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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위 서열 3위인 조지 왕자가 6일(현지시간) 처음 유치원에 가는 모습이 공개됐다. 왕세손의 업무를 담당하는 켄싱턴궁은 이날 공식 트위터 계정에 왕세손빈 조지 왕자의 첫 유치원 등원길 사진 2장을 올렸다. 조지 왕자는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의 장남으로 올해 2살(생후 30개월)이 됐다. 조지왕자가 선택한 유치원은 노퍽 주의 웨스트에이커 몬테소리 유치원. 이 곳은 윌리엄 왕세손 부부가 사는 아메르 홀과 가까운 일반 유치원으로, 수업료가 시간당 5.5파운드(약 9700원)이다. 이는 켄싱턴궁 근처의 사립 유치원 수업료(연간 약 3200만 원)보다 싸다. 현지 언론은 지난해 말 “왕세손 부부가 자녀를 일반적인 양육환경에서 키우겠다는 생각”이라고 전한 바 있다. 누리꾼들은 통통한 볼과 금발머리의 꼬마 왕자 사진에 “벌써 이렇게 컸다니 믿을 수 없다” “정말 귀엽다”며 환호했다. 특히 그가 입은 파란색 누비 재킷과 하늘색 배낭이 큰 인기를 끌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조지 왕자가 입은 재킷은 영국의 고급백화점인 ‘존 루이스’의 아동복으로 현재 매진 상태라고 전했다. 사진 속 조지 왕자의 포즈에도 관심이 쏠렸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치원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을 오른손으로 가리키면서 왼손은 재킷 안에 찔러 넣은 것. 이처럼 재킷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는 포즈는 이 집안 내력이다. 조지 왕자의 증조부인 필립 공과 할아버지 찰스 왕세자도 같은 포즈를 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이날 윌리엄 왕세손 부부는 아들을 직접 유치원에 데려다준 것으로 알려졌다. 조지 왕자는 당분간 수업의 일부만 들으며 적응기간을 가질 예정이다.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앗, 이게 뭐야?”“꺅! 너무 귀엽다.”이 가방을 보고 놀라지 않거나 웃음을 참기는 어렵다. 자물쇠까지 달린 어엿한 에르메스 버킨백 모양인데 앞쪽에 커다란 눈알 두 개가 달렸다.부끄럼을 타는 걸까? 아니면 호기심의 표현? 혹은 살짝 놀란? 표정이 살아있는 눈알 두개를 달아놓으니 밋밋한 가방이 말을 걸어올 듯 생기가 돈다. 신생 패션브랜드 플레이노모어(PLAYNOMORE)의 토트백 ‘샤이걸(Shy Girl)’은 본명보단 ‘눈알 가방’ 혹은 ‘눈깔 가방’이라 불린다.지난해 6월 19일 밤 11시 55분 온라인에서 런칭한 플레이노모어는 셀럽들이 들고다니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토트백(21.5×17.5×9㎝) 샤이걸에서 진화해 빨간 입술과 별이 그려진 같은 크기의 ‘샤이스타’, 눈알이 다섯 쌍 그려진 빅백(35×18×27.5㎝) ‘샤이패밀리’도 나왔다. 눈알과 입술 디자인을 인용한 티셔츠와 모자, 화장품(라네즈와 콜라보레이션), 네일스티커 까지 토털 패션 브랜드로 커나갈 잠재력도 보인다.태어난 지 한 돌도 되기 전부터 ‘짝퉁’ 제품이 나올 정도로 주목받아온 플레이노모어. 이 토종 브랜드의 인기몰이법을 김채연 플레이노모어 대표(35)에게 물었다. ① 가방은 여자들의 장난감디자이너인 김 대표는 “롤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에 “디즈니 만화”라고 했다. 헐, 샤이걸처럼 키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안야 힌드마치나 카스텔바작, 모스키노가 아니고? “디즈니만화는 보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사람까지 누구나 좋아하죠. 샤이걸도 송종국 씨 딸 지아부터 탤런트 전인화 김수미씨까지 들고 다니죠.” 김 대표는 지금도 해외에서 쇼핑할때면 옷이나 액세서리보다는 레고 블록이나 플레이모빌을 산다고. “플레이노모어는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던 여자들이 성인이 돼서 갖는 장난감 같은 거예요. 자동차는 성인 남자들의 장난감이잖아요. 로봇을 갖고 놀다 자동차로 옮겨가는 거죠. 가방이 여자들의 신분을 대신하는 게 싫어요. 가방도 좋아서 사는 패션 아이템이 됐으면 해요.”샤이걸은 눈만 가지고도 놀 거리가 많다. 한쪽 눈을 감게 한 뒤 아이섀도우를 바르거나, 아이라인을 그리거나, 속눈썹을 길게 빼 마스카라를 칠하거나. 여자들만 아는 재미다.② 가방은 ‘상전’이 아니다여기서 퀴즈 하나. 저기 저 여성이 들고 있는 명품 디자인 가방이 짝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건 갑자기 비가 오면 답이 나온다. 가방을 우산 대신 머리 위로 받쳐 들고 뛰면 짝퉁, 빗방울이 튈 새라 품에 꼬옥 안고 뛰면 진품이다.“명품 가방은 ‘장만’한다고 표현하잖아요. 전 쉽게 사서 편하게 들고 다니는 가방이 좋아요. 가방이 상전이 되면 안 되죠.”그래서 김 대표는 가죽 대신 합성 피혁을 쓴다. 눈은 스팽글을 달아 표현한다. 기계로 달고, 손으로 마무리한다. 플레이노모어 가방은 가볍고, 만만하며, 명품에 비하면 가격도 착하다. 토트백 크기의 샤이걸과 샤이스타가 17만8000~24만5000원, 빅백 샤이패밀리는 29만8000~42만8000원.③ 블로거, PPL 마케팅은 사절패션브랜드는 셀럽 마케팅이 중요하다. 그래서 드라마에 PPL을 하거나, 인기 가수와 배우들에게 “우리 가방 들어 달라”며 거저 주는 경우가 많다.플레이노모어도 SBS 월화드라마 ‘상류사회’에서 배우 임지연이 매고 나올 때가 있다. 김 대표는 “PPL이 아니라 협찬”이라고 했다. “협찬은 드라마 찍을 때 쓰고 난 뒤 돌려받아요. 이렇게 스타일리스트가 픽업하면 자연스러운데, PPL처럼 만들어진 내용은 한계가 있어요. PPL을 하기엔 마케팅 예산이 빠듯하기도 하고요.”샤이걸은 만화 같은 디자인 때문에 아이돌 쪽에서 러브콜이 많았지만 김 대표는 모델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모델은 또 아이돌과 달리 어리다는 느낌을 주지 않아 이들에게 ‘잇백’이 된다면 중장년층에까지 시장을 넓힐 수 있다고 봤다. “나이 드신 분들은 샤이걸을 보고 ‘이걸 어떻게 들지?’ 하잖아요. 그런데 변정수 씨가 들고 드라마(‘전설의 마녀’)에 나오니까, ‘아, 나도 들 수 있겠네’ 하는 거죠. 색상도 겨울에 일부러 밝은색 가방을 밀었어요. 그래야 계절도 타지 않죠.”‘리뷰를 써줄 테니 증정해달라’는 블로거들의 요구도 사양했다고. “천편일률적인 평가가 싫어서요. 솔직한 포스팅이 좋아요.” ④ 사랑받고 싶으면 기다리게 하라? 품절 마케팅플레이노모어의 가방을 사기는 쉽지 않다. 올 6월 초 서울 명동에 첫 단독매장을 열었고, 서울과 부산의 롯데백화점 일부에 입점해있다. 제일모직의 편집샵인 ‘비이커(Beaker)’ 매장에서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인기 상품의 경우 재고가 없어 주문을 해놓고 1주일 이상 기다려야 한다.공식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상품 주문 후 배송까지 3, 4주는 기다려야 한다. 일부 인기 모델은 품절이다. 그래서인지 리뷰란에는 “생각보다 별로” 보다는 “정말 어렵게 받았다” “드뎌…”라는 감격스러워하는 상품 후기가 많이 올라와 있다.구매하기가 어렵고, 명품 가방에 비해 가격 부담도 덜해서인지 한 번 살 때 색상별로 서너 개를 주문하는 이들도 있다. 일종의 ‘품절 마케팅’이랄까.“주문량을 따라잡지 못해서 그렇지, 의도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오래 기다리게 하면 클레임이 들어올 위험이 크죠. 큰 회사는 자본금이 있어 모든 과정을 다 만들어놓고 시작할 수 있지만, 저희는 하면서 만들어가거든요. 그래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어요.”⑤ “오래 가려면 새 장르가 돼야”홍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를 졸업한 김 대표는 2007년 구두 브랜드 ‘스탈렛애쉬(Starlet Ash)’를 런칭해 7년간 운영했다. 10년이 지나도 신을 수 있는, 유행을 타지 않는 무난한 콘셉트의 브랜드였다.그런데 쉽지 않았다. 신발은 계절도 타고, 사이즈가 세분화돼있으며, 취향도 제각각이고, 킬힐부터 플랫 슈즈까지 높이도 다양했다. 재고 부담이 컸다.게다가 셀럽 마케팅도 쉽지 않았다.“드라마 ‘상속자들’과 ‘예쁜남자’의 신발 스타일링을 담당했어요. 하지만 배우들의 구두까지 잡는 풀샷이 드물어 홍보 효과가 없었죠. 뭘 하더라도 상반신에 들어가야겠다, 계절과 사이즈를 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플레이노모어는 스탈렛애쉬와는 여러모로 대비된다. 가죽 대신 합성 피혁을 쓰고, 오래 가는 무난한 디자인이 아니라 어딜 가나 눈에 확 들어오는 튀는 스타일이다.문제는 튀는 패션 트렌드의 경우 반짝하다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 명품 브랜드들이 클래식한 디자인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유행이 아니라 새로운 장르가 되면 오래 가지 않을까요?”플레이노모어는 1주년이던 올 6월 19일 홍콩의 영국계 백화점 하비니콜스에 입점했다. 이밖에 이탈리아, 일본,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의 패션 매장에 진출했다.“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생각했어요. 국내에선 신규 브랜드이지만 해외에선 똑같이 모르는 브랜드잖아요.”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5년이나 대학을 다니고, 두 차례 무급 인턴으로 일하고, 3600만원이나 되는 빚을 지고도 나는 10대 때와 변함없이 취업시장에서 환영받을 요소는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딱히 기술이 필요 없고 책임도 별로지지 않는 저임금 노동만 벌써 몇 년째 하고 있었다.…”국내의 4년제 대학 졸업생이라면 누구라도 “내 얘기”라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미국의 ‘삼포세대’ 켄 일구나스(32)가 한 말이다.미국 뉴욕 주의 중산층 집안 아들인 켄은 뉴욕주립대 버펄로 캠퍼스를 졸업한 뒤 미국의 여느 대졸자들처럼 빚더미를 안고 대학문을 나섰다. 그가 대학에 다니며 편하게 공부만 한 것도 아니다. 대형 마트 카트 정리, 신문 배달, 패스트푸드점 조리사, 정원사, 공공 스케이트장 경비까지 고단한 알바를 끊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본인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문교양 학위(역사학과 영문학!)를 따느라 빚을 진 거다. 미국도 청년 실업이 장난이 아니다.켄에게 빚은 ‘격파해야 하는 악당, 죽여야만 하는 용, 쓰러뜨려야만 하는 풍차’였다. 악착같이 벌되 한 푼도 안 쓰는 전략으로 졸업 2년 만에 다 갚았다. 빚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자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 빚지지 않고 듀크대 대학원 인문교양프로그램을 마치는 것.그는 이 도전에 성공했고, 성공담을 새 책 ‘봉고차 월든(원제 Walden on wheels, 문학동네)’에 담았다. 2009년 미국 대학원 얘기임을 감안해 읽으며 국내 대학 생활에 적용해보자. ① 하숙집 말고 봉고차우선 방값을 아껴야 한다. 켄은 기숙사나 자취방 대신 봉고차에서 먹고 자기로 결정하고 1700달러(약 191만원)를 들여 주거용으로 개조된 1994년형 포드 봉고차를 샀다.켄이 계산한 봉고차 거주 시 연간 최저 생활비는 4824달러(약 543만원). 그는 책에서 거주 형태를 주택, 기숙사, 아파트, 봉고차, 텐트 5가지로 나눈 뒤 월 최저생활비를 꼼꼼히 계산했다. 이중 ‘기숙사’를 보면 월세 582달러와 식비 382달러를 포함 총 1129달러(약 127만원)가 든다. ‘봉고차’는 월세가 나가지 않는 대신 학내 주차비, 기름값, 보험료 등 차에 월 200달러가 든다. 여기에 식비와 기타 비용을 합하면 월 최저생활비는 402달러로 기숙사보다 생활비를 약 3분의 1 규모로 줄일 수 있다. 이보다 싼 주거 형태는 월 최저생활비가 202달러인 ‘텐트’밖에 없다.미국엔 ‘봉고차 거주족’이 있나 보다. 봉고차 거주계의 ‘구루’인 밥 웰스의 웹사이트(www.cheaprvliving.com)를 이용해도 좋다. 봉고차 선택법부터 인기척을 없애는 법, 태양전지판 설치법, 화장실 가는 법까지 봉고차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조언을 올려두었다.② 구내식당도 사치다 하룻밤쯤은 없이 사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하지만 봉고차 거주가 일상이 되려면 독하게 마음먹어야 한다. 켄은 논문학기를 제외한 2년을 봉고차에서 살았다. 10센트 단위까지 따져가며, 쓰레기통 뒤지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가난하게 지내야 빚 없이 대학원에 다닐 수 있다.등록금과 봉고차 다음으로 지출이 많은 부분이 식비. 켄은 하루 세 끼를 모두 해먹었다. 아침 메뉴는 시리얼에 가루우유(냉장고가 없다), 아니면 따뜻한 오트밀 한 그릇에 땅콩버터를 넣어 먹었다. 점심은 바나나와 땅콩버터 샌드위치, 저녁엔 가벼운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하루 식비는 평균 4.34달러. 샤워는 체육관에서(한 학기 회원권 34달러), 노트북, 휴대전화, 카메라 충전은 도서관, 공부는 따뜻한 강의실에서 한다. 가끔 휴식이 필요할 땐 도서관에서 무료로 책과 영화 DVD를 빌려본다. 한겨울 봉고차 안은 얼음장 같다. 최대한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버티다 돌아온다. 빨래는 월 1회 동전 빨래방, 쓰레기는 캠퍼스 공중 쓰레기통에. 봉고차에서 지내려면 건강 잘 챙겨야 한다. 의료보험도 없는데 목돈 들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③ 들키지 않기마지막 남은 대형 지출은 캠퍼스 주차증으로 연간 182달러다. 듀크대 주차 규정엔 자동차 거주 금지 조항이 없다. 물론 다양한 거주 방식을 실험하라고 배려해서가 아니다. 듀크대엔 워낙 사는 애들이 많아 굳이 그런 규정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거다.켄은 늘 들킬까봐 걱정이었다. 그는 검은 천과 선팅된 창문, 블라인드로 인기척을 없앴다. 불행히도 번잡한 쪽 주차장 자리에 배정받았다. 오후5시 이후부터는 대학 주차장 어디든 원하는 곳에 주차 가능했지만 켄은 기름값이 아깝고, 봉고차가 잔고장이라도 날 까 두려워 주차장을 옮겨 다니지 않았다. 그는 봉고차 거주 7원칙을 만들었다. 첫째, 그리고 둘째도 봉고차 거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셋째, 조명이나 난방을 켜두거나 시동을 건 채 차를 떠나지 않는다. 넷째, 불필요한 소음을 내지 않는다. 다섯째, 요리할 땐 모든 창문을 닫아 냄비가 달그락거리거나 수저 부딪치는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한다. 여섯째, 절대 봉고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아무도 못 보게 한다. 일곱째, 절대로, 절대로, 봉고차에서 나가는 모습을 아무도 못 보게 한다.④ 등록금 깎고, 알바꺼리 찾고듀크대 대학원 인문교양프로그램의 등록금은 과목당 3313달러. 켄은 ‘재정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끝에(그건 넘 쉬웠다!) 1089달러로 깎았다. 학기당 2개 강의를 수강했고, 석사 학위를 받는데 총 1만1000달러가 들었다.장학금을 받지 않는다면 알바꺼리를 찾아야 한다. 그는 대학이기에 가능한 알바를 구했다. 온라인으로 참여 가능한 모든 실험에 참가자로 신청한 거다. 신경과학과 인지실험은 시간당 10달러인데 전극으로 자극을 받거나, 바늘에 찔리거나, 약에 취하는 실험이었다. 4가지 주요 체액 중 3가지를 기증하기도 했다.가장 짭짤하되 다소 찜찜한 알바는 MRI 기계에 들어가 두뇌를 스캔 당하는 것. 시급 20달러는 탐나지만 실험 참여 동의서의 문구는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자성이나 전파에 노출되어 부작용이 발생했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향후 해로운 영향이 발견될 가능성은 있습니다.”글쓰기를 좋아하는 켄은 ‘독서 교육’ 체험학습 프로그램 알바도 했다. 도심지역 초등학교에서 시급 16달러를 받고 주당 20시간씩 일했다. ⑤ 방학 땐 극한 알바로 목돈 마련방학 땐 실한 알바를 뛰어 한 몫 벌어두는 게 좋다.미국엔 국립공원 산간지역 관리원이란 알바 자리가 있다. 켄은 방학이 되자 알래스카까지 날아가 게이츠오브더아크틱 국립공원 및 보호구역에서 일했다. 시급 20달러. 극한 알바이니만큼 일당이 많기도 하지만, 이런 곳에선 워낙 돈 쓸데가 없어 목돈을 모을 수 있다. 돈 모으려면 많이 버는 것보다 안 쓰는 게 중요!공원 내엔 도로도 산길도 인공 시설도 전혀 없어 수상용 경비행기를 타고 출근하고 이동했다. 관리원인 켄은 걷거나 카누를 타고 야생 지대를 순찰하고, 곰이 열 수 없는 식료품 함에 음식을 보관하고, 쓰레기를 줍고, 밀렵꾼이나 불법 어업자를 발견하면 위성전화로 공원 순찰대에 신고했다.바쁜 일거리도 없고, 대자연을 감상하며 맑은 공기를 마시니 호사 아니냐고? 27㎏짜리 짐을 어깨에 메고, 수많은 모기에 온몸을 물어뜯기며, 곰에게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해야 하는데도?켄도 그리즐리곰과 맞닥뜨렸다. 무사히 살아 돌아와 하는 말이겠지만, 어려움을 겪게 돼 행복했다고.“바로 그 순간이 스스로의 한계이자 나의 진정한 본질을 잠깐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으니까.” ⑥ 비밀 털어놓을 친구 만들기 켄은 외로웠다. 맥주 사마실 돈이 없고, “어디 사느냐?”는 질문을 피해 다녀야 하니 친구가 없을 수밖에. 하지만 그에겐 메일로 속마음을 주고받는 고교시절 베프 조시 프륀이 있었다. 이 책에서 주인공 켄과 함께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조시는 5만8000달러의 빚을 안고 대학을 졸업했다. 성적이 뛰어났지만 취업 시장에선 줄줄이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친구 켄처럼 극한 알바를 하지 않은 조의 대출금은 이자만 불어갔다. 조는 켄에게 보낸 메일에서 대출금을 이렇게 묘사했다.“마치 내가 운동화 끈을 묶느라 멈춰서 있는 동안 내 뒤를 맹렬하게 쫓아오는 퓨마 같아.”인류에 봉사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정의로운 조시. 하지만 대출금을 갚기 위해 웨스트우드 대학(미국서는 듣보잡 학교) 입학사정관이 됐다. 한국의 입학사정관과는 달리 텔레마케터에 가까운 직업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이 조시 자신처럼 학자금 대출 인생을 살도록 꼬시는 일이었다. 졸업율, 졸업생 취업 현황, 학위를 받기 위해 드는 엄청난 비용, 이곳서 받은 학점이 다른 일반 대학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숨겨야 했다. ‘집이 봉고차’라는 사실을 들킬까봐 학우들과 교류가 없었던 켄은 조시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외로움을 이겨냈다. 조시 역시 성실한 친구 켄과 교류하며 통쾌한 반전을 기획한다. ⑦ 멘탈 갑이 되는 스펙 관리켄이 학창시절 쌓아온 스펙을 보자. 토익점수? 필요 없고, 다른 경력? 없다. 지방 신문사 인턴 자리에 지원했지만 줄줄이 떨어졌다. ‘루저’ 켄은 빚을 갚을 요량으로 3D 업종에 뛰어들었다. 알래스카의 오지에서 모텔 청소하고, 햄버거용 패티를 굽고, 쓰레기를 소각하고, 여행 가이드를 하는 일이었다. 마약사범, 알코올 중독자, 정신분열증 환자, 살인 전과자들이 가득한 일터였다.하지만 모험거리라고는 비디오 게임밖에 몰랐던 도시촌놈 켄은 이곳에서 미국 사회의 민낯을 확인했다. 북극의 추위 속에서 신체를 단련했고, 알래스카에서 뉴욕 고향집까지 8000㎞를 히치하이크로 횡단하는 용기를 얻었다. 봉고차 주거 방식도 1980년식 쉐보레 서버번을 집으로 삼아 사는 알래스카 노인네에게서 배운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낮고 험한 곳에서 생활하며 그는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문화를 가꾸고, 성찰의 힘과 인문학의 효용을 깨달았다. 충만한 생활에서 건져 올린 귀한 글감은 그를 봉고차 속에 숨어 사는 ‘찌질이’에서 듀크대의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바꿔놓았다.책은 듀크대 대학원 졸업식에서 켄이 축사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비록 교육을 받기 위해 거의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그 대신 부유함을 얻었습니다. 여기서의 부유함은 환율이 없는 통화, 녹슬지 않는 주화, 소비해버릴 수 없는 자본인 아이디어와 진실의 부유함을 의미합니다. 비록 이곳을 떠나는 제 지갑은 비어 있을지언정, 나이가 적든 많든, 국내든 해외든, 집이 있든 없든, 돈이 많든 적든, 살아있는 마지막 그날까지 이 부유함을 간직할 것입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질질 끄는 거 이제 그만해.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72초뿐이야.”형식은 내용을 결정한다.손안의 TV 모바일은 드라마 문법을 고쳐 쓰고 있다.콘텐츠 제작 회사 ㈜칠십이초의 ‘72초 드라마’는 모바일 시청자를 겨냥한 콘텐츠다.올 5월10일 네이버 TV캐스트에 ‘72초TV’를 개설하고 72초짜리(실제로는 102~164초) 에피소드 8편을 내보냈다. 7월2일 현재 재생 수는 약 300만회.7월 중순에는 시즌1의 주인공이 그대로 나오는 시즌2가 방송된다. 다른 주인공을 내세운 시즌3은 대본 작업이 진행 중이다. ‘질질 끌지 않고’ 72초 만에 기승전결을 마무리 짓는 방법은 뭘까.㈜칠십이초의 성지환 대표(38)에게 초압축 드라마 찍는 법을 물었다.》① 드라마 작가가 쓰지 않는다72초든 60분이든 드라마는 스토리가 중요하다. 하지만 1분 남짓한 시간에 복잡한 캐릭터와 플롯을 소화하기는 무리. 그래서 72초 드라마는 일상을 다룬다.시즌1의 주인공은 ‘흔남(흔한 남자)’. 평범한 30대 미혼남이 중국집 가고, 미장원 가고, 한밤중에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뜬금없이 “자니?” 라는 문자를 날린 뒤 답장을 기다리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이야기다. 에피소드 7, 8회에서 주인공이 예쁜 여자를 만나 썸 타는 얘기가 나오자 즉각 “초심을 잃었다” “웬 판타지냐”는 성토 글이 올라왔다.일상을 다루는 드라마 대본은 누가 쓸까. 시즌1은 라디오작가 3명, 시즌2는 ㈜칠십이초 내부 연출자 2명이 썼다. 시즌3은 시즌1의 영어 번역을 맡은 ‘초짜’ 작가가 대본을 맡았다.“일반적인 드라마는 캐릭터와 상황을 설정한 후 이야기를 전개하죠. 72초 드라마는 누구나 겪을법한 평범한 사연을 다루기 때문에 (드라마 작법을 아는 전문 작가보다) 실제 경험담 위주로 생생하게 풀어내는 작가가 필요합니다.” ② 랩 같은 내레이션의 리듬감은 영업비밀72초 드라마의 묘미는 속도감. 편당 컷이 120개가 넘을 정도로 장면 전환이 빠르다. 대사는 없거나 있더라도 짧다. 내용은 내레이터가 전달하는데 랩처럼 들린다. 에피소드 3에서 나오는 아래의 내레이션은 10초 만에 끝난다.“내가 소개팅에서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는 입고 있던 옷이 별로였고, 차를 소리 내면서 마셨고, 재밌게 말을 못했고, 결정적으로 차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유행하는 옷을 샀고, 차를 우아하게 마셨고, 개인기를 준비했고,….” “음향 감독인 임태형 씨가 내레이션을 맡았습니다. 바람 새는 소리가 없이 전달력이 좋고 연기도 되는 사람이죠. 문장의 처음과 다음 문장 끝이 물리는 듯한 리듬감은 어떻게 편집한거냐고요?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 ③ 짧아도 돈 들건 다 든다짧아도 드라마는 드라마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끝난 뒤엔 엔딩 크레딧이 줄줄이 올라간다. 출연진이 26명, 스태프는 책임 프로듀서부터 예술감독 연출 촬영 조명 미술 음악 음향까지 35명이다(겹치기 포함).회사 직원이나 신인 배우를 캐스팅해 출연료 부담이 적은데도 성 대표가 밝힌 제작비는 회당 1000만원 미만. 60분짜리 미니시리즈 드라마 회당 제작비가 3억~4억 원(분당 500만~670만 원)인데, 이보다 많이 든다고 한다.“짧아도 스태프는 똑같이 필요하거든요. 제작비를 줄이려고 에피소드 8편을 몰아서 찍습니다. 회당 이틀씩 15~20일 만에 완성하죠.” ④ PPL 못 하는 이유? 100% 사전 제작시즌1이 인기를 끌자 PPL 제의가 몰려들었다고. 드라마를 보면 커피메이커, 술, 오디오, 의상, 커피숍, 스마트폰 등등 PPL 할만한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하지만 시즌2에도 PPL은 없다. TV 드라마의 경우 방송이 시작된 후 시청률이 높으면 PPL 요청이 쇄도한다. 72초 드라마는 100% 사전 제작이어서 PPL이 어렵다.“시즌2의 대본이 이미 나와 있는 상태여서 드라마의 완성도를 헤치지 않는 자연스러운 PPL이 어려웠어요. 시즌3에선 고려해 보려고요.” ⑤ 편성과 배급 전략이 있어야시즌1은 매주 수, 목 오전 11시27분 네이버에 공개했다. 시즌2의 편성과 채널은 미정이다. 넷플릭스처럼 에피소드 8편을 한꺼번에 공개할지, 하루 1편씩 할지, 주3회가 좋을지, 어떤 편성이 시청자를 끌어 모을지 고민 중이다. 약은 약사에게. 배급은 배급사에게.시즌1의 배급은 대표적인 MCN 회사인 트레져 헌터가 맡았다. 시즌2는 네오 터치포인트가 배급한다. “저희는 콘텐츠 제작 업체예요. 서로의 역량에 집중!” ⑥ 국내 시장만으론 어렵다시즌1의 경우 영어와 중국어 버전으로 제작 중이다. 일본어와 인도네시아어 버전 제작도 구상 중이다. 왜 인도네시아냐고? 인구 2억5000만 명이 넘는,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이니까.72초 드라마의 주요 수입은 콘텐츠 사용료와 광고수익에서 나온다. 하지만 여기에만 의존해서는 돈을 벌기가 어렵다고 한다.“BJ 같은 1인 제작자의 영상 콘텐츠와 달리 72초 드라마는 제작비가 높습니다. 국내 시장만 바라봐서는 한계가 있어요. 해외로 시장을 넓혀야지요.” ⑦ 독자 반응보다 중요한 기준, “72초답게”쪽 대본에 의존하는 한국 드라마의 제작 관행은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다. 그만큼 시청자들의 요구사항을 드라마 흐름에 반영할 수 있어서다.인터넷에서 BJ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실시간 댓글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 그러나 72초 드라마는 100% 사전 제작이다. 댓글? 보긴 하지만 크게 영향 받진 않는다고. “시청자 반응보다 중요한 건 만드는 사람들이 스스로 ‘재밌다’고 동의할 수 있느냐 입니다. 늘 자문해요. ‘72초스러운가’ 라고요. 브랜드 이미지가 있듯 ‘72초다움’은 우리 드라마의 시그너처 입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드립하다 특진?”“트위터 하다 보니 승진?”부산지방경찰청 장재이 경장(29)은 요즘 악플에 시달리고 있다. SNS에서 부산 경찰 홍보를 잘한 공로로 지난해 정기승진에 이어 올 6월말 또 한 차례 승진한 다음부터다.다행히도 악플엔 대개 이런 반론들이 따라 붙는다. “일선에서 고생하는 경찰들을 제대로 홍보해 신뢰를 얻은 점은 생각 안하나.”맞는 말이다. 부산 경찰은 SNS에서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페이스북 ‘좋아요’가 20만 명, 카카오스토리 구독자 수 15만명, 트위터 팔로워가 3만4000명이다.지난 연말엔 한국인터넷소통협회가 주관하는 ‘2014 대한민국 소셜미디어대상’ 공공기관부문대상, 한국소셜콘텐츠진흥협회가 주최하는 ‘제4회 대한민국 SNS대상’ 공공기관부문 대상, 한국광고PR실학회가 주는 ‘올해의 광고상’ 스마트광고상을 받았다.1일 ‘여경의 날’을 맞아 ‘우수 여경’ 장 경장에게 ‘약 빨고 하는 듯한’ 홍보 비법을 물었다.① 자기자랑은 금물…웃기거나 울리거나공공 기관 홍보 담당의 주요 업무는 기관장의 동정이나 ‘치적’을 알리는 일.그러나 부산경찰청 SNS의 경우 청장 사진이 올라오는 경우는 1년에 1, 2회. 그것도 ‘망가진’ 모습일 때다.시간 때우려고, 아무 생각 없이 웃으려고 들어오는 SNS에서 ‘자랑 질’은 금물.웃기거나, 감동적인 얘기가 좋다.온갖 사연들이 몰려드는 경찰서는 콘텐츠의 보고다. “아침에 출근하면 간밤에 들어온 사건사고 보고서와, 간부회의 결과 자료와, 일선 파출소나 경찰서에서 메일이나 카톡으로 보내온 사건 뒷얘기를 쭉 훑어요. 이중 얘기 되는 홍보거리를 재미있게 소개하는 거죠.”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덕분인지 장 경장의 예사롭지 않은 소개 글은 신선한 이야기 재료에 감칠맛을 더한다.“감자 캐다 산삼 건짐”. 신호 위반 차량을 쫓았는데 알고 보니 운전자가 마약 사범이었다는 이야기다. 만취한 형제가 경찰차를 얻어 타고 집에 가려고 메르스에 걸린 것 같다며 허위 신고해 검거된 소식을 전할 땐 이런 소개 글을 달았다. “아재들요, 쫌!”지난달 전국의 주요 언론에 소개된 한 장의 사진도 부산경찰청의 SNS 홍보에서 시작됐다.생후 2개월인 아이를 안고 민원 하러 남포지구대를 찾은 남자. 아기가 울자 초짜 아빠는 어쩔 줄 모르고, 육아 경험이 있는 경장이 아이를 대신 안아 젖병을 물린 모습을 놓치지 않고 찍어둔 사진이었다.장 경장은 사진을 업로드하며 이런 카피를 날렸다.“젖병을 든 남자의 팔뚝이 이렇게나 멋질 수가!”② 과장했다간 스팸 광고 짝 나요만날 한가하게 재밌는 드립만 칠순 없다. 가끔은 “부산 경찰, 살아 있네!” 소리가 나오게 일도 잘하고 있다는 걸 알려야 한다. 단, 가끔씩 그리고 은근히.“범인 검거하느라 일선에선 억수로 고생하거든요. 그런데 조금이라도 과장하거나, 많이 꾸미거나 하면 스팸 광고 같아서 역효과 나요. ‘칭찬해주세요’ 하고 강요해도 안 되고요. 사진과 영상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해요.”늦은 밤 차들이 쌩쌩 달리는 위험천만한 자동차 전용도로의 중앙분리대에서 가출한 치매 환자 할머니를 업고 도로를 무사히 건너려는 교통경찰, 학교 폭력의 피해자 여학생이 자신을 친동생처럼 돌봐주던 여경에게 보내온 100점짜리 수학 시험지 사진. 사실관계를 설명하는 문장 이상의 꾸밈이 없어도 이 장면들만으로 충분히 감동적이다.③ ‘부산 사투리’ ‘경찰’은 먹히는 코드서울 경찰도 이렇게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형사와 부산 사투리는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먹히는 인기 코드다.이 코드를 십분 활용한 콘텐츠가 학교 폭력 예방 캠페인 ‘부산 사나이’와 가정폭력 예방 캠페인 영상 ‘사랑한데이’다.‘부산 사나이’는 ‘신세계’ ‘범죄와의 전쟁’ 같은 조폭 영화를 패러디한 영상물. 조폭 혹은 꽃남 계열 형사 7명이 중학교 강당에서 학생들과 닭싸움하고, 호신술을 지도하며 어울리는 행사를 4분27초짜리 경쾌한 영상물로 만들었다.조폭 같이 생긴 형사는 “힘을 우째 쓰야하는지 알리주께” 하며 겁주고, 꽃남 형사는 여학생들을 겨냥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믄 오빠야가 데이트해주께” 하고 달콤하게 속삭인다.‘사랑한데이’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부산 경찰들이 아내, 어머니, 애인에게 전화로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물. 무뚝뚝한 부산 사내들이 홍보팀의 요청에 못 이겨 어렵게 입을 뗀다. “여보 사랑해.” “엄마 사랑해요.” 수화기 너머 반응도 부산 싸나이들 못지않다. “뭐라노.” “끊어라 바쁘다,” “미칫나, 약 잘못 묵었나.”④ 내 안에 끼 있다SNS에서 홍보를 하려면 영상물은 필수다. 웹툰까지 곁들인다면 금상첨화.부산경찰청은 제작 인력을 모두 내부에서 충당한다.SNS 홍보는 경찰청의 홍보담당관실에서 한다. 장 경장이 SNS를 관리하고, 영상은 강대민 경사, 웹툰은 박은정 경장이 주로 그린다. 사진 담당은 김록수 경사다.홍보 영상에 필요한 배우도 내부에서 캐스팅한다. 장 경장이 오글거리는 분장을 하고 직접 출연할 때도 있다.‘부산 사나이’도 내부 캐스팅으로 찍었다.“영상을 찍어서 보내 달라 했어요. 그중에 7명을 캐스팅했죠. 조폭 분위기 나는 경찰은 많은데, 꽃남 경찰이 없어서 찾다찾다 결국 의경 중에서 캐스팅했어요.”이 꽃남 의경이 올 봄 케이블 채널 엠넷 ‘너의 목소리가 보여’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꽃남 가수 ‘남포동 꽃경찰’이다. 그는 학교폭력 예방 홍보를 위해 이 프로그램에 출연, 미모에 가수 뺨치는 노래실력으로 인기를 끌었다.⑤ 팀장님이 이해 몬해도 패쓰!기발한 아이디어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나오는 법. 홍보담당관 직원들은 커피를 마시며 “이거 어떻노” “저거 어떻노” 하며 수다를 떨다 아이디어를 건진다.“팀장님(정태운 경감)이 팀원들을 믿고 일을 맡기세요. 내부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디어가 죽지 않죠. SNS에서 쓰는 은어는 팀장님이 모르실 수도 있는데 한번도 ‘이거 이해 안 된다. 알기 쉽게 고쳐라’ 하시지 않아요. ‘이거 요즘 재밌는 거야? 그럼 해봐’ 하시죠. 그래서 SNS스러운, 공공기관 냄새가 나지 않는 홍보물을 만들 수 있는 거죠.”⑥ 최고의 홍보거리는 바로…‘SNS 대모’로 불리는 장 경장은 검도 3단의 유단자다.장 경장은 지구대 파출소 경찰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며 2011년 경찰이 됐다.조폭 일당을 일망타진하는 박력 있는 형사도 좋지만, 소소한 동네 민원을 해결해주며 의지가 되는 경찰의 삶은 더욱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혼자 사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휴대전화의 단축번호가 1번 첫째아들부터 둘째 셋째로 이어지다 6번 파출소로 끝났다. 경찰은 누군가에겐 자식처럼 의지하고 기억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홍보거리를 찾느라 사건 보고서를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페북 좋아요 숫자가 늘어나는 것도 좋지만, 학교폭력 전담 경찰로 일할 때 상담해줬던 학생들이 가끔 연락해올 때 진짜 기분이 좋아요. 언젠가는 복귀해야죠. 일선 현장으로.”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이젠 당신 차례야.” “그래, 이번엔 내가 올라가야지.” 김창혁(54) 이영이(51) 씨 부부는 최근 ‘임무’ 교대를 했다. 아내 영이 씨가 생계를 책임지고, 남편 창혁 씨는 회사를 관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신문사 기자로 맞벌이를 하던 둘은 2005년 영이 씨가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면서 외벌이 커플이 됐다. 영이 씨는 10년간 의전 준비생-이화여대 의전 졸업-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올 3월 전문의가 됐다. 이번엔 창혁 씨가 배를 만드는 목수가 되기 위해 올 4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 부부처럼 한쪽이 ‘딴 짓’하는 동안 다른 쪽이 먹여 살리고, 일정 기간이 지나 밥벌이와 딴 짓하기를 교대하며 사는 커플을 ‘시소 부부’라고 한다. 둘은 따로 살았더라면 이루지 못했을 꿈을 시소 타듯 지혜롭게 균형을 이뤄가며 실현했다. 시소 부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시소부부로 살 수 있나요?”① 너무 늦지 않게 시작하라 2005년 2월 부부가 의료 봉사팀을 따라 네팔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몸을 낮추어 가난한 이들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는 의사들을 보며 영이 씨는 가슴이 뛰었다.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정의 실현 같은 거대담론을 고민하기보다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치료하고 그들이 나아지는 과정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끼고 싶었다. “나, 의사 되고 싶어. 회사 그만두고.” “해봐. 당신 공부 끝나면 나도 배 만드는 목수로 살 테니.” 영이 씨는 귀국하자마자 18년간의 기자 생활을 접고 나이 마흔 하나에 의전 공부를 시작했다. 창혁 씨는 말했다. “‘썸데이’ 윌 네버 컴‘Someday’ will never come), ‘언젠가’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② 지금보다 가난해지는 걸 각오하라 벌이는 반으로 줄고 씀씀이는 커졌다. 의전의 연간 학비만 2천만 원이었다. 의전 입시 준비에도 상당한 돈이 들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영이 씨는 의전 첫 해 입시에서 떨어졌다. 사표를 냈으니 돌아갈 곳도 없었다. 창혁 씨는 “사수까진 봐주겠다”고 했는데, 다행히 이듬해 합격했다. 창혁 씨도 배를 만드는 목수가 되기 위해 5년간 선박학교에 다녔는데, 그곳 학기당 학비는 500만원이었다. 부부는 집을 줄였다. “로망이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잖아요. 나이 들어 하는 공부이니 성취의 속도도 젊을 때와는 다르죠. 가난해지는 것 각오해야 해요. 무직에 대한 두려움도 떨쳐야 하고요.” ③ 둘 다 뜬구름을 잡으면 안 된다 의사 공부는 길어도 끝이 있다. 면허증이 있으면 굶을 일은 없다. 반면 배를 만드는 목수는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을지 막연하다. 창혁 씨가 회사를 그만 둔다고 했을 때도 시댁 식구들은 영이 씨에게 “네가 말려야 한다”고 했다. “만약 둘이서 화가와 배우가 되기 위해 시소 타기를 했다면 불안했을 거예요. 화가로 배우로 성공하기는 어렵잖아요. 둘 중 하나는 결과가 확실한 꿈을 꾸어야지요. 그리고 부부가 같은 쪽을 바라보면 힘들어요. 그럼 저희처럼 시차 공격이 불가능할 겁니다.” ④ 자아실현이 노는 핑계가 돼선 안된다 의사 공부를 하는 영이 씨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창혁 씨는 노후 걱정 없겠네. 셔터맨 하면 되니”였다. 영이 씨는 “하고싶은 일을 한답시고 놀고먹어선 안된다”고 못을 박았고, 창혁 씨는 회사를 그만두기 한참 전부터 배 목수로 살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했다. 2008년 강원도 원주에 있는 올리버 선박학교에 등록해 5년간 주말 보트 빌더로 살았다. 매주 토요일 아침에 가서 일요일 오후까지 공부한 시간이 모두 1만 시간은 된다. 2013년 5월엔 선주로서 발주해 학교 사람 3명과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꼬박 2년 매달린 끝에 9명이 탈 수 있는 22ft(6.7m) 길이의 레저용 케빈 크루저 ‘올리버 노바’를 완성했고,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동력수상레저면허와 배를 싣고 다닐 트레일러 면허도 땄다. “남편이 배 목수가 되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황당했어요. 배에 관한 책을 쓰고, 배를 만들어 전시회를 하고, 그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겠다니, 정말 황당하잖아요. 이번 전시회를 보고 좀더 믿어줄 걸 하고 후회했죠.”⑤ 기브 앤 테이크, 받았으면 갚아라 시소는 함께 타는 것. 내가 올라가면 다음엔 상대를 띄워줘야 한다. 아내가 오랜 수련 기간이 끝나고 전문의가 됐을 때 남편은 말했다. “나도 인턴, 레지던트 기간이 필요해. 5년을 줘. 그 후엔 내가 먹고사는 건 내가 해결하리다.” 아내도 동의했다. “내가 10년간 공부했으니, 이 사람에게도 4, 5년은 줘야죠. 10년 전 남편이 불안해했으면 저도 사고 못 쳤을 거예요. 회사 그만두고 의사 공부 하면서 힘들 때마다 징징거리면 남편이 다 받아줬는데, 이젠 내가 서포트 해야죠.” 창혁 씨는 당분간 헤밍웨이처럼 살 계획이다. 배타고, 배 짓고, 낚시하고, 글 쓰면서, 5년 후의 수익 모델을 찾을 생각이다. 먼저 올 가을 ‘심각한 취미’(나남)라는 책이 나온다. 배 만들기란 취미로 하기엔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심각한’ 취미란다.⑥ 서로의 꿈을 반복적으로 얘기하라 꿈꾼다는 건 때론 피곤한 일이다.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가난도 감수해야 한다. 그럴 때 힘이 되는 건 그 꿈에 대해 자꾸 얘기하며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꿈의 대화는 따로따로인 계획을 부부생활에 맞게 조율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아내는 봉사하는 삶을 꿈꾸죠.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을 하고 싶어했어요. 어느 날은 에티오피아로 함께 가자고 하더군요. 난 ‘아프리카는 싫다’고 했죠. 너무 착하게 살려고 애쓰지 말라고 했어요.” 의사 일도 하고, 배도 탈 수 있는 곳은 어딜까. 둘은 곳곳을 답사한 끝에 강원도 강릉에 정착했다. 강릉엔 아산병원이 있고, 올리버 선박학교 교육장이 들어선다. 개인병원이 아닌 아산병원이라면 공공 의료 성격을 갖추고 있어 병원이 아닌 환자를 위해 일하고 싶어 하는 영이 씨의 요구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⑦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라 둘의 시소타기는 ‘인생 후반부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남녀 모두 갱년기가 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되죠. 인생 2막을 버벅대며 시작하지 않으려면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기자로서 입품, 글품으로 살았는데 앞으로는 일품으로 살아야지 했어요. 몸을 써서 사는 일. 마침 아내의 공부가 끝나고, 아들의 군 복무도 끝나 있었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돈은 최저 생계비 정도만 벌면 되죠. 의사는 그러기에 좋은 직업이에요. 의사인 나를 정말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어요.” 부부는 멀지 않은 미래를 그려본다. 에메랄드 빛 바다의 항구엔 창혁 씨가 만든 배로 가득하다. 항구의 클럽하우스 옆엔 항해자들을 위한 클리닉이 있고, 그곳에 흰색 가운을 입은 영이 씨가 일한다. 언젠가는 부부가 병원선을 탈 것이다. 남편이 건조한 배에 아내의 진료용 도구를 싣고 외딴 섬을 돌며 배도 아픈 몸도 고쳐주면서 사는 그런 인생….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일하는 엄마, 집안일 하는 아빠. 이런 역할 분담이 일반적인 가모장(家母長)제 사회로 가는 걸까. 여성 가장을 뜻하는 여성 가구주가 늘고 있다. 여성 가구주란 남편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 남편과 사별 또는 이혼했거나 미혼으로 가장 역할을 하는 경우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여성 가구주는 해마다 증가해 올해는 약 531만3000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실직한 남편 대신 식구를 먹여 살리는 가구주(배우자가 있는 여성 가구주)도 132만3000가구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초식남’과 ‘알파걸’이라는 유행어가 말해주듯 선진국에선 가모장제로의 이행이 한국보다 빠른 편이다. 알파걸들이 커서 ‘알파주부’가 되는 것이다. 미국은 2009년, 영국은 2010년부터 전체 일자리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미국 저널리스트 해나 로진은 저서 ‘남자의 종말’에서 체력이 아닌 사회 지능과 의사소통 능력 등이 요구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남자를 제치고 있으며 집에서 살림하는 ‘전업남편’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선 전업남편에 대해 여성들의 거부감이 강하다는 사실. 결혼정보업체인 선우 부설 한국결혼문화연구소에 의뢰해 선우의 남녀 회원 46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남편이 전업주부 역할을 하는 데 대해 남성은 ‘찬성한다’가 48.3%로 ‘반대한다’(29.2%)보다 훨씬 많았다. 이에 비해 여성의 경우 반대 의견(67.0%)이 월등히 많았다. 이는 남편이 일을 그만둬도 집안일은 여자가 다 하게 되는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남옥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장은 “여성의 교육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있다. 아내가 가장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황현호 한국부부코칭센터소장도 “바깥일은 남자, 집안일은 여자라는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잠재적인 전업남편들에게 “직업이 있을 때의 직함을 나와 동일시하면 실직 후의 생활에 적응하기가 더욱 힘들다”고 조언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남편의 실직 후 3년째 가장 역할을 하는 김모 씨(40)의 이야기를 일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여보, 아무래도 나 그만둬야겠어, 회사….” 나는 말릴 수가 없었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는 꽤 오랫동안 어려웠다. 회사 형편이 다시 좋아질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오래 못 다닐 거라면 퇴직금 한 푼이라도 더 챙겨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나와 다른 직장을 찾아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맞벌이니 끼니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래, 고생했어. 한두 달 쉬면서 다른 직장을 알아보자.” 그렇게 나는 우리 집 가장이 됐다. 길어야 1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외벌이 가장 노릇을 한 지가 2년이 넘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가족 모두가 즐거웠다.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받던 남편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남편은 매일 아침 남매를 초등학교에 데려다 주고, 학교가 끝난 뒤 아이들이 돌아오면 간식 및 학원 스케줄과 숙제를 챙겼다. 아이들은 아빠가 챙겨주는 간식을 신기해하며 잘 먹었고, 신경질적인 엄마보다는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아빠와 공부하는 걸 더 좋아했다. 직장에 다닐 땐 집안일엔 손도 대지 않던 남편은 청소도 하고 세탁기도 돌렸다. 하지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자 집 안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남편은 구직용 웹사이트를 뒤적이고 대학 동창이나 선배들을 만나고 다녔지만 괜찮은 일자리의 면접 기회를 갖기는 어려웠다. 이것저것 자격증 수험서를 사들고 들어와도 끝을 보는 경우는 없었다. 내가 “자영업 쪽으로 알아보라”고 하면 “치킨집 열었다 열에 아홉은 망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실직 기간이 길어지자 남편은 의욕을 잃어갔다. 요즘은 바깥 약속도 없고, 내가 출근해 일하는 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눈치다. 나는 남편이 놀아 고민이라는 얘기를 털어놓을 친구가 몇 있는데, 남편은 실직 후 인간관계도 끊긴 듯하다. 이제는 집안일도, 아이들 돌보는 일도 안 한다. 얼마 전부턴 컴퓨터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늦게까지 게임을 하는 날이면 늦잠을 자느라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일도 빼먹는다. 남편은 무료해 죽을 지경인데 나는 바빠 죽겠다. 맞벌이 시절 가사도우미가 하던 일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됐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새로운 일터에 출근한 것 같다. 저녁상 차리고, 먹고, 치우고, 청소기를 돌린다. 아이들 숙제 봐주는 것도 다시 내 일이 됐다. 지친 몸으로 빨래를 개고 있는데 남편이 옆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면 속에서 열이 확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참는다.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을까 봐 겁이 난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내가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정규직인 게 어디냐고. 내 단골 마트에도 비슷한 처지의 여성이 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둬 아내가 마트에서 하루 9시간씩 일해 먹고산다. 오후 10시까지 서서 일하니 발바닥이 아프고, 가족과 저녁상에 마주앉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그 집에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못한 아들도 있다. 내가 가장 무서운 건 남편이 무너지는 거다. 가족 외식 후 번번이 내가 계산할 때, 명절에 거래처에서 내 앞으로 선물이 들어올 때 남편이 기죽지 않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아이들도 아빠 눈치를 본다. 어릴 적엔 “아빠랑 결혼할거야”라고 하던 딸이 요즘은 “난 결혼 안 해”라고 한다. 아빠는 집에서 노는데 엄마 혼자 회사일하랴 집안일하랴 힘든 모습을 보니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거다. 애 아빠가 노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딸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는 이유를 건너 건너 듣고는 억장이 무너졌다. 성인 남자가 반바지 입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 무서워서 딸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얘기였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미국에선 남편보다 수입이 많은 전문직 아내가 돈을 벌고 남편은 집안 살림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자는 직장이 없으면 전업주부지만 남자는 그냥 백수다. 내가 그 여자들만큼 똑똑하지도, 많이 벌지도 못해서일까. 일 없이 놀면서 집안일도 하지 않는 남편이 밉지만, 남편이 나 대신 진짜 전업주부가 되는 건 더 싫다. 둘 중 하나가 직장을 관둬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잘리는 게 낫겠다 싶다. 나이 마흔 둘에 일없이 집에서 노는 남편, 정말 봐주기 힘들다.■엄마 家長으로 살아보니“남편은 학습지로 아이들 가르치고 집안일도 아이들과 함께해요. 직업은 없지만 성실하게 사니 큰 문제는 없어요. 제가 벌면 되죠 뭐.” (계약직 회사원 전모 씨·40) “취업 면접 때 꼭 물어보더라고요. 남편이 뭐 하느냐고요. 제가 일하는 건데 왜 남편 직업을 묻나요?” (백화점 식품부 직원 이모 씨·60)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1차 서류전형 합격 문자를 받고 눈물이 나네요. (아이 키워 놓고 다시 일하려고) 40군데쯤 이력서 넣었는데 학습지 회사 말고 처음 받은 합격 통보예요. 하루 2∼3시간 단순 알바조차도 아무 연락이 없어 제 무능에 많이 좌절했어요. 아줌마는 노동시장에서조차 기회가 없네요.” 대표적인 여성 커뮤니티 사이트인 ‘82쿡’에는 이처럼 재취업과 관련한 글이 많이 올라온다. 통계청에 따르면 ‘경력 단절 여성(경단녀)’은 지난해 4월 현재 197만7000명. 이 중 30대가 109만5000명으로 가장 많다. 30대 기혼 여성의 36.7%가 경단녀다. 경력 단절의 이유는 결혼(41.6%) 육아(31.7%) 임신과 출산(22.0%) 자녀교육(4.7%) 순. 경단녀 문제를 연구 중인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녀 양육과 일 사이에서 균형 잡기가 어려운 워킹맘들은 조직이 기회를 주지 않거나 따를 만한 롤 모델이 없을 경우 그만두기 쉽다”며 “경력 단절 후엔 이전 수준으로 재취업하는 것은 어렵고, 그보다 낮은 수준으로 취업했다가 다시 경단녀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실제로 82쿡에는 눈높이를 낮춰 재취업에 성공했다 보수가 적고 비전이 없거나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다고 호소하는 글이 많다. “집안 호령하다가 재취업해 젊은 상사에게 지적받으니 못 참겠어요.” “월급이 초라해요. 고용주는 적은 월급 때문에 아줌마 채용한 거니 올려 줄 생각이 없는 듯해요. 신입사원들은 월급도 많고 직급도 높게 들어오네요.” 김종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고용연구센터장은 “여성의 취업에는 대다수가 찬성하면서도 여성이 결혼이나 출산과 무관하게 일하는 것이 좋다는 견해는 소수에 그친다”며 “경단녀 문제는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극복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진단했다. 특히 20대 청년 실업이 심각한 요즘에는 “왜 살림하던 아줌마들까지 끼어드느냐”는 적대적인 시선도 넘어야 할 산이다. 윤수경 고용노동부 고용문화개선정책과장은 “경력이 오래 단절된 여성들은 이력서 쓰기와 면접 기술부터 조직 생활 방식이나 소통 기술 등 익혀야 할 것이 많다”며 고용노동부의 경단녀 취업 프로그램을 활용할 것을 권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내 모습이 낯설게 보이더군요. 어디서도 배우지 못한 엄마 아내 며느리 역할을 하면서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어요. 그런데 40대가 되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됐죠. 아이가 학원 가고 없는 시간에 생각해요. 내가 뭘 하고 싶었더라? 앞으로 난 뭘 하고 살아야 하지? 질풍노도의 40대죠.”(정미경 씨·48·서울 양천구 목동) 여성에게 40대는 신체적 심리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다. 신체적으로는 폐경에 가까워지고, 결혼생활은 권태기에 접어들 때.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48)는 “30대의 젊음도, 50대의 홀가분함도 없는 40대는 힘든 시기”라며 “50대가 되면 몸이 가벼워지고 자녀 대학입시도 끝나 마음을 비우게 되며 남편과는 친구 같은 관계로 정리된다”고 설명했다. 중년의 위기는 전 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통과의례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40대만의 특수한 어려움이 있다. 40대는 ‘X세대(1968∼1974년 출생)’에 해당한다. 어린 시절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대학에선 정치적 민주화를 경험했으며, 취업 걱정 없이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누린 세대다. 이나미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장(54)은 “한국의 40대는 열심히만 하면 내가 꿈꾸는 대로 된다고 믿고 살았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며 이것이 착각임을 깨닫게 됐다”며 “정서적으로 저항력이 없는 취약한 세대”라고 했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자신감이 줄어든 중년 여성들은 피부 미용실을 찾고, 헬스클럽 이용권을 끊고, 문화 강좌를 듣는다.(‘중년기 여성 소비자의 자신을 위한 소비에 대한 탐색적 연구’, 소비자정책교육연구 2013년) 이 같은 엄마들의 노력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김종윤 씨는 고려대 석사학위 논문 ‘40대 중년여성의 생활 스트레스와 스트레스 대처방식이 가족의 건강성에 미치는 영향’(2014년)에서 “수도권 지역 4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이들은 가사, 건강, 직장, 자녀 교육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이는 가족의 행복도에도 나쁜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한국의 엄마들에겐 40대도 질풍노도의 시기다. 신체적으로 한풀 꺾이는 나이인 데다 자녀 교육 문제, 남편이 조기 퇴직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노부모 부양까지 온갖 짐을 짊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맞벌이를 하는 40대 여성들의 경우 더욱 큰 성과를 요구하는 직장 스트레스까지 겹쳐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40대 엄마들이 털어놓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20대 땐 모든 게 서툴고 두려웠어요. 30대에 결혼, 임신, 출산을 겪으며 힘들기도 했지만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40대는 두렵네요. 더이상 젊지도 않고 신경 써서 꾸며 봐도 아줌마일 뿐…. 40대의 삶은 어떨까요?” 맞벌이를 하며 8세 딸을 키우는 주부 A 씨(40)는 최근 여성 커뮤니티 사이트 ‘82쿡’에 이런 질문을 올렸다. 동아일보 창간 95주년 기획 ‘2020 행복원정대-엄마에게 날개를’의 인터뷰에 응한 40대 엄마들이라면 이런 댓글을 달았을 것이다. “각오하세요. 40대가 고비예요.” 중산층 30∼50대 엄마 50명을 인터뷰한 결과 40대 엄마들의 행복도는 평균 6.5점(10점 만점)으로 30, 50대 엄마들보다 낮았다. ‘나는 몇 점짜리 엄마인가’라는 질문에도 가장 낮은 점수(6.0점)를 주었다. 이들은 대학입시와 경단녀(경력단절여성) 문제, 조기 퇴직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감에 노부모 부양까지 엄마들의 모든 고민거리를 짊어지고 있었다.○ 일과 아이 사이의 외줄타기 육아 단계를 지난 40대 엄마들의 관심사는 자녀 교육과 일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자녀의 성공’과 ‘몰두할 수 있는 일’을 1, 2순위로 꼽았다. 30대, 50대 엄마들과 달리 ‘부부관계’를 선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애들이 고1, 고3이어서 온통 애들 성적 생각뿐이죠. 열심히 한 만큼, 실력만큼 대학 간다면 불만이 없을 텐데 요즘 대학입시는 로또 같아요. 대학 나와도 취업이 어렵다지만 그래도 대학마저 못 가면 더이상 패자부활전은 없는 사회잖아요.”(한모 씨·44·전업주부) “육아와의 사투 끝에 경단녀가 됐어요. 아이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돌봄교실’에 보낸다고 하면 (아직 어리니 엄마가 돌봐야 한다며) 짐짓 걱정스럽게 충고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면 폭발하려는 걸 꾹 참아야 하죠.”(유모 씨·43) 특히 40대 엄마 중에서도 맞벌이를 하는 경우 행복도(6.1점)와 자기 평가 점수(5.7점)는 매우 낮았다. “내가 늙어가는 것, 아들 성적, 직장 스트레스까지 삼중고예요. 아이가 ‘밋밋한 대학’에 갔어요. 뒷바라지를 못했다는 자책감이 커요. 직장에서도 후배들에게 처지는 느낌이에요. 요즘 애들 스펙이 장난이 아니잖아요.”(강모 씨·45·공기업 직원) “대학입시 전형이 수백 가지여서 엄마가 전략을 잘 짜야 애가 대학에 갈 수 있어요. 이건 양극화의 고착이고 직장맘들에겐 좌절감을 안기는 제도죠. 엄마 월수입이 700만 원 이하이면 직장 다니는 것보다 아이 키우는 게 낫다는 얘기도 해요. 이래서야 고학력 경단녀들이 국가 경제에 기여할 수 있을까요?”(김모 씨·41·회사원)○ 노부모 부양에 늦둥이까지 40대 엄마들이 ‘나의 행복 조건’ 3순위로 꼽은 것은 가족의 건강이었다. 양가 부모가 병들어 걱정이고, 명예퇴직한 남편 대신 가장이 된 내 건강이 걱정이었다. “시아버지는 요양원에 모셨어요. 친정어머니는 저를 포함해 세 딸이 돌아가면서 모시고요. 월 50만 원 요양원 비용과 양가 어머니 생활비까지 부담이 꽤 커요. 그거야 자식 된 도리라지만 속상한 건 시부모님과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며느리 탓을 하는 문화예요. 웃어른이 잘못하는 경우도 많은데….”(강모 씨·49·교사) “남편이 실직했어요. 퇴근 후 집에 오면 다른 일터에 출근한 듯 집안일과 애들 교육에 시달리죠. 나 혼자 살아보고 싶어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주인공 김혜자처럼 안식년을 가든가.”(장모 씨·41·회사원) 특히 만혼 풍조로 출산이 늦어지면서 육아 부담에 힘들어하는 40대도 있었다. “나이 마흔에 아이를 얻은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다만 우리가 너무 빨리 건강을 잃게 되면 어쩌나 걱정됩니다.”(이모 씨·42·회사원) 82쿡에도 늦은 육아를 하는 엄마들의 고생담이 많이 올라온다. “요즘 교육정책도 빠르게 바뀌고 엄마들도 극성인데 늙은 엄마는 힘들어요.” “출산이 늦으니 친정 엄마에게 산후조리나 육아도움을 바랄 수 없어 서러워요.” “둘째가 첫아이랑 열두 살 차이인데 첫째가 자꾸 물어요. 아빠가 병들어 일 못하면 자기가 동생 공부시키고 장가보내야 하느냐고요.” “어느 나라나 자녀가 사춘기일 때 엄마들은 가장 불행하다. 한국에선 자녀보다 엄마 쪽에서 분리불안을 느낀다. 아이를 떠나보내라. 나를 기쁘게 하는 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에 침잠해야 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56) “직장 여성들에게 40대는 자녀 양육의 부담이 크고 직장에서도 뭔가 보여줘야 하는 힘든 시기다. 아침이나 잠들기 전 잠깐이라도 오직 자기만을 위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은영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53·사회심리학 박사)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지킴이, 안식처, 기둥, 밑거름…. 엄마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더 노력해도 덜 얻는 저성장이 새로운 일상이 된 ‘뉴 노멀(New Normal)’ 시대. 사람들은 엄마를 나침반 삼아, 오아시스 삼아 사막 같은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엄마들은 안다. ‘모든 게 엄마 덕분’이라는 고마움은 언제든 ‘모든 게 엄마 탓’이라는 원성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2020년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까지 이어질 특별기획 ‘행복 원정대 2020프로젝트’의 올해 주제는 엄마의 행복이다. 동아일보는 엄마들의 고민과 부담감을 가늠하기 위해 30∼50대 중산층 ‘엄마’들 50명과 남편(20명), 10∼20대 자녀(20명), 시부모와 친정부모(10명) 등 가족 구성원 50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 100명과의 심층 인터뷰로 잡아내기 힘든 엄마와 가족들의 속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국내 대표적인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82쿡’과 ‘DC인사이드’에 올라온 엄마와 관련된 게시글의 1억여 개 단어를 분석했다. 인터뷰에 응한 엄마들은 스스로를 ‘종신형 집사’ ‘멀티플레이어’ ‘조력자’로, 가족들은 ‘정신적 기둥’ ‘내비게이션’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규정했다. ‘집사’든 ‘기둥’이든 역할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그 때문인지 엄마들은 가족이 짐작하는 것보다 행복감을 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엄마들은 행복도를 10점 만점 중 7.2점, 가족들은 엄마가 느끼고 있을 행복도를 7.4점이라고 답했다. 가족 구성원별로는 남편들이 아내의 행복도(7.9점)를 높게 추정했고, 미래에 엄마가 될 딸들은 엄마의 행복 점수(6.6)를 짜게 주었다. 전업주부(7.8점)가 직장 생활을 하는 엄마(6.8점)보다 행복도가 높았고, 자녀의 대학 입시와 양가 노부모의 건강 문제, 남편의 조기 퇴직 문제 등으로 고민이 많은 40대 엄마들의 행복도(6.5점)가 두드러지게 낮았다. ‘엄마’의 역할(아내와 며느리 역할 포함)을 잘 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엄마 본인들은 자신 없어했다. 가족들은 엄마의 수행 점수를 8.8점(10점 만점)으로 높게 평가했지만 엄마들은 스스로에게 6.5점을 줬다. 전업주부(6.7점)보다 직장맘(6.5점)이, 나이대별로는 40대 엄마(6.0)들이 스스로에게 인색한 평가를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글에 대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 엄마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남편의 경제력과 외도 문제였다. 자녀에 대해서는 성적과 대학 입시에 관심이 많았으나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자녀의 자존감과 행복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인간의 역사에는 숱한 전쟁이 있었지만 무기를 내려놓고 지낸 시간이 훨씬 길다. 싸움보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극한 갈등이 빚어내는 스펙터클이 없어 전쟁사보다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는 평화로운 시기 조약의 역사에 조명을 비춘다.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인 히타이트-이집트 조약(기원전 1274년으로 추정)에서 시작해 지구적 환경 재앙을 막기 위한 리우환경협약(1992년)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조약 64개를 추렸다. 이 중에는 국가 간 부동산 거래가 많다. 가장 주목할 만한 거래는 1803년 미국과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매입 협정이다. 당시 기준으론 미국 영토의 50%, 지금으로 치면 23%에 해당하는 너른 땅이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뉴올리언스를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에 “팔지 않으면 영국과 손잡고 프랑스를 치겠다”고 했고, 나폴레옹은 “아예 루이지애나를 통째 사라”고 했다. 나폴레옹으로선 미국의 위협도 겁났지만 “루이지애나는 사막 같은 쓸모없는 땅”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루이지애나는 미국이 20세기 초강대국으로 일어서는 토대가 됐다. 저자는 “역사상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국가는 많았지만, 이처럼 협상 테이블에서 대국이 된 나라는 거의 없다”고 평했다. ‘전쟁을 최대한 덜 비참하게 하려는’ 제네바 협약은 인류의 위대함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부상병은 국적을 불문하고 구호를 받는다”는 합의는 인도주의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자는 엄중 조사’ 방침에 나토 회원국의 활동은 열외다. 국사와 세계사 시간에 빨간 줄 치면서 조약의 주요 내용과 역사적 의미를 달달 외워야 하는 고교생들이 보충 교재로 이용하기 좋은 책이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전시 주제를 모르고 봤다면 ‘아프리카’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전시장을 둘러봐도 서구 예술사조 야수파에 영감을 준 아프리카 가면이나 토속적인 공예품 같은 건 없다. 사자와 얼룩말이 뛰어다니는 아프리카 풍경도 없다. 그럼에도 전시 제목이 ‘아프리카 나우’, 지금의 아프리카이다. 내년 2월 15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아프리카 나우’전은 국내 최초의 아프리카 현대미술 전시다. 아프리카라는 제목의 알리바이는 참여 작가 20여 명이 본인, 혹은 조상이 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사실에 있다. 존 아캄프라, 케힌데 와일리, 티에스터 게이츠를 비롯해 참여 작가 대부분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공부하고 뉴욕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파리 퐁피두센터 같은 주류 미술계에서 전시하며 주목받는 작가다. 그래서 전시 작품 100여 점은 ‘때’묻지 않은 원시성이나 소수자의 억눌린 한보다는, 멀쩡한 그림에 코끼리 똥칠을 하는 실험정신(크리스 오필리)과 인종 문제마저 한발 떨어져 보는 여유를 담고 있다.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건 퍼포먼스 작가 닉 케이브의 비디오 작품이다. 알록달록한 털옷을 뒤집어쓰고 한바탕 탈놀이를 펼치는 영상이다. 한 겹 외피만 둘러도 인종 성별 계층 따위는 가려지지 않느냐는 메시지를 유쾌하게 전한다. 사진작가 논시케렐로 벨레코가 남아프리카공화국 거리의 패셔니스타를 찍은 사진들은 무거운 과거에서 자유로운 아프리카 젊은이들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모잠비크 작가 곤살로 마분다의 두툼한 입술과 커다란 눈이 익살스러운 설치작품들을 들여다보면 오싹함을 느끼게 된다. 모국의 내전 후 남겨진 AK47 소총, 로켓포, 권총들의 잔해를 재료로 썼다. 총과 총탄으로 장식한 왕좌는 모잠비크만의 이야기일까. 직설적인 풍자만화가 안톤 카네마이어조차 ‘남아공은 무지개 나라’라는 주장에 ‘무지개엔 검은색이 없네’라는 대꾸를 집어넣는 유머를 잊지 않는다. 흑인과 백인 남자들을 팬티만 입혀 찍은 사진작가 조디 비버는 벗은 여자들 그림만 지겹도록 그려온 서구 미술계를 시원하게 한 방 먹인다. 영국 작가 잉카 쇼니바레의 설치작 ‘Earth(지구)’에 이르면 전시장에서 왜 아프리카를 느낄 수 없었는지 깨닫게 된다. 주먹을 쥐고 한 발을 내디딘 마네킹은 남자인데 치마까지 입었다. 머리 대신 지구의를 달아 놓아 인종도, 국적도 알 수 없다. 마네킹의 옷은 인도네시아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네덜란드에서 대량생산해 서아프리카 식민지에 판매한 천으로 만든 것이다. 글로벌한 현대미술에선 서구적인 것도 아프리카적인 것도 없다. 잔인한 노예제도에 따른 흑인 디아스포라(이산)는 서구 근대국가를 살찌웠을 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의 DNA에도 녹아들었다. 그래서 전시는 다문화 사회로 변해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한국적인 것은 무엇이냐고.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채널A 다큐멘터리 ‘특별취재 탈북’이 제19회 아시안 TV 어워즈 베스트 다큐멘터리 시리즈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탈북’은 11일 오후(현지 시간)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호텔에서 열린 아시안 TV 어워즈 시상식에서 종합편성채널로는 처음으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 부문 대상은 CNN 홍콩지부의 인권침해 고발 프로그램 ‘프리덤 프로젝트’가 받았다. 연출자인 채널A 양승원 PD는 “북한 인권 보호의 필요성을 국제적으로 알리게 돼 뿌듯하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탈북’은 올 4월 북미 3대 국제 미디어상으로 꼽히는 미국 휴스턴 국제영화제에서도 종편 최초로 다큐멘터리 부문 최고상인 대상을 차지해 해외 수상만 두 번째다. 이 프로그램은 일곱 살 꽃제비 김신혁 군을 포함해 북한 주민 15명이 압록강을 건너 탈북하는 과정을 동행 취재하고 이후 김 군의 한국 정착 과정을 추적한 다큐다. 지난해 1월 첫 방송 때 드라마를 제외한 전체 종편 프로그램 중 시청률 1위를 기록했고 같은 해 3월에는 일본 니혼TV가 방영해 11.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탈북’은 지난해 1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받은 데 이어 6월에는 종편 최초로 ‘2014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뉴미디어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채널A 다큐멘터리 '특별취재 탈북'이 제19회 아시안 TV 어워즈 베스트 다큐멘터리 시리즈 부문 2등상인 최우수상을 받았다.'탈북'은 11일(현지시간)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에서 열린 아시안 TV 어워즈 시상식에서 종합편성채널로는 처음으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 부문 1등상은 CNN 홍콩지부의 '프리덤 프로젝트'가 받았다.연출자인 채널A 양승원 PD는 "북한 인권 보호의 필요성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기회가 돼 뿌듯하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탈북은 올 4월 북미 3대 국제 미디어상으로 꼽히는 미국 휴스턴 국제영화제에서도 종편 최초로 다큐멘터리 부문 최고상인 대상을 차지해 해외 수상만 두 번째다. 이 프로그램은 일곱 살 꽃제비 김신혁 군을 포함해 북한 주민 15명이 압록강을 건너 탈북하는 과정을 동행 취재하고 이후 신혁 군의 한국 정착 과정을 추적해 제작한 다큐다.지난해 1월 첫 방송 때 드라마를 제외한 전체 종편 프로그램 시청률 1위를 기록했고, 같은 해 3월에는 일본 니혼TV가 방영해 11.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탈북은 지난해 1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받은데 이어 7월에는 종편 최초로 '2014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뉴미디어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3분의 1을 공유하라. 대안적인 주거문화를 모색해 온 정림건축문화재단은 건축가 9개 팀에 이런 주문을 했다. 100m²(약 30평) 규모의 집을 기준으로 3분의 1을 이웃과 공유하는 방안을 설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1인 가구의 증가로 4인 가족을 기준으로 한 주거문화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인 가구 비율은 26%. 2인 가구까지 합친 비율은 올해 이미 절반(52.7%)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설계한 아파트가 헐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집의 일정 부분을 공유하면 공동체 회복도 기대할 수 있다.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3층 프로젝트 갤러리에서 열리는 ‘협력적 주거 공동체’는 9개 팀의 아이디어를 모아 놓은 전시다. 지난해부터 공동 주거를 공부해 온 건축가 김경란 이진오 김수영의 프로젝트그룹 QJK는 한국 옛집의 안채와 바깥채(혹은 사랑채) 개념을 계단형 아파트 구조에 접목했다. ‘현관+현관쪽 방+이 방에 딸린 화장실’을 합쳐 바깥채로, 나머지 공간을 사생활이 보장되는 안채로 쓰자는 내용이다.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두 집이 이 바깥채를 합쳐 운동실이나 놀이방으로 함께 쓸 수도 있다. QJK는 아파트 주민들이 예약제로 쓸 수 있는 스파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스파의 운영은 아파트 자치회가 맡고, 수익금은 자치회와 양쪽 가구가 절반씩 나눠 갖자는 것이다. 건축가 조남호는 아파트를 입주민들이 직접 짓는 방안을 제시했다. 100가구 정도가 모여 아파트를 직접 지으면 건설사가 주도할 때보다 금융비용과 개발이익이 빠져 주변 시세의 60% 선에서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공유하는 공간에선 입주민들이 인테리어업체, 반찬가게, 어린이방 등을 운영하며 마을화폐가 통용되는 작은 경제 공동체를 만든다. 건축가 황두진은 아파트에서 남아도는 공간을 외부화해 도시농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거실을 텃밭으로 만들어 단지 내 주민에게 임대하고, 수확물을 주민들에게 판매하자는 것이다.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 13일 오후 2시 미술관 지하 1층 세마홀에서는 사회학자와 건축가들이 모여 대안적인 주거 문화를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린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소담스레 눈이 쌓인 시골 마을, 서늘한 새벽 공기를 내뿜는 숲 속 정경, 분홍 꽃잎이 흐드러진 봄날의 꽃나무…. 김준권 작가(58·사진)의 서정적인 풍경화를 보면 두 번 놀란다. 먹빛이 부드러운 수묵화 같은데 뾰족한 칼로 파낸 판화다. 평화로운 풍경을 그려내는 작가는 청년 시절엔 민족해방(NL) 계열로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섰던 투사였다. 1980년대 미술계의 주류였던 민중 화가들은 민주화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목판화가 오윤(1946∼1986)은 40세에 요절해 전설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으로 논란을 일으킨 홍성담 작가(59)는 여전히 직설적 화법으로 시대와 불화한다. 투쟁의 도구가 아닌 예술의 본질로 돌아가 미학적 고민을 하는 이들도 있다. 김 작가가 그런 경우다. 10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그의 회고전 ‘나무에 새긴 30년’은 미술 운동가에서 서정적 목판화가로 선회한 작가의 예술 여정을 시기별로 보여준다. 홍익대 미대 졸업 후 미술교사에서 해직 교사로, 민족미술협의회의 사무국장과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바쁘게 활동하며 억센 선묘 위주의 선동적 작품을 선보였던 작가는 민중미술운동이 동력을 잃자 다른 고민을 해야 했다. “커다란 이념이 아니라 동네 고샅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감동을 표현할 기술이 없더군요.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선에 투입됐던 거예요. 내가 옳다며 떠들던 것들이 실은 무지의 발로가 아닐까 회의했습니다. 다시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떠들썩한 세상 한가운데 서 있던 그는 30대 중반이던 1991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산골짜기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자발적인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에서 전통적인 수묵인화기법을 익히고, 목판화의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다색목판화 우키요에와 중국의 수인판화를 배웠다. 한중일 3국의 목판화 문화를 섭렵한 결과물이 채묵 목판화다. 젊은 시절 여느 목판화가들처럼 서양 종이에 유성물감으로 찍어냈던 그는 지금은 한지에 먹을 안료로 쓴다. 유성판화는 누가 찍든 같은 결과물이 나오지만 수묵판화는 먹의 농도, 목판과 한지의 수분 함량에 따라 작품들이 다 다르다. 그만큼 표현 영역이 넓지만 수분 조절이 어려워 정교한 기술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소재도 바뀌었다. 머릿속 이념을 담아내던 작가는 평범한 이들이 발 디디고 사는 이 땅의 질박한 풍경들을 눈으로, 발로 사생하고 작업실에 앉아 되새김질하며 목판에 새겨낸다. 그가 30년간 그리고, 파고, 찍은 작품은 550여 점. 작품마다 5, 6개의 판을 새겼으니 3000개가 넘고, 작품당 20점 미만의 에디션을 찍었으니 6만 장이 넘는 판화를 내놓은 셈이다. 이번 전시에는 연도별로 7, 8점씩 250여 점을 전시한다. 작업실에 ‘한국목판문화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건 작가는 “목판화란 죽은 나무를 살려내는 일”이라며 “내가 살려낸 것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다”고 했다. 29일까지. 02-733-1981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 뾰족한 수를 알려주진 않는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다. 안 하니까 못하는 것일 뿐. 인지심리학자인 저자들은 과학적인 연구에서 효과가 검증된 학습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건 △힘들여 배울수록 오래 남는다 △교재를 반복해서 읽는 것보다 시험 한 번 보는 게 낫다 △벼락치기보다 시간 간격을 두고 공부하라 △여러 주제를 한꺼번에 공부하라 △답 보기 전에 우선 풀어보라는 것이다. 대개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 효과를 입증하는 실험 결과들, 그리고 그 학습법에 따라 고득점을 받은 성공담들은 흥미롭다. 먼저 시험의 중요성. 어느 중학교의 학생들은 교재의 일정 부분은 한 학기에 세 번 시험을 보고, 나머지 부분은 시험 보는 대신 세 번씩 복습했다. 한 달 후 치른 시험에서 학생들은 시험을 봤던 범위에선 평균 A―를, 복습만 했던 범위에선 C+를 받았다. 몇 달 후 치른 재시험에서도 결과는 유지됐다. 시험을 통해 배운 것을 기억에서 꺼내 보는 연습을 함으로써 기억이 단단해지고, 기존 지식과의 연관성도 강화되며, 망각도 막아주기 때문이다. 집중적인 학습법은 비효율적이다. 책에는 외과 수련의들의 미세혈관 수술법 수업 사례가 나온다. 이들 중 절반은 하루에 몰아서, 나머지 절반은 일주일에 1회씩 4주간 배웠다. 평가 결과는 몰아서 배운 그룹이 훨씬 못했다는 것이다. 벼락치기 공부는 단기기억을 이용한다. 배운 걸 오래 기억하려면 사전 지식과의 통합이 일어날 시간이 필요하다. 또 약간의 망각 후엔 지식을 꺼내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기억도 강화된다. 어렵게 배울수록 오래 남는다는 말이다. 가장 새롭다 싶은 학습법은 두 가지 주제 이상을 한꺼번에 공부하는 ‘교차 연습’이다. 체육 수업의 사례는 놀랍다. 8세 꼬마들이 90cm 거리에서 바구니에 주머니 던져 넣기 시험을 치렀다. 절반은 90cm 떨어진 곳에서, 나머지 절반은 60cm와 120cm 거리에서 연습했다. 결과는? 90cm 거리에선 한 번도 연습하지 않은 아이들의 성적이 월등했다. 여러 가지 상황에 적응하는 유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여러 화가의 작품을 한꺼번에 배운 학생들이 특정 화가의 작품 공부를 끝낸 뒤 다음 화가로 넘어간 학생보다 화가와 그림을 연결짓는 시험 성적이 좋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림을 어떤 화가가 그렸는지도 더 잘 맞혔다. 저자들은 자기주도적 학습의 비효율성도 경고한다. 특히 공부를 못하는 학생일수록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객관적인 피드백은 필수적이다. 책을 읽다 보면 묻게 된다. 부담을 줄여준다며 시험을 없애는 것이 교육적인가. 3년에 걸쳐 배울 내용을 한 학기에 몰아서 배우는 방식은 효율적인가. 새로운 교육 제도를 내놓을 때 그 효과를 입증할 만한 연구들은 충분히 검토한 걸까. 미국에서 올 4월 출간됐다. 원제는 배운 게 머리에 꼭 들러붙게 하라는 뜻에서 ‘Make it stick’, 부제는 ‘The science of successful learning(성공적인 학습과학)’.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어느 별에서 왔을까. 그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나 보다.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이중섭(1916∼1956)과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함께 쓰고, 정상화(82) 최만린(79) 윤명로(78) 같은 원로 화가들을 길러낸 재미화가 김병기 화백(98)이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시차’ 때문에 잠시 어지러웠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내년 3월 1일까지 과천관에서 개최하는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 올해의 마지막 전시 ‘김병기: 감각의 분할’전이다. 그는 최고령 현역 작가다. 60년 넘게 일궈온 화업을 압축하는 회화 70여 점과 드로잉 30여 점이 걸려 있는 전시장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마운틴의 풍광이 내다보이는 작업실에서 그려낸 신작들도 있다.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내 생긴 가느다란 선과 굵은 붓질이 거칠게 지나간 사이로 앙상한 인체가 숨어있고(‘방랑자’·2012년), 캔버스를 채운 붉은 물감에선 몬드리안과 단청의 색감이 공존한다(‘연대기’·2013년). 구상과 추상,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넘어보려 그는 여전히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1+1은 2일까요?” 개막일인 2일 전시장에서 만난 김 화백은 대뜸 물었다. “예술에서 이런 절충주의는 타격의 대상입니다. 1+1이 3이나 4 혹은 0이나 9가 돼야 창조적인 제3의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어요.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사고가 있을 뿐이지요.” 1916년 평양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난 불발탄 같았다”고 했다. 화가이자 문인, 고미술 수집가이자 한국 최초의 미국 영화 배급업자였던 아버지의 부재가 오래도록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능을 물려준 건 아버지 김찬영이었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도쿄에서 서양화를 배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김환기 이중섭과 추상을 배우고 돌아와 한국 추상미술 정립을 주도했다. 화가이자 비평가, 교육 및 행정가로 한국 현대미술의 토대를 닦던 그는 49세 때 미국으로 떠나 그림에 집중했다. “한국을 떠난 지 49년이 지났네요. 한국에선 서양만 생각했는데, 서양에선 동양만 바라봤어요. 이런 멋진 나라를 두고 어디에 살았나 싶습니다.” 그의 신작들도 동양으로 기울어가는 듯하다. 색이 빠지고, 안료의 두께도 얇다. 칠하기보단 긋는다. 그만큼 투명하고 여백이 많다. 김 화백은 “요즘은 자꾸 지우게 된다”고 했다. “(스위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막대기 같은 조각상처럼 나도 맘에 안 들어 떼어내게 돼요. 다 떼어내고 나면 공간이 생깁니다. 무와 비움의 세계죠.” 김 화백은 “이젠 여생(餘生)이랄 것도 없다”고 했는데, 영상에서 본 작업실 속 그의 붓질은 힘찼다. 후학들에겐 “선배를 따라 해선 제대로 계승을 못한다. 부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전시장을 돌며 그림을 설명하던 김 화백이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제 작품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과정적일 뿐이지요.”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