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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대지진 참사가 터지자 전 세계 지진 전문가들이 “예고되었던 참사”라는 분석을 내놓았지만 사실 네팔 정부는 최근까지도 대형 지진의 발생 가능성을 파악했으나 시스템 미비, 대응능력 부재로 막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4일 네팔 주재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한국 미국 영국 등 주요 해외공관들은 최근까지 매년 지진 대비 훈련을 실시해왔다고 한다. 현지에서 만난 최용진 네팔 주재 한국 대사는 “지난해만 해도 미국 대사와 영국 대사로부터 네팔은 80년을 주기로 지진이 발생하니 조만간 대형 지진이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내용을 네팔 정부에도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최 대사도 미국 영국 대사관 재난 관련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아 군의 지휘소 훈련(CPX)과 비슷한 형태로 네팔 주재 한인들을 대상으로 2차례 실시했다고 한다. 그는 “네팔을 9개 지역으로 나누고 지역책임자를 정해 단계별로 대피장소로 이동하는 모의훈련은 물론 통신 두절에 대비해 무전기까지 나눠줬다”며 “이번 참사에서 부상자만 3명 발생했을 뿐 한국인 희생자가 없었다는 것은 사전 훈련 덕분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에비해 그동안 네팔 정부가 한 지진대비는 “지진이 나면 건물 밖으로 나가라”는 간단한 행동 요령을 방송으로 알렸던 수준으로 보여 진다. 네팔 공무원들은 정부가 긴급 사태를 선포하자 가족을 돌봐야 한다며 아예 출근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2009~2010년 선거 감시 및 치안유지 등을 맡은 유엔네팔임무단(UNMIN)에서 근무했던 네팔한인회 이해동 사무총장은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는 국장 등 일부 간부들만 출근하고 일선 실무 담당자들은 출근하지 않아 복구 관련 업무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다”며 “게다가 네팔은 읍면동에 해당하는 행정 조직이 없을 정도로 행정력이 매우 약해 대형 재난이 일어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같은 ‘행정력 공백’은 대지진에 버금가는 재앙이라고 일컫는 ‘구호 공백’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정부와 구호단체들이 네팔에 막대한 구호 물자를 보내고 있지만 체계적인 배포 시스템이 부족하다보니 이재민들에겐 구호품이 도달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통관절차까지 까다로워 구호물자들이 공항과 국경에서 방치되고 있다. 제이미 맥골드릭 유엔 네팔 상주조정관은 외신들과의 인터뷰에서 “구호품들이 공항에 묶여 있다. 네팔 정부가 관세 규정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팔 현지 언론들도 인도 국경에 수백 톤의 구호품들이 적체돼 있다고 보도했다. 네팔 정부는 1일 텐트, 방수포에 한해 수입세를 철폐했지만 참치, 마요네즈처럼 불필요한 구호물품도 있다며 세관이 모두 검사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트럭, 헬기 같은 운송수단이 없는 것도 큰 문제다. 구호단체들은 “고지대나 시골 지역에는 구호품이 거의 전달되지 않고 있다”며 “현재 운영되는 헬기는 20여대에 불과한 데 더 투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팔 경찰은 정부가 구호 관련 업무를 통제해야 한다는 이유로 민간단체의 트럭이 피해지역에 진입하는 것을 막는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마을 대부분이 무너진 신두팔촉 지역에는 지난주 한 구호단체가 방수포와 쌀을 전달한 것을 빼면 정부의 구호 복구 지원이 전혀 없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한편 4일 현재 확인된 지진 사망자는 7276명에 달한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30일 오전 네팔의 카트만두에는 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제법 굵었다. 비가 내리는 날 지진의 잔해 더미에서 실종자를 찾는 가족들의 심정은 어떨까. 구조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니 부서진 건물에 깔린 피해자들이 살아날 가능성도 희박하다. 이 비가 아직 살아 있는 실종자들에게 생명수가 된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카트만두에는 기적적인 낭보도 이따금 들려왔다. 이날 건물 잔해에 갇혀 있던 18세 청년이 대지진 이후 5일 만에 구조된 것이다. 이 청년은 구조대가 나타나자 고맙다고 인사했고, 구조 작업 내내 물을 달라고 했다고 현장의 경찰관이 전했다. 생후 넉 달밖에 안 된 아기가 무너진 가옥에 고립돼 있다가 지진 발생 22시간 만에 구출됐다는 소식도 뒤늦게 들려왔다. 그런데 이런 소식은 그야말로 한 줄기 희미한 희망일 뿐이다. 실종자 대부분이 돌덩이와 기둥, 흙더미에 깔려 있다가 숨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힌두교 사원 파슈파티나트의 화장터가 그런 현장이다. 사원 앞에선 시신과 함께 태울 나무, 짚 등을 운반하는 트럭이 보였다. 관광 가이드 리차드 디바즈 씨는 “25일 지진 발생 이후 매일 수백 명씩 화장을 했다. 시신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태우지 못하고 그냥 강에 띄우기도 했다. 하늘이 시신을 태우는 연기로 뒤덮였다”고 말했다. 장례 절차가 시작되자 시신을 장작 위에 올려놓고 짚과 꽃으로 덮었다. 유가족은 크게 울었다. 대여섯 구의 시신이 함께 탔다. 냄새가 진동했다. 재가 바람에 계속 날리자 유족의 울음도 거세졌다. 고교 영어교사 수레시 슈레스타 씨(46)는 25일 6층짜리 건물에 있다가 숨졌다. 조카 판카지 슈레스타 씨(19)는 “작은아버지는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시신이라도 찾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흐느꼈다. 화장 장소와 비용은 신분(카스트)에 따라 다르다. 브라만(성직자) 계층은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화장하고 화장터의 돌도 더 비싸 보이고 견고했다. 카트만두 부자들은 총리공관과 대사관이 밀집한 발루워터에서 낙살까지 이어지는 부촌(富村)에 산다. 발루워터에서 낙살까지 2km를 걸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악취도 없고, 매우 깨끗했다. 부서진 건물도 매우 적어 지진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숙소로 되돌아오는 길에 택시 운전사 렉 포크렉 씨(35)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길이 모두 다르다”고 말했다. 최대 1만 명으로 추산되는 희생자들의 가족을 생각하니 1일 밤 카트만두를 떠나는 기자의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이유종 특파원 pen@donga.com}

28일 오후부터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폭우가 쏟아졌다. 도무지 나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길거리에 천막을 세우고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았을 이재민들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튿날인 29일 날이 밝자마자 밖으로 나섰다. 무려 27개 텐트촌이 세워졌다는 카트만두에서 이재민이 제일 많이 모여 있다(약 1만 명)는 툰디켈 공원을 찾았다. 공원 전체가 텐트로 가득했다. 텐트라고 해봐야 비닐 천 쪼가리를 나뭇가지로 세워 묶은 것들이었다. 바닥은 종이와 천 등을 깐 게 전부였다. 급속한 경제성장기에 태어난 기자는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세대이다. 부모 세대의 가난이라야 6·25전쟁이 끝난 후 빈민들이 모여 있는 판잣집 사진을 보는 간접 체험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가난의 현장은 너무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인간의 삶이 과연 이렇게 무너져도 되는 것인가…. 대학생이라는 프레이티 골탐 씨(26·여)는 조부모, 부모를 포함한 가족, 친인척 30여 명과 함께 천막 하나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 지진 첫날인 25일 집에서 식구들과 밥을 먹다 땅이 크게 흔들리고 벽이 갈라지자 입던 옷 그대로 뛰쳐나왔다고 했다. 여동생은 돌에 맞아 크게 다쳤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고 했다. 골탐 씨 가족은 그날 오후 2시 바로 이 공원으로 왔다. 첫날은 그대로 땅바닥에서 밤을 보냈다. 하루 종일 물 한 방울 먹지 못했다. 이튿날인 26일에야 네팔의 적십자사로부터 천막을 지을 기본 재료들을 받았다고 했다. 골탐 씨는 “어제 내린 비를 쫄딱 다 맞았다. 너무 추워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목욕은 고사하고 세수도 못하고 화장실 시설도 제대로 없다 보니 공원은 악취로 가득했다. 배고픔과 절망에 지친 사람들은 차마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원 곳곳에서 나무로 불을 피우고 음식이 될 만하다 싶으면 모든 걸 불에 올려 구워 먹었다. 정오에 인도 소속 구호단체에서 국수와 밥을 나눠주자 너도나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아수라장이 됐다. 대지진이 할퀴고 간 카트만두는 매우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서서히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공원에서 도심 방향으로 3km 정도를 걸었다. 여전히 부서진 건물들은 덩그렇게 방치돼 있었지만 비가 그치고 날씨가 화창해서인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카트만두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는 타멜에 도착했다. 환전소, 기념품가게, 옷가게 등 일부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깨진 유리창과 엉망이 된 진열장을 정리하는 가게 주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음식점 한두 곳도 문을 열었다. 전기와 물도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나온다고 했다. 일부 상점에서는 인터넷이 간헐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등산용품점을 운영하는 풀 바하드라이 씨(38)는 “평소 같으면 등산 성수기라서 관광객들로 붐벼야 하는데 지진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했다. 얌부 호텔의 매니저 유브라즈 차울라가인 씨(22)는 “새로 들어오는 관광객은 거의 없다. 고객이 절반 이하로 크게 줄었다. 주변 호텔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호텔이 단전, 단수로 고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에는 택시를 타고 타멜에서 남부 사트도바토, 동부 트리부반 공항 등을 원형으로 40∼50분 정도 돌았지만 시내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제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는 네팔인들은 서서히 정부를 향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툰디켈 공원에서 만난 수만 카다 씨(25)는 “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이 있다는 신문 기사도 봤는데 누구도 구호물자를 전달하지 않고 있다. 지원 물자를 나눠 줄 수 없다면 그게 정부인가? 지금 네팔에는 정부가 없다”고 타국의 기자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네팔인들은 대지진 자체도 충격이지만 지진 이후 정부의 허술한 대처야말로 또 다른 재앙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부는 사망자들이 어디에 얼마나 묻혀 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구호팀이 도착해도 이를 컨트롤하는 타워조차 부재한 상황이다. 이러다 보니 지진 발생 후 네팔인 대부분은 모든 문제를 자신들 손으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이다. 구호에 나서고 있는 사람들도 민간인이 많았다. 타멜 거리에서 유니폼을 입고 고무장갑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고 있는 20, 30대 청년 50여 명이 보여 말을 걸었더니 ‘모국 네팔을 위한 젊은이의 운동’ 소속 회원들이라고 했다. 수닐 카드카 회장은 “지진이 발생한 뒤 즉시 구조작업에 참여했다. 인명 30여 명을 구했다”고 주장했다. 기자가 ‘왜 민간단체들만 이런 구조 및 구호 작업에 나서느냐. 네팔 정부가 제 구실을 못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난처한 표정이었다. 툰디켈 공원에서 공원관리 업무를 부여받았다는 한 군인은 “28일 오후 1시 공원으로 와 쓰레기를 치우고 텐트 치는 것을 돕고 화장실도 설치했다”고 했다. 그에게 “왜 지진이 난 지 사흘 만에야 왔느냐”고 물었더니 “기본적으로 시청 공무원들이 해야 할 업무다. 늦게 연락받은 것에 비하면 우리는 그나마 빠르게 대처한 것”이라고 답했다. 사람들은 네팔 하면 365일 눈이 쌓여 있는 하얀 히말라야 고봉들에 둘러싸인 낭만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이면에는 대지진을 가져온 땅의 지각변동만큼이나 불안한 정치적 지각변동이 수십 년간 거듭되어 왔다. 수백 년을 통치해온 전제 왕정이 2001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무너지긴 했지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총선을 치른 게 불과 7년 전인 2008년이었다. 이후 여러 정당의 분쟁에 볼모로 잡히는 정치적 소용돌이는 계속됐다. 하긴 종족 수만 126개, 고유 언어만 128개인 데다 물리적으로 교류가 힘든 산악 지형은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조건들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인도처럼 힌두교 신자가 대부분이다 보니 수십 개의 카스트(계급차별)가 상존하고 있다. 어떻든 네팔은 현재 제대로 된 헌법조차 없으며 기본적인 도로조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열악하다. 수도 카트만두만 해도 지진 이전에 하루 14시간씩 단전을 겪었다. 외국의 원조와 총 인구 4분의 1에 이르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힘들고 천한 일을 도맡아 하면서 국내 가족들에게 보내오는 해외 송금이 나라의 주된 수입원이다. 그러니 아무리 세계 지진학자들이 지난 수십 년간 네팔 대지진을 정확하게 예보해봐야 대비책을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네팔 수실 코이랄라 총리는 대지진이 터질 무렵 암 재발 여부를 체크하기 위해 해외 체류 중이었다. 그는 지진 발생 닷새째를 맞는 29일(현지 시간)에야 TV에 나와 “앞으로 사흘간을 국가 애도기간으로 선포하겠다”고 했다. 네팔은 2020년까지 최빈국에서 개발도상국 대열에 진입하는 것을 국가적 목표로 세웠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향후 재건 비용만 5년간 네팔 국내총생산(GDP)의 절반(1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돈도 돈이지만 재건 작업을 주도할 사람과 시스템이 없는 게 더 큰 문제다. 과연 이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카트만두=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인천공항을 떠난 지 30여 시간 만에 수차례 회항을 거듭하며 네팔 유일의 국제공항인 트리부반 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으로 27일 오후 6시였다. 피곤하고 지친 몸이었지만 무사히 착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국제공항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으로 치면 지방의 철도 간이역처럼 낡고 허름했다. 짐을 찾으려고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곳으로 갔지만 기계는 멈춰 있었고 승객 짐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이러다 내 짐을 못 찾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 틈에 섞여 다른 짐들을 헤집은 끝에 1시간 만에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국제공항이란 곳은 으레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설렘의 장소이지만 이곳은 곳곳에 주저앉아 우는 사람과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연민과 함께 죽음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이젠 숙소가 걱정이었다. 한국을 떠날 때 민박집을 예약하고 왔으나 계속 도착이 지연되면서 민박집 주인을 공항에서 기다리라고만 할 수 없어 예약을 취소했었다. 마침 한국인으로 보이는 60대 네 명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곳에서 한국인을 만나다니 정말 반가웠다. 은퇴자들인데 3개월 전에 네팔 트레킹을 하려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고 했다. 지진 소식을 듣긴 했지만 비행기가 뜬다고 하기에 출발을 강행했다고 한다. 여행이 힘들면 자원봉사라도 하자고 의기투합해 나선 길이라 했다. 기자가 “묵을 곳이 없다”고 하자 흔쾌히 자신들이 예약한 호텔로 함께 가자고 해 따라나섰다. 공항 밖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승객들을 태우려는 운전사들만 북적였다. 호텔 가이드를 따라 낡은 일제 미쓰비시 자동차 짐칸에 몸과 짐을 실었다. 태어나 처음 와 본 카트만두는 거대한 암흑 도시였다.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마주 오는 차의 헤드라이트에만 의지해 이동했다. 길가에 띄엄띄엄 불을 켠 상점들이 보였다. 운전 기사가 “미리 설치해 놓은 발전기로 전기를 공급받는 몇 안 되는 곳들”이라고 서툰 영어로 일러주었다. 차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다 왔다”고 해서 내렸더니 어두운 길가였다. 카트만두의 중심 지구인 타멜 지역이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그 자체였다. 짐을 들고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가로등도 없었다. 휴대전화 불빛에 의존해 걸었다. 일행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죽으면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음산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호텔은 6층짜리 낡은 건물이었다. 투숙객은 많지 않아 보였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유럽 관광객 10여 명이 투숙하고 있다고 했다. 호텔이라고 해도 바깥 상황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단전(斷電) 단수(斷水)로 전기와 물을 일절 사용할 수 없었다. 휴대전화도 불통이었다. 계단을 걸어올라 배정받은 4층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생각 저 생각이 오갔다. 취재는 고사하고 이 도시에서 무사히 빠져나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불안과 두려움이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는데 호텔 직원이 초와 성냥을 가져다줬다. 촛불을 켜 놓고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피로 때문이었는지 깜빡 잠이 들었다. 깜짝 놀라 깬 것은 침대가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여진이었다. 휴대전화를 켜니 28일 오전 4시였다. 오다가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닥칠 여진이 더 큰 문제라는 말을 언뜻 들었는데 이 호텔도 이러다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공포가 엄습했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휴대전화가 불통이어서 누구와도 접속할 수 없다는 거였다. 게다가 배터리가 거의 소진되고 있어 두려움은 더 커졌다. 이마저 끊기면 혼자 이곳에 방치되는 건가…. 바로 그때였다. 스위치를 켜 놓은 형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왔다는 생각에 재빨리 콘센트를 찾아 휴대전화 충전기부터 꽂았다. 그리고 1시간 만에 다시 전기가 나갔다. 뜬눈으로 2시간여를 보냈다. 바깥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오전 6시 호텔을 나섰다. 아직 어둠이 깔려 있는 새벽인데도 도로는 사람들로 넘쳤다. 몰골은 초췌하고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거리엔 악취가 가득해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집이 붕괴되어 아예 돌아갈 곳이 없거나 집 자체가 대부분 낡아 여진이 닥치면 그대로 묻힌다는 공포 때문에 나온 거였다. 길거리에 쓰러져 밤을 보낸 사람도 많아 보였다. 기둥만 남기고 사방 벽이 뻥 뚫린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간단한 음식을 먹는 가족도 심심찮게 보였다. 한 호텔은 땅이 푹 파였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옛 왕궁의 정문으로 보이는 건축물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붕괴된 초등학교도 눈에 들어왔다. “혹시 아이들이 죽지 않았느냐”고 사람들에게 묻자 “다행히 지진이 난 날이 토요일이어서 희생자는 없었다”고 했다. 지나가는 한 서양인에게 말을 걸었다. 뉴질랜드 출신이라는 글랜 팔리어 씨(67·여)는 은퇴 후 네팔에서 9개월째 여행자로 체류 중이라고 했다. 그는 “지인 중에 팔을 잃은 사람도 있다. 나도 여진이 두려워 길거리에서 잤다”고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휴대전화 문자 알림 신호가 울렸다. 반가운 마음에 보니 ‘오전 10시 18분 외교부. 네팔 여진 계속 발생. 체류 국민은 건물에서 떨어진 공터로 안전 대피 요망’이라는 문자였다. 현지 통신회사의 서비스 불능으로 문자메시지는 오고 갈 수 없었는데 아주 가끔 문자메시지가 배달되기도 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건물 붕괴에 따른 먼지 때문이다. 마스크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금방 목이 칼칼해졌다. 구정물로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330m²(약 100평) 정도 되는 도심 공터에는 대형 천막이 3, 4개 쳐져 있었다. 바로 옆 건물이 모두 붕괴돼서 모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무려 800명 이상이 이곳에서 이틀을 먹고 자고 했다고 한다. 천막에는 아이들이 뒹굴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소피아 아차랴 씨(20·여·레스토랑 종업원)는 “지진이 나자마자 집에서 뛰쳐나와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며 “미래는 고사하고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물도 전기도 없다. 막막하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데, 구호물자도 없다”고 말했다. 그의 머리엔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었다. 건물이 무너질 때 머리에 돌을 맞았는데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길을 계속 걷다 보니 텐트촌은 이곳만이 아니었다. 카트만두 도심 전체가 대형 텐트촌 같아 보였다. 금융회사에서 일한다는 아르주 카드카 씨(21)는 “가족과 함께 천막에서 지내고 있다. 치안이 불안하지는 않지만 밤이 되면 무섭다. 어린이, 여자들도 공터에 방치돼 있어 크게 걱정된다”고 했다. 다시 호텔로 돌아온 것은 오후였다. 이내 폭우가 쏟아졌다. 길거리에 있던 그 많은 사람이 이 비를 맞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외신들은 대지진 발생 나흘째인 28일 사망자가 5000명을 훌쩍 넘기고 부상자도 8000명을 넘겼다고 보도했다. 네팔과 인접한 인도와 중국에서도 각각 61명과 25명이 숨졌다. 현재 교통과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외곽 지역으로 구조 작업이 확대되면 사상자 수는 더 크게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이유종 특파원 현지 르포 pen@donga.com}

26일 오후 2시 55분 인천공항을 떠나 무려 30시간 만에 닿은 카트만두 트리부반 공항이었다. 평소 같으면 7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27일 오후 5시 35분(한국 시간 오후 8시 55분)에 도착한 트리부반 공항 로비는 네팔을 하루빨리 떠나려는 외국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표를 구하지 못해 대부분 공항에서 마냥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시내 대부분은 폐허가 됐고, 무너지지 않은 호텔은 이미 방이 꽉 차 있어 마땅히 숙소도 없어 공항 바닥에 아예 누워 잠을 청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현지 주민들은 “지진 이후 마치 배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멀미를 느끼고 있다”고 호소했다. 강진 이후에도 3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땅이 흔들리는 여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지진(리히터 규모 7.8) 사흘째를 맞은 카트만두 시내는 거대한 ‘텐트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수만 명의 주민이 폭격을 맞은 듯 주저앉은 건물 잔해를 피해 도로 한복판과 공터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었다. 도로에 그냥 이불을 깔고 누워 있는 사람도 많았다. 여진 때문에 건물이나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새벽녘엔 비까지 쏟아지는 바람에 기온이 떨어져 바깥에 있던 주민들은 추위에 떨고 있었다. 네팔 당국은 27일 오후 7시(현지 시간) 현재 사망자가 3900명, 부상자는 7100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전날보다 사망자는 1700여 명, 부상자는 2600명 넘게 늘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카트만두 가옥의 70%가 파괴됐다고 밝혔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 온라인판은 사망자가 1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네팔 당국자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지에선 1만 명 이상이 숨진 1934년 대지진(규모 8.2)의 재판(再版)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27일 ‘대한민국긴급구호대(KDRT)’를 40여 명 규모로 편성해 네팔에 파견하기로 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일요일이었던 26일 오전 출근길에 회사에서 휴대전화로 급히 찾는 전화가 울렸다. “바로 집으로 가서 출국 준비를 해 인천공항으로 가 네팔로 떠나라”는 지시였다. 서둘러 인천공항을 출발할 때만 해도 카트만두에 도착하기까지가 이렇게 험난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정시 출발한 중국 난팡항공 CZ3067편 기내에서 음료와 식사를 건네던 중국인 승무원이 어디에 가느냐고 묻길래 “카트만두”라고 말하자 “지진 난 것을 알고 있느냐. 왜 가느냐”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싫어 “비즈니스 때문”이라고만 짧게 답했다. 경유지인 광저우에 도착한 것은 비행 3시간 만인 현지 시간 오후 5시 40분(한국 시간 오후 6시 40분)이었다. 곧 떠날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일군의 네팔인들 모습이 보였다. 비행기는 예정대로 이륙해 카트만두로 향했다. 비행기 좌석은 총 100여 석 정도로 중단거리 중소형 항공기였다. 승객은 80% 정도 채워졌다. 30명 정도는 중국의 구급단체 블루스카이(Blue Sky Rescue) 대원들로 모두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유럽 등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다른 구호단체 사람들 모습도 보였다. 앞쪽으로 등산객 복장을 한 4명의 중년 한국인 모습도 눈에 띄었지만 말을 걸지는 못했다. 마침 옆자리에 네팔인들 모습이 보여 말을 걸어 보았다. 다들 어두운 표정이었다. 에미트 타파리아 씨(33)는 “카트만두 건물의 70%가 파괴됐다고 들었다. 중국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 소식을 듣고 놀라서 급히 고향으로 가고 있다. 집과 사무실 등이 모두 파괴됐다. 여진 피해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집 밖에 나와 텐트를 치고 있다고 한다”고 말한 뒤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는 중국에서 가정용품을 수입해 네팔에 파는 수입상이라고 했다. 또 다른 네팔인 케샤브 샤르마 씨(28)는 캐나다 앨버타대 토목공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그는 “그나마 공항은 무너지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내가 살던 집도 아직은 괜찮다는 소식을 들었다. 휴가를 얻어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마침 지진이 났다고 들었다. 가족들이 무사한지 몹시 걱정이 된다”고 했다. 한국의 서울과 부산에도 가본 적이 있다는 그의 꿈은 모국 네팔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디 그의 꿈이 이뤄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드디어 카트만두 트리부반 공항 가까이 왔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대재난이 닥친 현장을 제대로 취재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지루한 기다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기장은 공항 관제팀에 “착륙해야 한다”고 계속 말했지만 관제팀은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기장은 1시간 정도를 공항 상공만 빙빙 돌다가 방글라데시 다카 공항으로 항로를 변경했다. 시계를 보니 한국 시간으로 27일 오전 3시 15분이었다. 이웃한 승객들이 하나둘씩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자도 눈을 감았다. 1시간가량의 비행 후 다카 공항에 도착해 승무원들에게 착륙하지 못한 이유를 묻자 “전 세계 구호팀을 태운 비행기가 한꺼번에 몰려서 착륙할 수 없었다. 연료가 부족해서 기장이 다른 공항으로 변경한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카 공항에 도착해서도 기내에 1시간가량 갇혀 있어야 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온 사나운 모기떼와 싸우고 출입국심사 등으로 1시간 정도를 더 공항에 체류하다 비행사가 안내해준 다카 시내 사리나 호텔에 투숙했다. 3, 4시간 지난 뒤 다시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탄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는 사이 27일 아침이 밝았다. 휴대전화 문자로 회사와 교신하니 일부 조간신문 기자가 카트만두 현지에서 기사를 썼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해당 기자는 기자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방글라데시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마치 도착한 것처럼 포장된 기사였다. 큰 사건이 터지면 기자가 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얼굴 사진부터 실어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관행을 무심하게 따른 결과로 추정됐다. 현지 시간 27일 오전 10시에 출발한다던 비행기는 네 시간이 지나서도 지상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드디어 오후 2시 비행기가 움직였다. 1시간 반가량 지나 비행기가 착륙 허가를 받기 위해 카트만두 상공을 순회하는 동안 멀리서 부서진 집들이 보였다. 비행기는 쉽게 내리지 못했다. 무려 공항 상공을 3시간이나 맴돈 끝에야 착륙할 수 있었다. 답답한 기내가 마치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 비행기가 지상에 착륙하자 좌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 네팔인은 입국장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고향에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이어 다른 네팔인들도 짐을 찾다가 주저앉아 하나둘씩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공항은 순식간에 장례식장처럼 통곡의 장소로 변해버렸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의 고도는 1281m이다. 북쪽으로는 높이 8000m를 넘나드는 히말라야 고봉준령이 병풍처럼 서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은 “지진 이후 마치 배 위에 떠있는 것처럼 멀미를 느낄 지경”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27일 81년만의 강진 이후에도 3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땅이 흔드리는 여진이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네팔 대지진(규모 7.8) 사흘째를 맞은 27일 도착한 카트만두는 거대한 ‘텐트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수만 명의 주민이 폭격을 맞은 듯 주저앉은 건물 잔해를 피해 도로 한복판과 공터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었다. 도로 위에 그냥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하는 사람도 많았다. 여진 때문에 건물이나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네팔에 난민들의 ‘텐트 도시’가 건설됐다”며 “강한 여진으로 모두 집에 가길 두려워하고 있어 수만 명이 지진 둘째 날을 학교 운동장, 도로, 집 마당에서 보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진 첫날인 25일 밤, 길거리에서 박스나 얇은 옷가지만 덮으며 버텼던 시민들은 이튿날엔 무너진 집으로 돌아가 텐트를 가지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27일 새벽녘엔 비까지 들이닥쳐 추위에 떨어야했다. 구조 작업은 카트만두에서 진원지를 비롯한 외곽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지만 산사태로 도로와 통신망이 붕괴돼 접근이 어려운 실정이다. 네팔 재해당국은 사망자가 3200명, 부상자는 6500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전날보다 사망자는 1000명, 부상자는 2000명 넘게 늘었다. 국제구호기구 월드비전은 “200¤1000명이 사는 마을 전체가 산사태에 묻혀버린 일이 드물지 않다”고 밝혔다. 미국 지질조사국은 이번 피해 규모가 네팔 국내총생산(GDP)대비 35%에 달할 것으로 추정해 그렇지 않아도 아시아 최빈국인 네팔 자체가 외부원조 없이는 회생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 온라인판은 사망자가 1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네팔 당국자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때문에 현지에선 1만 명이상이 숨진 1934년 대지진(규모 8.2)의 재판(再版)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카트만두=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중국의 반(反)부패 정책으로 본토 관광객이 줄어든 ‘카지노의 메카’ 마카오가 변화를 꾀하고 있다. 도박 편향에서 탈피해 레저, 관광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성공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22일 마카오가 비즈니스모델을 바꾸고 있는 모습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지난해 마카오의 관광객 3150만 명 중 3분의 2는 본토에서 왔다. 1999년 포르투갈에서 반환된 마카오는 중국 대륙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도박을 할 수 있는 도시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2013년부터 반부패 정책을 추진하면서 마카오 매출액이 급감했다. 올해 1∼3월 카지노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6% 줄었다. 카지노 덕분에 2013년 1인당 역내총생산(GDP)이 세계 4위인 9만1376달러(약 9800만 원)에 달할 정도로 번영을 누리던 마카오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마카오는 중국에 반환됐으나 2049년까지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마카오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해법을 찾고 있다. 1990년대 미국 카지노 업체들은 카지노 매출 비중을 줄이면서 성장을 꾀했다. 라스베이거스의 전체 매출액에서 카지노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이하다. 나머지는 레저, 관광 등으로 충당한다. 이에 비해 마카오의 카지노 업체들은 매출의 88∼99%를 카지노에서 올리고 있다. 마카오의 카지노 업체인 갤럭시는 객실 1350개와 3000석 규모의 대형 극장, 대형 쇼핑몰 등 복합 시설을 갖춘 리조트 건설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 또 다른 업체 멜코크라운은 할리우드 테마 파크를 추진하고 있다. 샌즈차이나는 기존 호텔에 프랑스 에펠탑 등을 재현해 관광객을 더 끌어모을 계획이다. 리카르도 시우 마카오대 경영경제학과 교수는 “카지노 성장 둔화가 오히려 좋은 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카오에는 잠재 관광객이 많다. 2020년 해외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은 2억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카지노 사업을 VIP 고객 중심에서 일반 관광객으로 확대하면 수익이 더 늘어날 수 있다. 일반 관광객에게는 공짜 숙박, 음식을 제공할 필요가 없어서 수익률이 VIP보다 4배 많이 나온다. 하지만 당분간 수익을 크게 늘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최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상당수가 당일치기나 패키지 관광객이다. 한 중국인은 “카지노를 즐기고 싶다. 하지만 패키지 관광 일정이 빠듯해서 그럴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관광객들은 마카오에서 식비 정도만 지출하고 잠은 마카오 인근 중국 도시에서 잔다. 카지노 경쟁자도 증가하는 추세다. 최근 호주, 캄보디아, 필리핀의 카지노 매출은 크게 늘었다. 홍콩의 임피리얼퍼시픽과 중국의 태양열 패널 제작업체인 하너지는 사이판에 객실 4000개를 보유한 대형 카지노를 추진하고 있다. 마카오의 새로운 전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사흘 전 지중해에서 전복된 난민선의 희생자가 최대 9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유럽으로 항해하던 도중 사고로 숨지는 난민이 계속 늘고 있다. 국제이주기구(IOM)는 20일 300명 이상이 탄 선박이 지중해에서 가라앉아 최소 20명이 숨졌다는 조난 신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IOM 로마사무소의 조엘 밀만 대변인은 “지중해 공해상의 배에서 조난 신고를 받았다. 신고자는 300명 이상 탄 배에 탑승했으며 침수로 최소 20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고 AFP통신은 보도했다. 이와 별도로 이날 에게해의 로도스 섬 앞에서 200명 이상을 태운 난민선이 조난을 당해 최소 3명이 숨졌다고 그리스 ANA-MPA통신이 보도했다. 그리스 해안경비대는 이날 정오까지 난민 83명을 구조해 병원 등으로 옮겼다. 난민들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터키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앞서 18일 지중해에서 전복된 난민선 탑승자는 당초 추산했던 700명보다 250명 정도가 더 많은 950명이 타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CNN에 따르면 이탈리아 검찰은 방글라데시 국적의 생존자에게서 950명이 타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19일 밝혔다. 탑승자 300명은 갑판 아래 문이 잠긴 짐칸에 갇혀 침몰 과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짐칸에 감금된 난민들은 인신매매범들이 끌고 온 것으로 전해졌다. 탑승자에는 여성 200명, 어린이 50명도 포함됐다. 탑승자의 국적은 알제리, 이집트, 소말리아, 세네갈, 말리, 잠비아, 방글라데시 등이다. 이탈리아 검찰은 다만 탑승자들의 증언이 사실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탈리아와 함께 난민 구조작업에 나선 몰타 정부는 현재까지 50명 정도를 구조했다고 밝혔다. 난민선 사고가 잇따르면서 국제사회에서는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8일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는 수많은 난민을 유럽과 국제사회가 수용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유럽연합(EU) 28개 회원국 외교 및 내무장관은 20일 룩셈부르크에서 특별 합동회의를 열고 이탈리아,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에 집중된 난민 구조 부담을 EU 회원국 전체가 공유하자는 방안을 논의했다. EU 장관들은 지중해 난민 구조에 국경 관리 기관의 지원을 강화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도널드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난민 유입 사태를 논의하기 위한 긴급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EU 집행위원회는 다음 달 국경 통제 강화, 회원국 부담 공유, 난민 수용 근거 마련 등을 포함한 난민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동안 유럽 국가들은 반(反)이민 정서 때문에 난민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해왔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올해 유럽으로 향하다 지중해에서 숨진 난민만 1500명이 넘으며 지난해에는 3500여 명이 숨졌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스페인에 한국 태권도 사범의 이름을 딴 체육단지가 들어선다. 스페인 동부 에스트레마두라 주 카세레스 시는 18일 체육관과 테니스장 등을 갖춘 대규모 종합 체육단지를 조성하면서 한국 태권도 사범의 이름을 따 단지명을 ‘김영구 체육단지’로 명명했다고 밝혔다. 카세레스 시는 김 사범이 태권도를 통해 스페인 체육계에도 크게 공헌했다고 판단해 그의 이름을 딴 체육단지를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권도 공인 9단인 김영구 사범(65·사진)은 1979년 스페인에 정착해 카탈루냐 주 태권도 대표팀 감독을 맡는 등 태권도 보급에 앞장서 왔다. 지금은 에스트레마두라 주 태권도협회장을 맡고 있다. 한인 태권도 사범은 1960년대부터 스페인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스페인 전역에서 350명 이상이 활동하며 현지에서 태권도 열풍을 일으켰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일본이 중국을 제치고 7년 만에 미국의 최대 채권국 지위를 탈환했다. 15일 미 재무부에 따르면 일본은 2월 말 현재 1조2244억 달러(약 1332조5145억 원)의 미 국채를 보유해 1조2237억 달러(약 1331조7527억 원)를 가진 중국보다 7억 달러(약 7618억 원) 더 많았다. 일본이 미국의 최대 채권국이 된 것은 2008년 8월 이후 처음이다. 일본은 지난 1년 동안 미 국채 투자를 136억 달러(약 14조8008억 원)나 늘렸다. 반면 중국은 492억 달러(약 53조5443억 원)를 줄였다. 이와 관련해 월스트리트저널은 일본과 중국의 경제 상황이 미 국채 투자에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 일본은행의 대규모 양적완화로 풍부해진 일본의 유동성이 미 국채 투자로 몰리고 있다는 것.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0.322% 수준으로 미 국채 수익률 1.88%보다 훨씬 낮다. 반면 중국은 경기가 다소 부진해지면서 미 채권에 대한 투자가 감소했다. 일본은행이 당분간 대규모 양적완화를 이어 갈 것으로 보여 일본 국채 수익률은 한동안 매우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일본의 미 국채 매입 규모가 더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일본이 중국을 제치고 7년 만에 미국의 최대 채권국 지위를 탈환했다. 15일 미 재무부에 따르면 일본은 2월 말 현재 1조2244억 달러(약 1332조5145억 원)의 미 국채를 보유해 1조2237억 달러(약 1331조7527억 원)를 가진 중국보다 7억 달러(약 7618억 원) 더 많았다. 일본이 미국의 최대 채권국이 된 것은 2008년 8월 이후 처음이다. 일본은 지난 1년 동안 미 국채 투자를 136억 달러(약 14조8008억 원)나 늘렸다. 반면 중국은 492억 달러(약 53조5443억 원)를 줄였다. 이와 관련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본과 중국의 경제 상황이 미 국채 투자에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 일본은행의 대규모 양적완화로 풍부해진 일본의 유동성이 미 국채 투자로 몰리고 있다는 것.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0.322% 수준으로 미 국채 수익률 1.88%보다 크게 낫다. 반면 중국은 경기가 다소 부진해지면서 미 채권에 대한 투자가 감소했다. 일본은행이 당분간 대규모 양적완화를 이어갈 것으로 보여 일본 국채 수익률은 한동안 매우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일본의 미 국채 매입 규모가 더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인도가 매섭게 중국을 추격하고 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중국에 버금가는 영토와 인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경제가 지지부진해 ‘헐떡거리는 코끼리(Gasping Elephant)’라는 말을 듣기도 했던 인도였지만 올해 일부 경제 지표에서 중국을 뛰어넘은 것은 물론이고 주변국 외교에서도 중국을 견제하는 수준으로 떠올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인도가 16년 만에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인도의 코끼리가 중국의 용을 앞지르고 있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중국 넘어선 경제성장률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지난달 16일 인도를 방문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를 만나 “IMF 고위 간부급에 인도 출신 인사도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인도의 위상이 오른 만큼 대접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에 대해 라가르드 총재는 “언제라고 장담할 수 없지만, 가까운 미래에 인도 출신이 IMF의 수장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인도가 이대로 성장한다면 앞으로 4년 안에 국내총생산(GDP)이 일본과 독일을 합친 규모보다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14일 나온 IMF의 세계경제전망(WEO)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의 올해와 내년 GDP 성장률은 7.5%에 달한다. 이는 1월 제시한 전망치 6.3%보다 1.2%포인트 높다. 반면 중국은 올해 6.8%, 내년 6.3%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세계은행은 올해 초 인도의 성장률이 2017년 중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IMF는 그 시기를 2년 앞당겼다. 인도의 부상은 지난해 집권한 모디 총리가 단행한 부패와 비효율을 걷어내는 개혁 작업의 결실로 분석된다. 모리 총리는 현행 30%인 법인세율을 4년 내 25% 수준으로 낮추겠다고 최근 밝혔다. 또 철도 분야에서 외국인 투자 지분을 100%까지 높이는 등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에 나서고 있다. 효율성이 낮다는 비판을 받아 온 경제계획위원회를 폐지하고 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인도 개조 국가기구’를 설치했다. 이 같은 정책에 힘입어 지난해 4분기 신규 투자 프로젝트는 640억 달러(약 71조 원)로 4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 경제는 느려지고 있는 반면 인도에는 거대한 신흥 시장이 우뚝 서 있다”고 평가했다. ○ 중국 견제용 인도양 세력 확대 모디 총리는 외치(外治)도 다지고 있다. 그는 지난달 스리랑카 등 인도양 3개국을 방문했다. 외신들은 이를 두고 중국 견제용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하기 위해 인도양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모디 총리를 영접한 스리랑카 정부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겠다고 선언했다. 모디 총리는 다음 달 14∼19일에는 중국, 몽골, 한국 등 동아시아 3개국도 방문한다. 인도의 국방력도 급상승세다. 올해 인도 국방부는 핵잠수함 6척과 프리깃함 7척을 새로 건조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항공모함 두 척을 보유한 인도는 3번째 항공모함도 건조하고 있다. 인도의 덩치가 커지면서 중국과의 마찰음도 더 크게 들린다. 모디 총리는 올 2월 중국과 국경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아루나찰프라데시 주(州)를 전격 방문했다. 이 지역이 인도 영토라는 메시지를 중국에 전달한 것이다. 중국 외교부는 주중 인도대사를 불러 “불순한 의도”라고 반발했다. 중국이 최근 남중국해 분쟁 도서에 대한 영유권 공세를 강화하자 인도는 베트남과 군사공조를 넓히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유덕영 firedy@donga.com·이유종 기자}
러시아가 유엔의 금수 조치 이행 차원에서 시행해 온 방공 미사일의 이란 수출 금지령을 해제하자 미국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 방공 미사일의 이란 수출 금지령 해제에 서명하자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고 뉴욕타임스 등이 보도했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러시아의 행보는 이란 핵 협상의 최종 결과에 따라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푼다는 주요국의 계획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마리 하프 국무부 부대변인도 “이란은 예멘, 시리아, 레바논 등에서 불안을 일으킨다. 아직은 그런 무기 시스템을 이란에 팔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주요 외신들은 러시아가 이란에 무기 수출을 재개하면 이란 핵 협상의 최종 합의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 등 6개국은 2일 이란이 핵개발을 멈추면 국제사회의 제재를 푼다는 데 합의했으나 구체적인 해제 시점과 방법 등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였다. 주요국과 이란의 핵 협상은 6월 말까지 진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이 러시아의 방공 미사일을 도입하면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을 공습하기가 어려워져 핵 협상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할 수 있다. 이란 핵 협상 타결에 반대해 온 이스라엘도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유발 슈타이니츠 이스라엘 전략부 장관은 성명에서 “제재 해제에 따른 경제적 추진력은 이란 국민의 복지에 쓰이는 게 아니라 군비 확충에 악용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소설 ‘양철북’으로 유명한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가 13일(현지 시간) 독일 함부르크 인근 뤼베크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8세. 그는 1927년 독일 단치히자유시(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독일계 아버지와 슬라브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청소년기를 보냈고 뒤셀도르프국립미술대, 베를린예술대 등에서 수학했다. 그는 독일 전후 세대 문학 조류를 대변하는 작가로 평가받았다.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17세 고교생 시절 나치군에 복무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 포로가 됐다가 석방되고 잡부와 석공으로 일하다가 조각가가 되려고 뒤셀도르프미술학교를 거쳐 1952년 베를린예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파리에서 조각과 그래픽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소설을 썼다. 1959년 쓴 ‘양철북’은 그를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 반열로 끌어올렸다. 양철북은 1979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칸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양철북은 192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독일의 일그러진 역사를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 마체라트의 시점으로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세 살이 되던 생일날 일부러 계단에서 떨어져 성장을 멈추기로 하고 양철북을 잡는다. 이 소설은 그의 가족의 역사, 자신의 고독한 학교시절, 단치히의 소시민적 세계, 전쟁과 전후 시대를 이른바 ‘개구리 시점’으로 회상한 자서전적 장편이다. 당대 문학계는 비정상적인 난쟁이의 눈에 비친 정상인들의 세계가 더욱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이채롭게 구성한 점을 높게 평가했다. 그의 나치 복무 전력이 대중의 배반감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그는 지성인으로서 정치적 행동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1960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핵무기 반대를 외치며 빌리 브란트 총리의 재선을 위한 시민운동을 이끄는가 하면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당 소속 헬무트 콜의 낙선 운동에도 나섰다. 일간 디벨트가 2005년 실시한 ‘현존하는 독일인 중 최고의 인물’에도 그는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 요슈카 피셔 전 외교장관, 앙겔라 메르켈 총리, 콜 전 총리 등과 함께 거명됐다. 고향인 단치히 3부작으로 불리는 ‘고양이와 쥐’(1961년), ‘개들의 시절’(1963년)도 인간사회를 비판적 시선으로 그렸다. 한국에선 그라스의 대표작 ‘양철북’을 비롯해 ‘넙치’ ‘텔크테에서의 만남’ ‘게걸음으로 가다’ ‘라스트 댄스’ ‘나의 세기’ 등이 번역돼 소개됐다. 그는 2002년 5월 한일 월드컵 전야제에 참가해 축시 ‘밤의 경기장’을 낭송하기도 했다. 독일 분단을 겪은 그는 판문점도 방문했다. 2006년 그라스가 출간한 자서전 ‘양파껍질을 벗기며’를 번역 중인 장희창 동의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판문점을 다녀온 그라스가 흥분한 표정으로 ‘남북한이 형제인데 왜 그렇게 싸우느냐, 제발 싸우지 말라’고 당부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양파껍질을 벗기며’는 국내에 6월 출간될 예정이다.이유종 pen@donga.com·박훈상 기자 }

역사적인 이란 핵협상 타결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파격적인 양보안을 받아들인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67)이다. 5일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등 주요 외신들은 개혁 성향을 가진 그의 실용적 접근법이 이번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란의 변화는 2013년 8월 온건개혁파로 분류되는 로하니가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민생 우선’과 ‘개혁개방’을 내걸고 당선된 그는 취임 직후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길에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과 통화하고 싶다”는 뜻을 백악관에 전했다. 1979년 친미(親美) 정권이 쫓겨난 뒤 34년 만에 미국-이란 정상 간 통화가 시작된 계기였다. 선진 주요 6개국과 이란 간의 7자 핵 회담은 바로 다음 달인 10월부터 시작됐다. 협상 타결 직후인 3일 로하니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오늘은 이란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날”이라며 “어떤 사람들은 이란이 세계와 맞서 싸우거나 열강에 굴복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런 길들과 다른 제3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협상 타결 소식에 환호했던 수많은 이란 시민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또 한 번 “고마워요, 로하니”라고 적었다. 기존 정치 지도자들이 핵을 선택한 대가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바로 국민들이었다. 10년 이상 계속된 경제 제재로 한때 원유 수출로 넘쳐나던 이란의 외환보유액은 2012년 말 900억 달러(약 98조 원)에서 원유 수출이 대부분 막힌 지금은 700억 달러(약 76조 원)로 떨어졌고, 그나마 가용할 수 있는 액수는 150억 달러(약 16조 원) 미만에 불과하다. 이 금액은 이란이 석 달가량 버틸 수 있는 수입 물량 대금밖에 안 된다. 기업의 국내외 자산이 동결되면서 리알화 가치는 급락했다. 2012년 10월에는 하루 만에 18%나 떨어지기도 했다. 실업률은 2013년 16%, 물가상승률은 42.3%까지 치솟았다. 이에 대해 이란은 북한과 핵·미사일 개발 협력을 강화하면서 맞서 왔다. 이런 상황에서 취임한 로하니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를 국정 최대 과제로 내세우면서 공기업 민영화, 외국인 투자 유치 등 개혁개방 정책을 단행해 왔다. 올 1월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지속 가능한 성장과 고용 창출’ 행사에서 한 개막연설에는 그의 철학이 잘 담겨 있다. “고립돼 있으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없다. 외국인투자가들이 이란에 오면 우리의 자주(independence)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상처 입은 이란 경제가 회생하려면 개방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정치를 위해 경제가 희생해 왔지만 이제 정치가 경제를 위해 희생할 때이다.” 로하니 취임 이후 2012, 2013년 연속 ―5.6%, ―1.7% 성장을 해온 이란은 지난해 1.5% 성장한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추산하고 있다. IMF는 최근 유가 하락세에도 불구하고 이란이 올해도 2.2%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중도 노선을 걷고 있긴 하지만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강공을 펴는 돌파력도 갖고 있다. 핵협상 타결에 비판적인 보수파들이 맹공을 퍼붓자 “국민투표로 묻겠다”고 맞대응하기도 했다. 이란 셈난 주 소르헤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법학박사 학위를 가진 성직자이기도 하지만 외교 협상 경험이 풍부해 ‘외교의 달인’으로도 통한다.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시절 초대 이란 핵 협상단 수석대표(2003∼2005년)를 지내면서 2004년 유엔 제재를 피하려고 우라늄 농축을 한시적으로 중단하는 실용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직자 출신이어서 1대 최고지도자인 호메이니와 함께 혁명주도세력으로 참여했고, 2대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있다. 4일 내각회의에서서는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조언으로 이번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며 협상의 공을 하메네이에게 돌리기도 했다. 이란·이라크전쟁 때는 군 지휘관을 지내기도 했으며 페르시아어를 비롯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아랍어에 능통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란의 많은 젊은이들은 정상적이고 번영된 국가를 바라고 있다”며 “핵협상 이후 불거지는 여러 논쟁에도 불구하고 향후 이란은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서방국가와 더 많은 일을 함께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최창봉 ceric@donga.com·이유종 기자}
연간 한국인 관광객만 25만 명씩 몰리는 터키의 최대 도시 이스탄불에서 연일 테러가 발생하고 있다. 이스탄불 검찰청에 무장 괴한이 침입해 검사를 상대로 인질극이 벌어진 바로 다음 날 터키 경찰이 도심에서 무장 괴한과 총격전을 벌였다. 6월 총선을 앞두고 도심에서 잇따른 테러가 일어나고 정전 사태까지 겹쳐 터키가 큰 사회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1일 이스탄불경찰청 앞에서 무장 괴한 2명이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여성 괴한은 총에 맞아 숨졌고 남성 괴한은 인근 세무서로 도망쳤으나 곧 경찰에 붙잡혔다. 숨진 여성은 장총과 권총, 수류탄 2개를 가지고 있었다. 총격전을 벌이던 경찰 2명도 총에 맞아 부상했다. 이날 집권 정의개발당의 이스탄불 사무실에는 무장 괴한 1명이 침입해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터키 경찰은 이번 총격전이 31일 이스탄불검찰청에서 벌어진 인질극을 주도한 테러 단체 ‘혁명민족해방전선(DHKP-C)’의 소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봤다.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DHKP-C는 이스탄불검찰청에 여성 조직원 2명을 보내 검사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였고 검사는 총에 맞아 숨졌으며 인질범 2명도 사살됐다. 터키와 미국, 유럽연합(EU)은 DHKP-C를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1일 터키 전역에는 대규모 정전도 발생했다. 수도 앙카라와 이스탄불, 이즈미르 등 주요 도시에서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됐고 병원에서는 전기 부족으로 환자가 수술을 받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흐메트 다부토을루 터키 총리는 “우리는 악의 축에 직면해 있다. 총선 전에 혼란을 부추기려는 선동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정전 사태도 테러와 연관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터키 경찰은 이날 남부 안탈리아에서 DHKP-C가 추가 테러를 준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용의자의 집을 급습해 3개 도시에서 20명 이상을 체포했다. 또 이스탄불대 법과대에 검사 인질범과 관련된 포스터를 붙인 혐의로 대학생 36명을 붙잡았다. 테러 단체가 갑작스럽게 활동하는 것은 정정 불안과도 관련이 크다. ‘터키의 푸틴’으로 불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총리와 대통령을 역임하며 2003년부터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다. 그는 2003년부터 11년 동안 총리를 지내다 연임이 불가능해지자 법을 고쳐 지난해 8월 첫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의 장기 독재에 야권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부 구조를 현재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 전환하겠다고 밝혀 야당은 그의 독주를 우려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리려는 극좌 테러 단체가 날뛰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터키의 싱크탱크인 경제외교정책연구센터의 시난 울젠 회장은 “향후 유사한 무장 테러가 이어진다면 총선에 영향을 주려는 선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에 전했다. CNN은 “수년간 이어진 정치 위기 때문에 터키에서 긴장과 혼란이 심화되고 있다”고 보도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31일 이란 핵 협상 타결 시한을 앞두고 미국 등 주요 6개국(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독일·P5+1) 대표들과 이란 대표단이 ‘주고받기식’ 막판 절충을 거듭하고 있다. 양측은 시한 종료 하루 전인 30일 스위스 로잔에서 협상 참가국 외교장관들이 모두 참석하는 전체회의를 열고 남은 쟁점을 집중 논의했다. 전체회의가 열린 것은 24일 최종 협상 라운드가 시작된 이후 처음이다. 그만큼 합의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으로 타결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미국 협상 대표인 존 케리 국무장관은 이번 협상에 집중하기 위해 29일 미국 보스턴에서 열리는 고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추모 기념관 행사 참석 일정을 취소했고, 독일과 프랑스 외교장관도 카자흐스탄 방문 계획을 미루고 협상에 매달렸다. 이란 핵 협상이 타결될 경우 북한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또 국제유가가 추가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서방의 경제 제재로 수출이 제한됐던 이란산 원유가 시장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이란 핵 협상 타결 시 국제 유가가 배럴당 20달러로 추락할 수 있다고 전했다. 서방은 이란의 ‘브레이크아웃타임’을 최소 1년으로 늘리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는 이란이 핵무기 제조를 결심한 시점부터 핵무기 1개 제조에 필요한 핵물질을 확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현재 이란의 브레이크아웃타임은 2, 3개월 수준인 것으로 평가된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이를 위해 서방은 이란에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는 원심분리기 감축 △농축우라늄 재고분 해외 이전 △아라크 중수로 설계 변경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허용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핵심 쟁점 중 하나인 가동 원심분리기 수의 경우 1만 기(이란)와 4000기(미국)가 팽팽하게 맞섰으나 대략적으로 접점을 찾았다. 미국이 6000기 가동을 받아들인 가운데 이란은 현재 6500∼7000기 가동을 희망하고 있다. 중수로는 가동 과정에서 핵물질인 플루토늄이 발생하기 때문에 서방은 이란 중수로를 경수로로 설계를 변경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IAEA 사찰도 관건이다. 서방은 IAEA가 우라늄 채광부터 농축, 핵연료 저장 등 모든 과정과 시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감시하는 내용의 추가 의정서 적용을 이란에 요구하고 있다. 사찰 대상이 일부 시설로 제한되면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이란은 핵 활동 중단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국에 대한 경제 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1979년 주이란 미국대사관 점거 이후 경제 제재가 30년 넘게 지속되면서 이란 경제가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제재를 어느 수준까지, 어느 정도 속도로 완화하느냐도 쟁점이다. 이란은 일괄적·영구적인 즉시 해제를, 반면 서방은 합의 이행을 지켜본 뒤의 단계적 해제를 선호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란 경제에 가장 큰 타격을 주는 에너지 제재와 금융 제재는 핵무기 완전 포기 때까지 해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BBC는 서방과 이란이 몇몇 분야에서 난제를 안고 있지만 ‘타결을 위해 단계적으로 접근한다’는 데에는 합의했다고 미국 측 협상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타결 임박 소식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네타냐후 총리는 29일 내각회의에서 “로잔에서 진행되고 있는 위험한 합의는 우리의 우려를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 나쁜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비난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네팔에서 한국인이 탄 버스가 마주 오던 버스와 충돌해 한국인 5명이 숨지거나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네팔리타임스는 30일 네팔 중부 포카라에서 수도 카트만두로 향하던 버스가 반대 방향에서 오던 버스와 충돌해 한국인 4명이 숨지고 1명이 크게 다쳤다고 밝혔다. 사망자는 60대 남성 2명과 50대 여성 2명이다. 부상자는 60대 남성으로 상태가 매우 위중한 상황이다. 관광객으로 추정되는 한국인들은 포카라에서 렌트한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카트만두 인근 다딩 지역에서 마주 오던 버스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네팔인 차량 운전자도 숨졌으며 버스에 타고 있던 네팔인 승객 10여 명도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사고 당시 도로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운전자는 마주 오는 차량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교부 관계자는 “네팔 주재 한국대사관이 사고를 접수한 뒤 즉시 네팔 당국에 사고 경위 및 한국인 피해 여부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다. 대사관은 부상자가 이송된 병원으로 담당 영사를 파견해 사상자에게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말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예멘 반군 공습에 나섰다가 기체 결함으로 전투기에서 탈출한 사우디아라비아 공군 조종사 2명이 미군의 도움으로 예멘 연안에서 구출됐다. 미 국방부 관계자는 26일 오후 5시20분 조종사 2명의 위치를 확인했으며 인근 지부티에 있던 미군의 헬리콥터와 구축함 스테레트호를 동원해 이들을 구조했다고 미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이 27일 보도했다. 사우디 국영 SPA통신은 예멘 남부 홍해 상공을 비행하던 전투기 1대가 기술적인 결함을 일으켜 조종사 2명이 비상 탈출했다고 28일 보도했다. SPA통신은 미군이 구조를 도왔고 구조된 조종사의 건강상태는 좋다고 덧붙였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사우디 국왕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동 지역 우방과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며 사우디 주도의 예멘 공습을 지지한다고 화답했다. 사우디 등 10개 수니파 아랍 국가는 쿠데타로 예멘의 수도를 장악한 시아파 반군 후티가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대통령이 피신한 남부 도시 아덴까지 위협하자 26일 공습을 개시했다. 후티가 장악한 수도 사나 등의 지역에는 28일 새벽까지 후티의 대공화기 기지 등을 겨냥해 아랍국가들의 폭격이 계속됐다. 후티는 사흘째 이어진 폭격으로 민간인 45명이 숨졌다고 밝혔다.이유종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