지 헷갈린다고 말하는데, AI라고 표절을 스스로 인정할까 싶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