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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전화번호를 입력하자 모바일 메신저 친구 목록에 오보이스트 함경(25)의 이름이 새로 떴다. 프로필 사진 속 그는 스탠드 맡에서 고독하게 리드를 다듬고 있었다. 소개 글도 ‘리드 깎는 중, 방해하지 마세요’. 오보에 소리를 좌우하는 리드를 대하는 태도에서 음악에 대한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오늘요? 일요일이라 교회 갔다가 정기 연주회에 올릴 곡 연습하고 리드 깎다가 다시 독주회 연습…. 단조롭지만 지금은 이런 생활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아직 새내기니까요.” 29일 국내 독주회를 앞두고 12일 전화로 만난 그는 한국 오보에계에 한 획을 그었다. 2005년 금호영재콘서트 독주회로 데뷔한 뒤 서울예고 1학년 때 독일로 건너가 각종 콩쿠르를 휩쓸었다. 2016년에는 세계 최정상급 네덜란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에 입단했고, 지난해에는 독일 ARD콩쿠르에서 우승(1위는 없는 2위)했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를 ‘새내기’라고 표현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 건 맞지만 이제 입단 2년차예요. 능숙한 선배들과 보조를 맞추려면 적어도 7, 8년은 고시생처럼 생활해야죠. 주 2회 정기연주회를 소화하려면 매달 최소 8, 9곡을 새로 익혀야 합니다. 여기에 독주회 연습까지 겹쳐 ‘커피 연명’하고 있습니다.(웃음)” 한계의 시험대에 오른 듯 아슬아슬한 요즘이지만 종종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온다. 시간이 부족해 머릿속으로 연주하는 법을 익혔고, 단원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한층 음악이 깊어짐을 느낀다. 그는 “몸은 힘들지만 매일이 배움으로 인한 환희의 연속”이라며 “진정한 프로의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라고 했다. 함경은 음악인 가족을 뒀다. 아버지는 오보이스트 함일규 중앙대 교수, 어머니는 비올리스트 최정아 씨다. 형 함훈 씨도 플루트를 전공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흥미를 못 느끼던 그는 12세 때 오보에를 받아 든 뒤 운명적으로 자신의 악기임을 직감했다. “입술이 부르트도록 오보에를 불었다”던 연습벌레 소년은 10년간 눈부시게 성장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상담을 해오는 후배들에게 조언할 때 ‘이보다 더 뿌듯할 수’가 없어요. 지금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한국 오보에계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쑥스럽지만 저를 보면서 꿈을 키울 수도 있잖아요.” 그는 “이번 독주회에서 앙드레 졸리베와 허버트 하월스 등의 곡을 연주한다”며 “유럽에서 발굴한 주옥같은 곡들을 한국 관객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29일 오후 8시 서울 금호아트홀. 전석 4만 원. 02-6303-1977이설 기자 snow@donga.com}

클래식계는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흐른다. 디지털 음원 시대지만 클래식만큼은 공연장과 CD, LP를 고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다른 장르에 비해 형식과 음감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최근 이런 분위기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디지털로 클래식 음원이나 공연 정보를 제공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등 다양한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다. 최근 이런 흐름은 클래식 지식과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클래식 스타트업’이 이끈다. 요즘 ‘클래식매니저’란 앱으로 ‘클알못’(클래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서 ‘클잘알’(클래식을 잘 아는 사람)으로 환골탈태한 이들이 상당하다. 스타트업 ‘아티스츠카드’가 지난해 출시한 클래식매니저는 초보도 쉽게 클래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드뷔시의 ‘달빛’을 음성 검색하면 거의 모든 버전의 음원을 만날 수 있다. 드뷔시의 생애, 해당 곡에 얽힌 일화는 물론이고 악보도 상세하게 제공한다. 아티스츠카드 대표인 정연승 작곡가는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자동검색 큐레이션(취사선택)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했다. 클래식매니저는 지금까지 15만 명이 다운로드했다. ‘위드클래식’은 크고 작은 클래식 공연 정보를 아우르는 인터넷 플랫폼이다. 대형 기획사에서 진행하는 공연이 아니더라도 발품을 들여 찾아낸 1인 공연이나 무료 공연, 동네 공연 정보까지 제공한다. 성악을 좋아해 무작정 업계에 뛰어든 웹디자이너 출신 임재한 대표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기획한 공연을 판매하는 서비스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오케스트라 게임 음악을 만드는 ‘플래직’과 악기 연주 시 반주 음을 들려주는 ‘포케스트라’를 만든 ‘이스트컨트롤’도 눈에 띄는 클래식 스타트업. 클래식 분야 해설사를 양성하는 ‘모차르트마술피리’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콘텐츠를 기획하는 ‘오르아트’도 있다. 사실 클래식 스타트업이 늘어난 배경에는 한계에 봉착한 클래식계가 찾은 ‘탈출구’의 성격도 있다. ‘클래식에미치다’ 운영자인 안두현 양평필하모닉오케스트라 지휘자는 “갈수록 클래식계 상황이 어렵다 보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전공자가 많다”며 “이들이 활로를 모색하는 차원에서 다양한 스타트업으로 눈을 돌리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해외에서도 클래식 스타트업은 이미 대세로 자리 잡았다. 국내 클래식 연주자들의 미발표 음원을 제공하는 스트리밍 서비스 ‘클래시컬 네트워크’는 네덜란드 스타트업 ‘프라임포닉’을 본떠 만들었다. 독일 스트리밍 서비스인 이다지오(Idagio), 세계 연주자들의 구인구직을 돕는 덴마크의 트루링크트(Truelinked), 맞춤형 마우스피스를 판매하는 영국의 SYOS 등이 각광을 받고 있다. 노승림 음악평론가는 “최근 적극적으로 클래식을 소비하려는 애호가들이 등장하며 이들을 겨냥한 다양한 서비스가 시장에 출현한 셈”이라며 “결국 장기적으로 클래식 시장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음악평론가 한정호 씨는 “문화 관련 정부지원금 제도가 늘어나면서 클래식 관련 사회적 기업이 많아진 것도 한몫했다”고 분석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나지막한 언덕과 지붕 위로 내리쪼이는 햇살, 그리고 탁 트인 바다! 봄에 경남 통영에 다녀온 이들은 예외 없이 ‘통영앓이’를 한다. 아예 모를 순 있어도 한 번 겪으면 잊기 힘든 통영의 봄날, 2018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린다. 30일부터 4월 8일까지 통영국제음악당과 통영시 일원에서 열리는 음악제의 주제는 ‘귀향(Returning Home)’. 음악제 개최에 맞춰 통영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선생(1917∼1995)의 유해가 이장되면서 의미를 더하게 됐다. 먼저 ‘귀향’이란 테마와 윤이상 선생이 작곡한 곡들이 눈에 띈다. 30일∼4월 1일 오후 5시 블랙박스에서는 루트거 엥겔스가 재단의 요청으로 만든 음악극 ‘귀향’이 세계 초연된다. 트로이 전쟁 10년과 그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율리시스의 여정을 윤이상의 삶에 교차시킨 작품이다. 30일 오후 7시 30분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정경화’에서는 윤이상이 1981년 발표한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된다. 4월 5일에 세계 초연되는 ‘낙동강의 시’는 유족이 미발표 악보를 발견한 곡으로, 6·25전쟁의 비극적 정서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올림픽 찬가를 불러 이름을 알린 소프라노 황수미도 세 차례 무대에 오른다. 31일 오후 2시 콘서트홀에서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등을, 4월 1일 오전 11시 콘서트홀에서 독일 작곡가 크리스티안 요스트가 재해석한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노래한다. 4월 7일 오후 3시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Ι’에서는 진은숙이 작곡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퍼즐&게임 모음곡’을 들려준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공연도 눈에 띈다. 먼저 백보컬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영화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의 주인공인 리사 피셔가 31일 오후 7시 반 콘서트홀에서 공연한다. 영화 ‘리빙 하바나’의 주인공인 재즈 트럼펫 연주자인 아르투로 산도발은 4월 7일 오후 7시 반 피아니스트 케무엘 로이그, 색소폰 연주자 마이클 터커 등과 협연한다. 이 밖에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피아니스트 케빈 케너,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피아니스트 치몬 바르토, 베네비츠 콰르텟&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첼리스트 양성원&피아니스트 엔리코 파체, 대금 연주자 유홍&가곡 이수자 박민희 등 풍성한 공연이 펼쳐진다. 055-650-0400, 이설 기자 snow@donga.com}

클래식 샛별들의 ‘현의 노래’가 펼쳐진다. 동아일보사와 서울시가 공동 주최하는 ‘LG와 함께하는 제14회 서울국제음악콩쿠르’가 14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서울국제음악콩쿠르는 서울에서 열리는 유일한 국제음악콩쿠르다. 1996년 시작한 콩쿠르는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부문을 해마다 한 부문씩 번갈아 개최한다. 올해는 바이올린 차례다. 서울국제음악콩쿠르는 역대 입상자의 면면만 살펴봐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건반 위의 완벽주의자로 불리는 아비람 라이케르트 서울대 교수, 네덜란드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리비우 프루나루 악장, 거장 지휘자 겸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가 “아네조피 무터의 뒤를 이을 바이올린의 여제”라고 극찬한 백주영 서울대 교수, 젊은 클래식 스타 클라라 주미 강(바이올린) 등 그간 배출한 수많은 입상자들이 국제무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번 콩쿠르에는 10개국 77명이 참가 신청을 했다. 이 가운데 예비심사를 통과한 9개국 36명이 경쟁을 벌인다. 참가자는 세계적인 콩쿠르 상위 입상자 출신이 많다. 다민 김(프랑스)은 2009 프랑스 아비뇽 국제바이올린콩쿠르 3위 수상자이고, 시노야마 하루나(일본)는 2016년 독일 레오폴트 모차르트 아우구스부르크 국제바이올린콩쿠르 특별상 수상자다. 아라이 다카모리(일본)도 2008 일본 오사카 국제음악콩쿠르 2위 수상자. 지난해 오스트리아 베토벤 국제바이올린콩쿠르 2위 수상자인 구리하라 잇세이(일본)와 독일 펠릭스 멘델스존 콩쿠르 3위에 오른 다비드 페트를리크(프랑스)도 출전한다. 한국인으로는 2016년 영국 예후디 메뉴인 국제콩쿠르 4위 수상자인 김지인, 2012년 이탈리아 리피체르 국제바이올린콩쿠르 2위와 특별상, 지난해 오스트리아 브람스 국제바이올린콩쿠르 바딤레핀 특별상을 받은 김재원 등이 참가한다. 2016년 루마니아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바이올린콩쿠르 2위 수상자인 김동현과 2010년 오스트리아 프리츠 크라이슬러 국제바이올린콩쿠르 특별상을 받은 박성미도 눈에 띈다. 심사위원은 강동석(연세대 음악대학 교수), 이성주(한국종합예술학교 음악원 교수), 피호영(성신여대 음악대학 교수) 등 한국 국적 심사위원 3명과 쉬잔 게스네(프랑스), 일리야 그루베르트(네덜란드), 후쿤(프랑스), 올레흐 크리사(미국), 대니얼 필립스(미국), 슈테판 피카르트(독일), 시미즈 다카시(일본) 등 총 10명을 초빙했다. 입상자에게는 1위 5만 달러(약 5300만 원), 2위 3만 달러, 3위 2만 달러 등 6위까지 상금을 준다. 국내외 정상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리사이틀 등 다양한 특전도 제공한다. 2위 이상 한국인 입상자에게는 병역특례 혜택이 주어진다. ▽대회 일정 △1차 예선: 14∼17일 △2차 예선: 19, 20일 △준결선: 21, 22일 △결선 및 시상: 24, 25일. 입장료: 2만∼5만 원. 02-361-1415, 이설 기자 snow@donga.com}

한국을 강타한 미투운동은 미국으로부터 옮겨 붙은 걸까. 전문가들은 ‘노’라며 고개를 젓는다. ‘알파걸 신화’에 가려 조용히 쌓아온 분노에 미국의 미투는 불씨를 지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학업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성을 능가하는 높은 성취욕과 자신감을 가진 여성.’ 2006년 ‘알파걸’이라는 미국의 신조어가 한국으로 날아들었다. 하버드대 아동심리학자인 댄 킨들런 교수가 10대 소녀들의 변화상을 담아 만든 용어였다. 비슷한 시기 한국 사회에도 알파걸이 탄생했다. 현재의 2030, 넓게는 40대 초중반까지 아우르는 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뚜렷한 성차별을 겪지 않았다. 가정에서 귀한 반찬 앞에 아들딸이 평등했고, 교실에선 ‘30분 더 공부하면 내 남편 직업이 바뀐다’류의 교훈이 사라졌다. 1986년 부천경찰서 문귀동 성고문 사건,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 1992년 서울대 신모 교수 성희롱 사건 등을 계기로 이어진 여성운동은 잠시 숨을 골랐다. 양성평등은 상당 부분 진전을 이뤘다는 인식이 퍼졌다. 반면 뛰어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위기의식은 도드라졌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꽤 오랜 기간 알파걸 신화 속에 살았다. 하지만 이는 거대한 착각이었다. 한국 여성의 성평등 의식은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사회구조는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판 미투운동은 역설적으로 ‘알파걸의 반란’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알파걸은 착각이었다 “누구도 저를 알파걸로 대해 주지 않았어요.” 주부 손지민 씨(35)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아이’였다.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고 미술과 체육 시간에도 학우들보다 돋보였다. 2007년 명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침대 맡에서 셰릴 샌드버그, 힐러리 클린턴의 책에 밑줄을 그으며 남다른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여성의 성평등 의식은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사회구조는 전근대에 가까웠어요. 남자 상사는 ‘비키니 입으면 예쁘겠다’는 말을 예사로 내뱉었고, 회식 후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흔들어야 했죠.” 그는 “일상적으로 이어지는 음담패설 등 여성을 비하하는 분위기와 말대답을 하면 별종으로 취급하는 권위의식에 크게 실망했다”고 토로했다.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홍모 씨(33)도 비슷한 무력감을 느꼈다. 사회 핵심 구성원인 4050세대 남성들 일부는 예사로 여성 동료의 외모를 품평하고 비교했다. 군대문화가 조직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았다. 그는 “밥자리, 술자리에서 숱하게 성희롱, 성추행에 노출됐지만 모두가 ‘하하호호’ 하는 분위기에서 ‘똑 부러지는 대응’은 쉽지 않았다”며 “가부장적인 문화에 젖어 점차 약자의 위치에 익숙해졌다”고 했다. 오히려 알파걸 신화가 굴레로 작용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10년 차 기자인 이모 씨(34)는 “‘여성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왜 성폭력을 ‘당했다’고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알파걸이라는 굴레를 악용하는 느낌을 받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강남역’ ‘촛불’ ‘SNS’ 가정에서의 성역할 갈등도 이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2세, 5세 자녀를 둔 직장인 김유경 씨(37)는 맞벌이를 하면서도 가정에서는 전통 질서에 따라야 했다. 똑같이 직장생활을 하는데 명절에 기차표를 끊거나 부모님 생신을 챙기는 일은 늘 김 씨의 몫이었다. 그는 “사회가 현대여성과 전통여성의 불리한 부분만 떠맡기고선 ‘나 몰라라’ 하는 것 같았다”며 “이따금 참을 수 없는 억울함이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여러 문제가 겹치며 여성들 사이에 ‘뭔가 잘못됐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사회문제로 발돋움하지 못했다. 여성 대통령의 탄생과 일부 여성 리더의 신화에 보편적 여성문제가 가렸기 때문이다. 2016년 ‘여혐’과 ‘남혐’ 논란 분위기를 타고 이들은 결속을 다졌다. 그리고 2016년 5월 강남역 살해사건을 기점으로 들끊던 분노가 폭발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살아남아서다행이다’라는 연대의 해시태그가 넘쳐났다. 한샘 성폭력 사건이 처음 알려진 네이트 판 게시판, 직장인 애플리케이션 ‘블라인드’ 등 온라인 공간에는 성폭력 관련 상담글이 쏟아졌다. 온라인에서 연대한 이들은 같은 해 말 촛불집회를 통해 한 단계 성장했다. 뭉치면 잘못된 정치·사회 현상을 직접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웠고, 이때의 경험은 미투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강남역 사건으로 일상의 공포를 자각하고 촛불집회를 통해 실질적 변화를 절감한 알파걸들이 SNS를 무기로 미투운동을 주도했다”고 분석했다. ○ 정치권력 지형까지 흔들 전문가들은 “미투는 기존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형식의 운동”이라고 입을 모은다. 큰 틀에선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대중운동이지만 어디서 또 폭발할지, 어디로 향할지,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은 안갯속이란 것이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형성된 진보 진영 우세의 정치 지형, 친문(친문재인)-비문(비문재인) 등 여권 내부의 권력 지형에도 변화를 몰고 올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판 내부의 ‘주군(主君) 문화’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인 전 지사 피해자와 지난해 대선 경선 캠프에서 근무한 이들은 8일 캠프 내 성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이 교수는 캠프 인사들이 문제를 알고도 묵살했던 배경에 대해 “현재 정치판은 선수가 무너지면 캠프 식구 모두가 일자리를 잃는 구조”라며 “이로 인해 맹목적 순종과 비민주적 분위기가 만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앞으로 (비서를 수족 부리듯 하는) 가신 구조의 정치 지형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며 “이 지점이 미투운동의 본질이자 강력한 힘”이라고 했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바뀔 것이란 의견도 있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정치인을 검증할 때 주변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 잣대로 떠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장 6·13지방선거를 앞두고 성 관련 잡음에 휘말린 전력이 드러날 경우 공천에서 탈락할 공산이 크다. ○ ‘펜스 룰’은 답이 아니다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애초에 여성과 문제 될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는 이른바 ‘펜스 룰’을 따르려는 남성이 늘고 있다. 펜스 룰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지만 많은 남성들은 ‘펜스 룰을 지키는 게 속 편하다’고 푸념한다. 유통업체에 다니는 이모 씨(40)는 “혹시 모를 무고에 대비해 펜스 룰을 지키고 있다”며 “타인(여성)의 평등과 기회 보장을 위해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40대 후반 조모 씨는 “남성들 사이에서 ‘집무실 문은 활짝 열고, 남성과 여성 직원의 회식 장소를 따로 잡으라’는 매뉴얼이 돌고 있다”며 “농담 섞인 내용이지만 일견 일리가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펜스 룰은 미투운동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속 가능한 미투운동을 위해선 남성들의 참여와 지지가 필수적”이라며 “이를 위해선 ‘위드유’를 외치는 남성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드유’를 지지하는 한주석 씨(39)는 “얼마 전 아내가 직장에서 겪은 성폭력 경험담을 듣고선 소스라치게 놀랐다”며 “먼 나라 일인 줄 알았는데 성폭력 이슈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고 했다. ‘한국 남자가 부끄러운 한국 남자’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미투를 지지하는 남성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각계 핵심 위치에 오른 민주화세대 남성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운동권이었다가 1990년대 초반 제도권에 진입한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정치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면서도 사회·문화적으로 가부장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평가다.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은 3040세대와 달리 젠더 감수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다. 안 전 지사를 비롯한 미투운동 가해자 대부분이 이 세대에 속한다. 한 수도권 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성역할과 유교질서가 동시에 무너지는 현실에서 기성세대 남성들이 혼란을 겪을 수 있다”며 “미투운동이 성공하려면 이들의 적응을 돕고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판 앙시앵 레짐 종언 전문가들은 미투운동이 새 시대를 향한 물꼬를 텄다고 입을 모은다. 사안이 심각하고 비교적 명확한 여성문제가 ‘한국판 앙시앵 레짐(구체제) 종언’의 포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실제 검찰과 문화계 내 성폭력 폭로로 시작한 미투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번지고 있다. 홍익대 커뮤니티에는 군대식 신입생 길들이기 관행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한 언론사 직원은 상사의 언어폭력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젠더문제에 비교적 무감한 1020세대는 미투운동을 여성문제가 아닌 계급문제로 받아들인다는 시각도 있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의 미투운동은 여성문제뿐 아니라 계층갈등, 권위주의, 성차별 등 다양한 구태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고 있다”며 “한국판 ‘앙시앵 레짐 종언’의 성격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미투운동은 계급운동의 색깔이 짙다는 점에서 분야를 가리지 않는 사회변혁 운동으로 번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김숙영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외신에서 “한국은 인종문제가 없는 대신에 계급갈등이 심각한 편이다. 이 때문에 밀레니얼 세대를 비롯한 저임금 노동자나 청년들은 미투운동을 계급운동의 연장선으로 본다”며 “주류 남성 중심의 각종 억압에 맞서 성별을 뛰어넘은 결속이 이뤄지고 있다”고 풀이했다.이설 snow@donga.com·이세형 기자}

비올리스트 박경민(28·사진)이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입단했다. 5일 클래식 전문지인 ‘슬리페디스크’에 따르면 박 씨는 지난달 15일 베를린필에 합류해 2년간 수습 단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1995년 바이올리니스트 홍나리 씨가 입단한 이래 베를린필에 입단한 두 번째 한국인으로 확인됐다. 7세 때 바이올린을 시작한 뒤 11세에 비올라로 전향한 박 씨는 13세 때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나 빈 국립음대에서 수학했다. 2010년 동아 음악콩쿠르 우승을 시작으로 독일 ARD 국제콩쿠르에서 2위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14년 금호아트홀 선정 ‘라이징 스타’로 뽑혔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영국 테너 이언 보스트리지(54)는 ‘읽고 쓰면서 노래하는 사람’이다. 그냥 취미로 읽고 쓰는 게 아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철학 석사, 옥스퍼드대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지력(知力)을 바탕으로 음악과 삶에 대한 단상을 칼럼과 책에 담아낸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박사 테너’. 그런 그가 올해 한국을 3번이나 찾는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신설한 ‘올해의 음악가’ 제도 첫 주자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6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IBK무대에서 서울시향 단원들과 협연한다. 10, 11일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벤저민 브리튼의 ‘테너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녹턴’을 공연한다. 7월과 11월에도 공연이 예정돼 있다. 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그는 “지난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클래식 음악의 미래’ 콘퍼런스에서 당시 서울시향 상임작곡가였던 진은숙 씨를 만나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보스트리지는 “음악가가 집중 조명받을 수 있는 장기적 기회를 얻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며 “하나하나 공연에 최선을 다하면 장기적 성취로 이어질 거라고 믿는다”고 기대했다. 그가 음악에 빠져든 건 10대 시절 한 교사가 들려준 슈베르트의 ‘마왕’ 음반이 계기였다. 쓸쓸하게 읊조리다 광폭하게 휘몰아치는 전설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1925∼2012)의 음색에 단박에 사로잡힌 것. 이후 우연히 만난 우상은 뜻밖에도 개인 레슨을 제안했고, 2년 뒤 그는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겨울 나그네’로 화려한 데뷔전을 치렀다. “1994년 호주에서 오페라 ‘한여름 밤의 꿈’ 무대에 섰어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아마추어로 공연하던 때였죠. 그때 성악가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습니다. 예술가로 변신한 뒤 오히려 자유롭고 풍부한 글쓰기가 가능해졌어요.” 그는 음악계에서 ‘슈베르트의 심연에 가닿은 성악가”란 평가를 듣는다. 해당 곡이 처음 소비되던 당대의 맥락을, 성배를 찾듯 치열하게 고민해 노래에 반영한다. 슈베르트 대표곡 ‘겨울 나그네’ 24곡을 분석한 저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그 여정을 집대성한 결과다. 보스트리지 특유의 ‘노래를 부를 때 큰 키로 움츠러드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평가하는 해외 평단의 반응에 대해서도 슬쩍 물어봤다. “‘표현’과 ‘자제’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건 오랜 과제예요. 너무 몰입했다 싶으면 자제하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죠. 이런 표현의 문제를 포함해 저는 늘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요즘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소프라노 마르헤이트 호니흐에게 개인 레슨을 받는걸요.” 6일 ‘2018 실내악 시리즈 Ⅰ’ 1만∼5만 원. 10, 11일 ‘2018 올해의 음악가 이안 보스트리지’ ①, ② 1만∼9만 원. 1588-1210이설 기자 snow@donga.com}

《미국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과 한국의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화려한 경력에서 공통점을 찾기 힘든 두 사람이지만 연결고리가 하나 있다. 한미 양국을 각각 뒤흔들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의 진원(震源)이라는 점이다. 와인스틴은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촉발된 미투 캠페인의 핵심 타깃이었다. 안 전 검찰국장은 그로부터 100일을 조금 넘긴 올해 1월 말 시작돼 문화예술계 등을 강타하고 있는 한국판 미투의 도화선이었다. 양국의 미투 운동은 권력이나 특정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남성 ‘갑’을 상대로 ‘을’의 위치에 있는 여성이 피해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고 법에 호소하는 등의 기본 구조는 비슷하다. 다만 미투 운동이 본격화되는 양상과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 등에서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 여기에 미국은 해당 분야에서 정상급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인사들이 주도하는 반면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인지도 높은 인사들이 나서기를 꺼린다. 법률적인 환경과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투의 진원, 미국은 할리우드 vs 한국은 검찰 미국의 미투 운동은 2006년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양상으로 확대된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10월 와인스틴이 여배우와 여직원들을 상대로 갖가지 성추행 및 성희롱을 한 사실을 보도하면서부터다. 이후 앤젤리나 졸리, 귀네스 팰트로, 애슐리 저드 등 세계적인 스타 여배우들이 성추행을 당한 과거를 털어놓으며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로 미투 운동이 확산됐다. 한국의 미투 운동은 2016년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관련 분야의 관심을 촉구하는 수준에 머물면서 ‘찻잔 속 태풍’에 그쳤다. 현재와 같은 폭발력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서지현 검사의 폭로’다. 술 취한 검찰 고위 간부로부터 상갓집에서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을 당했고,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려 하자 보복성 인사 조치를 당했다는 서 검사의 폭로 이후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 전반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검찰은 사법정의를 실천하는 게 목적인 국가기관인 만큼 윤리 수준에서도 국민들의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며 “(문화예술계처럼 대중적인 관심이 늘 집중되는 분야는 아니지만) 검찰 내 고위 인사가 성추행을 저질렀고, 피해자가 이를 방송에서 자세히 밝힌 건 사회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다양한 권력 남용과 불공정 수사 의혹 등으로 검찰이란 조직 자체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쌓여 있었던 점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 미국은 정상급 스타가 주도하지만 한국은 아직… 미투 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의 면면도 차이가 있다. 미국에선 와인스틴이 배우와 회사 직원 등 주변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추행과 성희롱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졸리, 팰트로, 저드 등 글로벌 스타들이 앞장섰다. 이들은 과거 자신이 당했던 피해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나아가 조직적인 미투 운동 지지 움직임을 펼쳤다. 한국에선 아직까지는 정상급 스타나 유명 인사들이 나서기를 꺼리고 있다. 고은 씨의 성추문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 정도가 그나마 대중적으로 익숙한 이름이다. 문화예술계 안팎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높지 않았던 과거에 성희롱과 성추행이 더 심하고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공공연한 비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유명 여성 문화예술인들이 미투 운동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선 한국이 아직까지 성폭력과 여성 지위 향상 같은 이슈를 자유롭게 논의하기 어려운 분위기임을 방증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유명 인사들의 경우 자칫 자신이 갖고 있는 특권이나 지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길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에선 연예인들이 어떤 정치적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을 지지하는 연대가 존재하고 이어 사회적인 목소리가 만들어지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는 지적이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양성평등과 차별 방지에 대한 교육이나 논의의 역사가 길다”며 “한국에 비해 여성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도 적다”고 말했다. 이어 “정상급의 여자 배우들이 할리우드 권력자(와인스틴)를 대상으로 정면 대결을 펼칠 수 있다는 것도 사회적으로 이런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한국 미투 운동의 걸림돌, ‘명예훼손법’ 한미 양국의 미투 운동이 다르게 진행되는 이유 중 하나는 피해자들의 대응 태도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소송 등에 적극 나서는 반면 한국은 당사자 사과를 요구하는 수준에 머무는 등 소극적인 대응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차이는 국내에만 있는 법률적인 제약이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허위사실이 아닌 진실을 폭로해도 처벌받을 수 있도록 한 형법 제307조(‘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발목을 잡고 있다. 이 법은 공개적으로 사실을 밝혀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비방할 목적이 더해진 경우 정보통신망법 제70조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다. 결국 피해자들이 성폭력 사실을 알리고 싶어도 이런 법들에 저촉돼 역고소를 당할까 봐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피해자 발언의 사실 여부와 명예훼손의 조각 사유인 공익은 그 성격과 기준이 불분명한데 공개적인 폭로는 명예훼손 구성 요건에 분명히 해당해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은 1964년 명예훼손 처벌법을 위헌 처분한 ‘개리슨 대 루이지애나’ 사건 이후 대부분 주에서 명예훼손 처벌 조항을 폐지했다. 매사추세츠주, 미네소타주, 몬태나주, 뉴햄프셔주 등 4개 주만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그만큼 피해자들이 자유롭게 대응할 수 있다는 의미다.○ 미투 운동, 일반으로 확대 중 미국의 미투 운동은 유명 여성인사들 중심에서 일반인들로 확대되는 추세다. ‘타임스 업(Time‘s Up·한 시대가 끝났다)’ 단체 결성이 대표적인 사례다. 올해 1월 1일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각계 여성 300여 명이 모여 결성한 타임스 업은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블루칼라와 저소득층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방지와 지원 활동도 활발하다. 타임스 업에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물론이고 법조계 인사들도 참여하고 있다. 특히 법조계에선 자원봉사 형태로 무료 법률 상담을 해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이라 법적 대응에 나서기 어려운 피해자들을 돕는 데도 적극적이다. 필요할 경우 소송비 지원 같은 활동도 가능하다. 현재까지 마련된 기금 규모도 2000만 달러(약 216억 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 교수는 “미국의 경우 여성 성폭력에 대응하는 문화가 강한 데다 최근 유명인들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황이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관련 움직임이 확장되기 용이한 여건”이라며 “당분간 미투 움직임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한국에서도 앞으로 미투 운동은 법조계, 문화계를 넘어 일반 직장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의 익명 게시판에는 이미 직장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글이 수백 건 올라와 있다. “직장 상사가 좋은 노래라며 보내온 뮤직비디오를 틀어보니 낯 뜨거운 영상이 튀어나왔다”거나 “회식할 때 내 허벅지를 주무르더니 다음 날 딸 같아서 그랬다고 말하더라”는 식이다. 하지만 미국처럼 조직화되지 못하고 개인의 고발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한편 최근 확산 일로에 있는 미투 운동의 실상을 접하면서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적잖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성폭력이 만연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가해자의 잘못된 과시욕과 피해자의 피해의식, 방관자의 무관심 등이 깔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석정호 연세대 의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많은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심리를 왜곡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들이 변화에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하면서 성희롱을 쉬쉬하던 일반 기업에서도 ‘작은 미투 운동’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관대했던 佛, 길거리서 집적대면 과징금 12만 원▼성폭력 고발 목표 같지만 나라마다 상황 제각각현재 미투 운동은 전 세계적인 사회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양상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프랑스는 그동안 남성들의 유혹에 관대해 상대적으로 성에 대해 자유롭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이후 프랑스 전역에서 미투 운동을 지지하며 남성들의 성희롱을 규탄하는 여성들의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성의 40% 이상이 동의하지 않은 신체적 접촉이나 성희롱 발언을 경험했고, 심지어 10%는 성폭행을 당한 경험도 있다는 충격적인 조사가 계속해서 공개됐다. 이에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는 성희롱과 추행을 바로잡겠다며 낯선 여성에게 외설적인 발언을 하거나 길을 막거나 쫓아가는 이른바 ‘캣콜링(cat-calling)’ 행위에 90유로(약 12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영국은 정치권에서 미투 운동이 태풍급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장관이나 의원의 여성 비서진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이어지면서 테리사 메이 내각이 휘청거릴 정도다. 메이 총리의 정치적 동지로 국무조정실장 겸 수석비서 역할을 한 데이미언 그린 영국 부총리가 컴퓨터에 음란물이 들어 있고 여성 활동가의 무릎을 만졌다는 의혹에 결국 물러났다. 마이클 팰런 국방장관은 2002년 여기자를 성희롱한 사건으로 사임했고, 마크 가니에이 국제통상부 각외장관(수석차관)은 여비서에게 성인용품 가게에서 전동 자위기구 두 개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영국 의회는 비서진이 성희롱 사실을 편하게 고발할 수 있는 기구를 마련하고, 성희롱이나 괴롭힘을 가한 사실이 드러나는 의원은 의원직을 박탈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영국 의회 행동지침을 마련 중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미투 운동이 진행 중이지만 파장은 다른 선진 외국에 비해서 ‘찻잔 속 태풍’ 수준이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伊藤詩織) 씨가 지난해 5월 실명으로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일본판 미투 운동은 시작됐다. 이토 씨는 2015년 4월 취업 상담을 위해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 당시 TBS 워싱턴 지국장을 만났다가 성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처녀냐’고 묻는 등 상식 이하의 태도를 보이거나 야마구치 지국장을 불기소 처분하는 등 기대를 밑도는 반응으로 일관했다. 이에 이토 씨는 ‘블랙박스’라는 책을 내고 주일 특파원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며 전면전에 나섰다. 현재 야마구치 전 지국장을 상대로 1000만 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후 작가이자 블로거인 하추 씨가 광고 대기업 덴쓰에서 일할 당시 밤에 선배 사원의 집에 불려갔다는 등의 피해를 고백했고, 연출가인 이치하라 미키야(市原幹也) 씨가 과거 자신의 성추행 사실을 고백하고 사죄했다. 하지만 한국이나 미국처럼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양상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는 2015년 후생노동성 조사에서 일하는 여성의 3분의 1이 성추행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을 정도로 선진국치고는 아직 성추행에 대한 의식이 낮은 편이다. 화합을 강조하며 내부 폭로를 막는 사회적 분위기도 미투 운동의 확산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이세형 turtle@donga.com·이설·김상훈 기자·파리=동정민 ditto@donga.com/도쿄=장원재 특파원}

“외모는 팝가수, 실력은 정통 소프라노.”(세인트루이스 투데이) “21세기형 디바.”(이브닝 스탠더드) 호주 출신 소프라노 다니엘 드 니스(39)에 대한 평가다. 그의 공연 영상을 본 뒤 서면 인터뷰 답변지를 읽었다. 행간마다 활기, 긍정, 기대가 담긴 답은 꼭 그의 무대 같았다. “특유의 활달함으로 어떤 무대든 관객을 장악한다”는 외신의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클래식, 뮤지컬, TV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연해왔습니다. 18세기 모차르트부터 레너드 번스타인의 뮤지컬까지 소화할 수 있다는 걸 한국 관객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15일 오후 8시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첫 내한무대 ‘소프라노 다니엘 드 니스&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모차르트에서 브로드웨이까지’에 오른다. 모차르트 아리아,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중 ‘방금 들린 그대의 음성’, 레너드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와 ‘피터팬’ 등을 부른다. “루이지 아르디티의 ‘입맞춤’은 무대에서 처음 부르는 곡이라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모차르트 ‘돈 조반니’ 중 ‘그 배신자를 피해요’는 2017년 드레스덴에서 돈나 엘비라 역을 맡아 처음 공연했는데, 제가 정말 사랑하는 곡입니다.” 네덜란드와 스리랑카 혈통을 이어받은 그는 아역스타 출신이다. 9세에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로 호주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했고, 미국에 건너간 뒤에는 TV어린이쇼 호스트로 16세에 에미상을 받았다. 오페라뿐 아니라 뮤지컬, 방송, 영화 등을 넘나든다. “본질은 ‘무대’예요. 내 한계를 넘어섰을 때 밀려드는 쾌감은 오페라든 뮤지컬이든 TV쇼든 똑같죠. 다양한 장르를 통해 더 많은 분들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나누길 기대합니다.”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장르는 뮤지컬이다. 그는 “뮤지컬은 그 자체로 빠르게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며 “목소리의 변화에 따라 그에 맞는 장르에 주력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했다. 데뷔 후 30년간 그의 인생은 ‘돌격 무대로’였다. 임신 7개월까지 공연했고 출산 후 바로 관객과 만났다. 지금도 대부분의 시간을 달릴 채비를 하며 보낸다. “어디에 도달했다는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어요. 더 나아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죠. 요즘엔 조금은 멈출 용기가 생겨서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제 아들이 저를 멈추게 하죠.(웃음)” 그는 꽤 많은 한국인 친구를 만났는데 비슷한 문화권(스리랑카)이라 더 끌렸던 것 같다며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을 보다 깊이 알고 싶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한국인이 ‘차 맛’에 새롭게 눈뜨기 시작했다. 2016년 여름 시작한 밀크티 열풍이 ‘티 룸(Tea Room·차 전문점)’과 ‘애프터눈 티 문화’로 옮겨 붙고 있다. 이전까지 새로 개업하는 카페 10개 가운데 1개에 불과하던 차 전문점 비율이 최근 3, 4개로 늘었다. 차 관련 서적과 티 소믈리에 강좌도 2016년보다 3배 이상 껑충 뛰었다. 업계에서는 요즘 차 문화를 선도하는 이들은 ‘밀덕(밀크티 덕후)’과 ‘40대 언니들’로 보고 있다. 직장인 김미정 씨(34)는 지난해 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떠돌던 사진 한 장에 영혼을 빼앗겼다. ‘말간’ 살구빛 액체가 든 아빠 스킨 같은 병엔 ‘보틀 밀크티(Bottle Milktea·병 밀크티)’란 라벨이 붙어 있었다. “유제품을 좋아하는데 어떤 우유보다 구미가 강하게 당겼어요. 꽃 향도 나고 어릴 적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던 분유 우유 같기도 하고….” 이후 김 씨는 가루 밀크티, 액상 밀크티에 빠져들었고, 지난달부터 동네 티 룸에서 차 전반을 배우고 있다. 밀크티 열풍은 시각적 즐거움에서 출발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참기름 병’ ‘화장품 병’ ‘곰돌이 병’ 등으로 불리며 아기자기한 모양새가 여성들의 사랑을 차지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유행도 한몫했다. 최근엔 지난해에 비하면 대중적인 인기는 기세가 한풀 꺾이는 모양새. 하지만 좀 더 전문적이거나 깊게 차 전반에 빠져드는 ‘밀덕’이 많아졌다. 밀크티 전문점인 ‘소셜클럽’의 장재욱 대표(28)는 “밀크티로 시작해 차 세계에 매료된 이들이 적지 않다”며 “다만 프레르, 로네펠트 등 브랜드 티 룸과 개인이 운영하는 티 룸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주역인 40대 여성은 ‘혼족’ ‘욜로’ ‘배움’이란 트렌드에 반응하며 차 문화를 이끌고 있다. 이모 씨(43)는 요즘 한 달에 한 번 중세시대 귀부인으로 변신한다. 동대문에서 장만한 공단 이브닝드레스로 ‘드레스 업’한 뒤 친구들과 티 룸에서 정례 모임을 갖는다. “보기만 해도 황홀한 3단 트레이에 담긴 디저트와 차, 그리고 수다를 즐겨요. 자신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해야 인생도 좋은 시간으로 메워지지 않을까요?” 이 씨 등 덕후들이 꼽는 차 문화의 매력은 정서적인 안정감이다. 이 씨는 “2000년대 초반 열정적으로 스타벅스에 가던 친구들과 이젠 ‘힙’한 티 룸에 가서 특유의 분위기를 만끽한다”며 “따뜻하고 평화로운 카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같은 느낌을 즐길 수 있는 매개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차 문화는 다소 ‘어른’의 영역으로 인식돼 왔다. 일본 대만과 달리 산지가 늦게 발달한 점도 대중적인 확장을 더디게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광복 뒤 급격한 경제성장의 열차를 탔던 한국은 ‘빨리빨리’ 타 먹는 믹스커피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천천히 음미하던 조선의 차 문화가 밀리는 형국이었다고 본다. 미국 차 브랜드인 ‘스티븐스미스티’의 장호식 대표도 “2016년 스타벅스가 출시한 티 브랜드 ‘티바나’가 대박을 친 후 차에 대한 인식이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며 “커피 일색이었던 한국 음료시장이 다변화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했다. 티 전문점 ‘카페샌드박’ 대표이자 티 소믈리에인 박혜정 씨는 “영국 차 문화는 오후 시간대 사교의 성격이 짙고 일본의 차 문화는 외양적인 격식을 중시 여기는 측면이 강하다”며 “한국은 엄마들이 자녀를 교육기관에 보낸 뒤 ‘오전 11시 티타임’을 갖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어 어떤 성격의 차 문화가 만들어질지 흥미롭다”고 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날카롭게 뺨을 할퀴던 추위가 한풀 꺾였다. 겨우내 은인자중하던 클래식 공연계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인생 공연’이 될지도 모를 3월의 클래식 성찬을 소개한다. ▲ 임동혁 피아노 리사이틀 ‘쇼팽의 강자’로 알려진 1세대 스타 피아니스트 임동혁. 정작 자신은 “슈베르트가 가장 잘 맞는 옷”이라고 한다. 데뷔 앨범에서부터 슈베르트는 빼놓지 않던 그가 슈베르트로 전국 투어를 한다. 즉흥곡 D935와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인 D960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했다. 7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3만∼10만 원. 1577-5266 ▲ 서울시향 2018 올해의 음악가 이언 보스트리지 옥스퍼드대 역사학 박사로 잘 알려진 영국 테너 이언 보스트리지가 10, 11일 공연한다. 서울시향 선정 올해의 음악가로서 갖는 세 번의 공연 가운데 첫 무대다. 드뷔시 ‘3개의 녹턴’, 브리튼 ‘테너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녹턴’, 홀스트 ‘행성’ 등을 들려준다. 오후 5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만∼9만 원. 1588-1210 ▲ 소프라노 다니엘 드 니스&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 ‘소프라노계 비욘세’ 호주 출신 소프라노 다니엘 드 니스의 첫 내한 공연. 모차르트의 아리아, 아르디티 ‘입맞춤’, 레너드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와 ‘피터팬’ 등을 노래한다. 정상급 솔리스트들과 협연해온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이 공연에 격을 더한다. 15일 오후 8시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4만∼13만 원. 02-2005-0114▲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첫 내한 공연. 그리스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가 지휘와 협연을 동시에 맡았다. 27일에는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슈베르트 교향곡 제5번,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에로이카’를, 28일에는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 모차르트 교향곡 제38번 ‘프라하’, 슈만 교향곡 제2번 등을 연주한다. 오후 8시 서울 롯데콘서트홀. 4만∼15만 원. 1544-7744▲ 리처드 용재 오닐 ‘DUO’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5년 만에 신작앨범 ‘DUO’로 돌아왔다. 피아노가 아닌 바이올린, 첼로와 협연했다. 이에 맞춰 진행하는 공연 1부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 첼리스트 문태국, 비올리스트 이수민과 함께 베토벤, 조지 벤저민, 모차르트를 연주한다. 2부에서는 디토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선보인다. 31일 오후 8시 서울 롯데콘서트홀. 3만∼10만 원. 1577-5266이설 기자 snow@donga.com}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선생(1917∼1995·사진)의 유해가 25일 고향인 경남 통영시로 돌아왔다. 고국을 떠난 지 49년, 사후 23년 만이다. 그러나 이장(移葬) 찬반 논쟁이 가열되면서 ‘상처 입은 용(龍)’이 고향에서 편히 잠들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선생의 유해는 25일 오후 1시 반 김해국제공항을 통해 들어왔다. 유해함을 안은 플로리안 리임 국제통영음악재단 대표는 독일에서 출발해 일본을 경유한 뒤 한국에 입국했다. 리임 대표는 통영시추모공원에서 대기 중이던 선생의 아내 이수자 씨(91)에게 유해를 전달했다. 이 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건네받은 유해를 추모공원 내 공설봉안당에 안치했다. 입국과 이후 일정은 통영시와 통영국제음악재단 일부 관계자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진행됐다. 독일 현지 이장식은 23일(현지 시간) 베를린 가토 공원묘지에서 진행됐다. 유해를 받아든 딸 윤정 씨(67)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이장식에는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 권세훈 주독 한국문화원장, 리임 대표, 최영숙 한민족유럽연대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윤이상의 귀환은 탄생 100주년이던 지난해 여름부터 추진됐다. 이수자 씨가 ‘제 나이도 아흔을 넘었는데, 통영에 묻히고 싶어 했던 남편과 함께하길 원한다’는 편지를 베를린시에 보내면서 급진전됐다. 정부와 통영시도 적극 나섰다. 유골은 임시 봉안했다가 다음 달 30일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에 맞춰 안장될 예정이다. 묘지는 통영국제음악당 인근 언덕 100m² 터에 마련된다. 생전 통영 앞바다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그리워하던 선생의 뜻을 기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를 골랐다. 처음 교편을 잡은 화양초등학교와도 멀지 않다. 봉분 없이 비석 하나 있는 소박한 추모 공간으로 만들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내 안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선생은 1967년 동백림(東伯林·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뒤 이념 논쟁에 시달려 왔다. 재독 경제학자 오길남 씨에 대한 입북 권유 논란, 망명 후 북한과의 교류 등으로 ‘친북 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은 “노무현 정권 당시 송두율이 귀국한 데 이어 이제는 이장까지 해가며 윤이상을 띄운다”며 비판했다. 오길남 씨(76)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서도 “북한에 두고 온 두 딸은 죽기 전에 꼭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지역 여론도 쪼개졌다. 이날 오후 2시 통영시 중앙동 문화마당에서 보수단체 주최로 집회가 열렸다. 박순옥 운영위원은 “유해 안치를 결사 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통영애국시민총연합회도 최근 기자회견을 열어 “김일성을 사모했던 윤이상이 묻힐 곳은 북한의 ‘애국열사릉’이지 통영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당 소속인 김동진 통영시장(67)은 “선생에 대해 친북활동과 사상적 편향성 시비가 있었지만 이제 인도적 차원에서 자유로워져야 할 때도 됐다”며 “김동리문학관이 문학도의 순례지가 된 것처럼 윤이상 선생의 흔적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용민 통영국제음악당 예술기획본부장은 “윤 선생은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라며 “더 이상 분열 없이 진행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이상은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축하 행사 무대에 올린 오페라 ‘심청’의 성공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손혜리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사장은 “윤이상은 유럽 평론가들이 뽑은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명망이 높은 분”이라며 “이제라도 국내외에서 선생의 음악이 자주 연주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통영=강정훈 manman@donga.com / 이설 기자}

“한국의 ‘반지’는 독일이나 미국 반지와는 달라야겠죠. 남북 분단 상황과 핵전쟁의 위협 등을 작품에 적극 반영할 생각입니다. 예컨대 파프너와 파졸트 형제가 싸우는 장면은 남북 분단으로 그리는 거죠.” 거장의 손에서 ‘한국의 반지’가 새롭게 탄생한다. 독일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84·사진)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링사이클)을 한국에서 제작해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린다. ‘니벨룽의 반지’는 2005년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러시아 마린스키 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했지만, 한국에서 제작을 맡은 건 처음. 올해 11월 ‘라인의 황금’(공연 시간 2시간 30분)을 시작으로 2020년까지 ‘발퀴레’(3시간 40분), ‘지크프리트’(3시간 50분), ‘신들의 황혼’(5시간 20분)을 차례로 선보인다. 그는 21일 본보와의 단독 e메일 인터뷰에서 “올해 한국과 독일 수교 135주년을 맞아 7년 전부터 이번 공연을 준비해 왔다”며 “‘한국의 반지’가 ‘최고의 반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는 여러 우물을 제대로 판 전방위 예술가다. 포스터 의상 소품 등 무대 위 모든 시각물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며, 오페라와 연극을 연출한다. 지금껏 신들린 듯 쏟아낸 작품이 무려 150여 편.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수제자로 4개국에서 최고문화훈장을 받았다. “저는 30대 후반에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했어요. 그래서인지 남북으로 갈라진 한국에서의 공연에 큰 애착을 느낍니다. 분단국가의 현실과 경쟁, 물질만능주의, ‘갑질’ 논란 등을 작품에 담아 반지의 역사를 새로 쓰고 싶습니다.” 팔순이 넘은 고령에도 예술 혼은 펄펄 끓는다. 링사이클은 주요 인물만 34명에, 나흘에 걸쳐 총 18시간 동안 공연되는 대작. 미국 로스앤젤레스(2010년)와 독일 만하임(2013년)에 이어 그 어렵다는 작품에 세 번째로 도전하는 이유가 뭘까. “바그너가 26년 동안 빚어낸 링사이클은 완벽하게 혁신적인 작품이에요. 세계관이 웅장하고 인물은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메시지는 세월이 흘러도 살아 펄떡이죠. 지금까지 그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표현한 연출가는 없다고 봅니다.” 주요 배역은 바그너를 기리는 독일 음악축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활약해 온 한국과 유럽 성악가들이 맡았다. 전승현(아틸라 전), 김동섭(제라르 김), 에스더 리 등이 함께한다. 오케스트라는 오스트리아 지휘자 랄프 바이케르트(78)가 이끌며, 한국인 연주자 60명과 유럽의 연주자 30명이 참여한다. 총 제작비는 120억 원. 주한 독일문화원과 BMW 등 독일 기업이 프로젝트를 후원한다. 국내 공연 뒤 독일 현지로 작품을 역수출할 계획이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전 아직 어리고 먼 여정의 출발점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가장 훌륭한 천재조차도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일에 미쳐 있지 않다면’이란 명언을 늘 되새기죠.” 러시아 소프라노 율리아 레즈네바(29)는 최근 가장 ‘힙’한 20대 소프라노다. 티 없이 깨끗한 고음과 완벽한 기교, 중세시대 인형을 닮은 외모로 세계적으로 두꺼운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22일 오후 8시 서울 롯데콘서트홀의 ‘율리아 레즈네바의 바로크 음악’ 무대에 오르는 그를 e메일로 미리 만났다. 레즈네바는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지구물리학자인 부모는 노래에 무섭게 집중하는 다섯 살 딸의 재능을 알아보곤 곧장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입학하며 독보적 재능과 날카로운 안목이 만나 꽃길을 걸을 운을 틔웠다. 18세에 엘레나 오브라초바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수많은 거물이 그를 ‘다음 세기를 이끌 디바’로 점찍었다.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거장 마크 민코프스키(54), 소프라노의 전설 키리 테카나와(74), 세계적인 고악기 앙상블 ‘일 자르디노 아르모니코’를 이끄는 조반니 안토니니(53) 등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민코프스키는 대부 같은 분입니다. 데카나와는 저를 로열 앨버트홀 공연에 초청해 주셨죠. 안토니니와 그의 앙상블은 고음악계의 보석 같은 존재고요.” 레즈네바는 음색이 순박하면서도 기교가 화려해 바로크 음악에 최적화된 콜로라투라로 꼽힌다. 서울시향과 함께하는 이번 무대에서도 비발디 오페라 ‘그리젤다’ 중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헨델 오페라 ‘알렉산드로’ 중 ‘사랑스러운 고독이여’, 퍼셀의 ‘아더 왕 모음곡’ 등을 노래한다. 그는 “어린 시절 함께 어울렸던 한국 친구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며 “소프라노 조수미도 무척 존경해 이번 서울 공연에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바로크 음악은 ‘재즈’를 닮았어요. 어린 시절부터 바흐와 헨델의 오라토리오 등 바로크 음악을 좋아했죠. 노래할 때 모험을 하듯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점도 매력적이고요.” 고음악에 대한 애정은 악보 연구로 이어진다. 그는 “숨겨진 음악을 공유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며 “니콜라 포르포라의 모테트와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의 아리아 악보를 발굴했을 때 짜릿함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서른을 앞두고 음악적 외연을 넓힐 생각은 없을까. “새로운 것에 도전하겠지만 너무 많이 변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바로크 음악에 단단히 발을 딛고 모차르트,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가곡, 피아노와의 듀오 리사이틀 등에 도전할 겁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이번 설 연휴에는 모처럼 만난 가족과 함께 국악 공연장을 찾는 건 어떨까. 온 가족이 즐기기엔 시끌벅적 다채로운 국악이 안성맞춤.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노릴 만한 명품 공연을 소개한다. 먼저 4년 만에 돌아온 국립극장의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 고전소설인 심청전이 현대 풍자극으로 재탄생했다. 무능한 아버지 대신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는 심청이는 더 이상 효녀가 아니다. 외계어에 가까운 ‘급식체’(청소년 은어)를 쓰며 현실에서 달아나고픈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심 봉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허세 글을 올리며 적폐에 눈감는 ‘꼰대’로 그려진다. 뺑덕어멈은 심 봉사의 재산을 탕진한 뒤 특활비로 썼다고 큰소리친다. 풍자를 통해 민심을 다독이는 마당놀이 역할에 충실했다. 2014년 초연 뒤 2016년까지 118회 공연해 관객 12만5786명을 동원한 연말연시 대표 공연. 18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하늘극장. 전석 5만 원.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는 우리네 세시풍속을 재현한 대공연 ‘한판놀개’가 열린다. 젊은 소리꾼 김용우의 사회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무용단, 창작악단이 공연한다. 대중 아카펠라 그룹 ‘제니스’와 지난해 제6회 국악동요부르기 한마당에서 대상을 수상한 ‘소리꽃심 중창단’도 무대에 오른다. 공연은 새해를 여는 북 합주와 불운을 몰아내는 액막이 타령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소리꾼 김용우와 제니스가 샌드아트와 어우러진 협연을 펼친다. 무용단과 창작단은 신명나는 무대로 관람객의 흥을 돋운다. 소리꽃심 중창단은 설 동요를 부르고 국악관현악단은 세계민요와 연희 판놀음 등을 공연한다. 개띠 해에 태어난 관람객이나 한복 착용자, 3대가 함께 온 관람객에겐 입장료를 1000원으로 할인해준다. 아이가 있는 가족은 국립국악원 앞마당에서 열리는 떡메 치기, 투호, 제기차기 등 전통놀이 체험을 놓치지 말자. 16, 17일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 전석 1만 원. 클래식 공연도 마련돼 있다. ‘크마앙상블의 협주곡과 함께하는 음악여행’이 17일 오후 7시 반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다. 크마앙상블은 2004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창단연주회를 한 뒤로 연극과 클래식 음악을 접목하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해왔다. 김영호의 지휘로 멘델스존, 하이든, 쇼팽 등의 레퍼토리를 들려준다. 2만∼3만5000원. 세계적인 일본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도 내한 콘서트를 연다. ‘2018년 원주 윈터 댄싱카니발’의 일환으로 열리는 공연 ‘따뜻한 선물’에서 로망스, 레이크 루이스, 어펙션 등을 연주할 예정. 17일 오후 3시 강원 원주시 치악예술관. 5만5000∼6만6000원.이설 기자 snow@donga.com}

“이날 밤(개회식 공연)의 스타는 단연 소프라노 수미 황이었다.”(뉴욕타임스) 9일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 이후 인터넷은 ‘올림픽 찬가 선녀’에 대한 관심으로 후끈했다. 자그마한 체구, 황금 봉황이 수놓인 한복드레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외모와는 다른 반전 카리스마에 세계의 안방이 숨을 죽였다. 11일 독일로 돌아간 소프라노 황수미 씨(32)를 13일 인터뷰했다. 독일 본 오페라 극장 솔리스트로 활동하는 그는 전화 통화가 힘들 만큼 목 상태가 좋지 않아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세계적인 무대를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시나무처럼 떨었어요. 하지만 반주가 울리자 거짓말처럼 긴장이 가라앉더군요. 고요하고 벅찬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올림픽 찬가는 개회식 공연의 꽃이다. 1958년 공식 찬가로 지정된 뒤 플라시도 도밍고, 몽세라 카바예, 알프레도 크라우스, 안나 네트렙코 등 세계적 거장들이 개회식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중요한 무대인 만큼 성악가 선정 작업도 극비리에 진행된다. “지난해 12월 초에 후보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12월 29일 최종 선정 소식을 듣고선 ‘현실인가’ 싶었죠. 다행히 독일 공연 일정과 겹치지 않아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습니다.” 공연은 라이브가 아닌 녹음으로 진행됐다. 날씨 등 돌발 상황을 고려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지침에 따른 것. 특히 황 씨는 그리스어로 찬가를 불러달라는 특별 미션을 받았다. 생소한 가사를 어떻게 익힐지 걱정하던 중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그리스어로 올림픽 찬가를 부른 경험이 있는 극장 동료의 도움으로 발음을 정확히 익힐 수 있었어요. 1월 중순 한국에 들어와 녹음 작업을 마치고 바로 독일로 돌아갔죠. 이런 노력 덕분인지 IOC 측에서 올림픽 찬가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하네요.(웃음)” 그는 2014년 세계 3대 음악 콩쿠르 중 하나인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차세대 소프라노로 우뚝 섰다. 경북 안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엔 발레 피아노 등에 두루 관심을 두다가 성악에 정착해 서울예고로 유학을 갔다. “교육공무원인 아버지 수입으로 서울예고에 유학 보내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직 딸의 꿈을 위해 단 한 번의 반대도 없이 버팀목이 돼주신 부모님을 존경합니다.” 서울대 성악과에 진학한 후에는 아무리 연습해도 제자리걸음인 실력에 좌절하며 슬럼프를 겪었다. 그는 “어느 순간 비교가 발전을 방해한다는 걸 깨달았다”며 “‘남들보다 나은 노래’가 아닌 ‘어제보다 나은 노래’를 추구하면서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했다. 오페라, 종교음악, 가곡 등에서 두루 두각을 나타내는 그의 도전과제는 뭘까. “20대엔 방송 뮤지컬 등 다양한 길을 고민했죠. 하지만 가장 재미있는 건 역시 성악이에요.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매 순간에 충실하려 합니다. 무엇보다 성악가에겐 행복한 마음과 체력 관리가 최고의 계획입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사라 장 연주를 보고 자랐는데 ‘레전드’와 같은 무대에 서게 돼 영광입니다.” “저도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닌데 조금 이상하네요.(웃음) 제가 더 많이 배웠습니다.”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리허설룸에서 열린 ‘사라 장과 17인의 비르투오지(Virtuosi)’ 기자간담회. 사라 장(38·사진)과 후배들은 서로를 치켜세우느라 바빴다. 장 씨는 올해 예술의전당 30주년을 맞아 13일 오후 7시 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기념 공연을 연다. 4년 만의 국내 공연에는 후배 바이올리니스트 신아라(악장)·김다미, 비올리스트 이한나·정승원·윤소희, 첼리스트 박노을, 베이시스트 성민제 등이 함께한다. 연주곡은 비탈리 ‘샤콘’과 비발디 ‘사계’, 피아졸라 ‘사계’ 등이다. “엄마와 할머니가 아홉 살짜리에게 맞는 드레스를 찾아 동분서주하시던 모습만 생생해요. 또 공연이 끝나고 한 할아버지를 만나게 됐는데, 알고 보니 노태우 대통령이었죠.” 사라 장은 예술의전당과 인연이 깊다. 1990년 당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뉴욕 필 신년음악회’에 데뷔한 그를 ‘예술의전당 신년음악회’에 초대해 이곳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는 “무대마다 기운이 다른데 예술의전당은 집에 왔다는 느낌을 준다. 백스테이지도 편안하다”고 말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욕심이 과하면 작품이 안드로메다로 가기 쉽다. 역대 겨울올림픽 단복 가운데 ‘슬픈 망작 5’를 꼽아봤다. ①‘무지개떡인가.’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독일 선수단 단복이 공개되자 한국 유머게시판에는 이런 비아냥거림이 올라왔다. 빨간색, 노란색, 연두색, 하늘색, 흰색, 보라색, 주황색…. 전신을 오색으로 수놓아 눈이 어지럽다는 반응도 나왔다. 다만 독일 브랜드 아디다스와 보그너가 함께 제작한 이 유니폼은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러시아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등의 긍정 해석도 일각에서 나오긴 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색은 1978년 미국의 동성애 운동가인 길버트 베이커(1951∼2017)가 처음 디자인한 후 세계로 퍼졌다. ②1984년 사라예보 겨울올림픽. 미국은 지나친 카우보이 사랑으로 빈축을 샀다. 황토색 점퍼와 카우보이모자를 눌러 쓴미국 선수단이 입장하는 장면은 서부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카우보이모자와 웨스턴 부츠, 청바지로 상징되는 ‘카우보이 패션’은 자유와 개척 정신을 나타내는 패션 코드. 한데 정도가 지나쳤던 걸까. “옛날 카우보이보다 더 촌스럽다”는 혹평을 들었다. ③항공 점퍼와 군복 바지, 그리고 세련된 빨간색 비니.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에 참가한 멕시코의 단복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장소가 문제였다. 당시 외신은 “올림픽 개회식이 아니라 비행장이었다면 멕시코 선수단이 베스트 드레서로 꼽혔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배우 톰 크루즈가 전투기 조종사를 연기한 영화 ‘탑건’(1987년)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④1994년 릴레함메르 겨울올림픽 개막식. 캐나다 선수단이 입장하자 관중석이 술렁였다. 큼직한 붉은색 코트와 망토, 검은색 털모자와 검은색 장갑. 분명 러시아 선수단 복장인데 깃발에는 ‘캐나다’라는 글자가 또렷했던 것. 전혀 캐나다스럽지 않은 당시 디자인은 지금도 그 의도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⑤체코가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선보인 단복은 지나치게 어지러운 무늬를 사용해 박한 점수를 받았다. “잭슨 폴록이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다. 스케치북에서나 볼 법한 무늬”라는 혹평을 들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올림픽은 거대한 생중계 패션쇼다. 세계의 눈이 안방 TV를 통해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에 꽂힌다. 각국이 주요 브랜드와 손잡고 수년간 단복 제작에 매달리는 이유다. 9일 막이 오른 평창 겨울올림픽. 홍보 디자인 측면에서 각국이 ‘패션 승부’를 펼친다. ○ 국가 상징… 과하면 ‘밉상’ 덜하면 ‘바보’ 선수 단복은 상징물을 총동원해 애국심을 누가 더 세련되게 드러내느냐가 승부를 가른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윤강로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장은 “과하면 지나치다고 빈축을 사고, 모자라면 일대의 자국 홍보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말했다.[미국]빨간색, 흰색, 파란색의 멋스러운 조화. 어디서나 기본은 하는 별무늬와 줄무늬. 미국은 이번에도 성조기 덕을 톡톡히 봤다. 카우보이모자와 청바지, 웨스턴 부츠가 상징하는 ‘카우보이 패션’도 힘을 보탰다. 미국 개막식 단복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절묘하게 섞어 디자인했다. 빨간색, 흰색, 파란색으로 구성된 패딩 점퍼 뒷면에 성조기와 ‘USA’ 마크로 포인트를 줬다. 여기에 청바지와 웨스턴 장갑으로 자유로운 멋을 더했다. 미국적인 모티브를 과하지 않게 섞어 홍보와 디자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 여기에 기술력까지 과시했다. 버튼을 누르면 파카 안쪽에 부착된 발열 잉크가 몸을 데워준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도 발열 기능을 끄고 켤 수 있다. 성조기의 온도는 3단계로 조절된다. 디자인을 맡은 곳은 미국 대표 브랜드인 랄프로렌. 이번이 벌써 6번째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단복이 ‘메이드 인 차이나’로 알려져 국내 망신을 산 뒤로 원단과 제작 과정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캐나다]캐나다는 의류는 물론이고 모자, 장갑 등 액세서리까지 빨간색, 검은색, 흰색으로 만들어 통일감을 줬다. 또 단풍잎 문양과 ‘CANADA’ 글자를 곳곳에 노출해 홍보지수를 높였다. 단복을 제작한 캐나다 소매유통기업 허드슨베이컴퍼니는 특히 다양한 구성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양말을 체크무늬와 단풍잎무늬 등 여러 종류로 디자인한 것. 방한 장갑, 털모자, 야구모자, 가방, 목도리 등은 평상복으로도 손색이 없다. 허드슨베이컴퍼니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단복뿐 아니라 손수건, 유아용 보디슈트, 담요 등 다양한 올림픽 용품을 판매 중이다.○ 숨은 애국 디자인을 찾아라 의류 강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발군의 감각을 자랑했다. 자국의 상징색을 숨은그림 찾기수준으로 섞어 절제미를 살렸다. 또 ‘스키니 핏’을 고수해 디자인에 대한 자부심을 지켰다.[프랑스]프랑스 역시 국기의 파란색, 빨간색, 흰색을 본떴다. 활동적인 인상을 주는 파란색을 주색으로 쓰되 흰색과 빨간색 선을 곳곳에 배치해 재미를 줬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각도가 한쪽으로 기운 사선 디자인. 패딩 점퍼 등에 가로 세로 직선이 아닌 사선으로 지퍼를 배치해 고급스러운 느낌을 줬다. 심장 부분에 위치한 라코스테의 악어 로고를 유심히 살펴보자. 그 작은 악어의 몸을 파란색, 흰색, 빨간색으로 나눠 칠해 ‘앙증미’를 살렸다. 라코스테는 단복과 동일한 제품에 올림픽 오륜기를 덜어낸 컬렉션을 출시했다. [이탈리아]시골 아낙도 ‘패피(패션피플)’라는 이탈리아의 단복은 엠포리오아르마니의 스포츠 라인인 엠포리오아르마니 EA7이 제작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짙은 파란색으로 통일감을 준 뒤 양쪽 가슴 바깥 부분과 로고에 국기 상징색을 썼다. 언뜻 스타일에 집중한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애국 디자인이 숨어 있다. 재킷과 스웨터의 안쪽에 황금빛 필기체로 이탈리아 국가의 첫 소절인 ‘이탈리아의 형제’를 새겼다.스웨덴의 단복은 3번 연속으로 세계적인 제조·유통일괄형(SPA) 브랜드 H&M이 만들고 있다. 선수들의 의견을 수렴해 개발한 노란색과 파란색을 활용해 밝고 역동적인 단복을 완성했다. H&M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기능성과 디자인, 스웨덴의 문화를 모두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 자칫하면 균형 잃고 ‘망작’[독일]독일 개막식 단복에 대한 의견은 엇갈리지만 부정적 목소리가 다소 우세하다. 톤 다운된 황토색 카키색에 가죽으로 된 로고가 마치 캠핑 패션 같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의류업계에 종사하는 30대 남성은 “아디다스가 디자인했다고 믿고 싶지 않다”, “눈밭과 어울리지 않는 색만 모아놓은 것 같다”고 혹평했다. 독일 올림픽위원회는 단복을 공개하면서 “도시적이고 편안한 ‘어번 스트리트 스타일’을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스위스]스위스는 투박한 학교 체육복 같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빨강은 흰색이나 남색 등과 달리 변화를 줘야 돋보이는데 디자인이 지나치게 단순해 투박해 보인다는 분석도 나왔다. 스위스 올림픽위원회는 “스위스 국기에서 빨간색 바탕은 예수의 피를, 흰색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며 “단복에는 스위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정, 존중, 신뢰 등이 담겼다”고 말했다. [호주]호주는 ‘차려입은 대학생 룩’ 같은 단복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호주의 광활한 자연을 상징하는 짙은 초록을 상징색으로 내세운 시도는 좋았다. 문제는 디자인. 현지 신문은 “체크무늬 셔츠와 재킷, 초록색 스웨터로 구성된 단복은 은행원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도 추위에 약한 선수단을 위해 100% 메리노울을 사용하는 등 보온에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 막판까지 우여곡절도[한국]노스페이스가 제작한 한국 단복은 ‘북한 변수’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남북 공동입장과 단일팀 구성이 결정된 뒤 단복 디자인을 바꿔야 했다. 한국의 얼을 상징하는 흰색을 기본으로 태극기 문양의 파란색 빨간색을 적절히 활용했다. 북한 대표팀을 고려해 태극기는 한반도기로 바꾸고 오른쪽 팔의 ‘팀 코리아’ 로고와 패딩 안감에 새긴 애국가 가사는 삭제했다. 강진주 퍼스널이미지연구소장은 “소치 올림픽 단복과 비교해 전체적으로 개최국의 품위가 느껴지는 디자인”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자국의 도핑 스캔들로 개인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 러시아 선수단. 지난해 11월 단복을 공개한 러시아 브랜드 자스포트는 이들을 위해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러시아 국기를 상징하는 흰색, 빨간색, 파란색 3색 사용은 금하며 단색 또는 2개 색으로만 단복을 만들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에 따라 회색톤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생쥐꼴로 출전하게 됐다”(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제약을 뛰어넘은 모던하고 트렌디한 디자인”(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으로 평이 나뉜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디리리리링.”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습실. 티에리 피셔 수석 객원지휘자(61)의 지휘봉이 양금(洋琴) 연주자 최휘선 씨(31)를 가리켰다. 최 씨가 나무채로 현을 가볍게 두드리자 맑고 고운 소리가 귓등을 두드렸다. 피셔 씨는 “동양 악기가 서양 악기를 대체하다니 흥미롭다. 좋은 연주를 보여줘서 고맙다”며 최 씨를 격려했다. 이날 서울시향 단원 90여 명은 9, 1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공연하는 ‘티에리 피셔와 르노 카퓌송, 꿈’ 가운데 프랑스 작곡가 앙리 뒤티외(1916∼2013)의 ‘꿈의 나무’ 리허설 중이었다. 바이올린, 첼로, 호른, 봉고, 비브라폰…. 30여 종의 서양 악기와 호흡을 맞추던 최 씨는 “어안이 벙벙하다. 입양된 쌍둥이 언니 자리에 앉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서양클래식 공연에 어쩌다가 동양악기 양금이 끼게 됐을까. 사연은 지난해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백지혜 서울시향 공연기획팀 과장(41)은 공연 악기편성표를 받아들고 순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헝가리 민속악기 ‘침벌롬(cimbalom)’. 웬만한 악기 족보를 꿰고 있지만 너무 생소했다. 일단 급히 인맥을 동원해 국내 연주자를 수소문했다. 결과는 낭패.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이 침벌롬을 갖고 있긴 했지만 연주법을 몰랐다. 침벌롬과 이름이 비슷한 쳄발로(cembalo) 연주자인 오주희 씨(60)에게 ‘SOS’를 쳤다. “이야기를 듣고 바로 양금을 떠올렸어요. 양금과 침벌롬은 조상이 같고 소리도 똑같거든요. 12세기 고악기인 서유럽의 덜시머(dulcimer)가 동유럽에선 침벌롬으로, 동양에서는 양금으로 변형됐죠. 덜시머의 조상은 고대 페르시아 악기인 산투르(santur)입니다.” 악기 편성의 결정권을 쥔 지휘자 피셔 씨도 흔쾌히 악기 변경에 동의했다. 다음은 양금 연주자를 찾을 차례. 오 씨와 알고 지내던 타악기 연주자 한문경 씨가 최 씨를 적극 추천했다. 북한과 인접해 개량 국악기가 발달한 옌볜(延邊) 출신의 실력파였다. 6년간 국립국악관현악단 인턴 단원으로 활동한 최 씨는 “늘 양금의 동양적인 면을 부각하려 애썼는데 이번엔 상황이 반대가 됐다”며 “연주법이 조금 다르지만 최대한 침벌롬 느낌을 살려서 연주하려고 노력하겠다”며 웃었다. “음악의 테두리에 있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인 덕분에 양금이 이 무대에 오르게 된 게 아닐까요. 한국에서 양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연주자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