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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보수주의자라는 말은 오랫동안 낙후된 사람이거나 심지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라는 의미와 동일하다고 여겨졌다.” 1953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실린 이 책에 대한 서평의 일부다. 보수에 대한 관점이 현재 한국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놀랍다. ‘보수의 정신’을 논한다는 이 책이 새삼스레 눈에 띄는 이유다. 이 책이 출간된 1950년대 미국은 자유주의가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자유주의가 초래할 결함을 간파했던 보수주의 사상사를 정리하고 보수의 핵심 가치를 정립한 이 책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저자는 보수주의가 존경받을 만한 미국의 핵심 전통임을 내세우며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영미 역사, 정치학사를 살핀다. 개혁의 위험성을 간파한 버크에서부터 ‘평범함’이란 악을 낳는 민주주의의 모순을 다룬 토크빌, 규범적 자유를 옹호한 존 애덤스 등의 사상을 두루 다룬다. 보수의 핵심 가치로는 ‘초월적 질서에 대한 믿음’ ‘자유와 재산은 밀접히 연관됐다는 신념’ ‘신중한 개혁 선호’ 등을 제시한다. 출간 당시 저자는 ‘타임’ 같은 유명 매체에서 조명받았지만 자유주의 전통이 강했던 지성계로부터는 축출됐다고 한다. 60년이 더 지나서야 번역된 까닭을 짐작게 한다. 진정한 보수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에서 현재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더벅머리 곰 톰은 머리가 길어 치렁치렁하다. 미용사를 만나 단정하게 자르고 싶다. 길을 떠난 톰은 플라밍고 여우 코끼리를 만날 때마다 머리를 잘라 줄 수 없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다른 직업을 가진 동물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과연 톰은 솜씨 좋은 미용사를 만나 머리를 자를 수 있을까. 사소해 보여도 우리가 맡은 일은 모두 중요함을 알려준다. 로커처럼 머리가 자란 아기 곰 톰이 웃음을 자아낸다. 마지막에 변신한 모습도 귀엽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프랑스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26)이 쓴 소설을 읽는 건 특이한 경험이다. 재작년 국내에서 출간된 데뷔작 ‘속초에서의 겨울’(북레시피)은 배경부터 등장인물까지 무척 한국적이어서 해외문학이라는 이질감을 느끼기 어렵다. ‘불어로 쓴 한국 이야기’를 번역판으로 읽는 이 기묘한 느낌은, 정체성 혼란 때문에 창작을 시작했다는 한국계 프랑스 작가의 복잡한 내면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한다. 이 작가와 한국 독자들은 이런 ‘낯선 방식’으로 조우한다. 지난달 31일 주한 프랑스대사관이 주최한 프랑코포니 축제 참석차 방한한 뒤사팽 씨를 만났다. 데뷔작으로 로베르트 발저상, 프랑스 문필가협회신인상 등 유럽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한국에서도 대전, 부산 등에서 독자들과 만나며 바쁜 일정을 보냈다. 뒤사팽 씨는 이렇게 한국 독자들을 만난 것이 매우 특별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한국인 어머니를 둔 그는 프랑스, 스위스에서 자랐기에 한국어를 조금 알아듣긴 하지만 말하지는 못한다. 당연히 책을 쓸 땐 프랑스어권 독자들을 먼저 생각했다. 한국어로 번역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그는 “한국문화를 거리감 없이 잘 표현했다는 평에 기뻤다”며 “멀리서만 봤던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 준 책”이라고 말했다. “모든 대화를 말하지도 못하는 한국어로 ‘상상’하며 프랑스어로 썼어요. 한국인임에도 한국어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프랑스어로 말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죠. 아마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했다면 쓰지 않았을 것 같아요.” 최근 탈고한 두 번째 작품에서도 그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본을 배경으로 한국계 스위스 여성을 다룬 것. 주인공의 조부모는 일본에서 파친코를 경영하는 재일교포다. 8월경 유럽에서 먼저 출간되고 한국어로도 번역될 예정이다. 뒤사팽 씨는 “내 뿌리는 한국에 있지만 여기서 나는 이방인이고, 내게도 한국은 먼 나라”라며 “모든 걸 동원해서 한국을 표현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선지 그는 열세 살 이후로는 매년 짧게라도 한 해에 한 번은 한국에 온다. 올 때마다 모든 걸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한국은 역동적이다. 언제나 한결같은 유럽과 달리 변하지 않는 장소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웃어보였다. 염상섭 이청준 이승우 편혜영 등 한국 작가들의 프랑스어 번역 책도 즐겨 읽는다. 특히 염상섭을 통해 조부모 시대의 한국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동시대 한국 작가들에 대해서는 “성형수술, 첨단 기술 등 프랑스어권에서는 나올 수 없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글쓰기의 출발은 자신의 정체성 고민에서 비롯됐지만, 흔들리는 뿌리와 무너지는 경계는 현대사회가 당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뒤사팽 씨는 “문화 교류가 늘고 지역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유목민처럼 떠돌며 살아가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며 “글쓰기를 통해 개인적 차원의 고민을 넘어 문화적 복합성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나이: 평균 80세 이상. 성격: 모험과 도전을 즐김. 취미: 버킷리스트 작성. 특기: 주저하기엔 인생이 짧다는 과감한 결단력. 싫어하는 말: “그 연세에 어떻게….” 싫어하는 사람: 연령차별주의자. 주의사항: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대하면 화낼 수 있음. 최근 주목해서 봐야 할 프로필이다. 문화계 전반에서 이런 프로필을 가진 할매할배들이 급부상 중이다. 그동안 노인이나 노년 문제를 다룬 콘텐츠는 대중성과 거리가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진취적이고 발랄한 세계관을 가진 70대 이상 할매할배들이 문화계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힙한’ 할매할배들이다. ○ ‘소녀 감성 할매’에서 ‘할매 페미니스트’까지 출판계에서는 아흔 살이 넘은 저자들이 쓴 에세이집이나 이들을 다룬 책이 쏟아지고 있다. 올해 1월에 출간된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이봄·사진)은 다이어트로 자기관리를 하고 디즈니랜드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며 즐거워하는 소녀 감성 충만한 아흔 살 할머니의 이야기다. ‘젊은 내가 더 할머니같이 산다’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독자들의 호응이 쏟아지며 출간 첫 주에만 3000권이 팔렸다. 사실 이 책은 일본에서 20년 전에 출판됐다. 고미영 이봄 대표는 “이제 우리도 이렇게 쾌활하고 활달한 할머니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실제로 혼자 영화관에 가고 미국 수사물 CSI에 푹 빠진 원로 여성학자 박혜란의 ‘나는 맘 먹었다, 나답게 늙기로’(나무를심는사람들)처럼 톡톡 튀는 한국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주목받고 있다. 요즘 인기 있는 할매할배는 체면치레, 그럴듯한 어른 노릇보다는 모험, 열정에 우선순위를 둔다. 전문의로 일하다 90세가 다 돼 등단한 김길태 할머니의 ‘90세의 꿈’(아트와), 100세에 세계적 화가가 된 모지스 할머니의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수오서재)에서처럼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도전정신도 보여준다. 때론 젊은 사람보다 더 급진적인 주장도 편다. ‘나답게 살고 나답게 죽고 싶다’(21세기북스)를 쓴 ‘오싱’의 작가 하시다 스가코(93)는 “신나게 살다 깔끔하게 안락사로 죽고 싶다”는 도발적 주장으로 화제가 됐다. 출판사 측은 “이 저자는 최근까지도 크루즈 여행과 세계 일주를 떠나며 왕성하게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고 전했다. ○ 카리스마형 어른 지고 소통형 어른 뜨고 영어 실력은 기본, 흰 티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할머니 패셔니스타나 속사포 랩에 그루브를 탈 줄 아는 할미넴은 대중문화에서도 인기다. 최근 종영한 tvN ‘윤식당2’에서 젊은 배우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며 중심축 역할을 한 배우 윤여정 씨(71)가 대표적이다. MBC는 최근 유창한 랩 실력으로 ‘원조 할미넴’으로 불리는 배우 김영옥 씨(81) 등이 손자들과 출연하는 ‘할머니네 똥강아지’란 파일럿 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했다. 평균 연령 70세 이상의 할배들이 버킷리스트를 실현해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 ‘비밥바룰라’도 입소문을 타고 흥행 중이다. 대중문화 주변부에 머물던 노인들이 중심부 전면에 등장한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할매할배 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건 노년에 대한 관심이 전 세대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노년은 노인들만의 이야기라고 치부하던 이들조차 이제는 전 세대, 한국 사회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며 “노인들 역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커졌다”고 말했다.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며 노후 불안 같은 암울한 이야기 대신 새로운 노년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도 커졌다. 대중문화가 이를 적절하게 담아내며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할매할배들의 발랄한 감각과 도전정신, 열린 마음과 소통, 포용하고 배울 줄 아는 삶의 태도가 그간 빈칸으로 남아 있던 우리 시대 새로운 어른의 ‘롤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은영 대중문화평론가는 “훈계하는 ‘카리스마형 어른’이 지는 대신 소통하고 도전하고 노력하는 새로운 어른들이 대중의 각광을 받고 있다”며 “젊은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원숙함과 지혜를 갖춘 할매할배들이 이상적인 모습의 어른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방탄소년단 대표곡이 뭔지 모르고, 트와이스와 AOA를 구분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 최신 동향에 아무리 무심해도 요즘 이 사람을 몰라선 곤란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도 안다는 레드벨벳 아이린 얘기다. 북한에서도 다 알 정도로 가장 핫한 연예인으로 떠오른 아이린은 최근 출판계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이린이 팬미팅에서 “최근 읽은 책”으로 언급하자마자 한동안 잠잠했던 ‘82년생 김지영’이 각종 논란과 함께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책은 곧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다시 꿰찼다. 평범한 여성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을 다룬 이 소설이 크게 화제가 됐던 건 지난해였다. 최근의 ‘미투 운동’ 분위기가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아이린이 언급하지 않았다면 이런 극적인 ‘차트 역주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종의 ‘미디어셀러’인 셈이다. ‘미디어셀러’는 방송, 유명 인사가 만든 베스트셀러다. 뜻밖의 책이 인기인 경우 여기에 해당될 확률이 높다. 유명 인사가 계기였다는 점 말곤 주제나 출간 시기, 맥락에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연초 줄곧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지켰던 ‘나의 영어 사춘기’는 동명의 TV 예능 프로그램 덕을 톡톡히 봤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 나왔던 에세이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나 드라마 ‘도깨비’에 나왔던 시선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도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베스트셀러에 오른 사례들이다. 미디어셀러가 된 책들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주연배우가 가슴팍에 안고 나왔다거나 예능 출연자가 언급했단 이유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뚝딱 탄생하는 과정은 가볍다 못 해 허무하기까지 하다. 특히 이런 현상은 자신만의 안목, 소신으로 책을 고르는 이들이 줄고 있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최근 발표된 ‘2017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책을 살 때 본인이 직접 선택한다는 이들은 30% 미만에 불과했다. 다들 광고나 추천도서, 지인 등 누군가에 의존해 책을 골랐는데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TV, 유명인 의견을 따라 책을 산다는 이들도 30%에 이르렀다. 문제는 삶의 맥락이나 필요와 상관없이 남들 따라 읽는 책이 의미 있긴 힘들단 점이다. 유명해서 봤더니 재미없고, 그래서 안 읽다 보니 책 고르는 감별력은 더 떨어진다. 악순환이다. 올해는 25년 만에 정부에서 지정한 ‘책의 해’다. 지난해 한국은 성인 40%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상 최저 독서율을 기록했다. 이동책방, 독서 프로그램 확대 등 독서율 제고를 위한 방안 마련이 한창이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미디어셀러의 가벼움’을 접하다 보면, 장기적 해결책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만의 기준과 취향으로 책을 선별할 줄 아는 독자들이 늘지 않는 한 이런 악순환은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선희 문화부 기자 teller@donga.com}

나이: 평균 80세 이상. 성격: 모험과 도전을 즐김. 취미: 버킷리스트 작성. 특기: 주저하기엔 인생이 짧다는 과감한 결단력. 싫어하는 말: “그 연세에 어떻게…” 싫어하는 사람: 연령차별주의자. 주의사항 :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대하면 화낼 수 있음. 최근 주목해서 봐야할 프로필이다. 문화계 전반에서 이런 프로필을 가진 할매할배들이 급부상 중이다. 그동안 노인이나 노년문제를 다룬 콘텐츠는 대중성과 거리가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진취적이고 발랄할 세계관을 가진 70대 이상 할매할배들이 문화계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힙한’ 할매할배들이다. ● ‘소녀감성 할매’에서 ‘할매 페미니스트’까지 출판계에서는 아흔 살이 넘은 저자들이 쓴 에세이집이나 이들을 다룬 책이 쏟아지고 있다. 올해 1월에 출간된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이봄)은 다이어트로 자기관리를 하고 디즈니랜드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며 즐거워하는 소녀 감성 충만한 아흔 살 할머니의 이야기다. ‘젊은 내가 더 할머니 같이 산다’,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독자들의 호응이 쏟아지며 출간 첫 주에만 3000권이 팔렸다. 사실 이 책은 일본에서 20년 전에 출판됐다. 고미영 이봄 대표는 “이제 우리도 이렇게 쾌활하고 활달한 할머니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실제로 혼자 영화관에 가고 미국 수사물 CSI에 푹 빠진 원로 여성학자 박혜란의 ‘나는 맘 먹었다, 나답게 늙기로’(나무를심는사람들)처럼 톡톡 튀는 한국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주목받고 있다. 요즘 인기있는 할매할배는 체면치레, 그럴듯한 어른노릇보다는 모험, 열정에 우선순위를 둔다. 전문의로 일하다 90세가 다 돼 등단한 김길태 할머니의 ‘90세의 꿈’(아트와), 100세에 세계적 화가가 된 모지스 할머니의 ‘인생에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수오서재)에서처럼 나이를 무색케 하는 도전정신도 보여준다. 때론 젊은 사람보다 더 급진적인 주장도 편다. ‘나답게 살고 나답게 죽고 싶다’(21세기북스)를 쓴 ‘오싱’의 작가 하시다 시카코(93)는 “신나게 살다 깔끔하게 안락사로 죽고 싶다”는 도발적 주장으로 화제가 됐다. 출판사 측은 “이 저자는 최근까지도 크루즈 여행과 세계 일주를 떠나며 왕성하게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고 전했다. ● 카리스마형 어른 지고 소통형 어른 뜨고 유창한 영어 실력은 기본, 흰 티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할머니 패셔니스타나 유창한 랩에 그루브를 탈 줄 아는 할미넴은 대중문화에서도 인기다. 최근 종영한 tvN ‘윤식당2’에서 젊은 배우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며 중심축 역할을 한 배우 윤여정 씨(71)가 대표적이다. MBC는 최근 유창한 랩 실력으로 ‘원조 할미넴’로 불리는 배우 김영옥 씨(81) 등이 손자들과 출연하는 ‘할머니네 똥강아지’란 파일럿 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했다. 평균연령 70세 이상의 할배들이 버킷리스트를 실현해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 ‘비밥바룰라’도 입소문을 타고 흥행 중이다. 대중 문화 주변부에 머물던 노인들이 중심부에 전면 등장한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할매할배 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건 노년에 대한 관심이 전 세대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노년은 노인들만의 이야기라고 치부하던 이들조차 이제는 전 세대, 한국사회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며 “노인들 역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커졌다”고 말했다.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며 노후 불안 같은 암울한 이야기 대신 새로운 노년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도 커졌다. 대중문화가 이를 적절하게 담아내며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할매할배들의 발랄한 감각과 도전정신, 열린 마음과 소통, 포용하고 배울 줄 아는 삶의 태도가 그간 빈 칸으로 남아 있던 우리 시대 새로운 어른의 ‘롤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은영 대중문화평론가는 “훈계하는 ‘카리스마형 어른’이 지는 대신 소통하고 도전하고 노력하는 새로운 어른들이 대중의 각광을 받고 있다”며 “젊은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원숙함과 지혜를 갖춘 할매할배들이 이상적인 모습의 어른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을 이루자.” 1일 오후 북한 동평양대극장은 공연단에 참여한 가수들과 관람석을 가득 채운 1500명의 주민들이 두 팔을 머리 위로 들고 양쪽으로 흔들면서 한목소리로 부르는 노랫소리로 가득 찼다. 13년 만에 평양에서 열린 남측 공연에서 우리 예술단이 ‘우리의 소원’으로 이날 공연을 마무리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출연진 중 막내인 걸그룹 레드벨벳 멤버 슬기는 눈시울을 붉혔다. 관객들은 공연 후에도 한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 당초 오후 5시 30분에 열릴 예정이었던 공연은 “보다 많은 사람의 관람 편의를 위해 늦춰 달라”는 북측 요구에 한 차례 오후 7시 30분으로 미뤄졌다가 6시 30분으로 재조정됐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이날 오후 6시 20분(평양 시간 기준)에야 비로소 막이 올랐다. 깜짝 참석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내외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관현악으로 편곡한 아리랑이 흘러나오면서 극장 스크린에 큰 나뭇잎이 휘날리는 홀로그램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이번 평양 공연의 제목인 ‘봄이 온다’가 떠올랐다. 피아니스트 김광민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를 연주하자 가수 정인이 허밍으로 따라 불렀다. 첫 무대를 장식한 정인의 뒤를 이어 알리가 나왔고 백지영이 북한에서 한국 대중가요 중 최고 인기곡 중 하나로 꼽히는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른 뒤 ‘잊지 말아요’를 애절하게 불렀다. 공연 사회를 맡은 가수 서현은 “이렇게 약속을 빨리 지킬 수 있을지 몰랐는데 봄에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남북 관계에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다”고 인사말을 건넸다. 서현은 이날 북한 가수 김광숙의 대표곡 ‘푸른 버드나무’를 불렀다. 이 노래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만든 노래다. 걸그룹 레드벨벳이 ‘빨간맛’ ‘배드보이’를 부르자 북한 관객들은 박수치면서 호응했다. 멤버 예리는 공연이 끝난 후 인터뷰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박수를 쳐주시고 따라 불러주셔서 긴장이 많이 풀렸다”고 말했다. 아이린은 “우리가 숨이 차 하니까 관객들이 웃으며 박수를 쳐주셨다”고 말했다. 2003년 10월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 공연에 베이비복스와 함께 참여했던 댄스그룹 신화 멤버들은 당시 객석이 경직돼 있었다고 했지만 이날 객석 반응은 훨씬 뜨거웠다. 윤상 음악감독은 “북한 측은 우리의 선곡 리스트에서 가사나 율동 등에 수정 요구를 따로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함경도 출신 실향민 부모를 둔 가수 강산에는 아버지를 그리는 노래 ‘…라구요’와 함경도 사투리가 들어간 노래 ‘명태’를 불렀다. 강산에는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를 위해 이 곡을 꼭 부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연은 2시간 10분 정도 진행됐다. 참여 가수들이 조용필의 ‘친구여’와 북한 노래 ‘다시 만납시다’,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면서 막을 내렸다. 김정은은 부인 리설주와 공연을 관람하며 도중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공연 후 출연진을 불러 일일이 악수하며 격려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김정은은 우리 측 관계자들에게 “내가 레드벨벳 보러 올지 관심들이 많았는데 원래 모레 오려고 했는데 일정 조정해서 오늘 왔다”며 “평양 시민들에게 이런 선물 고맙다. 이런 자리가 얼마나 좋은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참석과 맞물려 이번 공연을 취재하기 위해 동행한 남측 기자단은 공연을 직접 관람하지 못했다. 3시간 전 진행된 최종 리허설은 볼 수 있었지만 정작 본공연은 모니터로 지켜봐야만 했다. 북측 안내원들은 “안절부절 말고 기다려라. 곧 귀가 탁 트이는 소식이 들릴 것”이라며 기자단을 배제시켰고, 항의가 이어지자 “어차피 공연 시작해서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막아서면서 논란을 빚었다. 한편 방북 예술단에는 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 포함돼 김정은에게 문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신나리 journari@donga.com·박선희 기자 / 평양=공동취재단}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을 이루자.” 1일 오후 북한 동평양대극장은 공연단에 참여한 가수들과 관객석을 가득 채운 1500명의 주민들이 두 팔을 머리 위로 들고 양쪽으로 흔들면서 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랫소리로 가득 찼다. 13년 만에 북한 평양에서 열린 우리 예술단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이날 공연을 마무리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출연진 중 막내인 걸그룹 레드벨벳 멤버 슬기는 눈시울을 붉혔다. 관객들은 공연 후에도 한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 당초 오후 5시 30분 예정이었던 공연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람 편의를 위해 늦춰 달라”는 북측 요구에 한 차례 7시 30분으로 미뤄졌다가 6시 30분으로 재조정됐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이날 6시 20분(평양 시간 기준)에서야 비로소 막이 올랐다. 깜짝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내외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관현악으로 편곡한 아리랑이 흘러나오면서 극장 스크린에 큰 나뭇잎이 휘날리는 홀로그램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이번 평양 공연의 부제인 ‘봄이 온다’가 떠올랐다. 피아니스트 김광민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를 연주하자 가수 정인이 허밍으로 따라 불렀다. 첫 무대를 장식한 정인에 뒤를 이어 알리가 나왔고 백지영이 북한에서 한국 대중가요 중 최고 인기곡 중 하나로 꼽히는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른 뒤 ‘잊지 말아요’를 애절하게 불렀다. 공연 사회를 맡은 가수 서현은 “이렇게 약속을 빨리 지킬 수 있을지 몰랐는데 봄에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남북 관계에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다”고 인사말을 건넸다. 서현은 이날 북한 가수 김광숙의 대표곡 ‘푸른 버드나무’‘를 불렀다. 이 노래는 김일성 전 주석의 지시로 만든 노래다. 걸그룹 레드벨벳이 ’빨간맛‘ ’배드 보이‘를 부르자 북한 관객들은 박수치면서 호응했다. 멤버 예리는 공연이 끝나고 인터뷰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박수를 크게 쳐주시고 따라 불러주셔서 긴장이 많이 풀렸다”고 말했다. 아이린은 “우리가 숨이 차 하니까 관객들이 웃으며 박수를 쳐주셨다”고 말했다. 2003년 10월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 공연에 베이비복스와 함께 참여했던 댄스그룹 신화 멤버들이 당시 객석이 경직돼있었다고 말했지만, 이날 객석 반응은 훨씬 뜨거웠다. 윤상 음악감독은 “북한 측은 우리의 선곡 리스트에서 가사나 율동 등에 수정 요구를 따로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함경도 출신 실향민 부모를 둔 가수 강산에는 아버지를 그리는 노래 ’…라구요‘와 함경도 사투리가 들어간 노래 ’명태‘를 불렀다. 강 씨는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를 위해 함경도 특산물 명태로 곡을 지었다. 뒤늦게 예술단에 합류하며 이 곡을 꼭 부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연은 약 2시간 10분 정도 진행됐다. 참여 가수들이 조용필의 ’친구여‘와 북한노래 ’다시 만납시다‘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면서 막을 내렸다. 마지막 콘서트 이후 13년 만에 평양 무대를 다시 밟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 최희선 씨는 “눈이 먹먹해져 악보가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연이 모두 끝난 뒤에는 로이킴의 ’봄봄봄‘ 음원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북측 관계자들이 꽃다발을 전달했다. 김정은은 부인 리설주와 공연을 관람하며 관람 중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공연 후 출연진을 불러 일일이 악수하며 격려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참석과 맞물려 이번 공연을 취재하기 위해 동행한 남측 기자단은 공연을 직접 관람하지 못했다. 3시간 전 진행된 최종 리허설과 모니터로 공연을 지켜봐야만 했다. 북측 안내성원들은 “안절부절하지 말고 기다리라. 곧 귀가 탁 트이는 소식이 들릴 것”이라고 기자단을 배제시키고 항의가 이어지자 “어차피 공연 시작해서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막아서면서 논란을 빚었다. 신나리 journari@donga.com·박선희 기자}

“어떤 것들은 존재 그대로 완벽하기에 아무런 개선도 필요하지 않다. 하늘, 태평양, 자식을 본다는 것,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딱 그렇고 책이 딱 그렇다.” ‘존재 자체로 완벽한 것들’의 목록에 책을 끼워 넣은 이 남자의 독서력을 보자. 1년에 최소 100권 이상을 읽는다. 소장도서는 1400여 권. 애독가치고 많은 양은 아니지만 평균적 미국인으로서는 300년 동안 읽을 책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양이다. 어림잡아 지금까지 6000권이 넘는 책을 읽었지만 24시간 책만 읽고 사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이렇듯 ‘열렬한 독서가’이자 미국 출판 칼럼니스트인 저자의 위트 넘치는 탐독기다. 책뿐 아니라 서가, 서점, 도서관, 출판 등 종이 냄새 물씬나는 아날로그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경험과 소회가 촘촘히 이어진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을 정리하거나 소장하는 방식, 활용하거나 처분하는 규칙을 나름대로 갖고 있다. 저자도 예외가 아닌데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일단 그는 시사, 전기, 회고록, 자기계발서, 기업가나 정치인이 쓴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주로 픽션을 편애한다. 책만이 가진 물성을 고귀하고 신비롭게 여겨서 종이책을 좋아한다. 책장 정리를 주제별로 하지 않고 책의 판형, 질감에 따라 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특히 킨들 같은 전자책에는 뿌리 깊은 불신과 회의감을 피력하고 오디오북은 책으로 취급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초판본이나 육필본을 모으는 책 수집가들과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고서점엔 전혀 취미가 없다. 가난하던 어린 시절 하도 헌 옷에 헌 장난감만 갖고 놀아서 헌것이라면 딱 질색이라나. 그래서 새 책을 고집한다. 대학 때 읽기 시작한 ‘율리시스’를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다 읽지 못했다는 사실 등 독서에 대한 솔직하고 발칙한 고백은 웃음을 유발한다. 열다섯 살 때 자신의 방학을 망친 필독서 토머스 하디의 책이 수십 년 뒤 아들의 방학을 똑같이 망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치 교사들이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마라, 애새끼들아”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분노하는 장면도 웃긴다. 유머러스한 고백 속에 책의 본질이나 가치, 독서 문화의 문제점도 노련하게 피력한다. 읽다 보면 자연스레 책과 관련된 자신만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전자책을 폄하하거나 특정 종류의 책을 비하하는 등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독서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이 모두 같을 순 없다. 이 사적인 탐독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나만의 탐독기’를 써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올해는 25년 만에 정부에서 지정한 ‘책의 해’다. 지난해 한국 성인의 40%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상 최악의 독서율을 기록했다. 독서를 일종의 의무로 생각해서다. 알고 보면 이렇게 즐거운 모험인데 말이다. 이 솔직한 탐독가의 고백처럼 고전, 필독서 따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지루하면 덮어도 된다. 그저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책을 즐겁게 읽는 걸로 충분하다. 그러면서 나만의 규칙, 나만의 기벽, 나만의 독서 습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진짜 내 스타일대로. 원제는 ‘One for the Books’.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미투 운동으로 그간 우리 사회에 얼마나 비뚤어진 성의식이 만연해 있었는지 모두가 절감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결국 교육이었는지도 모른다.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성폭력과 성차별을 해결하는 첫 단추로 성교육의 중요성이 주목받는 시점에 아들 성교육을 다룬 두 권의 책이 나란히 나왔다. 미투 운동을 보며 많은 부모들이 내 아들이 성폭력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가 균형 잡힌 성교육을 해주는 것이 필수인 시대가 됐다. 여기까진 알지만, 문제는 ‘어떻게’다. 많은 부모들이 여기서 막혀버린다. ‘당황하지 않고…’는 성교육 전문가가 쓴 아들 성교육 지침서다. 성교육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뽀뽀해서는 안 된다. “엄마가 안아주고 싶어. 뽀뽀해도 될까?”라고 물으며 결정권이 아이 자신에게 있음을 지속적으로 인지시키는 게 중요하다. 특히 성교육은 ‘핑퐁게임’처럼 하는 게 중요하다. 아이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 앞서는 것도 금물이고, 알고 싶어 할 때 대충 넘어가는 것도 곤란하다. 남자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접하게 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은지도 유형별로 정리해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엄마…’는 초등 남아 성교육서를 표방했지만 구체적인 방법보다는 우리 사회의 성교육이 얼마나 초보적인 수준이며, 편향적인 성의식을 답습하고 있는지를 꼬집는 칼럼 성격 글들이 주를 이룬다. 생물학 아니면 포르노에 갇혀 버리는 성에 대한 인식, 맹목적으로 따라 하는 성교육의 위험성 등 부조리한 현실을 되짚는다. 시기별, 상황별로 읽으면 도움이 될 만한 성교육과 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어느 날 뒷마당에 나타난 커다란 알 하나. 도마뱀일까, 거북이일까. 하지만 막상 알을 깨고 나온 것은 뜻밖에도 공룡이다. 아기 공룡은 처음에는 작지만 날이 갈수록 어마어마하게 자라 금방 집안의 골칫거리가 됐다. 여기저기 말썽을 부리면서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고, 의자나 프라이팬까지도 먹어 치워버린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어질러대니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다. 하지만 사고뭉치 디노는 어쨌든 우리 가족이자 특별한 친구니 사랑하고 아껴줄 수밖에. 개성을 존중하는 배려와 포용의 중요성을 일러준다. 빨강, 파랑 두 가지 형광 계열의 색상만을 사용한 일러스트도 눈길을 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일본 출장 중이던 4년 전 심수진 연두세상 대표(50)는 서점에서 발견한 그림책 ‘메치가 있던 섬(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독도 강치(바다사자 일종)와 일본 어린이의 우정을 그린 책으로 강치들이 한국 어부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멸종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전자책으로 초중학교에 배포해 국내에서도 논란이 됐던 문제의 책이었다. 그런데 그가 진짜 충격을 받은 건, 뜻밖에도 잘 만들어진 책이어서였다. “솔직히 많이 놀랐어요. 구성, 그림, 색감 모두 아이들 감성을 잘 고려한 책이었거든요.” 출판사가 입주한 서울 마포창업복지관에서 19일 만난 심 대표는 “우리는 한 번도 독도 문제를 진짜 아이들 눈높이에서 접근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 느낀 ‘뜨끔함’을 회상했다. 일본이 왜곡된 역사를 ‘강치’ 같은 귀여운 동물이나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우정을 내세워 교육하면 속수무책이었다. 캐릭터의 저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에 더욱 조바심이 났다. 사실 심 대표는 출판사 대표이기 전에 동화 작가다. EBS 애니메이션 ‘용감한 소방차 레이’의 원작자가 바로 그다. 경제잡지 등에서 일했던 그는 육아에 전념하다 동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소방차에 빠진 다섯 살 아들과 매일 서대문소방서에서 출동 구경을 했고 그 결과 ‘레이’가 탄생했다. 무명 동화 작가의 원고를 출판해 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원고만으로는 캐릭터가 의도대로 구현되기도 어렵겠다 싶어 2010년 무작정 혼자 출판사를 차렸다. 이후 그림 작가 섭외부터 디지털 콘텐츠 제작까지 ‘맨땅에 헤딩하듯’ 하나씩 일을 벌였다. 심 대표는 “당시 아이폰 애플리케이션이 막 출시되던 때라 책을 앱으로도 만들어 올렸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림동화앱 1호’로 해외에서도 주목 받으며 애니메이션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작은 신생 출판사가 콘텐츠 대기업들과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는 건 무척 이례적이다. ‘캐릭터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방차 11대를 종류별로 의인화해 전 세계 꼬마들의 친구로 만든 그의 ‘촉’은 일본 출장 이후 다시 꿈틀거렸다. 독도에 대해 다방면으로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심 대표는 “들여다보니 수백만 년 역사를 간직한 독도는 아름답고 소중한 이야기로 가득한 보물섬이었다”고 말했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캐릭터를 친구처럼 느껴요. 그 복잡하고 어려운 소방차 종류와 기능도 캐릭터로 만들면 줄줄 꿰잖아요. 독도를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고 싶다는 욕심이 났어요.” 레이를 만들 때처럼 독도를 대표하는 동식물도 특징을 살려 10가지로 캐릭터화했다. 따뜻한 할머니 동도, 멋쟁이 할아버지 서도, 상냥한 우체통 엄마, 든든한 사철나무 아빠, 부지런한 오징어 이모 등이다. 제목은 ‘보물섬 독도네 가족’. 이달 나온 1권에서는 별이가 개성 넘치는 독도 가족들과 첫 대면을 한다. 2권부터는 본격적으로 독도의 생물, 자원 등을 찾는 보물찾기 놀이가 펼쳐져 10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에도 책을 앱으로도 만들었다. 심 대표는 출판을 전혀 몰랐던 40대 주부가 창업해 여기까지 온 건 “‘엄마표 소방차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열정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독도 시리즈를 선보이는 지금도 레이를 처음 만들었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그저 ‘보물섬 독도’가 레이처럼 아이들의 정겨운 친구가 됐으면 하는 것. “아이들에게 ‘독도는 우리 땅’이란 말은 어려워요. 이 책을 통해 독도에 누가 살고, 무엇이 있는지, 날씨는 어떤지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알게 되면 아끼고 싶은 마음은 절로 생기지 않을까요? 지키는 것보다 잘 알고 사랑하는 게 먼저니까요.”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1. “경단녀? 그거 경단 만드는 떡 전문가 말하는 건가요?” 몇 년 전 회사를 관둔 이주희 씨(48)는 ‘경단녀’란 딱지에 이렇게 되묻는다. 출산 및 육아로 인해 집으로 강제 소환당한 여성들의 경력을 사회가 잘라 먹는 데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씨는 이런 경험담을 ‘딸로 입사, 엄마로 퇴사’(니들북)란 책으로 펴냈다. #2. 시댁 중심의 불합리한 결혼 문화를 민사린과 무구영이란 커플을 통해 다룬 웹툰 ‘며느라기’는 요즘 공분의 장으로 번지고 있다. “무구영 같은 남자는 답이 없다” “이 부부가 반드시 이혼하길 바란다” 같은 아줌마들의 ‘이혼 청원’이 빗발친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높아진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최근 이른바 ‘주부 페미니즘’으로 진화하고 있다. 뿌리 깊은 ‘생활 속 성차별’에 반기를 든 기혼 여성들의 목소리가 문화계 전반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관련 콘텐츠도 활발히 창작되고 소비된다. 특히 30∼50대 기혼 여성들 얘기는 최근 책으로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어쩔 수 없이 참고 살던 평범한 우리네와 닮았다. 김영주 씨(53)는 9남매 장남과 결혼하고 24년간 시집살이를 견디다 ‘시월드’에 사표를 던졌다. 그 시간 동안 느낀 점을 2월에 ‘며느리 사표’(사이행성)란 책으로 써냈다. 김 씨는 “주말마다 가야 했던 시댁에 발을 끊고 안 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밥 차리는 의무’를 벗어던지자 진짜 평화가 찾아왔다”고 고백한다. 이달에 나온 ‘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마음의숲)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결혼과 동시에 직장에서 ‘잠정적 배제 인력’이 되는 여성은 정작 전업주부가 되면 페미니즘을 논할 자격도 없는 ‘잉여’로 취급받는다. 담당 편집자 송희영 씨는 “지난해부터 인기였던 페미니즘 서적들이 올해 평범한 기혼 여성들의 ‘생활 속 고발’로 확장되는 추세”라며 “인터넷 연재 때부터 주부들의 댓글 반응이 뜨거웠다”고 말했다. 더 이상 참고 살지는 않겠다는 주부들의 가치관 변화는 다른 문화 영역에서도 확연하다. 시어머니와 ‘맞짱’ 뜨는 며느리를 다룬 독립영화 ‘B급 며느리’(1월 개봉)가 화제를 모았고, 웹툰 ‘며느라기’는 팔로어만 23만 명이 넘는다. ‘미투 운동’처럼 심각한 성폭력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밥상 위’나 ‘사무실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부당함에 본격적으로 맞서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육아나 가사 전담, 시댁 중심 문화 탓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기혼 여성이 이런 움직임의 중심축이 되고 있는 점이 가장 큰 변화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주부 페미니즘’의 진격에는 미투 운동 등을 통해 페미니즘 감수성이 높아진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잘못된 관행에 거부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일상의 민주화’가 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문화평론가인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한국 사회도 이미 여성의 역할이나 위상이 높아졌는데 그에 역행하는 가부장적 문화가 완고하게 버티며 충돌을 빚어왔다”며 “오랫동안 묵어 있던 갈등이 사회 각계에서 일제히 터져 나오는 과정”이라고 진단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를 남녀 대결이 아닌 인권 이슈로 풀길 주문했다. 구 교수는 “혁명처럼 터진 ‘미투 운동’이 실제 사회를 바꾸려면 결국 일상에서의 관행 변화가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생활 속 페미니즘’은 의미가 크다”며 “일부처럼 ‘성대결’로 몰고 가면 본질을 왜곡할 수 있는 만큼, 보편적 인권 문제로 다루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선희 teller@donga.com·임희윤 기자}

#1. “경단녀? 그거 경단 만드는 떡 전문가 말하는 건가요?” 몇 년 전 회사를 관둔 이주희 씨(48)는 ‘경단녀’란 딱지에 이렇게 되묻는다. 출산·육아으로 인해 집으로 강제소환당한 여성들의 경력을 사회가 잘라먹는데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씨는 이런 경험담을 ‘딸로 입사, 엄마로 퇴사’(니들북)란 책으로 펴냈다. #2. 시댁 중심의 불합리한 결혼문화를 민사린과 무구영이란 커플을 통해 다룬 웹툰 ‘며느라기’는 요즘 공분의 장으로 번지고 있다. “무구영 같은 남자는 답이 없다” “이 부부가 반드시 이혼하길 바란다” 같은 아줌마들의 ‘이혼 청원’이 빗발친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높아진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이 최근 이른바 ‘주부 페미니즘’으로 진화하고 있다. 뿌리 깊은 ‘생활 속 성차별’에 반기를 든 기혼 여성들의 목소리가 문화계 전반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관련 컨텐츠도 활발히 창작되고 소비된다. 특히 30~50대 기혼 여성들 얘기는 최근 책으로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어쩔 수 없이 참고 살던 평범한 우리네와 닮았다. 김영주 씨(53)는 9남매 장남과 결혼하고 24년간 시집살이를 견디다 ‘시월드’에 사표를 던졌다. 그 시간 동안 느낀 점을 2월에 ‘며느리 사표’(사이행성)란 책으로 써냈다. 김 씨는 “주말마다 가야했던 시댁에 발을 끊고 안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밥 차리는 의무’를 벗어던지자 진짜 평화가 찾아왔다”고 고백한다. 이달에 나온 ‘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마음의숲)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결혼과 동시에 직장에서 ‘잠정적 배제인력’이 되는 여성은 정작 전업주부가 되면 페미니즘을 논할 자격도 없는 ‘잉여’로 취급받는다. 담당 편집자 송희영 씨는 “지난해부터 인기였던 페미니즘 서적들이 올해 평범한 기혼여성들의 ‘생활 속 고발’로 확장되는 추세”라며 “인터넷 연재 때부터 주부들의 댓글 반응이 뜨거웠다”고 말했다. 더 이상 참고 살지는 않겠다는 주부들의 가치관 변화는 다른 문화영역에서도 확연하다. 시어머니와 ‘맞짱’ 뜨는 며느리를 다룬 독립영화 ‘B급 며느리’(1월 개봉)가 화제를 모았고, 웹툰 ‘며느라기’는 팔로워만 23만 명이 넘는다. ‘미투 운동’처럼 심각한 성폭력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밥상 위’나 ‘사무실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부당함에 본격적으로 맞서는 분위기다. 뭣보다 육아나 가사 전담, 시댁 중심 문화 탓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기혼여성이 이런 움직임의 중심축이 되고 있는 점이 가장 큰 변화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주부 페미니즘’의 진격에는 미투 운동 등을 통해 페미니즘 감수성이 높아진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잘못된 관행에 거부의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일상의 민주화’가 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문화평론가인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한국사회도 이미 여성의 역할이나 위상이 높아졌는데 그에 역행하는 가부장적 문화가 완고하게 버티며 충돌을 빚어왔다”며 “오랫동안 묵어있던 갈등이 사회 각계에서 일제히 터져 나오는 과정”이라고 진단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를 남녀 대결이 아닌 인권 이슈로 풀길 주문했다. 구 교수는 “혁명처럼 터진 ‘미투 운동’이 실제 사회를 바꾸려면 결국 일상에서의 관행 변화가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생활 속 페미니즘’은 의미가 크다”며 “일부처럼 ‘성대결’로 몰고 가면 본질을 왜곡할 수 있는 만큼, 보편적 인권 문제로 다루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박선희 기자teller@donga.com임희윤 기자 imi@donga.com ▼ 여성 리더 조명, 제2의 생 준비하는 여성 ▼ ‘미투 운동’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변화하며 여성 리더가 다시 주목을 받는다. 이에 따라 제2의 인생을 꿈꾸는 30~50대 여성들도 늘고 있다. 프리랜서 예술가 김지은 씨(36·가명)는 최근 3년간 미뤄둔 대학원 박사과정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중·고등학교 강사를 하면서 근근이 활동을 이어가던 김 씨는 최근 예술계 선배에게서 “앞으로 교수직에서, 각급 기관장이나 리더로서 여성 일자리가 크게 늘 것이다. 미리미리 대비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김 씨는 “활동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학업을 더 이어갈 엄두를 못 냈는데, 서둘러 학위에 도전해보기로 했다”고 했다. 요즘 문화 현장의 분위기는 이런 김 씨의 말을 뒷받침한다. 일례로 국립극장장 후보 1순위로 꼽히던 연출가 김석만 씨는 ‘미투 운동’의 폭로로 교수 시절 성추행 사실이 드러나며 탈락했다. 때문에 문화계 안팎에서는 비교적 이런 오점에서 자유로운 여성 경력자가 각급 예술기관장 유력 후보로 급부상하는 분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국립예술단체 관계자는 “수사기관이 아닌 이상 남성 후보들의 수십 년 경력에서 성 추문을 일일이 조사할 수 없다. 이참에 참신한 여성 인사를 기용해 기관 이미지도 제고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팀장급도 직장 내 남녀간 의사소통을 막는 ‘펜스 룰’을 적용하지 않을 여성 리더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현상은 여성의 반사이익 같은 단기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구조 변화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정치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차우진 문화평론가는 “그간 여성들은 높은 업무실적을 올려도 남성 중심적 조직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곤 했다”며 “일련의 분위기를 ‘해프닝’으로 멈추지 않으려면 ‘유리 천장’의 붕괴와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란 큰 틀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헨리 몰래슨. 이름만 들으면 낯설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에게 그렇게 낯선 존재가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메멘토’의 실존모델이자 신경과학 역사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유명 환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이름 대신 ‘환자 H.M’으로 불렸다. 헨리 몰래슨을 ‘환자 H.M’으로 역사에 남게 한 것은 치명적인 의료 사고였다. 중증 간질로 고생하던 공장노동자 헨리는 1953년 뇌 절제술을 받는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품고 수술대 위에 눕지만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뀐다. 집도의 스코빌 박사는 뇌의 어떤 부분이 간질을 초래하는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내측 측두엽 구조물을 모두 제거해버린다. 불확실한 수술이 초래할지 모를 부작용을 무시하고 감행한 그 수술은 요양원에서 진전 없는 뇌 연구나 하고 있던 그를 일약 세계적 뇌과학 권위자로 만들어준다. 헨리 몰래슨의 사망이자, 환자 H.M의 탄생이었다. 이 책은 미국 잡지 기자인 저자가 살아서는 ‘환자 H.M’으로 수백 번의 뇌 실험을 당하고 죽어서는 2401개의 뇌 조각으로 남게 된 불행한 남자 헨리 몰래슨(1926∼2008)의 일생을 추적하고 취재한 논픽션이다. 저자는 헨리의 뇌수술을 집도한 스코빌 박사의 외손자이기도 하지만 스코빌 박사가 감행한 수술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의료계의 비윤리성과 연구자들의 이기심, 과학의 야만성을 다각적 측면에서 폭로한다. 헨리가 수술 부작용으로 겪어야 한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장기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을 잃는 기억상실증을 앓게 된다. 항상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몽롱한 상태로, 삶에 드나드는 끝없이 낯선 사람에 둘러싸여 살아야 했다. 아버지의 사망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해 메모로 적어 셔츠에 넣고 다녔다. 동시에 그는 평생 장단기 기억, 꿈, 관성, 통증내성 등 셀 수 없이 많은 실험의 대상이 됐다. 뇌의 일부를 상실해 이상 반응이 생긴 그는 뇌 과학 연구에 더없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헨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으로 명성을 얻었고 정부와 민간의 지원금을 타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수전 코긴 박사는 그의 가치가 무한하다는 걸 깨닫고 ‘소유권’을 독점하기까지 한다. 그 과정에서 헨리는 마치 애완동물처럼 취급됐고 그의 인간적 아픔은 기록에서 지워졌다. 그는 임상사례 ‘환자 H.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죽어서까지도 헨리의 뇌 소유권을 놓고 MIT와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등 대학들은 다툼을 벌인다. 그의 뇌는 연구자들에게 “트로피이자 귀중한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50년간 헨리를 알아온 코긴 박사는 그가 죽자 바로 뇌 적출 부검을 감행한 뒤 그 순간을 “황홀했다”고 회상한다. 그들에게 헨리는 그저 데이터를 공급해줄 원천일 뿐이었다. “한 인간의 생명은 새로운 과학적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1985년 시카고대 화학자 에드윈 슬로슨은 ‘생명과 앎의 상대적 가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백신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정원사의 고작 여덟 살 된 아들에게 균을 주입하는 실험을 했던 것처럼, 극단적인 공리주의 발상은 과학의 역사 속에 암암리에 흘러온 어두운 전통이다. 저자는 6년에 걸친 취재 끝에 시공간을 오가며 헨리의 삶을 다각도에서 소설처럼 추적했다. 비윤리적 실험까지도 정당화해가며 발전을 거듭해온 과학역사의 어두운 이면이 퍼즐 맞추기처럼 찬찬히 들춰진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길쭉한 집, 납작한 집…. 책장을 넘길수록 개성 넘치는 집들이 나타난다. 뜨거운 집, 추운 집, 기울어진 집, 거꾸로 선 집, 가시 돋친 집, 투명한 집, 덩굴로 뒤덮인 집…. 그리고 그 집에는 각자 다른 멋과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상한 집에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책 맨 마지막에 공개된다. 제각각 다른 모양의 집과 사람들이 모여서 한 마을을 이룬다. ‘재미난 마을’이다. 독특한 형태의 집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지, 왜 이런 형태로 집을 만들었을지 유추하게 한다. 산뜻하고 예쁜 일러스트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900쪽이 넘는 예사롭지 않은 책 한 권이 최근 출간됐다. 제목은 ‘소명출판 20년, 한국문학 연구 20년’. 학술적 가치는 높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전문연구서적 출판에 매진해 온 이 출판사가 설립 2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여정을 모았다. 서울 서초구의 오래된 건물 한 층에 위치한 소명출판사를 13일 찾아 박성모 대표(55)를 만났다. 박 대표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더 두꺼워진 새 책부터 내밀었다. 20주년 기념 책에 오류가 있어 회수하고 1000부를 다시 찍었다는 거였다. 아연실색하자 그는 “어차피 팔릴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비용보다 정확한 게 중요하다”며 웃어 보였다. 박 대표의 고집스러움은 출판사 행로 곳곳에 녹아 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강의도 해봤지만 맞지 않았다. 그보다는 출판이 재미있었다. “주석 하나에 몇날 며칠 매달리는 연구자가 귀했고, 그렇게 어렵게 쓴 글의 오류를 매의 눈으로 잡으며 책 만드는 게 재밌었다”고 한다. 그에게 “기초연구는 고속도로”였다. 길이 있어야 누군가는 달리기 때문이다. 열정 있는 연구자들과 합심해 그 ‘길 닦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그 덕에 외환위기 당시 차린 1인 출판사가 연간 80여 종씩 총 1600권을 펴낸 근·현대문학 연구전문 출판사로 자리매김했다. 국문학자들에게 소명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건 영예로 여겨지기도 한다. 박 대표는 학술적 가치가 있다면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었다. 대표적 사례로, 이념·상업적 이유로 외면되던 시인 임화(1908∼1953) 연구를 9년에 걸쳐 집대성해 전집을 펴냈다. 사재를 털어 임화문학예술상도 만들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책으로 그는 주저 없이 ‘임화전집’을 꼽았다. 물론 자리를 웬만큼 잡은 지금도 학술 출판은 험난한 여정이다. “국내 출판사가 5만 개가 넘습니다. 일본의 3배예요. 정제돼야 할 출판업계에 한탕주의가 만연해 있고, 정부는 나눠주기식 지원으로 오히려 이를 부추기고 있으니 안타깝죠.” 박 대표가 특히 속상한 건 기초연구자는 홀대받는데 관련 논문 하나 쓴 적 없는 일반교양서 저자들이 전문가로 더 각광받는 현실이다. “기초학문이 바로 서지 않고는 현실을 보는 정확한 관점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모던보이’ ‘신여성’을 앞세워 일제강점기를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그려낸 영화나 서적들을 예로 들었다. “역사에 대한 위험천만한 인식을 퍼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출판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동아시아 근현대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조망’에 큰 관심을 둬왔다. 스무 살 때부터 각지 헌책방을 돌며 수집한 일제강점기 자료만 한 트럭이 넘는다. 이런 자료를 분석해 당대를 조망해보는 새로운 저작들도 준비하고 있다. “히트작을 잡으려는 출혈 경쟁 같은 건 여전히 관심 없습니다. 호흡 맞는 연구자들과 자료를 분석해 독자적으로 세상에 내놓는 게 출판인으로서 일말의 자존심이니까요.” 20주년을 맞아 소명출판사도 여러 변화를 꾀하고 있다. 학자들과 직원들이 함께 출판사를 경영하는 공동운영 방식도 구상 중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변함없다. “100년 이상 가는 기초학문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것.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박 대표의 목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해외에 소개하는 한국 문학의 폭을 기존 서울 중심의 엘리트 문단 문학에서 북한, 해외동포, 고전문학으로까지 폭넓게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취임 후 처음 기자간담회를 가진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62·사진)은 20일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국 문학번역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문학’의 정의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번역사업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김 원장은 시인 출신의 국문학자로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장, 부이사장 등을 지냈고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외국 문학 전문가가 아닌 국문학자가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는 등 한국 문학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높아지면서 ‘단순 번역’을 넘어서 보다 심층적인 접근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번역원의 업무가 해외 어문학 전문가를 키우는 것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정작 어떤 작가나 작품을 지원할 것인지 한국 문학 자체에 대한 고민은 외부 기구의 도움에 의존했다”며 “보다 심도 있는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국문학 전공자이자 한국 문학 현장을 잘 아는 이가 필요한 시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번역원 내에 한국어문학 부서를 신설할 예정이다. 이 부서에서 다루게 될 한국어문학은 남북한 문학, 해외동포 문학을 아우른다. 그는 “한국어문학을 공간적, 시간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문문학, 시조, 구비문학 등 고전문학 번역 지원도 강화할 예정이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 오에 겐자부로가 느닷없이 나온 게 아니라 일본 고전문학을 꾸준히 오래 번역한 토대 위에서 배출됐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멜 브룩스 감독의 유명한 미국 코미디 영화 ‘프로듀서(1968년)’는 일부러 망하는 연극을 만들어 투자자금을 가로챌 모의를 한 제작자들의 이야기다. 확실히 망해야 사기극이 탄로 나지 않는 만큼 ‘스프링 타임 포 히틀러’라는 히틀러 찬양 연극을 선택한다. 전 나치대원이 쓴 편협하기 짝이 없는 엉망의 각본이다. 최악의 감독과 배우도 기용한다. 그런데 망할 일만 남았다고 들뜬 이들은 연극이 뜻밖의 대성공을 거두며 위기에 빠지고 만다. 가디언·USA투데이 등에 기사를 써 온 저자가 18개월 동안 트럼프의 측근 200여 명을 취재해 썼다는 이 책에 따르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트럼프의 당선 과정은 포복절도하는 이 코미디 영화의 압축판이다. 트럼프 캠프의 목표는 ‘프로듀서’ 제작자들의 것과 같았다. 예상대로 패배하고, 그 패배를 힐러리 탓으로 돌리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가 되면 끝이었다. 이방카가 새엄마인 멜라니아를 조롱거리로 삼기 위해 친구들에게 한 말조차 이랬다. “이 말만 할게. 그녀는 아버지가 출마하면 확실히 이길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영화 같은 반전이 진짜 일어났다. 당선이 현실이 되자 주변에는 행정부를 질서 있게 꾸려갈 전문가가 없었다. 시시한 행적뿐이던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은 반이민 행정명령으로 미국을 분열시킬 ‘트럼피즘’(트럼프식 극우 포퓰리즘) 야심만 구체화시킨다. 권력의 큰 축으로는 ‘재방카’로 불리는 ‘가족우선주의’가 부상한다. 비서실장이 따로 있지만 실세는 ‘파파보이’인 사위 쿠슈너이고, 딸 이방카는 첫 여성 대통령을 노리며 설친다. 이들의 권력 암투와 미숙함 속에 조율도 없이 연방수사국(FBI) 국장 해임이 결정 나는 등 우왕좌왕하는 행보가 이어진다. 총체적 난국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트럼프다. 미국 출간 일주일 만에 140만 권이 판매된 이 책의 유명세에는 백악관이 큰 기여를 했다. 백악관이 나서 판매 금지를 거론하자 책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란 기대감이 증폭됐기 때문이다. 반향이 컸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렇게 웃게 될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트럼프를 향해 “빌어먹을 바보 같으니라고”라고 중얼거리는 루퍼트 머독이나 현안에 대해 “그(트럼프)가 이해하고 있나?”라고 반복적으로 물으며 의심하는 우파 언론인 로저 에일스. 배넌의 대답은 더 웃긴다. “그가 이해한 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를 ‘정상적인 사고가 작동하지 않는 어릿광대’로, 그 측근은 오합지졸로 노련하게 희화화시킨다. 그의 표현대로 ‘벽에 붙은 파리’처럼 백악관에 집요하게 드나들며 취재한 끝에 밝혀낸 것은 블랙코미디 주인공으로 완벽해 보이는 한 희극적인 남자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마시멜로 같은 남자”의 실체를 폭로하며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표지 사진으로 골라 넣은 것도 책을 읽고 보니 퍽 의미심장하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어쨌든 이것이 코미디가 아니라 논픽션이기 때문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내가 딛고 선 땅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눈에 보이진 않지만 동식물에게 소중한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땅에는 계절마다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새싹이 돋아나고, 꼬물꼬물 기어가던 애벌레가 나비로 변한다. 지렁이는 열심히 땅을 오가며 흙을 고른다. 땅에 사는 동물들의 배설물과 썩어가는 동물의 찌꺼기가 흙, 빗물과 함께 뒤섞이며 땅을 기름지게 만든다. 추운 겨울이면 달팽이, 번데기, 애벌레는 모두 꼼짝 않는다. 개미들도 일을 멈추고 한데 모여 온기를 나눈다. 계절마다 변하는 동식물 생태와 자연의 신비를 땅 아래 세상을 통해 아름답게 그려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