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란

한애란 기자

동아일보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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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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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3~202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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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 중인 러시아, 호황 넘어 과열인 이유[딥다이브]

    2024년 경제성장률이 4.1%나 되고, 실업률은 2.4%에 불과합니다. 임금이 뛰고 소비가 늘어나 경제가 호황이다 못해 과열 양상이죠. 어느 나라 얘기일까요. 바로 러시아입니다.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을 벌인 지 만 3년여. 러시아 경제는 침체 위기를 가볍게 뛰어넘어 진군 중입니다. 겉보기 수치로는 서방의 제재에도 끄떡없는데요. 러시아 경제는 왜 호황을 누리고 있고, 이 호황은 얼마나 더 이어질까요. 오늘은 러시아가 보여주는 전쟁 경제학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예측 깬 경제호황러시아 주가지수인 RTSI. 한 달 만에 15%, 석 달 전과 비교하면 39%나 뛰었습니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가 리야드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13일 하루에만 지수가 10% 급등했죠. 전쟁으로 외국인이 러시아 증시에 투자하기 매우 어려워진 상황에서도(미국의 투자금지 조치) 이 정도 급등세라니 놀라운데요. 홍콩 증시에 상장돼 거래가 자유로운 러시아 알루미늄 제련 기업 루살(Rusal) 주가는 한 달 만에 52%나 뛰었습니다. 미국이 곧 러시아 제재를 해제할 거란 기대감이 반영된 거죠. 러시아 루블화 가치 역시 올해 들어 달러 대비로 25% 넘게 올랐습니다.침략국 러시아 자산으로 금융시장 투자자들이 몰리는 현실이 왠지 씁쓸하기도 한데요. 본래 투자의 세계란 냉정한 법이죠.그리고 알아두셔야 할 게, 3년 넘게 계속되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는 상당히 잘나가고 있단 점입니다. 물론 처음 전쟁이 막 발발했을 땐 절벽으로 떨어졌죠. 러시아는 대대적인 경제 제재 융단폭격을 맞았고요. 주식시장은 한동안 문을 닫았고, 루블화는 폭락했고, 국가신용등급은 급락하고, 예금자들은 달러를 얻기 위해 은행에 줄을 섰고, 외국 기업은 줄줄이 빠져나갔습니다. 당시 IMF(국제통화기금)가 2022년 러시아 GDP의 8.5% 감소를 전망했을 정도였죠.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경제는 2022년에 1.2% 소폭 하락에 그쳤고요. 2023년엔 3.6%, 2024년엔 4.1%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모두의 예측이 빗나갔죠.군사지출이 만든 성장그럼, 러시아 경제는 어떻게 금세 다시 성장 궤도를 타게 됐을까요. 한마디로 ‘군사적 케인스주의’ 효과입니다.케인스주의란 정부가 공공지출을 늘려서 소비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거죠. 군사적 케인스주의는 군사 지출을 늘려서 성장을 촉진하는 걸 의미하는데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게 나치 독일입니다. 나치 독일은 1933~1937년 약 55% 실질 GDP 성장을 누리며 경제적 번영을 이뤘는데요. 나치 정부가 대대적인 군사력 확장에 나선 게 그 원동력이었습니다.전쟁이 길어지면서 러시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GDP의 약 3%를 차지했던 국방비는 이제 거의 7%로 불어났습니다. 국방비를 대대적으로 쏟아붓고 있단 뜻이죠. 전쟁 물자 생산을 위해 방산기업은 24시간 3교대로 쉴 새 없이 돌아갑니다. 전쟁으로 일할 사람 구하기 어려워진 무기 공장들이 월급 인상을 주도하면서 전반적인 급여 수준이 크게 올랐고요. 지난해 12월 기준 러시아 근로자의 급여 상승률은 1년 전과 비교해 21.9%나 됐습니다. 16년 만에 가장 높은 증가율이었죠.근로자뿐 아니라, 전선으로 나가는 군인들도 거액을 받습니다. 러시아 남서부 사마라주는 올해 초 지원병 계약 일시금을 80% 인상한 360만 루블(약 5800만원)로 책정했는데요. 러시아 평균 연봉(약 106만 루블)의 3배 넘는 금액입니다. 푸틴 정권에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각 주 정부가 경쟁적으로 계약금을 높인 결과이죠.임금이 이렇게 빠르게 오르다 보니 소비자들의 낙관론은 커집니다.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센터에 따르면 소비자 신뢰지수는 사상 최고 수준에 근접했고요. 러시아의 가계소비는 1년 전보다 6% 늘었습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독특한 소득 주도 성장인 셈입니다.코카콜라 대신 도브리콜라러시아 성장률을 끌어올린 또 다른 요인은 외국기업 대탈출로 인한 ‘국산화’ 효과입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1200개 넘는 다국적 기업이 러시아를 떠나거나 운영을 중단했죠. 현대차를 비롯한 자동차 제조업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요. 골드만삭스·ING·비자·마스터카드 같은 금융회사, 스타벅스·맥도날드·코카콜라·자라·애플 같은 소비자 관련 기업도 줄줄이 철수했습니다.그런데 이런 대량 이탈이 역설적으로 러시아 기업엔 기회가 됐습니다. 외국기업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러시아 기업의 이익은 크게 늘어났고요. 다국적 기업이라면 해외로 상당 부분 빠져나갔을 배당금과 세금이 러시아 내에 남는 결과로 이어진 거죠.무엇보다 러시아 기업의 ‘투자 붐’이 일고 있습니다. 지난해 상반기 러시아 기업의 투자는 14조4000억 루블(238조원). 전년 동기보다 10% 늘어났고,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는데요. 제재로 인해 주요 은행들이 부유한 러시아인들과의 거래를 끊으면서 예전처럼 해외 자산에 투자하기가 어려워졌거든요. 그래서 예전 같으면 해외로 빠져나갔을 돈이 국내에 재투자되는 겁니다. 이 역시 서방 제재가 가져온 예상 밖의 결과이죠.노동력이 고갈되다전쟁으로 우크라이나 곳곳은 폐허가 되고, 지금도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 침략국인 러시아에선 근로자도, 기업도 모두 돈을 더 잘 벌게 됐다니. 씁쓸하다 못해 허탈하다고요? 그런데 아직 결말은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러시아 경제를 떠받쳐온 군사적 케인스주의가 이제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케인스주의는 경제에 여유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정책인데요. 러시아의 가용 자원이 동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재정 여력은 아직까진 좀 남아있긴 한데요. 그보다 먼저 바닥난 건 인적자원입니다.러시아는 전쟁 이전에도 인구가 자연 감소하는 나라였습니다. 부족한 노동력을 이민자들로 메워왔는데요. 2022년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에선 대탈출이 벌어졌습니다. 이민자들은 물론 러시아인 중 IT나 금융 분야 고숙련 인재들까지, 무려 75만명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거죠. 또 매달 1만~3만명의 청년이 군에 입대하고 있습니다. 일손이 부족해 학생과 은퇴자까지 채용될 정도로 노동시장은 완전고용 상태(실업률 2.4%)이죠. 러시아 중앙은행 분석대로 러시아 전역에서 “전문가와 저숙련 노동자 모두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입니다. 한 에너지 기업 전직 임원은 FT에 이렇게 말하죠. “용접공들이 엄청난 급여를 받으며 무기 공장으로 가버립니다. 고용할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버나요?”한동안 푸틴 대통령은 “실업률이 역대 최저”라며 자랑스러워했는데요. 인력난과 인건비 상승이 너무 장기간 이어지면서 이젠 물가가 심상찮습니다. 2024년 12월 러시아 소비자 물가지수 상승률은 9.5%. 특히 지난해 식료품 가격이 급등해서 감자는 92%, 양파 48%, 오이 28.5%, 버터는 36%나 뛰었습니다. 오죽하면 지난해 11월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에선 복면을 쓴 강도가 가게에서 버터 20㎏를 훔쳐 달아나는 사건까지 발생했죠. 지난해 12월이 되자 푸틴 대통령도 인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할 시그널”로 지목했습니다.물가를 잡기 위한 방법으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군사 지출을 줄이는 것. 기록적으로 늘어난 국방 지출(2025년 13조5000억 루피)이 이미 러시아 경제 용량을 한참 초과한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지금으로선 푸틴 대통령이 선택할 리 없고요. 대신 러시아 중앙은행이 움직였습니다. 지난해 10월 기준금리를 19%에서 21%로 높였죠. 200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중앙은행의 이런 움직임이 효과를 발휘할까요. 글쎄요. 이후에도 물가상승률은 점점 더 높아지기만 하는데요(1월 9.9%). 이러다 물가는 못 잡고 괜히 기업 이자 부담만 불어나서 경제에 타격을 입하는 건 아닐까요. 경제를 과열시킨 건 군사 부문인데, 높은 이자 부담에 시달리는 건 민간 기업인 상황입니다.그래서 러시아에선 요즘 스태그플레이션(물가급등+경기침체)이 경제계의 큰 화두입니다. 러시아 싱크탱크 CMASF가 중기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우려된다고 경고했고요, 이게 맞냐 아니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일단 러시아 정부는 올해 1~2% 사이의 완만한 경제성장, 즉 연착륙을 예상합니다. 그래서 전쟁 끝나면?전쟁으로 이룬 경제성장은 원래 오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국가의 미래를 저당 잡기 때문이죠. 전쟁으로 인해 장기적인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교육과 과학기술, 건강에 대한 투자는 대폭 줄어들었고요. 대신 탱크와 총알을 만들고, 군인을 먹이고 수송하는 생산성 낮은 분야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두뇌 유출과 인구 감소까지. 국가의 성장곡선이 궤도를 심각하게 이탈한 상황입니다. 러시아 경제학자 블라디슬라프 이노젬체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러시아는 현대화로 가는 모든 길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안정은 있지만 발전은 없습니다.”즉, 지난 3년은 러시아 경제가 꽤 잘 버텼지만, 이대로 계속 갈 순 없습니다. 아마도 크렘린도 이를 느끼고 있었을 거고요. 바로 그 타이밍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 협상이라는 동아줄을 내려준 셈이죠.그럼 만약에 이 전쟁이 끝난다면, 그땐 러시아 경제가 어떤 국면을 맞이하게 될까요? 일단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종전이 경기침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전쟁 특수가 끝나면서 무기 공장의 일자리는 줄어들 거고, 실업률도 치솟을 테니까요.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 불가피합니다. 과열됐던 경제가 정상화하려면 냉각이 필요한 법이니까요.대신 러시아 경제는 제재에서 드디어 벗어나 한발짝 나아갈 겁니다. 더 많은 석유 달러를 벌어들이고, 진짜 필요한 서방 첨단기술을 사들일 수 있게 되겠죠. 러시아 증시가 들썩거리는 이유일 텐데요. 그런데 러시아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은 도대체 어떻게 될는지. 여전히 많은 물음표가 따라붙습니다. By.딥다이브스타벅스 대신 스타스 커피를 마시고, 자라 대신 MAAG에서 옷을 사는 러시아인들. 전쟁과 제재라는 악조건에도 금세 적응해버린 러시아 경제가 놀라운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종전 기대감이 커지면서 투자자들이 다시 러시아 자산으로 눈을 돌립니다. 전쟁 기간 러시아 경제는 예측을 깨고 호황을 누렸죠. 지난해 GDP 성장률은 4.1%에 달합니다. -‘군사적 케인스주의’ 효과입니다. GDP의 7%로 늘어난 국방지출,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는 무기 공장이 임금 인상과 소비 증가를 가져왔죠. 1년 만에 임금이 20% 넘게 뛰면서 소비자들의 낙관론은 커집니다. -하지만 이제 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노동력이 바닥나면서 인플레이션이 심상찮죠.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21%로 높였지만, 되레 스태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단 분석도 나옵니다. 전쟁이 만든 거품이 꺼질 때가 됐습니다.*이 기사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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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 깨어났다…트럼프가 촉발한 ‘자주국방’ 각성[딥다이브]

    수렁, 쇠락, 침몰. 한동안 독일 경제엔 이런 단어가 따라붙었죠. 2년 연속 경기침체에 빠진 데다, 다시 성장 궤도를 타기 위한 구조 개혁도 지지부진했기 때문인데요. ‘유럽의 병자’로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독일이 갑자기 깨어났습니다. 16년 만에 헌법을 개정해 대대적인 국방·인프라 투자에 나서겠다며 정치권이 팔을 걷어붙였죠. 이게 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나비효과인데요.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독일의 각성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안보를 위해선 무엇이든 한다“전후 독일 역사에서 가장 역사적인 패러다임 전환 중 하나다.”(도이체방크 수석 이코노미스트 로빈 윙클러)“완전한 게임체인저.”(뒤셀도르프대학 옌스 쥐데쿰 교수)“독일이 성장의 물꼬를 트고 있다.”(JP모건애셋매니지먼트 카렌 워드 전략가)독일의 차기 총리인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가 4일 발표한 헌법(기본법) 개정 합의안에 대한 평가입니다. 합의안 골자는 정부의 차입 한도를 규정한 ‘부채 브레이크’에서 국방비를 예외로 하는 것. 즉 재정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국방비를 무제한 확장할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겁니다. 이와 함께 5000억 유로(778조원)의 인프라 투자기금 설립, 주정부에 대한 부채 규칙 완화도 담겼죠. 한마디로 독일이 천문학적인 국방·인프라 투자로 나아가기 위한 문을 활짝 열기로 한 겁니다. 주식시장은 환호했고요(독일 DAX지수 5일 3.3% 상승). 채권시장에선 독일 정부가 국채 발행에 뛰어들 거란 기대감으로 독일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1997년 이후 가장 많이(0.31%포인트) 급등했습니다.그동안 독일은 헌법이 정한 ‘국내총생산(GDP)의 0.35%’의 재정적자 한도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이 엄격한 제한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메르켈 총리 시절인 2009년 처음 생겨났는데요. 재정 건전성을 지키자는 취지였지만, 실제론 독일 경제를 옥죄는 족쇄로 작용했습니다. 정부부채 비율이 대단히 낮은 선진국인데도(GDP의 63%), 스스로 만든 룰에 묶여 제대로 투자할 수 없었던 거죠.부채 브레이크를 이제 좀 풀자는 논의는 예전부터 나왔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다당제 정치 지형에선 어떤 개혁도 불가능해 보였죠.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기 위한 설득과 합의 과정이 너무나 험난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함정이랄까요. 사실 메르츠 차기 총리 역시 2월 23일 연방 선거 전엔 부채 브레이크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요.그런데 이렇게 180도 입장을 바꿔서 갑자기 역사적인 합의에 이를 줄이야.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의석수 3분의 2 이상 찬성에 이르려면 녹색당까지 추가로 끌어들여야 하지만, 아마도 가능할 거란 관측이 나오죠.결정이 느리기로 유명한 독일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움직였을까요. 이게 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덕분입니다. 유럽 외교관계위원회의 수석 정책 펠로우인 야나 푸글리에린은 FT에 이렇게 말했죠. “메르츠 차기 총리는 독일과 유럽에 대한 절대적인 비상 상황을 실제로 봤기 때문에 그렇게 빠르고 단호하게 행동합니다. 최근 몇 주 동안 트럼프 행정부의 행동이 없었다면 이건 불가능했을 거예요.”2월 28일 트럼프-젤렌스키 정상회담은 완전히 달라진 유럽 안보의 현실을 드러내 줬습니다.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중단은 독일엔 충격이 아닐 수 없죠. 어쩌면 러시아의 다음 표적이 나토(NATO) 회원국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 동맹국 미국에 안보를 의지할 수 없다니. 정신이 번쩍 든 겁니다.메르츠 차기 총리는 이번 합의안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 대륙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위협을 고려할 때, 이제 우리의 방어 규칙은 ‘무엇이든지’가 되어야 합니다.”그 많던 전차는 어디로?평화배당금. 냉전이 끝나고 국방비를 줄여 생긴 여유 예산을 마치 배당금처럼 쓰는 걸 뜻합니다. 독일은 역시 지난 수십 년 동안 국방비 지출을 크게 줄여왔고요. 이로 인해 생겨난 평화 배당금은 거대한 복지국가 건설에 쓰였습니다.그 결과 유럽 최대이자 세계 3위 경제대국인 독일의 군사력은 수십 년에 걸쳐 쪼그라들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주요 무기 현황이죠. 냉전 직후인 1992년 이후 독일군이 보유한 주요 무기 수는 아래 그래프처럼 급속히 줄었습니다. 그래프에선 생략했지만 전투기(1992년 553→2021년 226대), 단거리 방공시스템(680→12개)도 급감했죠.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고, 독일은 무기 지원에 나섭니다. 이때부턴 독일도 태세를 바꿔 다시 국방비를 늘리고, 무기고를 다시 채워나가기 시작했는데요. 문제는 독일의 재무장 속도가 너무 느리고, 규모도 형편없이 작았다는 겁니다. 지난해 키엘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뒤 독일은 연평균 14대 전투기, 49.2대 전차, 8.8대의 곡사포를 주문했다는데요. 이런 속도이면 독일이 2004년 수준의 전차 역량을 되찾는 데 40년, 곡사포 분야는 100년(!)이 걸릴 거라는 분석이죠. 너무 한가하게 굴고 있는 겁니다. 러시아는 한 해에 1500대의 전차를 생산할 수 있다는데 말이죠. 보고서 저자인 군트람 볼프 연구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직면한 상황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접근 방식을 쓰는 건 태만하고 무책임하다”고 일갈했습니다. 물론 독일 국방비 지출은 2024년 GDP의 2.1% 수준까지 늘어났습니다. 이전 30년 넘게 줄곧 1%대였고, 상당 기간 1%대 초반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죠. 헌법이 정한 엄격한 재정적자 제한 때문에 이 정도 하기도 쉽진 않았는데요. 하지만 미국은 물론 다른 유럽 선진국과 비교하면 아직 높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회원국에 ‘GDP 5% 방위비’ 지출을 요구하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고요.그럼 앞으론 어떨까요. 베를린 장벽 붕괴(1989년) 이전 냉전 시대, 독일은 GDP의 3~3.5%가량을 국방비로 썼습니다. 그동안 뒤처진 군사력을 재정비하려면 다시 냉전 수준 지출이 필요할 판인데요. 골드만삭스는 2027년까지 독일 국방비가 GDP의 최대 3.5%로 불어날 거라고 예상합니다.이런 분위기 덕분에 지금 유럽 방산주 주가는 치솟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프랑스 탈레스, 영국 BAE시스템스, 독일 헨솔트와 티센크루프 등이 모두 올해 들어 주가가 급등했고요. 특히 독일 최대 방위사업체로 대포·장갑차·탄약 제조에 특화된 라인메탈(Rheinmetall) 주가상승이 눈에 띄는데요. 올해 들어 주가 상승률 99%. 지난해 11월 트럼프 당선 이후로는 150%나 올랐습니다. 참고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전과 비교하면 무려 1250% 상승.라인메탈 CEO 아민 파퍼거는 지난달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기대합니다. “트럼프는 미국이 유럽 안보를 다룰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회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죠. 우리는 (다른 방산기업을) 인수하고, 막대한 투자를 할 것입니다.”다음은 징병제 부활?여기까지 정리하자면, 독일이 달라졌습니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제 빚을 왕창 내서라도 무기를 사서 채워넣기로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까지 버릴 수 있단 두려움이 분열된 정치권을 하나로 통합시킨 덕분이죠. 자, 그럼 혹시 이것도 가능할까요? 징병제 부활.독일은 2011년 군대 징집을 중단했죠. 더 이상 대규모 군대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됐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블록 간 대립은 끝났고, 다시 재현될 조짐도 없다고 본 거죠. 이미 서방에선 징병제가 옛 유물이 되어가던 시점이었습니다. 미국은 1973년 일찌감치 모병제로 전환했고 대부분 나토 국가도 1990년대엔 징병제를 없앴으니까요.현재 독일군은 약 18만명. 냉전 시기 정점(약 49.5만명)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칩니다. 독일 연방방위군 사령관 카르스텐 브로이어는 현재 독일군 인력이 최소 10만명 부족하고, 제대로 된 군대가 되려면 46만명이 돼야 한다고 말하죠.징병제 재도입은 독일 정치권의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현 국방장관 보리스 피스토리우스는 지난해 11월 스웨덴식 징병제 도입을 주장하기도 했죠. 2017년 징병제를 부활한 스웨덴은 만 18세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검사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건강하고 체력 좋고 똑똑한 일부 인원(약 30%)을 징집하죠.하지만 독일의 징병제 부활을 두고는 “청소년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는 반대론(중도우파 ‘자유민주당’)부터 ‘2년 의무복무’ 주장(극우 성향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까지,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립니다. 재정 규칙보다 오히려 합의에 이르기가 더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죠.어쨌든 잊혀졌던 징병제까지 이토록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됐다는 건 그만큼 국방이 독일의 중요한 실존적 문제로 떠올랐다는 뜻입니다. 평화배당금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데요. 그동안 복지국가를 떠받쳐놨던 평화배당금이 이렇게 사라지면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어디로 향해 갈까요. FT 칼럼니스트 자난 가네쉬의 답은 간단합니다. “유럽은 복지국가(welfare state)를 축소하고 전쟁국가(warfare state)를 건설해야 한다”는 거죠. 그동안 개혁이 필요한 걸 알면서도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사회지출에 대한 삭감이 본격화될 겁니다. 그렇게 독일은 깨어날 거고, 어쩌면 그 산업적인 힘과 GDP 성장, 강력한 군대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죠. 그리고 이 변화를 촉발한 주인공이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을지도. By.딥다이브유럽의 병자인 줄 알았던 독일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릴 준비를 합니다. 과연 다시 한창때처럼 그렇게 뛸 수 있을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독일이 국방비의 무제한 차입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합니다. 독일의 재정 확장을 가로막던 ‘부채 브레이크’를 풀겠다는 겁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킨 안보 불안이 느리기로 유명한 독일 정치권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금융시장은 환호합니다. -냉전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독일 군사력은 쪼그라들었습니다. 모든 무기가 부족한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무기고가 빠르게 비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다시 메우려면 국방 지출을 대거 늘려야 합니다. 라인메탈을 비롯한 유럽 방위산업 기업엔 큰 호재입니다. -독일은 14년 전 중단한 징병제도 부활시킬까요. 이를 둘러싼 논의는 점점 활발해집니다. 평화배당금 시대는 끝났고, 복지지출 삭감은 불가피합니다. 더 적은 복지와 더 많은 국방비의 새로운 시대가 찾아옵니다. 역사적인 전환점이죠.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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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72억, 홍콩 55억…영주권 사고파는 ‘골든 비자’의 세계 [딥다이브]

    초부유층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럭셔리 신상품 출시가 예고됐습니다. 가격은 단돈 500만 달러(약 72억원).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도입을 예고한 새로운 ‘골든 비자(Golden Visa)’입니다.거액을 내면 영주권 또는 시민권을 준다는 발상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누가, 왜 그 돈을 기꺼이 지불할까요.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글로벌 산업, 골든 비자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월 2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신상 ‘골드 카드’는 무엇?먼저 개념부터 정리할게요. 영주권과 시민권, 둘은 다르죠.-영주권(또는 거주권)=외국인이지만(국적 안 바뀜) 그 나라에서 거주와 취업을 제한 없이 할 수 있는 권리(기간이 정해져 있으면 거주권, 계속 갱신할 수 있으면 영주권)-시민권=그 나라 국적을 획득함을 의미영주권자는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시민권자보다는 제한됩니다.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에 제약이 있고요. 특히 눈에 띄는 차이는 여권을 주냐 안 주냐이죠. 영주권자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 나라 여권을 받을 수 없습니다.미국에선 영주권을 ‘그린 카드(Green Card)’라고 부르는데요.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 영주권을 500만 달러에 판매하겠단 구상을 밝혔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골드 카드(Gold Card)를 판매할 겁니다. 우린 그 카드에 약 500만 달러 가격을 책정할 거고, 그것은 시민권으로 가는 길이 될 겁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이걸 사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겠죠.” 더불어 그는 골드 카드가 100만 장쯤 팔릴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미친 듯이 팔릴 것 같아요. 시장이에요(It’s a market).”하워드 루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이 골드 카드가 35년간 시행돼 온 투자 이민제도 EB-5 프로그램을 대체한다고 설명했습니다. EB-5 비자는 최소 80만 달러를 미국 기업에 투자해서 최소 1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조건으로 영주권을 내주는 제도인데요. 이건 없앤다는 겁니다. EB-5는 일자리 창출이란 목적이 뚜렷한 데다, 연간 발행 한도도 1만개로 정해져 있어서 대놓고 장사하는 느낌까진 아니었는데요.이와 달리 트럼프 대통령의 골드 카드는 아마도 500만 달러를 정부에 수수료로 직접 지불하는 식이 될 거라고 합니다. 루트닉 장관은 “우리는 그 돈을 사용하여 (재정) 적자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하죠. 적자 감축을 위해 정부가 고액 영주권 판매에 나선다는 점을 당당하게 밝힌 셈인데요. 혹시 러시아 재벌들에게도 그걸 팔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주 좋은 사람인 러시아 재벌들을 알고 있어요.”요즘 핫한 골든 비자는 이것경제적 기여를 하면, 즉 돈을 내면 신속하게 영주권(또는 거주권)을 내주는 이런 제도. 흔히 ‘골든 비자(Golden Visa)’라고 부르죠. 이 분야 전문가인 크리스틴 수락 런던정경대(LSE) 교수에 따르면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약 60개국이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또 돈으로 아예 시민권(국적)까지 살 수 있는 ‘골든 패스포트(Golden Passport)’ 제도가 있는 나라도 10여 개국이 있는데요. 주로 몰타·도미니카 같은 작은 나라이지만, 오스트리아도 이에 해당됩니다(단, 오스트리아는 금액이 최소 950만 달러로 매우 비쌈).언제부터 영주권 또는 시민권이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이 됐을까요. 이런 골든 비자 또는 골든 패스포트가 처음 생겨난 건 1980년대. 1983년 몇천달러에 여권을 판매한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 통가가 이 분야 선구자였습니다. 그리고 1986년 캐나다가 골든 비자를 도입하면서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죠. 당시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불안해하던 홍콩인들이 캐나다의 주요 고객이 됐고요. 이어 1990년 미국이 일자리 창출과 외국인 투자 유치를 이유로 EB-5를 도입합니다.판이 본격적으로 커진 건 2010년 전후. 2008년 영국을 시작으로 아일랜드·포르투갈(2012년), 스페인·그리스·헝가리(2013년) 등 재정 사정이 어렵던 유럽 국가가 줄줄이 골든 비자를 도입합니다. 주로 현지 부동산에 수십만 유로를 투자하면 5~10년 거주권을 내주는 식이었는데요. 이런 골든 비자를 얻으면 유럽 29개국이 체결한 ‘솅겐 조약’에 따라 다른 EU 국가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죠. 또 몇 년 지나면 EU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통로도 되고요. 덕분에 골든 비자가 큰 인기를 끌면서 남유럽 국가 재정엔 쏠쏠한 도움이 됐습니다.골든 비자가 대히트를 친 나라로는 말레이시아가 있습니다. 2002년 시작된 ‘마이 세컨드 홈(MM2H)’ 프로그램은 중국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을 연간 수천 명씩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죠. 최근 이 시장의 절대 강자는 아랍에미리트(UAE)입니다. 최소 200만 디르함(약 7억8000만원)을 투자하면 5~10년 거주 허가를 내주는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2019년 도입했는데요. 2023년 한 해 동안 발급된 게 무려 15만8000건. 이제 전 세계 골든 비자 발급 건수의 80% 이상을 UAE가 차지할 정도입니다. UAE엔 개인소득세가 없다는 점이 특히 유럽 부호들에게 어필했죠.한국에도 골든 비자에 해당하는 제도가 있는 건 아시죠? 2010년 제주도부터 도입된 ‘관광·휴양시설 투자이민제’인데요. 특정 지역 부동산이나 공익사업에 10억원 이상 투자하면 거주 비자(F-2)를 내주고, 5년간 자격을 유지하면 영주권(F-5)을 줍니다. 다만 이 프로그램으로 국내 체류하는 외국인은 2255명으로 그리 많진 않은데요(이 중 94%는 중국인). 참고로 일본과 중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습니다. 자금세탁 우려+집값 급등수억 원 투자금을 턱턱 내놓는 부유한 이민자.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땐 반가운 존재일 수밖에 없겠죠. 실제 그리스·포르투갈에선 한때 골든 비자가 외국인 직접 투자(FDI)의 10~15%를 차지할 정도로 기여도가 컸습니다. 국가 부도로 무너졌던 그리스 부동산 시장을 회복시킨 것도 골든 비자 구매자들이었고요.그럼 골든 비자나 골든 패스포트 구매자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일까요. 크리스틴 수락 LSE 교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인이 역시 가장 많고요. 이어 중동과 러시아가 큰 수요처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지난 30년 동안의 엄청난 부의 축적과 권위주의 통치, 지정학적 불안 또는 전쟁이 결합된 곳에서 자신의 선택권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이라는 설명이죠. 즉, 그 나라가 좋아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모국에 대한 불안·불만이 골든 비자·패스포트 구매의 더 큰 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럼 혹시 그 중엔 사기꾼이나 범죄자, 스파이도 섞여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OECD와 EU 집행위원회가 골든 비자·패스포트 제도에 우려를 표하는 이유입니다. 자금세탁 단속을 어렵게 만들고 탈세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거죠. 공무원의 부패나 리베이트 관행, 편법이 결합되면 위험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바로 이런 이유로 영국과 아일랜드는 2023년 골든 비자를 폐지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안보 불안감이 커지던 시점이었죠. 호주는 역시 스파이와 범죄자가 유입될 수 있고 경제에 별 도움이 안 된단 이유로 2024년 1월 이를 없앴습니다.스페인은 오는 4월 골든 비자 제도를 종료하는데요. 이는 안보보다는 부동산 시장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골든 비자 자금 대부분이 부동산에 투자되면서, 집값 급등의 주범이란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죠. 역시 부동산 문제로 골치 아팠던 포르투갈은 2023년 골든 비자의 투자 목록에서 부동산을 제외했습니다. 즉, 이제 집을 사는 걸로는 안 되고 각종 펀드에 투자해야 골든 비자가 나오죠.이만한 돈벌이가 없다그래서 골든 비자 확대의 유행이 이제 저물고 있다는 분석이 한동안 나왔는데요. 하지만 지난 십수 년 동안 흥행성과 수익성이 이미 검증된 시장이잖아요. 정부 입장에선 이렇게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는 시장이 많지 않죠. 그래서 빠져나가는 국가 못지않게 새로 뛰어드는 국가가 상당합니다.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갈수록 커지는 데다, 코인·주식으로 떼돈을 번 초부유층이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수요는 여전히 건재하니까요.일단 홍콩이 지난해 3월 골든 비자를 8년 만에 부활시켰습니다. 중국 정부 입김이 세지면서 홍콩에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자, 이를 메우기 위해 나선 건데요. 홍콩 골든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 채워야 할 순자산 요건은 3000만 홍콩달러(약 55억원). 금액 기준이 상당히 높은 데도 지난해 말까지 800건이나 신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덕분에 가라앉던 홍콩 고급 부동산 시장에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죠.EU 가입국 중에선 헝가리가 가세했습니다. EU 집행위원회가 반대하는 거 뻔히 알면서도, 외국인 투자를 늘리겠다며 지난해 7월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다시 시행했죠. 부패 의혹으로 2017년 폐지한 지 7년 만의 부활입니다. 최소 25만 유로를 기금에 투자하면 20년(10년 뒤 1회 갱신)의 거주권을 받을 수 있다고 하죠. 경기 침체에 빠진 뉴질랜드도 골든 비자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뉴질랜드는 골든 비자 프로그램이 있긴 했지만, 2022년 기준을 너무 높여버린 바람에 찾는 이가 없었는데요. 올해 4월부터는 500만 뉴질랜드 달러(약 41억원)로 최소 투자금 기준을 대폭 낮추기로 했습니다. 또 영어 능력 제한을 없애고, 의무 체류 기간도 21일로 확 줄였죠. “투자자들이 목적지로 뉴질랜드를 선택하게 하기 위해 투자 비자를 더 간단하고 유연하게 만들었다”는 게 에리카 스탠퍼드 이민부 장관 설명. 영어 못하고 뉴질랜드에 거의 안 와도 돈만 내면 오케이라니. 절박함이 느껴집니다.그리고 급기야 미국까지 뛰어들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을 생각하면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는데요. 골든 비자를 이민자 유치보다는 돈벌이 수단으로 본다는 의미이겠죠.트럼프 대통령 말대로 미국 새 골든 비자 수수료는 500만 달러로 책정될까요? 아직 구체적인 방안이 나온 건 아니라 두고 봐야 하는데요. 솔직히 500만 달러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너무 비싸긴 합니다. 다른 나라는 펀드나 부동산 자산에 투자하는 금액이 몇억~몇십억원인 거니까, 원금 회수 가능성 있긴 한데요. 이건 한번 내면 사라져 버리는 수수료니까요.물론 세상엔 초부유층이 많고요. 아무리 비싸도 꼭 미국으로 오길 원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투자이민 컨설팅업체 헨리앤드파트너스의 개인 고객 책임자 도미닉 볼렉은 FT에 이렇게 말하죠. “(미국은) 아직도 부의 창출과 부의 보존에 있어서 놀라운 나라입니다. 중국과 인도는 부의 창출 기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부를 보존하는 게 어려워지죠.” 미국 영주권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보험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보험료로 그 정도 지불할 부유층은 분명히 있겠죠.지난해 미국 재무부가 발표한 연방정부 재정적자는 1조8330억 달러(약 2510조원)인데요. 단순 계산으론 100만개까지도 필요 없고 골든 비자를 36만6600개만(?) 팔면 재정적자는 바로 해소되는 셈입니다. 금전적으로는 밑질 것 없는 장사이니 해볼 만은 하겠네요. 어쩌면 영주권은 미국이 내다 팔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돈이 되는 자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By.딥다이브영주권과 시민권이 ‘사치품’이 되어버렸습니다. “부유층이 자유를 사는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데요.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지니까 시장이 형성된 거겠지만, 왠지 놀이공원 우선탑승권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00만 달러짜리 골드 카드를 팔겠다는 구상을 밝혔습니다. 500만 달러를 미국 정부에 내면 신속하게 미국 영주권을 주겠다는 거죠. 그 돈은 재정적자 감축에 쓰겠다고 합니다. -돈으로 영주권을 사는 ‘골든 비자’는 전 세계 약 60개국이 운영 중입니다. 1980년대 처음 등장해, 남유럽 국가가 재정위기를 겪은 2010년쯤부터 시장이 커졌죠. 하지만 자금세탁, 세금회피, 집값 급등 같은 부작용은 꾸준히 지적됩니다. -한동안 골든 비자를 없애는 국가가 이어졌지만, 최근엔 부활시키는 나라도 늘어갑니다. 다 돈 때문이죠. 홍콩·헝가리·뉴질랜드가 골든 비자 제도를 되살리거나 문턱을 대폭 낮춰 부유층에 어필 중입니다. 그리고 이제 미국까지. 가장 돈이 되고 귀한 자산을 내다 팔려는 나라들이 점점 많아지는 걸까요. *이 기사는 2월 2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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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바랜 영원의 약속…다이아몬드 종말론 나오는 이유[딥다이브]

    아프리카 보츠와나 광산부터 뉴욕 5번가 보석점까지. 연간 100조원 규모로 반짝이던 산업이 빛을 잃어갑니다. 바로 다이아몬드 이야기이죠. 다이아몬드 가격이 급락하면서 업계 최강자 드비어스가 매물로 나오고, 인도 공장이 줄줄이 문 닫고, 보츠와나 정권이 58년 만에 교체되기까지 했는데요.수백 년 동안 불황의 파고를 넘겨온 다이아몬드. 하지만 실험실 다이아몬드라는 쌍둥이로 인해 전례 없는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영원하다는 약속이 무색해진 다이아몬드 산업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대량 실직에 정권 교체까지화학적으로는 100% 탄소, 상업적으로는 100% 마케팅. 다이아몬드의 진짜 정체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이거죠. 20세기 초반까지 초부유층이나 끼는 호화사치품이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진정한 사랑의 상징으로 둔갑시킨 건 드비어스의 이 유명한 광고문구였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A Diamond is Forever)”.1947년 미국 광고대행사가 만든 이 문구를 내세운 대대적인 마케팅 공세는 적중했죠. ‘결혼반지는 다이아몬드’라는 인식을 대중에 심어주는 데 성공했고요. 이때부터 청혼할 땐 루비나 사파이어가 아닌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미는 게 공식처럼 자리 잡습니다. 미국 매체 애드에이지(AdAge)는 1999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를 20세기 최고의 슬로건으로 꼽았죠.그런데 이 천재적인 마케팅의 주인공이자, 세계 최대(금액 기준) 다이아몬드 생산업체인 드비어스(De Beers). 얼마 전 지난해 실적을 공개했는데 많이 어렵습니다. 매출(33억 달러)이 23%나 줄었고요. 재고물량만 20억 달러어치가 쌓여, 2008년 금융위기 수준입니다. 막대한 재고를 털기 위해 콧대 높은 드비어스가 지난해 12월 이례적으로 원석 가격을 10~15%나 깎았는데요. 블룸버그에 따르면 그런데도 고객들은 비싸다며 거래를 거부했다죠.모회사 앵글로 아메리칸(Anglo American)은 지난해부터 드비어스에서 발을 빼기 위해 매각을 모색 중인데요. 최근의 손실을 반영해 드비어스 장부가치를 지난해 76억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대폭 낮췄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선 여전히 너무 비싸다는 반응이죠. 사겠다는 곳이 없으면 앵글로 아메리칸은 드비어스 IPO를 추진할 수도 있습니다.이 산업이 얼마나 빠르게 추락 중인지는 다이아몬드 가격이 잘 보여줍니다. 1캐럿 다이아몬드 가격이 블룸버그 표준 가격 기준으로는 3420달러(약 488만원). 직전 고점인 2022년 5월(6720달러, 960만원)과 비교하면 거의 절반 수준입니다. 반등할 기세 없이 꾸준히 하락 중이죠. 좀처럼 바닥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다이아몬드 절단·연마의 세계적인 중심지로 통하는 인도 수라트시. 2023년 말 전 세계 최대 규모 사무빌딩으로 기록된 다이아몬드 거래소를 개장하기도 한 ‘다이아몬드 시티’인데요. 지금은 다이아몬드 공장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실업자가 넘쳐나는 절망의 도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18개월 동안 자살한 실직 다이아몬드 노동자만 71명에 달한다는 마음 아픈 뉴스가 이어집니다.추락하는 다이아몬드는 정권도 갈아치웁니다. 지난해 10월 실시된 보츠와나 총선에선 집권당이 참패해 4위로 주저앉았죠. 1966년 독립 이후 58년간 집권해 온 여당의 굴욕적인 패배이자, 놀라운 정치적 전환점이었는데요. 막대한 다이아몬드 매장량 덕분에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살고 안정적인 나라로 꼽히던 보츠와나. 하지만 다이아몬드 시장의 침체로 실업률이 27%로 치솟았고 정권은 심판받았습니다.중국 시장은 사망2021년부터 2022년 초, 다이아몬드 시장은 대활황이었습니다. 팬데믹 직후 ‘보복소비’ 열풍이 분 데다, 미뤘던 결혼식이 한꺼번에 열렸기 때문인데요. 돌이켜보면 마지막 불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파티는 끝났고, 남은 건 혼란스러운 잔해들뿐입니다. 사실상 죽어버린 중국 시장, 그리고 천연 다이아몬드의 10분의 1 헐값이 된 실험실 다이아몬드가 그것이죠.중국 다이아몬드 시장의 붕괴는 놀라운 수준입니다. 다이아몬드 시장 분석가 폴 짐니스키는 중국 수요가 지난해 최대 50%나 줄었을 거라고 분석했죠. 중국은 이전 10년 동안 유지했던 세계 2위 다이아몬드 구매국 지위(1위는 미국)를 지난해 인도에 뺏겼습니다. “중국 시장은 죽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회복이 보이지 않는다”(루카라다이아몬드 CEO인 윌리엄 램)는 한탄이 업계에서 나오는데요.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경기 부진과 소비 침체, 그리고 결혼 감소 때문이란 각종 분석이 쏟아집니다. 중국인들이 지갑이 얇아지면서 실속을 챙기게 됐고요. 결혼 건수가 45년 만에 최저(610만6000건)로 떨어진 영향이 컸습니다. 동시에 중국 공산당의 ‘돈자랑 콘텐츠’ 단속도 한몫합니다. 지난해 중국 당국 지시에 따라 소셜미디어 기업들은 ‘부를 과시하고 돈을 숭배하는’ 콘텐츠를 내리고 계정을 폐쇄했죠. 가뜩이나 식어버린 소비심리에 찬물을 끼얹은 겁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중국 소비자들이 지난 몇 년 동안 다이아몬드값이 떨어지는 걸 봐버렸다는 겁니다. 마치 가격이 급락한 중국 부동산 시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듯이, 다이아몬드 구매도 피하고 있죠. 전형적으로 버블이 꺼지는 모습인데요. 대신 중국 젊은이들은 이제 가치저장소로서 투자가치가 있는 금을 사는 데 열중한다고 합니다.가짜 아닌 진짜 합성 다이아몬드호황과 불황의 주기는 다이아몬드 시장엔 익숙한 일입니다. 가깝게는 2020년 팬데믹과 2008년 금융위기를 견뎌냈고요. 역사적으론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1867년 직후, 대공황과 전쟁이 이어진 1930년대의 암울한 시절도 겪었죠. 다이아몬드 가격은 주기적으로 추락했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상승곡선을 그리곤 했습니다. 침체기가 지나고 나면 새로운 부자가 다시 생겨났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그들에게 매력을 뿜어냈으니까요.그런 점에서 중국 시장의 붕괴는 명백한 위험이지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다른 나라, 예컨대 인도나 아랍에미리트가 그 자리를 메워갈 겁니다. 정작 업계를 짓누르는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죠.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합성(Lab Grown) 다이아몬드의 공습입니다. 이에 대해 뉴욕의 다이아몬드 도매상 마니시 샤는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 없는 일입니다. 산업 전체가 혼란에 빠졌습니다.”스웨덴 한 실험실에서 다이아몬드를 세계 최초로 합성한 게 1953년. 그 뒤로 수십 년 동안 산업용으로만 쓰였던 실험실 다이아몬드가 기술 발전으로 보석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 지는 이제 10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전문가도 눈으로는 뭐가 천연이고 뭐가 합성인지 구별할 수 없죠. 채굴한 원석과 화학성분이나 물리적 특성이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에 ‘가짜’ 다이아몬드가 아닙니다. 단지 자연에선 10억년 이상인 제조기간이 실험실에선 2-3주에 불과하다는 차이이죠.품질은 같은데 더 싼 다이아몬드. 이 게임체인저에 많은 귀금속 브랜드가 열광했습니다. 심지어 드비어스조차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을 정도였죠. 여전히 천연 다이아몬드만 고집하는 롤렉스 같은 브랜드도 있지만, 브라이틀링 같은 명품시계 브랜드는 이미 합성 다이아몬드로 100% 전환했습니다. 전체 다이아몬드 주얼리 시장에서 합성품의 비중은 2015년만 해도 제로였지만, 이젠 20% 정도로 불어났을 걸로 추정됩니다.물론 다이아몬드가 천연인지 합성인지를 몇초 만에 구분해 내는 장비는 이미 나와 있습니다. 또 아무리 똑같아 보여도 엄연히 다른 제품이긴 하죠. 드비어스의 알 쿡 CEO는 최근 블룸버그TV에 출연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나리자 포스터를 미술관에 걸어놓고 사람들에게 진짜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진짜가 아니잖아요.”다이아몬드의 운명은?하지만 아무리 천연 돌과 구분된다 해도, 가격 차이가 한 10배쯤 난다면 소비자엔 매력적인 선택지 아닐까요. 이게 바로 최근 벌어지는 일입니다. 2015년 처음 합성 다이아몬드가 주얼리 시장에 선보였을 땐 천연 제품 가격의 90% 수준이었는데요. 지난 몇 년간 기술 발전과 공급 급증(주로 중국에서)으로 값이 뚝뚝 떨어져 도매가격은 이미 천연다이아몬드의 5~10%로 떨어졌습니다. 다만 소매가격은 그 정도까진 아니고 천연산의 4분의 1 정도에 머뭅니다. 소매상이 합성다이아몬드에서 마진을 엄청나게 챙기고 있단 뜻이죠.그럼, 이 저렴한 합성 다이아몬드의 공습은 어떤 지각변동을 일으킬까요. 컨설팅기업 매켄지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①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이어진다면?합성 다이아몬드가 결국 대세가 될 겁니다. 같은 품질이면 더 싼, 또는 같은 값이면 더 큰 합성 다이아몬드를 대부분이 선택하겠죠. 대신 틈새 고급품 시장은 따로 갈 겁니다. 천연 다이아몬드는 마치 클래식 자동차나 고급 빈티지 아이템 수집 같은 지위가 되는 셈입니다. 드비어스 같은 업체 입장에선 시장이 쪼그라든다는 뜻이니, 상당한 암울한 얘기인데요. 만약 천연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미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되레 흐뭇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걸 잘 간직해두면 대대로 물려줄 가보가 될지도 모르니까요.②합성 다이아몬드 가격이 훨씬 더 무지막지하게 떨어진다면?다이아몬드 업계 유력인사인 라파포트 그룹의 마틴 라파포트 회장은 이코노미스트에 이렇게 말합니다. “실험실 다이아몬드가 캐럿당 10~15달러인 시대가 곧 올 겁니다.” 만약 실험실 다이아몬드가 ‘가짜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큐빅 지르코니아 가격 수준이 된다면. 이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결혼반지에 다이아몬드를 박는 건 다이아몬드가 비싼 보석으로 보여서잖아요. 그런데 몇만원짜리 싸구려 돌과 누가 봐도 똑같아서 구분이 잘 안 된다면? 아무리 천연산이라고 해도 누가 굳이 비싸게 사서 끼려고 할까요. 매켄지는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합성이든 천연이든) 모든 다이아몬드는 단순히 유행이 지나고, 매력을 잃고, 더 이상 결혼반지 필수품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루비, 사파이어, 아니면 24K 금이 훨씬 나은 선택이 되겠죠. 다이아몬드의 완전한 몰락일 겁니다.어느 시나리오가 더 그럴듯해 보이시나요? 최근 이코노미스트 칼럼은 두 번째 시나리오를 지지하며 이렇게 조언합니다. “다이아몬드로 청혼하지 마세요.” 역시 영원한 건 없는 걸까요. By.딥다이브아무리 천재적인 세기의 마케팅도 파괴적 혁신 앞에선 무용지물인 걸까요. 그 혁신이 기존 제품뿐만 아니라 아예 시장 자체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니, 흥미롭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다이아몬드 가격이 3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급락하면서 업계가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적자에 시달리는 드비어스가 팔리게 생겼고, 인도 다이아몬드 공장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었고, 보츠와나는 58년 단일정당 통치가 무너졌습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중국시장의 붕괴입니다. 2010년 이후 성장을 떠받쳐온 중국 수요가 반토막 났습니다. 소비부진과 결혼감소, 공산당의 기강 단속이 영향을 미쳤죠. 중국에서 버블이 터진 셈입니다.-호황과 불황의 주기는 늘 있어왔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합성 다이아몬드의 등장으로 업계가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거죠.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는 실험실 다이아몬드는 이제 천연산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립니다. 이대로 합성 다이아몬드가 대세로 자리잡고 천연 제품은 골동품 같은 대접을 받게 될까요. 아니면 합성이든 천연이든 모든 다이아몬드가 시시해질까요. 업계는 생존을 위해 마케팅 묘수를 짜내지만 도전은 만만찮습니다.*이 기사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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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지율 81%인데 고꾸라지는 주가…포퓰리즘과 인도네시아 경제[딥다이브]

    요즘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스트이면서 ‘스트롱맨’ 스타일인 지도자가 대세이죠. 이 중에서도 떠오르는 샛별이라 할 만한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지난해 10월 취임한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입니다.프라보워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요. 한쪽으론 인기영합적인 정책에 재정을 퍼부으면서, 다른 한편에선 각 부처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가혹한 긴축 정책을 병행합니다. 복지 확대와 재정 건전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단 거죠. 대중은 이에 열광하며 경이로운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전 세계 투자자들은 영 못 믿겠다는 반응입니다.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한 인도네시아의 포퓰리즘 실험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무상 급식과 무료 검진80.9%. 지난달 집권 100일 차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프라보워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지지율입니다. 엄청나죠. 전임자 조코 위도도 전 대통령도 높은 인기로 유명했는데(지지율 65~75%), 이를 한참 뛰어넘는 수준입니다.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인도네시아 주식시장은 반대로 고꾸라지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 인도네시아 종합주가지수 상승률은 -6.59%. 한국(코스피 +7.65%)이나 홍콩(항셍 +11.17%)보다 낮은 건 물론이고, 요즘 증시 부진에 시달리는 인도(센섹스 -3%)나 말레이시아(-3%)보다도 저조한 성적입니다. 프라보워 대통령 취임 뒤 줄곧 증시는 내리막이죠. 해외 투자자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발을 빼고 있기 때문인데요.왜 국민은 프라보워 대통령에 열광하는데, 투자자들은 고개를 흔들며 빠져나갈까요. 국내에서 인기 끄는 분배 정책이 자칫 경제성장엔 오히려 마이너스일 수 있다고 여겨서죠.그럼, 프라보워 대통령은 취임 뒤 뭘 했을까요. 눈에 띄는 몇 가지 정책을 뽑자면 이런 겁니다.①학생 무상급식=프라보워 대통령 공약 중 가장 핵심이면서도 논란이 많았던 정책이죠. 전 세계 최대 규모의 학생 무상급식 계획. 1월 6일 드디어 공식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첫날 학교에서 점심을 제공받은 학생은 57만명이었고요. 이를 점차 확대해 2029년엔 8290만명 학생에 매일 점심 급식을 제공한다는 게 계획이죠. 1인당 식사에 드는 비용은 1만 루피아(887원). 전액 정부 예산으로 지원됩니다. 무상급식에 대한 학생 반응은 다양한데요(맛있어요, 두부는 싫어요, 같이 먹어서 좋아요 등). 적어도 배를 곯는 학생은 없게 된다는 건 긍정적이죠. 또 급식 식재료나 식사를 납품하는 산업을 키우는 효과도 기대됩니다. 다만, 전면 시행 시 연간 약 40조원의 예산이 들어갑니다.②전 국민 무료 건강검진=인도네시아의 2억8000만명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무료 건강검진이 도입됩니다. 2월 10일 처음 시행됐는데요. 모든 국민에 건강검진 바우처(약 17만원의 가치)를 지급하고, 생일 한 달 안에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거죠. 검진 바우처가 일종의 정부가 주는 생일선물인 셈입니다. 인도네시아는 결핵 발병률이 특히 높은 나라(10%)이죠. 이런 전염병 예방에 무료 검진이 효과적일 거란 게 의학계 의견인데요. 다만 공공보건소가 그 많은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③최저임금 6.5% 인상=지난해 말 프라보워 대통령은 2025년 최저임금 6.5% 인상을 발표했습니다. 정부 규정에서 공식으로 정한 것(물가상승률, 경제성장률 등 반영)의 거의 두배 수준이죠. 6.5%라는 수치가 발표되자 노동계는 환영했지만, 상공회의소 측은 “6.5% 수치가 어느 공식에서 나왔느냐”며 당황했는데요. 프라보워 대통령은 “우리는 근로자 복지 개선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부가세 인상은 없던 일로왜 프라보워 대통령이 인기를 끄는지 좀 감이 오시나요? 그는 국민이 좋아하는 정책을 하는 것 못지않게 싫어할 만한 정책을 하지 않는 데도 적극적입니다. 최근엔 이런 행보를 보였죠.①부가세 인상 취소=1월 1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대통령이 계획됐던 부가가치세 인상을 취소하고 현재의 11%로 유지하는 특별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2025년 1월 1일 부가가치세를 11%에서 12%로 올린다는 계획은 한참 전인 2021년 제정한 세법에서 이미 정해놨던 내용인데요. 프라보워 대통령이 시행 막판에 이걸 뒤집은 겁니다. 그 결과 부가세 인상은 일부 사치품에만 적용되죠. 개인용 제트기, 요트, 고가 주택이 대상입니다. 당연히 국민은 이를 대환영했습니다.②LPG 보조금 개혁 철회=한동안 인도네시아는 주로 가정에서 조리용으로 쓰는 3㎏짜리 둥근 초록색 LPG 가스통(‘멜론 가스’라고 불림)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정부 에너지부가 2월 1일부터 소규모 소매점의 LPG 판매를 금지했기 때문인데요. 막대한 LPG 보조금이 엉뚱한 데로 새 나가는 걸(소매점의 부당한 가격 인상) 막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공식 대리점까지 가서 긴 줄을 서야만 하자, 소비자 불만이 폭발했고요. 급기야 한 노인이 1시간 동안 줄을 서다가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졌죠. SNS에서 반대운동이 불붙자(해시태그는 #lpg3kg) 결국 프라보워 대통령이 나섰고요. LPG 소매점 판매 금지 정책은 바로 철회됩니다.사실 부가세 인상이나 에너지 보조금 개혁 정책은 새로 도입되는 복지정책(무상 급식, 무료 건강검진 등)에 드는 막대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국민이 싫어한다고 이를 다 철회해 버렸으니. 그 많은 돈을 이제 어디서 마련해야 할까요.그래서 프라보워 대통령이 꺼낸 카드가 있습니다. 바로 1월 22일 발표한 ‘예산 지출 효율화 대통령령’이죠. 한마디로 말해, 올해 정부 예산 중 약 8.4%에 해당하는 27조원가량을 삭감해 버렸습니다. 예산이 지난해 다 짜여서 집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싹둑, 잘려 나가버린 거죠.예산 가위질로 대혼란예산이 모자란다며 정부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대통령이 나서서 집행 중인 예산을 삭감하는 건 우리에겐 낯선 일인데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법으로 재정적자가 GDP의 3%를 넘지 못하게 상한선이 정해져 있어요. 상당히 엄격한 규제인데요. 이 3% 상한선을 넘기면 법 위반이라 큰일 나는 일로 다들 여기기 때문에, 대통령이라고 해도 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그런데 무상급식 도입하면 재정적자가 지난해 GDP의 2.29%에서 올해는 3.1%로 확 불어날 거란 분석이 이미 나왔거든요. 3% 상한선은 절대 넘길 수 없고, 그렇다고 세금을 올려서 재정적자를 메울 수도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입니다. 정부 지출 중 다른 부분을 팍팍 쳐내야죠.그래서 예산이 대폭 깎인 정부 부처와 국가기관은 지금 난리입니다. 중앙부처는 사무실 전등을 끄고, 엘리베이터 운행을 중단하고, 문구류 구매를 90% 줄이고, 주 2일 재택 근무를 실시했고요. 출장 경비가 반토막 나서 이제 장관도 이코노미석을 타야 할 판입니다. 한동안 공무원 보너스가 폐지될 거란 흉흉한 소문이 돌았죠(이후 대통령실은 보도를 부인). 국립도서관은 일요일 휴관을 발표했다가, 반대 여론에 못 이겨 이를 취소하기도 했습니다.현재 각 부처는 어느 예산항목을 얼마나 줄일지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있는데요. 아마도 의약품 조달(보건부), 대학 지원(교육부), 연구개발(과학기술부) 같은 사업이 크게 영향을 받을 겁니다. 특히 공공사업부는 예산이 70%나 깎였기 때문에, 도로·교량 같은 인프라 건설사업은 대거 중단될 가능성이 큽니다.여기서 놀라운 건 정작 막대한 예산이 배정된 국방부와 경찰청 같은 기관은 한 푼도 깎이지 않았다는 점인데요. 프라보워 대통령은 4성 장군이자 국방부 장관 출신으로, 방위력 강화를 매우 강조하는 인물입니다.인도네시아 경제정책의 대전환이런 급격한 예산 재분배에 대한 반발이 당연히 터져 나옵니다. 하지만 프라보워 대통령은 반대 세력을 이렇게 비판하며 밀어붙이고 있죠. “관료조직엔 마치 작은 왕이 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돈을 절약하고 싶습니다. 그 돈은 국민을 위한 겁니다.”프라보워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인도네시아 경제 정책의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전임 위도도 대통령은 인프라 투자 중심의 정책으로 인도네시아 경제의 부흥을 가져왔죠. 특히 외국 기업 투자를 유치하는 데 열을 올렸는데요. 이런 투자 위주의 성장 정책은 단기간에 고용과 GDP를 끌어올리는 데 효과적입니다. 기업 친화적이라 주식시장에서도 환영하고요.대신 그 과정에서 경제 불균형이 커지기 마련이라는 게 문제인데요. 프라보워식 정책엔 인프라 투자보다는 이제 내수 소비 진작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죠.방향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순 없습니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비 촉진에 효과 있는 건 맞죠. 또 애들 밥 잘 먹이고 건강검진 잘해서 인적자원의 질을 향상시키는 건 국가경제에 중요하고요.다만 이런 효과가 눈으로 보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수 있습니다. 해외 투자자 입장에선 이러다 괜히 재정적자만 왕창 늘어나고 별 효과도 없는 건 아닌가 불안할 수밖에요. 루피아 통화가치가 뚝뚝 떨어지고 인도네시아 주가지수가 하락하는 이유입니다. PT뱅크센트럴아시아의 바라 쿠쿠 마미아 연구원은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성장 전망에 있어 걱정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자원 재분배가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 전에 단기적인 성장 골짜기에 빠질 수 있죠.”하지만 80% 넘는 높은 지지율은 당분간 프라보워 대통령에 계속 힘을 실어줄 겁니다. 이 정도 지지율이면 기득권층(투자자·기업·관료 등)의 불만 따위는 무시할 수 있죠. 이런 허니문 기간이 얼마나 이어질까요. 인도네시아대학교의 정치학 강사 아디티아 페르나다는 프라보워 대통령의 높은 인기를 두고 “그가 사회적 지원을 분배하는 산타클로스로 여겨진다”고 설명하는데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건 단기적으로 매우 유용하지만 5년 동안 그렇게 할 순 없을 겁니다.” By.딥다이브‘효율성’을 내세워 정부 예산 삭감에 열 올리는 지도자들이 요즘 눈에 띕니다. 프라보워(인도네시아), 밀레이(아르헨티나), 그리고 트럼프(미국) 대통령이죠. 각각 이를 통해 이루려는 목표는 다르지만, 공공부문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명분은 상당한 호응을 끌어내기도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취임한 지 4개월. 프라보워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무려 80.9%라는 경이적인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생 무상급식, 전 국민 무료 건강검진 등. 공약했던 복지정책을 빠르게 시행 중이죠. 부가세 인상 철회라는 선물까지 안겼습니다. -문제는 돈이죠. 무작정 국가 빚을 늘릴 수 없기 때문에 프라보워 대통령은 기존에 배정된 예산의 대폭 삭감을 명령했습니다. 연구개발비, 대학지원금, 인프라 건설비를 확 깎아서 아이들 밥 먹일 재원을 마련할 겁니다. -인도네시아 경제성장 정책의 대전환입니다. 그동안은 인프라 투자와 외국기업 유치가 인도네시아 경제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는데요. 이제 내수 소비로 방향을 튼다는 신호이죠. 이런 변화가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 해외 투자자들은 불안해서 발을 빼는 중입니다. *이 기사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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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신 기업은 뭐가 다를까…‘인재 밀도’의 비밀[딥다이브]

    혁신을 탄생시키는 조직은 뭐가 다를까요. 혁신의 조직을 만들어낸 공통의 레서피는 존재할까요. 전 세계를 쇼크에 빠뜨린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를 보며 이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이 전하는 스토리가 어디서 많이 본 듯했거든요. 딥시크의 일하는 방식은 애플, 구글, 넷플릭스 같은 미국 IT 기업 창업자나 연구자들이 했던 얘기와 매우 닮아있었죠. 거기서 찾은 핵심은 이겁니다. 극도로 높은 인재 밀도와 극단적으로 적은 통제의 결합.요즘 한국에서도 딥시크 때문에 AI 기술 육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오늘은 혁신 기업의 레서피를 들여다봤습니다.*이 기사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중요한 건 인재의 규모보다 밀도“판즈정은 2023년 여름 엔비디아 인턴 중 한명이었습니다. 나중에 그에게 정규직을 제안하려 했을 때, 그는 주저 없이 딥시크에 합류했습니다. 당시 딥시크 멀티모달팀은 단 세명이었죠.”딥시크의 추론모델 ‘R1’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1월 말. 엔비디아의 수석 엔지니어 위즈딩이 예전 인턴을 축하하며 X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딥시크는 초기부터 엔비디아도 잡고 싶어할 만한 뛰어난 인재를 끌어들인 기업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량원펑 딥시크 창업자는 이젠 유명해진 지난해 36kr과의 인터뷰에서 “(딥시크에) 신비한 천재는 없다”면서 “명문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라고 말한 적 있죠. 하지만 딥시크의 채용면접을 본 지원자들 얘기는 좀 다릅니다. 그들은 딥시크 채용 방식을 두고 “중국 기업 99%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천재 1%만 채용한다”는 식이라고 설명하죠. 딥시크가 신입 직원을 채용할 때 특히 중요하게 보는 건 학력과 함께 경시대회 입상 경력이라는데요. 업계에선 “딥시크는 금메달 아래는 원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경시대회 1등들만 모아놨단 뜻이죠.(이게 천재가 아니면 뭐죠?)이런 인재 영입을 위해선 과감한 투자는 필수입니다. 딥시크 연봉은 중국 IT업계에서도 급여가 세기로 유명한 바이트댄스(틱톡 모기업)를 앞선다고 하죠. 내부자에 따르면 “바이트댄스가 제안하는 연봉을 근거로 해서, 그보다 더 높여준다”고 합니다.그럼, 왜 딥시크처럼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은 연봉을 더 주더라도 이렇게 최고의 인재만 골라 영입해야 할까요. 당연한 것 아니냐고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얘기하지 않았느냐고요?그런데 딥시크가 보여주는 건 단순히 인재 수가 많아야 한다는 이야기와는 좀 다릅니다. 딥시크 직원 수는 고작 약 150명. S급 연구개발 인재의 수로 따지자면 바이두나 텐센트 같은 대기업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데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이겁니다. ‘인재 밀도’의 중요성.예컨대 최고의 인재 80명과 평범한 직원 40명으로 구성된 기업과 단지 뛰어난 인재 80명만으로 구성된 기업. 둘 중 더 성과를 낼 수 있는 건 어디일까요? 후자였다고 합니다. 이건 넷플릭스 창업자 리드 헤이팅스트가 직접 겪고, 자신의 책 ‘규칙 없음(No Rules Rules)’에 소개한 이야기인데요.2001년 닷컴버블이 꺼지면서 위기에 처한 넷플릭스는 전체 직원 120명 중 40명이나 해고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는데 회사 분위기가 가라앉기는커녕, 이상할 정도로 너무 좋은 거죠. 왜 그런가 봤더니, 재능 있고 창의적인 인재들끼리만 모이자 서로에게 배우고 의욕을 불어넣으면서 능률이 솟구쳐 오른 겁니다. 이후 헤이스팅스는 ‘인재 밀도’를 넷플릭스 운영의 최우선에 둡니다. 최고의 인재는 업계 최고 연봉을 주면서 뽑되, 평범한 직원은 바로 해고해 버리죠(대신 퇴직금은 넉넉히 줍니다). 그는 “빠르고 혁신적인 직장은 소위 말하는 ‘비범한 동료들’로 구성된다”고 말하는데요. 회사를 ‘스포츠팀’처럼 운영해야 한다는 겁니다.인재 밀도의 중요성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의 연구 결과에서도 확인됩니다(2006년, ‘나쁜 사과가 통을 망치는 방법, 시기, 이유’). 연구팀은 대학생들을 여러 팀으로 나눠 45분간 과제를 수행하게 하는 실험을 수십 차례 했는데요. 일부 팀엔 특정 역할을 맡은 배우를 1명 끼워 넣었습니다. 삐딱하게 앉아 핸드폰만 보는 ‘게으름뱅이’, 빈정거리는 ‘삐딱이’, 책상에 얼굴을 파묻은 ‘우울한 비관주의자’ 식으로요. 실험 결과, 이 단 한 명의 문제 행동은 전염력이 엄청났습니다. 다른 팀원들이 모두 그 행동을 흉내 내면서 과제 성과는 엉망이 됐죠(평균 30~40% 하락).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자가 많아도 평범하거나 비뚤어진 직원이 끼어있으면 이는 금세 전염돼 성과를 망치죠.혁신은 복도 대화에서 탄생한다 또 인재 밀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뭉치면 스파크가 터지면서 진짜 천재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가 아닌 팀일 때 놀라운 혁신이 터져 나올 수 있는 건데요.현대 인공지능(AI) 세계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혁신으로 꼽히는 구글의 ‘트랜스포머(Transformer)’ 기술 개발도 그랬죠. 2017년 구글 연구진 8명이 논문(‘Attention is all you need’)으로 발표한 이 기술 덕분에 AI가 드디어 문장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됐고요. 이후 챗GPT부터 딥시크까지 모든 생성형 AI가 이 트랜스포머 기반인데요.트랜스포머 개발 스토리에서 눈에 띄는 건 같은 회사 울타리 안에 있던 인재들끼리의 우연한 만남과 엿들음이 모여서 놀라운 혁신으로 이어졌단 겁니다. 구글 AI 연구자 야콥 우스코라이트는 어느 날 같이 구글 카페에서 다른 팀 엔지니어 일리아 폴로수킨과 점심을 먹었고요. 이 자리에서 폴로수킨이 구글검색 답변 속도에 대해 불평하는 걸 듣고 자신이 갖고 있던 기본 아이디어를 공유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팀에 속한 몇몇이 자발적으로 뭉쳤고요. 그들이 신기술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일 때, 우연히 구글의 베테랑 과학자 노암 샤지어가 그 앞 복도를 지나갑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샤지어는 ‘와,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감탄하며 프로젝트에 합류해 직접 코드 작성을 맡았고요. 그렇게 몇 달 만에 AI 세계를 완전히 뒤바꿔놓을 역사적인 논문이 탄생합니다. 연구팀조차 이 과정을 “마법”이라 부를 정도로 놀라운 창의력과 집중력이 발휘되었죠.딥시크도 비슷했습니다. 딥시크는 2017년 구글이 소개한 뒤 일반화된 MHA(멀티헤드주의) 대신 MLA(멀티헤드잠재주의) 아키텍처를 적용해 메모리 사용량을 대폭 줄이는 데 성공했는데요. 이를 사진에 비유하자면 찍은 사진 파일을 그대로 저장하는 게 아니라, 작은 섬네일로 압축해 저장해놓는 식의 기술을 활용한 셈이죠.이 MLA에 대한 기본 아이디어를 맨 처음 떠올린 건 딥시크의 한 젊은 연구자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 새 아이디어를 구현해 내기 위한 팀이 꾸려졌고요. 몇 달에 걸쳐 작업이 이뤄졌다고 하죠. 량원펑은 “탐사 과정에서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모든 연구원은 다른 사람을 초대해 논의한다”고 딥시크의 일하는 방식을 설명합니다.기술 세계에서 혁신은 혼자 굴을 파고 들어가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이디어와 아이디어가 부딪히면서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게 일반적이죠. 그래서 애플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혁신은 사람들이 복도에서 만나거나 밤 10시 30분에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데서 옵니다. 그들이 기존 사고방식에 구멍을 뚫는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발생하죠.”또 잡스는 이런 인터뷰도 남겼습니다. “제 사업 모델은 비틀스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부정적인 경향을 견제하는 네 사람이었죠. 그들은 서로를 균형 있게 조절했고,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컸습니다. 사업에서 위대한 일은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팀이 하는 겁니다. 비틀스는 함께 있을 때 정말 훌륭하고 혁신적인 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이 헤어졌을 때, 좋은 작업을 했지만 결코 똑같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업도 그렇게 봅니다. 항상 팀입니다.”통제를 없애면 혁신은 저절로 온다요약하자면 최고의 인재를 밀도 있게 모아서 아이디어가 흐르게 만드는 것이 혁신 탄생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간단하죠? 그런데 두 번째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습니다. 바로 개입과 통제를 최소화할 것.량원펑 딥시크 창업자는 혁신적인 조직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제 결론은 혁신엔 가능한 한 적은 개입과 관리가 필요하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활동할 여지와 시행착오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겁니다. 혁신은 종종 저절로 발생합니다. 의도적으로 준비되거나 가르쳐진 게 아닙니다.”일단 뛰어난 인재를 뽑았다면, 그냥 이들이 알아서 하게 두는 게 최선이란 뜻인데요. 그래서 딥시크엔 없는 게 많습니다. 우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목표나 업무 할당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할지 자기가 정해서 자발적으로 분업하는 거죠. 철저한 바텀업(상향식) 의사결정이 이뤄집니다. 딥시크엔 직급도, 부서도 없습니다. 모두 평등한 관계여서, 누구든 ‘이거 같이 연구해요’라고 다른 사람을 부를 수 있죠. 컴퓨팅 파워에 대한 권한도 제한이 없다네요. 누구나 승인 없이도 언제든 훈련 클러스터를 이용할 수 있는 겁니다.이게 기업에서 가능한가 싶기도 한데요. 그래서 중국 매체 36kr은 이런 딥시크를 두고 ‘기술적 이상주의의 극단적 이야기’라고 평하죠. 사실 이런 이상주의는 무엇보다 직원들이 능력과 열정을 모두 갖춘 인재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또 역으로 이런 극단의 자율성 부여는 최고의 인재를 끌어모으는 매력적인 조건으로 작용합니다.딥시크만큼은 아니지만 개입과 통제가 없기로 유명한 기업으로는 넷플릭스가 있죠. 예컨대 휴가기간, 법인카드 이용, 출장비 지출에 대한 명시적인 통제가 없고요. 무엇보다 상사의 ‘승인 권한’이란 게 없습니다. 일을 할 때 직원은 승인받을 필요 없고, 상사에게 진척 상황을 보고만 하면 되죠. 즉, 무슨 일을 할지 말지는 직원 개개인이 정하고 실행하는 겁니다.인재 밀도가 높은 기업엔 이런 거추장스러운 통제가 필요 없다는 게 리드 헤이스팅스의 철학인데요. 그 직원이 진짜 능력자라면, 설사 실패하더라도 배우는 게 있을 테니 믿고 맡기란 겁니다. 헤이스팅스는 이런 식으로 표현하죠. 혁신을 하려면 “교향악단을 조직하지 말고, 즉흥 연구를 할 재즈 밴드를 결성해야 합니다.”구글이 보여주는 혁신기업 딜레마앞서 설명한 구글 트랜스포머 연구가 진행된 환경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사실 구글 고위층은 이 작업을 그저 흥미로운 AI프로젝트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별 간섭 없이 그냥 8명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뒀죠. 연구 참가자들에 따르면 상사 중 누구도 프로젝트 진행과정을 체크하기 위해 부른 적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구에 참여한 니키 파머는 “구글은 우리가 탐구하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고 평가하죠.더 놀라운 건 그 이후 얘기입니다. 2017년 트랜스포머가 발표되고 나서, 이를 가지고 가장 먼저 대규모 언어모델을 출시한 건 구글이 아니라 오픈AI였죠(2018년 GPT-1이 시작). 이후에도 구글은 트랜스포머 기술을 적용한 서비스를 내놓는 데 매우 소심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급기야 2022년 오픈AI가 챗GPT 출시로 먼저 확 치고 나오면서, 구글은 뒤처지게 되는데요.그사이 실망한 트랜스포머 논문 저자 8명은 결국 모두 구글을 떠났습니다(지난해 구글은 이 중 노암 샤지어를 3년 만에 다시 거액을 들여 영입). 구글이 혁신 중심의 놀이터가 아닌 수익 중심의 관료조직이 되어버린 결과였죠. 그렇게 크고 돈 잘 버는 거대 대기업이 오히려 수익과 성과에 연연하며 실수를 두려워하다가 스타트업에 선두를 뺏기다니. 기술 세계의 아이러니인데요. 클레이턴 크리스턴슨 하버드대 교수의 1997년 저서 ‘혁신기업 딜레마’에서 전 설명한 대로 “혁신에서는 규모가 작고 독립적인 기업이 확실한 우위를 얻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인터뷰 발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잡스가 애플로 돌아와서 혁신적인 컴퓨터 아이맥(iMac) G3로 애플의 부활을 알렸던 1998년 했던 인터뷰입니다. “혁신은 얼마나 많은 연구개발비를 가졌는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애플이 맥을 내놓았을 때, IBM은 R&D에 적어도 100배 더 많은 비용을 지출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죠.(It‘s not about money. It’s about the people you have.) 당신이 어디로 이끌려가고,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By.딥다이브그동안 전 세계 많은 언론은 딥시크가 유학파가 아닌 중국 현지 대학 출신을 주로 채용한다는 점을 비중있게 보도했는데요. 그보다는 ‘996(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주 6일 근무)’으로 대표되는 가혹한 실적 압박의 후진적인 근로문화로 유명한 중국 IT 업계에서 이런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스타트업이 나왔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중국 AI 기업 딥시크는 극도로 높은 ‘인재 밀도’가 특징입니다. 혁신 기업 인재에 중요한 건 규모보다 밀도이죠. 부정적인 조직원의 태도는 금세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가장 좋은 복지는 언제나 ‘뛰어난 동료’인 법입니다. -최고의 인재가 모여있으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혁신의 스파크가 일어납니다. AI계 가장 큰 혁신이라 할 구글 트랜스포머도 점심식사 중의 스몰토크, 복도에서 우연히 엿들은 대화를 계기로 탄생했죠. 위대한 일은 팀이 합니다. -일단 뛰어난 인재를 뽑았다면 그냥 두면 됩니다. 개입과 통제가 필요 없죠. 딥시크에 부서와 직급, 할당된 목표나 업무가 없는 이유입니다. 무슨 일을 할지 자기가 정하면 승인 없이 뭐든 할 수 있는 자율. 그게 혁신으로 이어집니다.-하지만 기업이 커진 뒤엔 관료화되고 느려지면서 혁신과 거리가 멀어지곤 합니다. 더 많은 연구개발비, 더 많은 인력이 혁신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이미 많은 대기업들이 보여주고 있죠. 우리 기업들은 과연 어느 길로 갈까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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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이 파나마 운하 봉쇄할까봐? 트럼프의 ‘운하 탈환’ 도발[딥다이브]

    중미 남쪽 끝에 있는 인구 450만명의 파나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뒤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죠.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길이 82㎞ 물길, 파나마 운하를 둘러싼 갈등 때문인데요. 파나마 운하 운영권이 미국에서 파나마로 완전히 넘어간 지 25년. 이제 와서 “운하를 되찾겠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한 영토확장 야욕으로 치부하기엔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인데요. 트럼프 대통령의 ‘운하 탈환’ 도발에 담긴 지정학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운하에 관한 트럼프의 거짓말1년에 약 1만4000척의 배가 오가는 파나마 운하. 세계 교역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지대하죠. 전 세계 해상 무역의 6%를 차지하고요. 미국(71.8%)과 중국(22.7%), 일본(14.5%), 한국(9.8%)이 가장 큰 이용국(출발 또는 도착지)입니다(2023년 기준).지난 수십 년간 평화로웠던 이 운하에 심상찮은 물결을 일으킨 건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의 폭탄 같은 취임연설이었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우리는 이 어리석은 선물(파나마 운하 양도)로 인해 매우 나쁜 대우를 받았고, 파나마의 약속은 깨졌습니다. 중국이 운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운하를) 중국에 준 것이 아니라 파나마에 준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되찾을 것입니다(We are taking it back)!”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파나마에 준 거다?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파나마 운하 건설은 미국이 한 것 맞습니다. 1903년 미국이 운하구역에 대한 영구적·독점적 권리를 사들였고, 막대한 건설비(3억3665만 달러)와 노동력, 신공법을 투입한 험난한 공사 끝에 1914년 운하가 개통됐죠.그리고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파나마와 두 개의 조약을 맺었습니다. ①1999년 12월 31일까지 파나마 운하 운영권을 파나마에 양도한다. ②운하 운영의 영구적 중립을 보장한다. 만약 중립이 위협당하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 이에 따라 1999년 12월 31일을 기해 운영권은 파나마에 완전히 넘어갔죠.그럼, 당시 미국은 국익에 반하는 데도 어리석게 운하를 넘기는 관대하면서도 어리석은 짓을 한 걸까요? 따져보면 그건 아닙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 듯하지만, 48년 전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뒤에서 좀 더 설명하겠고요.트럼프 대통령의 다른 두 가지 주장, 미국이 나쁜 대우를 받고 있고 중국이 운하를 운영한다는 건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파나마 운하 요금이 지난 몇 년간 가뭄 탓에 급격히 오르긴 했지만, 모든 배는 국적과 상관없이 똑같은 통행료를 적용받죠. 5일 미국 국무부는 파나마가 미국 정부 소유 배엔 운하 통행료를 면제해 주기로 했다고 발표했는데요(이후 파나마 운하청은 이를 부인). 만약 이렇게 된다면 이게 오히려 특혜이고, 중립 위반입니다.파나마 운하 운영권은 어디까지나 파나마의 독립적 국가 기관인 파나마 운하청에 있습니다. 운하 운영에 있어 다른 나라의 개입은 없죠.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운하가 아니라 운하 끝에 있는 항구 운영권이 홍콩기업 CK허치슨에 있다는 점을 가리켜 ‘중국이 운하를 운영한다’라고 일부러 틀리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왜곡하는 데는 다 의도가 있죠.48년 전 무슨 일 있었나120여 년 전, 미국이 파나마 운하 개발에 나선 데는 군사적 이유가 컸습니다. 해군 군함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빠르게 오갈 수 있는 물길이 필요했죠.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무렵이 되자 그 군사적 가치는 확 떨어졌습니다. 수문이 너무 작아서 항공모함이 통과할 수 없거든요. 이즈음엔 운하의 경제적 의미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황량했던 미국 서부도 동부처럼 산업화됐기 때문이죠. 운하 통행료가 낮게 유지돼, 돈벌이도 시원찮았고요. 해리 트루먼 대통령(1945~53년 재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쫓겨나기 전에 우아하게 파나마에서 나가지 않겠습니까.”1950년대 후반부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선 민족주의 열기가 분출했고, 파나마는 그 중심이었습니다. 파나마에선 반미시위가 수년 동안 이어졌고 급기야 1964년 운하 지대의 국기 게양을 둘러싼 충돌로 24명이 사망했죠. 전 세계가 미국을 맹비난하고 나섰는데요.“운하를 돌려주지 않으면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헨리 키신저가 경고했습니다. 파나마에서 어떻게 발을 뺄까.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각각 방법을 모색했지만 진전은 없었습니다. 미국 보수층 상당수가 반대할 게 뻔한데 굳이 정치적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특히 공화당의 스타 정치인 로널드 레이건은 운하 반환 반대의 선봉에 섰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죠. “우리가 샀다. 우리가 비용을 지불했다. 우리가 건설했다!”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나섰습니다. 파나마와 운하 양도를 위한 조약을 체결했고요. 문제는 반대 여론을 뚫고 상원 비준(3분의 2 찬성)을 받아낼 수 있느냐였는데요. 공화당 강경파에 대한 매우 끈질긴 설득 작업 끝에 1978년 간신히 비준이 성사됩니다.이후 미국의 파나마 운하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식어갔습니다. 레이건은 대통령 집권 뒤에 파나마와의 조약을 건드리지 않았죠(1981~89년 재임). 뉴욕타임스는 이에 대해 “레이건 자신이 틀렸고 조약이 성공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1999년 12월 열린 파나마 운하 반환식에서 미국을 대표해 참석한 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었습니다.뒷마당에 누가 얼쩡거린다?그럼, 트럼프 대통령은 왜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잊혔던 파나마 운하 얘기를 다시 꺼낼까요. 일단 국내 정치적인 목적은 뻔히 보입니다. ‘미국이 만든 운하를 되찾자’는 구호가 레이건 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보수층에 어필하는 효과가 있죠. 그리고 미국 경제에 있어서 파나마 운하의 중요성이 다시 커졌습니다. 셰일혁명 영향인데요. 2016년 파나마 운하가 확장공사를 마쳤고요. 이후 여기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이 통과할 수 있게 된 거죠. 이제 파나마 운하는 미국 걸프해안에서 한국·중국·일본으로 향하는 LNG 수출의 핵심 통로입니다. LNG 생산·수출 확대로 미국을 더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약속을 실현하는 데 있어 역할이 한층 커진 거죠.그런데 미국이 다시 들여다봤더니, 아뿔싸. 자기네 뒷마당인 줄로 알았던 파나마에서 중국이 엄청나게 세력을 넓혀온 걸 뒤늦게 알아차린 겁니다. 미국이 소홀한 틈을 타서 중국이 이 지역을 파고들었는데요.2017년 파나마는 카리브해 국가 중엔 선도적으로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었고요. 2018년엔 중국 ‘일대일로(一带一路)’ 이니셔티브에 참여한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됐습니다. 중국의 라틴아메리카 진출에 있어 관문 역할을 톡톡히 한 거죠.일대일로는 중국 시진핑 주석이 10여 년 전부터 강력하게 추진 중인 ‘21세기 실크로드’ 구축 프로젝트입니다. 주로 다른 나라에 중국이 자금을 빌려주고 인프라 건설을 중국 기업이 맡아서 하는 방식인데요. 지난 몇 년 동안 파나마엔 중국 국영기업이 건설한 대형 컨벤션 센터와 크루즈선 터미널이 들어섰고요. 운하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다리도 중국기업이 건설 중입니다. 파나마의 전 외무장관 호르헤 에두아르도 리터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이렇게 말합니다. “냉전 이후 미국은 자기 뒷마당이라고 여긴 것(라틴아메리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중국이 들어왔습니다.”중국이 운하를 봉쇄한다?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의 취임 후 첫 방문국은 파나마였습니다. 그는 2일 호세 라울 물리노 파나마 대통령을 만나 파나마 운하에 대한 중국 영향력을 줄이라고 요구했죠. 중국의 운하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이 ‘중립 의무 위반’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경고한 건데요. 1977년 맺은 조약에 따르면 운하가 폐쇄될 위협이 있는 경우 미국은 무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그럼, 미국이 말하는 ‘운하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란 도대체 뭘까요. 가장 많이 꼽는 건 파나마 운하 양쪽 끝에 있는 두 항구입니다. 홍콩 부호 리카싱이 세운 기업 CK허치슨의 자회사 허치슨포트가 29년째 운영 중이죠. 참고로 허치슨포트는 24개국에서 53개 항구를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입니다.허치슨포트는 1997년 처음 이 항구 입찰권을 따냈습니다. 당시 입찰에 참여한 미국 기업은 없었고, 미국에선 허치슨포트를 위협으로 보지 않았죠. 아직 홍콩은 영국령이었고요. 이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나서도 경계심은 없었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중국은 위협적인 상대가 전혀 아니었고요. 무엇보다 리카싱은 한때 아시아 1위 부자였던 전설적인 기업인이고, 누구도 그가 중국 정부에 쉽게 휘둘릴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으니까요.하지만 2020년 홍콩에 강력한 국가보안법이 시행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홍콩을 포함한 중국 기업은 중국 정부의 정보수집이나 군사작전에 협조해야 한다는 법률을 적용받죠. 중국이 아니라 홍콩 기업이니까 문제없다는 말이 이제는 통하지 않게 된 겁니다.그래서 지난달 열린 공청회에서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파나마 운하와 관련해 이런 시나리오를 제기합니다. 파나마의 허치슨포트에 중국 스파이나 군 간부가 숨어있다면?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서 미군 출동을 막기 위해 파나마 운하 양쪽의 항구를 붕괴시켜 운하를 봉쇄해 버린다면? 건설 노동자로 위장한 중국 스파이가 파나마 운하 위에서 중국이 짓고 있는 다리를 무너뜨린다면?물론 구체적 증거는 없고 소설 같은 얘기이긴 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걸 완전히 가능성 없는 망상으로 치부할 순 없습니다. 예전 같지 않은 홍콩의 상황이 이런 소설 같은 시나리오에 신빙성을 더하죠.군사력 동원을 암시하는 “운하 탈환” 발언까지 서슴없이 하는 트럼프 대통령 기세 앞에 파나마 정부는 납작 엎드린 상황입니다. 파나마 대통령은 이미 중국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에서 최대한 빨리 탈퇴하겠다고 미국에 약속했고요. 또 2047년까지인 허치슨포트와의 항구 운영 계약을 취소할 방법을 모색 중이란 보도도 나옵니다. 인구 450만명에 상비군도 없는 작은 나라로선 미국에 무력사용 빌미를 주는 건 어떻게든 피해야 하니까요.물론 중국이 호락호락하게 물러설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 두 나라는 관세와 틱톡 등 풀어야 할 문제가 많죠. 아마 파나마 문제도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겁니다.그런데요. 이렇게까지 파나마를 압박해서 중국과 떼어놓는다면 그게 과연 미국의 진정한 승리일까요. 트럼프 사진과 성조기를 불태우며 격렬하게 항의하는 파나마 반미 시위대 모습을 보면 회의가 듭니다. 미국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이 다시 활활 타오르고 있거든요. 반미정서가 깊어질수록 반사이익을 보는 건 결국 중국입니다. 중국은 상당히 장기전으로 보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천천히 세를 키워가는 중이니까요.미국 육군 전쟁대학의 에반 엘리스 교수는 DW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중국이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무력화시킬 기회입니다. 이는 (중남미에서) 미국의 힘을 약화시키고 중국이 정치적, 상업적으로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게 만듭니다.”왠지 나그네 옷을 누가 먼저 벗기는지 내기하는 ‘해와 바람’ 이솝우화가 떠오르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은 아마도 이번 게임에선 쉽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역사가 그를 승리자로 기록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By.딥다이브트럼프 대통령의 다른 도발(예-그린란드, 가자지구, 관세 관련)에 비해 파나마 운하에 관한 주장은 미국 내에선 꽤 호응을 받는 편입니다. ‘미국이 만들었으니 미국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상당히 설득력 있기 때문이죠. 거의 50년 전 레이건이 설파했던 주장이 여전히 대중에게 통한다는 점이 놀랍기도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트럼프 대통령이 “파나마 운하를 되찾겠다”고 말하고, 루비오 국무장관은 파나마 대통령을 만나 “운하에 대한 중국 영향력을 줄이라”고 압박했습니다. 파나마 운하가 수십 년 만에 주요 뉴스로 떠올랐습니다.-미국이 어리석게도 운하를 파나마에 선물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레이건의 주장을 되풀이하지만, 따져보면 레이건조차 대통령이 된 뒤엔 파나마 운하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운하 양도가 당시로선 최선이었던 거죠.-셰일혁명으로 미국은 다시 운하가 중요해졌고, 이젠 자기네 뒷마당에 중국이 진을 치고 있는 게 영 못마땅합니다. 2020년 국가보안법 시행 뒤 홍콩의 자율성이 훼손된 것도 미국의 경계심이 커진 이유이죠. 하지만 몽둥이 들고 압박하는 게 최선일까요. 이 지역의 반미정서는 커져만 갑니다.*이 기사는 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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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한애란]딥시크는 혁신이 아니다, 그러나…

    낯선 파란 고래 한 마리가 전 세계 기술업계를 뒤집어 놨다.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 얘기다. 성능은 오픈AI ‘o1’과 비슷한데 개발비는 5%밖에 안 되는 가성비 추론모델 ‘R1’을 지난달 내놨다. 대형 AI 모델 개발이 이렇게 적은 비용으로 가능할 줄이야. 그것도 중국에서.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부으며 AI 성능 경쟁에 열 올리던 실리콘밸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른바 ‘딥시크 쇼크’다.하지만 혹시 딥시크가 오픈AI 챗GPT 답변을 베껴 훈련한 건 아닐까. 그건 따져볼 문제다. 그리고 설사 베낀 적 없다는 딥시크 측 주장을 받아들여도 이런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다. “딥시크는 데이터·알고리즘 최적화의 성공적 시도일 뿐, 기술의 파괴적 혁신은 아니다.” 다른 나라도 아닌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財新)이 내놓은 냉정한 평가다.기존 기술 최적화의 결과실제로 딥시크가 공개한 저비용 AI 개발 비법 중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라 할 만한 건 없다. 이를테면 효율성과 속도를 높여준 전문가 혼합(Mixture of Experts) 아키텍처. 복잡한 작업을 작고 쉬운 여러 개 작업으로 쪼개서 돌리는 머신러닝 기법인데, 그 시작은 1991년 나온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논문이다. 30년도 더 된 오래된 개념인 데다 미국 오픈AI나 프랑스 미스트랄도 이미 이전에 적용한 적 있다. 다만 딥시크 모델이 작업을 더 잘게 쪼갤 수 있게 잘 훈련됐다는 게 차이일 뿐이다.또 사전 데이터 없이 AI가 스스로 학습하는 강화학습. 역사를 따지면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개념 역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 연구자들이 만들어냈다. 9년 전 이세돌 9단과 대국했던 구글 알파고가 바로 강화학습을 통해 학습했다. 딥시크 연구진은 이미 알려진 이 개념을 가져와 AI 모델 훈련에 최적화했다.즉, 기존에 알려져 있던 여러 기술을 가져와서 잘 조합하고 다듬는 데 성공한 것. 그게 딥시크 가성비 AI 개발 비결의 사실상 전부다. 냉정하게 따지면 대단한 혁신은 없다는 지적이 일리 있다.그런데 기술 혁신이 아닌 최적화이면 별 의미가 없는 걸까. 딥시크만이 아니라, 세계 시장을 휩쓰는 중국 기업의 기술적 성취는 대부분 이런 최적화를 통해 이룬 것이다.끊임없는 개선에 강한 중국중국 바이트댄스가 운영하는 틱톡은 동영상 플랫폼 시장에서 후발주자이다. 하지만 추천 알고리즘 최적화로 이용자가 좋아할 만한 영상만 쏙쏙 골라 띄워주면서, 미국 MZ세대가 가장 사랑하는 숏폼 플랫폼이 됐다.배터리 세계 1위 기업 CATL을 키운 건 소재 혁신이나 전에 없던 차세대 배터리가 아니다. CATL은 예나 지금이나 에너지 밀도가 낮은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주로 생산한다. 대신 배터리 구조를 최적화해서 배터리셀을 더 촘촘하게 채워 넣는 ‘셀 투 팩(Cell to Pack)’ 방식으로 소재가 가진 한계를 극복했다.이미 나와 있는 기술을 활용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최적화는 이제 중국 기술기업의 특장점이 됐다. 연구개발에 매달릴 고급 기술 인력이 충분히 공급되기에 가능한 일이다.최근 딥시크 쇼크를 소개한 파이낸셜타임스 칼럼은 이를 ‘카이젠(지속적 개선)’이란 용어로 설명한다. 1970, 80년대 일본 제조업의 성공 방식을 일컫는 카이젠을 이제 중국 산업계가 마스터하면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평가다. 중국 기업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카이젠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 변화 속도도 더 빠르다.기술 세계에서 1등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천재적 창의성에 열광하지만, 역사를 보면 기술은 끊임없이 개선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최적화이든 카이젠이든, 딥시크가 혁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습게 볼 순 없는 이유다.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

    • 20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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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세 시한폭탄 일시정지…트럼프 ‘매드맨 전략’ 통했다 [딥다이브]

    관세 시한폭탄이 작동을 불과 몇시간 앞두고 멈췄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 캐나다에 4일 0시(현지시간)부터 부과하기로 했던 25% 관세를 한 달 연기하기로 했기 때문이죠. 철회가 아닌 연기인 게 조금 찜찜하지만, 그래도 최악은 피했습니다. 간밤 뉴욕증시 주가지수의 극적인 움직임이 이를 반영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규모 관세를 발표한 뒤 지난 며칠간 세계 경제는 대혼란에 빠졌죠. 상대국이 보복관세 맞대응을 선언하면서 자칫 1930년 대공황 시절 관세전쟁 같은 재앙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컸는데요. 여전히 불확실성은 남은 상황. 전 세계를 긴장케 한 트럼프의 관세정책을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2월 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25% 관세 한 달 유예 지난밤 전 세계 투자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한 멕시코 셰인바움 대통령이 “미국이 관세를 한 달 동안 유예하기로 했다”고 밝혔기 때문이죠. 이에 장 초반 급락하던 미국 주가지수가 낙폭을 크게 줄였고요.이어 뉴욕증시 마감 뒤 캐나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도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를 나눴다며 “제안된 관세가 최소 30일 동안 중단될 것”이라고 밝힙니다. 25% 관세폭탄이 시행되기 7시간 전쯤 말이죠.멕시코와 캐나다 정상은 각각 펜타닐 미국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국경감시 조치를 강화하겠다고 트럼프 대통령에 약속하고 유예 조치를 얻어냈습니다. 멕시코는 북부 국경에 군인 1만명을 투입하겠다고 했고요. 캐나다는 국경 보안에 이미 13억 캐나다달러를 투입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2억 캐나다달러를 추가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죠.어떤가요. 좀 굴욕적으로 보이나요? 하지만 그러면 어떻습니까. 재앙적인 관세전쟁만은 어떻게든 피해야죠. 진짜 25% 관세가 발효되는 상황과 비교하면 이게 훨씬 낫습니다. 당장 주식시장만 봐도 알 수 있죠.물론 관세를 철회한 건 아니기 때문에 불확실성은 여전합니다. 시한폭탄이 일시정지됐지만, 아직 뇌관이 살아있는 거나 마찬가지이죠. 스탠다드차터드의 이코노미스트 댄 판은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트럼프가 북미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기보다는 관세 위협을 협상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신호로 보고, 시장에선 위안으로 삼습니다.”트럼프 대통령은 10% 추가관세를 발표한 중국과도 협상에 나설 거라고 말했죠. 후보 시절 공언했던 ‘중국에 최대 60% 관세 부과’ 얘기와 달리, 10%만 부과하기로 한 것 자체가 협상의 여지를 열어뒀던 셈인데요. 물론 그는 이런 협박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것(10% 추가관세)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중국과 협상을 하지 못한다면 관세는 매우, 매우 커질 것입니다.”결국 트럼프식 벼랑 끝 전술이 상당히 들어먹히고 있는데요. 1987년 출판된 저서 ‘트럼프; 거래의 기술’에서 그는 자신의 거래 원칙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저는 크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항상 그렇게 했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간단합니다. 어차피 생각할 거라면 크게 생각하는 게 낫습니다.”글로벌 관세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경제 이슈도 그에겐 거래를 위한 수단으로 보입니다.왜 멕시코, 캐나다부터 때렸나 이번 트럼프 관세의 표적은 미국의 3대 무역파트너인 멕시코, 중국, 캐나다였습니다. 2월 1일 이 백악관의 발표는 여러모로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요.우선, 그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무려 수입품 1조4000억 달러(약 2052조원)어치에 관세를 부과하려고 했거든요. 이는 트럼프 1기에서 관세를 부과한 외국산 제품(3800억 달러)의 3배가 넘는 규모입니다.게다가 중국은 10%인데 멕시코·캐나다엔 25% 관세를 발표한 것도 놀라웠습니다. 가장 가까운 두 이웃국가가 주 타깃이란 뜻이니까요. ‘불법이민자와 펜타닐 마약의 침략 근절’이라는 모호한 목표를 들고나왔다는 점도 눈에 띄었죠. 목표가 모호하다는 건 관세를 언제까지 부과하느냐는 사실상 트럼프 마음에 달려있단 의미였습니다.그럼 왜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캐나다부터 때렸을까요. 불법 이민자와 펜타닐이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죠. 그는 2일 SNS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미국은 캐나다, 멕시코, 중국(그리고 거의 모든 나라!)에 큰 적자를 보고 있으며, 36조 달러의 빚을 지고 있으며, 더 이상 ‘어리석은 나라’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제품을 만들면 관세가 없습니다! 미국은 왜 다른 나라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수조 달러를 잃어야 합니까?”사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때부터 이웃국가에 불만이 컸습니다. 나프타(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가 미국 일자리를 빼앗는 “최악의 협정”이라고 공격했고요. 결국 재협상을 거쳐 이를 한층 깐깐한 USMCA(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로 대체했는데요.당시 그는 ‘역대 최고의 거래’를 협상했다고 자화자찬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미·중 갈등의 반사이익 덕분에 전 세계 자동차·가전 공장은 멕시코, 배터리 공장은 캐나다로 더 몰렸습니다. 특히 멕시코 경제는 니어쇼어링(nearshoring, 미국 인접국으로 생산기지 이전) 덕을 톡톡히 보며 호황을 누렸죠.아마 트럼프는 이런 상황이 못마땅했을 겁니다. 미국인에 와야 할 일자리와 투자를 캐나다·멕시코에 뺏기고 있다. 이렇게 그는 판단했죠. 그는 무역을 마치 부동산 개발업처럼 ‘제로섬 게임’으로 봅니다. 모두가 승자가 되는 ‘윈윈’이란 개념은 없이, 승자와 패자를 가르려고만 하는데요. 사실 이런 자유무역 효과를 상당수 미국 기업도 누리고 있고, 그 결과 진짜 이익을 보는 건 미국 소비자라는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그래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가 생각하는 건 단 하나. 기업이 미국 영토에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만들게 하는 겁니다. 그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아무리 가까운 나라라도 매운맛을 보여줘야 하죠. 그 수단이 바로 25% 관세폭탄이고요. 역사학자 버나드 루이스의 유명한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입니다. “미국은 적으로선 무해하지만 친구로서는 배신적(treacherous)이다.”만약 관세가 시행됐다면만약 중단없이 4일 바로 멕시코, 캐나다에 대한 25% 관세가 시행됐다면 어땠을까요.일단 멕시코산 아보카도, 캐나다산 방울토마토 같은 식료품은 미국 내 소매가격이 바로 뛰었을 겁니다. 두 나라는 미국 야채 수입의 47%를 차지하죠.북미 3국이 긴밀하게 얽혀있는 자동차 산업은 혼란 끝에 일시 정지됐을지 모릅니다. 부품 하나를 만드는 데 멕시코에서 캐나다, 다시 미국으로 6번쯤 국경을 왔다 갔다 해야 하기 때문이죠. 캐나다 자동차 협력업체 리나마르의 린다 하센프라츠 회장은 “(관세로 인해) 그저 엄청난 비용이 발생할 뿐이고, 아마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북미에서 자동차 생산이 중단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 캐나다 정부는 이미 공언했던 대로 총 1550억 캐나다달러(약 155조원)어치 미국산 제품에 25% 보복 관세를 부과했을 거고요. 어쩌면 멕시코도 비슷한 조치에 나서게 됐을지도 모르죠. 그랬다면 이건 진짜 전쟁입니다.관세는 그 자체로 부작용이 적진 않지만, 이렇게 상대국이 보복관세로 맞대응하기 시작하면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법입니다. 교역량이 위축되면서 모두가 패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인데요.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1930년 시행된 미국의 스무트-홀리(Smoot-Hawley) 법입니다. 2만개 넘는 수입품에 대해 평균 59% 관세를 부과했고, 곧장 다른 국가들의 보복으로 이어지면서 전 세계 교역량이 4년 만에 3분의 1로 쪼그라들었죠(1929년 82억 4280만달러→1933년 30억 달러). 이번 트럼프 관세를 두고“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무역전쟁(The Dumbest Trade War in History)”(월스트리트저널 사설), “가장 큰 자책골”(메리 러블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연구원)이란 혹평이 쏟아졌던 이유입니다. 불확실성은 끝나지 않았다역시나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멕시코와 캐나다가 앞으로 한 달 동안 뭔가 상징적인 행동을 더 취하고, 이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허세를 부리면서 관세안을 완전히 철회하는 겁니다. 이상한 쇼처럼 보일 순 있겠지만, 전쟁만은 피해야죠.하지만 그 최상의 시나리오에서조차 이번 관세폭탄의 여파는 상당할 겁니다. 일단 앞으로 언제 다시 미국 태도가 돌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멕시코·캐나다 진출 기업은 미국으로 생산공장을 옮겨야 할지 말지, 고민이 클 거고요. 무엇보다 이웃나라와의 협상이 끝나면 그다음엔 한국을 포함한 대미 수출국이 타깃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 관세 시한폭탄이 우리에게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인 거죠.불확실성은 기업활동과 경제에 해로운 법입니다. 그리고 아직 트럼프 대통령 임기는 4년이 남아있군요. By.딥다이브트럼프 시대가 된 걸 실감하는 지난밤이었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와 캐나다에 부과하기로 했던 25% 관세를 한 달 유예하기로 했습니다. 멕시코와 캐나다가 국경 보안과 펜타닐 차단을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게 명목상 이유입니다. 누가 힘의 우위에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는 트럼프의 승리입니다. -30년 넘게 자유무역협정으로 긴밀히 통합돼 온 이웃 국가에 고율 관세를 매긴다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무역을 제로섬게임으로 보는 트럼프식 사고방식이 드러납니다.-만약 계획대로 관세가 부과되고 보복관세까지 시행됐다면 그건 북미경제를 수렁에 빠뜨리고 금융시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재앙이 됐을 겁니다. 전쟁만은 피하는 게 최선이죠. 다음 관세 시한폭탄의 타깃은 과연 누가 될까, 벌써부터 두렵습니다. *이 기사는 2월 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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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계 테무’가 일냈다…딥시크 말고 문샷AI도 있다고?[딥다이브]

    파란색 고래 한 마리가 전 세계에 충격파를 날렸습니다. 주인공은 바로 ‘딥시크(Deepseek)’. 2023년 7월 설립된 중국의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인데요.갑자기 모두 딥시크 얘기만 하면서, 엔비디아는 물론 국내 반도체주 주가까지 급락했죠. 대체로 이런 반응입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중국 AI가 미친 가성비로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그런데 알아두실 게 두가지 있습니다. ①딥시크는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닙니다. 단지 세계가 뒤늦게 알아준 것뿐이지요. ②중국엔 딥시크 말고도 쟁쟁한 AI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 중입니다. 딥시크만 경계한다고 될 일이 아니란 뜻이죠. 오늘은 우리가 알아야 할 중국 AI 기업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월 3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훈련비 78억원의 쇼크“AI 분야의 스푸트니크 모멘트이다.”(벤처투자가 마크 앤드리슨)“(AI 기업에 과도하게 투자한) 일부 벤처캐피털엔 멸종 수준의 사건이다”(악시오스 기자 댄 프라이맥)“엔지니어들이 딥시크를 미친 듯이 분석하고, 가능한 모든 것을 복사하려고 노력 중이다.”(메타 직원이 팀블라인드에 올린 글)1월 20일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출시한 최신 AI 모델 ‘R1’에 대한 반응입니다. 성능은 현재 업계 최고라 할 수 있는 미국 오픈AI의 o1 공식 버전과 비슷한데, 훈련 비용은 557만6000달러(78억원)만 들었다고 공개한 게 충격이었죠. 일반적인 대규모언어모델(LLM)의 훈련비용은 수억 달러로 추정됩니다. 즉, 이 설명대로라면 100분의 1로 비용을 낮췄단 뜻인 거죠. 딥시크 설명에 따르면 훈련에는 엔비디아 H800 GPU가 쓰였습니다. H800은 미국의 수출 규제(2022년 8월)로 H100의 중국 수출이 금지되자, 그보다 사양을 낮춰 중국 본토용으로 출시한 버전이죠.뭐? 이렇게 낮은 사양의 칩으로, 적은 돈을 들여 고성능 AI 모델 개발이 가능하다고? 업계는 거의 뒤집어졌고, 엔비디아 주가가 1월 27일 하루 만에 17% 폭락했습니다. 딥시크는 단숨에 미국에서 다운로드 1위 앱이 되었고요. 거의 모든 언론이 ‘딥시크 창업자인 1985년생 량원펑은 누구인가’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죠. 딥시크가 오픈AI의 저작권을 침해했을 수 있다,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탈취할 수 있다는 식의 경고가 이어졌고요. 체감상 2022년 말 오픈AI가 챗GPT를 처음 선보였을 때만큼이나 모두가 아주 난리입니다.물론 딥시크의 훈련비용은 실제론 더 많을 거란 지적은 이어집니다. 이 78억원은 정확히는 딥시크가 지난해 12월 출시한 ‘딥시크 V3’의 공식 훈련비용이라고 밝힌 금액인데요. 그 이전 모델(V1, V2) 개발비, 그리고 V3에서 R1으로 넘어가는데 추가된 비용은 모두 빠져있죠.그렇다 해도 딥시크발 AI 혁신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제 누가 더 높은 성능을 내느냐 못지않게 누가 더 적은 비용으로 고성능을 구현해 내느냐도 승부의 기준점이 됐다는 거죠.‘AI계 테무’의 힘마치 전기차 시장처럼 AI 모델에서도 더 싸게 만들기 경쟁이라니. 생소한 이야기라고요? 하지만 적어도 중국에선 일반화된 일입니다. 중국에선 지난해 5월을 기점으로 AI 모델 가격인하 경쟁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죠. 그럼 그 경쟁의 시발점이 된 기업은? 네, 역시나 딥시크였습니다.딥시크의 중국에서의 별명이 뭔지 아시나요? ‘AI계 핀둬둬(拼多多)’입니다. 핀둬둬는 무지막지하게 싼 가격으로 중국 시장에서 급부상한 전자상거래 기업이죠. 핀둬둬가 해외용으로 출시한 쇼핑 앱이 바로 테무(Temu)입니다. 즉, 딥시크는 ‘AI계 테무’라고 보시면 됩니다.딥시크에 이런 별명이 붙은 건 2024년 5월 7일 ‘딥시크 V2’ 모델을 출시하면서부터였죠. 딥시크 V2는 당시로는 최고 모델이던 오픈AI의 GPT-4 터보와 동일한 성능을 보였습니다. 특히 코딩과 수학 영역에선 성능이 오히려 앞서는 걸로 나와서( 물론 자체 테스트 결과) ‘최초로 GPT-4 터보를 이긴 오픈소스 모델’이라 불렸죠. 그런데도 가격은 말도 안 되게 저렴했는데요.AI 개발 기업이 돈을 버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이죠. 하나는 챗봇 같은 서비스의 개별 이용자에게서 직접 구독료를 받는 거고요(예-챗 GPT 플러스는 월 20달러). 다른 하나는 API(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를 개발자에 제공해서 그 이용료를 받는 겁니다. API를 이용하면 개발자는 그 AI 모델 기능을 포함시킨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데요. API 이용료는 사용하는 토큰량에 비례해서 내게 되죠. 중국 AI 개발 기업은 주로 기업고객이 내는 이 API 이용료에 수익을 의지해왔는데요. 딥시크는 V2를 선보이면서 이 가격을 확 낮춥니다. 100만 토큰당 입력 비용 1위안(0.14달러), 출력 비용 2위안(0.28달러)으로 말이죠.이게 얼마나 싼 건지 감이 안 잡히실 텐데요. 그래서 당시 딥시크가 공개했던 API 요금표를 가져왔습니다. 참고로 아래표에서 GPT는 미국 오픈AI, 제미나이(Gemini)는 구글, 클로드(Claude)는 앤트로픽, 라마(LLaMA)는 메타, 믹스트랄(Mixtral)은 프랑스 미스트랄의 AI 모델이고요. abab, 어니(ERNIE), GLM, 문샷(Moonshot), 큐원(Qwen)은 모두 중국산 AI 모델입니다. 각각 미니맥스, 바이두, 즈푸AI(Zhipu AI), 문샷AI, 알리바바가 개발했죠.언뜻 봐도 아시겠지만, 딥시크 V2의 API 요금은 극도로 저렴했습니다. 다른 기업의 10분의 1~200분의 1 수준이었죠. 중국 AI 업계는 경악했습니다. 딥시크를 가리켜 ‘AI 가격 도살자’란 표현이 나왔고요. 어쩔 수 없이 경쟁사까지 파격적인 가격 인하에 나서야만 했습니다. 예컨대, 알리바바는 API 이용요금을 최대 97%, 즈푸는 80%나 한꺼번에 인하했고요. 바이두는 보급형 모델을 무료로 공개했습니다. 또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챗봇(월간 활성 사용자 6000만명) ‘도우바오(Doubao)’를 운영하는 바이트댄스(=틱톡 모회사)는 API 출력 비용을 0.6위안/100만 토큰으로 확 낮췄죠.딥시크의 초저가격 공습은 지금도 이어집니다. 이번에 출시한 딥시크 R1의 API 서비스 가격은 100만 토큰당 출력 기준 16위안(2.19달러)인데요. GPT o1(60달러)과 비교하면 30분의 1 수준입니다. 어떻게 한 거야?딥시크는 중국 AI 시장에서 게임의 룰을 바꿔놓았습니다. 지난해 내내 중국에선 딥시크의 미친 가성비 비결에 대한 분석이 쏟아져나왔죠. 그리고 2025년 1월, 이제 전 세계 언론도 이를 분석하기에 바쁜데요. 요약하자면 이런 겁니다.-전문가 혼합(MoE, Mixture of Experts) 아키텍처: 복잡한 작업을 더 작은 작업으로 분해한 뒤 각 전문가에 할당하는 머신러닝 기법이죠. 도서관에 비유하자면 사서가 모든 책을 다 읽고 나서 답변해 주는 게 아니라, 답을 줄 만한 올바른 책을 사서가 찾아주는 식입니다(6710억개 매개변수 중 약 340억개만 활성화). 비용과 시간 모두 크게 절약됩니다.-8비트 부동소수점: 엔지니어들은 보통 숫자를 32개의 0 또는 1, 즉 32비트의 부동소수점으로 표현해 연산합니다. 딥시크는 이걸 8비트로 확 줄였습니다. 그러면 데이터가 간단해지니까 연산이 빨라지는 대신 정밀도가 떨어질 수 있는데요. 딥시크는 메모리 사용량을 75% 줄이면서도 정확도를 해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오픈소스: 딥시크는 누구나 소프트웨어 소스 코드를 수정하고 배포할 수 있는 오픈소스 방식으로 개발합니다. 이름과 달리 폐쇄형인 오픈AI와는 다른 길을 택한 거죠. 오픈소스 방식은 딥시크 성공의 핵심 비결로 꼽힙니다.딥시크는 꽤 든든한 모기업 지원도 받고 있습니다. 딥시크는 AI 기반의 대형 헤지펀드 하이플라이어(High-Flyer) 창업자 량원펑이 ‘일반인공지능(AGI)’을 개발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만든 회사인데요. 하이플라이어는 2021년(미국의 반도체 수출제한 이전)에 이미 엔비디아 A100 GPU 1만개를 탑재한 고성능 컴퓨팅 클러스터를 구축했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컴퓨팅 성능을 갖춘 기업은 중국에 6개뿐이라고 하죠.‘키미 k1.5’는 또 뭐지?어떤가요. 딥시크가 위협적으로 보이시나요? 그런데 여기서 알아두실 점이 있습니다. 딥시크 말고도 중국엔 쟁쟁한 대형 AI 모델 개발 기업이 많다는 겁니다. 우선 ‘6마리 작은 호랑이’라고 불리는 AI 스타트업이 있는데요(즈푸AI, 문샷AI, 미니맥스, 바이촨즈넝, 링이완우, 제웨싱천). 후발주자 딥시크는 6마리에 속하지 않죠. 이 6개 기업 중 가장 눈에 띄는 문샷AI를 볼까요. 2023년 10월 AI 챗봇인 ‘키미(Kimi)’를 출시해 중국에서 대히트를 친 기업인데요. 특히 장문의 텍스트를 입력해도 대답을 척척 해내는 게 인기 요인이었습니다. 한 번에 200만자(중국 한자 기준)를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다고 하죠.이 문샷AI는 1월 22일 ‘키미 k1.5’를 내놨는데요. 회사 측에 따르면 오픈AI의 o1 모델보다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성능을 보인다고 합니다. 회사 측은 딥시크 R1과 성능을 비교하진 않았지만, 일부 사용자는 키미 k1.5가 딥시크 R1보다 더 빠르고 답변이 낫다는 후기를 올리고 있죠. 키미 k1.5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함께 처리하는 멀티모달이란 점에서도 딥시크 R1과 차이가 있습니다. 참고로 키미 k1.5 챗봇 사용은 현재 무료입니다. 또 중국의 거대 IT 대기업도 참전해있죠. 알리바바·텐센트·바이두·바이트댄스가 대표 주자인데요.알리바바는 설날인 1월 29일 아침 대형모델 ‘큐원2.5-맥스(Qwen2.5-Max)’를 선보이면서 세계 최고 모델(Gpt-4o, 딥시크 V3 등)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였다고 밝혔고요. 바이트댄스도 주력 AI 모델을 업데이트한 ‘도우바오 1.5 프로(Doubao 1.5 Pro)’를 출시하면서 성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비용 효율적이라고 강조했죠. 딥시크가 전 세계의 주목을 끌자, 중국의 경쟁기업도 보란 듯이 업데이트를 서두르는 모습입니다.그래서 알 수 있는 건? 딥시크는 중국의 AI 전쟁 승리를 위해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는 많은 중국 기업 중 하나일 뿐이란 겁니다. 미국이 5000억 달러짜리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발표하기 며칠 전, 중국 정부는 600억 위안(약 82억 달러, 약 12조원) 규모의 AI 투자기금을 조성했죠.물론 중국은 엔비디아의 첨단 반도체를 구하거나, 이를 제조할 장비를 들여오기도 어렵습니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는 아마도 더 강해지겠죠. 어쩌면 저사양 엔비디아 칩도 막히게 될지도 모릅니다.하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몸부림 속에서 혁신은 싹트고 있습니다. 미국 AI 기업 퍼플릭시티 CEO 아라빈드 스리니바스의 CNBC 인터뷰 발언을 참고하시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입니다. 하드웨어적 한계가 (중국 AI의)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해결책을 알아내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훨씬 더 효율적인 것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입증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더 효율적인 솔루션은 찾을 수 있습니다.” By.딥다이브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딥시크 등장을 두고 “돈을 많이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평가했죠. 상당히 기업가다운 발언이 아닐 수가 없는데요. 대형 AI 모델을 개발하는 기업보다는 이를 사용해서 소비자에 AI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기업이 훨씬 더 많은 법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격이 내려가는 건 AI 생태계 전체엔 긍정적이고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훈련비용이 78억원밖에 되지 않는다는 가성비 AI 딥시크R1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더 적은 메모리만 쓰는 전문가혼합 아키텍처, 8비트 부동소수점 같은 혁신이 비결로 꼽히죠.-개발비용을 다운시킨 딥시크는 API 이용료 역시 확 낮췄습니다. 경쟁사와 비교해 이용료가 몇십분의 1 수준일 정도죠. ‘AI계 테무’의 도발에 중국 AI 업계에선 이미 가격 경쟁에 불이 붙었습니다. -중국에 딥시크만 있는 게 아닙니다. 문샷AI를 포함한 6마리 호랑이 스타트업, 알리바바와 바이트댄스 같은 거대 IT 기업도 자체 AI 모델 개발에 투자를 쏟아붓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도 AI 투자기금을 마련해 지원에 나서죠. 중국 AI 산업에 주목할 때입니다. *이 기사는 1월 3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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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유를 파자”는 트럼프…그래서 유가 내리나요?[딥다이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취임하자마자 ‘행정명령 사인쇼’를 벌였습니다. 유례없는 정책 폭격을 퍼붓고 있죠. 미국 은행 JP모건체이스가 ‘작전실(War room)’을 설치하고 직원들이 밤새워 정책을 분석 중일 정도인데요. 전 세계를 긴장케 하는 관세 관련 행정명령은 아직 나온 게 없습니다. 예상보단 훨씬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죠. 대신 지금까지 발표된 것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이겁니다. ‘미국 에너지의 해방(Unleashing American Energy)’ 행정명령. ‘친환경에서 다시 화석연료로’ 미국 에너지 정책의 급격한 유턴을 선언한 건데요. 글로벌 에너지 산업에 영향이 큰 트럼프의 에너지 행정명령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월 2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미국이 에너지가 부족하다고?미국은 에너지 비상사태에 놓여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아무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는 듯하지만, 어찌 됐든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날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대통령이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한 건 미국 역사상 처음이라는군요(1970년대에 일부 지역에서 선포한 적은 있다고). 그는 “미국의 에너지 생산·운송·정제·발전이 부족한 건 우리 국가 경제·안보·외교정책에 비정상적이고 특별한 위협”이라고 주장했죠. 미국이 이미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이고, 그 생산량이 올해는 물론 내년에도 사상 최대치를 경신할 텐데도 말이죠.그리고 비상사태를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날 서명한 게 ‘미국 에너지 해방’ 행정명령입니다. 그 내용은 많지만,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①에너지와 천연자원(광물)의 생산을 가로막거나 지연시키는 각종 규제를 없앤다.②액화천연가스(LNG) 수출에 대한 바이든 행정부의 제한을 해제한다.③전기차를 의무화하는 정책은 철폐한다.④차량·가전제품에 대한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하는 불공정한 보조금 폐지를 즉각 검토한다.트럼프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에너지에서 많은 돈을 벌 겁니다. 우린 누구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에너지) 가격을 낮추고 전략적 비축량을 다시 최고점까지 채우고, 미국 에너지를 전 세계로 수출할 겁니다.”친환경에서 다시 화석연료로‘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 석유·가스 시추를 늘리자는 구호이죠. 트럼프가 대선 캠페인에서 강조했던 이 슬로건이 이제 정책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시장 반응은 어떨까요.일단 트럼프 대선 캠페인에 수천만 달러를 기부했던 석유 재벌들은 정책 기대감에 주가가 뛰며 큰 수혜를 봤습니다. 기후책임연구프로젝트(CARP)가 친트럼프 성향의 석유업계 억만장자 15명의 재산 변동을 추적했는데요. 트럼프 취임 후 단 하루 만에 33억 달러가 늘었다고 합니다. 2025년 들어서 그들이 번 돈은 총 170억 달러에 달한다죠. 투자금(기부금) 대비 수익률이 엄청납니다.미국의 LNG 수출기업은 파티 분위기입니다. 그동안 바이든 정부가 LNG 수출 허가를 중단하면서 위기에 처했는데, 트럼프가 이를 다 풀어줬으니까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LNG 수출기업 벤처글로벌(Venture Global)은 이를 기회 삼아 곧 대규모 기업공개(IPO)에 나섭니다.규제에 가로막혀있던 광산업체들도 활기를 띱니다. 리오틴토는 12년째 허가를 기다렸던 미국 애리조나주 구리광산 개발이 마침내 승인될 거라 기대하죠. 완전히 개발되면 북미에서 가장 큰 구리광산이 될 겁니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거부했던 알래스카의 페블광산 프로젝트도 트럼프 정부에서 승인받을 가능성이 커 보이죠. 캐나다기업 노던다이내스티가 소유한 이곳엔 구리·금·몰리브덴이 약 4000억 달러어치가 매장돼 있습니다.반면 전기차 관련 업계는 크게 덜컹거립니다. 2030년까지 신차의 절반을 전기차로 채운다던 바이든 시대 목표가 트럼프 행정명령으로 물거품이 되어버렸죠. 전기차 충전소 건설을 위한 연방정부 지원도 중단됐고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전기차에 최대 7500달러 구매보조금(세액공제)을 제공 정책은 아직 살아있긴 한데요(행정명령으론 없애지 못하고 의회가 새 법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역시 결국 폐지 또는 축소될 게 뻔하단 관측이 나옵니다.테슬라를 포함한 전기차 업체와 미국에 투자해 온 국내 배터리 업계엔 악재가 아닐 수 없죠. 23일엔 일본 자동차 기업 닛산이 미국에서 소형전기차를 생산하는 계획을 포기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그래서 셰일혁명 다시 한번?자, 그럼 이제 미국에선 대대적인 석유·가스 개발 붐이 일어나고, 미국 소비자들은 기후 위기 따윈 잊어버린 채 저렴한 화석연료를 펑펑 쓰며 풍요를 즐기게 될까요. 그럼 국제유가는 이제 하락할 일만 남았으니 우리는 안심해도 되나요.일단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시나리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석유 생산량이 왕창 늘어서 미국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2달러(=L당 0.53달러, 757원) 이하로 떨어질 거라고 큰소리쳐왔거든요.(22일 현재 미국 내 평균 가격은 갤런당 3.23달러)그런데 말이죠. 규제를 풀어주고, 개발할 땅을 임대해주고, 허가를 신속하게 내주는 것. 모두 석유·가스 생산을 늘리는 데 도움 되는 정책인 건 분명한데요. 시추를 더 하느냐 마느냐는 대통령이 아니라 민간 기업이 결정하죠. 그리고 기업 의사결정을 지배하는 건 어디까지나 시장 논리입니다. 유정을 새로 뚫는 게 얼마나 돈이 되느냐가 가장 중요하죠.그리고 그 부분이 좀 애매합니다. 미국은 이미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이자 천연가스 수출국이죠. 2009년부터 ‘셰일오일 개발 붐’이 일면서 이후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급증했는데요(2016년 하루 약 890만 배럴→2024년 1320만 배럴).지금은 미국도 이 붐의 끝물입니다. 수익성 있는 유정은 이미 거의 다 파냈기 때문이죠. 갈수록 미국에서 새 유정 굴착에 드는 비용이 커지는 추세입니다. 미국 석유의 심장부인 퍼미안 분지의 손익분기점이 이미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 기준으로 배럴당 62달러에 달하고 있죠.미국 에너지정보국이 예상하는 올해 WTI 평균 가격이 얼마냐. 배럴당 70달러입니다. 2026년엔 62달러로 떨어질 거라고 전망했고요. 이 전망대로라면 새로운 유정을 뚫는 건 남는 게 없는 장사입니다.트럼프의 ‘드릴, 베이비, 드릴’ 정책이 실제론 석유·가스 생산기업을 움직이진 못할 거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에너지분석 전문기업 리스타드에너지는 이렇게 내다봤죠. “임원진이 (트럼프의) 수사에 고무될 순 있지만, 석유의 잠재적 과잉공급과 유정 생산성 정체로 인해 더 많은 시추를 위해 투자를 늘릴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낮습니다.”물론 트럼프 정부가 석유 과잉공급을 흡수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전기차 지원을 없애고 배출가스 기준을 낮춰서 기름 많이 쓰는 내연기관차 판매를 늘릴 수 있고요. 또는 예산을 태워서 전략비축유를 다시 가득 채울 수 있죠. 트럼프 정부가 준비 중인 정책인데요. 참고로 미국은 긴급 상황에 대비해 전략비축유를 최대 7억1350만 배럴까지 저장할 수 있고, 현재는 약 4억 배럴 정도만 채워져 있습니다. 이론적으론 3억 배럴 넘게 추가할 수 있는 거죠(대신 예산이 엄청 많이 들겠지만.)동시에 다른 나라를 이렇게 압박하고 나설 겁니다. ‘관세를 피하고 싶나요? 그럼 미국 LNG를 수입하세요!’ 현재 미국산 LNG의 최대 수입국인 중국, 러시아산 LNG 수입에 의존하는 유럽이 모두 그 타깃이 되겠죠. 물론 세계 3위 LNG 수입국인 한국도. 이미 2022년 이후 3년 만에 미국산 LNG 장기도입 계약 체결에 나섰습니다.하지만 이렇게 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석유·가스 공급과잉 없이는 미국 소비자의 에너지 가격이 떨어질 리가 없죠. 소비자와 석유 생산기업의 이익, 둘은 명백히 상충합니다. 인플레이션을 잡으려고 석유 생산을 늘리자는 건데, 생산을 늘리려면 유가가 뛰어야 한다니. 딜레마적 상황인데요.그래서 트럼프의 ‘가솔린 2달러’ 공약은 신기루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에서 휘발유 가격이 배럴당 2달러 이하였던 마지막 시기는 코로나 팬데믹이 절정이던 2020년. 당시 평균 원유 가격은 배럴당 39.16달러(WTI 기준)였습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석유 기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아직은 확정되지 않은 트럼프 정부 정책도 큰 변수입니다. 만약 미국이 정말 캐나다에 다음 달부터 25% 관세를 부과한다면? 미국 중서부 지역 휘발유값이 갤런당 30~40센트 오르게 될 겁니다. 미국은 석유의 20% 이상을 캐나다에서 수입하니까요. 또는 트럼프가 그동안 공언했던 대로 이란에 더 강경한 제재 정책을 펼친다면? 이란의 원유 수출이 급감하면서 국제유가가 요동칠 겁니다. 골드만삭스는 이 경우에 브렌트유가 무려 90달러까지(!) 뛸 거라 내다보죠.그래서 결론은? 네, 트럼프가 돌아왔습니다. 그의 단순명료한 구호(‘드릴, 베이비, 드릴’ 같은)에 비해 에너지 정책이 나아가는 길은 울퉁불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고한 대로 관세 정책까지 더해지면 롤러코스터가 펼쳐질지 모르죠. 그러니 꽉 잡으세요. By.딥다이브트럼프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다보스포럼에서 “OPEC은 석유가격을 낮추라”고 발언했죠. 이에 브렌트유 가격이 1% 하락하기도 했는데요. ‘저유가=미국경제 번영’이란 그의 확고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20일 취임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중 전 세계가 주목한 건 ‘미국 에너지 해방’ 행정명령이죠. 친환경에서 다시 화석연료로의 유턴을 선언했습니다.-미국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업계는 규제 완화에 환호하죠. 반면 보조금 폐지 위기에 처한 전기차 관련 업계는 우울합니다. -‘드릴, 베이비, 드릴’이란 트럼프 구호대로 미국에서 다시 셰일오일 붐이 불붙을까요. 기름값이 떨어지고 소비자들은 행복해질까요. 그럼 좋겠지만 냉정한 시장 논리에 따르면 그게 쉽진 않다는데요. 시대는 이미 달라졌는데 자꾸 ‘다시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려고 하는 트럼프식 정책의 한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이 기사는 1월 2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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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S·삼성도 못한 걸 화웨이가? 트럼프 제재, 그 후 6년[딥다이브]

    지난해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이 3위로 밀려났다는 소식 들으셨나요? 중국 업체의 공습+애국 소비 열풍 탓인데요. 그 중심엔 이 기업이 있습니다. 화웨이.2019년 미국의 제재로 나락으로 떨어진 줄 알았던 화웨이가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특히 놀라운 점은 하드웨어보단 소프트웨어에 있죠. 구글 안드로이드와 애플 iOS가 장악한 모바일 운영체제(OS) 시장에서 화웨이가 놀라운 자립의 스토리를 써가고 있거든요. 마이크로소프트와 블랙베리, 삼성전자가 모두 실패한 그 어려운 걸 화웨이가 해낸다고? 솔직히 믿기진 않는데요. 트럼프 제재 후 6년, OS 완전 독립 꿈꾸는 화웨이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미국 제재 뚫었다?지난 16일(현지시간) 세계 시총 1위 기업 애플 주가가 4% 넘게 급락했죠. 애플의 중국시장 판매량이 지난해에만 900만대 가까이 줄어들면서 중국 시장 점유율 3위에 그쳤다는 소식이 충격을 준 건데요(5180만대→4290만대). 이렇게 미끄러진 애플의 빈자리는 누가 채웠을까요. 일단 시장 1위는 중국의 저가형 스마트폰 브랜드 비보(4930만대)가 차지했고요. 무엇보다 선전한 건 단숨에 2위로 뛰어오른 화웨이였습니다. 지난해 판매량이 전년보다 무려 1250만대(37%)나 급증했죠(3350만대→4600만대).화웨이는 1987년 중국 선전에서 설립된 통신장비 기업입니다. 한때 화웨이가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휩쓸던 시절이 있었죠. 2018년 애플을 제치고 삼성전자에 이어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 세계 2위로 올라섰는데요.곧바로 미·중 무역 갈등이 닥쳤고요. 화웨이는 트럼프발 제재의 직격탄을 맞습니다. 2019년 미국 정부가 안보 위협을 이유로 화웨이를 거래제한 기업 명단(Entity List)에 올린 거죠.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그들(화웨이)은 우리를 감시한다”면서 화웨이를 “스파이 웨이”라고 칭했습니다. 미국과 관련된 기업과의 각종 거래가 줄줄이 끊겼죠. TSMC의 고성능 칩도,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도 쓸 수 없게 됩니다.이대로 미국이 화웨이를 말려 죽이겠구나. 다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2021년 매출이 2020년의 3분의 1로 쪼그라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중국 정부와 화웨이는 포기하지 않았죠. 정부는 화웨이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했고요. 화웨이는 압도적으로 많은 연구개발비(중국기업 중 1위, 2023년에만 약 32조원)를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제재 4년 만인 2023년 8월 말. 화웨이가 예고도 없이 불쑥 신형 5G 스마트폰 ‘메이트60’를 공개합니다. 미국 제재로 4G 스마트폰만 만들던 화웨이가 다시 5G 시장에 복귀한 거죠.메이트60에 탑재된 AP는 7나노급인 ‘기린 9000s’. 화웨이의 팹리스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하고 중국 파운드리기업 SMIC가 생산했다죠.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중국은 미국의 제재 때문에 고성능 칩 생산에 쓰는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수입할 수 없거든요. 구형 장비를 가지고 7나노 칩을 생산해 냈단 뜻인데요. 전 세계 반도체 업계가 ‘어떻게 중국이 이런 칩을? 믿을 수 없어!’라는 반응이었죠. 물론 장비 탓에 수율(전체 칩 중 정상제품 비율)은 형편없을 거란 분석이 이어지긴 했지만요.메이트60 프로의 인기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습니다. ‘미국 제재를 뚫고 이뤄낸 쾌거’라며 중국 소비자는 환호했고, 대대적인 ‘애국 소비’ 물결이 일어났죠.MS·삼성도 못한 것2023년 메이트60로 화려하게 컴백한 화웨이는 지난해 9월엔 세계 최초로 ‘3단 병풍폰’을 출시해 화제를 끕니다. 그리고 2024년 11월. 새로운 전환점이 될 플래그십 모델, 메이트70을 선보였죠.메이트70은 전 세계의 주목을 끄는 매우 특별한 제품입니다. 중국산 칩 때문이 아닙니다. AP 자체만 보면 소소한 개선에 그쳤거든요. 이번엔 소프트웨어가 중요합니다. 화웨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순혈’ 운영체제(OS) ‘하모니넥스트’가 이 모델에 처음 탑재됐습니다.이게 왜 그리 중요하냐고요. 여러분의 스마트폰이 쓰는 운영체제는 무엇인가요? 둘 중 하나겠죠. 구글 안드로이드 아니면 애플 iOS. 전 세계 스마트폰은 거의 다 그렇습니다. 스마트폰을 어디에서 만들든 결국 OS는 종속돼 있는 거죠.물론 이 생태계를 벗어나려는 도전은 여럿 있었습니다. 쿼티 자판으로 인기 끌었던 블랙베리의 ‘블랙베리OS’가 그랬고요. 마이크로소프트(MS)도 ‘윈도우폰’ OS를 개발해 노키아 스마트폰에 탑재하기도 했습니다. 또 삼성전자와 인텔이 손잡고 개발한 OS ‘타이젠(Tizen)’이 있었죠. 2012년 처음 공개해, 이를 탑재한 첫 스마트폰이 2015년 인도에서 출시되기도 했는데요(삼성 Z1).왜 모두 실패했을까요.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생태학에 있습니다. OS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생태계를 새로 구축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독자적인 OS라는 건 안드로이드나 iOS와는 완전히 별개란 뜻이죠. 앱 개발자 입장에선 아예 새로 앱을 다시 개발해야만 합니다. 이제 막 새로 나온 OS는 사용자가 적으니, 앱을 잘 만들어도 크게 돈이 안 되죠. 또 새 OS의 개발 언어와 도구를 익히기까지 시간과 노력도 많이 들고요. 개발자 또는 기업이 굳이 그렇게까지 할 유인이 부족합니다.소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OS로 갈아타면 기존에 쓰던 안드로이드나 iOS용 앱이 무용지물이 되죠. 아무리 성능 좋은 기기여도 좋아하는 게임, 매일 쓰는 메신저 앱을 쓸 수 없게 된다면 무슨 소용인가요. 그리고 원래 안드로이드에서 iOS, 또는 그 반대로 갈아타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소비자로선 굳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새 OS를 시도할 이유가 없죠.바로 이런 이유로 그동안 독자 모바일 OS 시도는 모두 경영학의 대표 실패 사례로 기록됐습니다. 참고로 삼성전자 타이젠은 스마트TV를 포함한 가전제품용 OS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죠.이렇게 스마트폰 OS 시장 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결론이 나버린 후인 2019년 8월. 화웨이가 자체 모바일 OS 개발을 선언합니다. 그해 5월 미국 제재로 구글이 화웨이에 시스템과 보안 업데이트를 중단해 버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죠. 다가오는 계약 만료로 구글을 완전히 잃게 되면 화웨이 휴대전화는 ‘벽돌’로 전락할 판이었습니다.죽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전 세계 화웨이의 2000명 넘는 엔지니어가 중국 광둥성 동관시 송산호 캠퍼스에 모였죠. 기존에 화웨이가 사물인터넷(IoT) 기기 용도로 개발해 왔던 OS를 스마트폰용으로 바꿔 개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화웨이는 역대 가장 많은 엔지니어가 투입된 이 프로젝트를 ‘송호전투’라고 부릅니다. 훗날 화웨이 클라우드의 장핑안 CEO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화웨이 창립 이래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전쟁은 시작부터 아무도 우리가 이길 거라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생태계를 구축하려던 많은 기업이 모두 패배했기 때문이죠.”이것은 국가적 사명?!화웨이의 자체 OS 이름은 하모니(중국명 훙멍·鸿蒙). 2021년 6월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하모니OS 2.0이 공식 출시됩니다.하지만 이때의 하모니OS는 사실 100% 중국 기술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원래 안드로이드는 기본 소스코드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모두 공개된 기술이죠. 이걸 AOSP(안드로이드 오픈소스 프로젝트)라고 부르는데요. 화웨이는 이 AOSP 기반으로 하모니OS를 만들었습니다. 즉, 뼈대는 결국 구글 안드로이드와 똑같은 거죠. 핵심 기술 자체는 미국 것을 가져다 쓴 셈인데요.그래서 이 하모니OS에선 안드로이드용 앱이 호환됐습니다. 소비자들은 쓰던 앱을 그대로 쓸 수 있고, 개발자도 하모니용으로 완전히 새로 앱을 개발하진 않아도 됐고요. 덕분에 하모니는 별 충격 없이 중국 시장에 순탄하게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1분기엔 중국 점유율에서 애플의 iOS를 근소하게 앞섰을 정도죠. 다만 ‘이걸 자체 OS라고 볼 수 있나?’라는 회의적 반응이 많습니다. 완전한 독자 기술은 아니니까요.일단 생존이란 목표를 달성한 화웨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100% 중국 기술로 만든 ‘순혈’ OS를 개발한 거죠. 기존 안드로이드 생태계와 완전히 단절된, 전혀 새로운 모바일OS를 지난해 10월 선보입니다. 이름은 ‘하모니넥스트’.코드 1억1000만 줄 대부분을 화웨이가, 일부는 오픈소스로 개발했죠. 지난해 11월 출시된 메이트70 스마트폰에 처음 탑재됐고요. 올해 중국에서 화웨이가 내놓을 모든 휴대폰과 태블릿 제품엔 이 새 OS가 장착됩니다. 단, 당분간 소비자는 이전 버전(안드로이드와 호환되는)을 선택할 수 있죠.이제 화웨이는 새로운 생태계 구축이란 ‘맨땅에 헤딩’을 시작해야 합니다. MS와 삼성전자도 결국 포기하게 만들었던 그 가시밭길이 열린 거죠.현재 구글 플레이에 올라온 안드로이드용 앱은 250만개, iOS 앱스토어의 앱은 170만개가 넘죠. 반면 현재까지 하모니넥스트용으로 나온 앱은 약 2만개. 화웨이는 속도를 끌어올려 올해 안에 10만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이지만, 그래도 역부족입니다. 이미 하모니넥스트로 OS를 바꿨다가, 일상적인 앱이 작동하지 않아서 낭패 봤다는 소비자 불만이 적지 않죠. 개척해야 할 광활한 황무지가 펼쳐진 셈인데요.그런데 화웨이가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바로 범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죠. 예컨대 하모니넥스트에선 별도 앱을 다운 받지 않고도 바로 ‘디지털 위안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안드로이드나 iOS에선 불가능한 게 하모니넥스트에선 구현되는 거죠. 또 주요 은행은 올해 연초부터 모여 ‘순혈 OS 기반 혁신을 계속하겠다’며 대놓고 화웨이 밀어주기를 선언했고요. 주요 IT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모니넥스트용 앱을 설계한 WPS오피스의 수석기술 전문가 진후안은 CCTV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실제 국가적 사명을 가지고 있고, 오피스 소프트웨어 독점을 대체할 제품을 갖고 싶기 때문에 화웨이의 이 운영체제를 반드시 지원할 겁니다.”순혈OS 지원은 거의 국가 차원의 사업처럼 취급되고 있는데요. 그만큼 화웨이가 2019년 미국 제재 이후로 중국 기술 자립의 상징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죠.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인민일보의 온라인 논평 일부를 소개합니다. “자율적이고 통제 가능한 토종 훙멍(하모니 넥스트)은 중국의 과학기술 자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결과물이자 중국 정보기술 산업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초석입니다. 정부와 기업의 훙멍(하모니넥스트) 적용 과정을 가속화하여 핵심 경쟁력을 강화하고, 발전의 주도권을 잡고, 경제의 지속 회복을 촉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생태계 구축이란 가시밭길이런 분위기 덕분에 하모니넥스트에 대한 시장의 기대감은 상당합니다. 화웨이는 비상장기업이라 주식시세가 나와 있진 않은데요. 하모니넥스트 관련 기술기업인 런허소프트웨어(润和软件), 화리산업(华立股份) 주가는 지난해 10월 한 달 만에 300%나 뛰기도 했죠.그럼 과연 화웨이는 진짜 OS 독립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위청동 화웨이 소비자사업부문 CEO는 이미 나와있는 2만개 앱만으로도 “사용자 일일 이용시간의 99.9%를 충족했다”고 주장하는데요. 하지만 나머지 0.1%까지 다 채우지 못한다면 소비자는 외면할 겁니다. 화웨이가 매년 60억 위안(약 1조9000억원) 이상을 투자하겠다며 개발자 지원에 열을 올리는 이유입니다.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중국 안에서만 통하는 전략이죠. 만약 이 스마트폰을 들고 해외여행을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해외에서 써야 할 앱 대부분이 하모니넥스트 OS에선 제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화웨이가 그랩, 에미레이트항공 같은 해외 기업과의 협력에 나섰다고는 하는데요. 해외 개발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아직 기대하기 어렵죠. 한계가 뚜렷합니다.무엇보다 가장 큰 걸림돌은 중국 내부에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쓰는 중국의 다른 스마트폰 제조사가 과연 화웨이의 하모니넥스트로 넘어올까요? 비보·오포·샤오미처럼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화웨이와 치열하게 다투는 경쟁자들이 말이죠. 해외에선 통하지도 않고, 아직 생태계가 척박한 OS를 굳이 탑재할 이유가 뭘까요. 누구 좋으라고?심판이자 선수인 상대와 경쟁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입니다. 노키아와 손잡은 MS의 윈도우폰OS나 삼성전자의 타이젠OS가 과거에 실패한 이유 중 하나도 그거였죠. 고객(스마트폰 제조사)과 스마트폰 시장에서 너무 직접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다 보니 선택받지 못한 겁니다. 화웨이 역시 지금 그런 상황이죠.애국주의만으로는 시장경제의 냉정한 논리를 뛰어넘기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기업 샤오미는 스마트폰은 물론 사물인터넷과 전기차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화웨이와 경쟁관계인데요. 그런 샤오미가 하모니넥스트를 채택할 가능성? 거의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샤오미는 AOSP(안드로이드 오픈소스 프로젝트) 기반의 자체 운영체제 ‘하이퍼OS‘를 2023년 출시하고 이를 확장해 나가기 바쁘죠. 각자도생 기조가 팽배합니다.“높은 산을 향하면 우리 자신이 길이다.” 위청동 화웨이 CEO는 2025년 신년 메시지에서 이렇게 밝히며 “훙멍(하모니) 생태계 번영”을 강조했는데요. 모바일 OS 자립이란 미개척의 길을 정말 열어갈 수 있을까요. 어려워 보이지만 만약 해낸다면 ‘반도체 자립’만큼이나 엄청난 일이 될 겁니다. 실패한다면 역시나 그건 불가능한 꿈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거고요. 한번 지켜보시죠. By.딥다이브미국의 제재가 없었더라면 화웨이도 독자적인 운영체제로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미·중 무역 갈등으로 인해 달라지는 기업의 운명이 흥미로운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6년 전 미국의 제재로 추락했던 화웨이가 5G 스마트폰 시장에서 부활에 성공했습니다. 이제 독자 개발한 순혈 운영체제(OS)로 새로운 전환점에 섰습니다.-구글 안드로이드와 애플 iOS의 아성을 깨려는 시도는 십수 년 전부터 여럿 있었지만 줄줄이 실패했습니다. 블랙베리, 마이크로소프트, 삼성전자마저 포기했죠. 하지만 화웨이는 미국의 제재로 2019년 어쩔 수 없이 OS 독립의 길로 접어듭니다.-안드로이드와 호환되는 하모니OS로 중국 시장에 안착한 화웨이. 이제 안드로이드와 완전히 결별한 100% 중국산 OS 하모니넥스트로 나아갑니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죠. 하지만 정말 생태계 구축을 해낼 수 있을까요. 여전히 회의론이 팽배합니다.*이 기사는 2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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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주 인터넷, 그게 돈이 될까? 머스크는 다 계획이 있다[딥다이브]

    일론 머스크의 위성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Starlink)’를 아시나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위력을 과시한 스타링크가 곧 한국에서도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허황한 꿈인 줄 알았던 초연결의 ‘우주 인터넷 시대’가 손에 잡히는 현실로 다가온 건데요.인터넷 연결에 광케이블이면 충분하지, 무슨 위성씩이나 필요하냐고요?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마존부터 아프리카까지, 세계 곳곳에서 스타링크는 이미 열풍을 일으키고 있죠. 그 확장 속도가 무서울 정도인데요. 오늘은 지구 정복 노리는 스타링크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이리듐의 추억우주 인터넷 또는 위성 인터넷 서비스. 그 개념은 간단합니다. 우주 저궤도(고도 약 500㎞)에 쏘아 올린 인공위성을 중계국 삼아 지구 어디서나 통신이 이뤄지게 하는 거죠. 산꼭대기, 바다 한가운데, 비행하는 항공기 등. 지리적 제약 없이 통신이 가능해집니다.이런 위성 인터넷 서비스, 역사가 꽤 오래됐어요. 아마 X세대분들은 기억할 겁니다. 1990년대 후반 모토로라가 선보였던 ‘이리듐(Iridium)’이요. 엄청난 크기의 안테나가 달린 벽돌 같은 단말기를 쓰면 전 세계 사막·정글·바다 어디서나 이동통신을 쓸 수 있다며 SK텔레콤이 대대적으로 광고했던 서비스인데요. 전 세계에서 약 2만명, 한국에서도 2500명 넘게 가입했지만 1999년 파산했죠. 당시 기술 수준으론 투자비가 너무 많이 들고 서비스 요금도 비쌌기 때문입니다(단말기 가격 3000달러, 요금 분당 4~7달러). 멋진 아이디어였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갔죠.죽은 줄로 알았던 위성 인터넷 프로젝트가 부활한 건 2019년입니다. 일론 머스크의 우주기업 스페이스X가 그해 5월 우주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를 상용화하겠다며 인공위성 60기를 팰컨9 로켓에 실어 쏘아 올렸죠. 이렇게 쏘아 올려 작동 중인 스타링크 위성이 현재는 무려 7000개 이상. 몇 년 전엔 상상도 못 했던 엄청난 숫자죠. 전 세계 활성 위성 4분의 3이 스타링크용입니다. 이게 다 스페이스X가 로켓 재사용으로 발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인 덕분에 가능해진 건데요. 스페이스X는 최종적으로 저궤도 위성을 4만2000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입니다.현재 스타링크가 제공하는 건 광대역 무선인터넷 서비스입니다. 이를 이용하려면 고객은 피자 상자처럼 생긴 주파수 수신용 안테나를 설치해야 하죠. 스타링크에 따르면 인터넷 속도는 25~220Mbps이고요. 대부분 사용자가 100Mbps 이상의 속도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LTE 급인 거죠.별도 단말기 없이 휴대폰으로 곧장 위성 통신을 이용하는 서비스(다이렉트 투 셀, D2C) 출시는 아직입니다. 하지만 이 기능이 있는 스타링크 위성 350개가 지난해 이미 우주로 올라갔고요. 올해 안에 문자메시지를 시작으로, 추후엔 데이터와 음성통화까지 서비스하게 될 겁니다. 참고로 대형 산불 피해를 입은 LA 지역에선 이 D2C 서비스가 테스트 되고 있죠. 스타링크는 D2C 서비스에 대해 ‘사각지대를 없애 마음의 평화를 줄 것’이라고 홍보 중입니다.아프리카에 일어난 스타링크 붐아마 여기까지 읽고도 많은 분들이 시큰둥할 겁니다. 한국이 인터넷망은 전 세계 최고 수준이잖아요. 바다나 하늘 위이면 모를까, 지상에선 굳이 위성 인터넷이 크게 필요하진 않죠. 실제 한국 시장 출시를 앞둔 스타링크의 주요 타깃은 원양어선, 항공기 기내 인터넷 같은 B2B(기업 간 거래) 시장입니다. 스페이스X는 한국 정부에 제출한 사업계획에서 국내 스타링크 이용자가 서비스 첫해엔 2000여명, 5년 차엔 누적으로 7만명이 될 거라고 전망했죠.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 얘기이고요. 초고속 인터넷 접속이 그리 쉽지 않은 지역이 전 세계적으로 보면 여전히 많습니다. 스타링크 가입자 수가 매우 빠르게 늘어나는 이유이죠. 2024년 5월에 300만명을 넘었는데, 지난해 말엔 460만명을 기록했습니다. 7개월 만에 50% 넘게 늘어난 거죠. 우주산업 분석업체 퀼티스페이스(Quilty Space)는 2024년 77억 달러 매출을 올린 스타링크 서비스가 2025년엔 가입자 수 780만명, 매출 118억 달러의 고속 성장을 이어갈 거라 전망합니다.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이 가입하느냐고요? 물론 가장 큰 시장은 미국(140만명 이상)인데요. 최근 성장세가 눈에 띄게 가파른 지역은 단연 아프리카입니다. 스타링크는 2023년 1월 나이지리아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에서 총 17개국에 서비스 중인데요. 그야말로 스타링크 가입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입 신청이 폭증하는 바람에 과부하를 우려해 주요 도시에선 판매를 일시 중단했을 정도이죠.아프리카는 인터넷 보급률이 43%로 세계 평균(66%)보다 훨씬 낮죠. 소득이 낮다 보니 비싼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소비자가 대다수이고요. 스타링크는 이 시장을 파고들기 위해 가격을 확 낮췄습니다. 미국에선 월 120달러인 가정용 무제한 데이터용 요금이 잠비아에선 24달러일 정도이죠. 또 서비스를 받으려면 소비자가 안테나 키트를 사야 하는데요. 미국에선 349달러에 구매해야 하는 이 키트를 케냐 같은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선 월 15달러에 대여해줍니다.아프리카에도 광케이블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지 기업이 많은데요. 이와 비교했을 때 속도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빠른데 가격은 저렴하니 소비자들이 스타링크에 열광할 수밖에요.심지어 아직 진출하지 않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나라에서 이웃 나라의 스타링크 서비스에 가입하기도 합니다. 추가로 로밍 비용을 내면 그 지역에서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서라는데요. 그만큼 안정적인 인터넷 연결을 원하는 이들이 많단 뜻이죠.스타링크는 단숨에 나이지리아에선 3위, 케냐에선 10위(전체 60개 업체 중)의 인터넷 공급업체로 단숨에 뛰어올랐는데요. 긴장한 현지 인터넷 기업들이 부랴부랴 가격을 낮추고 인터넷 속도를 높이면서 경쟁에 불이 붙었습니다. 짐바브웨, 나이지리아 등. 각국 통신사들이 공정한 경쟁이 어렵다며 아우성치죠. 현지 통신사는 그 나라에서 인력을 고용하고 설비투자도 하는데, 스타링크는 그런 것 없이 시장을 확장하니까요. “외국 기업(스타링크)이 들어와서 최소한의 일만 하면서, 아프리카 대륙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수천 명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현지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고 있다”(컨설팅기업 ‘스페이스인아프리카’ CEO 테미다요 오니오순)는 비판이 나오는데요.케냐에선 지난해 7월 최대 통신사 사파리컴이 나서기도 했습니다. ‘스타링크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달라’고 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낸 거죠. 하지만 케냐 루토 대통령 반응은 사파리컴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는 미국 투자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죠. “사파리컴 CEO는 제가 일론 머스크를 데려온 것에 매우 불만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게 ‘경쟁이 당신을 앞서가게 한다’고 격려합니다.”스타링크가 인터넷 혁명을 일으키는 또 다른 지역은 아마존입니다. 스타링크의 브라질 고객 25만명 중 7만명은 아마존 지역에 있다고 하죠. 고립된 원주민 마을과 정글의 목장, 열대우림 곳곳에 있는 군사기지, 그리고 불법적인 금 채굴 현장까지. 스타링크 안테나는 이제 아마존의 어디에서나 발견됩니다.지난해 뉴욕타임스는 아마존 깊숙한 곳에 사는 마루보 마을 원주민이 스타링크로 세계와 연결되면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전하는 르포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새로운 일자리와 교육의 기회가 열리기도 했고요. 동시에 소셜미디어와 게임 중독, 온라인 사기, 미성년자 음란물 시청 같은 우리에겐 흔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어쨌든 확실한 건 인터넷이 이제 생활필수품이 됐다는 거죠.브라질의 기술 전문기자 페드로 도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혁신적입니다. 이제 아마존에선 스타링크 없인 더 이상 살 수 없단 사실을 브라질리아(브라질 수도)의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수익성 없다? 스타십이 있다!스타링크는 분명히 세상을 바꿀 만한 놀라운 서비스입니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4년여 만에 118개국에 진출해 곳곳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죠. 게다가 아직은 이에 대적할 만한 경쟁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600개 넘는 위성을 쏘아 올린 유럽의 원웹(OneWeb)이 그나마 가장 앞서있지만, 기업과 정부를 대상으로 서비스하고요. 아마존의 ‘카이퍼 프로젝트’가 종종 대항마로 거론되지만 고작 프로토타입 위성 2개만 쐈을 뿐입니다. 스타링크가 상당히 앞서 나가는 건 틀림없어 보이죠.그럼 궁금합니다. 과연 스페이스X는 이 서비스로 돈을 벌고 있을까요. 또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대박이 날까요. 마치 테슬라처럼?사실 이를 정확히 알긴 어렵습니다. 스페이스X는 비상장 기업이고, 스타링크 서비스의 손익이 얼마인지 공개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2023년 11월 일론 머스크가 SNS에 “스타링크가 손익 분기점을 달성했다”고 밝혀 화제가 됐죠. 가입자가 늘면서 대량생산을 통해 안테나 제조비용을 크게 낮춘 게 그 비결일 거란 분석이 나왔는데요. 퀼티스페이스 창업자 크리스 퀼티는 이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죠. “이 정도 사이즈의 위성군이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업계의 모든 이들을 겁에 질리게 합니다.”하지만 블룸버그는 회의적입니다. 제대로 따져보면 현재 스타링크는 수익성이 전혀 없을 거란 분석이죠. 머스크가 위성을 우주로 보내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은 일부러 빼놓고 계산하고 있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라는데요.스페이스X가 아무리 1단 추진체 재사용으로 발사 비용을 전보다 대폭 낮췄다곤 하지만, 여전히 돈이 많이 듭니다(팰컨9 1회 발사 시 고객에게 6700만 달러를 청구 중). 또 스타링크는 위성이 많이 떠 있을수록 서비스 용량이 늘어나는 구조여서요. 이 사업을 계속 확장해 나가기 위해선, 앞으로도 위성을 엄청나게 많이 쏴야 합니다. 즉, 한동안은 상당한 투자비를 쏟아야 하는 돈 먹는 하마 같은 사업인 건데요.물론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 일론 머스크가 이미 세워놨습니다. 바로 스페이스X가 개발 중인 우주 발사체 스타십(Starship)이죠.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강력할 뿐 아니라 ‘완전 재사용’까지 가능한 발사체 말입니다.스타십은 1단부 추진체뿐 아니라, 2단부 우주선까지도 완전히 재사용하도록 설계됩니다. 덕분에 1회 발사 비용을 1000만 달러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하죠. 또 지난해 10월에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젓가락 같은 로봇팔 기술 기억하시죠. 1단 추진체가 바다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발사대 로봇팔에 사뿐히 안겨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회수하는 데 드는 시간까지 크게 절약하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스타십은 팰컨9(18t)보다 훨씬 많은 150t을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한 번에 훨씬 많은 인공위성을 우주로 쏠 수 있단 뜻이죠.스페이스X는 16일(현지시간) 스타십의 7차 시험비행에 나섰습니다. 당초엔 최신 스타링크 위성과 똑같이 생긴 모형 위성 10개를 싣고 우주로 날아가서 배치해 본다는 계획이었는데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단 추진체를 다시 발사대 로켓팔로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상단 우주선이 분해돼 버리고 말았죠. 물론 스페이스X는 앞으로 또다시 시험발사에 나설 겁니다.모두가 스타링크를 환영하는 건 아닙니다. 미국, 그것도 예측 불가 기업인 머스크에 이 엄청난 잠재력의 시장을 넘겨줄 순 없다는 경계심도 커져갑니다. 중국은 스타링크 대항마로 ‘궈왕(국가 인터넷망)’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죠. 지난달 위성 10기를 처음 발사했고요. 지난해 유럽연합은 자체 위성통신망을 구축하는 ‘Iris²(아이리스2)’ 프로젝트에 106억 유로(약 16조원) 투자를 발표했습니다. 잃어버린 우주 산업 주도권을 뒤늦게나마 되찾겠다는 계획인데요.스페이스X 사장 겸 COO인 그윈 샷웰의 말대로 “스타링크의 잠재고객은 80억명”입니다. 어디까지 커질지 모르는 이 시장에 뛰어들기엔 아직도 늦진 않았을 겁니다. By.딥다이브머스크의 우주 기업 스페이스X의 최종 목표는 인류의 화성 이주이죠. 스타링크는 이 목표 달성을 위한 자금을 대줄 만한 유망한 사업으로 꼽히는데요. 과연 이 장대한 스토리의 결말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우주 인터넷 스타링크가 한국에도 곧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이미 저궤도에 7000개 넘는 인공위성을 띄운 스타링크는 지난해 말 전 세계에 460만 가입자를 모으며 빠르게 성장 중입니다. -누가 가입하느냐고요? 인터넷 연결이 어려운 사람은 전 세계에 너무나 많습니다. 온라인에 접속된 적 없는 아마존 오지 마을, 너무 비싼 통신요금이 부담스러웠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 등. 곳곳에서 스타링크가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죠.-스타링크의 수익성을 두고는 논란이 있습니다. 머스크가 큰소리친 것과 달리, 막대한 위성 발사 비용 때문에 당장은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렵다죠. 하지만 스페이스X가 개발 중인 인류 역사상 최대, 최강의 우주 발사체 스타십이 완성된다면 얘기는 달라질지 모릅니다. *이 기사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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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기차 시대, 진짜 열리냐고? 노르웨이에 물어봐[딥다이브]

    2024년 전기차 시장은 주춤했습니다. 테슬라는 사상 처음으로 연간 판매량이 뒷걸음질 쳤고요. 유럽의 전기차 판매량도 전년보다 줄었죠. 중국에선 순수 전기차보다는 플러그인하이브리드가 성장을 이끌었고요.역시 전기차는 비싸고 충전도 어려워서 대중화까지는 갈 길이 먼 걸까요. 미국에선 트럼프 당선자가 전기차 보조금 폐지를 예고한 터라 전망마저 암울한데요.이런 추세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전기차 시대로 질주하는 국가가 있습니다. 바로 전기차의 나라, 노르웨이입니다. ‘2025년 전기차 100%’라는 결승선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데요. 전 세계가 주목하는 노르웨이의 비법은 바로 당근 정책이죠. 노르웨이 전기차 정책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10대 중 9대가 전기차88.9%. 지난해 노르웨이에서 팔린 승용차 10대 중 9대는 전기차였습니다. 2023년(82.4%)보다도 크게 늘었죠. 압도적인 세계 1위인데요.이게 하이브리드는 제외한 순수 전기차만 따진 수치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습니다. 이 나라에서 하이브리드 판매 비중은 지난해 8%였죠. 즉, 순수한 휘발유·경유 차량이 고작 3.1%를 차지했단 뜻입니다. 이 나라에선 내연기관차를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이제 어려워진 거죠.이런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전기차 많이 타기로 유명한 북유럽 이웃 국가 덴마크(51.5%)나 스웨덴(35%)과도 차이가 크고요.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 중국 역시 순수전기차 비율은 지난해 27.3%에 그쳤으니까요.사실 노르웨이는 도로를 전기차로 채우기엔 기본 환경이 척박합니다. 일단 날씨가 너무 추워요. 북극권 맹추위는 배터리 성능을 급격히 떨어뜨리곤 합니다. 또 국토가 넓고 길다 보니 인구 밀도가 낮습니다. 충전기를 촘촘히 설치하기 쉽지 않단 뜻이죠. 무엇보다 자동차 시장이 이미 성숙한 선진국입니다. 수십 년 동안 휘발유·경유 차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의 습관을 바꿔야만 하는 건데요.하지만 동시에 노르웨이는 전기차에 유리한 조건도 있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요.①싸고 안정적이고 풍부한 전기=노르웨이는 대부분 전기를 수력발전으로 생산합니다. 저렴하면서도 친환경적이기까지 한 전기가 넘쳐나는 나라이죠. 해저 케이블로 다른 나라에 남는 전기를 수출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전기를 충전해 달리는 자동차를 몰기엔 좋은 조건이죠.②기존에 너무 비쌌던 자동차세=노르웨이에선 차를 사는 게 항상 비쌌습니다. 승용차가 대중화된 1960년대 이후로 줄곧 자동차세가 너무 높았죠. 한때는 새 차를 사면 내야 하는 부가가치세와 등록세 같은 각종 일회성 세금이 구매비용의 50%를 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노르웨이엔 자동차 제조업체가 없고, 전부 다 수입차이잖아요. 정부 입장에서 자동차는 손쉽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대상이었죠. 소비자들은 불만이었지만, 정부는 환경을 명분으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자동차세를 부과해 왔습니다.20년 넘게 이어진 인센티브노르웨이의 전기차 지원 정책은 1990년대부터 생겨났습니다. 처음엔 노르웨이 전기차 스타트업 ‘싱크카(Think Car)’를 지원하려는 목적이었죠. 1997년 통행료 면제, 1998년 공공장소 무료 주차, 2001년 부가가치세(25%) 면제까지. 파격적인 혜택이 줄줄이 생겨났는데요. 싱크는 결국 망했지만, 이런 전기차 지원제도는 그대로 남았습니다.그리고 2011년 가을. 소형 전기차 신모델이 새롭게 선보이면서 노르웨이 자동차 시장은 격변합니다. 바로 닛산 리프(Leaf)였죠. ‘26만 크로네(약 3300만원)’이란 가격표와 175㎞라는 당시로선 양호한 공식 주행거리에 소비자는 열광했습니다. 동급 폭스바겐 골프보다 가격은 15% 정도 비싸지만, 통행료 면제에 무료 주차라는 혜택까지 받을 수 있다니 매력적이었죠. 2013년 리프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3위에 오릅니다(1위 폭스바겐 골프, 2위 도요타 오리스)이어 2013년 8월 테슬라가 모델S를 출시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킵니다. 44만6600크로네(약 5700만원)라는 경쟁력 있는 가격을 앞세워 치고 올라왔죠(물론 이후 테슬라는 점차 판매가격을 올렸지만요). 2014년이 되자 노르웨이 전체 신차 판매량 중 12.5%를 전기차가 채웠습니다. 10년 전에 이미 최근 한국이나 미국 시장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거죠. 이런 현상은 노르웨이 소비자들이 특별히 환경 이슈에 민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각자 이익을 따진 선택이었죠. 손익을 계산했을 때 전기차 플러스라는 게 확실하게 보이자, 고민 없이 돌아선 겁니다. 노르웨이에서 전기차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너무 비싼 환경정책?그리고 이때쯤부터 노르웨이의 전기차 정책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납니다. 세금 면제 덕분에 전기차 구매가 늘어나는 건 좋은데, 막상 전기차가 너무 잘 팔리니까 세수에 난 구멍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죠. 자동차 탄소배출량 줄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돈을 많이 쓰는 게 과연 맞느냐, 너무 혜택이 과하지 않느냐는 회의론이 나온 겁니다. 실제 2025년 전기차에 대한 세금 감면과 각종 할인 혜택을 모두 합하면 500억 크로네(약 6조4000억원)에 달할 거라고 합니다. 엄청난 금액이긴 하죠.이를 두고 이웃 나라인 덴마크 기후 장관은 2019년 이렇게 비꼬듯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것(노르웨이의 전기차 정책)은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사용된 가장 비싼 정책 중 하나일 겁니다.”그러나 노르웨이는 이런 대대적인 인센티브 정책을 꾸준히 유지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정부가 두 가지를 모두 가졌기 때문이죠. 돈과 의지.노르웨이는 막대한 석유 매장량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2023년 정부가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로 얻은 순수입만 166조원에 달한다죠. 다른 나라에 석유 판 돈으로 전기차 구매를 지원한다니. 어찌 보면 좀 아이러니하긴 하지만요.또 정부는 2050년 탄소배출량을 1990년 대비 90% 이상 줄이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습니다. 2018년 발효된 ‘기후목표법’에서 이를 못 박아 정해뒀을 정도인데요. 이를 위한 중간단계로 2025년엔 승용차 신차 100%를 탄소배출 제로로 만들겠다고도 선언했습니다.노르웨이는 여전히 돈 많이 드는 전기차 우대 정책을 꿋꿋이 유지 중입니다. 물론 2023년부터 전기차 값 중 50만 크로네(6400만원)가 넘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가가치세를 내도록 하는 등 혜택을 다소 줄이긴 했는데요. 잘 팔리는 차종은 대부분 50만 크로네 이하이기 때문에 여전히 대다수 소비자엔 매력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광범위한 인센티브를 구성하고 이를 장기적으로 예측가능하게 만들 것.” 세실리 크니베 크로글룬드 교통부 차관은 노르웨이의 전기차 성공 교훈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일관된 정책은 게임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법이죠.참고로 노르웨이 방식을 따라 해서 최근 성공을 거둔 나라가 있는데요. 바로 (2019년에 장관이 노르웨이 정책을 비웃었던 그) 덴마크입니다. 이 나라는 2020년 정치적 합의를 통해 노르웨이와 비슷한 전기차 세금 면제 정책을 도입했죠. 그리고 이후 4년. 덴마크에서 전기차 판매 비중은 2020년 7.2%에서 2024년 51.5%로 수직상승합니다.‘승용차 탄소배출 제로’의 꿈전기차 판매가 급증하면서 노르웨이에선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이제 현대차·푸조·오펠·피아트·렉서스 같은 전통 브랜드도 노르웨이에서 내연기관차 판매를 아예 중단했고요. 주유소들은 충전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주유기를 일부 뜯어내는 업그레이드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편의점에선 30분의 충전시간 동안 손님들이 먹을 만한 좀 더 제대로 된 식사 메뉴를 팔기 시작했고요. 자동차 정비소는 이제 기름때 얼룩을 옷에 묻힐 일이 없는 배터리 기술자를 채용합니다. 이 나라엔 여전히 많은 내연기관차가 달리고 있지만 점점 늙어가고 있습니다. 경유차는 평균 연령이 13.2년, 휘발유차는 무려 19년이나 되죠.한때 “미친 짓”으로 손가락질받았던 2025년 무공해차 100% 목표는 이젠 손에 잡힐 듯합니다. 물론 완전한 100%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노르웨이 정부가 휘발유·경유 승용차를 못 팔게 규제하는 건 아니니까요.대신 올해 4월 1일부터 전기차가 아닌 차량을 살 때 내는 등록세가 올라갑니다. 내연기관차는 평균 1만4500크로네(185만원), 플러그인하이브리드는 평균 4만5000크로네(576만원)나 세금이 더 붙는다죠. 이건 거의 하이브리드카의 멸종 선언과 다름없는 조치라 하겠는데요. 당근책(인센티브)을 유지한 채 채찍까지 휘두르니 효과는 뻔합니다. 노르웨이 전기자동차협회의 크리스티나 부 회장은 이렇게 승리를 예상하죠. “2025년은 우리의 희년(성스러운 해)이 될 것입니다.”그럼 이 세계 최초 전기차 왕국에서 승자는 누구일까요. 일단 2024년 노르웨이에서 가장 많이 팔린 브랜드는 단연 테슬라인데요. 폭스바겐의 장기집권을 끝내고 2021년부터 줄곧 1위 브랜드 자리를 지킵니다.다만 테슬라 점유율은 2023년보다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만만찮은 도전자들이 선전 중이기 때문인데요. 지난해엔 볼보가 신형 전기차 EX3를 앞세워 시장을 넓혀갔고요. 후발주자인 중국 전기차 브랜드(BYD, 샤오펑, 니오, 지커 등)도 오슬로 핵심 지역에 쇼룸을 열고 판매량을 끌어올리고 있죠. 이런 중국 브랜드를 모두 합치면 약 10% 점유율을 기록합니다.2025년도 경쟁은 대단히 치열할 겁니다. 이 나라에서 팔리는 전기차 모델만 이제 160개가 넘습니다. 올해 가장 먼저 치고 나온 건 현대차이죠. 노르웨이에서 잘 팔리는 소형 전기 SUV 코나 가격을 새해에 4만 크로네(512만원)나 할인하고 나섰습니다. 도요타의 야심작인 ‘어반 크루저’ 전기차와의 대결을 준비하는 건데요. 어반 크루저는 ‘2025년 마지막 남은 휘발유차 모델(주로 도요타 브랜드)을 노르웨이에서 밀어낼 기대주’로 꼽히는 모델이라 긴장해야 합니다.또 테슬라 모델Y의 부분변경 모델 주니퍼가 올해 선보이죠. 벌써부터 2025년 판매 1위는 떼어놓은 당상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또 단종된 소형 해치백 ‘폴로’의 대체제로 꼽히는 폭스바겐 소형 전기차 ID.2 역시 출격을 준비 중이고요. 말 그대로 새로운 전기차가 쏟아져 나옵니다. 2025년 노르웨이 전기차 시장이 세울 신기록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By.딥다이브노르웨이 전기차 시장을 2년 만에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정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전기차 100%’라는 목표를 사실상 달성하게 될 거란 자신감은 훨씬 높아졌는데요. 마침 미국에서 전기차 보조금 폐지론이 나오는 터라, 더 대비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전기차 천국, 노르웨이가 2024년엔 전기차 판매 비중 88.9%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춥고 넓어서 전기차 보급에 불리하다는 인식을 깼습니다.-20년 넘게 이어진 전기차 지원 정책이 빛을 본 건 10여 년 전부터.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괜찮은 전기차 모델과 결합되면서 붐이 일어납니다. -물론 돈이 많이 드는 작업입니다. 정부의 의지와 재정적 부유함이 뒷받침됐습니다. 국내 자동차 제조사가 없기 때문에 정책이 오히려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나라에선 전기차를 사는 게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2025년에도 내연기관차 판매가 금지되진 않지만, 사실상 전기차만 팔리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겁니다.*이 기사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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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받던 진보 정치인의 몰락… 먹고사는 문제가 최우선이다[딥다이브]

    9년 넘게 캐나다를 이끈 쥐스탱 트뤼도 총리(54)가 6일 사임을 발표했죠. ‘진보의 아이콘’으로 통하던 트뤼도의 몰락이건만, 아무도 놀라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잇따른 보궐선거 패배와 지지율 폭락(22%), 그리고 측근이던 재무장관 사임까지. 침몰 징조가 워낙 뚜렷했거든요.임기가 길었던 만큼 추락의 원인도 여러가지인데요. 무엇보다 가장 큰 건 이겁니다. 캐나다 국민이 먹고살기가 점점 팍팍해진다고 느낍니다. 경제는 성장 없이 거의 제자리인데 생활비는 무섭게 뛰니까 말이죠. 환경·다양성 같은 가치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지도자를 국민은 원하는데요. 트뤼도의 몰락으로 본 캐나다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경제성장 동력이던 이민요즘 캐나다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많이 얘기합니다. 그럼 경기침체에 빠진 걸까요? 따져보면 그건 아니죠. 경기침체란 단순히 경제가 어려운 게 아니라, ‘2분기 연속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이 마이너스’인 걸 말합니다. 캐나다의 2024년 2분기 GDP 성장률은 2.1%, 3분기는 1%. 모두 플러스였죠.그런데도 요즘 캐나다 경제학자들은 “사실상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또 다른 지표, 1인당 실질 GDP가 무려 6분기 연속으로 하락했기 때문이죠. 이런 건 1982년 경기침체 이후 42년 만에 처음이라는군요. 그 6분기 만에 1인당 GDP가 3.5%나 쪼그라들었습니다. 나라 경제 전체로 보면 파이가 커졌지만, 국민 개개인의 몫은 점점 작아진 거죠.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인구가 워낙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이죠. 역대급 인구 급증 덕분에 1인당 GDP가 줄어드는 가운데도 경기침체는 벗어날 수 있었던 건데요.도대체 얼마나 늘었냐고요? 2023년에만 127만명, 즉 3.2%가 추가됐습니다. 1957년(3.3%)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자, 현대 선진국에선 웬만해선 찾아보기 힘든 수치이죠. 증가한 대부분은 이민자이고요. 그중에서도 80만명 이상은 영주권이 없는 ‘임시 거주자’에 해당합니다. 유학생과 난민, 그리고 저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이죠.캐나다는 본래 이민자에 열려있는 개방적이고 관대한 나라로 유명합니다. 그 바탕엔 ‘이민이 국가 경제에 기여한다’는 믿음이 깔려있죠. 그리고 2015년 압도적 지지율로 10년 만의 정권 교체에 성공하며 집권한 트뤼도 총리는 이민에 문을 더 활짝 열었습니다. 이민자 수를 대폭 늘리겠다고 발표했고요(연간 영주권자 2014년 26만명→2024년 50만명 목표).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고, 임시 취업비자 문턱을 낮추고, 영주권도 더 잘 내주고, 가족도 데려오기도 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친이민 정책이 캐나다 경제 성장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본 거죠. 그땐 유권자들도 이에 동의했습니다.특히 2015년 시리아 난민을 공항에서 환영하며 맞이하는 젊은 총리의 모습은 엄청난 화제가 됐죠. “다양성은 캐나다의 강점”이라는 트뤼도 총리 발언은 전 세계를 감동하게 했고요. 그는 마치 진보 정치의 영웅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캐나다 국민들이 질려버린 트뤼도식 ‘쇼잉(showing) 정치’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지만요.일자리와 살 집이 모자란다문제는 이민자 수가 늘어도 너무 빠르게 늘었단 겁니다. 2020~21년 코로나 팬데믹 때 억눌렸던 이민자 유입 수는 2022년이 되자 100만명, 2023년엔 120만명을 넘어섭니다.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밀려든 인구가 경제에 큰 부담이 되기 시작하는데요.일단 실업률이 치솟습니다. 새로 진입한 젊은 이민자는 대부분이 바로 취업시장에 뛰어들죠. 하지만 이들을 다 수용할 정도로 캐나다 경제가 강력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이민 문턱이 낮아진 데다, 대학들이 유학생을 왕창 유치하면서 저숙련 근로자가 너무 많아진 것도 문제이고요.2024년 11월 캐나다 실업률은 6.8%. 코로나 팬데믹 때를 빼면 2017년 이후 최고치입니다. 청년 실업률은 무려 14%에 육박하죠.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면 201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명색이 고등교육 비율 세계 1위인 나라인데,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난리인 상황입니다.토론토에 사는 인도 출신 유학생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영상은 요즘 캐나다 상황을 보여주죠. 팀홀튼 커피숍의 파트타임 구직 면접을 위해 몰려든 유학생 수십명이 긴 줄로 늘어서 있습니다. 물론 이런 유학생과 경쟁해야 하는 캐나다 청년도 절망적이긴 마찬가지 상황입니다.주택시장에도 적잖은 압박이 있습니다. 특히 매매시장보다는 임대시장이 2022년부터 넘치는 수요로 들썩거렸는데요. 지난 3년 동안 평균 임대료는 19%나 뛰었습니다. 최근 몇 달은 아파트 공급이 늘면서 임대료 상승세가 주춤했지만, 이미 젊은이들은 그동안의 임대료 폭등에 질렸습니다. 사실 냉정히 따져보면 임대주택이 모자라는 데는 다른 이유가 더 결정적이란 분석이 설득력 있긴 한데요(높은 금리, 건축비용 상승 등). 그래도 몰려든 이민자를 탓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그토록 이민에 열려있던 관대한 캐나다인들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엔비로닉스(Environics) 조사에 따르면 2022년엔 ‘캐나다로의 이민이 너무 많다’는 데 동의하는 응답자가 27%뿐이었는데요. 지난해엔 58%로 크게 높아졌습니다. 1998년 이후 가장 높은 거죠.결국 트뤼도 총리도 돌아선 여론에 항복해야 했습니다. 지난해 10월 공식적으로 이민정책의 실패를 인정했는데요. 그는 “균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면서, 인구수 증가 목표를 21% 삭감(영주권자 기준 50만명→39만5000명)한다고 발표했죠.조삼모사 탄소세의 결말트뤼도를 주목받는 지도자로 띄웠지만, 정작 국내 인기는 크게 갉아먹은 정책이 또 있습니다. 바로 ‘탄소세(공식 명칭은 탄소 가격책정)’이죠.2019년 캐나다 정부가 도입한 탄소세는 상당히 진보적인 환경정책입니다. 일단 모든 연료 구매에 세금을 부과하죠. 세금을 내는 건 주유소·도시가스업체 같은 기업이지만, 이는 결국 소비자 가격에 전가됩니다. 기름값이나 가스요금이 그만큼 오르죠. 탄소세는 가솔린 기준으로 1리터당 17.6센트(약 179원)였는데요. 2030년까지 해마다 조금씩(연간 약 3센트, 30원 정도) 인상됩니다.이렇게 거둔 세금은 특이하게 정부 재정으로 들어가지 않고요. 기금으로 모았다가 각 가정으로 환급해 줍니다. 가구주의 은행 계좌로 직접 돈을 넣어주죠. 돌려받는 금액은 주마다 다른데요. 1인 가구이면 분기당 100~200캐나다달러(10만~20만원)입니다. 가구원이 많거나 농촌 지역이면 더 받고요.아니, 왜 이런 번거로운 제도를 도입했을까요. 가계에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화석연료를 덜 쓰도록 소비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죠. 화석연료를 남보다 적게 쓰는 가정은 탄소세로 낸 것보다 더 많은 돈을 환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각 가정에서 자연스레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려고 애쓰지 않을까요. 단순히 ‘쓰면 세금 낸다’는 처벌 방식이 아니라, ‘안 쓰면 돈 번다’는 인센티브 방식의 제도인데요.탄소배출량을 줄이려는 이런 정부 차원의 노력. 취지는 참 좋습니다. 진보적인 환경정책의 세계적인 모델로 찬사를 받았죠. 물론 국민들도 처음엔 이를 지지했고요.문제는 ‘소비자가 내는 세금=가정이 돌려받는 환급금’이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쉽게 잊힌다는 겁니다. 즉, 분기마다 환급금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거야 당연히 좋은데요. 주유소에 갈 때마다, 가스요금 고지서를 받을 때마다 높아진 소비자 가격을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분노하게 되는 거죠.아무도 ‘탄소세 때문에 휘발유 가격이 뛰었네. 그럼 다음번에 내 환급금이 더 늘어나려나’라고 받아들이진 못하는 겁니다. 오히려 막연히 자신이 내는 탄소세가 돌려받는 환급금보다 많은 것 같다며 억울해하죠. 실제론 그런 가정은 전체의 20%밖에 되지 않는데도요. 또는 아예 환급금을 받은 걸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즉, 경제학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제도이지만 현실에선 생각했던 대로 작동하질 않는 겁니다.또 다른 문제는 ‘그럼 탄소세 덕분에 탄소배출량이 얼마나 줄어들었어?’라는 질문에 똑 떨어지게 답하기 어렵단 겁니다. 탄소배출량 감축을 위한 정책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중 얼마가 탄소세 덕분인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죠.대신 보수 진영은 탄소세 공격의 논리를 탄탄하게 쌓아가고 있습니다. 보수 싱크탱크 프레이저연구소는 ‘탄소세가 기업 부담을 늘려서 캐나다 경제를 최대 1.8% 위축시키고 일자리 18만개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란 전망을 내놨죠.특히 야당인 보수당 대표 피에르 폴리에브는 탄소세에 대한 반감을 땔감 삼아 불을 활활 지핍니다. 46세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인 그는 탄소세가 이렇게 계속 높아지면 “대량기아와 영양실조를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식품 제조업체가 에너지를 많이 쓰기 때문에, 탄소세가 결국 식품가격 인상으로 이어진단 논리입니다. 또 이렇게도 말하죠. “노인들은 겨울을 버티기 위해 난방 온도를 13~14도로 낮춰야 할 겁니다. 인플레이션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집을 떠나 운전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러면서 “세금 폐지(AXE THE TAX)”라는 단순 명료한 슬로건을 내겁니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제 캐나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탄소세 철폐를 원합니다. 물가가 뛰고 먹고살기 팍팍해지니, 환경이란 대의보다는 내 지갑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해진 거죠. 아마 이들 유권자 상당수는 다가오는 10월 총선에서 야당을 찍어 탄소세를 끝내려 들 겁니다.아무리 취지가 착하고 좋은 정책도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은데요. 원래 국민은 자신의 어려움을 잘 살펴주고 공감해 주는 지도자를 원하는 법입니다. 소통할 줄 모른 채 ‘내가 옳다’고 고집만 피우는 정치인은 진보이든 보수이든 설 자리가 없게 되죠. 언젠간 트뤼도 정부의 유산이 재평가받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닙니다. By.딥다이브인플레이션 쇼크는 종종 정권을 무너뜨린다는 이야기, 지난해 전해드린 적 있죠(). 영국과 미국에 이어 캐나다도 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됐습니다. 아무리 대의가 훌륭해도 민생을 챙기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9년 넘게 캐나다를 이끈 트뤼도 총리가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한때 전 세계적으로 빛나던 진보정치 스타의 추락은 무엇보다 먹고살기가 팍팍해졌기 때문입니다. -트뤼도는 이민이 캐나다 경제의 해결책이라 믿었고, 이민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하지만 2022년부터 이민자는 예상을 뛰어넘게 급증했고 이미 약한 캐나다 경제를 압박했습니다. 임대주택난과 청년실업에 시달리는 캐나다인은 이제 이민에 대한 열린 마음마저 닫고 있습니다.-트뤼도의 진보적인 환경정책 탄소세는 빠르게 지지를 잃었습니다. 화석연료를 덜 쓰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누구도 기름값이 높아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고물가 시대에 탄소세는 고통을 가중시키는 나쁜 정책으로 낙인찍혔고, 이제 유권자는 ‘세금 철폐’를 외칩니다.*이 기사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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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피값 급등은 기후변화 탓? 십수년 주기로 반복되는 이유[딥다이브]

    이것 없인 살 수 없다는 사람들, 아마 많을 겁니다.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에 한국을 포함한 상당수 국가는 수입에 의존하죠. 그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만 1억2500만명에 달합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거래되는 무역상품인 검은 빛의 원자재. 석유냐고요? 아니요. 바로 커피입니다.글로벌 커피 가격이 급등했다는 소식, 들어보셨나요. 뉴욕 국제상품거래소(ICE) 기준 커피 원두 가격은 지난 1년 동안 72% 뛰었죠. 2024년 12월엔 사상 최고치인 파운드(0.45㎏)당 3.49달러를 기록했고요.이게 다 극심한 기후변화 탓이란 분석과 함께 ‘이러다 커피가 사치품이 되겠다’는 걱정이 이어집니다. 그럼 정말 커피 가격은 이대로 계속 오르기만 할까요. 커피 가격의 지난 50년 추이 그래프가 말해주는 이야기는 좀 다른데요. 오늘은 치솟는 커피 가격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월 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브라질의 재채기글로벌 커피 업계엔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브라질이 재채기하면 커피 세계가 감기에 걸린다.’ 세계 커피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생산국 브라질 작황이 그만큼 커피 가격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단 뜻이죠.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왜 지금 커피 가격이 이렇게 뛰었을까요. 브라질이 재채기를 아주 세게 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2021년에요.2021년 7월 20일 아침, 커피 업계를 떨게 하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밤사이 브라질 주요 커피 농장 지역에 ‘검은 서리’가 닥친 겁니다.6~8월 브라질은 겨울이고, 아라비카 커피가 주로 자라는 고산지대엔 때론 한파가 닥쳐서 서리가 내리기도 하죠. 대부분은 잎과 열매만 어는 정도의 약한 서리(=하얀 서리)에 그치는데요.검은 서리는 커피나무의 줄기와 뿌리까지 죄다 얼려버려서 죽게 만드는 훨씬 강한 서리를 말합니다. 검은 서리가 들이치면 하룻밤 만에 농장이 초토화되죠. 커피나무가 타버린 듯 검게 변해 죽기 때문에, 베어내고 새 묘목을 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무서운 일이 2021년 닥친 겁니다. 브라질 전체 커피 생산량의 10%를 단숨에 날려버리는 사건이었죠. 그 결과 2021년 한해 국제 커피 가격은 100% 가까이 뛰었습니다.3년 반 전에 내린 검은 서리가 지금의 커피 가격과 무슨 상관이냐고요? 검은 서리가 내리면 그 피해는 몇 년에 걸쳐 이어지는 법입니다. 오히려 피해가 점점 커지는 경향도 있죠. 서리 첫해엔 보통 전년도까지 쌓아뒀던 재고 물량이 아직 남아있으니 시장이 어느 정도는 버팁니다. 문제는 한번 검은 서리의 습격을 받았던 지역에 곧이어 또 서리가 닥치곤 한다는 건데요.커피나무는 새 묘목을 심어 열매를 수확하기까지 3~4년이 걸립니다. 어린 커피나무는 줄기와 가지가 가늘기 때문에 서리에 더 취약하죠. 그래서 크고 튼튼한 나무라면 버틸 만한 서리에도 작은 나무는 바로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24년 8월 바로 이런 일이 발생했죠. 2021년 검은 서리보단 훨씬 약한, 하지만 어린나무엔 여전히 치명적인 서리가 닥친 겁니다.2021년과 2024년 연이어 서리 피해를 입은 브라질의 커피 농장주는 이렇게 말합니다. “2021년 나무의 90%가 손상됐고, 그중 60%는 다시 심어서 회복했습니다. 이제 막 생산을 시작하려던 때 다시 서리에 맞았어요. 이걸 또다시 재식재할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게다가 브라질 전 지역에 2024년 극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3년 전 서리로 이미 약해진 커피나무에 가뭄 스트레스까지 겹치면서 수확량을 더 줄였죠. 브라질 정부 산하 기관인 CONAB는 2024년 커피 수확량을 전년보다 0.5% 감소한 5479만 포대로 추정합니다. 4년 연속 흉작이죠. 6000만~6400만 포대를 거뜬히 수확했던 이전 풍작 시기와 차이가 큽니다.커피값 이상급등의 배후지구온난화 같은 기후 변화는 분명 커피 산업에 상존하는 위험 요인입니다. 커피나무, 특히 향미가 풍부하고 고급으로 평가받는 아라비카 커피는 키우는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18~22도의 덥지 않고 온화한 기온이어야 잘 자라죠. 열대지역에서도 해발 600m 이상 고지대에서 주로 자라는데요.지구 온도가 꾸준히 상승하면서 이 조건에 맞는 고도와 위도가 갈수록 높아져만 갑니다. 2050년이 되면 현재의 아라비카 커피 재배지의 50%는 너무 더워서 계속 재배하기엔 부적합해질 거라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죠. 마치 요즘 사과가 대구가 아닌 강원도에서 잘 자라고, 유럽의 와인 재배지가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이미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커피 농장의 고민은 큽니다. 수십 년 동안 일궈온 터전을 옮기기란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요.그럼 브라질 커피농장을 초토화하고, 글로벌 커피 시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검은 서리 현상. 이것도 최근의 기후 변화 탓일까요?솔직히 그렇게 말하긴 좀 애매합니다. 왜냐고요? 이 기후 현상은 새롭게 나타난 게 아닙니다. 이미 2세기 넘게 브라질 커피 재배에 있어 재앙적 존재였죠. 브라질의 상업적 커피 재배 초기인 1822년에도 검은 서리가 브라질 중남부를 덮쳐 큰 피해를 줬단 기록이 있고요. 그동안 20여 차례에 걸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파괴적 손실을 입힌 건 1975년과 1994년, 그리고 2021년이었죠.이러한 브라질의 서리 피해는 쌍으로 연이어 발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1975년과 1978년, 1994년과 1995년, 2021년과 2024년. 이렇게 말이죠. 그리고 이는 지난 50여년간 커피 가격 그래프 중 상당 부분을 설명해 줍니다.가격 그래프를 보면 뾰족한 봉우리가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이 중 빨간 원으로 표시한 부분이 바로 브라질 검은 서리의 여파를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크고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 나타나죠. (참고로 초록색 부분은 브라질을 포함한 중남미에 닥친 가뭄이 가격 급등의 주요 원인이었습니다.)그래서 결국 말하려는 건 이겁니다. 커피는 어디까지나 농산물이라는 거죠. 변덕스러운 자연에 따라 수확량이 급변하는 농산물이요. 그렇기에 때론 흉작으로 가격이 단기간 급등하는 일은 주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요즘 배춧값, 딸기값처럼 말이죠.농산물 가격이 널뛰는 이유커피도 농산물이다. 이런 당연한 말을 왜 하느냐고요? 그걸 간과하면 자칫 엉뚱한 데 분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975년 7월 브라질엔 역사상 최악의 검은 서리가 닥쳤습니다. 순식간에 브라질 커피농장의 절반 이상이 폐허가 되고, 10억 그루의 나무가 죽어버렸죠. 그 여파로 커피 가격이 이후 47년 동안 깨지지 않을 최고가(3.39달러)까지 치솟았던 1977년 초.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였던 윌리엄 세이파이어는 이런 제목의 칼럼을 썼습니다. ‘브라질의 커피 사기’. “날씨는 변명일 뿐”이고 브라질 정권이 시장 조작으로 “커피에 중독된 멍청한 미국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며, 미국인은 커피를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보면 커피가 농산물이란 기본 사실을 무시한 다소 황당한 주장인데요. 이게 당시 미국 소비자들의 정서였던 겁니다. 과연 2025년의 소비자는 그때와 다를 수 있을까요.커피는 농산물이기 때문에 다른 작물과 마찬가지로 가격에 따른 쏠림현상이 심합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해에 양팟값이 뛰면, 이듬해엔 농부들이 양파를 왕창 심는 바람에 어김없이 값이 급락하곤 하잖아요. 커피 농사도 이와 똑같은 일이 되풀이됩니다.어떤 이유에서든 커피 생두 가격이 뛰면, 전 세계적으로 커피 재배가 늘어나죠. 커피는 양파·마늘과는 달리 심어서 수확까지 시간이 꽤 걸리다 보니, 실제 수확량이 확 늘어나는 건 몇 년 뒤입니다. 그럼 그때 가선 커피 시장이 심각한 공급 과잉에 시달리게 되죠.그래프를 다시 보자면 커피 가격이 파운드당 1달러 아래로 떨어진 깊은 골짜기가 주기적으로 등장하는데요. 그게 바로 커피 시장 공급 과잉이 절정이었던 구간입니다. 여러분은 모른 채 지나갔겠지만, 2019년도 그랬죠. 당시 인건비도 못 건질 정도로 가격이 폭락하면서 일부 중남미 국가에선 커피 대신 코카 잎(코카인 원료)을 키우는 농장이 늘어나 골치였을 정도였습니다.달리 말하자면, 공급 과잉이 너무 심해서 ‘커피 농사 때려치운다’는 아우성이 나올 때쯤이면, 희한하게도 자연재해(서리·가뭄 등)가 닥쳐오곤 했죠. 그래서 공급과잉이 한 방에 해소되고 커피값이 다시 치솟으면 그땐 또 너도나도 뛰어들고요. 전형적인 농산물 시장의 구조입니다.변동성 키우는 선물시장커피값을 끌어올린 악당이 뚜렷하지 않고, 자연의 심술 탓이 크다니. 좀 허무한 이야기인가요. 여기서 지적할 게 있습니다. 작황에 따라 커피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야 당연한데요. 그 움직임을 더 뾰족뾰족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습니다. 글로벌 커피 거래 가격을 결정하는 기준이 바로 선물시장 가격이란 점입니다. 뉴욕상품거래소(ICE)의 커피C선물지수(이른바 C-가격)이 그것이죠.선물은 ‘미래의 특정 시점 정해진 가격으로 상품을 사겠다’라고 미리 계약을 맺는 걸 뜻하죠. 선물시장은 현물시장과는 별개의 금융시장이기 때문에 가격 결정 메커니즘도 다릅니다. 일단 농부들의 생산비용과는 전혀 상관없고요. 때론 커피 현물에 대한 수요·공급과도 달리 움직입니다. 지정학적 이슈나 공급망 문제가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 수요가 어느 쪽에 베팅하느냐에 따라 추세가 증폭되곤 하죠. 글로벌 커피 가격이 추락할 땐 아주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오를 땐 또 무섭게 치솟는 게 바로 이런 선물시장의 속성 때문입니다. 투기세력이 가세하면서 시장의 쏠림을 키우는 거죠.이렇게 결정된 선물 가격은 사실상 거의 모든 커피 농장의 현지 판매 가격을 결정합니다. 그렇다 보니 선물가격이 바닥을 칠 땐 대다수 소규모 농장은 인건비도 못 건지는 헐값을 받게 되죠. 그러다 보니 커피 생두 가격이 내내 낮았던 2000년대엔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한다는 ‘공정무역 커피’가 세계적으로 큰 이슈였습니다.그리고 커피 가격이 뛰는 지금은 그와 반대 상황이 펼쳐집니다. 투기 세력이 가세하며 가격 상승 추세를 더 가파르게 만들고 있죠. 어찌 보면 과거에 너무 낮게, 1달러 안팎까지 값이 떨어졌던 것의 반작용인 셈입니다. 지금 커피값이 비싼 게 아니라 이전 가격이 너무 쌌던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강한 잡종이 대안?그럼 커피 값이 주기적으로 널뛰는 건 하늘의 뜻이다 생각하고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냐고요? 그렇진 않죠. 주기적으로 닥쳐오는 악천후, 점점 높아지는 지구 온도에 대비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가장 농업적인 해결책은 결국 육종 기술에 있죠.전 세계 커피 생산의 60%를 차지하는 아라비카 커피는 고급스러운 풍미로 인기를 끌지만 감염병(특히 커피 녹병)과 높은 기온에 약합니다. 선선한 고지대(600~2000m)에서 재배해야 하니 키우는 것도 더 번거롭고, 서리 피해를 입을 우려도 크죠. 무엇보다 지구 온난화로 재배면적이 갈수록 줄어들고요.그래서 과학자들은 다양한 ‘잡종 커피’를 연구 중입니다. 질병과 기후변화에 강하면서도 생산성은 높고 풍미까지 훌륭한, 그런 신품종을 찾아내려는 겁니다. 비영리기관 월드커피리서치(WCR)는 5년째 아라비카의 서로 다른 품종을 교배한 잡종 커피를 연구 중이고요. 또 다른 과학자들은 아라비카보다 훨씬 나무가 강하지만 평판이 그닥 좋지 않아서(단맛이 강함) 오래전 잊혀졌던 리베리카 품종 커피를 되살려 개량하는 데 집중합니다.물론 품종 개량이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10년, 20년 뒤에도 우리가 커피를 지금처럼 여유롭게 즐길 수 있으려면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매일 마시던 커피 한잔이 조금은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By.딥다이브연간 1인당 커피 소비량 405잔.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세계적이죠.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신조어부터, 최근 ‘커피 선결제’란 트렌드까지. 커피에 꽤나 진심인데요. 더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 생활에 밀접한 커피 생산 시장을 들여다봤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국제 커피 생두 가격이 파운드당 3달러대에 진입했습니다. 지난달엔 최고점(3.49달러)을 새로 썼죠. 2021년과 2024년 연이어 닥친 서리피해로 최대 생산국 브라질 작황이 타격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길게 보면 커피 가격은 악천후로 인해 주기적으로 급등하곤 했습니다. 특별한 ‘악당’이 없어도 자연재해 탓에 가격이 널뛰기도 하는 게 본래 농산물 시장의 특징이니까요. 지금의 높은 가격은 다시 더 많은 커피 재배 붐으로 이어져, 수년 뒤엔 공급과잉 상태로 되돌려 놓을 겁니다. 늘 그랬듯이 말이죠.-커피 가격이 선물시장에서 결정되는 구조는 커피가격 그래프를 더 뾰족뾰족하게 만듭니다. 가격의 상승 또는 하락 추세가 더 증폭되죠. 지금 커피 가격이 너무 심하게 뛰는 건 과거엔 지나치게 떨어졌었단 뜻이기도 합니다.-세계인이 사랑하는 커피, 그 중에서도 아라비카 품종은 너무 예민하고 약합니다. 더 강건하면서도 품질이 좋은 그런 품종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과학자들의 연구에 기대를 걸어봅니다.*이 기사는 1월 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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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대론 공멸…중국 자동차 시장 ‘악’ 소리 나는 이유[딥다이브]

    2300만대. 2024년 중국에서 팔린 승용차 대수이죠. 중국 경제가 부진에 빠진 가운데도, 승용차 판매량은 6%나 성장했습니다. 중국은 전 세계 자동차 판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장 큰 시장이죠.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차가 잘 팔리는데도 왜 망하는 중국 자동차 제조사는 늘어가고, 해외 브랜드가 줄줄이 철수할까요. 폭스바겐의 대규모 구조조정, 일본 혼다와 닛산의 합병 추진 역시 중국 시장에서의 부진 탓이 크다는데요.가장 큰 이유는 만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중국 자동차 시장의 무자비한 ‘가격경쟁’에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격경쟁이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 수 있단 경고까지 나오는데요. 중국 자동차 시장의 승자 없는 가격전쟁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인하, 또 인하…. 만 3년째 ‘가격전쟁’혼다 시빅 판매가가 10만 위안(약 2000만원), 폭스바겐 파사트는 13만 위안(2500만원). 지난해 말 중국 자동차 시장에선 ‘대 바겐세일’이 펼쳐졌습니다. 기간 한정 가격 인하, 신차 구매 보조금, 포인트 지급, 계약금 무이자 혜택 등등. 거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가 각종 명목의 차값 할인을 내걸었죠. 지난해 1~11월 가격 할인을 내 건 승용차만 224개 모델에 달한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입니다. 특히 인기 차종인 테슬라 모델Y는 사상 최저가격인 23만9900위안(약 4800만원)에 팔렸습니다.이런 바겐세일, 해가 바뀌어도 계속됩니다. 이미 중국 전기차 제조사 BYD는 다가오는 설(춘절) 연휴를 겨냥해 주요 차종 가격을 한시적으로 최대 12% 인하한다고 치고 나왔죠. 선두권 업체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니, 다른 경쟁사도 이를 따르게 될 겁니다. 이미 니오, 샤오펑, 립모터 등. 주요 전기차 제조사 경영진이 2025년 판매량(또는 매출)을 지난해의 두 배로 늘리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죠.놀라운 건 이런 가격전쟁이 벌써 만 3년째 이어지고 있단 점입니다. 시작은 2022년 10월 테슬라의 모델3와 모델Y 공식 판매가 인하(최대 9%)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눈치 보며 뭉그적거렸던 다른 브랜드는 이후 석 달 만에 테슬라가 추가 가격 인하에 나서자 깜짝 놀라 가격경쟁에 가세했죠. 특히 중국 최대 전기차업체 BYD는 “전기가 석유보다 싸다”는 구호를 내걸고 가장 맹렬하게 뛰어들었습니다. 거의 모든 모델 가격을 5~20% 낮췄는데요. 특히 소형 전기차 친(Qin) 하이브리드 신형 가격을 기존보다 2만 위안 낮은 7만9800위안(1600만원)으로 책정해 업계를 놀라게 했죠.결국 2024년엔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부터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까지, 대부분이 가격전쟁을 펼쳐야 했습니다. 가혹한 난투극, 잔인한 탈락전이 시작됐습니다. 중국 전기차 업체 샤오펑의 창업자인 허샤오펑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 자동차 시장은 “피의 바다”를 헤쳐가는 “녹아웃 라운드에 진입”했죠.제 살 깎아 먹기 경쟁에 파산·철수적정 수준의 가격 인하는 판매량을 늘려 기업 이익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죠. 하지만 중국 자동차 시장의 가격전쟁은 그런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지난해 1~10월 중국 자동차산업 전체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2% 증가했지만, 이익은 3.2% 되레 감소했습니다. 과거 6~7%였던 매출액 대비 이익률은 4.5%로 쪼그라들었죠. 제 살 깎아먹기식 가격경쟁 탓입니다.중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 브랜드는 무려 200개 이상(이 중 전기차 브랜드 137개). 치열한 생존 경쟁이 이어지면서 탈락자가 속출합니다. 혼다의 프리미엄 브랜드 ‘어큐라’와 일본 미쓰비시는 2023년 이미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고요. 가오허자동차(高合汽车), 허추앙자동차(合创汽车), 티엔지자동차(天际汽车) 같은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이 지난해 문을 닫았습니다. 지리자동차와 바이두의 합작사로 주목받았던 지위에자동차(极越)도 12월 갑자기 사업 축소를 발표했고요. 사실 그 많은 중국 전기차 제조사 중 연간 흑자를 내는 기업은 BYD와 리오토 정도이죠. 이제 ‘다음에 망할 전기차 스타트업은 어디일까’ 명단이 돌고 있습니다.살아남았지만 적잖은 타격을 입은 제조사도 많습니다. 현대차는 지난해 1월 베이징현대 충칭공장을 20% 할인된 가격에 매각했고요. 혼다와 닛산은 중국에서 일부 공장 폐쇄와 대규모 해고를 진행했죠.제품에 자신 있으면 가격경쟁 따윈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독일 고급차 브랜드 BMW도 그렇게 생각한 적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7월 가격할인을 멈추고 정가로 되돌렸죠. 그러자? 8월 판매량이 곧바로 반토막 났습니다. 불과 한 달 만에 BMW는 다시 가격 할인 전쟁터로 돌아와야 했죠. 누구도 이 가격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습니다.승자 없는 싸움난립하던 완성차 브랜드가 경쟁 끝에 도태되고 일부만 살아남는 건 사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때 전 세계에 700개 넘는 브랜드가 난립했던 스마트폰 시장도 그런 과정을 거쳤으니까요. 컨설팅업체 알릭스파트너스에 따르면 중국 전기차 브랜드 137개 중 10년 안에 이익을 낼 만한 곳은 19개뿐. 나머지는 사라지거나 통합될 운명입니다.그런데 문제는 이 무지막지한 가격경쟁의 여파가 완성차 제조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난해 11월 BYD 임원이 협력업체에 보낸 e-메일 내용이 공개돼 화제였죠. 자동차 시장이 ‘녹아웃 매치’이자 ‘결정적 전투’로 접어들었다면서 2025년 부품 가격의 10% 인하를 요구한 겁니다. 이어 중국 국유 자동차 제조사 상하이자동차(SAIC) 역시 협력사에 10% 부품가 인하를 요청했단 보도가 이어졌는데요.물론 완성차업체가 협력업체를 쥐어짜는 거야 연례행사이긴 합니다. 다만 과거엔 해마다 3~5% 정도 깎았다면 이젠 인하 폭이 더 커진 데다, 연간 2~3회 가격 인하 요구도 비일비재하다고 하죠. 하지만 이미 보쉬·ZF·발레오·브로제 같은 자동차 부품 대기업들까지 지난해 중국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에 나섰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협상력이 약한 중소 공급업체는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고요. 한 부품업체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확실히 프로젝트에서 돈을 잃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잃지 않고는 프로젝트를 따낼 수 없으므로 악순환입니다.”만약 부품가격 인하 폭이 생산효율성을 높여서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면 어떻게 할까요. 결국 남은 방법은 재료 등급을 낮추는 겁니다. 납품가 인하 요구를 받은 1차 협력업체가 2차 협력업체의 납품가를 깎고, 2차 협력업체가 다시 3차 협력업체에 이를 전가하면, 결국 3차 협력업체는 더 싼 원자재를 찾을 수밖에 없죠. 이는 완성차의 품질 하락으로 결국 이어질 겁니다. 차값이 떨어지는 만큼 소비자는 보이지 않는 비용을 지불하는 셈이죠.이렇게 차값이 계속 떨어지면 소비자엔 이익일까요. 생각보다 중국 소비자들은 자동차 가격전쟁에 시큰둥합니다. 매켄지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소비자 중 80% 이상은 가격인하가 자동차 구매 결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괜히 차를 서둘러 샀다가 가격이 더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굳이 지금 살 이유가 없는 거죠. 최신 차량에 장착되는 옵션 패키지를 사고 싶은 생각도 줄어듭니다. 기다리면 고가의 운전보조 기능도 공짜로 장착될 가능성이 크니까요. 무엇보다 차를 샀는데 제조사가 파산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입니다. 자동차 업체가 망하면 그 브랜드 차량 소유자는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까요.완성차 업체, 부품 공급업체, 자동차 소비자. 현재까진 셋 중 누구도 승자가 아닌 이상한 전쟁이 이어지는 중입니다.정부가 “전면 시정” 외쳤지만이 가격전쟁, 이대로 둬도 될까요. 보다 못한 중국 정부가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12월 열린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이런 문구가 나왔죠. “‘퇴화적(内卷) 경쟁’을 전면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시장의 과도한 가격경쟁을 바로잡기 위한 정부 차원의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극단적인 가격경쟁이 기술 혁신과 산업 발전을 되레 저해한다고 보기 때문인데요.물론 정부는 어느 산업이 타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게 자동차 산업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죠. 중국 지리자동차의 리슈푸 회장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 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악하고 퇴화적인 경쟁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가격전쟁 대신 기술혁신, 품질, 브랜딩, 서비스, 기업 윤리에 집중해야 합니다.”하지만 중국 자동차 업계의 가격경쟁 ‘휴전’ 약속은 이전에도 있었다가 쉽게 깨지곤 했죠. 이번엔 과연 무슨 수로 이를 막을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입니다.다만 중국 업체 간 극단적인 가격전쟁이 괴멸적인 결과로 이어진 ‘퇴화적 경쟁’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산업이 오토바이인데요.예나 지금이나 동남아시아는 오토바이 천국이고, 그 시장을 지배하는 건 일본 브랜드이죠. 그런데 잠깐 중국산 오토바이가 이 시장에서 일본 브랜드를 제친 적이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이었죠.당시 혼다, 야마하 같은 일본 브랜드 오토바이는 동남아에서 약 2000달러에 팔렸는데요. 그 절반 가격인 중국산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베트남의 경우 1999년 기준으로 진출한 중국 브랜드만 20개 이상. 압도적인 가성비 덕분에 중국 브랜드는 일본산을 밀어내고 금세 베트남 오토바이 시장의 80%를 차지합니다.그리고도 가격전쟁은 계속됩니다. 중국 업체끼리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 거죠. 100cc짜리 오토바이 가격이 1000달러에서 800달러로, 그리고 다시 500달러까지 떨어집니다. 가격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베트남 오토바이 평균 판매가가 매달 70달러씩 하락했단 기록이 있을 정도이죠.그리고 가격과 함께 당연히 품질도 떨어졌습니다. 싸구려 중국산 오토바이는 잔고장이 잦은 데다 2~3년만 지나도 대수리가 필요했고, 4~5년이 되면 폐차할 지경이 됐습니다. 일부 브랜드가 애프터서비스를 등한시하면서 중국산에 대한 이미지는 급속히 나빠졌죠. 결론은 중국 브랜드 모두의 패배. 그 사이 중저가 신형 모델+대출 상품을 내놓은 일본 브랜드가 품질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다시 시장을 휩씁니다. 이제 동남아 시장 점유율은 혼다 67%, 야마하 22%. 중국산은 1%에 그칩니다. 품질마저 희생하는 극단적인 가격경쟁의 처참한 결말입니다. 중국 자동차 업계가 20여 년 전 오토바이 시장의 교훈을 최근 다시 곱씹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By.딥다이브자동차 산업이 원래 이리도 다이내믹한 것인가요. 중국 시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가 없기 때문에 더욱 중국 상황을 예의주시해야겠습니다. 마침 2일(현지시간) 테슬라의 연간 인도량이 13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는 뉴스가 눈길을 끕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중국 자동차 업계의 ‘가격전쟁’이 점점 더 심화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엔 테슬라 모델Y가 또다시 가격을 할인하고, 혼다 시빅이 10만 위안 이하로 팔려서 업계를 놀라게 했죠. 새해 들어서도 BYD가 할인 공세를 이어갑니다.-자동차 업계의 수익률이 악화하고, 적자가 불어난 전기차 스타트업 파산이 이어지고, 해외 브랜드 합작사가 철수하고 있습니다. 잔혹한 탈락전인데요. 제아무리 고급 브랜드라고 해도 가격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그 여파는 자동차 공급업체로 이어집니다. 완성차 업체의 납품가 인하 요구에 시달리면서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죠. 이는 결국 제품 품질 하락으로 이어질 게 뻔하다는 점에서 산업 전체엔 마이너스입니다. 그 비용은 결국 소비자에 돌아가는 셈이죠.-보다 못한 중국 정부가 “퇴화적 경쟁을 전면 시정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혼란을 무슨 수로 정리할까요. 20여 년 전 동남아 오토바이 시장의 교훈이 되살아납니다. *이 기사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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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인인 줄? 올해 131% 뛴 코코아, 177% 오른 아르헨 지수[딥다이브]

    2024년에 값이 가장 많이 뛴 원자재, 가장 많이 오른 증시는 무엇일까요. 새해에도 과연 고공행진을 할까요? 올해 가라앉았던 산업, 반대로 올해 드디어 빛을 본 산업의 앞날은 어떨까요.결산과 전망의 시기인 연말을 맞아 준비했습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보낸 88개 레터 주제 중 4가지를 골라 현재 상황과 전망을 업데이트해 전합니다. 딥다이브에서 소개한 뒤 더 큰 화제가 된 주제들입니다.*이 기사는 3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코코아 가격: 라니냐가 온다서아프리카발 코코아 공급 쇼크. 지난 2월 23일 레터에서 소개했죠(). 당시 코코아 선물 가격이 t당 6000달러를 넘어서며 심지어 ‘1만 달러가 될 수 있다’는 극단적 전망까지 있다고 전해드렸는데요.이럴 수가. 극단적 전망이 아니었습니다. 코코아 가격은 올해 4월 1만 달러를 뚫었고요. 이후 주춤하다 12월 18일 t당 1만2600달러까지 넘어서면서 업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물론 이후 다시 내려왔지만, 여전히 9868달러나 됩니다. 올해 상승률 132%. 모든 원자재 중 가장 많이 값이 뛰었을 뿐 아니라, 비트코인(142%) 상승률과도 맞먹죠.이런 가격 급등, 흔히 이상기후 탓이라고 얘기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구조적 문제 탓이 크죠. 가나·코트디부아르 농부들이 너무 가난해서 병충해에 대비할 여력이 없기 때문인데요. 안타깝게도 코코아값이 이렇게나 뛰었는데도 상황이 나아진 건 거의 없습니다. 소피 반 웰렌 영국 맨체스터대 연구원이 소개한 차트를 한번 보실까요.글로벌 코코아 가격은 2023년 여름부터 수직 상승했지만, 가나(빨간색 선)·코트디부아르(노란 선) 농장 가격과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선물 계약 방식(수확 9~12개월 전에 미리 판매) 탓에 가격 상승의 수혜를 거의 보지 못한 거죠. 가난한 아프리카 정부로선 선물 계약을 맺어야 그걸 담보로 해외 자금을 빌려서 코코아콩·비료를 살 수 있으니, 그동안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요. 뒤늦게 이런 구조를 고치겠다고 선언했지만, 잘 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자, 그럼 코코아 가격은 앞으로 어디로 갈까요. 지난 2년 동안 서아프리카 코코아 공급 쇼크를 유발했던 따뜻한 해류, 즉 엘니뇨는 이제 끝났습니다. 지금은 적도 지역 해수면을 냉각시키는 라니냐가 찾아왔죠. 기후만 보면 코코아 수확량은 다시 늘어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세계은행은 코코아 공급 상황 개선으로 코코아 가격이 2025년 약 13% 하락할 걸로 내다봅니다.하지만 이미 썩어버린 코코아나무를 베어내고, 다시 심어 키워서 열매를 맺게 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리죠. 완전한 정상화까진 쉽지 않습니다. 세계 최대 초콜릿 제조사 배리 칼레보의 CEO 피터 펠드는 아프리카 기상 조건이 1년 전보다 확실히 좋아졌지만, 여전히 2년 전 수준으로는 돌아가지 못했다고 말하죠. 코코아 가격도 과거의 낮은 수준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고 봤고요.ING의 상품전략책임자 워런 패터슨 의견도 같습니다. “서아프리카 생산량이 약간 상승하겠지만 가격은 내년에도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는데요. 참고로 코코아 가격은 2023년 초까지만 해도 10년 넘게 t당 2500달러 이하에 머물렀습니다. 그런 값싼 초콜릿 시대가 다시 돌아올 거란 전망은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플라스틱 공급과잉: 갈수록 태산글로벌 플라스틱 시장의 공급과잉이 위험 수준이란 이야기, 지난 4월 전해드렸습니다(). 당시의 시장 분위기(‘중국 경기 살아나면 한국 석유화학 산업도 희망이 있다’는 일말의 기대)에 비해 훨씬 암울한 전망을 담았는데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과잉 공급이 석유화학 업계의 ‘뉴노멀’이 됐다고 봤기 때문이었죠.그리고 석유화학 산업 위기는 현실로 닥쳐왔습니다. 올해 기업 실적은 곤두박질쳤고요. 결국 지난 23일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내놨죠. 공장 매각과 M&A 같은 사업 재편을 유도하겠단 건데요. 정부가 나서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단 뜻입니다.문제는 지금의 글로벌 공급과잉이 해소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새해가 진짜 고비라는 전망이 나오죠. 컨설팅업체 C-MACC는 “2025년 새로운 건설로 이미 공급이 과잉된 시장에 용량이 추가된다”며 “향후 1~2년은 글로벌 화학산업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대규모 수입 싱크홀” 역할을 해줬던 중국이 빠른 속도로 석유화학 생산을 늘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석유화학 공장) 가동률이 더 높아진다면 중국이 순수출국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옵니다. 생산비용이 높은 국가, 즉 유럽과 한국·일본·대만의 석유화학 생산업체가 가장 위험하죠.물론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위기에 처한 산업이 석유화학만은 아닙니다. 예컨대 철강산업에서도 비슷한 일은 벌어지는데요().여기서 중요한 건 적자에 빠진 중국의 철강산업과 달리 중국 화학산업은 여전히 돈을 벌고 있단 점입니다. 대부분 기업의 현금흐름이 플러스이죠. 즉, 중국 정부 입장에선 화학산업은 구조조정이 그리 시급한 상황이 아닙니다. 따라서 당분간 중국에선 더 많은 생산 용량이 추가될 거고, 공급과잉은 더 심화할 겁니다. 우울하지만 냉정한 현실입니다.아르헨티나 경제: 진짜 회복하나올해 주가지수가 가장 많이 오른 나라, 어디인지 아시나요? 네, 아르헨티나입니다. 올해 들어 주가가 177% 올랐죠. 이미 지난 10월 8일에 아르헨티나 증시가 85%나 뛰어 더할 나위 없다고 전해드렸는데요(). 그 뒤로도 40% 넘게 올랐습니다.이게 다 ‘전기톱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의 파격적인 긴축 정책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데요. ‘적자 제로’를 외치며 공무원도, 각종 보조금도 죄다 싹둑 잘라버리던 그 정책,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요. 몇 달 지나지 않았지만, 그동안 전해진 소식은 놀랍습니다. 2023년 무려 연간 211%에 달했던 물가상승률이 2024년엔 119%로 떨어질 전망이고요. 상반기 53%까지 치솟으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빈곤율(중위 소득의 50% 이하 비율) 역시 3분기엔 38.9%로 낮아졌죠. 절대 수치는 여전히 높지만, 하락세가 상당히 극적입니다.이를 두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물가를 낮추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경제정책에 힘입어 빈곤율과 노숙자 발생률이 감소했다”고 홍보합니다. 아동수당 같은 사회적 지원을 늘린 것도 빈곤 감소엔 효과적이었고요.하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덜 쓰고 덜 먹는 긴축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진짜 경제가 살아나려면 투자를 유치하고 기업활동이 늘어나고 근로소득이 증가하는 게 중요하죠. 자유주의자 밀레이 대통령은 규제 철폐와 기업 유치에도 적극적입니다. 30년 세금 면제를 골자로 하는 ‘대규모 투자 인센티브 제도(RIGI)’를 만들어 외국기업 유치에 시동을 걸고 있는데요.밀레이 대통령은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승리 뒤 첫 번째로 만난 외국 정상이기도 했죠. 이 만남 덕분에 그의 국제적 명성이 한층 높아졌는데요. 분위기가 닮은 두 정상의 친분이 과연 밀레이의 기대대로 두 나라의 자유무역 협정 체결로까지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습니다.얼마 전 WSJ과의 인터뷰에서 밀레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를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로 만들기 위한 개혁을 계속해 나갈 거라고 말합니다. 경제 개선으로 2025년 10월 선거에서 여당의 지지율이 높아질 거고, 그럼 그의 과감한 개혁은 더 탄력을 받을 거란 거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나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로보택시: 미래가 가까워졌다한동안 멀어진 듯했던 로보택시(Robotaxi)의 꿈이 되살아난다는 소식, 지난 7월에 전해드렸죠(). 많은 좌절과 사업 철수에도 불구하고 미국 웨이모, 중국 바이두로 대표되는 선두 주자들이 치고 나오며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지던 시점이었는데요.이후 엇갈린 소식이 나왔습니다. 이달 초 미국 GM은 크루즈의 로보택시 사업 중단을 발표했죠. 크루즈에 무려 8년 동안 100억 달러를 투자했던 GM의 철수 소식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요. 크루즈 설립자인 카일 보그트의 격한 반응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전엔 불분명했다면 지금은 분명하다: GM은 멍청한 놈들이다.”GM의 철수 타이밍이 특히 놀라웠던 건 마침 구글 웨이모 로보택시가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웨이모 로보택시는 올해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일반인 누구나 탑승할 수 있게 됐는데요. 이후 이용자 수가 석달 만에 두배 넘게 급증했습니다. 로보택시가 복잡한 도시에서도 잘 작동한다는 걸 입증한 셈이죠.웨이모는 현재 LA와 오스틴, 피닉스로 상업용 서비스를 확장했고요.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2025년까지 미국 10개 도시에 진출할 거란 계획도 밝혔습니다. 또 중국 지커 전기차, 그리고 현대차 아이오닉5를 이용한 새 자율주행차도 선보입니다. 오랫동안 ‘시범운영’ 수준에 머물렀던 완전 자율주행 로보택시 서비스가 올해를 기점으로 정말 일상이 되기 시작한 겁니다.이는 로보택시 비관론자들의 마음마저 돌리고 있습니다. 유명 IT 칼럼니스트인 아짐 아자르는 최근 기고문에서 “자율주행차가 오려면 멀었다던 과거 분석을 반성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율주행차는 ‘쓸데없는 방해물’이 아니라 거의 전성기를 맞을 준비가 됐습니다. 로보택시가 이 혁명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채택과 진화를 가리키는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게 근거입니다. 로보택시는 기술 거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이 시장에서 웨이모만 외롭게 달리는 건 아닙니다. 테슬라는 지난 10월 페달과 스티어링 휠이 없는 ‘사이버캡’을 공개하고 로보택시를 선보이겠다고 다시 한번 약속했죠. 또 아마존이 인수한 죽스(Zoox)는 2025년 자율주행 셔틀 서비스를 일반 대중에 개방한다는 계획이고요. 무엇보다 중국 우한에선 바이두의 로보택시 ‘아폴로고’가 10㎞당 최저 3.9위안(약 785원)의 요금이란 놀라운 경제성으로 이미 인기를 끌고 있죠.최근 만난 국내 자동차 업계 기업인은 이를 두고 “단기 실적과 주가에 연연하는 기업(GM)과 장기적으로 보고 투자하는 기업(테슬라 등)의 차이”라고 설명하더군요. 물론 로보택시 시대가 제대로 열리기까지는 규제를 포함해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긴 합니다. 하지만 2024년의 엇갈린 선택이 분명한 차이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By.딥다이브애초엔 연말 결산에 담을 만한 주제 후보가 10개도 넘었는데요. 늘 그렇듯이 쓰다보면 한없이 길어질 게 뻔해서 4개만 소개했습니다. 아깝게 탈락한(?) 주제를 추가로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늘면서 전력 공급이 세계적으로 큰 이슈이죠. 이 추세는 더 가속화할 겁니다. 에너지 컨설팅 기업 리스타드에너지는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이 10년 안에 두배로 증가할 거라 전망합니다. 이 전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수요도 계속될 거라고 하고요. ‘: 파운드리 부활을 노렸던 인텔이 좀처럼 반도체 제조 기술 향상에 속도를 내지 못하며 어려움에 빠졌죠. 올해 주가는 57% 추락했고, 결국 팻 겔싱어 CEO가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주주들이 팻 겔싱어가 파운드리 사업과 관련해 거짓말을 했다며 그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죠. 참 되는 일이 없어 보입니다. 이젠 현재 20달러인 주가가 10달러까지 추락할 거란 비관적 전망마저 나옵니다. *이 기사는 3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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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한애란]망상 아니어서 더 위험한 음모론

    지구 평면설, 한국전쟁 북침설, 달 착륙 조작설, 기후 위기 허구론…. 세상엔 참 많은 음모론이 있다. 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세월호 참사 같은 충격적 사건엔 어김없이 음모론이 뒤따랐다. 음모론(conspiracy theory)이란 용어가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음모론자를 낙인찍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만들어낸 것이란 음모론까지 있을 정도다. 이토록 음모론의 생명력이 강한 건 본래 인간이 음모론에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확증편향). 대의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사실 왜곡엔 눈감고 넘어가기도 한다(동기화된 추론). 이런 인지적 한계 때문에 똑똑하고 이성적이던 사람조차 음모론에 휩쓸릴 수 있다. 음모론을 단순히 망상 같은 정신병적 증상으로 취급하며 조롱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음모론에 취약한 성격이 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유독 음모론에 더 잘 빠지는 성격이 있다. 미국 심리학자 리처드 맥널리는 ‘외계인에 의해 납치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연구했다. 수면마비(가위눌림) 현상을 외계인 납치로 굳게 믿는 음모론자인데, 정신감정을 하면 정상으로 나온다. 대신 심리 평가 결과 이들은 비전통적인 인과관계를 강하게 믿고 환상적인 것에 끌린다는 공통점이 나타났다. 점괘나 부적, 저주와 예언이 실제 힘이 있다는 믿음은 음모론과 맞닿아 있다. 유럽 연구팀의 실험 결과도 비슷하다. 동전 던지기처럼 무작위적인 결과에서도 굳이 패턴을 찾아내는 사람일수록 음모론을 더 쉽게 믿었다. 있지도 않은 패턴을 발견하는 사람, 즉 미신 신봉자는 음모론에 취약하다. 댄 애리얼리 미국 듀크대 교수에 따르면 지적 겸손 수준과 나르시시즘은 음모론과 관련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지적 겸손이 부족하면 음모론적 사고에 끌리기 쉽다. 특히 자신이 대단한 존재로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스트는 위험하다. 상황이 뭔가 잘못됐을 때, 분명히 자기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며 비난 대상을 찾느라 음모론 수렁에 빠지기 때문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국가 지도자가 음모론에 휩쓸리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줬다. 다시 이런 혼란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음모론자의 성격적 특징을 제대로 알아둬야겠다. 앞으로 리더를 뽑을 땐 꼭 검증하자. 미신에 현혹되진 않는지, ‘나만 옳다’는 독불장군은 아닌지, 나르시시즘이 지나치진 않은지.가까운 사람이 음모론에 빠졌다면 정치 지도자라면 음모론자와 거리가 먼 인물로 잘 골라 뽑는 방법으로 걱정을 좀 덜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음모론자인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거리 두며 모른 척하고 싶기도 하다. 말해 봤자 듣지도 않을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데 무서운 건 사회적 고립감이 이들을 음모론에 아주 깊이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는 점이다. 주변에선 따돌리고 배척할 때, 음모론 집단은 자기 말에 귀 기울이고 지지를 보내준다. 소속감과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주장은 한층 과격해진다. 진실이냐 아니냐보다는 그 집단 소속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된다. 끈끈한 유대감은 이를 끊고 나오기 어렵게 만든다. 사이비 종교 집단과 유사하다. 결국 무시와 배척으로는 음모론을 잠재울 수 없다. 오히려 필요한 건 관심과 경청이다. 너무 깊숙이 빠지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고, 음모론에 빠지게 된 진짜 이유에 귀 기울여 주자. 내면의 결핍과 불안, 스트레스를 일깨워 준다면 생각은 조금씩이나마 바뀔 수 있다. 어렵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

    • 202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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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해가던 대기업이 부활하려면?히타치의 모범 답안[딥다이브]

    시대 변화에 뒤처진 대기업은 어떤 식으로 쇄신을 이룰 수 있을까요. 혁신을 사그라들게 만드는 ‘대기업병’은 치유 가능할까요.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기업이 있죠. 얼마 전 삼성전자가 연구 중이란 보도가 나오기도 했던 일본 대기업 히타치제작소(이하 히타치)입니다.15년 전 파산 위기에 몰렸던 히타치는 그야말로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며 새롭게 태어났죠. 특히 주목할 건 지난 15년 동안 사장이 4번 바뀌는 가운데도 구조개혁을 멈추지 않고 일관되게 실행했단 점입니다. 주인 없는 기업(소유분산 기업)은 CEO 리스크가 크다는 편견을 완전히 깨는데요. 대기업 위기 극복의 모범사례, 히타치의 혁신을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2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전자회사? 디지털 기업!올해 들어 주가 상승률 90%. 히타치는 이제 일본 시가총액 4위(약 166조원)로, 소니(3위)와 거의 맞먹습니다. “히타치는 문제 있는 하드웨어 제조사였지만 지금은 성장주로 변모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주식”이라는 일본 펀드매니저의 평가가 나오는데요.왜 지금 히타치인가를 얘기하기 전에 과거를 간단히 볼까요. 히타치란 브랜드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한때 TV와 에어컨이 꽤 잘 팔렸고요. 외장하드의 강자였죠. 그렇다고 순수 전자회사는 아니었습니다. 굴삭기 같은 건설기계도 비중이 컸고요. 그룹의 모태는 금속 산업입니다. 또 반도체 제조(메모리와 시스템LSI), 전동공구, 화력발전 시스템, 조선업, 물류와 금융(캐피탈)업까지 했습니다. 소비재 빼고는 웬만한 건 다 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문어발식 대기업이었죠.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모든 사업을 이제 다 안 합니다. 그럼 지금은 뭘 주로 하느냐. 크게 세 가지입니다.1. 디지털 시스템과 서비스=아날로그 산업현장에 IT와 AI를 이용한 실시간 데이터 분석을 도입하는 사업입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 공장’이 그중 하나인데요. 어떻게 스마트 공장을 구축하느냐. 사람 작업자가 손으로 조립하는 공장이라면 전자태그 수만 장과 카메라 수백 대를 달아서 현장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이를 통해 지금 어느 작업구간에서 병목현상이 벌어지는지, 뭐가 문제인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죠.공장 작업자를 위한 교육 시스템도 제공합니다. 작업 모습을 찍은 영상을 가지고 작업자 몸의 방향, 손의 움직임 등을 AI로 분석하는 거죠. 그렇게 쌓인 정보를 가지고 신입사원들에게 ‘숙련공은 이렇게 일한다’라는 걸 가르쳐줍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술을 전수하는 데 드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죠. 이런 디지털 분야는 히타치가 가장 역점을 두는 영역입니다. 2021년엔 미국 IT기업 글로벌로직스를 96억 달러에 인수한 것도 이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죠. 이는 일본 전자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 M&A였습니다. FT는 히타치가 “IT와 데이터 과학을 적용해 유틸리티, 제조업체에 경영 컨설턴트와 같은 존재가 됐다”고 평가합니다. 이제 히타치는 “일본에서 가장 큰 AI 사업을 하는 기업”(애널리스트 펠럼 스미더스)으로 통하죠.2. 그린 에너지&모빌리티=또 다른 축은 전력과 철도입니다. 전력과 철도는 달라 보이지만 둘 다 하드웨어 못지않게 제어·운용 기술이 중요하다는 공통점이 있죠. 히타치가 강한 분야입니다. 2020년 히타치는 스위스 기업 ABB의 송배전 사업을 인수하며(68억 달러) 전력 분야의 글로벌 강자로 올라섰고요. 마침 올해 AI 수혜주로 전력주가 급부상하면서 이 분야가 주가 상승의 큰 축이 됐죠. 철도 사업에서 히타치는 영국·이탈리아·그리스 등 유럽을 중심으로 열차 제조와 함께 신호시스템·보수사업을 잇따라 수주하고 있습니다.3. 커넥티브 인더스트리즈=엘리베이터, 반도체 제조 장치, 산업기계를 제조·판매합니다. 전통적으로 히타치가 주로 해왔던 하드웨어 제조업이죠. 다만 제품만 덜렁 파는 게 아니라 디지털 솔루션을 함께 판매하는 방향을 추구합니다.‘이러다 망한다’는 위기감요약하자면 히타치는 그동안 중구난방으로 뻗어있던 가지를 대거 쳐내고, 거대한 그룹을 세 줄기로 정리해 왔습니다. 2009년 943개였던 자회사는 많은 매각, 그리고 인수를 모두 거치며 지금은 573개가 됐고요. 이제 해외 매출 비중이 61%, 외국인 직원 비중이 60%에 달하는 진짜 글로벌 기업입니다. 일본 내수 설비투자 의존도가 워낙 높아서 ‘GDP(국내총생산) 기업’(기업 실적이 일본 GDP와 비슷하게 움직인다는 뜻)으로 불렸던 과거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죠.그럼 히타치를 이렇게 뒤바꿔놓은 건 무엇일까요. 큰 변화 이전에 ‘이러다 진짜 망하겠다’는 큰 위기감이 있었습니다.사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엔 장점도 있죠. 산업마다 사이클이 다르니까, 어느 한쪽이 적자에 빠져도 다른 데가 적당히 메울 수 있으니까요. 과거 히타치도 그렇게 그럭저럭 굴러갔습니다. 물론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에 빠지기 시작한 1990년부터 거의 이익을 내지 못했지만요. 그리고 2008년 히타치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겁니다. 이듬해 5월 발표한 2008 회계연도 적자 규모는 7873억엔. 일본 제조업 역사상 최대 기록이었습니다.“여기서 한 번만 더 적자가 나면 도산한다.” 히타치 내부에선 이런 진단이 나왔습니다. 외부에선 ‘가라앉는 거함’이라고 불렀죠. 2009년 4월 망할 위기에 처한 회사를 이어받은 9대 사장인 가와무라 다카시 사장의 취임 일성은 “적자는 악”이었습니다. 곧바로 대대적인 사업구조 재편을 선언했죠.“(모든 걸 다루는) 대기업에서 사회혁신 사업으로 축을 옮기겠다.” 그동안 자회사별로 제각각이었던 목표를 하나로 모아 뚜렷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룹을 하나로 묶는 경영전략이라는 게 제대로 생긴 거죠. 여기서 사회혁신이란 ‘우리는 단순히 하드웨어를 파는 게 아니라, 고객에게 디지털 솔루션을 제공해 가치 창출을 돕는 기업이 되겠다’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목표가 뚜렷해도 문제는 실행입니다. 구조 개편엔 당연히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죠. 흑자인 사업은 흑자라서, 적자인 사업은 곧 나아질 테니까 자기네는 구조조정 당할 이유가 없다고 반발합니다. 그걸 헤쳐 나가야만 하죠.11대 사장이었던 히가시하라 토시아키 현 회장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상반기까진 모든 자회사가 ‘올해 목표 달성 가능하다’고 전망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3분기가 끝날 무렵이 되면 구름의 움직임이 수상해지죠. ‘사실은…’이라며 목표달성이 어려워졌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자기네가 적자여도 다른 곳이 만회해 줄 것’이란 나태의 구조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었습니다.”독립적인 이사회의 역할이렇게 그룹과 자회사의 목표가 따로 갈 때, 중요한 건 강력한 리더십이죠. 하지만 히타치는 뚜렷한 대주주가 없고, 그룹 CEO는 자회사 수장들과 비슷하게 공채 출신입니다. CEO의 의지와 열정만으로 끌고 나가기란 어려운 구조인데요.하지만 히타치는 놀랍게도 2009년부터 지금까지 사장이 여러 번 바뀌는 가운데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건 독립성 높은 이사회가 개혁을 지지하고 동시에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죠.일본 또는 한국 모두 대기업의 이사회란 대체로 비슷한 모습이죠. 이미 하기로 거의 결정된 내용이 의안으로 올라오고요, 이사회는 사실상 거수기 역할을 합니다. 이사회 멤버는 주로 현 경영진과 가까운 사람들로 채워지고요.히타치 이사회도 과거엔 그랬지만, 이젠 구성부터 다른 기업과 차이가 큽니다. 12명 중 9명이 사외이사이고, 이 중 5명은 외국인이죠. 회의는 치열하고 깐깐합니다. 히타치의 전 사외이사였던 관료 출신 모치즈키 하루부미는 첫 이사회부터 깜짝 놀랐다고 전합니다. 미국 3M CEO 출신인 조지 버클리 사외이사가 발언 차례가 되자 메모를 들고 기관총처럼 비판을 마구 쏘아댔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소극적인 계획이면 미국에선 해고될 것”이라며 거침이 없었죠. M&A 같은 중요한 사항에 대한 심의는 매우 철저히 이뤄집니다. 차기 CEO를 선임할 땐 후보를 여러 차례 불러 검증하죠. 하루부미는 “진정한 의미의 감독과 집행의 분리가 뭔지 알게 됐다”고 말합니다.독립적이고 합리적인 데다 글로벌화까지 된 이사회의 존재는 구조 개혁에 명분과 힘을 실어줍니다. 이사회가 든든히 버티고 있으니 사장이 바뀐다고 흔들리는 일도 없고요. 코지마 케이지 현 사장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CEO가 깃발을 건네주며 달리는 이어달리기 같습니다. 이사회가 마치 감독처럼 차를 타고 옆에서 함께 달리면서 ‘힘내라, 너무 빠르다’라고 독려를 해주는 느낌이죠. 감독이 대신 달리는 건 아니지만, 이사들로부터 응원과 여러 조언을 받습니다.” 그는 “사장이 교체되면서, 10년 넘게 같은 방향을 목표로 경영을 계속하는 회사는 드물 것”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변혁은 시간을 들이는 것2008년 히타치 그룹 자회사 중 상장사는 22개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0이죠. 이중 상당수가 아예 매각됐거나, 지분을 일부 팔아 연결 자회사에서 빠졌습니다. 일부는 합병하거나 완전자회사가 되면서 상장폐지했고요.그럼 자회사 중 어떤 걸 남겨두고 어떤 건 팔아야 할까요. 생각보다 그 답을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엔 ‘시너지가 있냐, 없냐’를 기준으로 삼으면 될 것 같은데요. 사실 시너지라는 게 해석하기 나름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만으론 조직의 불만을 뚫고 가기 어렵죠. 그래서 히타치는 그룹의 목표에 충실하기로 합니다. 히타치는 사회혁신, 즉 단순 제조가 아닌 디지털 서비스 쪽으로 나아가기로 했잖아요. 그러려면 자산을 ‘라이트’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이때 라이트란, ‘Right’와 ‘Light’를 모두 뜻하죠.대표적인 사례가 히타치건설기계입니다. 굴삭기 같은 건설기계는 분명 다른 자회사와 시너지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죠. 전자부품은 물론 원격감시 솔루션 같은 IT를 결합한 디지털 솔루션도 히타치가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하지만 이사회는 글로벌 건설기계 시장에서 성장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놓고 치열하게 논의했습니다. 거의 3년 가까이 말이죠. 그 논의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앞으로는 건설기계는 소유하기보다는 임대해서 사용하는 기업이 많아질 거다. 금융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리스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이는 그 기계가 히타치건설기계의 자산이 된다는 뜻이다. 그럼 이미 10조엔에 달하는 히타치의 연결 자산 규모가 한층 더 무겁게 되는데?결국 그룹은 지분 상당 부분을 매각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2022년 히타치건설기계는 그룹과 결별했죠. 이런 식으로 상장 자회사였던 22곳 중 15곳이 그룹을 떠나게 됩니다. 돈을 잘 버는 흑자 기업이어도 방향성과 맞지 않으면 과감히 정리한 거죠.히타치의 변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몇 달 전에도 가정용 에어컨 제조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죠. 여전히 이사회에선 변화 속도가 느리다는 지적이 나온다는데요. 본래 변화란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기에 꾸준히 해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히타치의 나카하타 히데노부 CHRO의 인터뷰 발언을 공유하며 마무리합니다.“인간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린다’가 아니라 ‘시간을 들이는 것’을 염두에 뒀습니다. 시간을 들여 변화를 납득한 후에 일하게 하는 겁니다.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시작을 빨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By.딥다이브뚜렷한 경영전략, 독립적인 이사회, 과감한 선택과 집중. 교과서 같은 이야기이지만, 히타치는 이 모범 답안이 정말 통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올해 주가 상승률 90%. 일본 대기업 히타치가 디지털 전환으로 환골탈태했습니다. 시작은 이러다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던 2009년이었습니다. -느슨한 자회사 연합체였던 히타치는 그룹의 공동 목표를 뚜렷하게 정합니다. 그 목표란 ‘사회 혁신’. 단순히 제품만 파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디지털 솔루션까지 함께 제공하는 기업으로 변신하겠다는 겁니다.-이를 위한 과감한 구조재편이 이뤄집니다. 독립적인 이사회가 CEO에게 힘을 실어줬기에 가능했죠. 그동안 사장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개혁 방향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15년이 지났지만 히타치는 여전히 혁신 중입니다. 거대한 대기업의 방향을 돌리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죠. 더 빨리 시작하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이 기사는 2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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