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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앞두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조명하는 전시관이 처음으로 문을 연다. 충북도에 따르면 이 공간은 청주시 상당구 미래여성플라자 1층에 들어서며 99m²(약 30평) 규모다. 충북 출신이거나 지역에 연고가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흉상과 활동상을 담은 기록물이 전시될 예정이다. 흉상이 세워지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임수명(1894∼1924) 연미당(1908∼1981) 신순호(1922∼2009) 어윤희(1880∼1961) 윤희순(1860∼1935) 박자혜(1895∼1943) 등 11명이다. 1912년 통의부 군사위원장 신팔균과 결혼한 임수명은 비밀문서 연락을 담당했고 1921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4년 신팔균이 중국 마적과의 전투 중 전사하자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딸과 함께 자결했다. 연미당의 남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핵심 인물로 활동했던 엄항섭이다. 연미당은 1930년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에 가입해 교민 조사 및 여성 단합을 위해 일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애국부인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적선전위원회 등에서 활약했다. 신순호는 독립운동가 신건식의 외동딸이다.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들어가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고, 1940년 창설한 광복군에서 1기 여군으로 복무했다. 개성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된 어윤희는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옥중 만세운동을 벌였다. 전시관에는 청주와 음성, 충주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한 민금봉 민인숙 홍금자 여사의 활동상을 담은 기록물도 소개된다. 충북도 관계자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은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며 “흉상 제작과 전시관 개관이 이들의 활동을 제대로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청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밤에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오직 만세만을 부르는 운동자가 있었다. 이 운동자는 성격이 온순하며 목이 쉬도록 만세를 고창(高唱) 절규(絶叫)하다가 피로해지면 스스로 해산한다. 그 인원도 노인, 어린이 등이 뒤섞여 있어 한 동네 집집마다 1인 또는 2인 정도가 의무적으로 나가는 듯하다. 그래서 시험 삼아 그 집에 가서 물어보면 부인들은 ‘산에 만세 하러 갔소’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일제와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기록된 충북 청주 일대의 횃불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횃불만세운동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20여 일 지난 3월 23일경부터 4월 6일까지 청주 전역에서 계속됐다. 특히 4월 1일에 펼쳐진 횃불만세운동이 절정이었다. 청주 일대 8개 면의 산 위에서 동시에 전개돼 수백 명이 횃불을 밝히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쳐 충북 지역의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조동식 지사의 횃불만세운동 횃불만세운동을 창안한 이는 청주 강내면 태성리에 살던 조동식 지사(1873∼1949)였다. 그는 횃불만세운동을 시작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긴급한 상황을 봉화로 알리는 봉화고변(烽火告變)의 예를 따라 산꼭대기에 횃불을 올려 독립만세를 외치면 독립만세운동의 기세가 발양(發揚)될 것이다.” 횃불만세운동은 그의 주도로 시작된 뒤 충청도의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발전했다. 조동식은 3월 23, 24, 26일에 잇따라 주민들과 산 정상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횃불만세운동은 강내면 각 마을과 옥산과 남이면, 충남과 경기도 일부 지역으로 확산했다. 특히 3월 26, 27일에는 강내면과 충남 연기군의 주민들이 사전에 연락해 동시에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연합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1일에는 청주 중심지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산 위에서 수백 명이 모여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2일에는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했으나 일경들의 감시 강화로 실패하자 오후 10시경 500여 명이 읍내 부근 산 위로 올라가 횃불을 밝혔다. 이달 20일 찾은 조 지사의 묘역에서는 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횃불을 높이 들고 있는 조 지사 동상과 손자 조남기 장군의 흉상이 있다. 조 지사는 횃불만세운동과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비밀출판물을 배포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2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하지만 중국에 두고 온 조남기 장군이 6·25전쟁 당시 중공군 장교로 참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사에 오르지 못했다. 조 지사는 뒤늦게나마 독립운동 업적을 인정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조남기 장군은 중국 현역 군인 최초로 최고 정책자문기구인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지냈고, 1992년 한중 외교 정상화에서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지사 동상에는 일제 법정에서 그가 밝힌 준엄하고 당당한 상고(上告)의 취지가 새겨져 있다. “본인의 금번 행위는 일본 정부가 승인한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고 정의 인도에 기초를 두고 자주 자립을 표시한 고로 세인이 이에 동정하고 이를 처벌한 판사나 인도 정의의 존중을 알고 있는 일본인도 모두 이를 축하하였고, … 포로로서 취급하는 것은 가하나 형벌에 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 번개대장 한봉수 의병장의 활약 청주시 내수읍 일대의 3·1만세운동은 의병장 출신인 한봉수(1884∼1972)가 주도했다. 그는 ‘조선 후기 의병사’에서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의병장이었다. 1907년 의병으로 봉기해 1910년 초까지 30여 회에 걸쳐 일제와 교전을 벌이고 군자금도 모금했다. 특히 그는 번개대장이라고 불릴 만큼 기습과 변장 등을 활용한 유격전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10년 체포돼 ‘내란죄 수범(首犯)’이라는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에 불복하고 항고해 15년형으로 감형을 받은 뒤 옥고를 치르다 일제의 이른바 합방 대사령으로 출옥했다. 이후 그는 고종의 인산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뒤 충북 괴산의 홍명희와 함께 고향 선배인 의암 손병희의 집을 방문했다. 손병희는 이 자리에서 3·1운동 계획을 전하며 각각 귀향해 만세운동을 주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귀향한 한봉수는 기회를 엿보다 4월 1일 세교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한봉수는 이튿날인 2일에도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장터로 나갔다. 그는 식목 행사 때문에 이곳을 지나던 내수보통학교 학생들과 인솔교사 엄익래 이건간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고, 이를 수락한 학생 및 교사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일제에 의해 다시 체포된 그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황경수 청주대 교수는 “아직 논란이 있지만 한봉수 의병장은 4월 시위에 앞서 3월 4일 청주 6거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라며 “선생은 의병 항쟁에서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항일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최대의 만세 시위지 미원 장터 2016년 기준으로 청주 출신 독립유공자는 94명이다. 이 가운데 3·1운동 참여자는 34명으로 36%에 달한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간행한 ‘한일관계사료집’과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청주에서 7차례에 걸쳐 5000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이 가운데 20명이 체포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황 교수는 “시위 현장에서 일제와 직접 충돌한 전국 평균 비율이 37%인데 충북은 55%로 전국 최고 수준”이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충북의 지역정서가 점잖은 양반 분위기였지만 의병과 3·1운동 등을 통해 드러난 항일 의식은 매우 뜨거웠다”고 소개했다. 청주시의 3·1공원은 이 같은 충북지역의 불타올랐던 독립운동 열기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충북의 독립유공자 513명의 이름이 적힌 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민족대표 5인의 동상이 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북 출신이었던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의 동상이다. 당초 정춘수의 동상도 있었으나 시민단체가 친일 행적을 이유로 철거해 없어졌고, 그 자리에 횃불 조형물이 대신 자리 잡고 있다. 1919년 3월 30일 미원 장터에서 1500여 명의 군중이 벌인 만세운동은 청주지역 최대 규모이자 가장 격렬한 시위였다. 일제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정도였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이수란 이용실 신경구 등이었다. 신경구는 장터 김태복 집에서 이용실을 만나 이용실의 담뱃대를 신봉휴가 만든 태극기의 깃대로 삼아 시장으로 나갔다. 그는 시장 네거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호응한 군중이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일제 헌병이 출동해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했지만 군중은 더욱 격렬하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헌병들은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인 신경구를 체포해 주재소로 연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군중은 “주재소를 파괴하라” “신경구를 석방하라”고 소리치며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정문 기둥과 담장을 부쉈다. 당황한 헌병들은 군중을 향해 마구잡이로 사격을 가했고, 그 자리에서 장일환이 순국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미원의 독립만세운동은 이 같은 폭압적인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흘간 계속됐다. 청주의 만세운동은 면서기들까지 나섰다. 4월 1일 오후 8시경 북이면 신기리 주민들은 면서기 김호상의 주도 아래 근처 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동료 면서기였던 김정환 이시우 장성이 등도 김호상의 권유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주민들과 만세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이 과정에서 김호상은 일제에 체포돼 1년형의 옥고를 치렀고, 김정환 등은 90대의 태형 처벌을 받았다.청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밤에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오직 만세만을 부르는 운동자가 있었다. 이 운동자는 성격이 온순하며 목이 쉬도록 만세를 고창(高唱) 절규(絶叫)하다가 피로해지면 스스로 해산한다. 그 인원도 노인, 어린이 등이 뒤섞여 있어 한 동네 집집마다 1인 또는 2인 정도가 의무적으로 나가는 듯하다. 그래서 시험 삼아 그 집에 가서 물어보면 부인들은 ‘산에 만세 하러 갔소’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일제와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기록된 충북 청주 일대의 횃불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횃불만세운동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20여 일 지난 3월 23일경부터 4월 6일까지 청주 전역에서 계속됐다. 특히 4월 1일에 펼쳐진 횃불만세운동이 절정이었다. 청주 일대 8개 면의 산 위에서 동시에 전개돼 수백 명이 횃불을 밝히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쳐 충북 지역의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조동식 지사의 횃불만세운동 횃불만세운동을 창안한 이는 청주 강내면 태성리에 살던 조동식 지사(1873~1949)였다. 그는 횃불만세운동을 시작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긴급한 상황을 봉화로 알리는 봉화고변(烽火告變)의 예를 따라 산꼭대기에 횃불을 올려 독립만세를 외치면 독립만세운동의 기세가 발양(發揚)될 것이다.” 횃불만세운동은 그의 주도로 시작된 뒤 충청도의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발전했다. 조동식은 3월 23, 24, 26일에 잇따라 주민들과 산 정상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횃불만세운동은 강내면 각 마을과 옥산과 남이면, 충남과 경기도 일부 지역으로 확산됐다. 특히 3월 26, 27일에는 강내면과 충남 연기군의 주민들이 사전에 연락해 동시에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연합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1일에는 청주 중심지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산 위에서 수백 명이 모여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2일에는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했으나 일경들의 감시 강화로 실패하자 오후 10시경 500여 명이 읍내 부근 산 위로 올라가 횃불을 밝혔다. 이달 20일 찾은 조 지사의 묘역에서는 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횃불을 높이 들고 있는 조 지사 동상과 손자 조남기 장군의 흉상이 있다. 조 지사는 횃불만세운동과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비밀출판물을 배포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2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하지만 중국에 두고 온 조남기 장군이 6·25전쟁 당시 중공군 장교로 참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사에 오르지 못했다. 조 지사는 뒤늦게나마 독립운동 업적을 인정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조남기 장군은 중국 현역 군인 최초로 최고 정책자문기구인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지냈고, 1992년 한중 외교 정상화에서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지사 동상에는 일제 법정에서 그가 밝힌 준엄하고 당당한 상고(上告)의 취지가 새겨져 있다. “본인의 금번 행위는 일본 정부가 승인한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고 정의 인도에 기초를 두고 자주 자립을 표시한 고로 세인이 이에 동정하고 이를 처벌한 판사나 인도 정의의 존중을 알고 있는 일본인도 모두 이를 축하하였고, …(중략)… 포로로서 취급하는 것은 가하나 형벌에 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번개대장 한봉수 의병장의 활약 청주시 내수읍 일대의 3·1만세운동은 의병장 출신인 한봉수 의병장(1884~1972)이 주도했다. 그는 ‘조선 후기 의병사’에서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의병장이었다. 1907년 의병으로 봉기해 1910년 초까지 30여 회에 걸쳐 일제와 교전을 벌이고 군자금도 모금했다. 특히 그는 번개대장이라고 불릴 만큼 기습과 변장 등을 활용한 유격전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10년 체포돼 ‘내란죄 수범(首犯)’이라는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에 불복하고 항고해 15년형으로 감형을 받은 뒤 옥고를 치르다 일제의 이른바 합방 대사령으로 출옥했다. 이후 그는 고종의 인산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뒤 충북 괴산의 홍명희와 함께 고향 선배인 의암 손병희의 집을 방문했다. 손병희는 이 자리에서 3·1운동 계획을 전하며 각각 귀향해 만세운동을 주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귀향한 한봉수는 기회를 엿보다 4월 1일 세교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한봉수는 이튿날인 2일에도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장터로 나갔다. 그는 식목 행사 때문에 이곳을 지나던 내수보통학교 학생들과 인솔교사 엄익래 이건간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고, 이를 수락한 학생·교사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일제에 의해 다시 체포된 그는 보안법 위반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황경수 청주대 교수는 “아직 논란이 있지만 한봉수 의병장은 4월 시위에 앞서 3월 4일 청주 6거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라며 “선생은 의병 항쟁에서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항일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최대의 만세 시위지 미원 장터 2016년 기준으로 청주 출신 독립유공자는 94명이다. 이 가운데 3·1운동 참여자는 34명으로 36%에 달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간행한 ‘한일관계사료집’과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청주에서 7차례에 걸쳐 5000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이 가운데 20명이 체포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황 교수는 “시위 현장에서 일제와 직접 충돌한 전국 평균 비율이 37%인데 충북은 55%로 전국 최고 수준”이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충북의 지역정서가 점잖은 양반 분위기였지만 의병과 3·1운동 등을 통해 드러난 항일 의식은 매우 뜨거웠다”고 소개했다. 청주시의 3·1공원은 이 같은 충북지역의 불타올랐던 독립운동 열기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충북의 독립유공자 513명의 이름이 적힌 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민족대표 5인의 동상이 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북 출신이었던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의 동상이다. 당초 정춘수의 동상도 있었으나 시민단체가 친일 행적을 이유로 철거해 없어졌고, 그 자리에 횃불 조형물이 대신 자리 잡고 있다. 1919년 3월 30일 미원 장터에서 1500여 명의 군중이 벌인 만세운동은 청주지역 최대 규모이자 가장 격렬한 시위였다. 일제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정도였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이수란 이용실 신경구 등이었다. 신경구는 장터 김태복 집에서 이용실을 만나 이용실의 담뱃대로 신봉휴가 만든 태극기의 깃발을 만들고 시장으로 나갔다. 그는 시장 네거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호응한 군중들이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일제 헌병이 출동해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했지만 군중들은 더욱 격렬하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헌병들은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인 신경구를 체포해 주재소로 연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군중들은 “주재소를 파괴하라” “신경구를 석방하라”고 소리치며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정문 기둥과 담장을 부쉈다. 당황한 헌병들은 군중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사격을 가했고, 그 자리에서 장일환이 순국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미원의 독립만세운동은 이 같은 폭압적인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흘간 계속됐다. 청주의 만세운동은 면서기들까지 나섰다. 4월 1일 오후 8시경 북이면 신기리 주민들은 면서기 김호상의 주도 아래 근처 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동료 면서기였던 김정환 이시우 장성이 등도 김호상의 권유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주민들과 만세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이 과정에서 김호상은 일제에 체포돼 1년형의 옥고를 치렀고, 김정환 등은 90대의 태형 처벌을 받았다. 청주=김갑식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1990년대 초반 천주교청주교구 연수본당 신부였던 그는 목에 통증이 있어 병원을 찾았다. 목에서 폴립이 발견됐다. 악성은 아닌데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본당 사목이 어려웠다. 산속에서 농사짓고 기도하며 살겠다는 청을 교구에 넣었다. 1999년 그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귀농 사목자’가 됐다. 20일 충북 괴산군 연풍면 희양산 자락의 은티마을에 터를 잡고 있는 연제식 신부(72)를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20여 년간 텃밭 농사를 하며 그림 그리고 작곡하며 살아가는 도인(道人) 같은 신부다.》 ―귀농사목은 처음 들었다. “신부니까 귀농에 사목(司牧)이란 말을 붙여준 거지(웃음). 첫 사례였는데 지금도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당시 교구장이 소신학교 은사이던 정진석 추기경이다. 추기경께서 ‘1999년 2월이면 자네를 해방시켜 준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켜 주셨다.” ―지금 목 상태는 어떤가. “지금 말하고 있으니 좋아진 것 아닌가. 그래도 조심하려고 애쓴다. 목에 이상이 생긴 것도 묵언(默言) 수행하라는 하느님의 은총 아닌가 싶다. 화가 나도 참아야 하니까.” ―수염 때문에 도인 소리는 안 듣나. “도인 같다, 스님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 고향인 충북 음성의 감곡성당을 세운 프랑스 출신의 임 가밀로 신부(1869∼1947)와 인연이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젖이 나오지 않자 임 신부님이 소젖을 짜서 내게 줬다고 한다. 훗날 그분을 닮을 게 뭐 있나 생각해 보니 수염이었다.(웃음) 면도 안 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지금도 낯선데 1981년 파푸아뉴기니에서 5년간 선교를 자원했다. “동창 신부가 소신학교 때 마음가짐으로 한번 가보자고 하더라. 그런데 그때 ‘연 신부, 봉고차 맘 있으면 한번 타라’ 하는 예수님 말씀이 느껴지더라. 그래서 고민 없이 갔다.” 대장장이 아버지와 수녀의 꿈을 지녔던 어머니 사이에서 그의 삶은 신앙과 예술로 이어졌다. 신부의 길은 자연스러운 외길이었다. 9남매 중 4명이 수녀가 됐다. 작곡은 광주가톨릭대, 동양화는 홍익대 대학원에서 배웠다. 2011년부터 최양업 김대건 신부, 성 프란치스코, 안중근 의사 등의 삶을 주제로 한 성악곡인 칸타타를 매년 무대에 올렸다. 올해 1월에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를 기념하는 추모 칸타타 ‘거룩한 바보’를 공연했다. 산수화를 그린 20여 차례의 개인전도 가졌다. ―향후 공연과 전시 일정은…? “올해 9월 서울 명동대성당 지하 ‘갤러리 1898’에서 실경 산수화를 그린 전시회를 연다. 내년 1월에는 충주문화회관에서 감곡성당과 임 가밀로 신부님을 주제로 한 칸타타를 무대에 올린다.” ―성화(聖畵)는 그리지 않나. “하느님을 그리고 싶었는데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런데 산을 보니까 모든 중생을 말없이 품어주는 하느님 모습이더라. 내게는 산이 성화인 셈이다.” ―말씀 중 불교 용어가 자주 나온다. “여기로 오면서 전국 사찰을 돌며 불교 공부도 하고, 가깝게 있는 정토수련원 법륜 스님의 말씀도 들었다. 부처님오신날 때에는 정토수련원 가서 예불도 드리고, 반대로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곳 행자들이 이곳에서 미사도 드린다.” ―세상에는 종교 간 갈등이 적지 않다. “등산에 많이 비유하지만, 오를 때는 길이 하나밖에 없는 듯하지만 정상에 서면 여러 길이 보인다. 자기 안의 갈등이 없으면 종교 갈등도 없다. 사랑의 신 하느님, 자비의 부처님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염원은 다를 게 없다.”괴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여기는 평양입니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아, 스님 평양 실황이군요.” 경기 부천시 석왕사에서 15일 만난 영담 스님은 평양 보통강여관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지인들과 주고받은 대화와 사진을 보여줬다. 스님은 불교계의 대표적인 북한 전문가다. 2003년 이후 남북교류 협의를 위해 30여 차례나 방북했고 지난해 11월에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 자격으로 북한을 찾았다. 국제구호단체 하얀코끼리 이사장인 스님은 1월 미얀마 현지에서 봉사활동을 펼쳤고, 태국에서는 아쇼카재단이 주최한 시상식에서 해외 봉사상을 받았다. ―방북 결과를 소개해 달라.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던 2014년 윤이상음악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음악회에 초대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교류 길이 막혀 4년 만에 방북했다. 지난해 3박 4일 일정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두 차례 찾았다는 정성제약, 평양의 교원대 등을 둘러봤다.” ―북측과의 협의 내용은 무엇인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에서 아이들을 위한 심장병원과 축산, 문화교류를 중심으로 일을 같이하자고 해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지만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북-미 회담 같은 큰 물줄기가 불확실해서인지 그쪽도 내부적으로 정리가 안 된 분위기였다. 하지만 개방과 변화에 대한 의지는 피부로 느껴졌다. 이전에는 공항에 내리면 휴대전화 이용이 불가능했는데 이번에는 호텔 로비에서 SNS 메신저와 통화가 됐다.” ―베트남 하노이 회담 이후 북-미 관계를 예측하기 어렵다. “답답한 상황이다. 하지만 미국과 북한 모두 이 판을 깨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평화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지혜롭게 대처하길 바란다.” ―남북 교류를 위한 조언을 듣고 싶다. “정치적 색채가 없는 민간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 북측이 싫어하는 말이 ‘인도적 지원’이다. 용어부터 ‘협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문화재 복원 등을 중심으로 한 문화 교류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부천 석왕사의 유래가 되는 금강산 부근의 석왕사 복원을 돕고 싶다.” 영담 스님은 1995년 이주노동자 돕기를 시작으로 다문화 가정 지원, 동남아 지역 어린이 돕기, 대북 지원 등 20여 년간 자비를 실천해 왔다. 석왕사는 매년 부처님오신날 무렵 대규모 다문화 축제를 열어 지역 내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을 위한 센터로 자리 잡았다. ―2005년 이후 매년 미얀마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에는 이사장을 맡고 있는 영남학원 관계자들과 5박 6일 일정으로 양곤과 바고 지역의 고아원과 학교를 찾았다. 기본적인 지원은 계속하겠지만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생활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단체 이름을 하얀코끼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코끼리는 불교에서는 신성한 동물이다. 하얀색은 투명성, 긴 코는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적인 전문성, 큰 귀는 지구촌 곳곳의 소리를 듣는 것, 네 다리는 뚜벅뚜벅 듬직하게 찾아가 믿음을 주고 싶다는 의미를 담았다.” ―경전 중 좋아하는 구절이 궁금하다. “신라시대 부설 거사의 열반송이 마음에 와 닿는다.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 이무소청절시비(耳無所聽絶是非)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 단간심불자귀의(但看心佛自歸依)’라고 했다. 본 것은 본 자리에서 잊고 들은 것은 들은 자리에서 잊으면, 모든 시비가 끊어지니 단지 마음속의 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하라는 의미다.”부천=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여기는 평양입니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아, 스님 평양 실황이군요.” 경기 부천시 석왕사에서 15일 만난 영담 스님은 평양 보통강여관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지인들과 주고받은 대화와 사진을 보여줬다. 스님은 불교계의 대표적인 북한 전문가다. 2003년 이후 남북교류 협의를 위해 30여 차례나 방북했고 지난해 11월에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 자격으로 북한을 찾았다. 국제구호단체 하얀코끼리 이사장인 스님은 1월 미얀마 현지에서 봉사활동을 펼쳤고, 태국에서는 아쇼카 재단이 주최한 시상식에서 해외 봉사상을 받았다. ―방북 결과를 소개해 달라.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던 2014년 윤이상음악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음악회에 초대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교류길이 막혀 4년 만에 방북했다. 지난해 3박 4일 일정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두 차례 찾았다는 정성제약, 평양의 교원대 등을 둘러봤다.” ―북측과의 협의 내용은 무엇인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에서 아이들을 위한 심장병원과 축산, 문화교류를 중심으로 일을 같이 하자고 해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지만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북미 회담 같은 큰 물줄기가 불확실해서인지 그쪽도 내부적으로 정리가 안 된 분위기였다. 하지만 개방과 변화에 대한 의지는 피부로 느껴졌다. 이전에는 공항에 내리면 휴대전화 이용이 불가능했는데 이번에는 호텔 로비에서 SNS 메신저와 통화가 됐다.”―베트남 하노이 회담 이후 북미 관계를 예측하기 어렵다. “답답한 상황이다. 하지만 미국과 북한 모두 이 판을 깨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평화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지혜롭게 대처하길 바란다.”―남북 교류를 위한 조언을 듣고 싶다. “정치적 색채가 없는 민간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 북측이 싫어하는 말이 ‘인도적 지원’이다. 용어부터 ‘협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문화재 복원 등을 중심으로 한 문화 교류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부천 석왕사의 유래가 되는 금강산 부근의 석왕사 복원을 돕고 싶다.” 영담 스님은 1995년 이주노동자 돕기를 시작으로 다문화 가정 지원, 동남아 지역 어린이 돕기, 대북 지원 등 20여 년 간 자비를 실천해 왔다. 석왕사는 매년 부처님오신날 무렵 대규모 다문화 축제를 열어 지역 내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을 위한 센터로 자리 잡았다.―2005년 이후 매년 미얀마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에는 이사장을 맡고 있는 영남학원 관계자들과 5박 6일 일정으로 양곤과 바고 지역의 고아원과 학교를 찾았다. 기본적인 지원은 계속하겠지만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생활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단체 이름을 하얀코끼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코끼리는 불교에서는 신성한 동물이다. 하얀색은 투명성, 긴 코는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적인 전문성, 큰 귀는 지구촌 곳곳의 소리를 듣는 것, 네 다리는 뚜벅뚜벅 듬직하게 찾아가 믿음을 주고 싶다는 의미를 담았다.”―경전 중 좋아하는 구절이 궁금하다. “신라시대 부설 거사의 열반송이 마음에 와 닿는다.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 이청무성절시비(耳聽無聲絶是非)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 단간심불자귀의(但看心佛自歸依)’라고 했다. 본 것은 본 자리에서 잊고 들은 것은 들은 자리에서 잊으면, 모든 시비가 끊어지니 단지 마음속의 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하라는 의미다.” 부천=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당신은 왜 목숨 걸고 만세를 부릅니까?” “나라를 빼앗겨 보았습니까. 코와 귀가 잘려 나가고 손톱이 빠져도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나라를 잃은 고통은 잊을 수 없습니다. 유일한 슬픔이라면 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공연된 뮤지컬 ‘페치카’의 대사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안중근 의사에게 총을 건넨 사나이, 안 의사가 끝까지 지킨 그의 이름은 최재형(1858∼1920)이다. 이 작품은 연해주(프리모르스키) 독립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최재형의 일대기를 다뤘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그를 페치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러시아 이름 표트르의 애칭이기도 했지만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의 페치카에 그의 따뜻한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올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을 취재하면서 최재형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 뮤지컬이 공연됐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다음 달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순국 100주년 추모위원회 출범식 및 강연회’가 열린다. 이 행사는 한민족평화나눔재단,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공동으로 주최한다. 8월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되는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도 예정돼 있다. 행사와 관련한 이들과 통화하면서 공통적으로 들은 얘기는 “부끄럽다”, “안중근을 찾다 보면 최재형을 만난다”는 것이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인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의 말은 이렇다. “2014년 연해주에 갔을 때 선교사 안내로 최재형 선생과 연관된 유적지를 처음으로 돌아봤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만 알았지, 솔직히 그를 있게 한 최재형을 몰랐다. 돌아와 연구하면서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만났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출간한 문영숙 기념사업회 이사장도 2012년 연해주 여행 중 최재형의 흔적을 접하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선생에 대한 수식어는 열 손가락을 꼽아도 부족하다”며 “그는 기업가, 교육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라고 했다. 향후 구성될 추모위원회 홍보대사를 맡는 탁구감독 현정화 씨는 최근 ‘나의 독립영웅’이란 동영상을 통해 최재형을 소개했다. 그는 최재형을 ‘동토에 독립의 뜨거운 불꽃을 태운 페치카’라고 표현했다.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어린 시절 가족과 연해주로 이주한 그는 굶주림과 학대에 못 이겨 가출한 뒤 항구에서 실신한 상태로 러시아 선장 부부에게 구조됐다. 11세 때부터 6년 동안 선장의 배를 타고 견습선원으로 두 번의 세계일주를 하면서 글로벌 청년으로 환골탈태했다. 17세 때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그는 유창한 러시아어를 무기로 군납 사업을 벌여 부호가 됐고, 이내 러시아 한인들의 대변자가 됐다. 그의 재산은 독립운동을 비롯해 30여 개의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교육 사업에 아낌없이 투자됐다. 그는 항일 의병조직 동의회, 한인 신문 대동공보, 한인 실업인 모임으로 위장한 항일단체 권업회를 이끌었다. 특히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함께 계획하고 지원했다. 그러나 최재형은 1920년 ‘4월 참변’ 때 일본군에게 체포돼 순국했다. 연해주 지역 일본인들이 러시아 적군(赤軍)에 의해 목숨을 잃자 일제가 이에 대한 분풀이로 무고한 조선인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됐지만 그가 주목받은 건 최근의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삶이 독립운동뿐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조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천에 위치한 스프링제조사인 ㈜서일의 채양묵 회장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롤모델”이라며 “목표가 있다면 최재형 선생의 흉상을 본떠 전경련 건물 로비에 놓고 싶은 소망이 있다. 기업하는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한다는 간절한 마음가짐으로 기업을 이끌기 바란다”고 말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시 북쪽 외곽 소비에트스카야 언덕은 최재형이 일제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곳이다. 당시 잔혹했던 역사를 알려주는 기념비나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우수리스크 시내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볼로다르스카야 거리 38번지는 최재형이 마지막까지 거주한 곳이다. 한때 러시아인 소유로 넘어갔지만 최근 재외동포재단 지원으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구입해 최재형 기념관으로 재단장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최재형의 손자 최발렌틴 씨(81)를 초청해 대한민국 국적 증서를 수여한 바 있다. 2020년 순국 100주기를 앞두고 그의 삶을 다룬 영화 제작도 추진된다고 한다. 최재형은 뒤늦게라도 부끄러운 이들이 힘을 모아 밝혀야 하는 별이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dunanworld@donga.com}

‘현북면사무소 일부 관리들의 만류로 옥신각신하다가 그 계획을 변경하여 기사문리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하고 약 천 명의 군중이 관고개(關峴) 길을 따라 넘어 선두는 이미 기사문리 주재소 앞에서 왜경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천지가 진동하는 만세를 연호하고 있었다. 이때 언덕 밑 계곡 숲속에서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제 수비대와 경찰이 무차별 발포하여 현장에서 9명이 피살되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당하였으니 그 참상은 천인이 공노할 만행이었다.’ 7일 찾은 강원 양양군 ‘만세고개’ 한쪽에 서 있는 비에 적힌 글의 일부다. 양양군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위의 현장 만세고개에 유적비를 세웠다. 태극기를 새긴 타원형의 주비(主碑)에는 만세를 부르는 주민들의 군상이 조각돼 있다. 왼쪽 비에는 만세고개의 유래, 오른쪽 비에는 당시 상황과 희생된 애국지사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9명의 피로 만들어진 만세고개이 시위는 양양군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양양의 기미만세운동은 4월 4일 양양의 장날부터 결행돼 남녀노소 종파 신분의 구별 없이 일심동체가 되어 진행됐고, 요원의 불길처럼 각 면으로 확산됐다. 4월 9일 현북면에서도 궐기대회가 끝난 후 양양읍 장마당에서 군중과 장꾼들이 합세해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었다. 유학자 박원병 형제와 감리교회 청년 오세옥 이응렬 등이 손을 잡고 면내의 유지 임병익 오정현과 합세했고, 각 마을의 구장(이장)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이날 각 마을 구장들의 인솔하에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 1000여 명의 시위대는 소리 높이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에 있는 주재소로 향했다. 일제는 현북면 일대의 치열했던 당시의 시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4월 9일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주재소를 습격한 폭민(暴民)은 면장을 협박하기를 심히 하여 면장은 부득이 일시 사무를 중지하고 피난 중이다.’ 미리 시위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은 언덕에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다 일제히 발포했다. 사망자 9명, 부상자가 20여 명이 발생하고 시위 현장은 피바다가 됐다. 전원거 임병익 홍필삼 고대선 황응상 김석희 문종상 진원팔 이학봉 등이 희생됐다. 현재 만세고개에는 도로가 생기는 등 변화가 커 옛 흔적을 찾기 어렵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의 느낌만 남아 있다. 양양군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범위를 넓혀도 규모나 내용에서 3·1운동이 전개된 지역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양양군에 따르면 4월 4일을 시작으로 9일까지 6일 동안 1만5000명이 넘게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군 인구는 3만6000명으로 추산된다. “시위 때 집집마다 한 사람은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세운동의 열기가 뜨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13명의 사망자,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체포자는 부지기수였다. 특히 4월 5일 대포항 만세시위에는 1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하자 경찰이 완전히 굴복하고 사죄했고, 군중은 다음 날 양양읍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해산했을 정도다. 또 4월 6일 시위대가 제지하는 군대를 밀어내고 읍내 경찰서로 몰려가자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테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해 군중이 만세시위만 벌이고 저녁때 돌아가기도 했다.○ 유림의 이석범과 기독교(개신교)의 조화벽양양은 동학농민운동 때 반(反)동학군이 결성될 정도로 유림의 영향력이 강하고 보수적인 곳이었다. 보수적인 이곳에 1906년 남궁억이 군수로 있으면서 현산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학생 수가 200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히 발전했다. 신문화 바람과 함께 양양읍 성내리와 강현면 물치리, 현북면 상광정리에 교회가 들어왔다. 그중 양양 감리교회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등 큰 역할을 한 조화벽(1895∼1975)의 아버지 조영순 전도사가 이끌던 교회로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개화 바람이 커지자 반동학군을 주도했던 이석범(1859∼1932)은 쌍천학교를 세워 유교적 사상과 문화를 지키고자 했다. 이처럼 양양은 유교와 기독교 세력으로 나뉘었으나 나라를 되찾자는 대의에 하나로 뭉쳤다. 두 세력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했던 것이 현산학교와 쌍천학교, 양양보통학교의 초기 졸업생들이었다. 이석범은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장례)에 참례하고 돌아올 때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뒤 거사를 추진했다. 그는 아들 이능렬과 김영경 장세환 등 쌍천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요 임무를 맡겼다. 이석범은 문중의 큰 부자였던 이교완의 집을 본거지 삼아 최인식 등 30세 전후의 청장년층을 모았다. 3월 말경 조화벽은 개성에서 돌아올 때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숨겨 왔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다니던 그는 기숙사생으로 구성된 비밀결사대원으로 활동하다 일제의 휴교 조치로 고향으로 향했다. 이 선언서는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교회 청년 김필선에게 전해졌다. 김필선은 같은 양양보통학교 졸업생이자 교우(敎友)들인 김재구 김규용 김계호 등을 모았다. 이들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교회 인근 상여 보관처에 숨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최인식과 연락이 닿아 합동으로 거사를 추진하게 됐다. 하지만 4월 3일 일본 관헌들이 급습해 태극기를 만들던 사람들과 총지휘자 이석범을 비롯한 22명을 체포했다. 체포를 피한 최인식 김필선 등은 거처를 옮겨 밤새 준비했고, 4월 4일 계획대로 큰 시위가 벌어졌다. 조화벽은 훗날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과 부부의 연을 맺었고, 항일 독립운동으로 구금과 석방을 되풀이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한다. 1932년 양양으로 돌아온 조화벽은 정명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헌신한다. 이 학교는 일제 탄압으로 1944년 폐교되기 전까지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철수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소장은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림과 기독교 세력은 정서적으로 물과 기름의 관계일 수도 있었지만, 국권 회복을 위해 그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로 뭉쳤다”며 “청년 그룹이 두 세력을 연결하며 핵심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지도자 그룹이 대거 검거되면 운동이 지리멸렬해지기 쉽지만 양양의 만세운동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 소장은 이에 대해 “양양은 지금의 서울보다 큰 면적이기 때문에 연락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군에 걸쳐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진 것은 유림을 앞세워 구장까지 가담시킨 치밀한 조직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함홍기 열사, 서장에게 화로를 던지려다 순국4월 4일은 양양 장날이었다. 양양읍에 들어오는 통로 5개를 따라 인근 각지에서 만세 군중과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들에 나가 있던 농부들도 모여들었다. 점심때에 이르러 만세 군중은 더욱 불어났고, 특히 경찰서와 군청 주변은 물론이고 뒷산에도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은 경찰서와 군청을 에워싸고 임천리에서 체포한 22명을 비롯한 감금자를 석방하고 일본 관헌은 자기 나라로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몇 사람은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손양면 가평리 구장 함홍기는 일본 경찰서장에게 화로를 들어 던지려다 일본 경찰 두 명에게 양팔이 잘린 후 목을 찔려 죽었다. 그의 시신은 경찰서 내 복도에 가마니에 덮여 있다가 10여 일 뒤 가족에게 인계됐다. 마을 주민이 모인 뒤 장례를 치렀으나 일본 경찰은 동네 주민이 모여 울었다는 이유로 하관 직후 파헤치고 관을 깨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양양의 만세운동에는 유림과 기독교 세력뿐 아니라 천도교와 불교도 만세운동에 가세했다. 일제의 기록과 당시 증언 등에 따르면 4월 7일 오후 2시 반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약 3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개시하여 양양읍내에 들어오자 일제 경찰은 주모자 4명을 체포했고, 시위대는 해산됐다. 낙산사 승려들도 이날 오후 7시 바라 소리와 더불어 전 승려들이 등불을 들고 만세운동을 펼쳤다.양양=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조화벽 지사가 활동한 곳으로 유명한 양양 감리교회는 기독교계에서 민족구국제단을 표방하는 대표적 교회다. 7일 방문한 이 교회 입구 표지석에는 ‘이곳은 1901년 10월 5일 하디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로서 한국의 초대교회를 계승한 민족구국제단이며 1919년 양양 만세운동의 발상지입니다’라고 새겨져 있다. 설립 당시 이곳은 강원도 최초의 교회였다. 70m²(약 20평) 남짓한 기와집으로 시작했다 여러 번 개축을 거쳐 2011년 지금의 6층 교회건물이 들어섰다. 내부에서는 이 교회가 겪어 온 역사를 엿볼 수 있다. 1층에는 조화벽 기도실, 2층에는 3·1운동 당시 담임 목사의 이름을 딴 김영학홀, 3층에는 본당인 하디 예배실이 있다. 황해도 금천군 출신의 김영학 목사(1877∼1932)는 교인,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문서에서는 그에 대해 ‘민족절대독립주의, 배일사상을 지닌 자’로 규정하고 있다. 1922년 출감한 그는 연해주 선교사역에 나서지만 1930년 러시아 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로 체포됐다. 신앙을 버리라는 배교(背敎)를 거부하던 그는 1932년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 중 사망했다. 송정근 목사(1895∼1950)는 1926∼1929년 담임 목사로 재직 중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다 고난을 당하고, 친일 행위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사직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1945년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한 그는 공산당 반대에도 1946년 교파 연합의 3·1절 기념행사를 주도했고, 6·25전쟁 와중에 공산군에 의해 순교했다. 이 교회 이재풍 장로는 “본당 제대 앞에는 옛 교회당의 돌들을 가져다 놓았다”라며 “교회가 신앙뿐 아니라 구국을 위한 제단이었음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양양=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현북면사무소 일부 관리들의 만류로 옥신각신하다가 그 계획을 변경하여 기사문리 주재소를 공격키로 하고 약 천 명의 군중이 관고개(關峴) 길을 따라 넘어 선두는 이미 기사문리 주재소 앞에서 왜경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천지가 진동하는 만세를 연호하고 있었다. 이때 언덕 밑 계곡 숲 속에서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제 수비대와 경찰이 무차별 발포하여 현장에서 9명이 피살되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당하였으니 그 참상은 천인이 공노할 만행이었다.’ 7일 찾은 강원 양양군 ‘만세고개’ 한쪽에 서 있는 비에 적힌 글의 일부다. 양양군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위의 현장 만세고개에 유적비를 세웠다. 태극기를 새긴 타원형의 주비(主碑)에는 만세를 부르는 주민들의 군상이 조각돼 있다. 왼쪽 비에는 만세고개 유래, 오른쪽 비에는 당시 상황과 희생된 애국지사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9명의 피로 만들어진 만세고개 이 시위는 양양군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양양의 기미만세운동은 4월 4일 양양의 장날부터 결행돼 남녀노소 종파신분의 구별 없이 일심동체가 되어 진행됐고, 요원의 불길처럼 각 면으로 확산됐다. 4월 9일 현북면에서도 궐기대회가 끝난 후 양양읍 장마당에서 군중과 장꾼들이 합세해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었다. 유학자 박원병 형제와 감리교회 청년 오세옥 이응렬 등이 손을 잡고 면내의 유지 임병익 오정현과 합세했고, 각 마을의 구장(이장)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이날 각 마을 구장들이 인솔해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 1000여 명의 시위대는 소리 높이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에 있는 주재소로 향했다. 일제는 현북면 일대의 치열했던 당시의 시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4월 9일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주재소를 습격한 폭민(暴民)은 면장을 협박하기를 심히 하여 면장은 부득이 일시 사무를 중지하고 피난 중이다.’ 미리 시위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은 언덕에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다 일제히 발포했다. 사망자 9명, 부상자가 20여 명이 발생하고 시위 현장은 피바다가 됐다. 전원거 임병익 홍필삼 고대선 황응상 김석희 문종상 진원팔 이학봉 등이 희생됐다. 현재 만세고개에는 도로가 생기는 등 변화가 커 옛 흔적을 찾기 어렵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의 느낌만 남아 있다. 양양군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범위를 넓혀도 규모나 내용에서 3·1운동이 전개된 지역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양양 군에 따르면 4월 4일을 첫 시작으로 9일까지 6일 동안 1만 5000명이 넘게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군 인구는 3만 6000명으로 추산된다. “시위 때 집집마다 한 사람은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세운동의 열기가 뜨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13명의 사망자,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체포자는 부지기수였다. 특히 4월 5일 대포항 만세시위에는 1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하자 경찰이 완전히 굴복하고 사죄했고, 군중은 다음날 양양읍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해산했을 정도다. 또 4월 6일 시위대가 제지하는 군대를 밀어내고 읍내 경찰서로 몰려가자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테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해 군중이 만세시위만 벌이고 저녁 때 돌아가기도 했다.● 유림의 이석범과 기독교(개신교)의 조화벽 양양은 동학농민운동 때 반(反)동학군이 결성될 정도로 유림 영향력이 강하고 보수적인 곳이엇다. 보수적인 이곳에 1906년 남궁억이 군수로 있으면서 현산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학생수가 200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히 발전했다. 신문화 바람과 함께 양양면 성내리와 강현면 물치리, 현북면 상광정리에 교회가 들어왔다. 그중 양양 감리교회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등 큰 역할을 한 조화벽(1895~1975)의 아버지 조영순 전도사가 이끌던 교회로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개화 바람이 커지자 반 동학군을 주도했던 이석범(1859~1932)은 쌍천학교를 세워 유교적 사상과 문화를 지키고자 했다. 이처럼 양양은 유교와 기독교 세력으로 나뉘었으나 나라를 되찾자는 대의에 하나로 뭉쳤다. 두 세력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했던 것이 현산학교와 쌍천학교, 양양보통학교의 초기 졸업생들이었다. 이석범은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장례)에 참례하고 돌아올 때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뒤 거사를 추진했다. 그는 아들 이능렬과 김영경 장세환 등 쌍천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요 임무를 맡겼다. 이석범은 문중의 큰 부자였던 이교완의 집을 본거지 삼아 최인식 등 30세 전후의 청장년층을 모았다. 3월 말경 조화벽은 개성에서 돌아올 때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숨겨 들어왔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다니던 그는 기숙사생으로 구성된 비밀결사대원으로 활동하다 일제의 휴교 조치로 고향으로 향했다. 이 선언서는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교회 청년 김필선에게 전해졌다. 김필선은 같은 양양보통학교 졸업생이자 교우(敎友)들인 김재구 김규용 김계호 등을 모았다. 이들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교회 인근 상여 보관처에 숨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최인식과 연락이 닿아 합동으로 거사를 추진하게 됐다. 하지만 4월 3일 일본 관헌들이 급습해 태극기를 만들던 사람들과 총지휘자 이석범을 비롯한 22명을 체포했다. 체포를 피한 최인식 김필선 등은 거처를 옮겨 밤새 준비했고, 4월 4일 계획대로 큰 시위가 벌어졌다. 조화벽은 훗날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과 부부의 연을 맺었고, 항일 독립운동으로 구금과 석방을 되풀이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한다. 3·1 운동 6년 뒤 양양으로 돌아온 조화벽은 정명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헌신한다. 이 학교는 일제 탄압으로 1944년 폐교되기 전까지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양양문화원 부설 이철수 향토사연구소장은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림과 기독교 세력은 정서적으로 물과 기름의 관계일 수도 있었지만, 국권회복을 위해 그 차이를 뛰어 넘어 하나로 뭉쳤다”라며 “청년 그룹이 두 세력을 연결하며 핵심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지도자 그룹이 대거 검거되면 운동이 지리멸렬해지기 쉽지만 양양의 만세운동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 원장은 이에 대해 “양양은 지금의 서울보다 큰 면적이기 때문에 연락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 군에 걸쳐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진 것은 유림을 앞세워 구장(리장)까지 가담시킨 치밀한 조직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함홍기 열사, 서장에게 화로를 던지려다 순국 4월 4일은 양양 장날이었다. 양양읍에 들어오는 통로 5개를 따라 인근 각지에서 만세 군중과 장꾼들이 모여 들었다.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들에 나가 있던 농부들도 모여들었다. 점심 때에 이르러 만세 군중은 더욱 불어났고, 특히 경찰서와 군청주변은 물론 뒷산에도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은 경찰서와 군청을 에워싸고 임천리에서 체포한 22명을 비롯한 감금자를 석방하고 일본 관헌은 자기 나라로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몇 사람은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손양면 가평리 구장 함홍기는 일본 경찰서장에게 화로를 들어 던지려다 일본 경찰 두 명에게 양팔이 잘린 후 목을 찔려 죽었다. 그의 시신은 경찰서 내 복도에 가마니에 덮여 있다가 10여 일 뒤 가족에게 인계됐다. 마을 주민이 모인 뒤 장례를 치렀으나 일본 경찰은 동네 주민이 모여 울었다는 이유로 하관 직후 파헤치고 관을 깨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양양의 만세운동에는 유림과 기독교 세력 뿐 아니라 천도교와 불교도 만세운동에 가세했다. 일제의 기록과 당시 증언 등에 따르면 4월 7일 오후 2시 반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약 3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개시하여 양양읍내에 들어오자 일제 경찰은 주모자 4명을 체포했고, 시위대는 해산됐다. 낙산사 승려들도 이날 오후 7시 바라소리와 더불어 전 승려들이 등불을 들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 강원도 최초의 교회 ‘양양 감리교회’는… ▼ 조화벽 지사가 활동한 곳으로 유명한 양양 감리교회는 기독교계에서 민족구국제단을 표방하는 대표적 교회다. 7일 방문한 이 교회 입구 표지석에는 ‘이곳은 1901년 10월 5일 하디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로서 한국의 초대교회를 계승한 민족구국제단이며 1919년 양양 만세운동의 발상지입니다’라고 새겨져있다. 설립 당시 이곳은 강원도 최초의 교회였다. 70㎡(20평) 남짓한 기와집으로 시작했다 여러 번 개축을 거쳐 2011년 지금의 6층 교회건물이 들어섰다. 내부에서는 이 교회가 겪어온 역사를 엿볼 수 있다. 1층에는 조화벽 기도실, 2층에는 3·1운동 당시 담임 목사의 이름을 딴 김영학홀, 3층에는 본당인 하디 예배실이 있다. 황해도 금천군 출신의 김영학 목사(1877~1932)는 교인,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문서에서는 그에 대해 ‘민족절대독립주의, 배일사상을 지닌 자’로 규정하고 있다. 1922년 출감한 그는 연해주 선교사역에 나서지만 1930년 러시아 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로 체포됐다. 신앙을 버리라는 배교(背敎)를 거부하던 그는 1932년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 중 사망했다. 송정근 목사(1895~1950)는 1926~1929년 담임 목사로 재직 중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다 고난을 당하고, 친일 행위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사직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1945년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한 그는 공산당 반대에도 1946년 교파 연합의 3·1절 기념행사를 주도했고, 한국전쟁 와중에 공산군에 의해 순교했다. 이 교회 이재풍 장로는 “본당 제대 앞에는 옛 교회당의 돌들을 가져다 놓았다”라며 “교회가 신앙 뿐 아니라 구국을 위한 제단이었음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양=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3·1운동 100주년의 정신은 자유, 평화, 독립인데 인권, 인간의 존엄성, 창조의 원리를 항상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 한반도에 핵무기가 폐기됨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대한민국에 다시는 불행한 전쟁이 없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 가운데 번영된 나라가 되도록 더욱 뜨겁게 기도하자.” 7일 서울 여의도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교회 포럼’ 중 권태진 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의 설교다. 이 포럼은 ‘종교의 공익성과 자유’를 주제로 열렸다. 한국교회연합이 주최하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 등 개신교 연합기관이 후원했다. 이날 포럼은 문성모 목사(전 서울장신대 총장)를 좌장으로 ‘정치 권력화하는 동성애’(길원평 부산대 교수), ‘기독교 사학과 인권’(고영일 자유와인권연구소 소장), ‘종교의 자유와 국가사법권’(서헌제 중앙대 명예교수)에 대한 발제 및 토론과 결의문 낭독으로 이어졌다. 교회법학회 회장이기도 서 교수는 발제에서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의 자격에 관한 대법원 판결을 보면서 ‘법은 제단에 들어올 수 없다’, ‘법은 상식이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말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며 “목회자 중심주의를 취하는 기독교에서 목사, 특히 담임목사는 교회의 핵심이며 그 자격을 어떻게 정하고 어떠한 절차에서 판단하는지는 교회(지교회, 노회)의 고유 영역”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대법원은 지난해 오 목사가 목사 후보생 자격으로 신학대학원에 일반편입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해당 교단 헌법이 정한 목사 요건을 갖추지 못해 교단의 목사가 될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하지만 서 교수는 이날 “오 목사는 사랑의교회로 청빙되기 전 이미 17년간 미국 장로교에서 성공적으로 목회 활동을 했다”라며 “법원이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헌법상의 원칙을 무시한 채 작은 절차상의 문제를 빌미로 목사 자격이 없다고 판단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신앙적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라고 말했다. 길원평 교수는 “세계적으로 동성애를 정상으로 인정하라는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교묘한 언어전술, 문화 등의 미혹, 세뇌, 기만 등으로 이루어짐이 큰 문제라고 판단된다”고 했다. 고영일 소장은 “국가인권위원회는 감시기관이 없다는 문제점이 있는 데다 민주적 정당성이 담보돼 있지 않기에 권력기관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반(反)기독교적 편향성을 보이면서 문제를 일으켜 왔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발제 강연과 토론에 이어 결의문을 채택했다. 심만섭 목사(한국교회언론회 사무총장)는 이 결의문에서 “우리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 시점에 오늘의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에 헌신, 기여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국가기관과 사법부의 부당한 간섭과 폄훼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개신교 목회자이자 진보적 실천가로 살아온 문동환 목사가 9일 오후 5시 50분경 소천(召天·별세)했다. 향년 98세. 고인은 1994년 소천한 문익환 목사의 동생이다. 영화인으로 잘 알려진 문성근 씨가 조카다. 고인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독립신문’ 기자이자 목사였던 부친 문재린과 여성운동가였던 모친 김신묵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고,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8년 은진중학교를 마치고 은사인 김재준 목사의 권유로 일본에 유학해 도쿄신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향 용정 만보산초등학교와 명신여중고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5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웨스턴신학대, 프린스턴신학교 등에서 공부했고 1961년부터 한신대 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 전태일 분신과 유신헌법 공포를 겪으며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5년 동료 해직 교수인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를 마련했다. 1976년 3월 1일에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2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와이에이치(YH) 사건으로 다시 구속됐다 유신정권 몰락 시점에 출옥해 복직했지만 신군부가 들어서자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에 있을 때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나 미국에 온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도움을 준 인연으로 1988년 평화민주당에 수석부총재로 참여했다.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나, 3당 합당에 반대해 정계에서 은퇴한 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13년 귀국했다. 말년에는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구조적 원인이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라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민중 신학을 더욱 심화시켜 ‘이민자 신학’ ‘떠돌이 신학’ 연구에 매진했다. 유족으로 부인 문혜림 씨와 아들 창근 태근 씨, 딸 영혜 영미 씨(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가 있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이며 장례예배는 12일 오전 9시 경기 오산시 한신대 채플실에서 진행된다. 장지는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02-2227-7500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경북 영주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석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이름난 곳입니다. 불교의 수행정신과 유교의 선비정신이 잘 어우러져 우리 정신문화를 빛낼 수 있는 명소로 만들고 싶습니다.” 한국 명상의 세계화에 앞장선 각산 스님(세계명상센터 참불선원장)의 말이다. 참불선원과 경북 영주시는 4일 시가 추진하고 있는 한국문화테마파크와 연계한 한국명상수련원 건립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시는 수련원 건립에 필요한 부지와 기반시설 및 행정적 지원을 제공한다. 참불선원은 100억 원 규모로 3만3057m²(약 1만 평) 부지에 1000명이 동시에 수행이 가능한 명상수련관, 수행과 강의 등이 가능한 명상동 등을 지을 계획이다. 야외에 5000∼1000명이 함께할 수 있는 명상 캠프장과 작은 오두막 형태의 수행 시설도 예정돼 있다. 수련원은 이르면 2020년 10월, 늦어도 2021년 봄에 완공될 예정이다. 최근 국내에서 명상 관련 시설이 늘고 있지만 대규모 명상수련원 건립은 드물다. 특히 인접한 곳에 유교문화의 대표적 유산인 소수서원을 비롯해 대규모 선비촌과 선비문화수련원이 있는 것이 이채롭다. 각산 스님은 “불교와 유교 모두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우리의 삶을 복되게 했다”며 “대립되기보다 조화를 이뤄 두 공간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장욱현 영주시장도 “한국명상수련원을 유치해 전통문화와 명상을 결합한 선비정신으로 영주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테마파크와 연계해 지역을 대표하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영주 명상수련원 건립은 틱낫한 스님의 플럼 빌리지나 테제공동체 등 대규모 수행공동체의 가능성을 엿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각산 스님은 “영주 명상수련원은 종교에 관계없이 힐링과 수련을 원하는 이들이 찾을 수 있는 열린 수행 공간이 될 것”이라며 “이 수련원을 만들고 운영한 경험을 쌓아 또 다른 차원의 수행 공동체를 모색하고 싶다”고 했다. 각산 스님은 세계적 명상 수행자인 아잔 브람, 태국 고승 아잔차, 대만 심도 선사, 국내 간화선을 대표하는 혜국 스님 등을 초청한 법회와 명상 캠프를 통해 국내외 명상 교류에 힘써왔다. 지난해 10월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서 5000여 명이 참석한 DMZ세계평화 명상대전을 열기도 했다. 3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현지 교포들을 대상으로 2박 3일 일정의 ‘LA 명상힐림캠프’가 열린다. 각산 스님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동영상을 본 교포들의 초청으로 미국 현지 캠프를 열게 됐다. 하반기에는 미국 뉴욕이나 호주 캠프도 추진 중”이라며 “초기불교와 우리 전통불교 수행법의 장점을 결합한 명상의 세계를 국제적으로 알릴 기회”라고 말했다.영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경북 영주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석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이름난 곳입니다. 불교의 수행정신과 유교의 선비정신이 잘 어우러져 우리 정신문화를 빛낼 수 있는 명소로 만들고 싶습니다.” 한국 명상의 세계화에 앞장 서온 각산 스님(세계명상센터 참불선원장)의 말이다. 참불선원과 경북 영주 시는 4일 시가 추진하고 있는 한국문화테마파크와 연계한 한국명상수련원 건립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시는 수련원 건립에 필요한 부지와 기반시설 및 행정적 지원을 제공한다. 참불선원은 100억 원 규모로 3만3057㎡(1만 평) 부지에 1000명 동시 수행이 가능한 명상수련관, 수행과 강의 등이 가능한 명상동 등을 지을 계획이다. 야외에 5000~1000명이 함께 할 수 있는 명상 캠프장과 작은 오두막 형태의 수행 시설도 예정돼 있다. 수련원은 이르면 2020년 10월, 늦어도 2021년 봄에 완공될 예정이다. 최근 국내에서 명상 관련 시설이 늘고 있지만 대규모 명상수련원 건립은 드물다. 특히 인접한 곳에 유교 문화의 대표적 유산인 소수서원을 비롯해 대규모 선비촌과 선비문화수련원이 있는 것이 이채롭다. 각산 스님은 “불교와 유교 모두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우리의 삶을 복되게 했다”며 “대립되기보다 조화를 이뤄 두 공간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장욱현 영주시장도 “한국명상수련원을 유치해 전통문화와 명상을 결합한 선비정신으로 영주 위상을 높이고, 문화테마파크와 연계해 지역을 대표하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영주 명상수련원 건립은 틱낫한 스님의 플럼 빌리지나 테제공동체 등 대규모 수행공동체의 가능성을 엿보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각산 스님은 “영주 명상수련원은 종교에 관계없이 힐링과 수련을 원하는 이들이 찾을 수 있는 열린 수행 공간이 될 것”이라며 “이 수련원을 만들고 운영한 경험을 쌓아 또 다른 차원의 수행 공동체를 모색하고 싶다”라고 했다. 각산 스님은 세계적 명상 수행자인 아잔 브람, 태국 고승 아잔차, 대만 심도 선사, 국내 간화선을 대표하는 혜국 스님 등을 초청한 법회와 명상 캠프를 통해 국내외 명상 교류에 힘써왔다. 지난해 10월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서 5000여명이 참석한 DMZ세계평화 명상대전을 열기도 했다. 3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현지 교포들을 대상으로 2박 3일 일정의 ‘LA 명상힐림캠프’가 열린다. 각산 스님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동영상을 본 교포들의 초청으로 미국 현지 캠프를 열게 됐다. 하반기에는 미국 뉴욕이나 호주 캠프도 추진 중”이라며 “초기불교와 우리 전통불교 수행법의 장점을 결합한 명상의 세계를 국제적으로 알릴 기회”라고 말했다.영주=김갑식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3·1운동 100주년은 한국 기독교사(史)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교회는 일제의 거센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외국 선교사에 의해 전래된 기독교는 그 고난의 가시밭길 끝에 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났다. 21일 서울 성동구 성수일로 성락성결교회에서 지형은 목사(59)를 만났다. 독일 보쿰대에서 교회·교리사를 전공해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독일 통일의 현장을 지켜본 목회자로 대북지원과 교류에 힘써온 ‘남북나눔운동’ 이사장을 맡고 있다. -100주년 3·1절을 맞는 소감은? “3·1운동 당시 1800만 인구 중 기독교 신자는 20만 명 정도였다. 소수였지만 온 몸을 던져 민족과 사회를 끌고 갔는데 훨씬 교세가 커진 우리 교회가 그 역할을 하고 있나 의문이 들어 안타깝다.” -기독교사에서 3·1운동의 의미는? “기독교적 관점의 과대평가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팩트로 봐도 교회 역할은 컸다. 천도교 손병희, 불교의 만해 한용운 선생 같은 출중한 지도자도 계셨지만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조선에서 거의 유일한 전국적 네트워크인 교회가 3·1운동의 거점이 됐다. 불교와 유교의 토착화에 수백, 수천 년이 걸렸는데 기독교는 3·1운동을 계기로 30여년 만에 이 역사와 한 몸으로 직조됐다. 이 땅과 운명 공동체가 됐다.” -반면, 신사참배는 교회의 큰 수치라는 평가다. “3·1운동의 중심이 기독교였기 때문에 일제는 교회를 철저히 탄압했다. 1937년 본격화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교회의 대응은 크게 두 방향이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아 달라는 청원 운동과 순교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냥 고개를 숙인 것만은 아니다. 대략 통계를 보면 200개 교회가 폐쇄됐고 2000여명이 투옥됐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순교자도 50여명에 이른다.” -3·1운동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3·1운동을 계기로 왕국(王國)에서 민국(民國), 국민의 나라라는 의식이 생겨났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상상 이상으로 국제 관계에 밝았다. 당시 세계의 80%가 식민 지배를 받는 상태였기에 우리 지도자들은 동양 평화를 통한 세계의 평화를 애기한 것이다. 교회적 관점에서 보면 3·1운동을 계기로 고난을 견뎌내는 ‘결’이 생겨났다.”-현재의 교회가 반성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까지는 먼 여정이다. 한국 교회가 이 상황을 꿰뚫어볼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이 있는지 의문이다. 한동안 일부 교회의 통일 기도는 ‘38선이 무너지고 김일성 집단이 붕괴하시고~’라는 식의 북진 통일론이었다. 100년 전 국제관계 속에서 동양과 세계평화에 대한 지평을 가진 과거 지도자들보다 훨씬 떨어지는 의식 수준이다.” -남북나눔운동 이사장으로 현재 진행 중인 대북 교류사업을 밝혀 달라. “전임 이사장인 홍정길 목사님 등 선배들의 지론처럼 통일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함께 해야 한다. 그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지난해 10월 58개 단체로 구성된 ‘북민협’을 통해 밀가루 5000톤을 보냈다. 그중 남북나눔이 320톤 정도를 부담했다. 특히 황해도 천덕리에서 진행 중인 농촌시범마을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800채 중 400채를 지었는데 천안함 사건이후 중단됐다. 북한이 평양과 일부 특구를 빼면 시골 지역을 개방한 전례가 없다. 단순히 주거환경 개선을 넘어 자립, 상생, 친환경의 표본이 될 수 있도록 북한 측과 협력하고 있다.” -독일 유학 당시 통독 현장을 지켜봤다. 남북교류와 통일운동의 원칙이 있다면? “사람이 만나야 한다, 절대로 성급하면 안 된다, 길게 봐야 한다, 이런 원칙들이 필요하다. 오랜 기간 사람이 만나고 교류한 독일에서조차 ‘오씨 베씨 (ossi wessi·동독 것들 서독 것들)’ 같은 불편한 말이 생기더라.” -좀 더 구체적으로? “경제력에서 앞서는 우리가 칼자루를 쥘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쪽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통독 과정에서 크게 기여한 베를린 원탁회의를 주도한 크레첼 목사도 ‘동독 쪽 얘기를 많이 들지 않았다’라며 반성하더라. 기 싸움에서 밀리는 게 아니라 충분히 들어야 통일 비용을 줄일 수 있다.”김갑식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지난해 설립 30주년을 맞아 소외된 이웃을 위한 30가지 나눔 축제로 화제를 모은 새에덴교회(경기 용인시 죽전로)는 민족과 역사를 위한 소명에 충실한 교회다. 이 교회는 2007년부터 해외의 6·25참전용사를 비롯해 국내외 참전용사 3500여명을 초청한 보은행사를 통해 민간 외교에 기여해왔다. 최근 교회의 발걸음은 위안부 할머니 돕기, 일본 교회의 사과와 한일화해, 3·1운동과 독립운동 후손 돕기 등 다방면으로 향하고 있다. 그동안 교회는 경기도 광주 소재 나눔의집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후원하면서 할머니들의 건강과 생활을 도왔다. 100주년을 맞는 3·1절을 앞두고 오야마 레이지 목사를 비롯한 일본 기독교 지도자 20명이 교회 초청으로 방한했다. 이들은 27일 새에덴교회 특별 예배에서 사죄문 발표에 이어 사죄의 절을 올렸다. 제암리 교회와 순교자기념관, 서대문형무소와 안중근의사기념관 방문에 이어 1일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 기념대회에 참석해 과거사에 대해 공개 사죄한다. 소강석 담임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은 최근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추모비 건립과 독일운동가 후손 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함경도 경원 출생의 선생은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연해주로 이주해 군납 사업으로 큰 부자가 된 뒤 그 돈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는 항일 의병조직 동의회, 한인 신문 대동공보, 한인 실업인 모임으로 위장한 항일단체 권업회를 이끌었고, 30여개 학교를 세워 동포들의 교육에 힘썼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하고 지원한 그는 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일대의 한인촌을 습격해 살상을 자행한 4월 참변 때 순국했다. 재단은 올해 8월 광복절을 맞아 선생이 순국한 우수리스크에 추모비를 건립할 예정이다.김갑식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 교회에는 ‘태극기 꽃’이 피었다.백두에서 한라까지 교회 십자가와 하나가 된 희망의 꽃이었다. 일제의 총칼에 무참하게 짓밟힌 고난의 꽃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기독교와 이 땅을 운명공동체로 묶어준 생명의 꽃이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 교회의 과거와 오늘, 미래를 살펴본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민족과 함께, 교회와 함께.’ 올해 100주년을 맞아 3·1절에 개최되는 기독교 연합대회의 주제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3·1운동 100년 한국교회 기념대회’가 진행된다. 주요 기독교 연합단체와 교단들이 참여한다. 이 행사는 주제에 걸맞게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교회로서의 사명을 다시 되새기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념예배 설교는 한기총과 한교총, 교회협회장을 지낸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가 맡았다. 이 목사는 ‘교회가 희망이다’라는 제목으로 3·1정신 계승과 한국교회의 역할을 밝힐 예정이다. 준비위원회 측은 기성 세대와 다음 세대가 어우러진 축제로 진행된다는 점을 이번 대회의 큰 특징으로 꼽았다. 한국대학생선교회(한국CCC)와 전국 중·고·대학 교목회 등을 통해 청소년과 청년층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대회는 3개 섹션으로 나눠 진행된다. 대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윤보환 림형석 목사가 과거, 현재, 다음 세대를 위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지막 섹션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기도가 이어진다. △3·1운동 정신 계승을 위해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감사하며 △위정자와 지도자들을 위해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나라와 민족, 한반도 복음통일을 위해 △한국교회와 다음세대를 위해 각각 기도할 예정이다. ‘한국교회 비전선언문’도 발표된다. 이 선언문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와 세계 평화를 염원하며 한국교회의 역할을 천명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전망된다. 준비위원회는 “이번 대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3·1정신을 계승하고 민족의 동반자 역할을 회복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봄이 오는구나 3월이 오는구나/잠든 산하를 흔들어 깨우면서/반가운 그님과 함께 오시는구나/…지금은 해방된 하늘과 땅/무거운 얼음을 깨뜨리면서/그님께서 쇠북으로 우시는구나/큰 소리 눈물로 우시는구나/해마다 3월이 오면/낯익은 골목마다/그님의 흰옷 그림자가 되살아나고.’ 19일 찾은 충북 영동군 매곡면 3·1운동 의거 기념비. 눈비가 섞여 내리는 늦겨울 하늘이 기념비 한쪽의 시비(詩碑)에 새겨진 박희선 시인의 ‘해마다 3월이 오면’과 어우러졌다. 매곡초등학교 앞에 조성된 기념비 주변은 날씨 탓인지 인적이 끊겼지만 시의 한 구절처럼 잠든 산하를 깨우면서 100주년을 맞는 3·1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일제의 헌병 분견소까지 불태워 충청과 경상, 전라도의 접경지에 위치한 영동지역의 만세운동은 서울의 지도부 조직과 연결이 약해 자생성이 강했던 사례로 꼽힌다. 식민통치에 대한 반항의식이 바탕을 이룬 상황에서 일제의 농민에 대한 수탈과 강제 노역 등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전 군으로 확산됐다. 항일 의병운동을 일으킨 이들이 다시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만세운동은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처음에는 면사무소 등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평화적 운동으로 진행됐으나 일제가 야만적인 무력 탄압으로 주동 인물을 검거하고 살상하자 군민들은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며 격렬하게 맞섰다. 매곡면의 3·1운동을 주도한 안준은 1897년에 태어나 15세에 황간학교에 입학하여 4년을 배운 뒤 농사일을 하면서 서당 훈장도 했다. 그는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는데 옥중에서 고문으로 병을 얻어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하는 등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뒤에 면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매곡의 만세 시위는 4월 2일부터 6일까지 이어졌다. 옥전리에 살던 안준은 독립선언서를 얻어와 안광덕과 본격적으로 거사를 준비했다. 이들은 400여 장의 태극기와 베껴 쓴 독립선언서를 들고 면 소재지인 노천리에 내려와 김용선 남도학 임봉춘 등과 논의하여 4월 2일 밤나무 묘포장의 부역꾼들과 면사무소 마당에서 거사하기로 했다. 당일 오전 11시경 부역꾼 100여 명과 각 마을에서 모인 300여 명이 합세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면장과 직원들도 만세운동에 가담하도록 했다. 일부는 마침 장날이었던 황간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4월 3일과 4일에는 군중 800여 명이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추풍령 헌병 분견대가 출동해 주동 인물인 안광덕 임봉춘 남도학 등을 체포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구속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추풍령 헌병 분견소까지 추격했다. 6일에는 300여 명이 추풍령 분견소에 쇄도하였으나 밀고를 받은 헌병이 출동해 제지당했다. 이날 안준을 비롯해 장복철 안병문 김용선 신상희 등 4명이 체포됐고 이후 이장노 장출봉 김용문 등 8명이 추가로 일경에 잡혔다. 매곡면 3·1운동 애국지사숭모회장을 지낸 안병찬 씨는 “지형이 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영동의 3·1운동은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집중됐다”라며 “정확한 기록으로 입증되지는 않지만 일제 헌병이 주둔해 있던 추풍령 분견소에 불이 났는데, 매곡 사람들 짓이라는 소문이 났다”고 전했다. 매곡 시위의 현장이었던 면사무소에서 추풍령 분견대까지는 6km 정도로 어른 걸음으로 1시간 거리였다고 한다. 이날 기념비를 살펴보던 안 씨는 “당시 시위 주동자 중 4명이 공주에서 옥고를 치렀는데 6·25전쟁 중 감옥이 불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독립유공자 지정에 어려움이 있다”며 “여러 증언을 토대로 지정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영동군은 올해 3·1절 100주년을 맞아 매곡면에서 진행해온 기념행사를 군 단위로 확대해 개최한다. ○ “조밥을 먹기도 힘든 때에 웬 뽕나무인가” 매곡면에 앞서 학산면에서 3월 25, 28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곳 시위의 직접적 발단은 영동∼무주 간 도로 공사 강제 노역 동원 및 뽕나무 묘목 강제 배부 등 일제의 악랄한 수탈 정책이었다. 이때의 시위는 학산과 양산면민의 연합으로 전개됐다. 특히 3월 30일에는 학산면 소재지인 서산리에서 도로 공사 부역에 나섰던 군중이 양산면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져 창문과 전화기를 파괴했다. 구속된 지사의 구출에 나섰지만 일본의 지원 병력이 출동하면서 7명이 체포되고 38명이 중상을 입기도 했다. 4월 3일에도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양봉식 이기영 전재득 정해용 이건양 전만표 등이 주도하다 검거됐다. 재판기록을 참고해 이날의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먼저 4월 3일 오후 4시경부터 6시까지 서산리 시장에서 약 300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장을 누볐다. 오후 8시경에도 20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에 달려가 “조밥을 먹기도 힘든 때에 웬 뽕나무인가”라고 외치면서 임시로 심어놓은 2만8000그루의 뽕나무 묘목을 뽑아 불에 태웠다. 이들 중에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한 양봉식은 경술국치 후 비분강개해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서간도로 망명했던 인물이다. 그는 1919년 2월 진남포를 경유해 독립선언서 수십 장을 얻어와 옥천 이원 금산 무주 등에 배포했다. 영동지역의 중심지인 읍내에서도 3월 말 영동 장날에 시장 남쪽의 다리 위에 사방 130cm의 태극기가 달려 있었고 여러 곳에서 종이로 만든 150여 장의 태극기가 나돌았다. 4월 4일 영동 장터에서 2000여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투석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위의 주동자는 박성하 한의교 정성백 장인덕 김태규 정우문 한광교 등 7인이었다. 이들이 장터에 흩어져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은 호응하여 읍내를 누비며 행진했다. 놀란 일본 경찰은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 이때 일경의 발포로 6명이 죽고 8명이 크게 다쳤다. 1991년 영동읍 주곡리에는 이들의 뜻을 기리기 위한 7지사(志士) 독립운동 기념비가 세워졌다.○ 3·1운동에 힘을 보탠 독립군 나무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입구에는 ‘독립군 나무’(영동군 보호수 제43호)로 불리는 느티나무가 있다. 높이 20m, 둘레 10m로 수령은 350여 년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원래 각각 떨어진 두 그루이지만 밑동이 붙어 자라면서 멀리서 보면 한 그루처럼 보인다. 이 나무가 독립군 나무로 불리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주민들이 나무에 흰 헝겊을 달아 일본 헌병의 동태를 살핀 데서 유래했다. 영동지역은 충북 옥천, 전북 무주, 경북 김천으로 통하는 지역이다. 이곳을 지나가야 했던 독립군들은 이 나무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면서 신변의 안전을 도모했다고 한다. 독립군 나무는 오랜 풍파로 쇠약했지만 영동군이 몇 년 전부터 보호 작업을 하면서 활력을 되찾았다. 영동군은 나무의 생육을 촉진하기 위해 밑동 주변의 흙을 걷어내고 영양제가 섞인 마사토를 새로 깔고 나무줄기에 영양제도 투입했다. 낡고 부서진 둘레석을 말끔히 정비하고 자투리 공간에 자연친화적 휴식공간을 설치했다. 최향숙 문화관광해설사는 “흥미로운 스토리를 간직한 독립군 나무에 대한 스토리텔링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라며 “3·1운동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전하는 것도 후손들에게 물려줄 중요한 문화자산”이라고 말했다.영동=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3·1운동 100주년은 한국 기독교사(史)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교회는 일제의 거센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외국 선교사에 의해 전래된 기독교는 그 고난의 가시밭길 끝에 민족과 함께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났다. 21일 서울 성동구 성수일로 성락성결교회에서 지형은 목사(59)를 만났다. 독일 보쿰대에서 교회·교리사를 전공해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독일 통일의 현장을 지켜본 목회자로 대북지원과 교류에 힘써온 ‘남북나눔운동’ 이사장을 맡고 있다.―100주년 3·1절을 맞는 소감은…. “3·1운동 당시 1800만 인구 중 기독교 신자는 20만 명 정도였다. 소수였지만 온몸을 던져 민족과 사회를 끌고 갔는데 훨씬 교세가 커진 우리 교회가 그 역할을 하고 있나 의문이 들어 안타깝다.”―기독교사에서 3·1운동의 의미는…. “기독교적 관점의 과대평가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팩트로 봐도 교회 역할은 컸다. 천도교 손병희, 불교의 만해 한용운 선생 같은 출중한 지도자도 계셨지만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조선에서 거의 유일한 전국적 네트워크인 교회가 3·1운동의 거점이 됐다. 불교와 유교의 토착화에 수백, 수천 년이 걸렸는데 기독교는 3·1운동을 계기로 30여 년 만에 이 역사와 한 몸으로 직조됐다. 이 땅과 운명 공동체가 됐다.”―반면, 신사참배는 교회의 큰 수치라는 평가다. “3·1운동의 중심이 기독교였기 때문에 일제는 교회를 철저히 탄압했다. 1937년 본격화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교회의 대응은 크게 두 방향이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아 달라는 청원 운동과 순교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냥 고개를 숙인 것만은 아니다. 대략 통계를 보면 200개 교회가 폐쇄됐고 2000여 명이 투옥됐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순교자도 50여 명에 이른다.”―3·1운동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3·1운동을 계기로 왕국(王國)에서 민국(民國), 국민의 나라라는 의식이 생겨났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상상 이상으로 국제 관계에 밝았다. 당시 세계의 80%가 식민 지배를 받는 상태였기에 우리 지도자들은 동양 평화를 통한 세계의 평화를 얘기한 것이다. 교회적 관점에서 보면 3·1운동을 계기로 고난을 견뎌내는 ‘결’이 생겨났다.”―현재의 교회가 반성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까지는 먼 여정이다. 한국 교회가 이 상황을 꿰뚫어볼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이 있는지 의문이다. 한동안 일부 교회의 통일 기도는 ‘38선이 무너지고 김일성 집단이 붕괴하고∼’라는 식의 북진 통일론이었다. 100년 전 국제관계 속에서 동양과 세계평화에 대한 지평을 가진 과거 지도자들보다 훨씬 떨어지는 의식 수준이다.”―남북나눔운동 이사장으로 현재 진행 중인 대북 교류사업을 밝혀 달라. “전임 이사장인 홍정길 목사님 등 선배들의 지론처럼 통일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함께 해야 한다. 그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지난해 10월 58개 단체로 구성된 ‘북민협’을 통해 밀가루 5000t을 보냈다. 그중 남북나눔이 320t 정도를 부담했다. 특히 황해도 천덕리에서 진행 중인 농촌시범마을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800채 중 400채를 지었는데 천안함 사건이후 중단됐다. 북한이 평양과 일부 특구를 빼면 시골 지역을 개방한 전례가 없다. 단순히 주거환경 개선을 넘어 자립, 상생, 친환경의 표본이 될 수 있도록 북한 측과 협력하고 있다.”―독일 유학 당시 통독 현장을 지켜봤다. 남북교류와 통일운동의 원칙이 있다면…. “사람이 만나야 한다, 절대로 성급하면 안 된다, 길게 봐야 한다, 이런 원칙들이 필요하다. 오랜 기간 사람이 만나고 교류한 독일에서조차 ‘오시 베시 (ossi wessi·동독 것들 서독 것들)’ 같은 불편한 말이 생기더라.”―좀 더 구체적으로? “경제력에서 앞서는 우리가 칼자루를 쥘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쪽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통독 과정에서 크게 기여한 베를린 원탁회의를 주도한 크레첼 목사도 ‘동독 쪽 얘기를 많이 듣지 않았다’라며 반성하더라. 기 싸움에서 밀리는 게 아니라 충분히 들어야 통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3·1운동 100주년 예배 ‘결단의 기도문’ ▼ 말씀삶공동체를 추구하는 성락성결교회는 3일 3·1운동 100주년 예배를 갖는다. 이 예배에 사용될 ‘결단의 기도문’을 소개한다. 다른 교회도 참고할 수 있어 원문을 살렸다.◇인도자 인류 역사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삼일운동 100주년 예배를 드리며 여기 주님의 임재와 현존 앞에 서 있습니다.◇회중 당신의 거룩한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어 자유로운 의지와 인격적인 결단의 선물을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인도자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이 그들이 사는 역사와 사회의 시공간에서 사랑과 평화를 가꾸며 살라고 명하시니 감사드리며 찬양을 올립니다.◇회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의 자리로 초대하시는 이 크신 은혜에 가없는 감사를 드리며 영광을 올려드립니다.◇인도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설교에서 가르쳐주신 대로 창조와 구원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하늘 아버지라 부르며 간구합니다. 100년 전 이 땅 한반도에 3·1운동을 허락하시어 비폭력 평화의 고결한 뜻을 우리 역사와 사회의 한가운데로 흐르게 하시어 다음과 같은 은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모두 함께 ―남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자신을 성찰하여 더불어 사는 세상을 추구하게 하셨습니다. ―과거의 회한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열며 앞으로 걸어갈 역사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만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동양의 평화와 세계의 번영을 염원하며 인류 공영의 전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과 기독교 신앙이 뗄 수 없이 연결되고 자유민주주의 의식의 토대가 놓이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체적인 삶과 세계의 현실에서 펼쳐지도록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게 하셨습니다.◇인도자 하늘 아버지, 우리는 백 년 전에 주신 은혜에 터하여(기초하여) 오늘의 우리를 성찰하며 이렇게 회개하고 간구합니다.◇회중 남북분단과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추구한 우리 죄를 회개하오니, 한반도에서 평화의 길이 넓어지며 점진적이고 평화적이고 복음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남자들: 물질의 풍요로움을 추구하여 맘몬의 우상에 빠지며 효율성에 종속되어 기술의 우상에 매인 우리 죄를 회개하오니,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와 이웃과 주변 나라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여자들: 무분별한 물량적 교회 성장주의에 매몰되어 개(皆)교회주의와 교파주의로 얼룩진 한국 교회의 죄를 회개하오니, 그리스도의 몸인 공교회성이 회복되어 사회와 역사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회중 인간의 이기심으로 망가져가는 지구환경의 위기를 우리 모두의 죄로 끌어안고 회개하오니, 생태적 지구환경의 회복을 위해 그리스도인과 모든 헌신적인 사람들이 손잡고 일하게 하옵소서.◇모두 함께 하늘 아버지, 우리는 성경의 약속대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우리 삶이 도상의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한반도에 주신 삼일정신의 고귀한 뜻이 오늘날의 세계에 강처럼 흐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