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2024년 전기차 시장은 주춤했습니다. 테슬라는 사상 처음으로 연간 판매량이 뒷걸음질 쳤고요. 유럽의 전기차 판매량도 전년보다 줄었죠. 중국에선 순수 전기차보다는 플러그인하이브리드가 성장을 이끌었고요.역시 전기차는 비싸고 충전도 어려워서 대중화까지는 갈 길이 먼 걸까요. 미국에선 트럼프 당선자가 전기차 보조금 폐지를 예고한 터라 전망마저 암울한데요.이런 추세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전기차 시대로 질주하는 국가가 있습니다. 바로 전기차의 나라, 노르웨이입니다. ‘2025년 전기차 100%’라는 결승선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데요. 전 세계가 주목하는 노르웨이의 비법은 바로 당근 정책이죠. 노르웨이 전기차 정책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10대 중 9대가 전기차88.9%. 지난해 노르웨이에서 팔린 승용차 10대 중 9대는 전기차였습니다. 2023년(82.4%)보다도 크게 늘었죠. 압도적인 세계 1위인데요.이게 하이브리드는 제외한 순수 전기차만 따진 수치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습니다. 이 나라에서 하이브리드 판매 비중은 지난해 8%였죠. 즉, 순수한 휘발유·경유 차량이 고작 3.1%를 차지했단 뜻입니다. 이 나라에선 내연기관차를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이제 어려워진 거죠.이런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전기차 많이 타기로 유명한 북유럽 이웃 국가 덴마크(51.5%)나 스웨덴(35%)과도 차이가 크고요.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 중국 역시 순수전기차 비율은 지난해 27.3%에 그쳤으니까요.사실 노르웨이는 도로를 전기차로 채우기엔 기본 환경이 척박합니다. 일단 날씨가 너무 추워요. 북극권 맹추위는 배터리 성능을 급격히 떨어뜨리곤 합니다. 또 국토가 넓고 길다 보니 인구 밀도가 낮습니다. 충전기를 촘촘히 설치하기 쉽지 않단 뜻이죠. 무엇보다 자동차 시장이 이미 성숙한 선진국입니다. 수십 년 동안 휘발유·경유 차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의 습관을 바꿔야만 하는 건데요.하지만 동시에 노르웨이는 전기차에 유리한 조건도 있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요.①싸고 안정적이고 풍부한 전기=노르웨이는 대부분 전기를 수력발전으로 생산합니다. 저렴하면서도 친환경적이기까지 한 전기가 넘쳐나는 나라이죠. 해저 케이블로 다른 나라에 남는 전기를 수출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전기를 충전해 달리는 자동차를 몰기엔 좋은 조건이죠.②기존에 너무 비쌌던 자동차세=노르웨이에선 차를 사는 게 항상 비쌌습니다. 승용차가 대중화된 1960년대 이후로 줄곧 자동차세가 너무 높았죠. 한때는 새 차를 사면 내야 하는 부가가치세와 등록세 같은 각종 일회성 세금이 구매비용의 50%를 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노르웨이엔 자동차 제조업체가 없고, 전부 다 수입차이잖아요. 정부 입장에서 자동차는 손쉽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대상이었죠. 소비자들은 불만이었지만, 정부는 환경을 명분으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자동차세를 부과해 왔습니다.20년 넘게 이어진 인센티브노르웨이의 전기차 지원 정책은 1990년대부터 생겨났습니다. 처음엔 노르웨이 전기차 스타트업 ‘싱크카(Think Car)’를 지원하려는 목적이었죠. 1997년 통행료 면제, 1998년 공공장소 무료 주차, 2001년 부가가치세(25%) 면제까지. 파격적인 혜택이 줄줄이 생겨났는데요. 싱크는 결국 망했지만, 이런 전기차 지원제도는 그대로 남았습니다.그리고 2011년 가을. 소형 전기차 신모델이 새롭게 선보이면서 노르웨이 자동차 시장은 격변합니다. 바로 닛산 리프(Leaf)였죠. ‘26만 크로네(약 3300만원)’이란 가격표와 175㎞라는 당시로선 양호한 공식 주행거리에 소비자는 열광했습니다. 동급 폭스바겐 골프보다 가격은 15% 정도 비싸지만, 통행료 면제에 무료 주차라는 혜택까지 받을 수 있다니 매력적이었죠. 2013년 리프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3위에 오릅니다(1위 폭스바겐 골프, 2위 도요타 오리스)이어 2013년 8월 테슬라가 모델S를 출시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킵니다. 44만6600크로네(약 5700만원)라는 경쟁력 있는 가격을 앞세워 치고 올라왔죠(물론 이후 테슬라는 점차 판매가격을 올렸지만요). 2014년이 되자 노르웨이 전체 신차 판매량 중 12.5%를 전기차가 채웠습니다. 10년 전에 이미 최근 한국이나 미국 시장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거죠. 이런 현상은 노르웨이 소비자들이 특별히 환경 이슈에 민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각자 이익을 따진 선택이었죠. 손익을 계산했을 때 전기차 플러스라는 게 확실하게 보이자, 고민 없이 돌아선 겁니다. 노르웨이에서 전기차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너무 비싼 환경정책?그리고 이때쯤부터 노르웨이의 전기차 정책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납니다. 세금 면제 덕분에 전기차 구매가 늘어나는 건 좋은데, 막상 전기차가 너무 잘 팔리니까 세수에 난 구멍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죠. 자동차 탄소배출량 줄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돈을 많이 쓰는 게 과연 맞느냐, 너무 혜택이 과하지 않느냐는 회의론이 나온 겁니다. 실제 2025년 전기차에 대한 세금 감면과 각종 할인 혜택을 모두 합하면 500억 크로네(약 6조4000억원)에 달할 거라고 합니다. 엄청난 금액이긴 하죠.이를 두고 이웃 나라인 덴마크 기후 장관은 2019년 이렇게 비꼬듯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것(노르웨이의 전기차 정책)은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사용된 가장 비싼 정책 중 하나일 겁니다.”그러나 노르웨이는 이런 대대적인 인센티브 정책을 꾸준히 유지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정부가 두 가지를 모두 가졌기 때문이죠. 돈과 의지.노르웨이는 막대한 석유 매장량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2023년 정부가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로 얻은 순수입만 166조원에 달한다죠. 다른 나라에 석유 판 돈으로 전기차 구매를 지원한다니. 어찌 보면 좀 아이러니하긴 하지만요.또 정부는 2050년 탄소배출량을 1990년 대비 90% 이상 줄이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습니다. 2018년 발효된 ‘기후목표법’에서 이를 못 박아 정해뒀을 정도인데요. 이를 위한 중간단계로 2025년엔 승용차 신차 100%를 탄소배출 제로로 만들겠다고도 선언했습니다.노르웨이는 여전히 돈 많이 드는 전기차 우대 정책을 꿋꿋이 유지 중입니다. 물론 2023년부터 전기차 값 중 50만 크로네(6400만원)가 넘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가가치세를 내도록 하는 등 혜택을 다소 줄이긴 했는데요. 잘 팔리는 차종은 대부분 50만 크로네 이하이기 때문에 여전히 대다수 소비자엔 매력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광범위한 인센티브를 구성하고 이를 장기적으로 예측가능하게 만들 것.” 세실리 크니베 크로글룬드 교통부 차관은 노르웨이의 전기차 성공 교훈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일관된 정책은 게임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법이죠.참고로 노르웨이 방식을 따라 해서 최근 성공을 거둔 나라가 있는데요. 바로 (2019년에 장관이 노르웨이 정책을 비웃었던 그) 덴마크입니다. 이 나라는 2020년 정치적 합의를 통해 노르웨이와 비슷한 전기차 세금 면제 정책을 도입했죠. 그리고 이후 4년. 덴마크에서 전기차 판매 비중은 2020년 7.2%에서 2024년 51.5%로 수직상승합니다.‘승용차 탄소배출 제로’의 꿈전기차 판매가 급증하면서 노르웨이에선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이제 현대차·푸조·오펠·피아트·렉서스 같은 전통 브랜드도 노르웨이에서 내연기관차 판매를 아예 중단했고요. 주유소들은 충전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주유기를 일부 뜯어내는 업그레이드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편의점에선 30분의 충전시간 동안 손님들이 먹을 만한 좀 더 제대로 된 식사 메뉴를 팔기 시작했고요. 자동차 정비소는 이제 기름때 얼룩을 옷에 묻힐 일이 없는 배터리 기술자를 채용합니다. 이 나라엔 여전히 많은 내연기관차가 달리고 있지만 점점 늙어가고 있습니다. 경유차는 평균 연령이 13.2년, 휘발유차는 무려 19년이나 되죠.한때 “미친 짓”으로 손가락질받았던 2025년 무공해차 100% 목표는 이젠 손에 잡힐 듯합니다. 물론 완전한 100%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노르웨이 정부가 휘발유·경유 승용차를 못 팔게 규제하는 건 아니니까요.대신 올해 4월 1일부터 전기차가 아닌 차량을 살 때 내는 등록세가 올라갑니다. 내연기관차는 평균 1만4500크로네(185만원), 플러그인하이브리드는 평균 4만5000크로네(576만원)나 세금이 더 붙는다죠. 이건 거의 하이브리드카의 멸종 선언과 다름없는 조치라 하겠는데요. 당근책(인센티브)을 유지한 채 채찍까지 휘두르니 효과는 뻔합니다. 노르웨이 전기자동차협회의 크리스티나 부 회장은 이렇게 승리를 예상하죠. “2025년은 우리의 희년(성스러운 해)이 될 것입니다.”그럼 이 세계 최초 전기차 왕국에서 승자는 누구일까요. 일단 2024년 노르웨이에서 가장 많이 팔린 브랜드는 단연 테슬라인데요. 폭스바겐의 장기집권을 끝내고 2021년부터 줄곧 1위 브랜드 자리를 지킵니다.다만 테슬라 점유율은 2023년보다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만만찮은 도전자들이 선전 중이기 때문인데요. 지난해엔 볼보가 신형 전기차 EX3를 앞세워 시장을 넓혀갔고요. 후발주자인 중국 전기차 브랜드(BYD, 샤오펑, 니오, 지커 등)도 오슬로 핵심 지역에 쇼룸을 열고 판매량을 끌어올리고 있죠. 이런 중국 브랜드를 모두 합치면 약 10% 점유율을 기록합니다.2025년도 경쟁은 대단히 치열할 겁니다. 이 나라에서 팔리는 전기차 모델만 이제 160개가 넘습니다. 올해 가장 먼저 치고 나온 건 현대차이죠. 노르웨이에서 잘 팔리는 소형 전기 SUV 코나 가격을 새해에 4만 크로네(512만원)나 할인하고 나섰습니다. 도요타의 야심작인 ‘어반 크루저’ 전기차와의 대결을 준비하는 건데요. 어반 크루저는 ‘2025년 마지막 남은 휘발유차 모델(주로 도요타 브랜드)을 노르웨이에서 밀어낼 기대주’로 꼽히는 모델이라 긴장해야 합니다.또 테슬라 모델Y의 부분변경 모델 주니퍼가 올해 선보이죠. 벌써부터 2025년 판매 1위는 떼어놓은 당상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또 단종된 소형 해치백 ‘폴로’의 대체제로 꼽히는 폭스바겐 소형 전기차 ID.2 역시 출격을 준비 중이고요. 말 그대로 새로운 전기차가 쏟아져 나옵니다. 2025년 노르웨이 전기차 시장이 세울 신기록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By.딥다이브노르웨이 전기차 시장을 2년 만에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정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전기차 100%’라는 목표를 사실상 달성하게 될 거란 자신감은 훨씬 높아졌는데요. 마침 미국에서 전기차 보조금 폐지론이 나오는 터라, 더 대비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전기차 천국, 노르웨이가 2024년엔 전기차 판매 비중 88.9%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춥고 넓어서 전기차 보급에 불리하다는 인식을 깼습니다.-20년 넘게 이어진 전기차 지원 정책이 빛을 본 건 10여 년 전부터.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괜찮은 전기차 모델과 결합되면서 붐이 일어납니다. -물론 돈이 많이 드는 작업입니다. 정부의 의지와 재정적 부유함이 뒷받침됐습니다. 국내 자동차 제조사가 없기 때문에 정책이 오히려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나라에선 전기차를 사는 게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2025년에도 내연기관차 판매가 금지되진 않지만, 사실상 전기차만 팔리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겁니다.*이 기사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9년 넘게 캐나다를 이끈 쥐스탱 트뤼도 총리(54)가 6일 사임을 발표했죠. ‘진보의 아이콘’으로 통하던 트뤼도의 몰락이건만, 아무도 놀라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잇따른 보궐선거 패배와 지지율 폭락(22%), 그리고 측근이던 재무장관 사임까지. 침몰 징조가 워낙 뚜렷했거든요.임기가 길었던 만큼 추락의 원인도 여러가지인데요. 무엇보다 가장 큰 건 이겁니다. 캐나다 국민이 먹고살기가 점점 팍팍해진다고 느낍니다. 경제는 성장 없이 거의 제자리인데 생활비는 무섭게 뛰니까 말이죠. 환경·다양성 같은 가치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지도자를 국민은 원하는데요. 트뤼도의 몰락으로 본 캐나다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경제성장 동력이던 이민요즘 캐나다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많이 얘기합니다. 그럼 경기침체에 빠진 걸까요? 따져보면 그건 아니죠. 경기침체란 단순히 경제가 어려운 게 아니라, ‘2분기 연속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이 마이너스’인 걸 말합니다. 캐나다의 2024년 2분기 GDP 성장률은 2.1%, 3분기는 1%. 모두 플러스였죠.그런데도 요즘 캐나다 경제학자들은 “사실상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또 다른 지표, 1인당 실질 GDP가 무려 6분기 연속으로 하락했기 때문이죠. 이런 건 1982년 경기침체 이후 42년 만에 처음이라는군요. 그 6분기 만에 1인당 GDP가 3.5%나 쪼그라들었습니다. 나라 경제 전체로 보면 파이가 커졌지만, 국민 개개인의 몫은 점점 작아진 거죠.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인구가 워낙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이죠. 역대급 인구 급증 덕분에 1인당 GDP가 줄어드는 가운데도 경기침체는 벗어날 수 있었던 건데요.도대체 얼마나 늘었냐고요? 2023년에만 127만명, 즉 3.2%가 추가됐습니다. 1957년(3.3%)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자, 현대 선진국에선 웬만해선 찾아보기 힘든 수치이죠. 증가한 대부분은 이민자이고요. 그중에서도 80만명 이상은 영주권이 없는 ‘임시 거주자’에 해당합니다. 유학생과 난민, 그리고 저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이죠.캐나다는 본래 이민자에 열려있는 개방적이고 관대한 나라로 유명합니다. 그 바탕엔 ‘이민이 국가 경제에 기여한다’는 믿음이 깔려있죠. 그리고 2015년 압도적 지지율로 10년 만의 정권 교체에 성공하며 집권한 트뤼도 총리는 이민에 문을 더 활짝 열었습니다. 이민자 수를 대폭 늘리겠다고 발표했고요(연간 영주권자 2014년 26만명→2024년 50만명 목표).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고, 임시 취업비자 문턱을 낮추고, 영주권도 더 잘 내주고, 가족도 데려오기도 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친이민 정책이 캐나다 경제 성장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본 거죠. 그땐 유권자들도 이에 동의했습니다.특히 2015년 시리아 난민을 공항에서 환영하며 맞이하는 젊은 총리의 모습은 엄청난 화제가 됐죠. “다양성은 캐나다의 강점”이라는 트뤼도 총리 발언은 전 세계를 감동하게 했고요. 그는 마치 진보 정치의 영웅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캐나다 국민들이 질려버린 트뤼도식 ‘쇼잉(showing) 정치’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지만요.일자리와 살 집이 모자란다문제는 이민자 수가 늘어도 너무 빠르게 늘었단 겁니다. 2020~21년 코로나 팬데믹 때 억눌렸던 이민자 유입 수는 2022년이 되자 100만명, 2023년엔 120만명을 넘어섭니다.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밀려든 인구가 경제에 큰 부담이 되기 시작하는데요.일단 실업률이 치솟습니다. 새로 진입한 젊은 이민자는 대부분이 바로 취업시장에 뛰어들죠. 하지만 이들을 다 수용할 정도로 캐나다 경제가 강력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이민 문턱이 낮아진 데다, 대학들이 유학생을 왕창 유치하면서 저숙련 근로자가 너무 많아진 것도 문제이고요.2024년 11월 캐나다 실업률은 6.8%. 코로나 팬데믹 때를 빼면 2017년 이후 최고치입니다. 청년 실업률은 무려 14%에 육박하죠.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면 201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명색이 고등교육 비율 세계 1위인 나라인데,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난리인 상황입니다.토론토에 사는 인도 출신 유학생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영상은 요즘 캐나다 상황을 보여주죠. 팀홀튼 커피숍의 파트타임 구직 면접을 위해 몰려든 유학생 수십명이 긴 줄로 늘어서 있습니다. 물론 이런 유학생과 경쟁해야 하는 캐나다 청년도 절망적이긴 마찬가지 상황입니다.주택시장에도 적잖은 압박이 있습니다. 특히 매매시장보다는 임대시장이 2022년부터 넘치는 수요로 들썩거렸는데요. 지난 3년 동안 평균 임대료는 19%나 뛰었습니다. 최근 몇 달은 아파트 공급이 늘면서 임대료 상승세가 주춤했지만, 이미 젊은이들은 그동안의 임대료 폭등에 질렸습니다. 사실 냉정히 따져보면 임대주택이 모자라는 데는 다른 이유가 더 결정적이란 분석이 설득력 있긴 한데요(높은 금리, 건축비용 상승 등). 그래도 몰려든 이민자를 탓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그토록 이민에 열려있던 관대한 캐나다인들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엔비로닉스(Environics) 조사에 따르면 2022년엔 ‘캐나다로의 이민이 너무 많다’는 데 동의하는 응답자가 27%뿐이었는데요. 지난해엔 58%로 크게 높아졌습니다. 1998년 이후 가장 높은 거죠.결국 트뤼도 총리도 돌아선 여론에 항복해야 했습니다. 지난해 10월 공식적으로 이민정책의 실패를 인정했는데요. 그는 “균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면서, 인구수 증가 목표를 21% 삭감(영주권자 기준 50만명→39만5000명)한다고 발표했죠.조삼모사 탄소세의 결말트뤼도를 주목받는 지도자로 띄웠지만, 정작 국내 인기는 크게 갉아먹은 정책이 또 있습니다. 바로 ‘탄소세(공식 명칭은 탄소 가격책정)’이죠.2019년 캐나다 정부가 도입한 탄소세는 상당히 진보적인 환경정책입니다. 일단 모든 연료 구매에 세금을 부과하죠. 세금을 내는 건 주유소·도시가스업체 같은 기업이지만, 이는 결국 소비자 가격에 전가됩니다. 기름값이나 가스요금이 그만큼 오르죠. 탄소세는 가솔린 기준으로 1리터당 17.6센트(약 179원)였는데요. 2030년까지 해마다 조금씩(연간 약 3센트, 30원 정도) 인상됩니다.이렇게 거둔 세금은 특이하게 정부 재정으로 들어가지 않고요. 기금으로 모았다가 각 가정으로 환급해 줍니다. 가구주의 은행 계좌로 직접 돈을 넣어주죠. 돌려받는 금액은 주마다 다른데요. 1인 가구이면 분기당 100~200캐나다달러(10만~20만원)입니다. 가구원이 많거나 농촌 지역이면 더 받고요.아니, 왜 이런 번거로운 제도를 도입했을까요. 가계에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화석연료를 덜 쓰도록 소비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죠. 화석연료를 남보다 적게 쓰는 가정은 탄소세로 낸 것보다 더 많은 돈을 환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각 가정에서 자연스레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려고 애쓰지 않을까요. 단순히 ‘쓰면 세금 낸다’는 처벌 방식이 아니라, ‘안 쓰면 돈 번다’는 인센티브 방식의 제도인데요.탄소배출량을 줄이려는 이런 정부 차원의 노력. 취지는 참 좋습니다. 진보적인 환경정책의 세계적인 모델로 찬사를 받았죠. 물론 국민들도 처음엔 이를 지지했고요.문제는 ‘소비자가 내는 세금=가정이 돌려받는 환급금’이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쉽게 잊힌다는 겁니다. 즉, 분기마다 환급금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거야 당연히 좋은데요. 주유소에 갈 때마다, 가스요금 고지서를 받을 때마다 높아진 소비자 가격을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분노하게 되는 거죠.아무도 ‘탄소세 때문에 휘발유 가격이 뛰었네. 그럼 다음번에 내 환급금이 더 늘어나려나’라고 받아들이진 못하는 겁니다. 오히려 막연히 자신이 내는 탄소세가 돌려받는 환급금보다 많은 것 같다며 억울해하죠. 실제론 그런 가정은 전체의 20%밖에 되지 않는데도요. 또는 아예 환급금을 받은 걸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즉, 경제학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제도이지만 현실에선 생각했던 대로 작동하질 않는 겁니다.또 다른 문제는 ‘그럼 탄소세 덕분에 탄소배출량이 얼마나 줄어들었어?’라는 질문에 똑 떨어지게 답하기 어렵단 겁니다. 탄소배출량 감축을 위한 정책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중 얼마가 탄소세 덕분인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죠.대신 보수 진영은 탄소세 공격의 논리를 탄탄하게 쌓아가고 있습니다. 보수 싱크탱크 프레이저연구소는 ‘탄소세가 기업 부담을 늘려서 캐나다 경제를 최대 1.8% 위축시키고 일자리 18만개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란 전망을 내놨죠.특히 야당인 보수당 대표 피에르 폴리에브는 탄소세에 대한 반감을 땔감 삼아 불을 활활 지핍니다. 46세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인 그는 탄소세가 이렇게 계속 높아지면 “대량기아와 영양실조를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식품 제조업체가 에너지를 많이 쓰기 때문에, 탄소세가 결국 식품가격 인상으로 이어진단 논리입니다. 또 이렇게도 말하죠. “노인들은 겨울을 버티기 위해 난방 온도를 13~14도로 낮춰야 할 겁니다. 인플레이션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집을 떠나 운전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러면서 “세금 폐지(AXE THE TAX)”라는 단순 명료한 슬로건을 내겁니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제 캐나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탄소세 철폐를 원합니다. 물가가 뛰고 먹고살기 팍팍해지니, 환경이란 대의보다는 내 지갑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해진 거죠. 아마 이들 유권자 상당수는 다가오는 10월 총선에서 야당을 찍어 탄소세를 끝내려 들 겁니다.아무리 취지가 착하고 좋은 정책도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은데요. 원래 국민은 자신의 어려움을 잘 살펴주고 공감해 주는 지도자를 원하는 법입니다. 소통할 줄 모른 채 ‘내가 옳다’고 고집만 피우는 정치인은 진보이든 보수이든 설 자리가 없게 되죠. 언젠간 트뤼도 정부의 유산이 재평가받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닙니다. By.딥다이브인플레이션 쇼크는 종종 정권을 무너뜨린다는 이야기, 지난해 전해드린 적 있죠(). 영국과 미국에 이어 캐나다도 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됐습니다. 아무리 대의가 훌륭해도 민생을 챙기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9년 넘게 캐나다를 이끈 트뤼도 총리가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한때 전 세계적으로 빛나던 진보정치 스타의 추락은 무엇보다 먹고살기가 팍팍해졌기 때문입니다. -트뤼도는 이민이 캐나다 경제의 해결책이라 믿었고, 이민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하지만 2022년부터 이민자는 예상을 뛰어넘게 급증했고 이미 약한 캐나다 경제를 압박했습니다. 임대주택난과 청년실업에 시달리는 캐나다인은 이제 이민에 대한 열린 마음마저 닫고 있습니다.-트뤼도의 진보적인 환경정책 탄소세는 빠르게 지지를 잃었습니다. 화석연료를 덜 쓰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누구도 기름값이 높아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고물가 시대에 탄소세는 고통을 가중시키는 나쁜 정책으로 낙인찍혔고, 이제 유권자는 ‘세금 철폐’를 외칩니다.*이 기사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이것 없인 살 수 없다는 사람들, 아마 많을 겁니다.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에 한국을 포함한 상당수 국가는 수입에 의존하죠. 그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만 1억2500만명에 달합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거래되는 무역상품인 검은 빛의 원자재. 석유냐고요? 아니요. 바로 커피입니다.글로벌 커피 가격이 급등했다는 소식, 들어보셨나요. 뉴욕 국제상품거래소(ICE) 기준 커피 원두 가격은 지난 1년 동안 72% 뛰었죠. 2024년 12월엔 사상 최고치인 파운드(0.45㎏)당 3.49달러를 기록했고요.이게 다 극심한 기후변화 탓이란 분석과 함께 ‘이러다 커피가 사치품이 되겠다’는 걱정이 이어집니다. 그럼 정말 커피 가격은 이대로 계속 오르기만 할까요. 커피 가격의 지난 50년 추이 그래프가 말해주는 이야기는 좀 다른데요. 오늘은 치솟는 커피 가격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월 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브라질의 재채기글로벌 커피 업계엔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브라질이 재채기하면 커피 세계가 감기에 걸린다.’ 세계 커피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생산국 브라질 작황이 그만큼 커피 가격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단 뜻이죠.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왜 지금 커피 가격이 이렇게 뛰었을까요. 브라질이 재채기를 아주 세게 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2021년에요.2021년 7월 20일 아침, 커피 업계를 떨게 하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밤사이 브라질 주요 커피 농장 지역에 ‘검은 서리’가 닥친 겁니다.6~8월 브라질은 겨울이고, 아라비카 커피가 주로 자라는 고산지대엔 때론 한파가 닥쳐서 서리가 내리기도 하죠. 대부분은 잎과 열매만 어는 정도의 약한 서리(=하얀 서리)에 그치는데요.검은 서리는 커피나무의 줄기와 뿌리까지 죄다 얼려버려서 죽게 만드는 훨씬 강한 서리를 말합니다. 검은 서리가 들이치면 하룻밤 만에 농장이 초토화되죠. 커피나무가 타버린 듯 검게 변해 죽기 때문에, 베어내고 새 묘목을 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무서운 일이 2021년 닥친 겁니다. 브라질 전체 커피 생산량의 10%를 단숨에 날려버리는 사건이었죠. 그 결과 2021년 한해 국제 커피 가격은 100% 가까이 뛰었습니다.3년 반 전에 내린 검은 서리가 지금의 커피 가격과 무슨 상관이냐고요? 검은 서리가 내리면 그 피해는 몇 년에 걸쳐 이어지는 법입니다. 오히려 피해가 점점 커지는 경향도 있죠. 서리 첫해엔 보통 전년도까지 쌓아뒀던 재고 물량이 아직 남아있으니 시장이 어느 정도는 버팁니다. 문제는 한번 검은 서리의 습격을 받았던 지역에 곧이어 또 서리가 닥치곤 한다는 건데요.커피나무는 새 묘목을 심어 열매를 수확하기까지 3~4년이 걸립니다. 어린 커피나무는 줄기와 가지가 가늘기 때문에 서리에 더 취약하죠. 그래서 크고 튼튼한 나무라면 버틸 만한 서리에도 작은 나무는 바로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24년 8월 바로 이런 일이 발생했죠. 2021년 검은 서리보단 훨씬 약한, 하지만 어린나무엔 여전히 치명적인 서리가 닥친 겁니다.2021년과 2024년 연이어 서리 피해를 입은 브라질의 커피 농장주는 이렇게 말합니다. “2021년 나무의 90%가 손상됐고, 그중 60%는 다시 심어서 회복했습니다. 이제 막 생산을 시작하려던 때 다시 서리에 맞았어요. 이걸 또다시 재식재할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게다가 브라질 전 지역에 2024년 극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3년 전 서리로 이미 약해진 커피나무에 가뭄 스트레스까지 겹치면서 수확량을 더 줄였죠. 브라질 정부 산하 기관인 CONAB는 2024년 커피 수확량을 전년보다 0.5% 감소한 5479만 포대로 추정합니다. 4년 연속 흉작이죠. 6000만~6400만 포대를 거뜬히 수확했던 이전 풍작 시기와 차이가 큽니다.커피값 이상급등의 배후지구온난화 같은 기후 변화는 분명 커피 산업에 상존하는 위험 요인입니다. 커피나무, 특히 향미가 풍부하고 고급으로 평가받는 아라비카 커피는 키우는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18~22도의 덥지 않고 온화한 기온이어야 잘 자라죠. 열대지역에서도 해발 600m 이상 고지대에서 주로 자라는데요.지구 온도가 꾸준히 상승하면서 이 조건에 맞는 고도와 위도가 갈수록 높아져만 갑니다. 2050년이 되면 현재의 아라비카 커피 재배지의 50%는 너무 더워서 계속 재배하기엔 부적합해질 거라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죠. 마치 요즘 사과가 대구가 아닌 강원도에서 잘 자라고, 유럽의 와인 재배지가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이미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커피 농장의 고민은 큽니다. 수십 년 동안 일궈온 터전을 옮기기란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요.그럼 브라질 커피농장을 초토화하고, 글로벌 커피 시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검은 서리 현상. 이것도 최근의 기후 변화 탓일까요?솔직히 그렇게 말하긴 좀 애매합니다. 왜냐고요? 이 기후 현상은 새롭게 나타난 게 아닙니다. 이미 2세기 넘게 브라질 커피 재배에 있어 재앙적 존재였죠. 브라질의 상업적 커피 재배 초기인 1822년에도 검은 서리가 브라질 중남부를 덮쳐 큰 피해를 줬단 기록이 있고요. 그동안 20여 차례에 걸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파괴적 손실을 입힌 건 1975년과 1994년, 그리고 2021년이었죠.이러한 브라질의 서리 피해는 쌍으로 연이어 발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1975년과 1978년, 1994년과 1995년, 2021년과 2024년. 이렇게 말이죠. 그리고 이는 지난 50여년간 커피 가격 그래프 중 상당 부분을 설명해 줍니다.가격 그래프를 보면 뾰족한 봉우리가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이 중 빨간 원으로 표시한 부분이 바로 브라질 검은 서리의 여파를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크고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 나타나죠. (참고로 초록색 부분은 브라질을 포함한 중남미에 닥친 가뭄이 가격 급등의 주요 원인이었습니다.)그래서 결국 말하려는 건 이겁니다. 커피는 어디까지나 농산물이라는 거죠. 변덕스러운 자연에 따라 수확량이 급변하는 농산물이요. 그렇기에 때론 흉작으로 가격이 단기간 급등하는 일은 주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요즘 배춧값, 딸기값처럼 말이죠.농산물 가격이 널뛰는 이유커피도 농산물이다. 이런 당연한 말을 왜 하느냐고요? 그걸 간과하면 자칫 엉뚱한 데 분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975년 7월 브라질엔 역사상 최악의 검은 서리가 닥쳤습니다. 순식간에 브라질 커피농장의 절반 이상이 폐허가 되고, 10억 그루의 나무가 죽어버렸죠. 그 여파로 커피 가격이 이후 47년 동안 깨지지 않을 최고가(3.39달러)까지 치솟았던 1977년 초.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였던 윌리엄 세이파이어는 이런 제목의 칼럼을 썼습니다. ‘브라질의 커피 사기’. “날씨는 변명일 뿐”이고 브라질 정권이 시장 조작으로 “커피에 중독된 멍청한 미국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며, 미국인은 커피를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보면 커피가 농산물이란 기본 사실을 무시한 다소 황당한 주장인데요. 이게 당시 미국 소비자들의 정서였던 겁니다. 과연 2025년의 소비자는 그때와 다를 수 있을까요.커피는 농산물이기 때문에 다른 작물과 마찬가지로 가격에 따른 쏠림현상이 심합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해에 양팟값이 뛰면, 이듬해엔 농부들이 양파를 왕창 심는 바람에 어김없이 값이 급락하곤 하잖아요. 커피 농사도 이와 똑같은 일이 되풀이됩니다.어떤 이유에서든 커피 생두 가격이 뛰면, 전 세계적으로 커피 재배가 늘어나죠. 커피는 양파·마늘과는 달리 심어서 수확까지 시간이 꽤 걸리다 보니, 실제 수확량이 확 늘어나는 건 몇 년 뒤입니다. 그럼 그때 가선 커피 시장이 심각한 공급 과잉에 시달리게 되죠.그래프를 다시 보자면 커피 가격이 파운드당 1달러 아래로 떨어진 깊은 골짜기가 주기적으로 등장하는데요. 그게 바로 커피 시장 공급 과잉이 절정이었던 구간입니다. 여러분은 모른 채 지나갔겠지만, 2019년도 그랬죠. 당시 인건비도 못 건질 정도로 가격이 폭락하면서 일부 중남미 국가에선 커피 대신 코카 잎(코카인 원료)을 키우는 농장이 늘어나 골치였을 정도였습니다.달리 말하자면, 공급 과잉이 너무 심해서 ‘커피 농사 때려치운다’는 아우성이 나올 때쯤이면, 희한하게도 자연재해(서리·가뭄 등)가 닥쳐오곤 했죠. 그래서 공급과잉이 한 방에 해소되고 커피값이 다시 치솟으면 그땐 또 너도나도 뛰어들고요. 전형적인 농산물 시장의 구조입니다.변동성 키우는 선물시장커피값을 끌어올린 악당이 뚜렷하지 않고, 자연의 심술 탓이 크다니. 좀 허무한 이야기인가요. 여기서 지적할 게 있습니다. 작황에 따라 커피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야 당연한데요. 그 움직임을 더 뾰족뾰족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습니다. 글로벌 커피 거래 가격을 결정하는 기준이 바로 선물시장 가격이란 점입니다. 뉴욕상품거래소(ICE)의 커피C선물지수(이른바 C-가격)이 그것이죠.선물은 ‘미래의 특정 시점 정해진 가격으로 상품을 사겠다’라고 미리 계약을 맺는 걸 뜻하죠. 선물시장은 현물시장과는 별개의 금융시장이기 때문에 가격 결정 메커니즘도 다릅니다. 일단 농부들의 생산비용과는 전혀 상관없고요. 때론 커피 현물에 대한 수요·공급과도 달리 움직입니다. 지정학적 이슈나 공급망 문제가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 수요가 어느 쪽에 베팅하느냐에 따라 추세가 증폭되곤 하죠. 글로벌 커피 가격이 추락할 땐 아주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오를 땐 또 무섭게 치솟는 게 바로 이런 선물시장의 속성 때문입니다. 투기세력이 가세하면서 시장의 쏠림을 키우는 거죠.이렇게 결정된 선물 가격은 사실상 거의 모든 커피 농장의 현지 판매 가격을 결정합니다. 그렇다 보니 선물가격이 바닥을 칠 땐 대다수 소규모 농장은 인건비도 못 건지는 헐값을 받게 되죠. 그러다 보니 커피 생두 가격이 내내 낮았던 2000년대엔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한다는 ‘공정무역 커피’가 세계적으로 큰 이슈였습니다.그리고 커피 가격이 뛰는 지금은 그와 반대 상황이 펼쳐집니다. 투기 세력이 가세하며 가격 상승 추세를 더 가파르게 만들고 있죠. 어찌 보면 과거에 너무 낮게, 1달러 안팎까지 값이 떨어졌던 것의 반작용인 셈입니다. 지금 커피값이 비싼 게 아니라 이전 가격이 너무 쌌던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강한 잡종이 대안?그럼 커피 값이 주기적으로 널뛰는 건 하늘의 뜻이다 생각하고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냐고요? 그렇진 않죠. 주기적으로 닥쳐오는 악천후, 점점 높아지는 지구 온도에 대비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가장 농업적인 해결책은 결국 육종 기술에 있죠.전 세계 커피 생산의 60%를 차지하는 아라비카 커피는 고급스러운 풍미로 인기를 끌지만 감염병(특히 커피 녹병)과 높은 기온에 약합니다. 선선한 고지대(600~2000m)에서 재배해야 하니 키우는 것도 더 번거롭고, 서리 피해를 입을 우려도 크죠. 무엇보다 지구 온난화로 재배면적이 갈수록 줄어들고요.그래서 과학자들은 다양한 ‘잡종 커피’를 연구 중입니다. 질병과 기후변화에 강하면서도 생산성은 높고 풍미까지 훌륭한, 그런 신품종을 찾아내려는 겁니다. 비영리기관 월드커피리서치(WCR)는 5년째 아라비카의 서로 다른 품종을 교배한 잡종 커피를 연구 중이고요. 또 다른 과학자들은 아라비카보다 훨씬 나무가 강하지만 평판이 그닥 좋지 않아서(단맛이 강함) 오래전 잊혀졌던 리베리카 품종 커피를 되살려 개량하는 데 집중합니다.물론 품종 개량이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10년, 20년 뒤에도 우리가 커피를 지금처럼 여유롭게 즐길 수 있으려면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매일 마시던 커피 한잔이 조금은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By.딥다이브연간 1인당 커피 소비량 405잔.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세계적이죠.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신조어부터, 최근 ‘커피 선결제’란 트렌드까지. 커피에 꽤나 진심인데요. 더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 생활에 밀접한 커피 생산 시장을 들여다봤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국제 커피 생두 가격이 파운드당 3달러대에 진입했습니다. 지난달엔 최고점(3.49달러)을 새로 썼죠. 2021년과 2024년 연이어 닥친 서리피해로 최대 생산국 브라질 작황이 타격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길게 보면 커피 가격은 악천후로 인해 주기적으로 급등하곤 했습니다. 특별한 ‘악당’이 없어도 자연재해 탓에 가격이 널뛰기도 하는 게 본래 농산물 시장의 특징이니까요. 지금의 높은 가격은 다시 더 많은 커피 재배 붐으로 이어져, 수년 뒤엔 공급과잉 상태로 되돌려 놓을 겁니다. 늘 그랬듯이 말이죠.-커피 가격이 선물시장에서 결정되는 구조는 커피가격 그래프를 더 뾰족뾰족하게 만듭니다. 가격의 상승 또는 하락 추세가 더 증폭되죠. 지금 커피 가격이 너무 심하게 뛰는 건 과거엔 지나치게 떨어졌었단 뜻이기도 합니다.-세계인이 사랑하는 커피, 그 중에서도 아라비카 품종은 너무 예민하고 약합니다. 더 강건하면서도 품질이 좋은 그런 품종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과학자들의 연구에 기대를 걸어봅니다.*이 기사는 1월 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2300만대. 2024년 중국에서 팔린 승용차 대수이죠. 중국 경제가 부진에 빠진 가운데도, 승용차 판매량은 6%나 성장했습니다. 중국은 전 세계 자동차 판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장 큰 시장이죠.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차가 잘 팔리는데도 왜 망하는 중국 자동차 제조사는 늘어가고, 해외 브랜드가 줄줄이 철수할까요. 폭스바겐의 대규모 구조조정, 일본 혼다와 닛산의 합병 추진 역시 중국 시장에서의 부진 탓이 크다는데요.가장 큰 이유는 만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중국 자동차 시장의 무자비한 ‘가격경쟁’에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격경쟁이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 수 있단 경고까지 나오는데요. 중국 자동차 시장의 승자 없는 가격전쟁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인하, 또 인하…. 만 3년째 ‘가격전쟁’혼다 시빅 판매가가 10만 위안(약 2000만원), 폭스바겐 파사트는 13만 위안(2500만원). 지난해 말 중국 자동차 시장에선 ‘대 바겐세일’이 펼쳐졌습니다. 기간 한정 가격 인하, 신차 구매 보조금, 포인트 지급, 계약금 무이자 혜택 등등. 거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가 각종 명목의 차값 할인을 내걸었죠. 지난해 1~11월 가격 할인을 내 건 승용차만 224개 모델에 달한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입니다. 특히 인기 차종인 테슬라 모델Y는 사상 최저가격인 23만9900위안(약 4800만원)에 팔렸습니다.이런 바겐세일, 해가 바뀌어도 계속됩니다. 이미 중국 전기차 제조사 BYD는 다가오는 설(춘절) 연휴를 겨냥해 주요 차종 가격을 한시적으로 최대 12% 인하한다고 치고 나왔죠. 선두권 업체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니, 다른 경쟁사도 이를 따르게 될 겁니다. 이미 니오, 샤오펑, 립모터 등. 주요 전기차 제조사 경영진이 2025년 판매량(또는 매출)을 지난해의 두 배로 늘리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죠.놀라운 건 이런 가격전쟁이 벌써 만 3년째 이어지고 있단 점입니다. 시작은 2022년 10월 테슬라의 모델3와 모델Y 공식 판매가 인하(최대 9%)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눈치 보며 뭉그적거렸던 다른 브랜드는 이후 석 달 만에 테슬라가 추가 가격 인하에 나서자 깜짝 놀라 가격경쟁에 가세했죠. 특히 중국 최대 전기차업체 BYD는 “전기가 석유보다 싸다”는 구호를 내걸고 가장 맹렬하게 뛰어들었습니다. 거의 모든 모델 가격을 5~20% 낮췄는데요. 특히 소형 전기차 친(Qin) 하이브리드 신형 가격을 기존보다 2만 위안 낮은 7만9800위안(1600만원)으로 책정해 업계를 놀라게 했죠.결국 2024년엔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부터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까지, 대부분이 가격전쟁을 펼쳐야 했습니다. 가혹한 난투극, 잔인한 탈락전이 시작됐습니다. 중국 전기차 업체 샤오펑의 창업자인 허샤오펑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 자동차 시장은 “피의 바다”를 헤쳐가는 “녹아웃 라운드에 진입”했죠.제 살 깎아 먹기 경쟁에 파산·철수적정 수준의 가격 인하는 판매량을 늘려 기업 이익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죠. 하지만 중국 자동차 시장의 가격전쟁은 그런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지난해 1~10월 중국 자동차산업 전체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2% 증가했지만, 이익은 3.2% 되레 감소했습니다. 과거 6~7%였던 매출액 대비 이익률은 4.5%로 쪼그라들었죠. 제 살 깎아먹기식 가격경쟁 탓입니다.중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 브랜드는 무려 200개 이상(이 중 전기차 브랜드 137개). 치열한 생존 경쟁이 이어지면서 탈락자가 속출합니다. 혼다의 프리미엄 브랜드 ‘어큐라’와 일본 미쓰비시는 2023년 이미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고요. 가오허자동차(高合汽车), 허추앙자동차(合创汽车), 티엔지자동차(天际汽车) 같은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이 지난해 문을 닫았습니다. 지리자동차와 바이두의 합작사로 주목받았던 지위에자동차(极越)도 12월 갑자기 사업 축소를 발표했고요. 사실 그 많은 중국 전기차 제조사 중 연간 흑자를 내는 기업은 BYD와 리오토 정도이죠. 이제 ‘다음에 망할 전기차 스타트업은 어디일까’ 명단이 돌고 있습니다.살아남았지만 적잖은 타격을 입은 제조사도 많습니다. 현대차는 지난해 1월 베이징현대 충칭공장을 20% 할인된 가격에 매각했고요. 혼다와 닛산은 중국에서 일부 공장 폐쇄와 대규모 해고를 진행했죠.제품에 자신 있으면 가격경쟁 따윈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독일 고급차 브랜드 BMW도 그렇게 생각한 적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7월 가격할인을 멈추고 정가로 되돌렸죠. 그러자? 8월 판매량이 곧바로 반토막 났습니다. 불과 한 달 만에 BMW는 다시 가격 할인 전쟁터로 돌아와야 했죠. 누구도 이 가격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습니다.승자 없는 싸움난립하던 완성차 브랜드가 경쟁 끝에 도태되고 일부만 살아남는 건 사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때 전 세계에 700개 넘는 브랜드가 난립했던 스마트폰 시장도 그런 과정을 거쳤으니까요. 컨설팅업체 알릭스파트너스에 따르면 중국 전기차 브랜드 137개 중 10년 안에 이익을 낼 만한 곳은 19개뿐. 나머지는 사라지거나 통합될 운명입니다.그런데 문제는 이 무지막지한 가격경쟁의 여파가 완성차 제조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난해 11월 BYD 임원이 협력업체에 보낸 e-메일 내용이 공개돼 화제였죠. 자동차 시장이 ‘녹아웃 매치’이자 ‘결정적 전투’로 접어들었다면서 2025년 부품 가격의 10% 인하를 요구한 겁니다. 이어 중국 국유 자동차 제조사 상하이자동차(SAIC) 역시 협력사에 10% 부품가 인하를 요청했단 보도가 이어졌는데요.물론 완성차업체가 협력업체를 쥐어짜는 거야 연례행사이긴 합니다. 다만 과거엔 해마다 3~5% 정도 깎았다면 이젠 인하 폭이 더 커진 데다, 연간 2~3회 가격 인하 요구도 비일비재하다고 하죠. 하지만 이미 보쉬·ZF·발레오·브로제 같은 자동차 부품 대기업들까지 지난해 중국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에 나섰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협상력이 약한 중소 공급업체는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고요. 한 부품업체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확실히 프로젝트에서 돈을 잃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잃지 않고는 프로젝트를 따낼 수 없으므로 악순환입니다.”만약 부품가격 인하 폭이 생산효율성을 높여서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면 어떻게 할까요. 결국 남은 방법은 재료 등급을 낮추는 겁니다. 납품가 인하 요구를 받은 1차 협력업체가 2차 협력업체의 납품가를 깎고, 2차 협력업체가 다시 3차 협력업체에 이를 전가하면, 결국 3차 협력업체는 더 싼 원자재를 찾을 수밖에 없죠. 이는 완성차의 품질 하락으로 결국 이어질 겁니다. 차값이 떨어지는 만큼 소비자는 보이지 않는 비용을 지불하는 셈이죠.이렇게 차값이 계속 떨어지면 소비자엔 이익일까요. 생각보다 중국 소비자들은 자동차 가격전쟁에 시큰둥합니다. 매켄지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소비자 중 80% 이상은 가격인하가 자동차 구매 결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괜히 차를 서둘러 샀다가 가격이 더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굳이 지금 살 이유가 없는 거죠. 최신 차량에 장착되는 옵션 패키지를 사고 싶은 생각도 줄어듭니다. 기다리면 고가의 운전보조 기능도 공짜로 장착될 가능성이 크니까요. 무엇보다 차를 샀는데 제조사가 파산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입니다. 자동차 업체가 망하면 그 브랜드 차량 소유자는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까요.완성차 업체, 부품 공급업체, 자동차 소비자. 현재까진 셋 중 누구도 승자가 아닌 이상한 전쟁이 이어지는 중입니다.정부가 “전면 시정” 외쳤지만이 가격전쟁, 이대로 둬도 될까요. 보다 못한 중국 정부가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12월 열린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이런 문구가 나왔죠. “‘퇴화적(内卷) 경쟁’을 전면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시장의 과도한 가격경쟁을 바로잡기 위한 정부 차원의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극단적인 가격경쟁이 기술 혁신과 산업 발전을 되레 저해한다고 보기 때문인데요.물론 정부는 어느 산업이 타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게 자동차 산업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죠. 중국 지리자동차의 리슈푸 회장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 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악하고 퇴화적인 경쟁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가격전쟁 대신 기술혁신, 품질, 브랜딩, 서비스, 기업 윤리에 집중해야 합니다.”하지만 중국 자동차 업계의 가격경쟁 ‘휴전’ 약속은 이전에도 있었다가 쉽게 깨지곤 했죠. 이번엔 과연 무슨 수로 이를 막을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입니다.다만 중국 업체 간 극단적인 가격전쟁이 괴멸적인 결과로 이어진 ‘퇴화적 경쟁’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산업이 오토바이인데요.예나 지금이나 동남아시아는 오토바이 천국이고, 그 시장을 지배하는 건 일본 브랜드이죠. 그런데 잠깐 중국산 오토바이가 이 시장에서 일본 브랜드를 제친 적이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이었죠.당시 혼다, 야마하 같은 일본 브랜드 오토바이는 동남아에서 약 2000달러에 팔렸는데요. 그 절반 가격인 중국산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베트남의 경우 1999년 기준으로 진출한 중국 브랜드만 20개 이상. 압도적인 가성비 덕분에 중국 브랜드는 일본산을 밀어내고 금세 베트남 오토바이 시장의 80%를 차지합니다.그리고도 가격전쟁은 계속됩니다. 중국 업체끼리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 거죠. 100cc짜리 오토바이 가격이 1000달러에서 800달러로, 그리고 다시 500달러까지 떨어집니다. 가격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베트남 오토바이 평균 판매가가 매달 70달러씩 하락했단 기록이 있을 정도이죠.그리고 가격과 함께 당연히 품질도 떨어졌습니다. 싸구려 중국산 오토바이는 잔고장이 잦은 데다 2~3년만 지나도 대수리가 필요했고, 4~5년이 되면 폐차할 지경이 됐습니다. 일부 브랜드가 애프터서비스를 등한시하면서 중국산에 대한 이미지는 급속히 나빠졌죠. 결론은 중국 브랜드 모두의 패배. 그 사이 중저가 신형 모델+대출 상품을 내놓은 일본 브랜드가 품질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다시 시장을 휩씁니다. 이제 동남아 시장 점유율은 혼다 67%, 야마하 22%. 중국산은 1%에 그칩니다. 품질마저 희생하는 극단적인 가격경쟁의 처참한 결말입니다. 중국 자동차 업계가 20여 년 전 오토바이 시장의 교훈을 최근 다시 곱씹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By.딥다이브자동차 산업이 원래 이리도 다이내믹한 것인가요. 중국 시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가 없기 때문에 더욱 중국 상황을 예의주시해야겠습니다. 마침 2일(현지시간) 테슬라의 연간 인도량이 13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는 뉴스가 눈길을 끕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중국 자동차 업계의 ‘가격전쟁’이 점점 더 심화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엔 테슬라 모델Y가 또다시 가격을 할인하고, 혼다 시빅이 10만 위안 이하로 팔려서 업계를 놀라게 했죠. 새해 들어서도 BYD가 할인 공세를 이어갑니다.-자동차 업계의 수익률이 악화하고, 적자가 불어난 전기차 스타트업 파산이 이어지고, 해외 브랜드 합작사가 철수하고 있습니다. 잔혹한 탈락전인데요. 제아무리 고급 브랜드라고 해도 가격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그 여파는 자동차 공급업체로 이어집니다. 완성차 업체의 납품가 인하 요구에 시달리면서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죠. 이는 결국 제품 품질 하락으로 이어질 게 뻔하다는 점에서 산업 전체엔 마이너스입니다. 그 비용은 결국 소비자에 돌아가는 셈이죠.-보다 못한 중국 정부가 “퇴화적 경쟁을 전면 시정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혼란을 무슨 수로 정리할까요. 20여 년 전 동남아 오토바이 시장의 교훈이 되살아납니다. *이 기사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2024년에 값이 가장 많이 뛴 원자재, 가장 많이 오른 증시는 무엇일까요. 새해에도 과연 고공행진을 할까요? 올해 가라앉았던 산업, 반대로 올해 드디어 빛을 본 산업의 앞날은 어떨까요.결산과 전망의 시기인 연말을 맞아 준비했습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보낸 88개 레터 주제 중 4가지를 골라 현재 상황과 전망을 업데이트해 전합니다. 딥다이브에서 소개한 뒤 더 큰 화제가 된 주제들입니다.*이 기사는 3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코코아 가격: 라니냐가 온다서아프리카발 코코아 공급 쇼크. 지난 2월 23일 레터에서 소개했죠(). 당시 코코아 선물 가격이 t당 6000달러를 넘어서며 심지어 ‘1만 달러가 될 수 있다’는 극단적 전망까지 있다고 전해드렸는데요.이럴 수가. 극단적 전망이 아니었습니다. 코코아 가격은 올해 4월 1만 달러를 뚫었고요. 이후 주춤하다 12월 18일 t당 1만2600달러까지 넘어서면서 업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물론 이후 다시 내려왔지만, 여전히 9868달러나 됩니다. 올해 상승률 132%. 모든 원자재 중 가장 많이 값이 뛰었을 뿐 아니라, 비트코인(142%) 상승률과도 맞먹죠.이런 가격 급등, 흔히 이상기후 탓이라고 얘기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구조적 문제 탓이 크죠. 가나·코트디부아르 농부들이 너무 가난해서 병충해에 대비할 여력이 없기 때문인데요. 안타깝게도 코코아값이 이렇게나 뛰었는데도 상황이 나아진 건 거의 없습니다. 소피 반 웰렌 영국 맨체스터대 연구원이 소개한 차트를 한번 보실까요.글로벌 코코아 가격은 2023년 여름부터 수직 상승했지만, 가나(빨간색 선)·코트디부아르(노란 선) 농장 가격과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선물 계약 방식(수확 9~12개월 전에 미리 판매) 탓에 가격 상승의 수혜를 거의 보지 못한 거죠. 가난한 아프리카 정부로선 선물 계약을 맺어야 그걸 담보로 해외 자금을 빌려서 코코아콩·비료를 살 수 있으니, 그동안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요. 뒤늦게 이런 구조를 고치겠다고 선언했지만, 잘 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자, 그럼 코코아 가격은 앞으로 어디로 갈까요. 지난 2년 동안 서아프리카 코코아 공급 쇼크를 유발했던 따뜻한 해류, 즉 엘니뇨는 이제 끝났습니다. 지금은 적도 지역 해수면을 냉각시키는 라니냐가 찾아왔죠. 기후만 보면 코코아 수확량은 다시 늘어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세계은행은 코코아 공급 상황 개선으로 코코아 가격이 2025년 약 13% 하락할 걸로 내다봅니다.하지만 이미 썩어버린 코코아나무를 베어내고, 다시 심어 키워서 열매를 맺게 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리죠. 완전한 정상화까진 쉽지 않습니다. 세계 최대 초콜릿 제조사 배리 칼레보의 CEO 피터 펠드는 아프리카 기상 조건이 1년 전보다 확실히 좋아졌지만, 여전히 2년 전 수준으로는 돌아가지 못했다고 말하죠. 코코아 가격도 과거의 낮은 수준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고 봤고요.ING의 상품전략책임자 워런 패터슨 의견도 같습니다. “서아프리카 생산량이 약간 상승하겠지만 가격은 내년에도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는데요. 참고로 코코아 가격은 2023년 초까지만 해도 10년 넘게 t당 2500달러 이하에 머물렀습니다. 그런 값싼 초콜릿 시대가 다시 돌아올 거란 전망은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플라스틱 공급과잉: 갈수록 태산글로벌 플라스틱 시장의 공급과잉이 위험 수준이란 이야기, 지난 4월 전해드렸습니다(). 당시의 시장 분위기(‘중국 경기 살아나면 한국 석유화학 산업도 희망이 있다’는 일말의 기대)에 비해 훨씬 암울한 전망을 담았는데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과잉 공급이 석유화학 업계의 ‘뉴노멀’이 됐다고 봤기 때문이었죠.그리고 석유화학 산업 위기는 현실로 닥쳐왔습니다. 올해 기업 실적은 곤두박질쳤고요. 결국 지난 23일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내놨죠. 공장 매각과 M&A 같은 사업 재편을 유도하겠단 건데요. 정부가 나서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단 뜻입니다.문제는 지금의 글로벌 공급과잉이 해소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새해가 진짜 고비라는 전망이 나오죠. 컨설팅업체 C-MACC는 “2025년 새로운 건설로 이미 공급이 과잉된 시장에 용량이 추가된다”며 “향후 1~2년은 글로벌 화학산업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대규모 수입 싱크홀” 역할을 해줬던 중국이 빠른 속도로 석유화학 생산을 늘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석유화학 공장) 가동률이 더 높아진다면 중국이 순수출국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옵니다. 생산비용이 높은 국가, 즉 유럽과 한국·일본·대만의 석유화학 생산업체가 가장 위험하죠.물론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위기에 처한 산업이 석유화학만은 아닙니다. 예컨대 철강산업에서도 비슷한 일은 벌어지는데요().여기서 중요한 건 적자에 빠진 중국의 철강산업과 달리 중국 화학산업은 여전히 돈을 벌고 있단 점입니다. 대부분 기업의 현금흐름이 플러스이죠. 즉, 중국 정부 입장에선 화학산업은 구조조정이 그리 시급한 상황이 아닙니다. 따라서 당분간 중국에선 더 많은 생산 용량이 추가될 거고, 공급과잉은 더 심화할 겁니다. 우울하지만 냉정한 현실입니다.아르헨티나 경제: 진짜 회복하나올해 주가지수가 가장 많이 오른 나라, 어디인지 아시나요? 네, 아르헨티나입니다. 올해 들어 주가가 177% 올랐죠. 이미 지난 10월 8일에 아르헨티나 증시가 85%나 뛰어 더할 나위 없다고 전해드렸는데요(). 그 뒤로도 40% 넘게 올랐습니다.이게 다 ‘전기톱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의 파격적인 긴축 정책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데요. ‘적자 제로’를 외치며 공무원도, 각종 보조금도 죄다 싹둑 잘라버리던 그 정책,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요. 몇 달 지나지 않았지만, 그동안 전해진 소식은 놀랍습니다. 2023년 무려 연간 211%에 달했던 물가상승률이 2024년엔 119%로 떨어질 전망이고요. 상반기 53%까지 치솟으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빈곤율(중위 소득의 50% 이하 비율) 역시 3분기엔 38.9%로 낮아졌죠. 절대 수치는 여전히 높지만, 하락세가 상당히 극적입니다.이를 두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물가를 낮추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경제정책에 힘입어 빈곤율과 노숙자 발생률이 감소했다”고 홍보합니다. 아동수당 같은 사회적 지원을 늘린 것도 빈곤 감소엔 효과적이었고요.하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덜 쓰고 덜 먹는 긴축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진짜 경제가 살아나려면 투자를 유치하고 기업활동이 늘어나고 근로소득이 증가하는 게 중요하죠. 자유주의자 밀레이 대통령은 규제 철폐와 기업 유치에도 적극적입니다. 30년 세금 면제를 골자로 하는 ‘대규모 투자 인센티브 제도(RIGI)’를 만들어 외국기업 유치에 시동을 걸고 있는데요.밀레이 대통령은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승리 뒤 첫 번째로 만난 외국 정상이기도 했죠. 이 만남 덕분에 그의 국제적 명성이 한층 높아졌는데요. 분위기가 닮은 두 정상의 친분이 과연 밀레이의 기대대로 두 나라의 자유무역 협정 체결로까지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습니다.얼마 전 WSJ과의 인터뷰에서 밀레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를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로 만들기 위한 개혁을 계속해 나갈 거라고 말합니다. 경제 개선으로 2025년 10월 선거에서 여당의 지지율이 높아질 거고, 그럼 그의 과감한 개혁은 더 탄력을 받을 거란 거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나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로보택시: 미래가 가까워졌다한동안 멀어진 듯했던 로보택시(Robotaxi)의 꿈이 되살아난다는 소식, 지난 7월에 전해드렸죠(). 많은 좌절과 사업 철수에도 불구하고 미국 웨이모, 중국 바이두로 대표되는 선두 주자들이 치고 나오며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지던 시점이었는데요.이후 엇갈린 소식이 나왔습니다. 이달 초 미국 GM은 크루즈의 로보택시 사업 중단을 발표했죠. 크루즈에 무려 8년 동안 100억 달러를 투자했던 GM의 철수 소식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요. 크루즈 설립자인 카일 보그트의 격한 반응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전엔 불분명했다면 지금은 분명하다: GM은 멍청한 놈들이다.”GM의 철수 타이밍이 특히 놀라웠던 건 마침 구글 웨이모 로보택시가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웨이모 로보택시는 올해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일반인 누구나 탑승할 수 있게 됐는데요. 이후 이용자 수가 석달 만에 두배 넘게 급증했습니다. 로보택시가 복잡한 도시에서도 잘 작동한다는 걸 입증한 셈이죠.웨이모는 현재 LA와 오스틴, 피닉스로 상업용 서비스를 확장했고요.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2025년까지 미국 10개 도시에 진출할 거란 계획도 밝혔습니다. 또 중국 지커 전기차, 그리고 현대차 아이오닉5를 이용한 새 자율주행차도 선보입니다. 오랫동안 ‘시범운영’ 수준에 머물렀던 완전 자율주행 로보택시 서비스가 올해를 기점으로 정말 일상이 되기 시작한 겁니다.이는 로보택시 비관론자들의 마음마저 돌리고 있습니다. 유명 IT 칼럼니스트인 아짐 아자르는 최근 기고문에서 “자율주행차가 오려면 멀었다던 과거 분석을 반성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율주행차는 ‘쓸데없는 방해물’이 아니라 거의 전성기를 맞을 준비가 됐습니다. 로보택시가 이 혁명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채택과 진화를 가리키는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게 근거입니다. 로보택시는 기술 거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이 시장에서 웨이모만 외롭게 달리는 건 아닙니다. 테슬라는 지난 10월 페달과 스티어링 휠이 없는 ‘사이버캡’을 공개하고 로보택시를 선보이겠다고 다시 한번 약속했죠. 또 아마존이 인수한 죽스(Zoox)는 2025년 자율주행 셔틀 서비스를 일반 대중에 개방한다는 계획이고요. 무엇보다 중국 우한에선 바이두의 로보택시 ‘아폴로고’가 10㎞당 최저 3.9위안(약 785원)의 요금이란 놀라운 경제성으로 이미 인기를 끌고 있죠.최근 만난 국내 자동차 업계 기업인은 이를 두고 “단기 실적과 주가에 연연하는 기업(GM)과 장기적으로 보고 투자하는 기업(테슬라 등)의 차이”라고 설명하더군요. 물론 로보택시 시대가 제대로 열리기까지는 규제를 포함해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긴 합니다. 하지만 2024년의 엇갈린 선택이 분명한 차이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By.딥다이브애초엔 연말 결산에 담을 만한 주제 후보가 10개도 넘었는데요. 늘 그렇듯이 쓰다보면 한없이 길어질 게 뻔해서 4개만 소개했습니다. 아깝게 탈락한(?) 주제를 추가로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늘면서 전력 공급이 세계적으로 큰 이슈이죠. 이 추세는 더 가속화할 겁니다. 에너지 컨설팅 기업 리스타드에너지는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이 10년 안에 두배로 증가할 거라 전망합니다. 이 전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수요도 계속될 거라고 하고요. ‘: 파운드리 부활을 노렸던 인텔이 좀처럼 반도체 제조 기술 향상에 속도를 내지 못하며 어려움에 빠졌죠. 올해 주가는 57% 추락했고, 결국 팻 겔싱어 CEO가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주주들이 팻 겔싱어가 파운드리 사업과 관련해 거짓말을 했다며 그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죠. 참 되는 일이 없어 보입니다. 이젠 현재 20달러인 주가가 10달러까지 추락할 거란 비관적 전망마저 나옵니다. *이 기사는 3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지구 평면설, 한국전쟁 북침설, 달 착륙 조작설, 기후 위기 허구론…. 세상엔 참 많은 음모론이 있다. 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세월호 참사 같은 충격적 사건엔 어김없이 음모론이 뒤따랐다. 음모론(conspiracy theory)이란 용어가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음모론자를 낙인찍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만들어낸 것이란 음모론까지 있을 정도다. 이토록 음모론의 생명력이 강한 건 본래 인간이 음모론에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확증편향). 대의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사실 왜곡엔 눈감고 넘어가기도 한다(동기화된 추론). 이런 인지적 한계 때문에 똑똑하고 이성적이던 사람조차 음모론에 휩쓸릴 수 있다. 음모론을 단순히 망상 같은 정신병적 증상으로 취급하며 조롱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음모론에 취약한 성격이 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유독 음모론에 더 잘 빠지는 성격이 있다. 미국 심리학자 리처드 맥널리는 ‘외계인에 의해 납치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연구했다. 수면마비(가위눌림) 현상을 외계인 납치로 굳게 믿는 음모론자인데, 정신감정을 하면 정상으로 나온다. 대신 심리 평가 결과 이들은 비전통적인 인과관계를 강하게 믿고 환상적인 것에 끌린다는 공통점이 나타났다. 점괘나 부적, 저주와 예언이 실제 힘이 있다는 믿음은 음모론과 맞닿아 있다. 유럽 연구팀의 실험 결과도 비슷하다. 동전 던지기처럼 무작위적인 결과에서도 굳이 패턴을 찾아내는 사람일수록 음모론을 더 쉽게 믿었다. 있지도 않은 패턴을 발견하는 사람, 즉 미신 신봉자는 음모론에 취약하다. 댄 애리얼리 미국 듀크대 교수에 따르면 지적 겸손 수준과 나르시시즘은 음모론과 관련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지적 겸손이 부족하면 음모론적 사고에 끌리기 쉽다. 특히 자신이 대단한 존재로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스트는 위험하다. 상황이 뭔가 잘못됐을 때, 분명히 자기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며 비난 대상을 찾느라 음모론 수렁에 빠지기 때문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국가 지도자가 음모론에 휩쓸리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줬다. 다시 이런 혼란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음모론자의 성격적 특징을 제대로 알아둬야겠다. 앞으로 리더를 뽑을 땐 꼭 검증하자. 미신에 현혹되진 않는지, ‘나만 옳다’는 독불장군은 아닌지, 나르시시즘이 지나치진 않은지.가까운 사람이 음모론에 빠졌다면 정치 지도자라면 음모론자와 거리가 먼 인물로 잘 골라 뽑는 방법으로 걱정을 좀 덜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음모론자인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거리 두며 모른 척하고 싶기도 하다. 말해 봤자 듣지도 않을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데 무서운 건 사회적 고립감이 이들을 음모론에 아주 깊이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는 점이다. 주변에선 따돌리고 배척할 때, 음모론 집단은 자기 말에 귀 기울이고 지지를 보내준다. 소속감과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주장은 한층 과격해진다. 진실이냐 아니냐보다는 그 집단 소속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된다. 끈끈한 유대감은 이를 끊고 나오기 어렵게 만든다. 사이비 종교 집단과 유사하다. 결국 무시와 배척으로는 음모론을 잠재울 수 없다. 오히려 필요한 건 관심과 경청이다. 너무 깊숙이 빠지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고, 음모론에 빠지게 된 진짜 이유에 귀 기울여 주자. 내면의 결핍과 불안, 스트레스를 일깨워 준다면 생각은 조금씩이나마 바뀔 수 있다. 어렵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

시대 변화에 뒤처진 대기업은 어떤 식으로 쇄신을 이룰 수 있을까요. 혁신을 사그라들게 만드는 ‘대기업병’은 치유 가능할까요.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기업이 있죠. 얼마 전 삼성전자가 연구 중이란 보도가 나오기도 했던 일본 대기업 히타치제작소(이하 히타치)입니다.15년 전 파산 위기에 몰렸던 히타치는 그야말로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며 새롭게 태어났죠. 특히 주목할 건 지난 15년 동안 사장이 4번 바뀌는 가운데도 구조개혁을 멈추지 않고 일관되게 실행했단 점입니다. 주인 없는 기업(소유분산 기업)은 CEO 리스크가 크다는 편견을 완전히 깨는데요. 대기업 위기 극복의 모범사례, 히타치의 혁신을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2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전자회사? 디지털 기업!올해 들어 주가 상승률 90%. 히타치는 이제 일본 시가총액 4위(약 166조원)로, 소니(3위)와 거의 맞먹습니다. “히타치는 문제 있는 하드웨어 제조사였지만 지금은 성장주로 변모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주식”이라는 일본 펀드매니저의 평가가 나오는데요.왜 지금 히타치인가를 얘기하기 전에 과거를 간단히 볼까요. 히타치란 브랜드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한때 TV와 에어컨이 꽤 잘 팔렸고요. 외장하드의 강자였죠. 그렇다고 순수 전자회사는 아니었습니다. 굴삭기 같은 건설기계도 비중이 컸고요. 그룹의 모태는 금속 산업입니다. 또 반도체 제조(메모리와 시스템LSI), 전동공구, 화력발전 시스템, 조선업, 물류와 금융(캐피탈)업까지 했습니다. 소비재 빼고는 웬만한 건 다 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문어발식 대기업이었죠.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모든 사업을 이제 다 안 합니다. 그럼 지금은 뭘 주로 하느냐. 크게 세 가지입니다.1. 디지털 시스템과 서비스=아날로그 산업현장에 IT와 AI를 이용한 실시간 데이터 분석을 도입하는 사업입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 공장’이 그중 하나인데요. 어떻게 스마트 공장을 구축하느냐. 사람 작업자가 손으로 조립하는 공장이라면 전자태그 수만 장과 카메라 수백 대를 달아서 현장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이를 통해 지금 어느 작업구간에서 병목현상이 벌어지는지, 뭐가 문제인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죠.공장 작업자를 위한 교육 시스템도 제공합니다. 작업 모습을 찍은 영상을 가지고 작업자 몸의 방향, 손의 움직임 등을 AI로 분석하는 거죠. 그렇게 쌓인 정보를 가지고 신입사원들에게 ‘숙련공은 이렇게 일한다’라는 걸 가르쳐줍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술을 전수하는 데 드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죠. 이런 디지털 분야는 히타치가 가장 역점을 두는 영역입니다. 2021년엔 미국 IT기업 글로벌로직스를 96억 달러에 인수한 것도 이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죠. 이는 일본 전자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 M&A였습니다. FT는 히타치가 “IT와 데이터 과학을 적용해 유틸리티, 제조업체에 경영 컨설턴트와 같은 존재가 됐다”고 평가합니다. 이제 히타치는 “일본에서 가장 큰 AI 사업을 하는 기업”(애널리스트 펠럼 스미더스)으로 통하죠.2. 그린 에너지&모빌리티=또 다른 축은 전력과 철도입니다. 전력과 철도는 달라 보이지만 둘 다 하드웨어 못지않게 제어·운용 기술이 중요하다는 공통점이 있죠. 히타치가 강한 분야입니다. 2020년 히타치는 스위스 기업 ABB의 송배전 사업을 인수하며(68억 달러) 전력 분야의 글로벌 강자로 올라섰고요. 마침 올해 AI 수혜주로 전력주가 급부상하면서 이 분야가 주가 상승의 큰 축이 됐죠. 철도 사업에서 히타치는 영국·이탈리아·그리스 등 유럽을 중심으로 열차 제조와 함께 신호시스템·보수사업을 잇따라 수주하고 있습니다.3. 커넥티브 인더스트리즈=엘리베이터, 반도체 제조 장치, 산업기계를 제조·판매합니다. 전통적으로 히타치가 주로 해왔던 하드웨어 제조업이죠. 다만 제품만 덜렁 파는 게 아니라 디지털 솔루션을 함께 판매하는 방향을 추구합니다.‘이러다 망한다’는 위기감요약하자면 히타치는 그동안 중구난방으로 뻗어있던 가지를 대거 쳐내고, 거대한 그룹을 세 줄기로 정리해 왔습니다. 2009년 943개였던 자회사는 많은 매각, 그리고 인수를 모두 거치며 지금은 573개가 됐고요. 이제 해외 매출 비중이 61%, 외국인 직원 비중이 60%에 달하는 진짜 글로벌 기업입니다. 일본 내수 설비투자 의존도가 워낙 높아서 ‘GDP(국내총생산) 기업’(기업 실적이 일본 GDP와 비슷하게 움직인다는 뜻)으로 불렸던 과거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죠.그럼 히타치를 이렇게 뒤바꿔놓은 건 무엇일까요. 큰 변화 이전에 ‘이러다 진짜 망하겠다’는 큰 위기감이 있었습니다.사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엔 장점도 있죠. 산업마다 사이클이 다르니까, 어느 한쪽이 적자에 빠져도 다른 데가 적당히 메울 수 있으니까요. 과거 히타치도 그렇게 그럭저럭 굴러갔습니다. 물론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에 빠지기 시작한 1990년부터 거의 이익을 내지 못했지만요. 그리고 2008년 히타치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겁니다. 이듬해 5월 발표한 2008 회계연도 적자 규모는 7873억엔. 일본 제조업 역사상 최대 기록이었습니다.“여기서 한 번만 더 적자가 나면 도산한다.” 히타치 내부에선 이런 진단이 나왔습니다. 외부에선 ‘가라앉는 거함’이라고 불렀죠. 2009년 4월 망할 위기에 처한 회사를 이어받은 9대 사장인 가와무라 다카시 사장의 취임 일성은 “적자는 악”이었습니다. 곧바로 대대적인 사업구조 재편을 선언했죠.“(모든 걸 다루는) 대기업에서 사회혁신 사업으로 축을 옮기겠다.” 그동안 자회사별로 제각각이었던 목표를 하나로 모아 뚜렷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룹을 하나로 묶는 경영전략이라는 게 제대로 생긴 거죠. 여기서 사회혁신이란 ‘우리는 단순히 하드웨어를 파는 게 아니라, 고객에게 디지털 솔루션을 제공해 가치 창출을 돕는 기업이 되겠다’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목표가 뚜렷해도 문제는 실행입니다. 구조 개편엔 당연히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죠. 흑자인 사업은 흑자라서, 적자인 사업은 곧 나아질 테니까 자기네는 구조조정 당할 이유가 없다고 반발합니다. 그걸 헤쳐 나가야만 하죠.11대 사장이었던 히가시하라 토시아키 현 회장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상반기까진 모든 자회사가 ‘올해 목표 달성 가능하다’고 전망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3분기가 끝날 무렵이 되면 구름의 움직임이 수상해지죠. ‘사실은…’이라며 목표달성이 어려워졌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자기네가 적자여도 다른 곳이 만회해 줄 것’이란 나태의 구조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었습니다.”독립적인 이사회의 역할이렇게 그룹과 자회사의 목표가 따로 갈 때, 중요한 건 강력한 리더십이죠. 하지만 히타치는 뚜렷한 대주주가 없고, 그룹 CEO는 자회사 수장들과 비슷하게 공채 출신입니다. CEO의 의지와 열정만으로 끌고 나가기란 어려운 구조인데요.하지만 히타치는 놀랍게도 2009년부터 지금까지 사장이 여러 번 바뀌는 가운데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건 독립성 높은 이사회가 개혁을 지지하고 동시에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죠.일본 또는 한국 모두 대기업의 이사회란 대체로 비슷한 모습이죠. 이미 하기로 거의 결정된 내용이 의안으로 올라오고요, 이사회는 사실상 거수기 역할을 합니다. 이사회 멤버는 주로 현 경영진과 가까운 사람들로 채워지고요.히타치 이사회도 과거엔 그랬지만, 이젠 구성부터 다른 기업과 차이가 큽니다. 12명 중 9명이 사외이사이고, 이 중 5명은 외국인이죠. 회의는 치열하고 깐깐합니다. 히타치의 전 사외이사였던 관료 출신 모치즈키 하루부미는 첫 이사회부터 깜짝 놀랐다고 전합니다. 미국 3M CEO 출신인 조지 버클리 사외이사가 발언 차례가 되자 메모를 들고 기관총처럼 비판을 마구 쏘아댔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소극적인 계획이면 미국에선 해고될 것”이라며 거침이 없었죠. M&A 같은 중요한 사항에 대한 심의는 매우 철저히 이뤄집니다. 차기 CEO를 선임할 땐 후보를 여러 차례 불러 검증하죠. 하루부미는 “진정한 의미의 감독과 집행의 분리가 뭔지 알게 됐다”고 말합니다.독립적이고 합리적인 데다 글로벌화까지 된 이사회의 존재는 구조 개혁에 명분과 힘을 실어줍니다. 이사회가 든든히 버티고 있으니 사장이 바뀐다고 흔들리는 일도 없고요. 코지마 케이지 현 사장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CEO가 깃발을 건네주며 달리는 이어달리기 같습니다. 이사회가 마치 감독처럼 차를 타고 옆에서 함께 달리면서 ‘힘내라, 너무 빠르다’라고 독려를 해주는 느낌이죠. 감독이 대신 달리는 건 아니지만, 이사들로부터 응원과 여러 조언을 받습니다.” 그는 “사장이 교체되면서, 10년 넘게 같은 방향을 목표로 경영을 계속하는 회사는 드물 것”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변혁은 시간을 들이는 것2008년 히타치 그룹 자회사 중 상장사는 22개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0이죠. 이중 상당수가 아예 매각됐거나, 지분을 일부 팔아 연결 자회사에서 빠졌습니다. 일부는 합병하거나 완전자회사가 되면서 상장폐지했고요.그럼 자회사 중 어떤 걸 남겨두고 어떤 건 팔아야 할까요. 생각보다 그 답을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엔 ‘시너지가 있냐, 없냐’를 기준으로 삼으면 될 것 같은데요. 사실 시너지라는 게 해석하기 나름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만으론 조직의 불만을 뚫고 가기 어렵죠. 그래서 히타치는 그룹의 목표에 충실하기로 합니다. 히타치는 사회혁신, 즉 단순 제조가 아닌 디지털 서비스 쪽으로 나아가기로 했잖아요. 그러려면 자산을 ‘라이트’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이때 라이트란, ‘Right’와 ‘Light’를 모두 뜻하죠.대표적인 사례가 히타치건설기계입니다. 굴삭기 같은 건설기계는 분명 다른 자회사와 시너지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죠. 전자부품은 물론 원격감시 솔루션 같은 IT를 결합한 디지털 솔루션도 히타치가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하지만 이사회는 글로벌 건설기계 시장에서 성장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놓고 치열하게 논의했습니다. 거의 3년 가까이 말이죠. 그 논의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앞으로는 건설기계는 소유하기보다는 임대해서 사용하는 기업이 많아질 거다. 금융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리스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이는 그 기계가 히타치건설기계의 자산이 된다는 뜻이다. 그럼 이미 10조엔에 달하는 히타치의 연결 자산 규모가 한층 더 무겁게 되는데?결국 그룹은 지분 상당 부분을 매각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2022년 히타치건설기계는 그룹과 결별했죠. 이런 식으로 상장 자회사였던 22곳 중 15곳이 그룹을 떠나게 됩니다. 돈을 잘 버는 흑자 기업이어도 방향성과 맞지 않으면 과감히 정리한 거죠.히타치의 변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몇 달 전에도 가정용 에어컨 제조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죠. 여전히 이사회에선 변화 속도가 느리다는 지적이 나온다는데요. 본래 변화란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기에 꾸준히 해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히타치의 나카하타 히데노부 CHRO의 인터뷰 발언을 공유하며 마무리합니다.“인간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린다’가 아니라 ‘시간을 들이는 것’을 염두에 뒀습니다. 시간을 들여 변화를 납득한 후에 일하게 하는 겁니다.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시작을 빨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By.딥다이브뚜렷한 경영전략, 독립적인 이사회, 과감한 선택과 집중. 교과서 같은 이야기이지만, 히타치는 이 모범 답안이 정말 통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올해 주가 상승률 90%. 일본 대기업 히타치가 디지털 전환으로 환골탈태했습니다. 시작은 이러다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던 2009년이었습니다. -느슨한 자회사 연합체였던 히타치는 그룹의 공동 목표를 뚜렷하게 정합니다. 그 목표란 ‘사회 혁신’. 단순히 제품만 파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디지털 솔루션까지 함께 제공하는 기업으로 변신하겠다는 겁니다.-이를 위한 과감한 구조재편이 이뤄집니다. 독립적인 이사회가 CEO에게 힘을 실어줬기에 가능했죠. 그동안 사장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개혁 방향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15년이 지났지만 히타치는 여전히 혁신 중입니다. 거대한 대기업의 방향을 돌리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죠. 더 빨리 시작하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이 기사는 2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왜 사람들은 음모론에 휘둘릴까요. 음모론은 어떻게 열혈 추종 세력을 만들고 현실을 혼란스럽게 만들까요.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입니다.사실 음모론은 늘 있었습니다. 6·25 북침설, KAL기 폭파범 김현희 가짜설이 그렇고요.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2014년 세월호 참사 역시 음모론에 휩싸였습니다. 특히 부정선거론은 정치 이념을 가리지 않고, 2012년 대선(박근혜 당선)과 2020년·2024년 총선(더불어민주당 1당) 모두에서 뜨겁게 타올랐죠.이런 음모론, 그동안은 그냥 무시해 왔는데요. 이번 사태를 보며 음모론이 아주 무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게 이토록 중요한 일이라면, 음모론을 좀 알아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왜 멀쩡해 보였던 사람들이 음모론에 빠지나’에 대한 답을 책에서 찾아봤습니다. 한국에선 올해 10월 출간된 댄 애리얼리 듀크대학교 교수의 신간 ‘미스빌리프(Misbelief)’를 바탕으로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어디에나 음모론은 있다당신은 음모론을 얼마나 믿으십니까? 전 세계적으로 상당한 추종자를 가진 음모론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이런 겁니다.-미국의 달 착륙은 NASA가 영화 제작 스튜디오에서 연출한 가짜였다.-세계 각국 정부는 외계 생명체의 증거를 은폐한다.-몇몇 유명인의 죽음 관련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 마틴 루터 킹, 모차르트, 존 레넌, 존 F. 케네디 등.-기후위기는 없다. 지구온난화 관련 과학은 이념적·금전적 이유로 만들어졌다.-비밀결사 일루미나티(또는 프리메이슨, 유대인)가 전 세계를 주무르고 있다.-코로나19는 애초에 중국(또는 미국)의 어느 실험실에서 생물무기로 개발됐다.어떤가요. 이 중 몇 가지는 ‘정말 그런가?’라며 솔깃한 적 있는 이야기 아닌가요. 실제 영화나 소설에서 차용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스토리이기도 하고요.음모론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나타났습니다. 서기 68년 악명 높은 폭군이었던 로마 황제 네로가 사망했을 때도, 일부는 그가 여전히 살아있고 왕좌를 되찾으려 한다고 믿었죠. 그 뒤로 몇 년 동안 ‘내가 네로’라고 주장하는 사기꾼이 로마에 여럿 나타났을 정도입니다.세상엔 별의별 음모론이 다 있고, 음모론은 끊임없이 탄생하죠. 음모론은 이념을 가리지 않습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진보와 보수, 모두 거짓정보를 소비하고 퍼뜨리는데요. 특히 양 진영의 극단적 집단일수록 더 심하죠. 그리고 두 극단의 음모론은 놀랍도록 닮아있습니다.한국의 부정선거론(2012년 대선엔 김어준, 2024년 총선에선 전광훈)이 그렇고요. 미국에선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두고는 현대의학을 회피하는 극진보주의자와 정부를 불신하는 극보수주의자가 모두 음모론을 펼쳤죠. 음모론은 시대나 지역, 이념까지 뛰어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인간 자체의 특성(또는 취약성)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겁니다.음모론의 심리학적 해부아마 이렇게 반문하실 겁니다. ‘난 음모론 따윈 절대 안 믿는데? 난 음모론자들과는 다르다고!’ 과연 그럴까요.듀크대에서 심리학과 행동경제학을 가르치는 스타 교수 댄 에리얼리는 2020년 7월 자신이 ‘코로나19 사기극’의 수괴라는 음모론을 접하게 됩니다. 그가 비밀결사 일루미나티의 일원이고, 빌 게이츠와 공모해서 세계 지배를 위해 코로나19라는 가짜 전염병을 만들어냈단 주장이었죠. 음모론 추종자들은 그를 히틀러에 비유하며 ‘죽여야 한다’고 증오를 쏟아냅니다. 그가 적극적으로 반박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죠.그래서 애리얼리는 그들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패배한 뒤 미국에서 ‘부정선거 음모론’이 퍼지고, 급기야 이듬해 초 의회의사당 난입사건까지 벌어진 시기였습니다. 그는 왜 사람들이 음모론에 빠지는지 알기 위해 그들에게 연락해서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죠. 그는 자신을 살인마로 묘사했던 그 음모론자들과 ‘친구 비슷하게’ 됐고요. 이를 통해 그가 다다른 결론은 이겁니다.1.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감정적 취약성과 인지적 한계가 음모론의 배경이다.2. 하지만 특별히 더 음모론에 깊이 빠지게 만드는 성격과 상황이 있다.3. 음모론이 판치지 않게 하려면, 음모론자를 ‘미쳤다’고 조롱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해야 한다.‘이해와 공감’이라는 키워드를 보고 솔직히 좀 놀랐는데요(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람들을 100% 이해할 순 없지만, 그래도 ‘뭔가 그렇게 된 사정이 있겠지’라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은 있잖아요. 음모론자도 이와 비슷하게 봐달라는 게 애리얼리 교수의 주장입니다.통제감 회복과 인지적 편견그럼 왜 인간은 음모론에 끌릴까요. 예로부터 인간은 악당을 사랑합니다. 그리스 신화부터 어벤져스 영화까지, 악당의 존재는 세상을 단순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주니까요. 실제 세상은 너무 복잡해서 혼란스럽고, 통제할 수 없으니 불안합니다. 하지만 모든 잘못된 것의 원흉인 악당이 생기는 순간, 뿌옇고 모호했던 회색빛이 걷히고 세상은 흑 또는 백으로 명확해지죠. ‘이제야 이 사건의 전모를 온전하게 파악했다’며 안도하고 통제감을 되찾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음모론이 세월을 뛰어넘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 느낌은 일시적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죠.하지만 악당은 찾아도 진짜 현실의 문제(혼란·공포·불안 등)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시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그 음모론에 더 집착합니다. 관련된 동영상과 자료를 끊임없이 찾으며 점점 깊이 빠져들죠. 집착이 만드는 파괴적 순환입니다.음모론은 안도감을 줄 뿐 아니라,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능동적인 게임’이라 할 수 있죠. 그저 정보를 흡수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정보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악당을 제압하는 헌신적이고 중요한 존재’로 스스로를 느낄 수 있습니다.이렇게 보면 음모론은 마치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는 셈인데요. 다만 음모론자들은 음모론을 정말 진실이라고 확신한다는 게 마약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죠. 왜 수많은 과학적 증거와 반론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들은 허황한 주장을 굳건히 믿을까요.이런 인지적 편견과 관련한 심리학적 연구는 사실 차고 넘칩니다. 몇 가지를 꼽자면.확증편향 : 사람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맞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 증거는 쉽게 무시해 버리고, 기존 신념을 합리화하죠. 따라서 같은 사람이어도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패배하면 ‘개표기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승리하면 ‘민주적 선거’라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면 되니까요.동기화된 추론 : 또 사람들은 원하는 결론에 들어맞도록 현실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인지과학적 용어로는 ‘동기가 부여된 추론’을 하는 건데요. 트럼프는 대선 후보 시절 하루에도 몇번 거짓말을 했지만 지지자들은 그걸 신경 쓰지 않았죠. 왜? ‘그가 이런 거짓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걸 보면 그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안을 밀어붙이는 데 필요한 일은 뭐든 다 할 거야’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과장과 왜곡은 상관없다는 인식이죠.더닝-크루거 효과 : 무식하면 용감한 법입니다. 어떤 사안을 너무 잘 알 때보다 그저 조금만 알 때,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많이 안다고 착각하죠. 자신의 지식을 너무 과신하다 보니 위험한 짓도 서슴없이 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거죠. 가짜뉴스와 관련한 대규모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건의 실체를 잘 모르는 사람일수록 그와 관련한 가짜뉴스에 쉽게 넘어갈 뿐 아니라, 이를 SNS에서 더 많이 퍼뜨립니다.미신과 음모론의 상관관계자신이 ‘외계인에 의해 납치됐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위눌림’이라고 흔히 얘기하는 수면마비 현상을 외계인 납치로 착각하는 건데요. 이들을 정신 감정해 보면 정상으로 나오죠.실험연구 결과, 이른바 ‘외계인 피랍자’는 뚜렷한 성격적 특징을 보였습니다. 일단 자신이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더 겪었고요(잘못된 기억). 또 정신적이거나 환상적인 것에 유독 잘 끌렸습니다(예-부적 또는 저주는 효과가 있다). 이런 특징이 이들을 음모론에 더 쉽게 빠져들게 하는 거죠.그럼 어떤 성격이 특히 음모론에 쉽게 넘어갈까요. ①패턴을 열심히 찾는 사람은 음모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동전 던지기 같은 무작위적인 결과를 놓고도 굳이 패턴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죠. 이렇게 아무 인과관계가 없는 일들 사이에도 패턴을 찾는 것, 즉 미신적인 의식에 의지한다는 건 음모론과 연관이 큽니다.②직관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음모론자가 되곤 합니다. 트럼프는 과거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내겐 직감이 있다. 내 직감은 때때로 다른 사람의 뇌가 말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준다.”③지적 겸손 수준이 낮으면 위험합니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남이 더 많이 알 수도 있다’라는 열린 태도가 음모론에 휩쓸리지 않게 하니까요.④나르시시스트일수록 위험한 음모론자가 되곤 합니다. 일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 때, 그들은 자기에겐 분명히 아무 잘못이 없기 때문에(나르시시스트는 원래 그렇게 생각함) 비난을 받아야 마땅할 대상을 찾죠.친절한 음모론 집단부정선거 음모론을 펼치는 극우 유튜버 영상의 댓글을 혹시 보신 적 있나요? 영상마다 수천개 댓글이 달리는데, 어쩜 이리도 영상 제작자에 대한 지지와 응원, 감사와 축복이 가득한지 모릅니다. 참 친절하고 따뜻한 집단처럼 보이죠. ‘적을 박살 내자’는 썸네일 속 과격한 문구와는 정반대 분위기가 아닐 수 없는데요.주변 가족과 친구들은 내 얘기를 무시하고 따돌리는데, 이 집단에선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지지를 보낸다면 어떨까요.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일수록, 이 따뜻한 음모론 집단에 더 깊이 빠져듭니다. 소속감과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주장은 한층 더 과격해지죠. 진실(팩트냐 아니냐)보다는 충성심(어디 소속이냐)이 중요합니다. 정보가 좀 부정확하고 다소 황당하더라도 눈 감아버리죠. 이들이 느끼는 사회적 유감은 그들을 음모론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듭니다.그렇기 때문에 음모론의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 사람은 다시 끌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이비종교’라는 비유가 과장이 아닌데요. 하지만 에이얼리 교수는 “내가 희망을 찾는 곳은 인간”이란 낙관론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음모론의 인간 심리를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려 노력한다면 그 파괴적인 영향력을 줄여갈 수 있다고 말하죠. 그들의 진짜 이야기(왜 음모론에 빠졌는지)를 들어주면서 조금씩 다가가란 겁니다.정말 그럴까요. 냉소와 무시만으론 음모론의 폭풍을 잠재울 수 없다는 건 한국과 미국 정치 모두가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이해하려 다가가기란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하죠. 음모론자까지도 품을 수 있는 그런 열린 사회란 과연 가능할까요. By.딥다이브이 글을 읽으면서 ‘역시 나는 음모론에 빠질 위험은 없어’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반대로 ‘나도 음모론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지적 겸손)이 음모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니까 말이죠. 지나친 과신은 금물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왜 멀쩡해보였던 사람이 음모론에 빠질까요. 음모론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나타납니다. 이념적 양 극단의 음모론은 서로 닮아있죠. 음모론이 인간이 누구나 가진 특성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진 취약성이 음모론을 만들어냅니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통제감을 되찾으려는 욕구의 반영이죠.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는 확증편향, 대의를 위해서라면 진실의 왜곡쯤은 넘어가는 동기화된 추론이 음모론을 신뢰하게 만듭니다.-그리고 유독 음모론에 잘 빠지는 위험한 성격이 있습니다. 패턴 찾기와 미신을 좋아하고, 지적 겸손 수준이 낮은 나르시시스트가 특히 그렇죠. 일단 한번 음모론에 빠지면 거기서 느끼는 사회적 유대감이 그들을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끕니다.-그래서 필요한 건 조롱과 무시가 아닌 이해와 공감입니다. 그들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소통하며 서서히 스며들어야만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요.*이 기사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모두가 열광하는 AI 시대 슈퍼스타’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기업이 있죠. AI 반도체 절대강자, 엔비디아(Nvidia)입니다. 세계 시가총액 2위 기업, 지난 2년 주가 상승률 719%, 분기 매출 성장률 491%이란 수치가 이 기업의 위상을 보여주죠. 이토록 놀라운 기록을 쓴 엔비디아는 어떻게 일하는 기업일까요. 1993년부터 지금까지 31년 동안 젠슨 황은 이 회사를 어떻게 이끌고 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 국내에선 이미 책이 여러권 나왔는데요. 가장 신뢰할 만한 책이 12월 10일 미국에서 출간됐습니다. 미국 경제매체 배런스(Barron‘s) 시니어 라이터 태 김(Tae Kim)이 쓴 ‘더 엔비디아 웨이: 젠슨 황과 기술 거인의 탄생(The Nvidia Way: Jensen Huang and the Making of a Tech Giant)’입니다. 그는 엔비디아 협조를 받아 회사 공동창업자와 다수의 전현직 임직원, 관련자들을 인터뷰했죠. 물론 젠슨 황을 포함해서요.이 책은 연대기 순으로 구성됐지만, 몇 가지 중요한 키워드를 뽑아 정리해 봤습니다. 엔비디아가 AI 세상을 지배한 방식, 즉 젠슨 황의 방식을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1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보고서 대신 e-메일한국이든 미국이든, 대기업이라면 전통적 피라미드형 조직구조를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정점에 있는 총수와 얼굴을 보며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임원은 극소수이죠. 보고 내용은 늘 세심하게 조율됩니다. 너무 잘 다듬어져서 기업의 진짜 문제와 장애물을 숨기곤 하죠.그래서 젠슨 황은 공식 보고서가 아니라 직원들의 e-메일을 받습니다. 전 직원이 1~2주에 한 번 직속 팀과 임원에게 ‘톱 5’ 이메일을 보내게 하죠. ‘자신의 작업 중인 상위 5가지 사항’과 ‘최근 시장에서 관찰한 사항’에 대해 설명해야 합니다. 물론 수신자엔 젠슨 황이 포함되고요. 엔비디아 초창기, 즉 젠슨 황이 검은색 가죽 재킷을 유니폼처럼 입기 전부터 이어져 온 일입니다. 젠슨 황이 이걸 읽냐고요. 네, 그럼요. 때론 메일을 보낸 지 몇분 만에 답장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은 일부러 일요일 밤늦게 톱5 메일을 보냅니다. 만약 금요일 오후에 보낸다면 한밤중 CEO 답장이 날라와서 주말을 망칠 테니까요. 일요일 밤이면 젠슨 황은 싱글 몰트 위스키 하이랜드 파크 한잔을 마시면서 찬찬히 e-메일을 읽곤 합니다.젠슨 황은 왜 톱5 e-메일을 좋아할까요. “약한 신호를 감지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종종 신호를 포착합니다. 예를 들어 머신러닝을 다룬 직원 e-메일 여러 개를 읽은 뒤(모든 메일은 키워드 검색을 위해 주제 태그를 달아야 함), 젠슨 황은 관련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가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즉시 더 많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추가하라고 지시했죠.더 평평하게, 더 투명하게1999년 상장 당시 250명이던 엔비디아 직원 수는 2010년엔 5700명으로 불어납니다.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임원부터 말단 직원까지 모두와 얼굴 보며 일 얘기하길 좋아했던 젠슨 황이지만 그건 어려워졌죠. 그는 피라미드형 조직에 거부감이 큽니다. 이상적인 조직은 훨씬 더 평평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래야 독립적으로 일할 만한 역량 있는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고요. 동시에 일일이 지시받지 않고는 일할 줄 모르는 저성과자는 걸러낼 수 있으니까요.그래서 엔비디아엔 60명 넘는 e-스태프가 있습니다. CEO와 정기적으로 회의하는 직속 보고자가 60명이 넘는단 뜻이죠. CEO 직속 보고자가 10명이 채 되지 않는 일반적인 미국 대기업과는 대조적입니다.이 회사엔 1대 1 회의는 거의 없습니다. 보고와 피드백은 60명 넘게 모인 대규모 회의에서 이뤄지죠. 투명하고, 정보가 빠르게 공유됩니다. 전 엔비디아 관리자 앤디 킨은 이렇게 말합니다. “젠슨 황이 임원진에게 말하는 걸 다 함께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를 동기화하죠.”정보가 즉각 공유되고 뭐가 중요한지를 모두가 아니까, 협조는 훨씬 수월합니다. 전 마케팅 임원 올리버 발투흐는 다른 기업과 비교했을 때 “엔비디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누군가에게 한 번만 요청하면 바로 처리됐다는 점이다. 두번 요청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죠.파워포인트 대신 화이트보드엔비디아 사무실과 수십 개 회의실에서 꼭 찾아볼 수 있는 게 화이트보드입니다. 심지어 출장 갈 때도 젠슨 황은 화이트보드를 들고 갈 정도죠. 그는 마커펜은 꼭 대만산 12㎜ 폭의 끝이 납작한 것만 쓴다고 합니다.엔비디아에서 많은 경우 화이트보드가 파워포인트를 대체합니다. 분기마다 젠슨 황은 수백명 리더를 모아 회의를 여는데요. 모든 총괄 관리자는 화이트보드를 이용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비즈니스 스토리를 설명해야 합니다. 화려한 파워포인트 없이 하얗게 비어있는 보드 앞에 서야 하는 거죠. 그럼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발표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예쁜 그래픽과 모호한 텍스트 뒤로 숨을 수가 없게 됩니다. 마커펜 하나에만 의존해서 실시간으로 자신의 사고 과정을 보여줘야 하죠. 내용을 잘 알고 있는지, 논리에 빈틈은 없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대충 자료로 때울 수가 없죠. 무엇보다 가장 앞줄에서 젠슨 황이 쏘아보고 있을 겁니다. 때론 중간에 뛰쳐나와 본인이 직접 화이트보드에 다이어그램을 그리기도 하죠.이 책의 저자 태 김은 “엔비디아에서 화이트보드는 의사소통 수단 그 이상의 의미”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도 결국엔 지워지고, 새 아이디어가 이를 대신하게 된다는 믿음을 보여주죠. 실수든 성공이든, 과거는 돌아보지 않고 미래와 기회라는 빈 칠판에 집중하자. 이게 바로 엔비디아 문화입니다.미션이 보스다관료주의의 큰 폐해는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질 뿐 아니라, 내부정치가 횡행한단 점입니다. 임원끼린 경쟁관계이고, 각 사업부는 자기네 임원을 이기게 만드는 데 사활을 걸죠. 다른 사업부가 잘 안 돼야 오히려 득을 보기도 합니다.이런 내부정치는 젠슨 황이 혐오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다른 이의 성공을 위해 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기회를 박탈하는 리더가 있다면 저는 그냥 큰 소리로 말할 겁니다. 한두 번 그렇게 하면 아무도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죠.”그래서 엔비디아엔 각 사업부의 경로를 가두는 장기 전략 계획이 없습니다. “5개년 계획은 없습니다. 세상은 살아 숨 쉬니까요. 우린 그저 지속적으로 계획할 뿐입니다.”직원들에겐 ‘미션이 바로 보스(Mission is the boss)’라고 강조합니다. 미션 실현이 목표이지, 조직이나 임원을 보고 일하는 게 아니란 거죠. 엔비디아에선 모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그 책임자(Pilot in Command)를 정하고, 그가 직접 CEO에 보고토록 합니다. 실무 책임자가 임원이나 팀 이름 뒤에 숨지 않게 하죠.또 미션 달성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바로 도움을 요청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 영업 임원이 할당량을 못 채우게 생겼다면, 가급적 일찍 회사에 알려야 하죠. 그럼 회사가 다른 부서 전문가를 투입해 함께 문제를 해결할 테니까요.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약점이 되지 않고, 반대로 요청하지 않는 게 문제가 되는 문화입니다. “우리는 함께 일합니다. 아무도 혼자 패배하지 않습니다.”이 회사에서 임원과 책임자는 공개 질책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젠슨 황은 칭찬에 매우 인색합니다. 과거 업적을 돌아보는 건 기업을 안주하게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죠. 대신 질책은 사정없이 쏟아냅니다. 주로 대규모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혼내곤 하는데요. 당하는 입장에선 상당한 굴욕이 아닐 수 없죠.왜 이렇게 창피를 줄까요. 젠슨 황은 “피드백은 학습”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왜 그 사람만 배우나요? 그는 스스로 저지른 실수와 어리석음 때문에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우린 모두 거기에서 배워야 합니다.” 참 냉정한데요.그가 직원들에게만 가혹한 건 아닙니다. 한 엔비디아 임원은 환상적인 분기 실적을 보고하는 회의에서 젠슨 황이 맨 처음 했던 말을 기억하죠. “난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이렇게 말해요. 너 진짜 짜증 나(You suck).”일 중독자 집합소헌신(dedication)과 근면함(hard work). 엔비디아가 모든 직원에게 요구하는 바죠. 마케팅 책임자인 마이클 하라가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 했던 발언입니다. “우리는 매우 공격적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 안되는 이유에 대한 변명을 찾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여기 와서 뒤에 숨어서 월급 받고 5시에 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착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늘 그만두세요.”야근, 주말 근무는 일상이고요. 엔지니어 아닌 마케팅 담당자도 주 60시간 이상 근무가 허다하죠. 너무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직장에 애를 데리고 출근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 정도입니다.긴 근무시간에 대한 불평, 당연히 있습니다. 하지만 젠슨 황은 불만을 제기한 직원에게 이렇게 얘기했죠. “올림픽을 위해 훈련하는 선수들도 이른 아침에 훈련하는 것에 대해 불평합니다.” 최고가 되려면 국가대표급으로 일에 전념하는 게 당연하다는 압박이죠.그럼 지쳐서 직원들이 대거 떠날 것만 같은데, 신기한 건 그렇지 않단 겁니다. 엔비디아 이직률은 3% 미만으로 매우 낮죠. 왜 그럴까요.이 회사는 칭찬이 없는 대신, 주식으로 보상을 줍니다. 연간 성과평가에서 ‘우수’ 등급을 받거나 ‘특별기여자’로 선정되면 주식을 몇백 주 주고요. 또는 언제든 훌륭한 일을 해내면 젠슨 황이 바로 연락해서 주식을 주기도 하죠. 철저한 성과기반으로 민첩한 보상이 이뤄집니다. 특히 주가가 워낙 빠르게 오르면서, 받기로 예정된 주식이 있는 우수한 인재는 회사에 오래 머물게 됐죠.또 엔비디아는 엔지니어들이 가장 원하는 걸 제공해 주는 회사입니다. 업계의 걸출한 동료들과 함께 세상을 바꿀 만한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거죠. 어떤 엔지니어도 폐기될 게 뻔한 쓸모없는 기술 개발에 몇 년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부 정치 같은)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기술에만 100% 집중할 수 있다”(전 GPU 설계자 리이 웨이)는 건 기술 업계에서 매력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못한 대기업이 너무 많으니까요.그리고 중요한 건 회사 전체에서 가장 긴 시간, 가장 많이 일하는 사람이 바로 CEO라는 점입니다.젠슨 황은 영화를 봐도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보는 내내 일 생각만 하니까요. 그가 휴가를 떠나면 직원들은 두려워합니다. 호텔 방에 처박혀서 일만 하면서,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e-메일 폭탄을 안기기 때문이죠. 그는 엄청난 일 중독자이고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CEO의 이런 태도는 전염이 되고, 이제 엔비디아의 조직문화 그 자체가 되었죠.결론적으로 이 책에서 설명한 엔비디아 방식은 결국 젠슨 황 CEO, 그 자체입니다. 젠슨 황이란 인물을 직원 3만명짜리 대기업으로 만든 게 엔비디아인 셈이죠. 엔비디아는 전적으로 젠슨 황 리더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태 김의 표현대로 “그게 엔비디아의 유일한 실패 지점”입니다. 61세 CEO가 언젠가 은퇴한다면, 그 뒤에도 엔비디아 신화는 이어질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엔비디아는 독특합니다. CEO가 독특하니까요. 책에 나온 젠슨 황의 발언 몇가지를 추가로 소개하며 마무리합니다. “기대가 매우 높은 사람들은 회복력이 매우 낮습니다. 불행히도 회복력은 성공에 중요합니다. 위대함은 지능이 아닙니다. 위대함은 성격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보기 좋더라도 너무 많은 걸 하는 것보다 적은 걸 잘하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스위스 군용칼을 사러 가게에 가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받는 선물이죠.”“우리는 ROI 타임라인이 없습니다. ROI 타임라인이 없고 수익성 목표가 없죠. 우리가 최적화하는 유일한 건 이겁니다. 정말 멋진가? 사람들이 좋아할까?”“초창기엔 많은 면에서 엉망이었어요. 첫날부터 훌륭한 회사는 아니었죠. 우리는 31년 동안 회사를 훌륭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남았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최악의 적이었습니다.”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계엄 혼란으로 한국 증시 시총이 대만에 크게 밀리게 됐다. 이런 기사 보셨나요. 지난 7일 블룸버그 기사를 국내 언론이 앞다퉈 . 이를 두고 정치 때문에 경제가 폭망이라는 한탄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과연 정치만 문제일까요. 올해 초부터 줄곧 벌어지기만 하는 양국의 시총 격차는 두 나라 경제의 다른 운명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운이 아니라 명백한 실력 차이이죠. 잘 나가는 대만 경제와 증시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아시아에서 제일 잘 나가대만 증시는 올해 들어 여러 기록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3월 사상 처음으로 자취안 지수가 2만 포인트를 돌파했습니다.-아시아 주요국 증시 중 올해 들어 지수 상승률이 가장 높습니다(30.35%).-한국을 크게 제치고 아시아 국가 중 확고한 시가총액 3위로 올라섭니다.사실 올 초만 해도 대만 증시는 좀 불안해 보였습니다. 1월 총통 선거에서 ‘친미반중’ 성향의 집권 민진당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됐기 때문이죠. 중국과의 갈등이 고조돼서 대만해협에서 뭔 일 일어나는 거 아니냐는 걱정 많았는데요. 하지만 중국이 지금 당장은 그럴 여력이 없죠. 경제 성장 둔화로 내부 챙기기에도 바쁘니까요. 많이들 우려했던(동시에 한국 증시는 내심 반사이익을 기대했던) 지정학적 리스크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대신 미국 나스닥 발 인공지능(AI) 열풍이 대만 증시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듭니다. 대만 시총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반도체 기업 TSMC 주가가 올해 87%나 폭등했죠. 지난 7월엔 사상 처음으로 시총 1조 달러를 돌파하기도 했는데요(이후 환율 변동 탓에 지금은 1조 달러를 하회). 9일 기준 TSMC 시총은 1234조원. 삼성전자(319조원)의 4배 가까이 됩니다. 2020년 이전만 해도 삼성전자가 더 앞섰는데. 씁쓸합니다.아, 그럼 이게 다 TSMC 때문이네. 이렇게 생각하시겠죠? 그런데 의외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대만엔 TSMC 말고도 든든한 AI 관련 기술주가 잔뜩 포진해 있죠. 반도체를 포함한 AI 생태계가 이미 탄탄하게 자리 잡은 겁니다.반도체 넘어 AI 생태계까지아마존웹서비스(AWS),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대만에 데이터센터를 뒀거나 건설할 예정인 미국 빅테크이죠. 또 구글은 대만에 첨단 하드웨어 연구개발(R&D) 센터를 운영 중이고요. MS의 AI R&D센터, 마이크론 하이엔드 메모리 R&D센터도 대만에 있습니다. 엔비디아, AMD(GPU·CPU 세계 2위), ASML(반도체 장비업체), 슈퍼마이크로(AI 서버 전문 업체), 인피니언(자동차 반도체 세계 1위) 같은 내로라하는 기술기업 역시 R&D 센터를 짓고 있거나 짓는단 계획을 발표했고요.아니, 중국의 대만 침공 우려가 나온 게 어제오늘 얘기가 아닌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대만을 연구개발 기지로 택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필요한 게 대만에 다 모여 있으니까요. 첨단 AI 반도체 제조와 서버 구축, 장치 냉각 등 거의 모든 가치사슬이 말이죠. 예를 들면 지금 대만 증시에서 잘 나가는 AI 관련 기업은 이런 곳이 있습니다.폭스콘(Foxconn) : 애플 아이폰 제조로 알려진 기업이죠. AI 서버 수요가 급증하면서 올해 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하고 있는데요. 멕시코에 최신 엔비디아 AI 가속기 ‘GB200‘ 생산시설도 짓고 있습니다. 올해 주가 상승률 86%.퀀타 컴퓨터(Quanta Computer) : 원래 애플 맥북 제조사로 유명한데요. 최근엔 AI 서버를 전문으로 하는 자회사 퀀타 클라우드 테크놀로지(QCT, 엔비디아 주요 협력사)로 더 유명합니다. 폭스콘과 경쟁 관계에 있죠. 2023년 주가가 약 160% 뛰었고, 올해도 38% 더 올랐습니다.델타 일렉트로닉스(Delta Electronics) : AI 서버용 전원공급장치와 열을 시켜주는 냉각 솔루션을 만드는 기업입니다. 역시 엔비디아 협력업체이죠. 전력 손실을 크게 줄이는 기술에서 특히 주목받습니다. 이전엔 전기차 전력 공급으로 유명했지만, 이제 AI 관련주로 변신하면서 주가 상승세가 이어집니다. 올해 주가 상승률은 31%.아시아 바이탈 컴포넌트(Asia Vital Components) : GPU 액체 냉각을 위해 필요한 구리로 된 콜드플레이트(Cold Plate, 발열을 흡수하는 역할)를 생산하는 기업입니다. 냉각 방식이 액체 냉각으로 진화하는 트렌드의 최대 수혜주로 평가되죠. 올해 주가가 115% 급등했습니다.이름이 좀 생소할 수도 있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AI 가속기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B2B 기업들입니다. 여기에 수백개의 반도체 디자인 회사와 세계 최고 패키징 기업(ASE)을 포함한 완성된 반도체 공급망도 대만엔 있죠. 엔비디아는 물론 MS와 구글 등 AI 선두기업이 이 작은 섬나라로 모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충분합니다. 류페이 첸 대만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대만은 AI 관련 하드웨어의 원스톱 샵입니다.”아시아 실리콘밸리라는 꿈물론 이런 AI 생태계 구축은 대만의 민간 기업끼리 서로 밀고 끌어줬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TSMC가 엔비디아의 공급망 선정에 영향을 줬으리란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죠. 또 젠슨 황 엔비디아 CEO나 리사 수 AMD CEO 같은 대만계 IT 거물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합니다.그러나 무엇보다 정부 역할을 무시할 수 없죠. 사실 대만 반도체 산업은 태생 자체가 정부 작품이었죠. TSMC가 1987년 국영기업으로 출발했으니까요(1992년 민영화). 또 정부는 부지 개발을 직접 한 ‘과학산업단지’(신주, 중부, 남부 3개 권역) 공장을 반도체 기업에 싸게 빌려줬습니다. 기업은 비용을 아낄 수 있을 뿐 아니라, 가까이에 서로 모여 있으면서 시너지를 내게 한 거죠. 이토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건 반도체가 국가 안보를 지켜줄 ‘방패’라는 절박함 때문이었는데요. TSMC가 호국신산(護國神山, 나라를 지키는 성스러운 산)으로 불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하지만 이런 대만 경제도 2010년 전후로는 많이 헤맸습니다. 과거 대만 경제 기적을 이끌었던 OEM(주문자 생산방식) 경제성장 모델이 수명을 다했기 때문이죠. 저가 PC 조립 같은 OEM만 하다 보니 원천 기술이 대만엔 남지 않았고요.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기업들이 하나둘 빠져나간 겁니다.2016년 집권한 민진당 차이잉원 총통은 ‘아시아 실리콘밸리 계획’을 발표합니다. ‘OEM 경제에서 기술 혁신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혁신기업과 인재를 육성한다는 계획이었죠. 첨단 반도체 제조 인프라 기반에 AI 같은 미래 기술을 융합시키자는 야심 찬 그림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엔 실현 불가능한 ‘돈 낭비’라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이런 전략을 주도할 디지털 장관엔 ‘화이트 해커’ 출신인 오드리 탕을 임명했죠. 당시 35세였던 최연소 장관이자 첫 트랜스젠더 장관이라 파격적이었는데요. 그만큼 규제완화와 혁신에 진심이란 걸 보여준 겁니다. 그는 올해 5월까지 무려 8년이나 자리를 지킵니다.기술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규제완화와 투자지원이 본격화했고요. R&D센터와 첨단 반도체 공정에 대한 보조금 확대와 화끈한 세금 감면, 외국 인재 유치(소득세 혜택 주는 취업 골든카드 비자 발급), 반도체연구학과 설립 같은 대대적인 지원 정책이 펼쳐집니다.마침 타이밍도 좋았습니다. 트럼프 집권 뒤 미·중 갈등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고,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졌으니까요. 2018년부터 MS와 구글 같은 빅테크가 ‘대만을 AI 연구 허브로 만들겠다’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실리콘밸리 기업이 왜 굳이 대만까지 오겠어?’라던 회의론을 보란 듯이 뒤집은 거죠. 대만 정부 설명대로 “보조금, 인재, 세금(감면)”이란 세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입니다.한국과는 뭐가 달랐나그런데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AI 육성, 그거 우리나라도 참 많이 했던 얘기인데. 2016년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인간중심 AI 육성’ 외쳤고요. 2019년 말 문재인 전 대통령은 ‘IT 강국을 넘어 AI 강국으로’라며 비전 발표했거든요. 게다가 올해 9월엔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위원회’ 출범식도 열렸습니다. AI를 본격적으로 외치기 시작한 시점은 대만과 별 차이 없었습니다.그런데 뭐가 달랐던 걸까요. 사실 이유야 수도 없이 많지만요. 굳이 꼽자면 일단 반도체와 AI 아니면 끝장이라는 절박함이 지정학적 위기에 처한 대만보다 약했다고 봅니다. 또 정권이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정책을 이어나갈 동력을 잃고 리셋 되어버렸고요. 헤쳐 나갈 의지와 에너지 모두 부족했던 건데요. 그러다 보니 발표해 놓은 각종 지원 정책도 흐지부지됐고요. 반도체 산업 주도권이 정부보단 민간 대기업에 있다 보니, 중소기업까지 키우진 못했죠.(삼일PwC경영연구원 ‘K-반도체 레벨업 방안’ 보고서 참고)한편 올 5월 취임한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대만을 실리콘(반도체) 섬에서 AI 섬으로 변모시키겠습니다.” 기존 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겠단 점을 분명히 한 건데요. 이제 AI는 대만에서 (반도체에 이어) “국가를 보호해 줄 두 번째 산”으로 불립니다.대만의 AI 강국 스토리에도 틈은 있습니다. 저출산으로 인구가 감소하면서 모든 영역에서 근로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고요. 두둑한 보너스로 부유해진 IT업계 종사자와 다른 업종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죠. 물론 대만 경제는 성장의 페달을 열심히 밟아서 파이를 더 키우는 데 주력할 겁니다. 대만 정부가 내놓은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3.29%. 한국의 내년 성장률 예상치(투자은행 평균 1.8%)를 한참 웃돕니다. By.딥다이브대만 증시에 투자자가 몰리는 데는 AI 열풍과 함께 상장사의 배당성향(당기순이익 중 현금배당 비율)이 매우 높다(10년 평균 60%)는 이유도 작용하죠. 그것 또한 부러운 점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만과 한국의 시총 격차가 갈수록 벌어집니다. 대만 증시는 펄펄 나는데, 한국은 고꾸라지는 탓이죠. TSMC를 필두로 한 대만 AI 생태계가 무섭게 성장 중입니다. 첨단 반도체 제조부터 서버 구축, 냉각까지. 대만은 AI 원스톱 쇼핑이 가능한 나라입니다. -대만 기술 산업은 정부 주도로 키워졌습니다. OEM 경제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2016년부터 ‘아시아 실리콘밸리’ 계획을 펼쳤죠. 보조금 지급+인재 양성+세금 감면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데다, 미·중 무역 갈등이 기회로 작용하면서 대만이 아시아 AI 허브로 급부상합니다. -2016년 알파고 대국의 충격 이후 AI 육성을 외쳐왔지만 별소득이 없는 한국. 지금이라도 각성이 필요할 텐데, 나라가 이리도 혼란스러우니 걱정입니다.*이 기사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계엄 사태로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과연 이 정치적 혼란이 우리 경제에 어떤 충격을 미칠지에 대한 걱정이 상당한데요. 정치적 불안정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거야 상식이죠. 그런데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까요.이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태국이죠. 한때 잘 나갔던 태국 경제는 지난 20년 동안 정치적 혼란과 함께 가라앉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붕괴는 아니지만 서서히 침식되어 가고 있죠. 최근엔 ‘아세안의 병자’라는 굴욕적인 수식어까지 붙었는데요. 정치가 발목 잡은 태국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쿠데타의 나라?먼저 정치 얘기부터 해볼까요. 요즘 쿠데타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요. 아시아에서 쿠데타 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태국입니다. 1932년 첫 군사 쿠데타 이래 지금까지 총 19번 쿠데타가 있었으니, 약 4년 10개월에 한 번꼴로 쿠데타가 일어난 셈이죠. 이 중 12번이나 성공했고요.왜 이렇게 쿠데타가 잦을까요. 강력한 군부가 입헌군주제 왕실과 손잡고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에선 선거로 총리를 뽑아놔도 마음에 안 들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내쫓아버리는데요. 이걸 또 국왕이 승인해 주는 겁니다.아무리 국왕이지만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민주적 절차 따윈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는 게 놀라운데요. 왕실 입장에선 군부 엘리트가 자기네 재산과 권력을 지켜주니 나쁠 것 없죠. 참고로 태국 국왕은 막대한 방콕 부동산과 태국 최대 시멘트 회사, 석유회사 지분을 가진 태국 최고 부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왕입니다.그런데 이런 군부에 맞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정치인이 있죠. 바로 탁신 친나왓 전 총리입니다. 성공한 기업인 출신인 탁신은 가난하고 소외됐던 농민을 공략해 2001년 총리직에 오릅니다. 저개발 농촌에 보조금과 대출을 쏟아붓는 그의 포퓰리즘적 정책은 서민에게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대신 기득권층(방콕 중산층과 기업인들)이 적으로 돌아서게 만듭니다. 결국 2006년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 정권을 무너뜨렸고요. 탁신은 해외로 도피합니다.태국 정치엔 극단적 분열의 시기가 열립니다. ‘붉은 셔츠’의 친탁신(농촌 빈민)과 ‘노란 셔츠’의 반탁신(도시 중산층)이 거리에서 맞서 싸웠고, 폭력시위는 유혈사태로 이어졌죠. 2011년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총리에 올랐지만,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로 갈등은 끊이지 않습니다. 분열과 혼란은 군부엔 기회였습니다. 2014년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켰고, 태국은 군사정권 체제로 들어갔죠.불타오른 민주화 열망, 그리고 좌절무려 8년 만에 치러진 2019년 총선. 군부계는 스스로 만든 헌법 덕분에 재선에 간신히 성공했지만, 뜻밖의 다크호스가 등장합니다. 창당한 지 1년 만에 제3당으로 부상한 신미래당(Future Forward Party)이었죠.신미래당 당수는 1978년생 타나톤 쯩룽르엉낏. 엘리트 재벌 2세인 타나톤은 ‘군사정부 반대, 민주주의 복원’을 외치며 중도좌파를 표방했습니다. 우리로 치면 신선한 ‘강남 좌파’의 등장이었죠. 후진적 정치에 질렸던 20, 30대 젊은 유권자들의 몰표가 쏟아집니다.야권 차기 주자로 급부상한 타나톤을 군부가 그냥 놔둘 리 없죠. 2020년 헌법재판소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신미래당 해산을 판결합니다. 타나톤의 정치활동도 10년간 금지하고요. 태국에서 헌법재판소를 포함한 사법 엘리트는 군부 기득권 편을 들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곤 합니다. 분노한 젊은이들이 뛰쳐나왔고, 그해 여름과 가을 거대한 민주화 시위 물결이 태국을 휩쓸었죠.그리고 돌아온 2023년 총선. 들끓는 MZ세대의 민주화 열망이 파란을 일으킵니다. 전진당(Move Forward Party)이 무려 제 1당으로 올라선 거죠. 2020년 해산된 신미래당이 이름만 바꿔 부활한 건데요. 이번엔 하버드·MIT 출신 엘리트 피타 림짜른닷(1980년생)이 당을 이끌었습니다.이제 드디어 개혁의 시대가 찾아오겠구나. 기대가 컸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철천지원수 같았던 군부계와 탁신계 정당이 손을 잡은 겁니다. 군부는 더 위협적인 적(전진당)을 막기 위해, 탁신계는 집권을 위해 20년 앙숙과 손을 잡고 연정을 구성했죠. 새 총리로는 탁신의 측근인 세타 타위신이 선출됐고요. 탁신은 15년 망명을 끝내고 태국으로 돌아옵니다.하지만 견원지간 두 파벌의 정략결혼이 순탄할 리 없죠. 또다시 헌법재판소가 움직입니다. 뇌물로 유죄판결 받은 적 있는 인물을 장관으로 임명했다는 이유로 올해 8월 세타를 총리직에서 해임한 겁니다. 본인이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닌데 해임이라니. 무슨 판결이 이런가 싶은데요. 어쨌든 군부 견제로 그는 잘렸고, 같은 당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직을 이어받습니다. 탁신의 딸이죠.그리고 같은 달 헌법재판소는 모두가 예상했던, 하지만 충격적인 또다른 판결도 내놨습니다. 전진당을 해산하고 피타 림짜른닷 대표의 정치활동을 10년간 금지한 거죠. 이렇게 태국 정치는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한 채 도돌이표에 갇힌 상태입니다.프라이팬 경제의 회복력간단히 요약한다고 했는데도 너무 길고 복잡한 스토리네요. 한마디로 2006년부터 이어진 태국 정치의 혼란은 잦아들지 않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이 기간에 두 번의 쿠데타와 세 번의 헌법 개정, 잇따른 정당 해체가 있었고요. 대규모 거리 시위와 폭력 사태가 주기적으로 반복됐습니다. 그럼에도 민주화엔 도통 진전이 없죠. 자, 그럼 궁금합니다. 이런 정치적 혼란 때문에 해외 자본은 태국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통화가치는 급락하고, 국가 신용등급은 추락했을까요?그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한동안 태국 경제엔 ‘테플론 태국(Teflon Thailand)’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마치 테플론(코팅) 프라이팬처럼 식었다가도 금세 달궈졌단 뜻이죠. 경제 성장이 약해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재주를 보인 건데요.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태국은 외국인 투자 유치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이죠. 특히 일본과 서구 제조기업은 일찍부터 태국에 생산·조립공장을 짓고 수출 전진기지로 삼아왔는데요. 이는 곧 해외 기업이 태국에 엄청난 매몰 비용을 갖고 있단 뜻입니다. 태국 생산시설을 철수하려면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할 뿐 아니라, 숙련된 근로자도 포기해야 하는 거죠. 그러니 웬만한 혼란이 있어도 기업들은 줄행랑 치기보다는 일단 버티기 마련입니다.또 정치는 혼란스러웠지만, 꽤 유능한 경제 관료들이 중심을 잡아줬습니다. 솜키드 자투스리피탁 전 부총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인데요. 탁신 총리 시절 경제정책을 이끌었던 솜키드는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에 의해 또다시 발탁됐죠. 그는 ‘경제정책의 차르’로 불릴 정도로 태국 경제에 영향력이 컸는데요. 다만 그 역시 군부세력 내 정치싸움에 밀리면서 2020년 사임했습니다.그리고 무엇보다 관광이 태국 경제를 어느 정도 떠받쳐줬죠. 2019년 정점에 관광은 국가 GDP의 11.5%를 차지했는데요. 천혜의 자연과 따뜻한 날씨, 음식과 문화유산은 정치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매력적 요인입니다.그럼 뭐가 문제냐고요? 태국 경제는 한꺼번에 무너지진 않았습니다. 대신 서서히 침식되고 있죠. 이제 곳곳에 녹이 슬고 물이 새기 시작합니다. 정치 혼란이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침식의 흔적이 이젠 너무나 선명해졌습니다.경제가 시름시름 앓고 있다2023년 태국의 GDP 성장률은 고작 1.9%. 잘 나가는 아세안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너무 초라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은행은 지난 7월 올해 태국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8%에서 2.4%로 내렸습니다. 관광객은 전년보다 대폭 늘었지만 수출과 투자 모두 부진하기 때문이죠.태국 정부는 이를 두고 아직도 ‘코로나 팬데믹 충격’ 탓을 합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코로나 탓만 할 순 없죠. 성장 둔화의 이유는 외국인 직접투자(FDI) 성과만 살펴봐도 찾을 수 있는데요. 지난해 태국은 고작 30억 달러의 순유입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지역의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 비해 크게 뒤진 수치였죠. 한마디로 해외 투자자들이 이제 더 이상 태국을 선택하지 않고 있습니다.사실 태국이 동남아시아 진출을 고려할 때 첫 번째로 떠오르는 국가가 아니게 된 지는 꽤 오래됐습니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2008년 중국을 대체할 휴대전화 생산 거점으로 베트남을 선택했고요. 현대차, 효성, 포스코 등 한국 대기업도 줄줄이 투자처로 베트남을 택했습니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데다 인건비가 저렴하다는 게 베트남으로 간 이유인데요. 베트남은 일당 독재국가라서 정치적으로는 안정돼 있다는 게 특히 큰 장점으로 꼽혔습니다. 인건비는 더 비싼데 정치 불안은 큰 태국으로 굳이 갈 이유가 없게 된 거죠.태국을 밀치고 올라오는 건 베트남만이 아니죠. 요즘 데이터센터 같은 첨단 기술 투자를 가장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동남아 국가는 말레이시아입니다. 또 배터리 관련 제조시설은 니켈이 풍부한 인도네시아로 향했고요. 단순 조립 위주의 낡은 제조 기술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최신의 미래 기술은 태국까지 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는 2000년부터 같은 구조로 운영되어 왔고, 그래서 경쟁력이 침식됐습니다. 지역의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외국인 직접투자에서 경쟁할 수가 없어요.”(키아타난타 룬카에우 경제학 박사의 VOA 인터뷰)오랜 정치적 불안정이 가져온 태국 경제의 쇠퇴를 확인할 수 있는 데이터는 다양합니다. 태국은 한때 ‘아시아의 디트로이트’라고 불릴 정도로 자동차 제조업에서 존재감이 컸는데요. 통계에 따르면 태국의 자동차 판매량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말레이시아에 추월당하고 말았습니다. ‘아세안 2위 자동차 시장’ 지위를 내주고 만 거죠.한때 서비스 품질에서 높이 평가받던 타이항공의 추락도 상징적입니다. 2024년 최고의 프리미엄 항공사를 뽑는 평가에서 타이항공은 25위 안에 아예 들지 못했죠. 대한항공(2위)은 물론 베트남항공(11위)에도 밀렸습니다. 이 항공사는 부실 경영과 뇌물 사건에 코로나까지 겹치며 2020년 파산 보호에 들어갔고,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죠.OECD 국제학업성취도평가의 처참한 성적표는 나라의 기반마저 흔들린다는 걸 보여줍니다. 지난 10년 동안 태국은 점수와 순위 모두 눈에 띄게 하락했는데요(81개국 중 평균 63위). 시골 학교의 형편없는 교육 여건(=지역 불균형), 국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시대착오적 커리큘럼 탓이란 진단이 나온 지는 오래지만, 점점 나빠지기만 합니다.“2006년 이후 태국은 기반을 잃었습니다. 태국은 뒤처져 왔고 계속 뒤처지고 있습니다. 진로 수정이 없다면 태국은 꼴찌 국가가 될 것이고, 친절한 사람들과 좋은 가격은 관광에 매력적이겠지만 그 이상은 아닐 겁니다.”(태국 쭐랑롱껀 대학 수석연구원인 티티난 퐁수디락 기고문)진단은 명확합니다. 이 혼란을 끝내고 과감한 개혁과 민주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국민의 각성도 시작됐죠. 하지만 현실의 태국 정치는 과연 현 정권이 임기는 채울 수 있을지를 여전히 걱정하는 상황입니다. 과연 20년의 정치 소용돌이에서 태국 경제는 이제라도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가까이서 단기간 들여다보면 정치 혼란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충격이 한방에 몰아서 오는 게 아니라 천천히 스며들기 때문이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기에 더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태국은 2006년 이후 20년 가까이 정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친탁신-반탁신의 분열과 갈등이 극심했고요. 최근엔 민주화를 요구하는 MZ세대의 분노가 터져 나옵니다. 두차례 쿠데타와 세 번의 헌법 개정, 그리고 연이은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판결이 혼돈을 가중시킵니다.-그렇다고 경제가 갑자기 무너진 건 아닙니다. 오랜 수출 전진기지로서의 기반은 여전히 유지되는 듯 보이죠. 그런 회복력 덕분에 ‘테팔론 태국’이란 별명도 붙었습니다.-하지만 경제는 서서히 침식됐고 이제 그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 경제는 펄펄 나는데, 태국 경제만 혼자 기어가고 있죠. ‘아세안의 병자’라는 자조 섞인 분석이 나올 정도인데요. 정치 혼란의 사슬을 끊고 앞으로 나아갈 진짜 회복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이 기사는 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인구 1억명의 성장하는 시장, 베트남에서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 브랜드는 뭘까요. 도요타? 현대자동차? 아닙니다. 바로 빈패스트(VinFast)이죠. 베트남 토종의 순수 전기차 제조회사입니다.‘베트남 기술력으로 만든 전기차가 팔리겠어?’라는 조롱에도 내수시장에서 질주하는 빈패스트. 그 중심엔 베트남 최고 부자 팜 녓 브엉(Pham Nhat Vuong) 빈그룹 회장이 있죠. 한때 ‘베트남의 도널드 트럼프’로 불리던 부동산 재벌이 이젠 ‘베트남의 일론 머스크’를 꿈꾸며 전기차에 ‘올인’ 중인데요. 빈패스트의 무모한 도전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국내 판매 1위 달성했지만‘베트남 자동차 산업의 역사적인 이정표’, ‘이전엔 아무도 생각한 적 없는 기적’.지난달 중순 10월 자동차 판매 통계가 발표되자, 베트남 언론이 들썩였습니다. 1~10월 판매량에서 처음으로 베트남 유일 자동차 제조사 빈패스트가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죠. 빈패스트는 이 기간 약 5만1000대 차량을 판매했는데요. 도요타(4만9000대), 현대차(4만8000대)를 제친 겁니다.빈패스트가 설립된 지 7년밖에 되지 않은 데다, 2년 전부터는 순수전기차만 생산한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더 주목받았습니다. 아직 전기차 인프라가 부족한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1, 2위가 모두 빈패스트 전기차(VF3, VF5)였으니까요.빈패스트 전기차가 왜 베트남에서 잘나갈까요. 일단 싸기 때문이죠. 소형 전기차 VF3는 가격이 1327만원(2억4000만 동)부터 시작합니다. 휘발유 소형차와 비교해도 가격 면에서 경쟁력 있는데요.빈패스트가 6월 말 내놓은 공격적인 마케팅도 한몫했습니다. 모든 신차 구매 고객에 계열사(V-그린) 충전소에서 1~2년 동안(모델 따라 다름) 무료 충전을 제공하고요. 모회사 빈그룹이 속한 모든 장소(쇼핑몰·호텔 등)에서 하루 5시간씩 무료 주차도 2년간 제공합니다. 게다가 각종 사은품까지. 여기에 베트남 정부의 전기차 등록비 100% 면제 정책까지 얹어졌죠.베트남 언론은 빈패스트 전기차의 경제성을 강조합니다.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하노이시의 한 택시 운전사는 “예전 택시는 하루 운행하는데 평균 30만동(1만6500원)이 들었는데, 빈패스트의 VF5 플러스로 바꾼 뒤엔 그 절반 이하”이라며 “전기차가 휘발유차보다 훨씬 경제적”이라고 말하죠.글로벌 평가는 냉정하기만그리고 빈패스트와 베트남 언론은 얘기하지 않는(하지만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결정적인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내부 거래이죠.빈패스트 전기차는 가장 크고 확실한 고객을 잡고 있는데요. 지난해 탄생한 베트남 전기 택시회사 GSM입니다. 이 회사의 택시는 100% 빈패스트 전기차(또는 전기 오토바이)로 운영되죠. 그럼 GSM 지분 95%를 보유한 대주주는? 팜 녓 브엉 빈그룹 회장입니다. 즉, 브엉 회장의 개인회사가 빈그룹 계열사인 빈패스트 전기차를 왕창 사주고 있는 거죠. 참고로 지난해 팔린 빈패스트 전기차 3만5000대 중 70%를 GSM이 사줬습니다.이 정도면 전기차 팔아주려고 택시회사 차린 것처럼 보일 정도인데요. 물론 대기업 계열사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거야 익숙한 이야기이긴 합니다. 다만 회장 개인회사로 일감을 몰아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니 좀 특이하죠.또 치명적이지만 역시 베트남 언론에선 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운 빈패스트 전기차의 약점이 있습니다. 품질과 성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가격이 그렇게 많이 저렴한 건 아니란 점입니다.베트남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전기차 VF5를 볼까요. 최소 구매 가격이 2588만원(4억6800만동, 플러스 버전)으로 나오는데요. 이건 배터리를 뺀 차량 가격입니다. 배터리 가격은 별도라는 뜻이죠. 빈패스트는 독특하게도 전기차 배터리에 마치 정수기처럼 ‘렌탈(구독)’ 개념을 도입했는데요. 배터리 렌탈을 선택하면 차값은 저렴해지는 대신 매달 120만~270만동(약 7만~15만원)의 구독료를 자동차 회사에 내야 합니다(충전비는 별도). 주머니가 가벼운 구매자의 초기비용을 낮추기 위해 이런 방식을 도입한 건데요.그럼 배터리가 포함된 VF5 플러스 가격은 얼마냐. 3030만원(5억4800만동)입니다. 경쟁 차종인 중국산 BYD 돌핀(베트남 판매가 3544만원)보단 저렴하지만, 대신 완충 시 최대 주행거리가 300㎞와 405㎞로 차이가 꽤 큽니다. 싼 게 비지떡이죠.빈패스트는 이미 혹독한 품질 논란을 겪었습니다. 지난해 5월 야심 차게 미국 시장에 진출한 빈패스트는 첫차로 중형 전기 SUV VF8을 출시했었죠. 이때 자동차 전문지의 리뷰가 쏟아져 나왔는데요. 좀처럼 보기 힘든 수준의 혹평 일색이었습니다. 제목만 한번 볼까요.모터트렌드 ‘2023 빈패스트 VF8 첫 번째 테스트 드라이브: 발신자에게 반환’로드앤트랙 ‘첫 번째 주행:2023 빈패스트 VF8은 받아들일 수 없다’인사이드 EVs ‘2023 빈패스트 VF8 씨티 에디션 첫 주행 리뷰: 으악’에어컨, 내비게이션, 방향지시등, 승차감, 조립 마감 등등. 너무 많고 심각한 품질 문제와 함께 예상보다 별로 싸지 않은 가격, 짧은 주행거리가 약점으로 지적됐습니다. 빈패스트는 당시 상징적으로 999대의 VF8 차량을 베트남 하이퐁에서 미국 캘리포니아로 운송해 왔는데요. 수백 대 차량이 이후 몇 달 동안 항구에 주차돼 있었다고 전해지죠. 지금도 빈패스트는 북미 지역 판매량은 따로 공개하지 않습니다.위대한 도전인가 위험한 도박인가한마디로 빈패스트가 ‘베트남 시장 1위’ 타이틀을 획득하긴 했지만, 거기엔 많은 물음표가 따라붙습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자동차 제조사로서 평판을 쌓기까진 갈 길이 구만리이죠. 당연히 빈패스트는 설립 이후 줄곧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해까지 7년 누적 손실이 약 10조원에 달하고요. 올해 3분기까지도 적자행진을 이어갑니다.그에 비해 공격적인 해외 확장을 추진하면서 벌여놓은 사업은 여기저기 너무 많습니다. 이미 북미, 유럽,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동 시장에 진출했고요. 인도와 인도네시아에는 생산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도 공장을 짓기로 했는데, 어려워진 시장 상황을 이유로 2028년으로 연기한 상황이죠.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캐즘’에 빠지면서 찬 바람이 부는 요즘. ‘베트남판 테슬라’라는 빈패스트의 꿈은 그냥 한바탕 꿈으로 끝나는 게 아닐까. 이런 회의론이 당연히 나옵니다. 특히 빈패스트 주가가 지난해 8월 나스닥 상장 직후 700% 상승했다가, 다시 단숨에 95% 폭락하는 유례없는 널뛰기를 벌인 터라, 더더욱 시장의 의심이 커지죠. 지난해 한때 장중 90달러를 넘기도 했던 주가는 현재 4달러 언저리에 머뭅니다.하지만 빈패스트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빈패스트에 올인 중이니까요. 빈그룹 창업자이자 베트남 최대 부자인 팜 녓 브엉 회장입니다. 브엉 회장과 빈그룹은 빈패스트에 이미 100억 달러 가까운 투자금을 쏟아부었는데요. 지난달 추가 자금지원을 발표했습니다. 빈그룹은 빈패스트에 2조원을 추가 대출해 주고, 브엉 회장은 개인 자산으로 2조8000억원을 제공한다고 하죠.빈그룹은 수년 전부터 자동차 제조업에 온 역량을 집중해 왔습니다. 이를 위해, 슈퍼마켓(빈마트)을 포함한 소매업을 통째로 매각하고 항공업과 TV·스마트폰 제조업에선 과감하게 철수했죠. 빈패스트를 그룹의 최우선으로 둔 건데요.전기차 제조업은 본래 돈 벌기가 쉽지 않은 산업이죠. 테슬라조차 흑자를 내기까지 17년이 걸렸으니까요. 이러다 빈패스트 때문에 빈그룹까지 휘청거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지만, 브엉 회장은 확고합니다. 지난 6월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언제까지 빈패스트를 더 지원할 거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죠. “돈이 바닥날 때까지요.”화끈한 승부사의 과감한 베팅브엉 회장은 왜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도전할까요. 그의 기업가로서의 행보 자체가 기회 포착과 과감한 베팅의 연속이었습니다.브엉 회장의 사업 인생은 소련 붕괴 직후 혼란기였던 1993년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됐습니다. 소련 유학을 마친 뒤, 우크라이나에서 작은 베트남 국수가게를 하던 그는 값싼 인스턴트 라면에 대한 수요를 감지하고 모든 걸 걸었죠. 엄청난 이자율(월 8%)로 빚을 내서 라면 공장을 세웠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그의 라면 브랜드 ‘미비나’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고요. 그는 단숨에 성공한 기업인이 됐습니다.이어 그는 빠르게 성장하던 베트남으로 눈을 돌립니다. 2001년 여행 간 해변도시 냐짱(나트랑)에서 럭셔리 리조트 개발이란 사업 아이디어를 얻은 건데요. ‘바다에 돈을 쏟아붓는다’는 조롱을 받으며 개발한 ‘빈펄리조트 냐짱’이 대성공을 거뒀고요. 이후 하노이부터 호찌민까지 베트남 전역에 호텔·리조트·고급빌라·오피스빌딩·아파트 등, 가장 큰 부동산 프로젝트를 빈그룹이 휩쓸게 됩니다. 브엉 회장은 2013년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포브스 선정 ‘빌리어네어(자산 10억 달러 이상)’에 올랐고요. 그에겐 ‘베트남의 도널드 트럼프’란 별명이 붙었습니다(트럼프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동산 재벌이었지만,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시절 얘기입니다). 물론 빈그룹이 헐값에 요지의 땅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정부의 지원이 있었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고요(물론 회사 측은 특혜를 받은 적 없다고 부인합니다).그리고 이제 브엉 회장은 전기자동차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돌진합니다. 일단 기회를 잡으면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죠. 온갖 회의론이 난무하지만 그는 이를 모두 “근거 없다”고 일축합니다. 그는 지난 4월 연례주주총회에서 이런 비장한 비유를 들며 말했죠. “70년 전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투(인도차이나전쟁에서 베트남군이 프랑스연합군을 상대로 거둔 최대의 승리)의 ‘모두가 최전선을 위해, 모두를 위해 승리’라는 슬로건처럼 우리는 빈패스트를 결코 놓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즈니스 스토리가 아닙니다.”내로라하는 경쟁자들도 고전 중인 글로벌 전기차 시장. 브엉 회장의 승부사 기질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결과는 예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모든 걸 걸었다니 좀더 예의주시해 보려 합니다. By.딥다이브전기차 제조업을 키우는 건 베트남 정부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온 나라가 팍팍 밀어주면 세계적인 전기차 브랜드 하나쯤 키울 수 있으려나요. 결말이 궁금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베트남 유일의 자동차 제조사 빈패스트가 1~10월 내수 판매량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라며 베트남 언론이 환호합니다. -판매량 급증의 비결은 싼 가격+퍼주기식 마케팅, 그리고 내부거래입니다. 팜 녓 브엉 빈그룹 회장이 소유한 전기택시회사가 대놓고 빈패스트 전기차를 밀어주고 있죠. 빈패스트 전기차의 품질에 대한 혹평도 해외에선 파다합니다. -하지만 빈패스트는 공격적 해외 확장을 멈추지 않고 있죠. 이러다 빈그룹까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지만, 베트남 최고 부자 브엉 회장은 “돈이 바닥날 때까지” 빈패스트를 지원할 거라는데요. 늘 “공격이 최선”이라던 그의 도전이 계속됩니다.*이 기사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관세 시한폭탄’ 타이머를 작동시켰습니다. 이미 ‘캐나다·멕시코에 25%, 중국엔 추가 10%’ 관세 예고장 날렸고요. 선거 공약이었던 모든 수입품 10~20% ‘보편관세’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전 세계가 그의 SNS 글 한 토막에 벌벌 떨고 있는데요.미국을 더 강하게 만들겠다며 보편관세라는 초강수를 뒀던 미국 대통령. 이전에 또 있었죠. 바로 1971년의 리처드 닉슨입니다. 닉슨의 팬으로 유명한 트럼프가 53년 전 닉슨 정책을 그대로 따라 한다는 점이 흥미로운데요. 트럼프가 왜 관세에 집착하는지를 알려주는 사례, 닉슨의 보편관세를 들여다봅니다. *이 기사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미국을 강하게, 달러를 약하게미국이 다시 제조업을 위대하게 만들고 수출을 늘려 무역적자에서 탈출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건 뭘까요. 트럼프 당선인에 따르면 바로 ‘달러 약세’입니다. 왜냐고요? 강달러가 미국산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끌어내리는 결정적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죠. 그는 지난 6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우리는 큰 통화 문제가 있습니다. ‘강한 달러-약한 엔, 약한 위안’ 등 환율 문제가 심각합니다. 저는 (과거 대통령 재임 시절) 그들과 싸웠는데 그들은 항상 통화 약세를 원했죠. 저는 더 이상 통화 약세를 유지하면 관세를 부과할 거라고 말하며 싸웠죠. 그것(강달러)은 다른 나라에 트랙터 등을 팔려고 하는 미국 기업들에 엄청난 부담입니다”미국산이 안 팔리는 게 제품 경쟁력 때문이 아니라 불리한 환율 탓이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지만, 이는 1960년대 후반부터 꽤 확고하게 자리 잡은 사고방식입니다. 그 시절 미국에선 무역흑자가 급감한 게 독일과 일본이 수출을 위해 통화가치를 일부러 낮게 유지한 탓이라고 봤죠.급기야 미국의 연간 무역수지가 19세기 이후 처음으로 적자로 돌아선 1971년. 미국 재무장관 존 코널리가 난국을 타개할 경기부양책을 닉슨 대통령에 보고합니다. 대책 중엔 그 유명한 금태환 정지(외국이 달러를 가져오면 미국이 금으로 바꿔 지급해 주던 걸 중단)와 함께 물가·임금 동결이 있었고요. 아울러 이게 포함됩니다. 모든 수입품에 일시적으로 10% 관세를 추가 부과할 것.처음 이 안을 보고 받았을 때, 닉슨 대통령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백악관 집무실 녹음테이프엔 이런 그의 발언이 남아있죠. “수입 관세는 다른 나라에 반격하고 양보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라 날 기쁘게 하네.” (더글러스 어윈 다트머스대 경제학 교수의 ‘40년 후의 닉슨 쇼크: 수입 할증료 재검토’ 논문 참고)관세는 대중에 인기 있는 정책모든 수입품에 일제히 관세를 추가로 부과하는 ‘보편관세’는 미국에서도 1930년 이후엔 한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1971년 8월 13일 금요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닉슨 대통령 주재의 비밀회의에 참석한 주요 경제 참모들은 이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입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관세 인상의 부작용을 지적했습니다. 관세 탓에 수입이 줄면 미국 달러화 가치가 되레 더 뛸 수 있다는 거였죠.하지만 코널리 재무장관은 추가 관세가 다른 나라를 압박해 양보를 이끌어내는 데 효과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아울러 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인기를 끌 거란 점을 강조했죠. “미국 국민에게 국경세 부과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금이 환율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결국 참석자들은 상대국을 압박하는 협상카드로써 일시적인 추가 관세 안에 합의합니다.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역사에 ‘닉슨 쇼크’로 기록된 유명한 특별메시지를 발표합니다. 전 세계를 쇼크에 빠뜨린 핵심 내용은 금태환 정지였지만, 관세 인상도 있었습니다.“저는 달러를 보호하고, 국제수지를 개선하고, 미국인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일시적인 조치로 저는 오늘 미국으로 수입되는 상품에 10%의 추가 세금을 부과합니다. 이는 불공정한 환율로 인해 미국 제품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불공정한 대우가 종료되면 수입세도 종료될 것입니다.”관세 정책은 역시나 대중에게 인기 있었습니다.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1%는 추가 관세에 찬성했죠. 반대는 14%뿐이고 15%는 잘 모르겠다고 답합니다.무역 상대국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곧이어 미국 재무부가 각국에 환율 조정 요구 사항을 들이밀었습니다. 미국 달러화를 18% 평가 절하하고, 특히 일본 엔화는 24% 평가 절상하라는 요구였죠. 한마디로 미국이 다른 나라에 이런 식으로 협박한 겁니다. ‘10% 관세 계속 얻어맞을래? 아니면 너희 통화가치 18% 이상 올릴래?’ 마치 조폭 같은 행태인데요. 당시는 지금과 달리 고정환율제로 정부가 공식 환율을 정하던 시절이었죠. 미국은 이런 협박이 쉽게 들어 먹힐 거라 여겼습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상대국의 저항이 거셌습니다. 특히 일본이 세게 버텼죠. 엄청난 규모의 외화보유액을 달러 매입에 쏟아부으면서,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한 달쯤 지나서도 협상에 별 진전이 없자 국가 안보 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가 나섭니다. 그는 이런 자극이 국제적 긴장을 높이고, 상대국 보복을 불러올 거라고 우려했는데요. 하지만 추가 관세를 철회하자는 키신저 제안을 닉슨 대통령은 거부했습니다. “어려워요, 헨리. (관세는) 국내에서 인기가 너무 높아서, 무언가를 얻기 전엔 끝낼 수 없어요. 국민이 이 관세를 지지하고 있어요. 맙소사, 그냥 포기할 순 없죠.”닉슨의 승리? 미국 경제의 패배미국은 포기하지 않았고 협상을 이어갑니다. 마침내 1971년 12월 18일, 미국 워싱턴DC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10개국 재무장관이 모여 합의를 이뤘죠. 금에 대한 미국 달러 가치는 7.9% 평가절하됐고(온스당 35달러→38달러), 일본 엔화는 달러화 대비 16.9%, 독일 마르크화는 13.5% 평가절상됩니다. ‘스미스소니언 협정’이죠.한동안 버텼던 일본 정부도 ‘10% 추가 관세보다는 차라리 엔화 평가절상이 낫다’는 자국 기업들의 아우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 정도 달러화 가치 하락은 이미 외환시장에선 반영돼 있던 수준이었고, 단지 이를 각국 정부가 공식화한다는 의미이긴 했지만요.목표를 달성한 닉슨 대통령은 협정 체결 이틀 뒤인 1971년 12월 21일 10% 추가 관세를 폐지합니다. 보편관세를 협상 카드로 사용하는 실험이 4개월 만에 막을 내린 거죠.여론은 어땠을까요. 당시 타임지 기사는 스미스소니언 협정으로 얻어낸 달러화 평가 절하를 “조용한 승리”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닉슨과 코널리에게 승리입니다. 평가절하를 감수한 그들의 용기는 대중과 양당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그런데 말이죠. 이게 정말 미국 경제의 승리였을까요? 단기적으론 그런 것처럼 보이긴 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엔화 절상 요구에 굴복했고, 미국은 그토록 소망하던 ‘싼 달러 시대’를 열었고, 닉슨 대통령은 이듬해 11월 압도적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으니까요.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 이후에 펼쳐집니다. 달러화 평가절하는 고스란히 미국 내 수입 물가 급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정부의 가격 통제 정책이 끝나고, 중동발 오일쇼크까지 닥치면서 1973년부터 미국 물가는 미친 듯이 급등합니다. 경기침체와 고물가가 결합한이 펼쳐지죠.또 잠시 흑자로 돌아서나 싶었던 미국의 무역수지는 1976년 다시 적자로 돌아서 지금껏 해마다 적자 행진을 이어갑니다. 이후에도 미국은 약달러 정책을 폈지만(예-1985년 플라자합의), 무역적자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합니다.왜 또다시 보편관세인가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트럼프 정책을 볼까요. 그는 11월 26일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내년 1월 20일 취임하자마자 “펜타닐과 불법 이민자의 침공이 멈출 때까지” 멕시코와 캐나다산 모든 제품에 25%, 중국에 10%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죠. 미국의 1, 2, 3위 교역국을 한꺼번에 겨냥했는데요. 관세를 협상 무기화한 겁니다. ‘관세 맞을래, 요구사항 들어줄래’라는 협박이 53년 전 닉슨의 정책과 매우 유사한데요.그때와 크게 달라진 건 미국의 교역 상황입니다. 1971년 미국의 상품 수입은 GDP의 3.4%에 그쳤지만, 지난해엔 12.7%에 달합니다. 그만큼 미국 경제의 수입 의존도가 높고 관세 영향이 크단 뜻이죠. 자칫 미국 기업, 소비자가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겁니다.게다가 주요 교역 상대국이 협박한다고 호락호락 말 들을 것 같지도 않죠. 중국은 이미 2018년 트럼프 1기가 관세를 올렸을 때 인민은행이 위안화 가치를 떨어뜨려서 관세를 무력화한 적 있습니다. 위안화가 지금보다 더 약해지는 것(즉, 미국 달러가 상대적으로 더 강해지는 것)은 트럼프의 희망 사항과 정반대되는 일이기도 합니다.물론 그걸 다 알고도 트럼프는 관세라는 무기를 쉽게 놓진 않을 겁니다. 이미 ‘보편관세’를 선거공약으로 외쳐 당선됐으니, 앞으로 다른 나라로 더 범위를 넓혀갈지도 모르죠. 그 나라를 협상장에 앉히기 위해서라면 말입니다.그리고 관세는 정치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미국 제조업을 살리고 일자리를 구한다’는 목표야 같지만, 대중에겐 바이든식 당근(보조금)보단 트럼프식 채찍(관세)이 더 소구하는 법입니다. 50여 년 전 닉슨 전 대통령 사례가 이를 입증해주죠. 참고로 트럼프는 1980년대부터 닉슨과 깊은 친분을 나눈 닉슨 팬이기도 합니다(둘의 성향이 많이 닮았죠).최근 여론조사도 이를 확인해 줍니다. 11월 중순 CB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 대해 응답자의 52%는 긍정적이라고 답했고요. 특히 트럼프를 찍은 유권자는 83%가 이를 선호했습니다. 경제학자들이 뭐라 하든(UBS ‘보편관세 10% 부과하면 물가 1.7% 상승’ 전망), 실제 무얼 얻어낼 수 있든, 관세는 정치적으로 좋은 무기입니다. 폴 크루그먼의 말대로 나쁜 경제 아이디어는 죽기를 거부하나 봅니다. 관세의 무기화라는 좀비 아이디어가 다시 활개 칩니다. By.딥다이브아직 취임이 50일 정도 남았지만 전 세계 경제계가 온통 트럼프 이야기만 하는 듯합니다. 관세 폭탄은 과연 터질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모든 수입품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보편관세. 이를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 경제에서 유일하게 부과한 사례가 있습니다. 1971년 8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입니다. -당시 미국은 무역적자의 원인이 강달러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10% 보편관세를 부과한 뒤, 교역 상대국에 달러 평가절하를 요구했죠. 4개월의 협상 끝에 마침내 스미스소니언 협정으로 목표를 달성합니다. -‘관세의 무기화’는 정치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닉슨은 재선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정작 달러 평가절하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면서 미국 경제는 심각한 침체를 겪었죠. 이제 다시 트럼프 당선인이 관세를 협상 무기로 꺼내들었습니다. 왜 나쁜 경제정책은 죽지 않고 살아날까요. *이 기사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자산이 99조원에 달하는 아시아 2위 부자인 인도인이 있습니다. 바로 가우탐 아다니(Gautam Adani). 인도 아다니 그룹의 창립자이자 회장이죠. 무케시 암바니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 회장(순자산 134조원)과 함께 인도 경제를 대표하는 거물인데요.이 아다니 회장이 미국 연방 검찰과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의해 기소당했습니다. 혐의는 뇌물 공여와 증권 사기. SEC는 아다니 회장에 대한 소환장을 발부했죠.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솔직히 놀랍지 않지만, 이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일지가 궁금합니다. 아다니의 뇌물스캔들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자수성가의 신화. 비결은 친구?10년 전만 해도 인도 3대 대기업 하면 타타그룹·릴라이언스그룹·비를라 그룹이 꼽혔습니다. 각각 1868년, 1958년, 1857년 설립된 전통 있는 기업들이었죠. 1988년 설립된 아다니 그룹은 그때만 해도 아직 인도에서 10위권 안팎에 머물렀는데요.이제 아다니는 인도 경제를 얘기할 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3대 대기업이 됐습니다. 항만·광산·공항·발전소·에너지·시멘트·부동산을 포함하는 거대한 제국이죠. 아다니는 인도 최대 민간 전력기업이자 최대 태양광 발전단지 운영업체이고, 인도에서 두 번째로 큰 시멘트 제조사입니다. 아다니의 13개 항구는 인도 컨테이너의 거의 절반을 운송하고, 7개 공항은 매년 9000만명 이상이 이용합니다. 인도에서 가장 긴 고속도로 건설과 인도의 가장 큰 빈민가 재개발을 하는 기업이기도 하죠.작은 직물상의 아들 가우탐 아다니는 어떻게 자수성가로 인도 경제를 대표하는 거물로 성장했을까요. 무역업체로 시작된 아다니 그룹이 도약 발판을 마련한 건 1995년. 구자라트주 정부로부터 문드라 항구 운영 계약을 따내면서부터입니다. 당시 문드라는 작고 오래된 적자투성이 항구였습니다. 하지만 아다니 회장은 직관적으로 항만사업이 돈이 된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500명 넘는 개인 토지 소유자와의 협상 끝에 주변 습지와 목초지를 사들이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해 항구를 대폭 확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문드라 항구가 이젠 인도 최대의 민영 항구로 성장했죠.성장 궤도에 오른 아다니 회장은 그의 생애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만납니다. 바로 나렌드라 모디, 현 인도 총리이죠. 2001년 모디가 구자라트 주지사로 취임한 뒤, 아다니는 구자라트주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약속하며 모디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합니다. 이에 모디도 2003년 문드라를 경제특구(SEZ)를 지정하며 아다니 그룹에 날개를 달아줬죠. 20년 넘게 끈끈하게 이어지는 모디-아다니 파트너십이 탄생합니다.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 있죠. 2014년 선거 승리로 총리직에 오르게 된 모디가 비행기에 올라타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는 장면인데요. 그 옆에 ‘adani’ 글자가 또렷하게 보입니다. 선거 기간 내내 모디가 이용했던 아다니의 개인 제트기였죠.모디 정부에서 아다니의 사업 무대는 한층 넓어지고 확장엔 불이 붙습니다. 국가 계약·허가가 필요한 항구·공항·발전소 같은 인프라 분야에서 아다니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죠. 인프라와 신재생에너지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는 모디의 경제정책 방향은 아다니 그룹 포트폴리오와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정부 규제도 아다니 편이었죠. 2018년 정부가 공항 소유권 규제를 풀자마자 아다니는 단숨에 7개 공항 운영권을 확보하게 됩니다.모디의 총리 취임에 맞춰 아다니는 글로벌 확장에도 시동을 겁니다. 스리랑카·말레이시아·방글라데시·베트남 같은 아시아는 물론, 탄자니아·케냐·이스라엘까지. 각종 해외 인프라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는데요. 인도 언론 스크롤에 따르면 아다니의 이런 글로벌 사업 대부분이 모디 총리가 그 나라를 방문하거나 그 나라 지도자와 만난 지 몇 달 안에 양해각서가 체결됐습니다. 참 절묘한 타이밍이죠.모디 정부와 아다니 그룹의 유착관계를 두고 인도 야당은 ‘정실 자본주의’라며 비난합니다. 특히 2022년 아다니가 정부 비판 매체였던 NDTV(뉴델리TV)를 적대적으로 인수한 건 정경유착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데요(물론 인수 뒤 NDTV의 논조는 180도 달라짐).솔직히 이런 정경유착, 한국 경제에서도 꽤 오랫동안 고질적인 문제였어서 그리 놀랍진 않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했던 바죠. 문제는 아다니 그룹이 그동안 너무 빠르게 성장하는 바람에 이제 글로벌 시장이 주목하는 인도 대표 기업이 되어버렸단 점입니다. 굵직한 인프라 사업을 벌이다 보니, 해외 자금 의존도가 높기도 하고요. 그만큼 보는 눈이 많아진 겁니다.2년 전 힌덴버그발 충격 있었지만2022년 말, 무섭게 뛴 아다니 그룹 주가는 천장을 뚫을 기세였습니다. 그룹의 중심인 아다니 엔터프라이즈 주가가 2년 반 만에 30배로 치솟았으니까요. 그 시기 가우탐 아다니 회장은 제프 베저스 아마존 창업자와 세계 2위 부자 자리를 두고 겨룰 정도의 거물이 돼 있었습니다.그리고 2023년 1월, 미국 공매도 투자업체 힌덴버그 리서치의 100쪽짜리 보고서가 아다니 제국을 강타합니다. 아다니 그룹이 “수십년간 뻔뻔한 주가조작과 분식회계에 관여했다”는 내용이었죠. 주가는 폭락했고 한 달 만에 그룹 시총의 76%, 1500억 달러나 날아갔습니다. 인도 증시 전반을 휘청거리게 만든 엄청난 충격이었는데요.더 놀라운 건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아다니 그룹은 힌덴버그 주장을 전면 부인하고 413쪽짜리 반박 보고서를 내며 역공을 펼칩니다. 인도 집권여당도 ‘외국 자본의 부당한 간섭’이라며 비판에 열을 올렸죠. 인도 투자자들의 민족주의적 투자+저가 매수 움직임도 가세했습니다. 그 결과 주가는 상당 부분 회복됩니다.인도증권거래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했지만, 올해 7월 되레 힌덴버그가 보고서를 “고의적·선정적으로 왜곡했다”며 부정거래 혐의로 제소했죠. 아다니에 대해선 아직 아무 조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잠시 떠들썩했던 힌덴버그와의 싸움은 사실상 아다니의 판정승으로 끝나고 묻히는 듯했습니다.“아다니 회장을 뇌물 공여로 기소한다”이제 투자자들 기억에서 힌덴버그 보고서 기억이 희미해지던 지난주. 미국 뉴욕동부 연방 검찰청의 수요일 오후 발표가 바다 건너 인도의 목요일 새벽을 깨웁니다. “인도 대기업 회장과 7명의 고위 기업 임원을 뇌물 공여와 증권사기 혐의로 형사기소한다”는 내용이었죠. 공개된 피고인 명단 맨 위가 가우탐 아다니였습니다.기소장 내용은 구체적입니다. 아다니그룹의 두 재생에너지 기업(아다니그린에너지와 애저파워글로벌) 최고경영진들은 지난 4년 동안 태양광 에너지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인도 정부 관리들에게 2억6500만 달러(약 3700억원)의 뇌물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정부가 시장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전기를 구매해 주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두 기업은 미국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을 때, 회사가 뇌물방지 원칙을 준수한다고 거짓말했습니다.미국 법에 따르면 미국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외국기업이 해외에서 뇌물을 주는 건 불법이고요. 미국 투자자들에게 허위 진술로 자금을 모으는 것도 불법입니다. 인도 기업이 인도에서 저지른 뇌물공여 사건이 미국 사법기관 관할인 이유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유죄판결을 받으면 수년간 감옥에 갇히게 될 겁니다.아다니 그룹은 쑥대밭이 됐습니다. 이 발표 이후 아다니 엔터프라이즈 주가는 20%, 아다니그린에너지는 30% 넘게 급락했죠. 그룹 계열사는 임박했던 6억 달러 규모 채권 매각을 취소해야 했습니다. 그룹 측은 미국 검찰 기소가 “근거가 없고 우리는 모든 법률을 완벽하게 준수한다”고 혐의를 전면 부인했는데요. 하지만 상대는 무려 미국 검찰입니다. 기소의 여파가 전 세계적일 수밖에요.가장 먼저 움직인 건 케냐입니다. 미국 검찰 발표가 나오자마자 케냐 대통령이 아다니 그룹과 맺었던 공항 확장, 송전설 건설 계획을 전면 취소했죠. “부패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서요.프랑스 기업 토탈에너지SE는 24일 발표한 성명에서 “결과가 명확해질 때까지 아다니 그룹에 대한 새로운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밝힙니다. 이 기업은 아다니그린에너지의 주요 주주이자 합작투자 파트너이죠. 아다니 그룹의 해외 자금줄이 막히기 시작한 겁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이번 사태가 “그룹 신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경고도 내놨죠.결정권은 트럼프 법무부에?자, 그럼 이제 어떻게 될까요. 미국 SEC가 아다니 자택으로 소환장을 발부했다는데요. 설마 이대로 아시아 2위 부자가 미국에서 체포되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을까요.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은 작아 보입니다.일단 아다니가 제 발로 미국 검찰에 출두할 리야 없고요. 남은 방법은 미국 법무부가 범죄인 인도 절차에 돌입하는 건데요. 물론 인도 정부가 설마 순순히 아다니를 넘겨주지도 않겠지만, 더 중요한 건 지금 미국이 대통령 교체기라는 점입니다. 아다니의 인도를 요구하느냐 마느냐, 기소를 유지하느냐 마느냐 결정이 내년 출범할 트럼프의 법무부에 달려있죠.트럼프 대통령 당선자 입장에선 이 얼마나 좋은 협상카드인가요. 아마도 인도와 거래할 기회로 볼 겁니다. 안 그래도 인도는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국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니까요. 아다니 회장도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2주 전 그는 X를 통해 “미국의 에너지 안보와 인프라 프로젝트에 100억 달러를 투자하고 최대 1만5000개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공개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웬 깜짝 발표인가 싶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미국 검찰 발표에 앞서 선수 친 거였죠. 미국 싱크탱크 윌슨센터의 남아시아 연구소 소장인 마이클 쿠겔만은 이렇게 내다봅니다. “트럼프는 아다니를 동맹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를 칭찬하고 모디와 친하며 미국에 투자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한 동료 사업가니까요.”물론 아다니 그룹의 해외 사업 야망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해외 자금 조달에서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죠. 그렇다 해도 아다니가 인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당장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인도 경제의 너무 많은 부분이 아다니가 진행 중인 각종 개발 프로젝트에 달려있기 때문이죠. 이미 인도에서 아다니는 ‘실패하기엔 너무 큰’ 존재입니다.더 크게 흔들리는 건 경제보단 정치입니다. 이미 야권지도자 라훌 간디는 “총리가 부패에 연루돼 있다”며 모디 총리를 맹공격하고 나섰고요. 25일에도 야당 지지자들은 뉴델리 국회 앞에서 “모디와 아다니는 하나”, “모디의 우정이 나라를 거덜 낸다”며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쉽사리 잦아들 사건이 아닌 듯한데요.기업친화적 정책을 기반으로 한 인도 경제의 고도성장은 모디 총리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꼽혀왔죠. 하지만 이제 그 성장의 밝음에 가려졌던 부패와 정경유착의 짙은 그림자가 그를 덮치고 있습니다. 모디 총리는 어떻게 정치적 난관을 돌파할까요. 모디와 아다니의 20년 우정이 이제 정치적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By.딥다이브가우탐 아다니 회장은 두차례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인물로도 유명하죠. 1998년엔 차에 탄 채 무장 괴한에 납치됐었고, 2008년엔 뭄바이 호텔에서 테러리스트의 인질로 잡혔었는데요. 어쩌면 이번이 그의 기업인 인생에 있어선 가장 큰 위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시아 2위 부자, 아다니 회장은 창업 30여년 만에 경제계 거물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공격적인 기업 확장 배경엔 지난 20여년 동안 모디 총리가 있었습니다.-무섭게 성장한 아다니 그룹은 2023년 1월 공매도 세력 힌덴버드 리서치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비호와 인도 투자자의 지지 속에 아다니는 큰 충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엔 미국 검찰이 나섰습니다. 뇌물 공여 혐의로 아다니 회장을 기소하며 소환장을 발부했습니다. 다만 그가 체포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이는데요. 대신 아다니 그룹의 거침 없는 해외 확장에 제동이 걸리고, 공고했던 모디-아다니 파트너십에 균열이 생길지도 모릅니다.*이 기사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가부채 디폴트를 낸 나라. 선진국에서 한순간에 ‘망한 나라’로 전락해 조롱받던 나라. 어디인지 아시겠죠. 바로 그리스입니다.그리스 경제가 10여 년 만에 되살아났다는 얘기 들어보셨을 겁니다. 요즘 그리스는 유로 경제의 최고 모범생으로 칭찬받죠. 그럼 그리스는 어떻게 기적적으로 부활했을까요. 뼈를 깎는 긴축정책이 경제를 살린 걸까요. 흔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진짜 그리스 경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좀 다른데요. 오늘은 그리스의 반전 경제학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었다먼저 과거를 좀 돌아볼게요. 2001년 유로존 가입 이후 한동안 그리스 경제는 초호황을 누렸습니다. 통화가 유로화로 바뀐 덕분에 그리스 경제력엔 맞지 않게 조달금리가 확 낮아졌거든요(6~7%→3~4%). 정부는 빚내서 공공지출 늘리기 바빴습니다. 무상 의료와 후한 연금제도도 국가부채를 키웠고요. 부동산 시장엔 대규모 투기 붐이 일어납니다.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2004년 아테네 올림픽도 치렀죠.하지만 파티는 갑자기 끝났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집니다. 경제를 떠받치던 관광·해운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고, 투자자들은 부채비율 높은 그리스에서 발을 빼기 바빴죠. 거품이 빠르게 꺼졌습니다.경기침체로 나라가 뒤숭숭했던 2009년 9월, 선거 유세에서 당시 제1 야당 대표였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는 역사에 남을 유명한 발언을 합니다. “돈이 있습니다.” 재정적자가 심각하다고 그리스 경제가 손가락질당하던 상황에서 ‘그거 해결할 돈 있거든’이라며 자신감을 보인 건데요.그렇게 경제회복 열망에 힘입어 총리직에 오른 파판드레우. 취임 몇주 만에 전 세계를 경악케 할 깜짝 자백을 합니다. 집권하고 나서 까보니, 국가 통계가 완전히 엉터리였다는 거죠. 실제론 재정적자가 기존 발표치의 몇 배라며 통계를 수정 발표해 버립니다(GDP의 3.7%→12.7%로 수정, 나중에 15.4%로 최종 정정됨).있는 줄 알았던 돈은 없다, 외부 수혈 없인 버틸 수 없다는 게 드러난 건데요. 결국 2010년 4월 파판드레우 총리가 아름다운 카스텔로리조 항구를 배경으로 유럽연합(EU)·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고 발표합니다. “침몰할 준비가 된 배”처럼 보이는 그리스는 “명예와 신용이 없는 나라”가 됐다면서 말이죠. 그리스 경제사의 굴욕적인 순간입니다.이것이 총 세 차례(2010년, 2012년, 2015년)에 걸쳐 집행된 3200억 유로(약 471조원) 구제금융의 시작이었습니다. 구제금융 대가는 혹독했죠. IMF와 EU는 뼈를 깎는 듯한 긴축을 요구합니다. 공공병원은 문을 닫고, 공무원은 해고되고, 임금과 연금은 3분의 1이 깎이고, 세금은 치솟았습니다. 기업과 은행이 줄줄이 폐업했고, 실업률은 30%에 육박했고, 특히 청년(15~24세) 실업률은 54%로 뛰었죠. 이 기간 그리스 실질 GDP가 4분의 1이나 사라졌을 정도인데요. 이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의 타격이었습니다. 1930년 미국 대공황과 맞먹는 정도였죠.먹고 살기 어려워진 국민은 가혹한 긴축안에 분노했고, 나라는 총파업과 시위로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2015년 이런 분노를 바탕으로 집권한 포퓰리즘 정당(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은 EU를 상대로 벼랑 끝 전술을 펼쳤죠. 긴축을 요구하는 구제금융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부결을 이끌어냈고요. 채무 탕감 안 해주면 ‘디폴트+유로존 탈퇴’로 가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한 건데요. 하지만 이럴수록 EU 다른 국가는 더 완고해졌고, 결국 그리스는 백기를 들고 맙니다. 전보다 한층 더 혹독한 긴축 요구를 담은 추가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여야 했죠.너무 독한 약을 썼다국제 채권단(EU와 IMF)의 그리스 경제 신탁통치 체제는 2018년 8월에야 막을 내립니다. 무려 8년에 걸친 고난의 행군은 일단락됐는데요.그렇다고 그리스 경제가 아직 제대로 살아난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간신히 링거 바늘 빼고 입원실에서 퇴원하는 수준이었죠. 당시 국가부채는 GDP의 180%에 달했고(EU 최대), 실업률은 20%에 육박했고, 국가 신용등급은 B+(22단계 중 14번째)의 투자부적격 등급이었으니까요.하지만 이즈음엔 채권단도 깨달았습니다. 독한 약(가혹한 긴축)의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것을요. 재정적자라는 급한 불은 껐지만, 구조적 개혁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오히려 약자의 희생만 키웠기 때문입니다. IMF에서 그리스 구제금융을 담당했던(그래서 그리스에서 엄청 미움을 받았던) 폴 톰센은 2019년 이런 반성을 담은 연설을 합니다.“우리(IMF)는 조정(긴축)이 성장에 비우호적이고 지속 불가능한 방식이란 우려를 점점 느꼈습니다. 지출은 잠재 성장과 기본 공공서비스 제공을 방해하는 수준으로 삭감됐습니다. 우리는 재정통합이 GDP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특히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으로 인해 노동자에 과도한 부담을 줬고, 그 결과 프로그램(구제금융안)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었습니다.”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을 이끌었던 장클로드 융커 전 EU 집행위원장도 2022년 인터뷰에서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 시민들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 끔찍한 기간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고,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그리스 사회에 부과된 조치는 너무 엄격했습니다. 실수의 일부는 유럽 연합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IMF, 중앙은행, 그리고 제가 몇 년 동안 위원회에서 맹목적인 긴축 예산을 시행했기 때문이죠. 그것은 실수였습니다.”긴축의 부작용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세금 분야입니다. 그리스 경제가 위기에 빠진 이유로 복지정책과 국유화를 많이 꼽지만, 그 못지않게 심각했던 문제가 탈세였죠. 자영업자 비중(32%)이 워낙 높은 영향인데요.이런 상황을 바로잡지 않고 긴축을 위해 세율을 대폭 높이자 어떻게 됐을까요. 가뜩이나 낮았던 세금 징수율이 뚝 떨어집니다(2010년 65%→2017년 41%). 고소득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탈세를 한 거죠. 그렇게 부자들은 이리저리 빠져나간 반면, 저소득 노동자는 실업과 최저임금 삭감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그리스 경제의 기적이 시작됐다2019년 그리스 국민은 더 이상 포퓰리즘 정당에 표를 몰아주지 않았습니다. 성장을 외치는 친기업 성향의 중도우파 정당을 선택했죠.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매켄지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가 총리에 오릅니다.그리고 지난 5년간 그리스가 이룬 변화는 놀랍습니다. 전 세계가 ‘그리스의 기적’이라며 찬탄하죠. 일단 지표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볼까요. 그동안의 성과는 이렇습니다.EU 국가 중 실업률이 가장 빠르게 감소했습니다(18→9.3%).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이 가장 크게 감소했습니다(207→153%).임금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평균임금 5년간 20.2% 인상).개인 소비 증가율이 유럽 평균보다 높습니다(23.4%).1인당 실질 GDP가 5년간 7.7% 증가해 EU 평균(3.3%)을 크게 웃돕니다.팬데믹에서 벗어난 2021년부터 관광업이 살아나면서 그리스는 3년 연속으로 양호한 성장률(2021년 8.5%, 2022년 5.6%, 2023년 2.0%)을 기록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데이터센터를, 화이자가 연구개발 허브를 그리스에 구축 중이기도 하죠. 떠났던 투자자가 다시 돌아오고, 소득과 소비가 살아나고, 재정건전성은 강화되고 있습니다.2019년부터는 빚도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몇 차례 조기 상환 끝에 IMF 대출금은 전액 상환했고요. 유로존 국가에서 빌린 ‘그리스 대출 기구(GLF)’ 대출금도 올해 말이면 다 갚을 거라고 합니다. 내년엔 만기가 아직 많이 남은 장기부채 중에서도 50억 유로어치를 조기 상환한다는 계획도 밝혔죠.모두가 회생이 쉽지 않다고 봤던 그리스 경제가 놀랍게도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경제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선거에서 미초타키스 총리는 각종 정치적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재집권에 성공했고요. S&P와 피치는 그리스 국가 신용등급을 12년 만에 ‘투자 적격’으로 올렸습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2023년 올해의 국가’로 그리스를 선정했죠.성장을 위한 경제학자, 그럼 미초타키스 정부는 그리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요. 고통스러운 긴축도, 포퓰리즘도 모두 아닙니다. 대신 이런 걸 했습니다.①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합니다.그리스는 2019년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최저임금을 인상했습니다. 그 결과 월 650유로(약 96만원)였던 최저임금이 830유로(약 122만원)로 28% 인상됐죠. 이 기간 물가상승률(16%)을 크게 웃도는 겁니다. 구제금융 기간 긴축을 한다며 최저임금을 싹둑 삭감했던 것과 비교하면 극적인 변화인데요. 그리스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생산된 부가 정의에 따라 분배돼야 하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인상합니다. 선거 전 공약한 대로, 재정 안정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2027년까지 최저임금을 950유로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여기서 이렇게 반문할 분 많을 겁니다. 최저임금 인상? 그거 부작용 큰 퍼주기 정책 아니야?한번 봅시다. 보통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논리가 뭘까요. 임금이 올라가면→고용주 부담이 늘어나니까→고용이 감소하고 실업이 늘어날 거라고 보기 때문이죠.그런데 그리스에서 실제 나타난 경제학 작동방식은 달랐습니다. 이 기간 고용은 50만명 늘어났고, 실업률은 꾸준히 감소했죠. 최저임금을 받는 저임금 계층의 살림살이는 나아졌고요. 저소득가구는 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에 늘어난 소득이 소비 증가로 쉽게 이어지는 법입니다. 이로 인해 소비가 살아나고 물가도 적당히 뛰면서 GDP 증가에 기여했죠. 최저임금 인상이 가져온 선순환입니다.사실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 감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작다’는 건 데이비드 카드 미국 UC버클리대 교수가 1992년 연구에서 밝힌 바 있죠. 이 연구는 그에게 2021년 노벨경제학상까지 안겨줬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최저임금 인상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주장이 완전히 엇갈리는 뜨거운 주제입니다.그래서 IMF도 그리스가 최저임금을 인상한다고 했을 때 많이 우려를 표했습니다. FT의 마틴 울프 칼럼니스트는 “정책의 후퇴는 위협”이라며 경고했죠. 하지만 그리스는 정부위원회에 참여한 런던정경대 연구팀 조사 결과를 신뢰했습니다. 당시 연구팀은 “최저임금의 신중한 인상은 임금 불평등 감소에 도움이 되고, 노동 수요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정도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제로 그랬습니다.②법인세를 포함한 세금을 깎아줍니다.그리스 경제정책의 또 다른 큰 축은 감세입니다. 위기 시절 그리스는 재정 흑자를 위해 법인세를 대폭(20→29%) 끌어올렸는데요. 미초타키스 총리는 취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법인세율을 22%까지 끌어내립니다.그뿐 아니라 배당소득세 인하(10→5%) 등, 긴축 시절 인상됐던 50가지 세금을 이미 없애거나 내렸는데요. “점진적이면서도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한 감세는 우리의 핵심 선택”이라고 미초타키스 총리는 말합니다. 기업 활동을 장려하고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린다면, 세율을 낮춰도 세수는 오히려 늘어난다는 거죠.이렇게 세율을 대폭 낮추는 동시에 그리스 정부가 집중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탈세와의 싸움입니다. 전자송장 의무화, POS 사용 확대 같은 ‘거래의 디지털화’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죠. 마치 과거 한국이 ‘신용카드 소득공제’ 정책으로 지하경제를 줄였던 것과 비슷한 발상인데요. 실제로 이런 조치의 세수 증대 효과가 쏠쏠하다고 합니다. 만약 세금 누수를 더 단단히 틀어막을 수 있다면 지금은 24%나 되는 부가가치세까지 인하할 수 있을 겁니다.어떠신가요. 최저임금 인상과 세금 인하의 결합이라니.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를 당혹스럽게 하는 정책 조합인데요. 달리 보면, 가혹한 긴축은 없었지만 재정적인 책임감을 가졌고요. 불평등을 바로잡으면서도 포퓰리즘으로 빠지진 않았습니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어떻게 경제를 살릴지에만 초점을 맞췄죠.미초타키스 총리는 올 2월 이코노미스트 기고문에서 “경제에 있어서 우리는 성장에 집중했다”고 말합니다. “포퓰리즘에 맞서는 것은 공평한 경제 성장을 창출하는 것과 관련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 정치가 휩쓸고 있는 전 세계에 그리스 경제 부활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By.딥다이브그리스 경제에 대해 ‘어떻게 망했는지’는 자세히 다루면서, 정작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있는지’는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더군요. 이젠 부활의 스토리에도 집중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유로존 가입 이후 초호황기를 누렸던 그리스 경제는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고 고꾸라졌습니다. 국가통계 조작까지 겹치며 금융시장 신뢰를 잃었고, 결국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을 받아야했죠. -8년이나 이어진 긴축은 가혹했지만 구조개혁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고통은 가난한 자에 집중됐습니다. 이젠 당시 맹목적인 긴축을 요구했던 게 실수였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2019년 그리스 국민은 포퓰리즘 대신 중도파를 선택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과 법인세 감면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을 펼치면서 그리스 경제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있죠. 긴축도, 퍼주기도 아닌 경제 성장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이 기사는 2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노스볼트(Northvolt)라는 스웨덴의 전기차용 배터리 제조 스타트업을 아시나요. 모르는 분이 많을 듯하지만, 이래 봬도 ‘유럽 최대 배터리 제조업체’입니다. 아시아 기업이 점령한 배터리 시장에서 유럽의 자존심을 세워줄 희망으로 촉망받아온 기업이죠.이 노스볼트가 유동성 위기로 인해 파산 직전 상황에 놓였습니다. 동시에 이게 다 ‘중국 협력업체의 방해공작 탓’이란 음모론도 파다한데요. 단순히 ‘캐즘의 저주’라고만 보긴 어려운 노스볼트 추락 스토리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현금 바닥났다, 파산 위기올해 초만 해도 노스볼트는 순항 중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2021년 말 첫 번째 배터리셀 생산으로 유럽을 설레게 만들었던 이 기업은 스웨덴 기가팩토리 규모를 4배로 확장하기 위한 공사에 한창이었죠. 독일과 캐나다에서도 새 배터리셀 공장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EU와 독일 정부로부터 10억 유로, 캐나다와 퀘벡주 정부에선 20억 달러를 지원받기로 했죠.조만간 IPO(기업공개)에 나설 거란 소식도 있었습니다. 시장에선 기업가치가 200억 달러(약 28조원)에 달할 거라고 기대했죠. 폭스바겐·골드만삭스·BMW와 스웨덴 연기금을 대주주로 둔 이 배터리 제조 기업은 유럽에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받아놓은 주문량만 550억 달러어치(약 77조원)에 달할 정도였죠. 앞날이 창창한 ‘될성부른 떡잎’으로 여겨졌습니다.하지만 몇 달 전,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순수 유럽 혈통’ 배터리 업체라는 허울에 가려졌던 적나라한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축구장 70대 크기라는 스웨덴 셸레프테오 공장의 배터리셀 생산량이 터무니없이 적었습니다. 연간 예상 생산량이 16GWh(기가와트시)인 공장이 지난해 실제 공급한 배터리셀은 80MWh(메가와트시). 고작 200분의 1에 그쳤죠. 그만큼 생산라인이 엉망이고 수율(정상제품 비율)이 형편없단 뜻입니다. 주문은 넘쳤지만, 고객사는 언제 배터리를 받을지 기약이 없었죠.주요주주인 BMW가 가장 먼저 손절에 나섰습니다. “인내심을 잃었다”며 6월 노스볼트와 맺었던 20억 달러 규모의 배터리셀 공급 계약을 해지하고, 삼성SDI로 갈아탔죠.7월 공개된 2023년 노스볼트의 연간 적자는 12억 달러. 전년의 4배로 불어났습니다. 여기저기 벌여놓은 공사는 산더미인데, 배터리셀을 제대로 만들어내질 못하니 현금이 빠르게 고갈됐습니다. ‘죽음의 골짜기’가 노스볼트에 닥친 건데요. 8월엔 미국 캘리포니아의 연구개발 자회사를 폐쇄했고, 이어 스웨덴의 양극재 생산시설을 닫습니다. 이러다 직원 월급도 내기 어렵겠다는 말이 나오던 9월엔 스웨덴 직원 4분의 1인 1600명 해고를 발표했죠. 스웨덴 공장 확장 공사는 중단됐고, 공사를 맡았던 건설 자회사는 파산 신청에 들어갑니다.그리고 11월. 현금이 바닥난 노스볼트는 이제 생존이 위태로울 지경입니다. 스웨덴 정부가 나설 거란 기대도 꺾였죠. 이 나라 재무부 장관은 15일 “노스볼트를 정부가 소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현지 언론은 노스볼트가 미국에서 챕터11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전합니다.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이번 주가 고비란 보도도 이어집니다. 유럽 전기차 산업에서 희망의 등불로 통했던 노스볼트 불꽃이 이대로 사그라지는 걸까요.중국 기업에 사기 당한 스웨덴?“광범위한 산업적 ‘기후 역풍’에 대응해야 합니다.”지난 9월, 노스볼트 CEO 피터 칼슨은 대규모 정리해고를 발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가 어려워진 이유를 전 세계적인 전기차 수요 둔화로 돌린 거죠.그런데 냉정히 따져보면 그건 핑계일 뿐입니다. 노스볼트 위기는 주문이 줄어서가 아니라, 배터리 생산을 빨리 늘리지 못했기 때문이니까요. 도대체 왜 첫 번째 셀을 생산한 지 3년이 다 되도록 여태껏 생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지가 핵심입니다.노스볼트가 매일 뉴스 헤드라인에 오르는 스웨덴에선 이와 관련해 특히 관심을 끄는 주장이 있습니다. 바로 이게 다 노스볼트 1공장의 장비 공급을 맡은 중국 기업 ‘우시리드(Wuxi Lead)’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지난 9월 이런 주장을 처음 펼친 건 스웨덴의 작가이자 유명 블로거인 라스 윌더란그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제보라며 이렇게 공개했죠.“노스볼트는 중국 우시리드로부터 배터리 제조 장비를 구입했지만, 배송된 문서는 일부 지워져 있었습니다. 스웨덴 현장에서 장비를 사용하려면 우시리드의 중국 작업자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장비에 대한) 지식 전달이 부적절했습니다.”그리고 이런 주장을 덧붙입니다. “우시리드는 처음부터 사업을 방해했습니다. 그 의도는 노스볼트를 파산시켜 중국 기업이 이를 매입하게 하는 것으로 의심됩니다.” 즉 “순진한 스웨덴인”이 중국 기업에 일종의 사기를 당했다는 음모론이었습니다.물론 그의 글 어디에도 구체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 공산당과 손잡은 중국 기업의 유럽 시장 장악을 위한 음모’라는 해석은 꽤 설득력이 있었나봅니다. 스웨덴 언론도 이 주장을 받아 확대 재생산했죠. 스웨덴 경제잡지 아파르스발든(affarsvarlden)은 전현직 노스볼트 직원을 인용해, 우시리드가 초래한 현장 혼란을 자세히 전합니다.“기계 작동용 메뉴는 중국어였어요. 우린 기계 작동법을 이해하려고 구글 번역을 사용해야 했죠. 현장엔 중국인 근로자가 수백명이었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기계가 중국산이었는데 결함이 많았어요. 기계 전체가 집 차고에 있을 법한 전선으로 제작돼 결코 작동할 수 없었죠. 중국산 장비는 표준 이하에요.”불량 장비? 구매 프로세스가 엉망!중국 협력업체가 노스볼트를 파괴했다는 소문은 점점 더 구체성을 띠며 퍼져나갔습니다. 급기야 우시리드 담당자가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해야 했을 정도이죠.(“우리가 (장비 사용법을)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았단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겁니다.”)자, 여러분이 보기엔 어떠신가요. 중국이 유럽의 배터리 야망을 훼방 놓기 위해 일부러 노스볼트를 망쳤다는 해석, 그럴듯한가요.그런데 궁금합니다. 우시리드는 CATL은 물론 테슬라와 폭스바겐에도 장비를 공급한 이 분야 선두 기업인데요. 사업을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고객사를 그렇게까지 방해할 수가 있을까요. 또 만약 그런 조짐이 보였다면 노스볼트 측이 얼마든지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당연히 스웨덴에선 이런 논쟁이 크게 일었고,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스볼트 자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에 대한 전현직 직원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오는데요. 먼저 레딧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AMA)’ 게시판에 익명의 노스볼트 엔지니어가 올린 답변을 볼까요.일단 우시리드와의 협업에 문제가 많았던 건 사실입니다. 특히 전선을 포함한 장비 품질 문제가 심각했죠. 하지만 그 진짜 원인은 엉망진창인 노스볼트의 조달 프로세스에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노스볼트는 우시리드에 형편없이 작성된 모호한 사양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우시리드)은 충분히 좋다고 생각하지만, 유럽에선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저렴한 전선을 설치했죠. 노스볼트 직원은 장비 허가를 위해 중국으로 가서 이를 확인하고도 ‘배송 가능’으로 서명합니다. 마감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쨌든 승인한 거죠.”그는 나머지 각종 문제-도면 등을 문서로 주기를 꺼리고, 매뉴얼 번역이 엉망이고, 영어가 잘 통하지 않은 것-가 있지만, 기업 문화 차이+영어실력 부족 때문이지 ‘음모’까진 아니라고 봤습니다.유럽 매체 ‘더 로컬’과 인터뷰한 직원 반응도 이와 비슷합니다. “노스볼트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계약서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습니다. 계약서는 아무 가치도 없었죠. 실제로 무엇을 공급해야 하는지, 일정과 요구사항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중국 기계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들(노스볼트 경영진)이 진짜 기술적 실사 없이, 모든 것을 엉성하게 조립했기 때문이죠. 그저 끔찍하게 잘못 관리한 겁니다.”거품이 초래한 비현실적 야망의 결말과연 중국이 노스볼트를 차지하기 위한 큰 그림이 있었는지, 그 음모론을 확인하기란 어차피 불가능하니 넘어가고요. 가장 이상한 건 이 부분입니다. 노스볼트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페테르 칼슨(Peter Carlsson)는 구매 전문가입니다. 소니 에릭슨과 NXP반도체에서 구매를 담당했고, 창업 직전엔 테슬라의 공급망 책임 임원으로 일했죠. 그런데 왜 노스볼트는 구매에 있어서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실패했을까요.FT는 노스볼트의 너무 빠른 성장과 경험 없고 무능한 임직원을 핵심 원인으로 지적합니다. FT와 인터뷰한 익명의 직원은 이렇게 말하죠. “전 이렇게 많은 관리자와 임원이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분야에 경험이 부족한 직원이 많아요. 관리자, 엔지니어, 생산직, 심지어 임원까지.”노스벨트 CEO 페테르 칼슨은 야망이 크고 대담하며 공격적인 스타일의 경영자입니다. 스웨덴 첫 공장의 배터리셀 양산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바로 캐나다와 독일에 공장을 추가로 짓겠다고 나섰습니다. 또 나트륨이온배터리와 항공기용 배터리 개발, 폐배터리 재활용으로도 나아갔죠. 너무 빨리, 많은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정작 생산 현장에선 경험 없는 인력들이 불량장비와 씨름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이 회사는 2년 경력의 25살 대졸자가 부서 책임자를 맡을 정도로 인력난이 심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합니다. 유럽에서는 다룬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과 공정이니까요.그럼, 노스볼트는 능력도 부족하면서 왜 그렇게 확장에만 열을 올렸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이 많다고 봤기 때문이죠. ‘유럽 최대 배터리 제조사’, ‘유럽 최초 배터리셀 생산’이란 화려한 타이틀 덕분에 그동안은 돈이 쉽게 따라왔습니다. EU나 독일과 캐나다 정부의 보조금, 각종 녹색 대출, 그리고 연기금 같은 기관의 투자까지 말이죠. 배터리셀을 잘 만드는 실력보다는 녹색투자 열풍의 한가운데 서있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겁니다.결국 과대포장된 일종의 거품이었습니다. 스웨덴 옌셰핑 국제경영대학원 교수인 크리스티안 샌드스트롬은 “정부가 녹색 버블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다”고 지적하죠. “노스볼트는 자본조달 대부분을 자기자본이 아닌 부채를 끌어들여 이뤘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기업엔) 아무 리스크가 없는 환경을 만들었죠. 터무니없지만, 정치 자본가(political capitalists)엔 기회였습니다.” By.딥다이브노스볼트의 위기는 한국 배터리 3사엔 기회가 될까요. 그런 해석이 없진 않지만, 노스볼트가 국내 장비 제조업체 여러 곳의 주요 고객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유럽 배터리의 희망이었던 노스볼트가 파산 위기에 처했습니다. 배터리셀 생산이 끔찍하게 부진한 탓에 납품이 지연되면서 현금이 바닥 났습니다. -생산 부진의 원인 중 하나는 중국산 불량장비로 인한 혼란입니다. 이를 두고 스웨덴에선 ‘중국 기업이 일부러 노스볼트를 망가뜨리고, 이를 인수하려고 한다’는 식의 음모론이 판칩니다.-하지만 노스볼트의 구매 프로세스의 허술함이 중국산 장비를 둘러싼 대혼란을 초래한 진짜 원인일지 모릅니다. 배터리셀 만드는데 집중하기보다는 너무 빨리 사업을 확장하려고만 한 비현실적 야망이 벽에 부딪혔습니다. 기업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는 비옥한 환경이 거대한 녹색 거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기사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폭스바겐 그룹. 연간 90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세계 2위 자동차 기업이죠. 이 폭스바겐의 위기가 요즘 독일 경제의 가장 큰 이슈입니다. 얼마 전엔 사상 처음 독일 공장을 폐쇄할 거라고 해 충격을 줬는데요.전기차에서 길을 잃은 폭스바겐이 반전의 카드를 꺼냈죠.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 리비안과의 합작 발표입니다. 뒤처진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리비안을 통해 한방에 만회하겠단 전략인데요. 이 파격적인 행보가 폭스바겐을 구할진 두고 봐야겠지만, 독일 경제엔 상징적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리비안과 손잡은 폭스바겐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비상 경영 중 나온 8조원 베팅폭스바겐, 요즘 어렵습니다. 자동차 판매가 줄고 영업이익이 급감하면서 비상 경영을 선언했죠. 올해 1~3분기 영업이익률은 고작 2%. 1937년 설립 뒤 87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 공장 10곳 중 최소 3곳을 폐쇄한다고도 밝혔습니다.왜 이렇게 어렵냐.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그동안 폭스바겐을 먹여 살려온 가장 큰 시장인 중국에서 판매가 급감했기 때문이죠. 중국에선 전기차, 특히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가 대세인데요. 폭스바겐은 여전히 내연기관차 중심이고, 경쟁력 있는(기술과 가격 모두에서) 전기차 모델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거대 독일 자동차 기업은 전기차 경쟁에서 한참 뒤처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6월 폭스바겐이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 리비안과의 합작에 50억 달러(약 7조원)를 투자한다고 밝혔을 때, 업계는 놀라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두 회사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윈윈’이란 점에서 말이죠.그리고 12일 폭스바겐은 리비안과의 합작회사 출범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총투자금은 58억 달러(8조1500억원)로 더 늘었고, 합작회사 CEO는 리비안 최고소프트웨어책임자(CSO)와 폭스바겐 최고기술책임자(CTO)가 공동으로 맡기로 했죠. 양사 엔지니어 1000명으로 구성될 합작사는 전기차 컴퓨터시스템(아키텍처)과 소프트웨어를 개발합니다. 이 기술을 탑재한 전기차는 리비안이 2026년, 폭스바겐이 2027년에 출시할 계획이죠.겉으로만 보면 이 거래는 절대적으로 리비안에 유리합니다. 돈은 모두 폭스바겐이 대고, 리비안은 기술과 지식재산권만 기여하니까요. 리비안은 그동안 전기 SUV와 픽업트럭이 제품력에선 호평받았지만, 연간 생산량이 고작 5만7000대 수준에 그쳐 심각한 적자에 빠져 있었죠. 현금이 바닥났던 리비안엔 단비 같은 투자입니다.달리 보면 폭스바겐에 이 거래가 그만큼 절실했단 뜻이죠. 폭스바겐은 전기차에서 발목을 잡아 온 결정적인 문제, 전기차용 소프트웨어 기술을 이 미국 스타트업에 맡기기로 한 겁니다. 소프트웨어 자체 개발이 어렵다는 걸 인정한 셈이죠. 리비안이 최근 석 달 만에 생산해 낸 프로토타입 전기차를 두고 폭스바겐 연구개발 책임자 마이클 슈타이너는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밤낮으로 일하더라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자동차에 이것을 설치하고 작동시킬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폭탄이 된 소프트웨어내연기관차가 수만개 부품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복잡한 기계장치라면, 전기차는 커다란 스마트폰에 모터와 바퀴를 단 것에 더 가깝습니다. 소프트웨어가 그만큼 핵심 중의 핵심인데요.그동안 폭스바겐 전기차 소프트웨어는 어땠을까요. 2019년 폭스바겐의 순수 전기차 ID.3는 출시와 함께 ‘실패작’으로 평가됐죠. 심각한 소프트웨어 오류로 인해 터치스크린은 종종 먹통이 되고, 이유 없이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가 하면, 잘못된 경고음이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는 소비자 보고가 쏟아졌는데요. 무엇보다 무선으로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할 수 없다는 점이 지극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업데이트하려면 딜러에 차를 맡겨야만 했죠. 참고로 테슬라는 2012년부터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제공했습니다.이어 2021년 출시된 전기 SUV ID.4는 이전보다 확실히 업그레이드됐지만, 여전히 소프트웨어 문제-스마트폰 연결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화면이 검게 변하거나, 주행 충 주차센서가 작동하거나-로 말이 많았습니다. 전기차 판매가 신통찮은 주요 원인이었죠. 소프트웨어 문제는 폭스바겐 그룹 프리미엄 브랜드의 발목도 잡았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서 아우디 Q6 e-트론, 포르셰 마칸 EV 같은 전기차 신모델 출시가 3년이나 지연됐죠.여기서 놀라운 건 폭스바겐이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투자에 소극적이었던 건 아니란 점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죠. 2020년 폭스바겐은 각 브랜드에 흩어져있던 엔지니어들을 모아 거대한 소프트웨어 자회사 카리아드(Cariad)를 설립했습니다. 그룹 안에 일종의 실리콘밸리 스타일 기업을 새로 만든 거죠. 당시 그룹 CEO 허버트 디스는 “소프트웨어 중심의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신하겠다”고 선언했고요. 카리아드를 ‘선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로 키우기 위해 ‘디지털 전문가’ 직원을 1만명까지로 늘리겠다고 약속합니다(현재 직원 수 약 6000명). 실제 테슬라 같은 미국 IT 기업 출신 엔지니어도 적극 영입했고요.그동안 폭스바겐이 자체 전기차 소프트웨어 구축을 위해 카리아드에 투자한 금액은 무려 120억 유로(17조8000억원)에 달합니다. 하지만 그룹을 위한 미래 기술을 자체 개발해 디지털 경쟁력을 끌어올린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카리아드는 그룹 내부에서 ‘시한 폭탄’으로 불리는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관료주의라는 함정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이 제기됩니다. 폭스바겐을 구원할 줄 알았던 카리아드는 어쩌다 구제 불능 문제아로 전락했을까요. 단순히 독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실력이 미국이나 중국보다 떨어져서는 아닐 텐데요(카리아드는 90개국 이상 국적의 엔지니어가 일한다고 자랑합니다).다양한 문제점이 제기되지만(예-부서 간 경쟁, 브랜드별 제각각인 요구사항, 최고경영자의 변덕 등) 가장 많이 지적되는 이유는 이겁니다. 폭스바겐의 지독한 관료주의. 전 카리아드 직원은 FT에 이렇게 말했죠. “카리아드엔 정말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있지만, 그들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건 결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인 문제입니다.”관료주의? 문화적 문제? 구체적으론 어떤 걸까요. 카리아드 직원을 직접 인터뷰하긴 어려워서 독일권 직장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카리아드 직원의 리뷰를 살펴봤습니다. 그중 몇 가지 눈에 띄는 걸 뽑아보면 이렇습니다.“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아닌 사람들이 소프트웨어에 대해 결정을 내립니다. 문화의 대부분이 폭스바겐과 아우디의 기존 경영진에 의해 정의됩니다. 그들은 오래된 공급업체와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테슬라를 이긴다고 얘기하죠.”“환상적인 워라밸입니다. 회사가 공룡의 속도로 돌아가기 때문에 저는 일주일에 10시간 정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젊은 엔지니어 경력엔 사형선고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업무가 거의 없고 관료주의가 너무 많습니다.”“최고경영진은 소프트웨어가 아닌 기계 제조 전공입니다. 많은 경직성과 레거시 프로세스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여러분은 그냥 하세요’라는 태도입니다. 작은 위험조차 감수하길 싫어합니다.”이것은 독일 경제의 위기인가물론 일부 직원이 익명으로 남긴 리뷰를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뭐였는지, 왠지 알 것만 같긴 하죠. 그런데 궁금합니다. 폭스바겐은 소프트웨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스타트업 스타일의 별도 회사까지 설립했잖아요. 그럼 좀 자율성을 주고 맡겨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요. 이와 관련해 독일의 경제 잡지 ‘매니저 매거진’ 분석에서 힌트를 찾았습니다. 이에 따르면 문제는 폭스바겐이 오래된 기계공학적 구조에 디지털 기술을 내장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소프트웨어 자체를 ‘살아있는 시스템’으로 보는 테슬라와는 애초에 접근법이 달랐죠. 하드웨어 중심의 낡은 사고의 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과거의 성공 공식에 갇혀 달라진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과연 폭스바겐 같은 내연기관 자동차 기업만의 문제일까요. 독일 싱크탱크 뮌헨연구소(ISF 뮌헨)의 안드레아스 보에스 대표는 기고문(‘카리아드의 실패는 독일의 약점을 보여준다’)에서 이것이 독일 경제 전반의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가장 뼈 때리는 건 이 문단이었죠.“새로운 산업생산 방식을 향한 역사적 패러다임 전환을 숙달하는 데 있어서 우리(독일)는 ‘개발도상국’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우리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것을 배웠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고 미래의 도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산업화 1단계에서 얻은 이점이 이제 2단계의 장애물이 되었습니다.”순탄한 결혼 가능할까이제 폭스바겐 그룹은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 대신 리비안과의 합작을 택했습니다. 카리아드라는 거대 폭탄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밝히지 않지만, 아마도 해체될 가능성이 커 보이죠.물론 폭스바겐과 리비안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순탄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폭스바겐 노동자 협의회 의장인 다니엘라 카발로는 이미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이것(리비안과의 합작투자)이 다음번 수십억 유로짜리 무덤이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이런 회의론이 그럴듯해 보이는 건 독일 자동차 제조사가 유독 다른 나라 기업과의 통합에 서툴렀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죠. 9년 만에 처참한 실패로 파경을 맞이한 다임러와 크라이슬러 합병(1998~2007년)이 그랬고요. 무려 4년에 걸친 이혼 소송전(국제중재 재판)을 벌였던 폭스바겐과 스즈키의 제휴(2009~2015년)도 있었습니다.그래도 아직은 허니문 기간입니다. 지금이야 기업문화의 차이조차 매력적으로 보이죠. 리비안 최고경영자인 RJ 스카린지는 폭스바겐이 리비안의 “빠르고 민첩하며 결단력 있고 관료주의적이지 않은” 업무문화를 합작법인에서도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아야 할 텐데요.폭스바겐은 리비안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고 전기차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을까요. 공장 폐쇄와 인력 구조조정으로 비용을 쥐어짜는 가운데도 쏟아붓는 58억 달러 투자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움직임이 독일 경제와 자동차 산업의 시대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By.딥다이브폭스바겐을 포함한 독일 자동차 업계에서 위기론이 나온다는 소식, 1년 전쯤 전해드린 적 있죠(). 그 사이에 위기는 더욱 현실로 다가왔고, 살길을 모색하던 폭스바겐이 파격적인 제휴에 나섰습니다. 이런 급박한 움직임을 보니, 정말 자동차 업계가 대격변기로구나 실감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유럽 최대 자동차 제조사 폭스바겐이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 리비안의 손을 잡았습니다. 전기차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합작회사 설립에 총 8조원을 투자합니다.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을 포기한 셈입니다. -이는 폭스바겐의 소프트웨어 자회사 카리아드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카리아드는 선도적인 소프트웨어 기업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그룹의 시한폭탄으로 전락했습니다. 폭스바겐의 지독한 관료주의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과거의 성공에 머무는 낡은 사고방식이 패러다임 전환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디지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게 변화의 시작 아닐까요. 독일 경제도, 전통 자동차 산업도 대전환기에 놓였습니다. *이 기사는 1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최근 두 달 만에 지수가 28% 수직상승한 주식시장이 있습니다. 코스피(-1.5%)는 물론 S&P500(7.2%)보다도 성과가 훨씬 좋은데요. 어디인지 아시겠죠. 바로 중국입니다. 극도로 부진했던 중국 증시가 연이은 경기 부양책 발표에 힘입어 빠르게 살아나고 있죠.하지만 지난 8일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발표는 투자자들을 실망시키기도 했습니다. 부동산과 소비 부양책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라는데요. 도대체 지금 중국 경제는 어디쯤 와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투자자라면 기대할 점, 조심할 점은 무엇일까요. 19년 차 중국 담당 애널리스트인 김선영 DB금융투자 연구원을 8일 만나 인터뷰했습니다.*이 기사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경기 부양책, 이 한 방이 나와야-9월 말 인민은행의 깜짝 발표를 시작으로 중국 정부가 연이어 경기부양책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 시점엔 중국 정부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나설 줄은 시장에서 아무도 몰랐었죠?“몰랐어요. 사실 중국은 이렇게 돈 풀고 경기부양을 한 지가 4년 이상 됐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돈이 잘 돌지 않았죠. 기업들은 ‘제2의 헝다가 되지 않겠다’면서, 대출을 받아도 고금리 채무를 갚아버렸고요. 개인 저축률은 여전히 43%로 높습니다. 1인당 가처분 소득이 올라가서 지갑에 쓸 돈이 있는데도, 쓰지 않고 저축해요. 왜냐면 불안하니까.즉, 소비·부동산·증시 부양책은 이전부터 나왔는데요. 9월 말부터 달라진 건 한꺼번에 이런 정책이 다시 다 나왔다, 그리고 이게 거의 매일 나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또 가장 중요한 건 시진핑 주석이 실수했을 때도 책임지지 않게 세 가지 면책 사항을 얘기했단 점이죠. ‘이젠 제발 하는 척만 하지 말고 제발 좀 해’라고 메시지를 준 건데요. 그래서 전 부처별로 경기부양 정책을 써 내려가는 과정입니다.”-전인대 상무위의 경기부양책 규모에 투자자 관심이 쏠렸죠. 금융위기였던 2008년엔 중국이 4조 위안의 부양 패키지를 내놨었는데요.“4조 위안은 당시 중국 GDP의 12% 정도였어요. 지금 GDP는 그때의 4배 가까이 되죠. 그 당시의 중국이 3개 더 생겼다고 보시면 됩니다. 만약 지금 GDP의 12%가 되려면 15조 위안 정도를 풀어야 해요. 조금 과하긴 하죠.저는 중국의 부양책 규모가 10조 위안 이상이냐 아니냐보다는 그 중 얼마나 소비쿠폰 발행으로 갈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중국은 물가가 너무 낮죠. 레이 달리오가 말한 ‘아름다운 디레버리징’, 중국이 물가 걱정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돈을 풀면서 부채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는 핵심시기입니다.”(8일 오후 늦게 발표된 부양책 규모는 5년간 10조 위안(1936조원)이나 됐지만, 이는 모두 지방정부 부채 해결용이었다. 소비쿠폰 발행 같은 소비 부양책은 나오지 않아 글로벌 투자자를 실망시켰다.)-소비자들이 나가서 바로 돈을 쓰게 만들려면 소비쿠폰이 가장 효과적일까요?“현금을 나눠주면 그냥 저금하거든요. 만약 70만원을 주면 100만원어치를 구매할 수 있는 유효기간 2년짜리 소비쿠폰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그런 식으로 바로 소비로 직결될 수 있게 하는 게 지금은 중요합니다.”-그렇게 소비를 살려서 디플레이션에 빠지는 것도 막고,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하겠군요.“시진핑이 2017년 10월 집권 2기를 시작할 때 뭐라고 했느냐. 앞으로 첫 번째 15년은 중산층을 늘리고 과학 기술력을 습득한다. 그리고 두 번째 15년은 국방과 우주에 투자해서 글로벌 넘버 1(GDP 기준 세계 1위)을 만들겠다고 했어요. 2047년이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100주년이거든요. ‘30년 뒤엔 세계 1등 할 거야’라고 지른 거예요. 1등(미국) 입장에선 기분 나쁘죠.미·중 무역분쟁은 이 30년의 싸움입니다. 누가 미국 대통령이든 앞으로 이 싸움은 계속될 거예요. 그럼 중국 입장에선 앞으로 계속 규제가 세질 텐데 살 길이 뭐가 있을까를 보니, 소비이죠. ‘우리는 14억 인구의 소비가 있구나. 그동안은 여기가 생산기지였는데 지금은 소비 기지구나’라는 겁니다.그래서 중국이 믿을 건 소비인데, 내수 부양을 해도 소비가 안 살아나고 저축해버리고 기업들도 안 움직이니까 지금은 좀 급해졌어요. 그걸 우리한테 들킨 상황이죠.부양책의 메인은 소비여야 하는데, 돈 좀 준다고 사람들이 갑자기 집이나 차를 사진 않죠. 대신 나가서 사 먹긴 할 거고(외식), 그동안 못 샀던 거(가전 등) 한번 사볼까 할 거고요. 또 여행을 많이 갈 거예요.지금 갑자기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나라에 무비자 입국을 허용한 것도 이와 관련 있습니다. ‘우리도 여행 많이 갈 테니, 너네도 여행 좀 와’라고 하는 거죠. 또 트럼프 새 내각의 대외정책이 구체화하기 전에 미국 우방 국가와의 관계를 좀 개선하려는 부분도 있고요.”중국 주식, 드디어 플러스?-중국 정부가 대대적인 경기부양으로 나아가기로 방향은 정한 거고, 앞으로 구체적인 정책이 쭉쭉 이어지겠군요. 그럼 이에 대한 국내외 투자자들 분위기는 어떤가요.“일단 증시 거래량이 폭증했습니다. 최근 한 달 상하이와 선전 거래소 거래량이 이전의 거의 두배로 치솟았죠. 또 그동안 중국 주식이 애물단지, 마이너스였는데 이제 플러스로 전환한 투자자들이 많죠. 제 중국인 지인은 해외에 체류 중인데, MTS 비밀번호를 계속 틀리니까 증권사 지점에 방문하려고 중국으로 들어갔다더라고요. 당장 중국 주식을 더 사기 위해서 말이죠.”-이전엔 중국 증시에 다들 시큰둥했는데, 이번엔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네요.“마침 미국도 금리를 내리고 글로벌 투자자들이 ‘이 돈은 어디로 갈까?’하고 있었는데 중국이 ‘여기로 와!’라고 한 거죠. 그때(9월) 분위기가 인도와 일본이 좋았는데, 거기서 돈을 빼서 ‘중국은 싸네. 이번엔 뭔가 좀 할 것 같다’면서 중국으로 많이 갔어요. 지금도 그 연장선인데요. (경기 부양을) 할 듯 말 듯 하지만, 사실은 하는 과정이죠. 중국은 지금부터 내년 3월 전국양회까지 정책이 만들어지고 발표될 거거든요. 기대했다, 실망했다가, 이번엔 나오겠지? 아니네, 다음이네. 이런 게 있겠지만, 그래도 나오기로 했으니 아직 관심이 꺼지지 않은 상황이죠.”-그래도 그 열기가 예전에 중국이 한창 핫했을 때만큼 뜨거운 건 아직 아니죠?“그동안 중국 증시는 한번 확 오르고 나면 장렬하게 전사했어요. 차트를 보여드리자면, 최고점에 상하이지수가 6000을 넘었죠(2007년 10월 장중 6124 포인트). 그리고 나서 무너졌고요. 이후 외국인에 주식시장을 개방하면서 다시 지수가 올랐다가(2015년 6월 5178) 떨어졌죠.비교해 보면 2015년 지수 상승의 높이는 2007년보다 좀 낮았고요. 상승하는 구간의 기간도 짧아졌어요. 그런데 대신 하단은 전보다 올라갔죠.”-그렇네요. 과거엔 1000이 하단이었는데, 점점 올라갔네요.“버블로 갔다가 지수가 빠졌는데, 하단은 계단식으로 올라갔어요. 이번에도 저는 상단은 감히 예상할 수 없고요. 그래도 빠질 때의 하단은 방어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중국의 시가총액 1위 종목은 공상은행입니다. 상하이지수 시총의 25%가 은행이죠. 한국에서 밸류업하니까 은행주가 좋았잖아요. 중국도 밸류업 정책(신(新) 국9조)으로 은행주가 오르면서 지수를 같이 끌어올리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중국 주식에 투자한다면) 지수 중심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미국의 트럼프는 관세와 감세 위주 정책을 예고하죠. 추가 관세를 실제 얼마나 매길진 아직 모르지만 중국은 GDP의 19%가 수출입니다. 만약 미국이 관세를 올린다면? 수출 기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중국 정부가 환율을 어느 정도 약세로 가져가려 할 겁니다. 지금 위안화 환율이 달러당 7.1위안인데요(11일엔 7.2위안까지 상승). 어찌 보면 8자를 볼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더더욱 내수 위주의 정책이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하는 상황이죠.”-위안화가 정말 달러당 8위안까지 절하된다면, 그건 한국 경제에도 큰일 아닌가요?“그렇게 단기적으로 가진 않고, 서서히 갈 거예요. 만약 위안화가 갑자기 확 약세로 가서 투기세력이 붙으면 ‘투매’가 나타나면서 외국인이 중국시장을 버리고 떠나버릴 수 있으니까요. (위안화 절하 때문에) ‘이제 한국 수출 어떻게 하나’라는 얘기 나오는 정도가 되는 건 2~3년 뒤 일이 될 겁니다.”중국에서 유망한 섹터는?-아까 중국 증시는 지수 중심으로 투자하는 게 낫다고 하셨는데요. 유망한 섹터는 특별히 없나요?“중국 증시는 지수가 밋밋해도 섹터별로 순환매가 계속 나타나곤 합니다. 내국인이 주관하는 시장이다 보니까, 예컨대 부동산 회의가 하나 잡히면 ‘뭐가 나올 건가 봐’라며 부동산주가 막 올라요. 그런데 막상 그 회의를 열어서 뭔가 나오면 이전 3~4일 동안 엄청 많이 올랐으니까 오히려 주식을 팔아요. 그래서 자칫 섹터 (매수) 방향을 잘못 잡으면 위험할 수 있죠.”-약간 한국 증시 같네요.“그런가요? ‘며칠 올랐으니까, 또는 오늘 정책 나왔으니까 들어가야지’라고 하면 안 되는 시장이에요. 지금은 경기와 증시를 부양하고 제조업 PMI(구매관리자지수)도 바닥 찍고 올라가는 시기이잖아요. 그럼 크게 손해 볼 건 없다고 보고, 지수로 접근하는 게 가장 편안하죠.어느 정도 지수 레벨이 올라간 뒤, 중기적 관점에서는 미국이 규제하는 데도 중국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분야가 유망합니다. 바로 바이오와 반도체이죠. 강하게 규제하는데도 중국이 계속 연구 개발하고, 관료층을 대거 과학기술자로 바꾸면서까지 목숨을 걸고 있어요.”-신흥국 카테고리로 보면 인도가 엄청나게 치고 올라오고 있고, 동남아시아는 제조업 기지로 커가고 있습니다. 길게 보면 중국은 고령화로 인구도 줄어들고, 기세가 점점 꺾여가지 않을까 싶은데요?“중국은 아마 ‘왜 우리랑 인도, 베트남을 비교해?’라고 생각할 거예요. GDP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면 미국 바로 다음이 중국이고 인도는 저 아래에 있으니까요. 물론 성장률은 인도가 7~8%로 훨씬 더 높게 나오지만, 지금 중국이 그리는 건 ‘G2’ 그림이죠.지난 몇 년을 돌이켜 보면 중국이 은근히 글로벌 입지를 다졌어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가 제재받자 ‘우리가 원유 사줄게’라면서 위안화 결제를 늘렸고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7년 만에 화해할 때도 중국이 자리를 만들어서 베이징에서 악수했어요. 나름대로 G2로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실리적 외교를 한 거죠.”-중국이라고 하면 ‘그냥 신흥국 중 하나’로 접근했는데, 말씀 들으니 중국에선 ‘우리와 겨룰 상대는 이제 미국밖에 없다’라고 하겠군요. 아까 질문과 반대로 생각하면 ‘이렇게 큰 나라인데, 어떻게 포트폴리오에서 무시할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미국이 수입하는 국가 중 중국이 1위였는데, 지금은 멕시코가 1위에요. 그 사이 중국이 멕시코로 나가서 공장을 지었기 때문이죠. 직접이냐, 간접이냐의 차이이지 중국의 자본 영향은 계속 커져 왔습니다. 유럽도, 한국에도 여전히 중국은 주요 교역국이죠. 워낙 우리 산업과도 밀접한 국가여서요. 어쩔 수 없이 미워도 포트폴리오에서 일정 부분은 가지고 가는 게 맞을 겁니다.” By.딥다이브돌이켜보면 중국 정부가 갑자기 인터넷 기업 옥죄고, 게임과 사교육 금지하고 하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이 ‘여긴 시장 경제가 아니다’라며 대거 떠났던 게 2021년입니다. 이후 에버그란데(헝다) 사태와 제로 코로나 봉쇄를 거치며 중국 증시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는데요. 오랜만에 되살아난 중국 증시가 왠지 낯설고 미심쩍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죠. 이번엔 좀 다를까요. 주요 인터뷰 내용을 요약하자면. -중국이 각성했습니다. 대대적인 경기부양책 투하가 9월 말부터 시작됐죠. 내년 3월까지 이어질 부양책 행진 중 주목할 건 내수에 불을 지필 소비쿠폰 정책이 얼마나 나오느냐입니다. 관세 파고가 높아지는 가운데, 중국 경제가 믿을 건 소비뿐입니다. -투자자 기대가 높아지면서 돈이 중국으로 몰립니다. 중국 증시는 오를 땐 화끈하게 올랐다가 또 무섭게 추락하곤 했죠. 대신 하단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 긍정적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지수 중심으로 접근하되, 좀더 길게 본다면 중국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술개발하는 분야에 주목하세요. 바이오, 그리고 반도체입니다. *이 기사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돌아왔습니다. 자, 그럼 경제는 어디로 갈까요. 많은 이들이 전망한 대로 미국 금리 오르고 달러 강세 가나요. 한때 4.5%에 육박했던 미국 국채 10년물 이자율, 달러당 1400원을 찍은 환율을 보니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금융시장은 고금리·강달러 시대 도래를 기정사실화하는 듯한데요.돌이켜보면 8년 전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도 그랬죠. 그런데 이후 4년 동안 어떤 상황이 펼쳐졌는지 기억하시나요. 오늘은 트럼프 2기의 경제정책과 전망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고금리·강달러라는 논리금융시장에선 왜 트럼프 재집권=고금리로 통할까요. 그가 내년 1월 취임 뒤 펼칠 경제정책 때문이죠. 중요한 정책은 너무 많지만 가장 큰 건 두 가지입니다. 관세 인상과 세금 감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①수입품 관세를 올리면→물가가 뛰니까→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야 할 거다.②세금을 감면하면→세수가 줄고→재정적자가 커지니까→국채 발행이 늘어서→금리는 오를 수밖에 없다.이런 논리이죠. 미국의 고금리는 곧 달러 강세를 뜻합니다. 원래 돈은 금리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고,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전 세계 자금이 그리로 쏠릴 테니까요. 미국 달러 수요가 늘면서 달러가치가 뛰겠죠.논리적으로는 딱딱 들어맞습니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 미국 상원은 공화당이 과반을 확보했고, 하원 의석수에서도 현재까지 앞서 나가고 있죠(개표 완료까지 며칠 걸림). 행정부와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이 휩쓰는 레드 스윕(Red Sweep, 공화당 싹쓸이)이라면, 이 흐름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만 같아 보입니다.트럼프 1기엔 어땠더라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트럼프는 1기(2017년 1월 20일~2021년 1월 20일)도 지금과 매우 비슷한 정책 기조였거든요. 중국 견제를 위해 관세 줄줄이 올리고, 법인세를 대폭 감면(35→21%)했죠. 그래서 그때도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금리가 급등세를 보였는데요. 하지만 트럼프 재임기간 전체를 보면 오히려 금리도, 달러가치도 모두 하락했습니다. 마지막 1년은 너무 예외적 상황(코로나 팬데믹)이었으니 빼고, 첫 3년의 기록만 봐도 마찬가지죠. ‘트럼프 트레이드’가 결과적으로는 맞아떨어지지 않은 겁니다.왜 그랬을까요. ‘①번 관세를 올리면 인플레이션이 온다’는 공식부터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미국 역사적으로 ‘관세 인상=소비자 물가상승’인 사례는 1930년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는데요. 언뜻 생각하기엔 수입품에 관세를 왕창 물리면 그만큼 소비자 판매 가격이 올라갈 것만 같죠. 그런데 물건을 팔아야 하는 수입회사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갑자기 판매가를 50~60% 올리면 제품이 안 팔릴 게 뻔하죠. 그러니까 제품 가격을 마음껏 올리진 못한 채 기업이 관세 부담을 상당 부분 지게 되고요. 수익성은 악화됩니다. 과거 트럼프 취임 2년 차였던 2018년 미·중 무역갈등이 본격적으로 불붙고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부과가 이어졌는데요. 그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 2.4%에 그쳤습니다. 대신 기업들이 원가 부담을 호소하면서 2018년 미국 주식시장은 부진했고(S&P500 -6.52%), 그해 11월 하원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패배했죠.보편 관세라는 폭탄은 터질까이번에도 트럼프는 대대적인 관세 폭탄을 예고합니다. 중국산에 60%, 나머지 국가엔 10~20%의 관세를 부과할 거라고 하죠. 산업재 중엔 현재 관세 면제인 제품도 많은데요. 예외 없이 모든 수입품에 ‘보편 관세’를 부과한다니 상당히 놀라운 공약입니다. 이게 시행되면 미국 소비자 물가지수가 얼마나 뛸지를 두고 여러 분석(예-블룸버그 이코노믹스 최대 4.3%, 모건스탠리 0.9%) 분석이 그동안 쏟아져 나왔죠.사실 관세는 의회 허락을 받을 필요 없이 대통령이 행정명령만으로 부과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마음먹는다면 사실상 막을 장치는 없죠. 그래서 곧 터질 폭탄이라도 되는 듯이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데요.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유력한 재무장관 후보로 꼽히는 스콧 베센트는 FT 인터뷰에서 이런 입장(최대 20% 보편 관세)은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서 축소될 수도 있는 “최대치”라고 설명하죠. “트럼프는 결국 자유무역주의입니다.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확대하는 거죠(escalate to de-escalate). 트럼프의 다른 점은 그가 사업가라는 점입니다. 그는 경제를 이해합니다.”골드만삭스도 비슷한 의견인데요. 트럼프가 중국에 대한 관세를 60%가 아닌 20%포인트만 인상하고, 다른 나라에 대한 보편 관세는 없을 거란 전망입니다. 이 경우 1년 뒤 근원 인플레이션은 2.3%로 더 떨어지고, 연준은 금리 인하를 이어갈 거라는 결론이죠.감세로 재정적자 눈덩이?그럼 ②번 세금 감면 확대 공약은 어떻게 될까요. 일단 트럼프 1기인 2017년 통과시켰던 ‘감세와 일자리 법(법인세를 한시적으로 35%에서 21%로 인하하는 내용)’은 일몰(2025년 말) 전에 연장이 추진될 겁니다. 현재 21%인 법인세율이 다시 35%로 높아지는 걸 막을 거란 얘기죠. 이에 대해 미국 의회예산국은 10년 동안 4조6000억 달러의 세수가 줄어들게 될 거라 전망합니다. 게다가 이게 다가 아니죠. 트럼프는 추가로 세금을 더 깎아주겠다고 공약했는데요. 미국에서 생산하는 제조기업엔 법인세를 15%로 낮추고, 각종 항목(팁, 초과근무 수당, 노년층 사회보장 혜택 등)에 대한 소득세를 면제하겠다고 했습니다. 가뜩이나 미국 경제는 재정적자(1조8330억 달러, 2550조원)에 시달리는데요. 만약 적자 상황에서 세수가 크게 줄어든다면 결국 빚을 더 내는 수(국채 발행)밖에 없겠죠. 벌써부터 미 국채 금리가 치솟는(가격은 하락) 이유입니다.그런데 세법을 바꾸려면 의회 동의를 받아야 하죠.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이 잡으면 국회 통과도 문제 없을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생각만큼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공화당 안에서도 이념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인데요.딜로이트 보고서에 따르면 의외로 공화당 안에 2017년 법인세율 인하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는 의원들이 꽤 있다고 하죠. 공개적으로 법인세율 인상에 찬성한다고 밝히는 공화당 의원들도 나오고요. 전통적으로는 ‘공화당=친기업’이었고, 법인세를 깎아주는 데 적극적이었던 건 맞는데요. 그게 점점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공화당 자체가 예전과 달라지고 있는데요. 일단 대기업 경영자 중엔 민주당 지지자가 더 많아졌고요. 공화당 주 지지층은 소규모 사업가나 노동자 계층이어서 법인세 감면이 그렇게까지 큰 관심사가 아닌 거죠. 오히려 재정 적자에 대한 걱정이 점점 커진다고 합니다.하원은 양당 의석수가 비슷해서, 공화당 의원 중 일부라도 돌아서면 법안 통과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실제 2017년 트럼프의 오바마케어 폐지 시도가 초강경 보수파 공화당 의원들에 가로막혀 좌절된 사례가 있죠(대체 법안 ‘트럼프케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 트럼프의 이번 파격적 감세 공약 역시 수정 없이 일사천리로 통과하기란 쉽지 않아 보이기도 하는데요. 미국 재정적자에 대한 경각심은 필요하지만, 미국 재무부가 감세 때문에 국채를 마구 찍어내고 금리가 치솟는 상황이 실제로 닥치기까진 시간이 꽤 걸릴 수 있습니다.너무 긍정의 희망회로를 돌렸나요? 대선 이후 트럼프가 돌아와서 경제가 큰일 났다는 분석이 쏟아지고 있죠. 그래서 일부러 좀 다른 얘기를 해봤습니다.트럼프 말만 들으면 집권하자마자 무지막지한 정책이 펼쳐질 것만 같죠. 그런데 따져보면 그 중엔 대통령 권한 밖의 일도 있고요(예-“취임 첫날 게리 겐슬러 증권거래위원장을 해고하겠다”, “불법 이민자를 즉각 추방하겠다”). 많은 경우엔 의회 동의를 꼭 거쳐야 한다(예-“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을 폐기하겠다”)는 점, 알아두셨으면 합니다.트럼프는 보수주의자라기보다는 포퓰리스트이죠. 이념이 아니라 뭐가 이익이 되느냐를 따져서 얼마든지 입장을 180도 바꾸곤 합니다. 놀랍도록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것만 지금으로선 예측 가능한데요. 불확실성 속에 숨어있을 기회를 잡으려면 안테나를 더 바짝 세워야겠습니다. 다시 돌아온 트럼프 시대, 슬기롭게 잘 넘겨 보자고요. By.딥다이브트럼프 당선 직후 엇갈리는 국내 주식시장 주가흐름을 보면서 미국 대통령의 위상을 새삼 실감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트럼프가 돌아왔습니다. 그의 당선 소식에 미국 국채 금리와 환율이 모두 뛰었습니다. 관세 인상, 세금 감면을 중심으로 한 트럼프 경제공약이 고금리, 강달러로 이어질 거란 전망이 파다합니다.-다만 트럼프 1기 땐 예상과 달리 금리도, 달러가치도 좀 오르다 오히려 하락했습니다. 관세인상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지 않고, 기업의 부담으로 작용했죠. -이번에 트럼프는 모든 수입품에 10~20% 보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약했는데요. 한편으론 협상카드에 그칠 거란 분석도 있습니다.-법인세를 15%까지 낮추고, 각종 소득세를 깎아준다는 공약도 있습니다. 이미 막대한 재정적자를 더 키울 수 있는데요. 하지만 공화당 의원들이 호락호락하게 이를 통과시켜 주지 않을 거란 관측도 나옵니다. -확실한 건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겁니다. 앞으로 미국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더 관심 있게 지켜봐야겠습니다.*이 기사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전기자동차 시장이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에 빠졌다는 2024년, 오히려 역대급 기록을 달성하며 질주하는 전기차 제조사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 BYD(비야디)이죠. 3분기 매출에서 처음으로 미국 테슬라를 제친 데 이어, 10월엔 월간 판매량이 전 세계 전기차 기업 중 처음으로 50만대를 돌파했습니다. 놀라운 신기록 행진인데요.20여년 전 조롱 속에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배터리 기업은 어떻게 전기차 산업의 리더로 떠오르게 됐을까요. BYD 창업자 왕촨푸(王傳福) 회장의 지독한 기술 중심주의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조롱받던 배터리 기업2003년 37세 중국 기업인 왕촨푸는 제법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이끄는 BYD는 세계적인 휴대폰 배터리 제조사로 성장했고, 2002년 7월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까지 했으니까요. 성공한 ‘배터리 왕’으로 불리던 2003년 1월. 왕촨푸가 폭탄선언을 합니다. 친촨자동차를 인수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한 거죠.휴대폰 배터리 지금 너무 좋은데, 웬 자동차? 투자자들은 뒤집어졌습니다. 하루 만에 주가가 21% 폭락했죠. ‘휴대폰 배터리 제조사가 감히 자동차를 만든다고?’라는 조롱이 쏟아졌고, 주변에서도 “위험한 게임”이라며 그를 뜯어말립니다.당시 왕촨푸는 자동차를 운전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는 “자동차는 쇳덩이다. 자동차 제조는 장난감 만드는 것과 같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잘 몰랐기 때문에 과감히 뛰어들었을 겁니다.2004년 말 왕촨푸는 BYD가 처음 자체 개발한 내연기관 신차 316을 자랑스럽게 공개했죠. 돌아온 딜러 반응은 “차가 너무 못 생겨서 팔 수 없다”는 혹독한 비판. 평소 조용하고 침착한 왕촨푸는 이때 너무 화가 나서 망치로 차량을 때려 부숴버렸습니다. BYD 자동차 제조 초창기의 흑역사입니다.다행히 이후 BYD가 출시한 F3는 도요타 코롤라 디자인을 베꼈다는 평을 듣긴 했지만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BYD 자동차 사업이 이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나 싶었던 2007년, 왕촨푸는 또다시 대담한 선언을 합니다. “2015년까지 중국 1위, 2025년엔 세계 최대 자동차 제조사가 되겠습니다.”고작 연간 10만대 생산하는 기업이 세계 1위를 운운하다니. 이후 수년간 왕촨푸는 헛소리하는 기업인으로 조롱받습니다. 하지만 왕촨푸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가 당시 생각한 자동차 산업을 재편할 신무기는 바로 전기차였죠. “BYD는 선도적인 배터리 기술을 사용하는 순수 전기차 E6를 출시할 겁니다. 리튬인산철 배터리 공장을 선전에 건설하면, 전기차가 비 온 뒤 버섯처럼 솟아 나올 겁니다. 이 파괴적 제품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BYD는 늘 ‘세계 최초’를 추구합니다.”(2007년 8월)고집스럽게 기술 개발BYD는 2008년 세계 최초의 대량 생산 플러그인하이브리드 차량인 F3DM, 2009년 순수 전기차 E6를 출시합니다. 차량용 반도체 제조사와 리튬 광산도 인수했죠. 이런 공격적인 행보에도 업계는 싸늘했습니다. 도무지 전기차 시대라는 게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거든요.2011년 중국 자동차산업 발전 포럼에서 전문가들은 BYD에 냉담했습니다. “정부가 전기차 개발에 과도하게 적극적이게 만든 책임이 BYD에 있다”고 대놓고 비판했죠. 주식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기차 관련 막대한 투자로 인해 수익성이 악화하면서 주가는 1년 만에 반토막 납니다. 부사장급 고위 경영진들까지 일제히 주식을 팔아치울 정도로 분위기는 엉망이었죠.돈 안 되는 전기차에 올인하다가 BYD가 망하게 생겼단 비난이 쏟아졌지만, 왕촨푸는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동시에 매우 고집스러운 경영자이죠. 그때 마음고생이 꽤 컸는지, 지난해 열린 500만대 신에너지 차량 출시 기념 행사에서 그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의심과 조롱 속에서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굳건히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연구개발에 수천억 위안(수십조원)을 투자했습니다. 지난 12년(2011~2022년) 중 11년은 연구개발 투자비가 그해 순이익을 초과했습니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BYD 이익이 3년 연속 크게 감소했습니다. 특히 2019년엔 순이익이 16억 위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연구개발에 84억 위안을 투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가 돈을 태운다며 비웃었습니다.”2020년, 질주가 시작되다그렇게 축적해 온 BYD의 전기차 기술 잠재력이 2020년 폭발적으로 발현됩니다. 그해 3월, BYD가 혁신적인 배터리 신제품을 선보였죠. 칼날처럼 얇은 셀을 촘촘히 박아서 만든 ‘블레이드 배터리’입니다.왕촨푸는 전기차 운명을 결정하는 건 결국 배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휴대폰 배터리 제조사였던 BYD가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이유이기도 하죠. 초기부터 리튬인산철 배터리에 승부를 걸어온 BYD의 야심작이 바로 블레이드 배터리였습니다. 같은 부피에 훨씬 더 많은 배터리셀을 넣어 성능(주행거리)은 대폭 향상시키면서도 안정성을 높인 거죠. 주행거리로 경쟁사를 압도하는 ‘가성비 갑’ 브랜드로 BYD가 떠오르는데요. 마침 팬데믹으로 자동차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 준비된 강자, BYD의 무서운 질주가 시작됩니다.배터리 못지않게 BYD가 역점을 둔 기술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입니다. 내연기관 엔진과 전기 모터를 함께 쓰면서, 외부 전원(플러그)으로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차량이죠. 사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는 순수 전기차로 넘어가는 중간단계라고 여겨져서, 그리 각광받진 못했던 기술인데요. 왕촨푸는 “다른 회사들이 연구개발을 포기했고, 내부 많은 사람도 포기하자고 했지만 나는 그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고 회상합니다. 2020년 BYD는 효율을 대폭 높인 ‘DM-i 슈퍼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내놓았고요. 그 결과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는 빠르게 중국 자동차 시장의 주류로 떠오릅니다. 그의 베팅이 들어맞은 거죠.혹시 올 5월 BYD가 새로 선보인 5세대 DM-i 하이브리드 시스템 스펙을 보셨나요? 연비가 100㎞당 2.9L(한국식으로 바꾸면 L당 34.5㎞)이고, 최대 항속거리가 무려 2100㎞(소형차 기준)라고 BYD가 밝혔습니다. 스펙이 충격적으로 좋아서 중국에서도 ‘말도 안 돼. 이거 거짓말 아니야?’라는 의심이 제기됐는데요. 이후 주행 연비를 확인하는 관련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면서, 실제로 연비가 상당히 좋다는 게 확인되는 중입니다(단, 중국은 연비 측정 기준이 한국과는 다르다는 점 유의하세요). 중국에서 BYD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신형 모델이 현재 엄청난 인기를 끄는 이유이죠. 지난달 BYD가 판매한 승용차 50만대 중 32만대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전년보다 129% 성장)입니다. 순수 전기차 시장이 주춤한 ‘캐즘’의 2024년이지만 BYD는 되레 더 잘 나가는 중이죠.유별난 기술 중심주의와 약점정리하자면 한국에선 싸구려 전기차로 폄하되는 BYD이지만, 저렴한 가격 못지않게 기술력이 큰 강점입니다. 이는 사실 연구개발비만 봐도 알 수 있죠. BYD가 올 상반기에 지출한 연구개발비는 202억 위안(약 3조9000억원). 전년보다 42%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순이익(136억 위안)은 물론, 테슬라(22억3000만 달러, 약 3조원)보다 많습니다.BYD는 중국에서 직원 수(약 90만명)가 가장 많은 민간기업인데요. 이 중 약 11만명이 연구개발 인력입니다. 전 세계 자동차 기업 중 단연 최대이죠.BYD 연구 인력은 3년 전(약 4만명)의 세배 가까이로 불어났습니다. 중국 명문대학 석박사 출신을 대거 채용하고 있죠. 왕촨푸는 외부에서 경력자를 영입하는 것보다 백지상태에서 기술 인력을 새로 키우는 걸 선호하는데요. 그래서 대졸 신입사원들을 기숙사에 집어넣고 엔지니어로 양성합니다. 회사는 대학의 연속이고, 관리자는 곧 멘토가 되는 거죠. 왕촨푸는 기술자라는 자부심이 상당히 큰 CEO입니다. 평소에도 정장보단 작업복을 입고 공장과 연구실에서 일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데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한 적 있죠. “나는 먼저 엔지니어이고, 그다음 기업가입니다.”또 오래전부터 BYD의 가장 큰 재산은 엔지니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자산은 엔지니어이지만, 재무제표엔 이 데이터가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과 투자자 인식의 가장 큰 괴리입니다.” “토지·공장·특허·주식 등 모든 재산이 사라져도, 엔지니어들이 있는 한 (BYD는)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습니다.” “BYD에서는 기술이 왕이고, 혁신이 기초이며, 핵심은 R&D 인력입니다.”이런 기술자 중심의 독특한 문화가 지금의 BYD를 만든 건 분명한데요. 이건 자칫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BYD는 외부 수혈 없이 자체 인력을 키우다 보니 전체 조직이 ‘또 하나의 왕촨푸’처럼 되어버렸죠. BYD 왕국에서 왕촨푸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사실상 회장 한 사람의 생각과 판단이 이 거대 기업을 좌지우지하죠. 이는 곧 왕촨푸 개인의 한계가 BYD의 한계가 될 수도 있단 뜻이기도 합니다.자율주행 기술이 바로 그런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왕촨푸는 지난해 초만 해도 “기만이고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다”면서 경쟁사의 자율주행 기술을 평가절하했는데요. 올해 들어서는 갑자기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대대적인 투자에 나섭니다. 지난해부터 중국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에선 이미 경쟁의 초점이 자율주행 성능으로 옮겨갔는데요. BYD가 경쟁사보다 한발 뒤처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거죠. BYD는 JD파워가 꼽은 중국의 지능형 전기차 브랜드 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습니다(1위는 지커, 2위 샤오펑).전기차를 더 싸고 잘 달리게 만드는 기술의 강자인 BYD가 ‘더 스마트하게’도 만들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자율주행 기술에 1000억 위안(약 19조3000원)을 투자한다는 BYD의 발표는 업계를 긴장케 합니다. 지금까지 왕촨푸의 BYD는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기어코 해내는 기업이었으니까요. By.딥다이브왕촨푸 회장은 흙수저 출신입니다. 안후이성 시골의 가난한 농부 집안인 데다, 일찍 부모님을 잃었죠. SNS 같은 건 일절 하지 않는 조용한 스타일인데요. 그래서 금수저이자 SNS 대스타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캐릭터입니다. 다만 기술에 대한 집착과 포기를 모르는 끈기, 워커홀릭 기질 등. 일하는 방식에 있어선 공통점도 상당히 많죠.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전기차 시장의 성장이 주춤한 2024년에도 BYD는 놀라운 질주를 이어갑니다. 3분기 매출에서 테슬라를 처음 제쳤고, 10월엔 월 50만대 판매 기록을 세웠죠.-BYD 왕촨푸 회장은 일찌감치 ‘전기차로 세계 1위’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세상은 그를 조롱했지만 고집스럽게도 기술개발에 매달립니다.-축적된 기술력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건 2020년부터. 블레이드 배터리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우위로 BYD는 내달리기 시작합니다.-독특한 엔지니어 중심 문화는 BYD의 강점이지만, 왕촨푸 회장 1인 체제는 자칫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익성을 따지기보단 연구개발에 올인하는 BYD의 질주는 어디까지 이어질까요.*이 기사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