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이소연 기자

동아일보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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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소연 기자입니다.

always99@donga.com

취재분야

2025-11-07~2025-12-07
문화 일반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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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10%
역사7%
사건·범죄7%
사회일반2%
  • “늘 올곧은 말씀 해주신 분” 故김동길 교수 추모 발길

    “한국 사회를 위해 늘 올곧은 말씀을 해주신 스승 같은 분이셨습니다.”(김동건 아나운서) 4일 세상을 떠난 김동길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김옥길기념관에는 5일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트레이드마크인 안경과 콧수염,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환하게 웃는 고인의 영정 사진이 조문객을 맞았다. 이날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 등이 조문했다. 김옥길기념관은 문교부 장관을 지낸 고인의 누나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1921∼1990)을 추모하기 위해 고인이 1999년 자택 마당에 건립했다. 조문객은 한국 정치를 비판하며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긴 고인을 회고했다.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늘 깊은 영감을 줬다”고 애도했다. 안 의원은 “한국 정치사와 지성사에 남긴 족적은 길이 기억될 것”이라며 추모했다. 고인은 올해 1월 당시 국민의당 대선 후보였던 안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고인은 1970, 80년대 민청학련 사건 등에 연루돼 연세대에서 두 차례 해직됐다가 복직됐다. 이후 강연과 칼럼으로 주목받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1996년 정계 은퇴 뒤 보수 논객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승만 대통령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은 없다”,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 경제를 이만큼 만든 건 인정해야 한다”는 말은 세간에 회자됐다. 2019년 유튜브 채널 ‘김동길TV’를 개설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7일까지 치러지며 시신은 고인의 뜻에 따라 연세대 의대에 기증된다. 서대문구 자택은 김옥길 전 장관이 총장을 지낸 이화여대에 기부하기로 했다. 유족으로 여동생 옥영 수옥 씨가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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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하 청소년에 독립사상 고취 ‘조선소년군’ 100돌

    한국스카우트운동의 마중물이 된 ‘조선소년군’ 창립 100주년을 맞아 5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중앙고에서 ‘조선군 창설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조선소년군은 1922년 10월 5일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에서 시작됐다. 조선소년군을 창설한 이는 독립지사 관산 조철호 선생(1890∼1941)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평안북도 오산학교 체육교사였던 그는 전교생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인촌 김성수 선생(1891∼1955)은 1921년 그를 중앙고 체육교사로 임명했다. 조 선생은 1922년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소년군을 만들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너희는 민족의 화랑이다. 민족을 구하는 선봉이 되라”고 당부했다. 창립 첫해 8명으로 시작한 조선소년군은 4년 만에 전국 학생 1만여 명이 참여한 학생운동 조직으로 성장했다. 조 선생은 1926년 중앙고 학생들을 이끌고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1937년에는 조선소년군을 일본 보이스카우트에 병합하려는 일제에 대항하다 또다시 감옥에 끌려갔다. 조선소년군은 일본 보이스카우트와 강제 병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해 자진해산했다. 조선소년군 총사령장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조 선생은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1년 세상을 떠났다. 조선소년군은 광복 후 ‘대한소년단’으로 다시 출발했고, 그 뒤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조 선생은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중앙중고교는 조선소년군 창설을 기리기 위해 2008년 교정에 ‘한국스카우트발상지비’를 세웠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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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웃픈’ 감정 써보셨죠?… 이모티콘, 제2의 언어로

    《올해 탄생 40주년을 맞은 이모티콘은 이미 모바일 세상에선 ‘제2의 언어’로 자리매김했다. 카카오톡이 이모티콘으로 10년간 벌어들인 수익은 약 7000억 원에 이를 정도. 최근 인종·문화 다양성 논의도 벌어지는 이모티콘의 변천사를 들여다봤다.언젠간 세상에 이런 속담이 생길지도 모르겠다.‘이모티콘 한마디로 대출 빚 갚는다.’ ‘잘 키운 이모티콘, 열 자식 배부르다.’이미 스마트폰에선 문자와 동급. 가끔은 글자보다 표현이 다양하고 상황을 묘사하는 데 더 적확하다. 이모티콘은 21세기 현대사회에선 일상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이모티콘이 올해 탄생 40주년을 맞았다. 1982년 9월 19일 미국 카네기멜런대의 스콧 팔먼 컴퓨터과학과 교수가 학내 온라인 게시판에 ‘:-)’을 올렸을 때 과연 이런 영향력을 상상이나 했을까. 기네스북에 ‘최초의 디지털 이모티콘’으로 기록된 이 사건에 대해 팔먼 교수는 미 CNN과의 인터뷰에서 “인터넷에 글만 쓰던 시대엔 상대의 표정이나 몸짓을 알 수 없어 진의를 구별하기 힘들었다”며 “이모티콘이란 수단이 온라인 세상에서 ‘감정의 교감’을 가능하게 했다”고 밝혔다.특히 한국은 이모티콘에 더욱 열광했다. 미 소프트웨어 회사 어도비의 지난해 보고서 ‘2021년 글로벌 이모지 트렌드’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호주보다 이모티콘 사용빈도가 10%포인트 이상 높다. ‘카카오톡(카톡)’을 만든 카카오에 따르면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출시된 이모티콘은 약 30만 개나 되며, 메신저로 발신한 이모티콘은 2200억 건이 넘는다. 한국의 생활 문화는 물론이고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컬처 자이언트’ 이모티콘의 이모저모를 짚어봤다.》‘마흔살 이모티콘’ 변천사○ “감정 맥락 중시하는 한국말에 적합”한국인의 이모티콘 사랑은 어도비의 보고서에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설문에 응한 이들의 76%가 “글자보다 이모티콘 사용을 선호한다”고 답했을 정도다. 나머지 6개국 평균은 55% 정도다. 한국인은 친구나 연인, 가족 같은 사적인 소통은 물론이고 직장 등 조직생활에서도 이모티콘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한국인은 이토록 이모티콘을 사랑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는 대화에서 ‘분위기’를 중시하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조현용 경희대 한국어교육전공 교수는 “영어나 프랑스어는 문자 그대로 의미를 전달하는 ‘직관적’ 성격이 강하지만 한글은 어떤 상황이나 맥락인지를 봐야 하는 ‘복합적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밥 먹었느냐’는 말은 실제 식사 여부에 대한 질문이기보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 인사로 쓰이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인이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감정 단어’는 430여 개로 다른 언어보다 월등히 많다. 의성어나 의태어의 비율 역시 높다. 이 때문에 비대면 문자로는 소통에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한국 사회의 상호 교감을 중시하는 문화도 이모티콘의 인기에 한몫했다. 딱딱한 문장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윤활유 역할도 할 수 있고, 대답하기 애매한 상황을 적당하게 넘기기에도 요긴하다. 조 교수는 “기분이나 상황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쓰면 글로는 어려운 전체적인 분위기를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어 이모티콘의 쓰임새가 확장됐다”고 설명했다.○ 누적 구매 2100만 명…초등생도 제작이런 배경은 국내 이모티콘 시장의 폭발적 성장을 이끌었다. 카톡이 국내 소셜미디어 시장에서 이모티콘을 처음 선보인 건 2011년 11월경. 이듬해인 2012년 월간 평균 이모티콘 발송량은 약 4억 건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 월 이용자 수가 5000만 명에 이르는 카톡은 한 달 평균 발송하는 이모티콘이 24억 건에 달할 정도다. 자연스럽게 이모티콘 구매자들도 늘었다. 2012년까지 이모티콘을 한 번이라도 구입한 누적 이용자는 약 280만 명에서 지난해 약 2400만 명으로 8.6배로 늘었다. 약 10년 동안 카톡 이모티콘의 총 수익 규모도 약 7000억 원에 이른다. 카카오 관계자는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하면 카톡 이용자 가운데 매달 2900만 명이 최소한 한 번은 이모티콘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모티콘 산업의 성장은 새로운 직업군도 낳았다. 국내에서 현재 ‘이모티콘 작가’라 불리는 이들은 1만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게 일상이었던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많다. 지난해 이모티콘 작가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20대가 49.9%로 가장 많고 30대가 34.5%로 두 번째다. 최연소 작가인 12세 초등학생도 있다고 한다.○ MZ세대, 이모티콘은 자기표현 수단이모티콘은 이제 젊은 세대에겐 ‘문화의 용광로’로 자리 잡는 추세다. 인기 있는 영화나 드라마, 웹툰이 곧장 이모티콘으로 제작되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다. 이모티콘 자체가 하나의 유행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최근 다양성에 관심이 많은 MZ세대의 특성을 반영한 이모티콘도 많다. 이선영 백석문화대 초빙교수는 “개성을 중시하는 MZ세대의 특성이 이모티콘 시장을 더욱 다양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모티콘 산업이 성장하면서 그동안 소수라는 이유로 배제돼왔던 이미지들까지도 상품성을 갖게 됐다”며 “나를 닮은 이모티콘을 쓰고 싶어 하는 요즘 세대 특성상 피부색부터 머리 모양, 패션 등 다채로운 이모티콘이 쏟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모티콘 속에 문화 다양성이 반영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2017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인 라이우프 알후메디 양(당시 15세)이 미 애플사에 “히잡을 쓴 ‘무슬림’ 이모티콘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알후메디 양은 “친구들과 모바일 메신저로 대화할 때 이슬람교도인 날 표현할 이모티콘이 없다. 히잡을 쓴 여성이 뉴스에만 나올 게 아니라 이모티콘에도 등장해 우리 모두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리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애플은 이에 응답해 같은 해 히잡을 쓴 여성 이모티콘을 선보였다. 최근 MZ세대에게 화제를 모은 이모티콘 시리즈 ‘와다다다 흥겹다곰’을 만든 전진주 작가(34)도 이에 공감했다. 전 작가는 “돈보단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 이모티콘 작가가 됐다”며 “가장 나다운 감정을 이모티콘으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반응이 클 줄 몰랐다”고 했다. 2020년 3월 평범한 직장에 다니던 전 작가는 이모티콘을 자체 제작해 카톡에 선보였다. 그는 “친구들과 메신저로 대화할 때 ‘힘들다’ ‘좋다’는 글자만으로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 힘들었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현재 그의 이모티콘 시리즈는 ‘카카오 이모티콘 플러스’에서 10위 안에 드는 인기를 끌고 있다.○ 문화적 다양성 품는 이모티콘 월드이모티콘이 하나의 국제 통용어로 성장하다 보니 이모티콘의 국제표준을 정하는 움직임도 있다. 세계의 모든 문자를 다루도록 설계된 표준 문자 전산 처리 방식인 ‘유니코드(Unicode)’를 규율하는 유니코드 컨소시엄은 2019년부터 해마다 ‘다양성 이모티콘’ 시리즈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유니코드 컨소시엄은 만국 공통의 문자 코드를 제정해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1년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최근 유니코드는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친숙한 ‘좋아요’(엄지손가락 치켜세우기) ‘하이파이브’(손바닥 마주치기) 등의 이모티콘을 3가지 피부색과 성별에 따라 모두 만들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컨소시엄 측은 “남녀는 물론이고 백인과 흑인, 아시아인을 다양하게 표현한 이모티콘이 인종과 민족, 성별의 벽을 허물길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유니코드의 이모티콘에선 ‘이모티콘 강국’인 한국의 영향력도 엿볼 수 있다. 올해 유니코드는 ‘손가락 하트’를 만국 공통의 이모티콘으로 발표했다. 유니코드 컨소시엄은 “손가락 하트는 세계에서 올해 나온 신생 이모티콘 31개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글이 남성으로만 제작했던 과학자, 용접공, 정비공, 농부 등의 이모티콘을 여성으로도 만든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구글은 “어린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모티콘도 사회윤리 국제규범 지켜야이모티콘의 파급력이 갈수록 커짐에 따라 이모티콘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이모티콘의 사회적 윤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카카오는 올해 1월 내부 가이드라인인 ‘이모티콘 창작자 윤리 지침’에 증오발언 근절 원칙을 추가했다. 카카오는 “창작자들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증오발언과 사회 차별을 조장하는 표현을 경계하도록 하자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윤리 지침에는 구체적인 제한이 담겨 있다. △특정 개인·집단을 멸시하거나 조롱하는 표현 △학교폭력 등 집단 괴롭힘 관련 표현 △외모를 평가하거나 비하하는 표현 △특정 질병·장애를 희화화하는 표현 △특정 종교를 희화화하는 표현 등이 담긴 이모티콘은 출시 자체를 금지하기로 했다. 지난해 해당 윤리 지침 마련에 참여한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가장 큰 원칙은 ‘이모티콘을 통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특정 집단을 차별하는 표현이 강화돼서는 안 된다’는 데 초점을 뒀다”며 “다른 메신저 플랫폼들도 하루빨리 협의해 공통의 윤리 지침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도 고려대 언어학과 교수도 “이모티콘은 이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세계인을 연결하는 만국공통어로 자리 잡았다”며 “각국 대표가 참여하는 ‘이모티콘 컨소시엄’을 구축해 인종과 종교, 문화적 차별을 막고 다양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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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산성 숭렬전’ ‘영월군 창절사’ 등 10건 보물된다

    문화재청은 백제 시조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남한산성 숭렬전’(사진) 등 문화재 10건을 29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남한산성 숭렬전은 병자호란 때 임금이 남한산성에 머물며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낸 것을 계기로 1638년 세워졌다. 1795년 정조가 직접 ‘숭렬전’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 등 충신 10명에 대한 제사의례 목적으로 1685년 세워진 강원 영월군 창절사, 통일신라시대 석탑인 경주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등도 보물로 지정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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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서 거래되는 조선 묘지, 두고 볼 수 없었다”

    “조상 묘소에 있어야 할 묘지(墓誌·고인 신분이나 행적 등을 기록한 돌판)가 일본에서 거래되고 있었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두고 볼 수만은 없었어요.” 일본 도쿄에서 고미술업체를 운영하는 김강원 씨(54·사진)는 지난해 8월과 12월 현지에서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던 ‘백자청화김경온묘지(白磁靑畵金景溫墓誌)’와 ‘백자철화이성립묘지(白磁鐵畵李成立墓誌)’를 사들였다. “사비를 써서라도 묘지를 본래 있어야 할 고향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김 씨는 매입 직후 곧바로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아무 조건 없이 해당 묘지의 후손에게 기증하고 싶다”고 밝혔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8일 경북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김 씨가 기증한 묘지 2건을 공개하고 기증·기탁 기념식을 열었다. 김 씨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묘지는 성격상 무덤에서 무단으로 파헤쳐 불법 반출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후손이라면 얼마나 속상할까 싶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다”고 말했다. 1755년에 제작된 ‘백자청화김경온묘지’는 1726년 조선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고향인 안동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한 김경온(1692∼1734)의 묘지다. ‘백자철화이성립묘지’는 조선 무관이던 이성립(1595∼1662)의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묘지는 개인사는 물론이고 시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라며 “해당 묘지들이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됐는지는 현재로선 파악되지 않았다”고 했다. 묘지를 돌려받은 후손은 김 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해당 묘지를 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기록유산 전문연구기관인 국학진흥원은 해당 묘지들을 시대사 연구에 활용할 방침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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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구는 그 자체로 예술… 보존 어려운 종이작품 100년 이상 유지시켜”

    그림 뒷면에 천이나 여러 겹의 종이를 발라 꾸미는 표구(表具)는 일제강점기 이래 예술의 바깥 테두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표구는 ‘장황(裝潢)’ ‘배접(褙接)’이라 불리며, 이 또한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작업으로 대접받았다. 2006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류(紙類) 작품을 복원해온 김미나 학예연구사(39·왼쪽 사진)도 표구에 대한 사회적 대접이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최근 ‘표구의 사회사’(연립서가·오른쪽 사진)를 펴낸 그는 “눈에 보이는 테두리는 표구의 일부일 뿐”이라며 “보존에 취약한 지류 작품을 100년 이상 버티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표구의 진정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2006년 차병갑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고문(69)을 만나 사제의 연을 맺으며 표구에 빠져들었다. 차 고문은 1997년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복원한 지류문화재 복원전문가다. 김 학예연구사는 “스승님은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더라도 전통 배접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며 “충무공 영정 복원 때도 일본 비단으로 덧댄 표구를 전부 제거하고 우리 전통 비단으로 단장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값이 비싸고 구하기 어렵더라도 우리나라 비단을 고수하셨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여러 겹의 종이를 덧대는 전통을 지키셨고요. 당장은 효율이 떨어져 보여도 전통 원칙을 지켜야 작품을 100년 넘게 보존할 수 있다고 하셨죠.” 그가 표구를 책으로 정리한 것도 스승에게 배운 가르침을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족자와 병풍, 액자 등의 표구 제작 과정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김 학예연구사는 “요즘은 표구의 보존성보다 비용과 디자인을 중시해 베니어합판에 덧대는 방식이 각광받고 있다. 겉보기에는 값싸고 편리하지만 종이가 변색돼 보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여러 겹의 종이를 작품에 덧대는 전통 방식은 한두 단계를 거르면 당장은 티가 나지 않아도 언젠가 작품에 탈이 나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에서 바라보는 외형이 아니라 단단한 내면에서 나온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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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세히 봐야 보인다… 귀걸이 유물의 진가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진가가 보인다. 충남 공주에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이번에 전시한 ‘귀걸이’들은 특히나 그렇다. 길이가 최소 2cm부터 최대 10.1cm. 크고 화려한 유물에 가려 눈이 잘 가지 않았던 귀걸이 유물들이 전시의 주인공으로 돌아왔다. 공주박물관이 27일 시작한 특별전 ‘백제 귀엣-고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귀걸이 1021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국내 귀걸이 유물 전시로는 최대 규모다.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백제 귀걸이 216점이 포함돼 관심을 모은다. 귀걸이라고 하면 공주박물관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이기도 한 국보 ‘무령왕 금 귀걸이’를 떠올리는 이가 많다. 길이 10.1cm에 한쪽 무게만 54.7g. 금의 순도가 99%에 이르는 이 유물은 언제 봐도 영롱하다. 역시 국보인 ‘무령왕비 금 귀걸이’도 바로 옆에 전시됐다. 백제 왕족 귀걸이는 고유한 특징이 있는데, 모두 검붉은 색 안료를 덧입혀 놓았다. 나선민 학예연구사는 “반짝이는 금과 대비를 이루는 흑색, 적색을 칠해 일부러 금빛을 덜 노출시키는 ‘절제된 화려함’을 추구하는 게 백제의 미학”이라고 설명했다. 무령왕 귀걸이만큼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귀걸이도 있다. 충남 부여 응평리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백제 사비시대(538∼660년) 추정 금 귀걸이 한 쌍이다. 금이긴 해도 왕족이나 귀족이 착용하던 화려한 장식품이 아니다. 평범한 우리네 금반지마냥 소박한 고리 형태로 푸근함이 느껴진다. 재밌는 건 해당 귀걸이는 발굴 당시 머리뼈 관자놀이 부근에서 발견됐다는 것. 당시는 불교가 보편화돼 부장품 매장 문화가 거의 사라진 시기. 하지만 돌아가신 분이 애용하던 귀걸이는 함께 묻을 정도로 백제에서 귀걸이는 모두가 즐기는 ‘핫 아이템’이었다. 4∼6세기 백제와 신라, 고구려, 가야의 귀걸이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백제 사비시대와 고구려의 귀걸이는 중간 장식을 매달지 않고 하나로 이어붙인 일체형으로 제작된 공통점을 지녔다. 나 학예연구사는 “정치적으로는 서로 적대적 관계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적극 교류했다는 증거”라고 했다. 내년 2월 26일까지. 무료.공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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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청, ‘윷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예고

    ‘윷놀이’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우리 민족이 즐겨온 전통놀이인 윷놀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한다고 26일 밝혔다. 윷가락 4개를 던져 판의 말을 옮기는 윷놀이는 주로 정초와 정월대보름에 하다가 1년 내내 즐기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동양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음(陰)과 양(陽), 천체 28수 등 고유한 형식을 갖췄다. 한반도에서 윷놀이는 삼국시대 전후부터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역사서 ‘북사(北史)’ 등에는 부여에서 비슷한 형식의 놀이를 즐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김문표(1568∼1608), 이규경(1788∼1856)이 윷놀이의 의미와 방법을 기록으로 남겼다. 문화재청은 “윷놀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며 “다만 누구나 즐기는 문화인 만큼 특정한 보유자와 보유단체는 두지 않고 ‘공동체종목’으로 지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국가무형문화재 공동체종목으로 지정된 건 ‘김치 담그기’ ‘장 담그기’ ‘한복생활’ 등 15건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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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분 쉬는 시간에도 정원 산책… 집보다 더 집같은 학교”

    “서울 도심에 이런 곳이 있다니… 이게 학교라고?” 지난해 3월 개교한 서울 영등포구 신길중학교를 보면 누구나 절로 감탄이 나온다. 주변은 신길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2017년부터 아파트가 4000채 넘게 들어섰다. 아파트가 숲을 이뤘지만 학교 풍경은 삭막하지 않다. 한적한 전원에 세워진 미술관도 이만큼 어여쁠까 싶다. 신길중은 최근 ‘서울특별시 건축상’에서 완공부문 대상을 받았다. 학교에서 24일 만난 이집건축사사무소 대표인 이현우 건축가(54)는 2018년 서울시교육청 주최한 설계공모전에 참가할 때부터 “집보다 더 집 같은 학교”를 염두에 뒀다고 한다. “당시 아파트는 재건축이 한창이었죠. 거대한 단지 아래 아이들이 ‘덩어리의 일부’로 살아가겠단 우려가 생겼어요. 위압적인 건물 틈에서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란 얼마나 어렵겠어요. 학교라도 반대로 가보자 싶었죠.”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인 신길중은 하나의 건물이지만 얼핏 보면 옹기종기 집들이 모인 마을처럼 보인다. 실제 22구역으로 공간이 나눠져 있으나, 앞마당을 서로 맞댄 채 연결돼 있다. 이 건축가는 “크게 전체 3개 동으로 구분된 구역도 기다랗게 이어져 있다”며 “각 동은 층수를 달리 해 한 동의 건물 옥상이 다른 동 마당이 돼 준다”고 설명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옥상을 포함해 곳곳에 배치된 중정(中庭·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이다. 무려 19군데에 중정을 지었고, 모든 마당은 교실에서 통유리창으로 보인다. 문을 열고 나서면 곧장 따사로운 볕도 쬘 수 있다. 이 건축가는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에 운동장까지 나가 햇살을 즐기긴 무리”라며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면 가슴이 뻥 뚫리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런 설계는 의외의 선순환도 낳았다. 학교에서 종종 문제의 온상이 되곤 했던 옥상이 모두에게 개방된 놀이터이자 쉼터가 됐다. 층마다 여러 곳에 중정이 있다 보니 특정 무리가 공간을 독점하는 일도 사라졌다. 개방적인 장소라 사각지대도 없다. 이 건축가는 모든 중정의 생김새를 달리했다. 1층 도서관 앞은 단풍나무를 심어 야외에서 독서를 즐길 수 있고, 벽돌 바닥으로 지은 테라스는 학생들이 둘러앉아 수다 떨기에 맞춤이다. 이 건축가는 “크고 작은 중정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공간을 활용하는 법을 찾길 바랐다”고 했다. 교실을 포함한 22채의 독립공간은 막힌 곳 없이 모든 길로 통한다. 재밌는 점은 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어 한 동에서 다른 동으로 갈 때, 바쁘면 곧장 계단과 복도로 가면 된다.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나무와 잔디가 심어진 중정 등으로 산책하듯 돌아갈 수 있다. 이 건축가는 “삶의 목적지로 가는 길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걸 몸으로 이해하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건물 외형도 뾰족한 박공지붕과 평평한 지붕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었어요. 교실 천장도 그에 맞춰 서로 다르게 했고요. 학생들이 다름이란 가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바랐거든요. 아이들이 학교에 애정을 가지고 직접 가꾸며 학교의 진짜 주인이 되면 좋겠어요.” 이 건축가의 소망은 이미 상당히 이룬 듯했다. 아이들이 직접 가져다놓았다는 앙증맞은 화분들이 교실 옆을 수놓았고, 잔디밭 중정 난간엔 손수 만든 바람개비들이 알록달록 돌아갔다. “요즘은 학생들이 중정 잔디밭에서 씨름도 한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데, 하하. 역시 아이들은 제가 상상한 것보다 더 대단해요. 어떻게 하든 그건 학생들 마음이죠. 그게 진짜 학교 아닐까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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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빽빽한 아파트 속 전원주택 마을?…집보다 더 집 같은 ‘학교’입니다

    4000세대가 넘는 29층 높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서울 영등포구 신길재정비촉진지구. 빽빽한 아파트 숲 사이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 키 작고 자그마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이 지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흡사 도심 속 전원주택단지 같아 보이는 이 건물은 바로 ‘신길중학교’다. 지난해 3월 개교한 신길중은 14일 열린 ‘제40회 서울특별시 건축상’ 시상식에서 완공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 학교를 설계한 이집건축사사무소 대표 이현우 건축가(54)는 2018년 서울시교육청이 주최한 설계 공모전에 참가하기 전 아파트 재건축이 한창인 학교 부지를 찾았다가 “집보다 더 집 같은 학교”를 상상했다고 한다.“거대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덩어리의 일부로 살아갈 아이들을 떠올렸어요. 위압적인 건물들 속에서 아이들이 상상력을 키우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학교는 아파트와 정반대로 지어야겠다고 결심했죠. 아이들에게 집보다 더 집 같은 학교를 지어준다면 아이들이 제 집처럼 학교를 가꿔나갈 테니까요.” 24일 이 건축가와 함께 둘러본 학교는 여러 채의 집을 잘게 나눈 작은 마을과 같았다. 4층짜리 통 건물이 아니라 22채의 조그마한 집들이 앞마당을 서로 맞댄 채 이어져 있다. 3개 동으로 기다랗게 연결된 동시에 각 동의 층수를 달리 해 앞 건물 옥상이 뒤편 마당이 되어주는 식이다. 연면적이 9858㎡인 학교에 마련된 중정이 무려 19곳. 중정과 교실로 통하는 문이 통유리 창으로 연결돼 있어 아이들이 교실 문을 나서면 어디서든 볕을 쬘 수 있다. 이 건축가는 “아이들이 운동장까지 걸어 나가 햇볕을 쬐기에는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은 너무 짧다. 교실 앞에 작은 정원이 있다면 그 짧은 시간에도 아이들이 햇볕을 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덕분에 학교의 사각지대이자 골칫덩이였던 옥상이 아이들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 특히 각 층마다 옥상 중정을 덕분에 특정 무리가 공간을 독점하지 않고, 모든 아이들이 쉼터를 두루 나눠 쓸 수 있게 됐다. 이 건축가는 “일부러 중정마다 생김새를 다 다르게 설계했다. 1층 도서관 앞에는 단풍나무를 심어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야외에서 책을 읽고, 벽돌 바닥으로 만든 테라스에서는 아이들이 둘러앉아 수다를 떨 수 있다”며 “크기는 작을지라도 중정을 19곳으로 쪼개 다양한 아이들이 쉼터를 누리길 바랐다”고 했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앞 동과 뒷 동이 쪼개진 듯 보이지만 모든 길은 서로 통한다. 교실과 중정이 서로 연결되고, 중정과 건너편 건물이 유리문을 통해 이어지는 식이다. 이 건축가는 “다른 목적지로 이동할 때 한 방향으로만 길을 내지 않고 여러 갈래의 길을 내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바쁘면 건물 내 계단과 복도를 통해 건너편으로, 시간이 넉넉하다면 푸른 잔디와 나무가 심어진 중정을 가로질러 이동할 수 있다.“아이들이 삶의 목적지로 나아갈 때 하나의 길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는 걸 몸소 깨달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뾰족한 박공지붕과 평평한 지붕 등 다양한 건물 외형에도 건축가의 철학이 담겼다. 이 건축가는 “교실의 천장이 제각기 다르듯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다름이라는 가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 건축가는 “아이들이 제집처럼 학교를 가꾸고 바꿔나가며 학교의 진정한 주인이 되길 바랐다”고 강조했다. 이날 교실 곳곳에는 아이들이 직접 가꾼 화분이 보였다. 잔디밭이 심어진 중정에는 해바라기 꽃들이 줄을 지어 피었다. 중정 난간에는 아이들이 손수 만들어 붙인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손수 가꿔놓은 정원을 바라보던 이 건축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준 것뿐이에요. 요즘 학생들이 이 잔디밭에서 씨름을 한대요.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활용법인데(웃음). 역시 아이들은 제가 상상한 것보다 더 대단해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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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마침내 성공으로 수렴한 ‘더 나은 실패’의 기록

    “위성이 궤도 진입에 실패했습니다.” 2009년 8월 25일 오후 5시.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가 역사적인 첫 비행을 시작한 지 9분 만이었다. 나로호가 보내오는 데이터를 분석하던 연구원들에게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로호 2단에 설치된 부품이 고도 177km 상공에서 분리되지 않은 탓에 속도가 떨어지며 위성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했다. 안타깝고 속 쓰린 순간이었지만 현장을 지키던 저자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1989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창립멤버인 조광래 전 원장(사진)과 당시 연구원이었던 고정환 현 항우연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은 곧장 원인 분석에 착수했다. “로켓맨에게 포기란 없다”며. 올해 6월 21일. 대한민국은 드디어 독자적인 기술로 한국형발사체 누리호를 우주로 띄워 보냈다. 전 국민을 환호하게 만든 크나큰 성과였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힘겨웠다. 1993년 한국 최초의 과학로켓 ‘KSR-Ⅰ’을 거쳐 나로호와 누리호 개발 책임을 맡았던 저자들은 이 책에 그 값진 ‘실패담’을 담담히 풀어냈다. 바깥에서 보기엔 실패였는지 몰라도, 사실 이들의 여정은 ‘대한민국 항공우주연구개발사(史)’ 자체다. 1990년대 한국은 항공우주 분야에서 미국, 일본은 물론 북한에도 뒤처진 후발주자였다. 처음 발사대 가동 연습 당시, 알맞은 장소를 구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대전에 있는 항우연 기숙사 옆 주차장에서 로켓 점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연구원들은 휴일에도 경북 영주와 울진, 경남 통영과 남해, 제주 모슬포 등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야 했다. 미지의 영역을 향한 도전은 순간순간이 위기였다. “첫 발사를 시도하기 전까지 크고 작은 결함이 보고된 것만 1000건이 넘었다”고 한다. 1993년 6월 4일 한국 최초의 과학로켓 ‘KSR-Ⅰ’을 발사할 때도 성공보다 실패의 시간이 훨씬 길었다. 특히 첫 발사를 앞두고 추진기관의 결함을 확인하는 ‘X선 비파괴검사’는 저자들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해당 검사에서 추진기관 내부에 딱 “달걀 1개 크기인” 기포가 발견됐다.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우니 그냥 발사하잔 의견도 있었지만, 연구원들은 결국 모두 갈아엎고 다시 시작했다. 과학에서 실패는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의 잣대는 냉혹했다. 저자들은 “발사를 실패한 뒤엔 ‘형벌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털어놓았다. 1997년 7월 9일 이륙 20.8초 만에 과학로켓 ‘KSR-Ⅱ’의 통신이 끊겼을 때다. 곧장 과학기술처 소속 조사단이 항우연 연구실에 들이닥쳤다. 당시 조사단은 로켓 시스템에 대해 이해하려 들진 않고 그저 연구원들을 ‘무능력한 죄인’으로 몰아세웠다고 한다. 2013년 1월 30일 나로호 발사 성공 뒤 조광래 당시 나로호발사추진단장이 “너무 늦어 죄송하다”며 고개부터 숙였던 것도 그런 압박감 때문이었다. 역경이 끊이지 않았지만 로켓맨들은 굴하지 않았다. 패배자란 낙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실패가 잇따랐지만, 그저 시도하고 연구하고 준비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값진 항공우주기술로 이어졌다. 하지만 저자들은 현재의 성과에 결코 안주할 생각이 없다. 누리호의 성공조차 “우리에겐 반드시 가야 할 누리호 그 다음이 있다”고 다짐할 뿐이다. ‘우리는 로켓맨’은 고맙고 미안한 책이다. 머리로야 고생하는 걸 알았지만, “또 실패냐”며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예산도 인원도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데, 묵묵히 한길을 가는 그들이 놀랍기만 하다. 책은 어느 한 구석 버릴 게 없지만, 가장 감동적인 건 마지막 페이지다. 항공우주 개발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 234명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진 못해도, 그들이 대한민국이 우주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던 개척자란 사실은 잊어선 안 되겠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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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켓맨에게 포기란 없다”…나로호-누리호 성공을 이끈 값진 ‘실패담’

    “위성이 궤도 진입에 실패했습니다.”2009년 8월 25일 오후 5시.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가 역사적인 첫 비행을 시작한 지 9분 만이었다. 나로호가 보내오는 데이터를 분석하던 연구원들에게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로호 2단에 설치된 부품이 고도 177㎞ 상공에서 분리되지 않은 탓에 속도가 떨어지며 위성이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못했다. 신간 ‘우리는 로켓맨’의 두 저자. 현장을 지키던 그들은 안타깝고 속 쓰린 순간이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1989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창립멤버인 조광래 전 원장과 당시 연구원이었던 고정환 현 항우연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은 곧장 원인 분석에 착수했다. “로켓맨에게 포기란 없다”며.올해 6월 21일. 대한민국은 드디어 독자적인 기술로 한국형발사체 누리호를 우주로 띄워 보냈다. 전 국민을 환호하게 만든 크나큰 성과였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힘겨웠다. 1993년 한국 최초의 과학로켓 ‘KSR-Ⅰ’을 거쳐 나로호와 누리호 개발 책임을 맡았던 저자들은 이 책에 그 값진 ‘실패담’을 담담히 풀어냈다.바깥에서 보기엔 실패였는지 몰라도, 사실 이들의 여정은 ‘대한민국 항공우주연구개발사(史)’ 자체다. 1990년대 한국은 항공우주분야에서 미국, 일본은 물론 북한에도 뒤처진 후발주자였다. 처음 발사대 가동 연습 당시, 알맞은 장소를 구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대전에 있는 항우연 기숙사 옆 주차장에서 로켓 점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연구원들은 휴일에도 경북 영주와 울진, 경남 통영과 남해, 제주 모슬포 등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야했다. 미지의 영역을 향한 도전은 순간순간이 위기였다. “첫 발사를 시도하기 전까지 크고 작은 결함이 보고된 것만 1000건이 넘었다”고 한다. 1993년 6월 4일 한국 최초의 과학로켓 ‘KSR-Ⅰ’을 발사할 때도 성공보다 실패의 시간이 훨씬 길었다. 특히 첫 발사를 앞두고 추진기관의 결함을 확인하는 ‘X선 비파괴검사’는 저자들에게 오래토록 기억에 남았다. 해당 검사에서 추진기관 내부에 딱 “달걀 1개 크기인” 기포가 발견됐다.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우니 그냥 발사하잔 의견도 있었지만, 연구원들은 결국 모두 갈아엎고 다시 시작했다.과학에서 실패는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의 잣대는 냉혹했다. 저자들은 “발사를 실패한 뒤엔 ‘형벌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털어놓았다. 1997년 7월 9일 이륙 20.8초 만에 과학로켓 ‘KSR-Ⅱ’의 통신이 끊겼을 때다. 곧장 과학기술처 소속 조사단이 항우연 연구실에 들이닥쳤다. 당시 조사단은 로켓시스템에 대해 이해하려 들진 않고 그저 연구원들을 ‘무능력한 죄인’으로 몰아세웠다고 한다. 2013년 1월 30일 나로호 발사 성공 뒤 조광래 당시 나로호발사추진단장이 “너무 늦어 죄송하다”며 고개부터 숙였던 것도 그런 압박감 때문이었다. 역경이 끊이지 않았지만 로켓맨들은 굴하지 않았다. 패배자란 낙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실패가 잇따랐지만, 그저 시도하고 연구하고 준비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값진 항공우주기술로 이어졌다. 하지만 저자들은 현재의 성과에 결코 안주할 생각이 없다. 누리호의 성공조차 “우리에겐 반드시 가야 할 누리호 그 다음이 있다”고 다짐할 뿐이다.‘우리는 로켓맨’은 고맙고 미안한 책이다. 머리로야 고생하는 걸 알았지만, “또 실패냐”며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예산도 인원도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데, 묵묵히 한길을 가는 그들이 놀랍기만 하다.책은 어느 한 구석 버릴 게 없지만, 가장 감동적인 건 마지막 페이지다. 항공우주개발연구에 참여한 연구원 234명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진 못해도, 그들이 대한민국이 우주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던 개척자란 사실은 잊어선 안 되겠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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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합니다]‘안녕, 마음씨!’ 김수진 동아일보 기자 개인전

    신문에 연재되며 독자에게 따사로움을 전했던 그림들이 전시를 통해 관객을 만난다. 김수진 동아일보 뉴스디자인팀 기자의 개인전 ‘안녕, 마음씨!’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21~26일 열린다. 김 기자가 “오늘의 이 그림이 따뜻한 위안이 되길 바라며 나의 마음 조각들을 건넸다”며 동아일보 오피니언 면에 게재했던 그림들을 중심으로 모두 30점을 선보인다. 전시에는 밤하늘 별을 품에 안은 이를 형상화한 ‘나의 우주’(사진), 밤거리에 홀로 선 사람을 비추는 달빛을 담은 ‘달 등대’ 등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소를 짓게 하는 작품이 많다. “때로는 대면할 용기가 없어서, 때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들여다보지 못했던 내면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는 김 기자의 속내가 묻어난다.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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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정부, 박물관 통해 ‘고구려=中관할’ 자의적 역사인식 전파”

    중국 베이징국가박물관이 최근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展)’에서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제공한 전시 연표에서 무단으로 고구려와 발해를 삭제해 논란이 이는 가운데, 중국 정부가 박물관을 통해 자국 중심주의 역사관을 전파해 왔다는 지적이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지난달 30일 출간한 ‘동북아역사포커스’ 9월호에서 김현숙 연구위원은 논문 ‘박물관 전시를 통해 본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김 위원은 “2017∼2019년 중국 동북 지역 주요 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가운데 고구려와 관련된 전시를 분석한 결과, 고구려를 중국 관할로 소개했다”며 “중국은 박물관 교육을 통해 중화문명의 위대성을 주창하며 자민족 중심주의에 치우친 자의적 역사인식을 전파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린(吉林)성에 있는 지안(集安)박물관이다. 이곳은 전시장 입구부터 고구려의 종속성을 강조하는 안내문을 설치했다. 여기에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할 때 고구려인 구역에 고구려 현을 설치해 현도군 관할에 뒀다”며 해당 현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취지의 문장이 실렸다. 현도군은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등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하나. 랴오닝(遼寧)성과 톄링(鐵嶺), 번시(本溪), 선양(瀋陽)박물관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담은 소개글들이 발견됐다. 김 위원은 이를 고구려가 한나라에 속해 행정적 지배를 받았다는 중국의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와 후한서 등을 살펴보면, 주몽의 고구려는 기원전 75년 현도군을 공격해 쫓아낸 뒤 기원전 37년에 건국했다”며 “고구려는 한나라의 행정적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적인 국가”라고 반박했다. 지안과 톄링, 번시, 랴오닝 등 4곳에서는 한나라와 고구려를 “조공과 책봉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고구려가 중원 왕조에 종속됐다는 ‘속국론’을 펼치기도 했다. 김 위원은 “조공과 책봉의 개념은 한나라가 멸망한 뒤 남북조 시기에 완성됐다”며 “고구려가 한나라에 예물 등을 보낸 것은 강대국인 중국과 우호적인 외교 무역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뿐”이라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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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악기 연주가 공성연-김지연… 슈투트가르트 마림바 콩쿠르 1-3위

    퍼커셔니스트(타악기 연주가) 공성연 씨(22)와 김지연 씨(31)가 독일에서 18일(현지 시간) 열린 ‘제7회 슈투트가르트 세계 마림바 콩쿠르’에서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했다. 공 씨는 ‘위촉곡 최고 해석 특별상’도 수상했다. 일본의 이시다 마치가 공 씨와 함께 공동 1위에 올랐다. 1위에게는 1만2000유로(약 1670만 원), 3위에게는 5000유로 상금을 수여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 입학한 공 씨는 2015년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했다. 현재 슈투트가르트국립음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2014년 금호영아티스트콘서트로 데뷔한 김 씨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국립음대 석사 및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쳤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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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 민속문화재 지정 예고

    문화재청이 경북 영덕군에 있는 ‘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喜庵齋舍·사진)’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한다고 19일 밝혔다. 무안박씨 희암재사는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의 승장인 무의공(武毅公) 박의장(1555∼1615)을 기리는 분암(墳庵·묘소 주변에 세우는 불교 암자) 형식의 1730년대 건축물이다. 경주부판관이던 무의공은 왜군에게 빼앗겼던 영천성과 경주성을 되찾는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문화재청은 “불교식 묘 제사에서 유교식 묘 제사로 넘어가는 시점의 의례복합공간으로 당시 사회의 변화상을 볼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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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14세 ‘남장’소녀, 관동팔경 유람할 제…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행을 다닐 수 없다니…. 저 원주 소녀 김금원,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이렇게 남장을 한 채 관동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시겠습니까.” 16일 강원 강릉역에서 출발하는 바다열차 안. 한 유랑객이 푸른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열차에 올랐다. 강원 원주에서 나고 자란 조선시대 여성 시인 김금원(1817∼?)의 복장을 한 엄미정 해설사였다. 김금원은 ‘산천을 유람하는 여성은 곤장 100대에 처한다’는 경국대전에 따라 여성에게 여행을 금하던 시대에 살았다. 그는 14세에 남장을 하고 관동팔경(關東八景·강원을 중심으로 동해안에 있는 8개 명승지)과 금강산을 유람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16∼18일 김금원으로 변장한 해설사와 강릉 일대를 여행하는 ‘관동풍류의 길’ 행사를 처음 열었다. 일일 프로그램으로, 사전신청을 받았다. 한 회차당 30명씩, 하루 세 차례 프로그램을 운영해 사흘간 총 270명이 참가했다. 참가비는 없고 바다열차는 문화재재단에서 제공했다. 강릉을 오가는 교통비와 식사비는 각자 부담했다. 강릉역에서 삼척해변역으로 이어지는 동해를 감상하는 ‘바다열차 관동풍류’와 효령대군 11세손 이내번(1703∼1781)이 터를 잡은 300년 고택 선교장을 야간 탐방하는 ‘선교장 달빛방문’까지 연결되는 코스다. 엄 해설사는 정동진, 묵호항을 지나 열차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를 보며 “고성 청간정과 삼일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양양 낙산사, 울진 망양정, 통천 총석정, 평해 월송정까지, 관동팔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에 동해는 없다. 하지만 바다야말로 관동팔경의 중요한 조연”이라고 강조했다. 김금원은 1851년 펴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 동해를 본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바다는 끝없이 깊고 넓도다. 비로소 하늘과 땅 사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나니 그 품 안에 모든 것 다 안았구나.’ 오후 7시 반부터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선교장 달빛방문’ 프로그램에서는 박광일 해설사(51)가 선교장 곳곳에 담긴 얘기를 전하고,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관람객을 안내했다. 선교장 여정의 첫 길목, ‘달빛이 내리는 문’이란 뜻의 월하문(月下門) 앞에서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외쳤다. “이보시오. 내 관동팔경을 유람하러 강릉을 찾았소. 이 집이 손님을 대하기가 신선 같다고 하여 내 며칠 지내고자 하오.” 선교장은 유람하던 양반들에게 잠자리를 내어주던 아량 넓은 고택으로 이름을 떨쳤다. 박 해설사는 선교장 초입에 있는 활래정(活來亭)을 가리키며 “관동팔경을 여행하는 손님들에게 내어주던 이곳 이름은 ‘늘 새 샘물이 솟아올라 맑은 연못’을 뜻한다. 선교장이 손님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가옥에서 펼쳐지는 대금산조와 가야금 연주를 들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걷다 보니 ‘신선이 머무는 높고 그윽한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고택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올해 시범사업으로 진행한 ‘관동풍류의 길’ 행사는 내년부터 운영기간과 참가 인원을 확대해 운영할 예정이다. 강릉=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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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장하고 여행 떠난 14세 조선 소녀, 김금원의 ‘관동풍류의 길’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행을 다닐 수 없다니…. 저 원주 소녀 김금원,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이렇게 남장을 한 채 관동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시겠습니까.” 16일 오후 2시 반경 강원 강릉역에서 출발해 삼척해변역까지 이어지는 바다열차 안. 한 유랑객이 푸른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열차에 올랐다. 그는 강원도 원주에서 나고 자란 조선시대 여성 시인 김금원(1817~?). ‘산천을 유람하는 여성은 곤장 100대에 처한다’는 경국대전에 따라 여성에게 여행은 그림의 떡이던 시대 남장을 하고 집을 떠나 관동팔경(關東八景·강원을 중심으로 동해안에 위치한 8개 명승지)과 금강산을 유람한 당찬 14세 소녀다. 그는 자신의 여행기를 담아 1851년 펴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 처음 여행에 나선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마치 새장에 갇혀 있던 새가 새장을 나와 끝없는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고, 좋은 말이 굴레와 안장을 벗은 채 천리를 달리는 기분이로다.’ 물론 ‘진짜’ 김금원은 아니다. 이날 열차에 오른 이는 김금원의 복장을 한 엄미정 해설사.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16일부터 18일까지 김금원으로 변장한 해설사와 함께 강원 강릉에서 동해 풍경을 만끽하고 선교장을 야간 탐방하는 ‘관동풍류의 길’ 행사를 열었다. 강릉역에서 출발해 삼척해변역으로 이어지는 바다 풍경을 감상하는 ‘바다열차 관동풍류’와 만석꾼 이내번(1703~1781)이 터를 잡았던 300년 고택 선교장을 야간 탐방하는 ‘선교장 달빛방문’으로 관동의 낮과 밤, 바다와 고택의 고즈넉한 정취를 한번에 느낄 수 있다. 이날 엄 해설사는 정동진, 묵호항을 지나 열차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고성 청간정과 삼일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양양 낙산사, 울진 망양정, 통천 총석정, 평해 월송정 등 관동팔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에 동해는 없지만 이 푸른 바다야말로 관동팔경의 보이지 않는 조연”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김금원은 동해를 바라보며 호동서락기에 ‘이 강, 저 강이 동쪽으로 다 흘러들어 바다는 그지없이 깊고 넓도다. 비로소 하늘과 땅 사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나니 그 품 안에 모든 것 다 안았구나’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김금원과 함께 떠나는 관동 여정은 밤에도 이어졌다. 오후 7시 반경 1시간 동안 진행된 ‘선교장 달빛방문’ 프로그램에서는 박광일 해설사(51)가 이야기를 풀어주고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관람객들을 안내했다. 특히 김금원을 연기하는 배우와 동행하는 재미가 있다. 선교장 여정의 첫 길목, ‘달빛이 내리는 문’이란 뜻을 지닌 선교장 월하문(月下門) 앞에서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내 관동팔경을 유람하러 강릉을 찾았소. 이 집이 손님을 대하기가 신선 같다고 하여 내 며칠 지내고자 하오.” 실제 조선시대 선교장은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유랑하던 옛 양반들에게 잠자리를 내어주던 아량 넓은 고택으로 이름을 떨쳤다. 박 해설사는 선교장 초입에 지어진 활래정(活來亭)을 가리키며 “관동팔경을 여행하는 손님들에게 내어주던 이 곳의 이름은 ‘늘 새 샘물이 솟아올라 맑은 연못’을 뜻한다. 선교장이 먼 길을 떠나온 손님을 얼마나 새 샘물처럼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달빛이 내려앉은 선교장의 밤은 ‘신선이 머무는 높고 그윽한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가옥에서 펼쳐지는 대금산조와 가야금 연주를 들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옛 고택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박 해설사는 선교장 너머 어둠이 내려앉은 밤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옛 선비들은 따스하게 손님을 품어주는 선교장에 머물며 더 넓은 세상을 유람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길을 열면 저 어둠 너머 14세 소녀 김금원이 꿈꿨던 드넓은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겁니다.”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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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어느 살인자의 각성… ‘잔혹한 연기’는 계속될 수 있을까

    “나쁜 놈을 죽일 땐 바보가 돼야 한다.” 미 해군 출신인 마흔네 살 청부살인업자, 빌리 서머스는 그 나름대로 지켜온 신념이 있다. 그간 17번의 암살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그는 언제나 ‘죽여도 되는’ 명분을 찾았다. 대상의 직업이나 나이 등은 다양했지만 모두 똑같은 이유가 있었다. 죽어도 쌀 만큼 나쁜 사람. 그렇게 생각해야 자신도 마음이 편했다. 빌리는 그간 의뢰인들 앞에선 멍청한 척 행세했다. 조지 오웰과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즐길 정도로 상당한 지적 능력을 지녔지만 그게 훨씬 낫다고 여겼다. 조만간 바보 연기를 관두고 이 업계에서 은퇴하리라 마음먹었을 무렵, 18번째 의뢰가 들어왔다. 암살 대상은 그와 같은 청부살인업자. 당연히 죽어도 되는 인물인 데다 200만 달러라는 거금까지 주어진다. 의뢰를 수락하고 당분간 주변에서 은신한 채 지내야 할 빌리에게 의뢰인 측은 뜻밖의 제안을 한다. 그들이 만들어준 가짜 신분은 바로 ‘작가’였다. 스티븐 킹이란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저자가 하드보일드 스릴러로 돌아왔다. 영화 ‘캐리’(1976년) ‘샤이닝’(1980년) ‘미저리’(1990년) 등 걸작 호러 장르의 원작 소설가로도 유명한 그가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초자연적 현상이 주를 이뤘던 전작들과 다르게, 청부살인업도 하나의 직종으로 본다면 빌리 서머스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이다. 마지막 임무 완수를 준비하며 작가로 위장한 빌리. 기왕 하는 김에 그는 자신의 얘기를 한번 써보기로 한다. 그 어떤 초현실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지만, 빌리의 마음속에선 초능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 버렸던, 어린 시절 자신의 눈앞에서 여동생이 숨을 거뒀던 순간. 이라크전쟁에 파병돼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 영혼 깊이 내재됐던 깊은 상처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깨어난다. 당황스럽지만 빌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 순간 나는 어떤 기분을 느꼈었는지. 임무를 제대로 끝내려면 여전히 어수룩하게 굴어야 했지만, 빌리는 더 이상 이전처럼 행동하기 어렵다. 뭣보다 우연히 은신처 인근 길거리에서 성폭행을 당한 채 쓰러져 있던 앨리스를 마주하며 그의 인생은 돌변한다. 누군가를 보살필 상황이 아니지만, 폭력으로부터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던 과거가 되살아난 그는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결국 집 안에 들인 앨리스는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는 첫 번째 독자가 되는데…. 청부살인업자로 살던 빌리에게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겨버리고, 그에겐 더 이어가고 싶은 이야기도 생겨버렸다. 모든 게 기존 계획과는 어긋난 빌리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해 8월 미국에서 책이 출간된 뒤 저자는 현지 인터뷰에서 “빌리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의식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글을 써내려가며 방어기제가 무너져 결국 누군가를 암살하는 자신 역시 나쁜 사람이란 걸 깨닫는 것”이란 설명이다. 하지만 이런 자의식이 과연 그에게 약일까 독일까. 빌리와 앨리스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현지에선 영화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2020년)를 연출한 거물 제작자이자 감독인 J J 에이브럼스가 이 소설을 드라마 시리즈로 만드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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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의 제왕’ 스티븐 킹이 돌아왔다, 청부살인업자로

    “나쁜 놈을 죽일 땐 바보가 돼야 한다.” 미 해군 출신인 마흔네 살 청부살인업자, 빌리 서머스는 나름 지켜온 신념이 있다. 그간 17번의 암살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그는 언제나 ‘죽여도 되는’ 명분을 찾았다. 대상의 직업이나 나이 등은 다양했지만 언제나 똑같은 이유가 있었다. 죽어도 쌀 만큼 나쁜 사람. 그렇게 생각해야 자신도 마음이 편했다.빌리는 그간 의뢰인들 앞에선 멍청한 척 행세했다. 조지 오웰과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즐길 정도로 상당한 지적 능력을 지녔지만 그게 훨씬 낫다고 여겼다. 조만간 바보 연기를 관두고 이 업계에서 은퇴하리라 마음먹었을 무렵, 18번째 의뢰가 들어왔다. 암살 대상은 그와 같은 청부살인업자. 당연히 죽어도 되는 인물인데다, 200만 달러라는 거금까지 주어진다. 의뢰를 수락하고 당분간 주변에서 은신한 채 지내야할 빌리에게 의뢰인 측은 뜻밖의 제안을 한다. 그들이 만들어준 가짜 신분은 바로 ‘작가’였다.스티븐 킹이란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저자가 하드보일드 스릴러로 돌아왔다. 영화 ‘캐리’(1976년) ‘샤이닝’(1980년) ‘미저리’(1990년) 등 걸작 호러 장르의 원작 소설가로도 유명한 그가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초자연적 현상이 주를 이뤘던 전작들과 다르게, 청부살인업도 하나의 직종으로 본다면 빌리 서머스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이다. 마지막 임무 완수를 준비하며 작가로 위장한 빌리. 기왕 하는 김에 그는 자신의 얘기를 한번 써보기로 한다. 그 어떤 초현실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지만, 빌리의 마음 속에선 초능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어린 시절 자신의 눈앞에서 여동생이 숨을 거뒀던 순간. 이라크 전쟁에 파병돼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 영혼 깊이 내재됐던 깊은 상처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깨어난다. 당황스럽지만 빌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 순간 나는 어떤 기분을 느꼈었는지.임무를 제대로 끝내려면 여전히 어수룩하게 굴어야 했지만, 빌리는 더 이상 이전처럼 행동하기 어렵다. 뭣보다 우연히 은신처 인근 길거리에서 성폭행을 당한 채 쓰러져있던 앨리스를 마주하며 그의 인생은 돌변한다. 누군가를 보살필 상황이 아니지만, 폭력으로부터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던 과거가 되살아난 그는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결국 집안에 들인 앨리스는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는 첫 번째 독자가 되는데…. 살인청부업자로 살던 빌리에게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겨버리고, 그에겐 더 이어가고 싶은 이야기도 생겨버렸다. 모든 게 기존 계획과는 어긋난 빌리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지난해 8월 미국에서 책이 출간된 뒤 저자는 현지 인터뷰에서 빌리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의식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글을 써내려가며 방어기제가 무너져, 결국 누군가를 암살하는 자신 역시 나쁜 사람이란 걸 깨닫는 것”이란 설명이다. 하지만 이런 자의식이 과연 그에게 약일까 독일까. 빌리와 앨리스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현지에선 영화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2020년)를 연출한 거물 제작자이자 감독인 J. J. 에이브럼스가 이 소설을 드라마 시리즈로 만들기로 결정됐다고 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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