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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가 초선 의원 15명에게 10만 엔(약 97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돌린 것이 드러나 지난해 10월 집권 후 지지율이 최저로 떨어진 가운데 그의 전임자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 또한 재임 중 의원들에게 상품권을 돌렸다는 의혹에 휩싸였다.기시다 내각에서 차관급 공직을 맡았던 집권 자민당의 한 의원은 19일 아사히신문에 “2022년 총리 공저에서 열린 간담회 직후 총리 비서로부터 10만 엔 상당의 상품권을 받았다”고 공개했다. 또 다른 자민당 관계자 또한 당시 간담회에서 상품권을 받았다고 동조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봉투에 “1000엔 짜리 상품권 100장이 들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다만 기시다 전 총리 측은 이시바 총리와 마찬가지로 법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이번 스캔들이 자민당의 또 다른 전직 총리로 번질 조짐 또한 감지된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전 총리 또한 아사히신문의 선물 배포 관련 질의에 “코로나19로 회합을 하기 어려운 시기를 제외하면 재임 중 정치인을 포함한 다양한 분들과 회의를 가졌다”며 “당시 간단한 선물을 드린 적이 있고 모두 법령의 범위 내에서 했다”고 답했다. 아소 다로(麻生太郎) 전 총리 측은 “노 코멘트”라며 답변을 피했다. 자민당 출신 현직 총리가 소속 의원들에게 상품권 등을 주는 행위가 관습화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아시히신문은 논평했다. 이시바 총리는 이번 스캔들에 대해 거듭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제1야당 입헌민주당 측은 “(이시바 총리가) 국회의 정치윤리심사회에 나와 설명하는 등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7일 일본 도쿄 시나가와구에 위치한 슈퍼 체인 ‘업무슈퍼(業務ス―パ―)’의 한 매장.이곳은 경쟁 슈퍼보다 초저가를 앞세우고 대신 계산을 현금만 받는 곳으로 식당 주인은 물론이고 호주머니가 가벼운 일본 서민들도 생필품을 사러 몰리는 곳이다.지난해 여름에 시작된 일본 내 쌀값 폭등이 최근까지 이어지는 현장을 보기 위해 찾은 이 슈퍼의 쌀 매대에는 일본에서 생산된 쌀이 한 포대도 보이지 않았다. 떡을 만드는 데 주로 쓰는 1kg 일본산 찹쌀을 빼고,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일반 쌀은 미국 캘리포니아산 수입 쌀 ‘칼로스’ 5kg짜리 5포대가 매대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쌀값이 급등하며 ‘고시히카리(명품 쌀 품종)의 나라’ 일본의 서민들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미국산 저가 수입 쌀이 된 것.심각해지는 일본 쌀 유통 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처럼 보였다.》● 美 캘리포니아산 쌀 찾는 일본 서민들 나흘 뒤 저녁에 다시 찾은 슈퍼에는 품절됐던 일본 쌀들이 다시 채워져 있었다. 가게 점원 우시로 씨는 “며칠 전에는 일본 쌀이 일시적으로 품절됐던 것이지 아예 공급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일본 쌀을 찾는 사람이 많다. 다만, 쌀값이 1년 가까이 계속 오르기만 하는 상황이기에 상대적으로 값싼 미국, 대만 쌀을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어제 대만 쌀이 들어왔는데 오늘 벌써 다 팔렸다. 대만 쌀보다 인기는 적은 편이지만 미국 쌀을 찾는 사람도 생각보다 꽤 있다”고 귀띔했다. 이 슈퍼에서 파는 미국과 대만 쌀은 5kg짜리가 똑같이 3542엔(약 3만4500원·이하 세금 포함)에 팔리고 있었다. 일본 쌀 가운데 가장 저렴한 아오모리(靑森)현 쌀보다 659엔(약 6400원) 저렴했다. 쌀 매대 앞에서 만난 60대 일본 여성은 “쌀값이 올라 부담이 되지만 아직 수입 쌀을 산 적은 없다”면서 “카레나 볶음밥을 해 먹으면 밥맛이 괜찮다고 들었다. 그래서 가계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수입 쌀을 찾는다”고 말했다. ● 한국 쌀 가격의 두 배 수준 된 일본 쌀 일본의 농림수산성은 전국 수퍼 약 1000곳의 쌀 판매 가격을 확인해 발표하는데,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2일까지 판매된 쌀 5kg의 가격은 3952엔(약 3만8600원)이었다. 현재 한국에서 쌀 5kg이 보통 2만 원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두 배가량 비싼 것. NHK방송은 “1년 전에는 쌀 5kg이 2000엔 정도였다. 최근 1년 사이 쌀값이 94.6%까지 폭등했다”고 전했다. 쌀 5kg이 3000엔대 후반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전국 평균 가격으로, 물가가 비싼 도쿄에선 이제 5000엔이 넘는 쌀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7일 도쿄 시니가와구 오사키 지역에 자리잡은 슈퍼 체인 ‘라이프’의 쌀 매대에는 일본 쌀 5kg 제품들이 보통 4000엔대 후반에서 5000엔대 중반 사이에 가격이 표시돼 있었다. 30년 넘게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한 재일교포는 “일본에 살면서 쌀 5kg짜리가 5000엔대를 넘은 것은 처음 봤다”며 “충격적인 가격”이라고 말했다. 비싼 쌀값으로 인한 서민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슈퍼에서 만난 60대 여성 사카에 씨는 “쌀값이 오르기만 해서 매우 난감한 상황”이라며 “하루 세 끼 가운데 아침은 주로 빵을 먹으며 조금이라도 식비를 줄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엄마라는 한 30대 여성은 “쌀값이 지나치게 오르기만 해서 이제는 쌀값을 줄일 어떤 방법을 찾기에도 지쳤다. 아예 포기한 상황이 됐다”고 혀를 찼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아이들에게는 쌀밥을 먹이고 어른들은 우동이나 소바 등을 먹는 가정도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문제는 일본산 쌀값뿐 아니라 수입 쌀 가격도 덩달아 올라 서민의 선택지가 더욱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미국산 칼로스 쌀 5kg의 가격은 1800엔 정도였는데, 지금은 역시 2배가량 오른 상황이 됐다. 이런 가운데 일본 민간 기업이 지난 1년(2024년 4월 ∼2025년 3월)간 정부에 신청한 쌀 수입 물량은 올해 1월 말 기준 991t으로, 수입 쌀 물량이 가장 많았던 2020년(426t)의 2.3배가 됐다고 요미우리신문이 15일 전했다. 최근 백악관 대변인이 “일본의 수입 쌀 관세는 700%”라며 압력에 나선 것도 일본의 쌀 수입 물량을 더욱 늘리기 위한 포석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 비축미 21만t 시장에 풀어, 밥공기 29억 개분 쌀값의 고공 행진이 이어지고 있지만 뚜렷한 원인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일본 농업계는 2003년 폭염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와 지난해 8월 난타이 대지진 발생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일어난 사재기 현상에 이어 유통업체와 가정의 쌀 확보 경쟁이 더해져 쌀값이 계속 오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보다 내일 더 비싸니’ 일단 확보하고 보는 풍조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뒤늦게 정부 비축분인 쌀을 민간 시장에 풀기 시작했다. 일본은 흉작 등에 대비해 100만 t의 쌀을 전국 300개 창고에 나눠서 보관 중인데 이 가운데 21만 t을 쌀 가격 안정을 위해 판매키로 한 것. 밥공기로 치면 29억 개 분량에 달한다고 NHK는 설명했다. 1억2000여만 명인 일본 인구 전체가 24끼를 먹을 수 있는 규모다. 일본 정부는 2011년부터 쌀 100만 t을 비축하는 제도를 시작했는데 쌀값 안정을 이유로 비축미를 시장에 푼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미 경매 절차는 마쳤으며 이달 말부터 소비자들에게 공급될 것으로 보인다. 밥맛에 민감한 일본 소비자들이 창고에 묵혀 놨던 정부 비축미를 얼마나 선택할 것인가가 쌀값 안정의 변수로 떠올랐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비축미 창고의 내부는 1년 내내 온도는 15도 이하, 습도는 60∼65%로 유지되고 있다. 5년간 보관된 쌀도 밥을 지으면 맛이 있다”고 대대적인 언론 홍보에 나서고 있다. ● 7월 참의원 선거 변수가 된 쌀값 안정 정부 비축미가 시장에 공급되면 쌀값이 다소 안정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지만, 생각보다 그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이러자 일본 정부는 이번 비축분을 통해 쌀값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추가로 정부 비축분을 풀 수 있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시장에 내보내고 있다. 특히 올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쌀값 안정 여부가 승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지난달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쌀값이 비싼 것을 실감한다”며 “실제로 슈퍼마켓에 가면 쌀이 없는 등 소비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상황인 것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뒤늦게 쌀값 정책의 실패를 사실상 인정하며 부랴부랴 비축미를 푼 것도 결국 선거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라는 게 일본 언론의 분석이다.황인찬 도쿄 특파원 hic@donga.com}

초선 의원들에게 상품권을 뿌린 이른바 ‘상품권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이시바 시게루(石破茂·사진) 일본 총리를 향한 민심이 싸늘하다. 현지 주요 신문들의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이 30%를 밑돌며 지난해 10월 정권 출범 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아사히신문이 15, 16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이시바 내각의 지지율은 26%를 기록했다. 지난달 조사(40%)보다 14%포인트 급락했다. 총리 측이 3일 당내 초선 중의원 15명에게 1인당 10만 엔(약 98만 원)어치 상품권을 전달한 사실이 13일 공개된 여파다. 이시바 총리는 14일 공개 사과했지만 지지율 하락세를 멈추지 못했다. 이번 조사에서 총리의 상품권 배포가 “문제”라고 답한 응답자는 75%에 달했다. “문제가 아니다”란 답은 23%에 그쳤다. 다만 이번 사태로 총리가 사임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가 60%였다. “그만둬야 한다”(32%)보다 2배가량 높다. 이시바 총리가 당장 사퇴한다 해도 집권 자민당 내에서 별다른 총리 후보감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마이니치신문이 역시 15, 16일 실시한 조사에서도 이시바 총리의 지지율은 23%에 그쳤다. 2월보다 7%포인트 떨어졌다. 요미우리신문의 조사(14∼16일 실시)에서 이시바 총리의 지지율은 31%로 30%대를 턱걸이하는 데 그쳤다. 요미우리신문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엄청나게 하락하고 있다. 이시바 정권의 운영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시바 총리는 17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상품권 배포를 또 사과했다. 그는 “사회 통념, 세상의 인식 등과 괴리가 있는 부분이 크다. 통절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고개를 숙였다. 다만 정치적 목적은 없었고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규정법 등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올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자민당 지도부는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이들은 17일 도쿄의 모처에서 회담을 갖고 향후 국정 운영에 대한 협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자민당 간사장은 “여론을 받아들여 당의 신뢰 회복에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여론은 싸늘하다. 2023년 12월 자민당 내 대부분의 계파가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통해 거둔 지원금을 유용한 사실이 드러난 ‘비자금 스캔들’이 터졌다. 이 여파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가 물러나고 이시바 내각이 출범했지만 비슷한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만 확인한 형국이다.도쿄=황인찬 특파원 hic@donga.com}

초선 의원들에게 상품권을 뿌린 이른바 ‘상품권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를 향한 민심이 싸늘하다. 현지 주요 신문들의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이 30%를 밑돌며 지난해 10월 정권 출범 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아사히신문이 15, 16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이시바 내각의 지지율은 26%를 기록했다. 지난달 조사(40%)보다 14%포인트 급락했다. 총리 측이 3일 당내 초선 중의원 15명에게 1인당 10만 엔(약 98만 원)어치 상품권을 전달한 사실이 13일 공개된 여파다. 이시바 총리는 14일 공개 사과했지만 지지율 하락세를 멈추지 못했다. 이번 조사에서 총리의 상품권 배포가 “문제”라고 답한 응답자는 75%에 달했다. “문제가 아니다”란 답은 23%에 그쳤다. 다만 이번 사태로 총리가 사임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가 60%였다. “그만 둬야 한다”(32%)보다 2배 가량 높다. 이시바 총리가 당장 사퇴한다 해도 집권 자민당 내에서 별다른 총리 후보감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마이니치신문이 역시 15, 16일 실시한 조사에서도 이시바 총리의 지지율은 23%에 그쳤다. 2월보다 7%포인트 떨어졌다. 요미우리신문의 조사(14~16일 실시)에선 이시바 총리의 지지율은 31%로 30%대를 턱걸이하는데 그쳤다. 요미우리신문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엄청나게 하락하고 있다. 이시바 정권의 운영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시바 총리는 17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상품권 배포를 또 사과했다. 그는 “사회 통념, 세상의 인식 등과 괴리가 있는 부분이 크다. 통절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고개를 숙였다. 다만 정치적 목적은 없었고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 규정법 등에 저촉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도 고수했다. 올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자민당 지도부는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이들은 17일 도쿄의 모처에서 회담을 갖고 향후 국정 운영에 대한 협의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자민당 간사장은 “여론을 받아들여 당의 신뢰 회복에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여론은 싸늘하다. 2023년 12월 자민당 내 대부분의 계파가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통해 거둔 지원금을 유용한 사실이 드러난 ‘비자금 스캔들’이 터졌다. 이 여파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가 물러나고 이시바 내각이 출범했지만 비슷한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만 확인한 형국이다. 도쿄 황인찬 특파원 hic@donga.com}

자민당 초선 의원 15명에게 1인 당 10만 엔(약 98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돌린 것이 드러나 정치적 입지가 위축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가 이번에는 방위상이 총리의 주요 정책을 공개 반대하는 상황을 맞았다. 15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나카타니 겐 방위상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이시바 총리가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에서 구매 의욕을 보인 미국 보잉사의 C-17과 도입과 관련해 “진심으로 이것을 원한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카타니 방위상은 또 “수상 자신도 어떤 결정을 내리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나카타니 방위상은 “이미 미국에서는 C-17 제조를 중지해 부품을 포함해 모든 필요 물품의 조달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반대 이유를 밝혔다. C-17의 새 기종 생산은 2015년 종료됐으며 이제는 중고를 구매해야 한다. 아사히신문은 “C-17 도입을 지론으로 펴온 이시바 총리와 나카타니 방위상 사이에 인식차가 표면화한 형국”이라며 내각 내 미묘한 기류를 전했다.앞서 14일 이시바 총리가 상품권 지급에 대해 사과했지만 “정치자금법 위반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해 야당 등의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이니치신문 등은 16일 이시바 총리가 대표를 맡고 있는 돗토리현 제1선거구 지부가 2021년에 받은 개인 기부금 14건, 총 132만 엔(약 1300만 원)의 기부자 주소를 잘못 게재했다고 보도했다. 기부자 개인 주소가 아니라 기부자가 이끄는 기업이나 단체의 주소를 기재해 법 위반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도쿄=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앞으로 다큐멘터리 쪽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2010년 연세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당시 마흔 살의 소설가 한강은 교수에게 불쑥 이런 얘기를 한다. 그때는 몰랐다. 이 한마디가 나중에 일어날 거대한 파장의 전조일 줄은.이를 기점으로 한강(54)의 문학은 큰 변화를 맞는다. ‘채식주의자’(2007년)처럼 개인이 다른 개인을 핍박하는 구도를 넘어 국가와 같은 거대 집단이 개인에게 큰 상흔을 남기는 역사적 고통을 증언하게 된 것. 2010년 이후 발표한 주요 작품인 ‘소년이 온다’(2014년)는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2021년)는 제주 4·3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스웨덴 한림원이 주목한 것도 이 부분이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것이 노벨 문학상의 시상 배경이었다.》당시 한강의 석사 논문을 심사했던 정과리 연세대 명예교수(66)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왜 다큐멘터리로 가려고 하는지 잘 몰랐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더군요. 한강은 줄곧 상처 입은 사람들 얘기를 해왔지만 그게 굉장히 내적 성찰로만 드러나니까 역사나 사회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죠. 한강은 결국 한국 사회의 어떤 중요한 사건과 역사적 흐름이 상처 입은 사람들과 다 연관이 돼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큐멘터리로 가겠다고 말했던 거죠.” 국내 대표적인 문학평론가인 정 교수를 16일 오전 서울 은평뉴타운의 자택에서 만났다. “한강을 만나야지 왜 나를 찾아왔냐”는 게 첫마디. 그러면서도 그는 옛 기억을 더듬어 제자의 일화를 하나라도 더 전해주려고 했다. 정 교수는 독창적 비평으로 국내 최고 비평가로 꼽히던 김현(1942∼1990)의 서울대 불문과 직계 제자이기도 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석사 과정생이던 한강이 연구실에서 교수와 대화를 나눴다. 교수가 “요즘엔 책이 너무 많아져서, 보관할 공간이 없다. 그래서 책을 찢어서 스캔을 해서 본다”고 말하자 한강은 깜짝 놀란다. “선생님, 어떻게 책을 찢어요?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가 있어요?” 정 교수는 말한다. “한강은 책을, 문학을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보관할 공간이 없어 책을 찢어서 스캔했을 뿐인데 한강은 좀처럼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문학을 신성시하던 작가가 노벨상을 탔다. 정 교수도 깜짝 놀랐다. “이미 (2016년 부커상 수상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받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만 아주 빨리 찾아왔죠. 보통 완성기에 이르는 작가들에게 주는 게 관행이거든요. 그런데 한강은 아직도 열심히 쓰고 있고, 진화 중인 작가입니다. 그렇기에 한림원이 굉장히 파격적인 변화를 보인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강은 10일 노벨상 발표 이후 기자회견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강 책을 펴낸 출판사들은 기자회견 장소까지 대관했지만 한사코 고사했다. “노벨상으로 바뀐 것은 없다. 조용히 글 쓰고 싶다”는 게 한강의 생각. “그 친구는 한번 마음을 먹으면 옆에서 누가 말해도 잘 안 바뀌는 타입입니다. 또한 아버지(한승원 소설가)는 굉장히 개방적인 스타일인데, 반대인 측면이 있죠. 학교에서 봤을 때도 워낙 조용하고, 어디 숨어 있는 것 같고, 눈에 띄지 않는 친구였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굉장히 주체적인 모습이 있고,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한강의 ‘당당한’ 모습은 2005년 이상문학상 시상식에서 볼 수 있었다. 중편 ‘몽고반점’이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작품은 비디오 아티스트인 ‘나’가 처제의 엉덩이에 남아있는 몽고반점을 상상하며 몸에 대한 원초적 욕망과 강한 예술적 영감에 빠진다는 내용. 당시 문단의 한참 선배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등장 인물 중 보디페인트 칠을 하는 형부에 ‘꽂혀서’ 이런저런 심사평을 남겼다. 하지만 수상자인 서른다섯의 한강은 시상식에서 잘라 말했다. “저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닙니다.” 이후 시상식 분위기가 묘해졌다는 게 문학계에 오래 전해지는 얘기다. 한강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하다. 바로 옆에 있어도 들릴락 말락하다. 2011년 소설 ‘희랍어 시간’을 펴냈을 때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작가의 목소리가 좀처럼 잘 들리질 않아 귀를 쫑긋 세웠던 기억이 있다. 정 교수는 이런 한강의 화술을 ‘말을 조리 있게 잘하면서도, 아주 작게 말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또 이런 화법을 소설 작법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 “한강의 작품을 읽다 보면 굉장히 사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이게 아주 가볍게 찰랑찰랑거리는 물 같아요. 그런데 들여다보면 그 밑에 역사라든지, 사회라든지 그런 문제들이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강의 소설에는 시도 녹아들어 있다. 스웨덴 한림원이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밝힌 것도 그 까닭. 그도 그럴 것이 한강은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먼저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 잡지의 편집동인 중 한 명이 정 교수였다. 다만 당시 연세대에 있지를 않아서 한강이란 사람을 개인적으론 모를 때였다. “편집동인의 만장일치로 등단시키는데 한강도 마찬가지였죠. 굉장히 담백한 수채화 같은 시들이었습니다. 당시는 이성복, 황지우를 필두로 이미지가 굉장히 화려한 시들이 문단에서 각광을 받았는데 한강의 시는 그렇지 않았죠.”시에 대한 관심은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으로도 이어진다. 정 교수가 심사했던 한강의 석사 논문 제목은 ‘이상의 회화와 문학 세계’. 시인이자 소설가, 건축가였던 이상을 이해하기 위해 한강은 문학과 미술에 동시에 접근하는 흔치 않은 시도를 펼쳤다. 작가 이상과 그림에 대한 관심은 그의 문학을 미학적으로 더욱 끌어올린다. “한강이 어떤 내적 감성을 회화적 이미지로 치환시키는 것은 언어의 미적인 부분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큰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죠. 특히 채식주의자 연작 중 한 편인 몽고반점의 회화적 매력은 부커상 수상을 이끄는 등 해외에서 굉장히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한강이 노벨상에 닿기까지 그의 작품을 해외에 소개한 번역자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채식주의자’의 경우 무려 31개 언어로 번역이 됐으니 31명 해외 번역가들의 숨은 조력이 있었던 셈. 그중 영어본을 맡은 영국 출신의 번역가인 데버라 스미스(36)는 한강과 부커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정 교수는 스미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케임브리지대를 나온 번역가들은 아시아권이라 하면 보통 중국어, 일본어를 택하는데 그 친구가 한국어를 택한 걸 보면 굉장히 성취욕이 있는 친구죠. 본인 스스로도 상당히 어떤 감수성과 문장력을 갖고 있으니 영국 독자들이 어떻게 하면 책을 읽을 것인가 직관적으로 파악해서 번역을 한 거죠.” 하지만 스미스의 번역본이 나온 뒤 국내에선 오역 논란이 일기도 했다. 몇몇 평론가들이 문제를 제기했고, 정 교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제 의역과 오역의 합리적인 절충점을 찾는 것이 한강의 노벨상이 남긴 또 다른 과제가 됐다는 말도 나온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한 주 지났지만 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수상 발표 5일 만에 한강의 책들은 판매량 100만 부를 넘겼으며, 해외 아마존 문학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한강의 수상은 문학의 고급화를 상징하는 봉우리 같은 것’(소설가 이문열)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정 교수는 아직 남은 숙제도 많다고 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98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 남미 소설의 붐이 일었죠. 마르케스 말고도 다른 작가가 소개되며 외연을 넓힌 것에는 남미 소설 특유의 색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강 등 일부 작가가 개인적 성취를 거두는 것을 넘어서 한국 문학 전체를 아우르는 특유의 색채를 찾아야 한국 문학이 더욱 널리 읽힐 것입니다.”정과리 명예교수△1958년 대전 출생△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서울대 불어불문과 졸업△1984년 충남대 불어불문과 전임강사△1986년 충남대 불어불문과 조교수△1993년 서울대 불어불문학 박사△2000년 연세대 국어국문과 교수△2005년 대산문학상 평론부문△2015년 편운문학상 평론부문△2023년 연세대 국어국문학 명예교수황인찬 문화부장 hic@donga.com}

“아야, 배가 너무 아파….” 주안이는 배를 움켜잡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간식을 나눠 먹은 후였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친구들은 멀쩡하고, 왜 주안이만 아플까요. 바로 손가락 요괴 때문이랍니다. 손가락 요괴들은 기회를 보고 있다가 주인이와 친구들의 손가락에 올라탔지요. 최종 도착 목표는 아이들의 배 속이랍니다. 친구들은 간식을 먹기 전에 손을 잘 씻어 손가락 요괴를 없앨 수 있었어요. 하지만 손을 씻지 않은 주안이는 달랐어요. 요괴들이 손가락에서 간식으로 올라탔고 결국 배 속으로 들어가 왕성하게 번식하게 된 거죠. 결국 주안이는 병원에 갔고 의사 선생님은 ‘장염’이라고 말해 줍니다. 아이들이 흔하게 걸리는 ‘장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힘이 빠져 누워만 있는 아이를 볼 때면 안쓰럽습니다. “손을 잘 씻어라”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잘 듣지 않죠. 그럴 때 손가락 요괴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아이들이 조금 더 정성 들여서 손을 씻지 않을까요.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현충원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국보 ‘세한도’의 기부자 손창근 씨(1929∼2024)는 고심 끝에 자식들에게 이런 결정을 알렸다. 그는 2012년 경기 용인의 산림 660만 ㎡(약 200만 평)을 국가에 기증해 그해 산림청으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아 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을 이미 마련한 상태였다. 평소 ‘얼굴 없는 기부왕’으로 본인을 드러내기를 단연코 거부한 그였지만 본인의 장지를 두고는 마지막까지 고심이 깊었단다. “아버님이 현충원 안장 부분만큼은 몇 번이고 생각이 바뀌시는 것 같았어요. 결국 형님과 누님에게 ‘(대전)현충원에 직접 가보라’는 말씀까지 하셨지요.”》손창근 씨의 차남인 손성규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64)의 말이다. 하지만 결국 손창근 씨는 현충원 안장을 스스로 포기한다. 손창근 씨는 11일 세상을 떴다. “죽음을 주위에 알리지 말라”는 그의 당부에 장례는 친인척 20여 명만 참가한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졌다. 장례 절차를 다 마친 뒤에야 뒤늦게 그의 별세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발인이 열흘 정도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손 교수를 만났다. 자신이 공개되기를 꺼린 아버지처럼 아들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이건 기사에는 쓰지 말아 달라”는 말도 종종 덧붙이며 감춰져 있던 아버지 얘기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그 일부를 전한다. ―현충원을 가지 않으셨는데 장지는 어디인가요? “장지는 그냥 선산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친척 한 분도 장례에 참석 못 했다면서 장지를 가겠다며 물어오셨는데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며 장소를 안 알려드렸습니다.” 손창근 씨는 마지막 가는 길도 한결같았다. 본인이 사망하더라도 앞서 세한도 등을 기부한 국립중앙박물관, 임야를 기부한 산림청 등 주변에는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단다. “내가 뭐라고 바쁘신 분들 여기까지 오시게 하겠나. 주위에 폐 끼치지 말아라.” 고인의 빈소는 경기 용인세브란스병원이었다. 2009년부터 부인과 함께 머물던 실버타운과 가까운 곳이지만 서울 사는 사람들이 오가기에는 다소 먼 거리다. 그러니 ‘괜히 알려서 폐 끼치지 말라’는 마지막 당부였다. 손창근 씨는 앞서 통 큰 기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당시 1000억 원 상당의 임야를 기부할 때는 대리인을 보내 본인의 사진 한 장 나오지 않았다. 2017년 KAIST에 50억 원 상당의 건물과 1억 원을 쾌척했을 때도 설득 끝에 공개된 것은 뒷모습뿐이었다. 이후 KAIST가 명예박사 수여를 여러 번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고사했다고 한다. 그는 2018년 구순을 맞아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년)과 추사의 난초 걸작 ‘불이선란도’ 등 미술품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박물관은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을 마련했다. 개성 출신 실업가이자 고미술 수집가였던 손세기 씨(1903∼1983)와 그의 아들인 손창근 씨가 대를 이어 우리 고미술을 수집하고, 또 국가에 기증한 뜻을 기린 것. 한 번도 공개석상에서 기증의 소회를 밝힌 적이 없던 손창근 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한 점 한 점 정(情)도 있고, 애착이 가는 물건들입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 고민 생각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손 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 주세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손창근 씨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는 고미술품들로 가득 채워진 방이 하나 있었다. 벽에 걸리거나 장 속에서 고미술품들 대부분은 간직돼 있었다. 하지만 금고에 들어가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국보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1844년)였다. 추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세한도의 서화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33.5cm. 하지만 청나라와 조선 문사들이 쓴 감상평이 그림 옆에 줄줄이 덧붙어 현재는 총길이가 15m에 이른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농담으로 ‘이건(세한도는) 가치가 조 단위’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무척 아끼셨다.”(손성규 교수) 그래서였을까. 세한도가 세상에 기증되기까지는 1년 2개월이 더 걸렸다. 앞서 임야를 기증할 때처럼 본인이 오랜 고민 끝에 결정을 먼저 하고, 가족들에게 결심을 알리는 수순이었다. 손 교수는 그런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평생 종교가 없었습니다. 신앙이 있다면 어떤 종교적 의미에 기대어 큰 기부 결정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기댈 곳이 없었어요. 오로지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외롭고, 고독한 가운데 어려운 의사 결정을 했죠. 사실 축의금마저도 10만 원 할까, 20만 원 할까 무척 고민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결정을 그때그때 혼자 하시다 보니 너무 힘드셨겠다, 이제 와서 보니 자식으로서 안쓰러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손창근 씨가 기부를 하는 이유를 가족들에게 명확히 얘기한 적은 없다고 한다. 평소 말수가 지나치게 적을뿐더러 본인의 속내를 잘 드러내는 성격도 아니라고 한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가족들에게 기부와 관련된 소회나 당부의 말은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그는 가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를 많이 이룬 사람이 그것에 걸맞지 않게 국가나 사회를 위해 아무것도 베풀지 않는 모습을 볼 때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 전혀 베풀지 않는구나. 부와 명예를 움켜쥐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가족들은 손창근 씨의 기부에는 부친 손세기 씨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손세기 씨 또한 1973년 서강대에 보물 ‘양사언 초서’를 비롯해 정선, 심사정, 김홍도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다. 당시 기증서 내용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고 하면서 함께 작성한 것이라고 손 교수는 얘기했다. 손창근 씨가 기부를 이어간 이유도 이 글에서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께서 물려주신 유품들을 영구 보존하여 주시고 귀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박물관을 통해 우리의 옛 문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1973년 1월 30일 석포 손세기.” 손 교수가 어릴 적에는 종로구 가회동에서 조부모, 부모 등 3대, 9가족이 함께 살았다. 조부와 아버지는 틈이 나면 가까운 인사동을 돌며 고가의 고미술품을 사 모았다. 조부 손세기 씨는 간송미술관에 특별전이 열리면 거의 전시실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고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 영향을 받아 손창근 씨도 고미술의 매력에 빠지며 부친과 함께 수집에 나선 것. 하지만 평소 생활은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면지를 모아 다시 썼고, 택시를 탈 때면 순방향에서만 탔지 반대 방향에서는 타지 않았어요. 한번은 부모님이 여행을 가셨는데, 어머니가 호텔방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냈더니 아버지가 외출복을 입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뭐 하러 비싼 콜라를 마시나, 내가 편의점 가서 사 오겠다.’” 손 교수는 또 “아버님이 어머님에게 항상 빠듯하게 생활비를 주신 게 기억이 납니다. 그런 절약 정신은 제 조부도 비슷해서 작은아버지 또한 ‘어릴 적에는 길바닥에 나앉을 정도로 집이 가난한 줄 알았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끼고 아껴서 사 모은 미술품들은 이제 모두 기증된 상태다. 고인이 떠난 용인 거처에는 대신 세한도 기증으로 받은 문화훈장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 용인 임야 기증으로 받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자리 잡고 있다. 국가에 기증된 세한도는 기증실이 개편된 이후 올 1월부터 지난달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됐다. 박물관 측에선 공개에 맞춰 손창근 씨의 방문을 부탁했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아들인 손 교수가 대신 다녀왔다고. 아끼던 세한도를 다시 보지 못하고 고인은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평소 이런 말을 했다고 손 교수는 전했다, 그 말에서 자식을 다 키워 세상으로 내보낸 뒤 애써 정을 줄이려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졌다. “기부하면 다 그만인 것이다. 서약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얼굴 없는 기부왕’ 손창근 씨1929년 개성 출생1953년 서울대 섬유공학과 졸업1960년대 스위스계 상사에서 일하다 부친과 함께 사업2012년 임야 660만 ㎡기부,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2017년 KAIST에 50억 원 상당 건물과 1억 원 기부2018년 추사의 ‘불이선란도’ 등 문화유산 304점 기부2020년 추사의 ‘세한도’ 기부, 금관문화훈장 추서2024년 향년 95세로 별세황인찬 문화부장 hic@donga.com}

일본에서 두 아들을 키우며 살고 있는 한국인 50대 부부가 있다. 일본에서 13년 넘게 살았지만 흉금을 터놓게 얘기할 수 있는 일본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지금 살고 있는 일본 사이타마현의 한 지역 마을은 2층짜리 전원주택이 앞뒤로 빼곡이 들어선 곳이지만 그렇다고 이웃과의 왕래는 거의 없다. 일본에서 흔하디흔한 편의점마저 찾기 힘든 곳. 한적하다 못해 답답할 정도다.하지만 2년 반 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유튜브가 삶을 바꿔놓았다. 50대 부부가 본인들의 일본 생활기를 담담하게 적던 이야기는 이제는 일본 여행의 맛과 관광 정보를 넘어 일본 사회에 대한 설명까지 넓어졌다. 구독자도 이제 2만9000명을 넘겼다. 여행 정보를 찾는 20, 30대부터, 일본에서의 자녀 교육 및 유학, 그리고 은퇴자로 일본에서 살아가는 것 등에 관심이 많은 중장년층도 자주 찾는다.도쿄 중심에서 지하철로 1시간가량 떨어진 외곽에서 일본 전원 라이프 등을 전하는 유튜브채널 ‘우리두리브이로그’ 얘기다. 사이타마현에 있는 유튜버 우리두리의 집이자 ‘사무소’를 찾았다. 유튜버 ‘우리’는 남편, ‘두리’는 아내로 둘 다 50대 초반이지만 유튜브에 대한 열정만큼은 MZ 세대 못지 않았다.-50대에 유튜버를 시작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나요.“평소에도 워낙 사진 찍고 동영상 찍는 것을 좋아했어요. 지금 하는 채널 이외에 앞서서 채널을 하나 운영하기도 했는데, 2021년 6월쯤에 남편과 함께 본격적으로 ‘한번 해보자’해서 유튜브 제작에 집중하게 됐습니다. 지금 채널이 두 개 인데 일상 생활을 담는 ‘우리두리 브이로그’는 매주 동영상 한 건을, 여행 정보를 담은 ‘우리두리’는 2주에 한 건 정도 동영상을 올리고 있어요.(아내)”※두 부부는 원래 게임 프로그래머였다. 일본의 게임회사에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 정착하게 됐다. 현재 부인은 퇴직을 했고, 남편은 퇴직후 경화물차로 배달 일을 하고 있었지만 조만간 다시 게임 개발일을 하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유튜브 제작에는 어느 정도 시간을 쓰세요.“사실 10분짜리 동영상을 하나 올리는데 거의 일주일을 풀로 쓴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하루 반나절 정도는 콘텐츠 구상과 대본을 짜고, 촬영은 하루 정도 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손이 느려서 그런지(웃음) 편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편집하는데 사흘 정도 걸리는데, 중간중간 추가 촬영도 하고 해서 완성까지 꽤 시간이 걸립니다.(아내)”-동영상에 대한 애착이 크시겠네요.“사실 매주 출산을 하는 느낌입니다. 매주 금요일 오후 7시에 올리는데, 업로드를 한 뒤에 저희끼리 맥주 한잔 하죠. 조횟수 올라가는 것을 보는데 생각보다 빨리 안 올라가면 ‘왜 그런 거지’라는 얘기도 서로 하고 그럽니다.(아내)”-구독자들은 어떤 분들인가요.“아무래도 저희가 한국어로 영상을 만들다보니 일본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이 대부분입니다. 40대 이상이 거의 절반이 되고, 20~30대가 그 다음입니다. 여행 정보를 보러 오시는 분들도 많지만 외국 생활을 꿈꾸거나 일본에 자녀를 유학을 보내려는 부모님들도 많이 찾아오세요. 아무래도 저희가 두 아들을 일본에서 키웠으니까요.(남편)”-일본에서 애들 교육은 어떠셨나요?“첫째 아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때, 둘째는 유치원 때 일본에 왔지요. 보통 일본에 주재원으로 오시는 분들은 국제학교에 애들을 보내는데, 저희는 일본 학생들이 다니는 보통의 학교에 보냈어요. 저희는 혹 애들이 학교에서 차별이라도 받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아이들은 정작 학교에서 이지메 같은 것을 모르고 지냈다고 하네요. 저희가 걱정했던 만큼 학교 생활에 문제를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남편)”※첫째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현지에 취직하며 독립을 했다. 작은 아들은 고3 수험생으로 올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막바지 입시를 치르고 있었다.-남편분은 영상에 얼굴을 공개하지만 아내분은 안 나오시는데요.“처음에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다가 남편 먼저 자연스럽게 공개하게 됐고요. 저는 마스크를 쓴 모습만 공개했는데, 제 얼굴을 공개하려면 화장도, 의상도 신경을 매번 써야 하니 그런 부분이 걸려서 공개 안한 측면도 있어요.(웃음) 코리안타운인 신오쿠보의 한국슈퍼에서 한국인 구독자 부부가 남편을 알아보는 등의 일이 생겨서 저희도 외부 시선을 조금씩 신경 쓰고 체감하고 있죠. 또한 악성 댓글 이런 것도 있어요. 하지만 저희 부부가 원래 게임개발자였어서 게임 공개 후 불만을 표시하는 유저들을 경험해봐서 악성 댓글에는 어느 정도 맷집이 있는 상태입니다.(아내)”-유튜브를 꾸준히 제작하게 되는 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물론 구독자가 늘고 수익이 늘어나고 이런 물질적인 부분이 제작 동력이 되죠. 그런 면도 있지만 이를테면 유튜브에 멤버십이라는 게 있어요. 저희 유튜브 채널의 멤버십이 되려면 월 490엔을 지급해야 하는데 현재 열 분 정도가 이런 멤버십에 가입해 계세요. 한국이나 일본이 아닌 미국이나 뉴질랜드에 계신 분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과는 굉장히 특별한 관계가 되고 사람들을 만나는 인연도 넓어지는 것 같아요. 저희가 지금은 도쿄 외곽의 한적한 곳에, 현지 일본인들과도 교류가 적은 조금 적적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유튜브 속에서는 구독자들과 거리와 시간 제한 없이 넓게 교류를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점이 유튜브 제작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아내)”-유튜브 제작의 목표가 있을까요.“5만 명, 10만 명 구독자가 늘어가면 좋겠죠. 그러기 위해 노력도 할 것이고요. 하지만 좋은 사람들을 더 알아가고, 소통하고 이런 매력이 유튜브에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유튜브는 60대, 70대에도 계속 이어서 제작할 것 같아요. 그때쯤되면 여행 정보 같은 것보다는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얘기, 그리고 여기저기 여행하는 얘기가 주요 주제가 될 것 같아요. 저희 삶의 모습들을 기록하고, 그것을 통해 주위 사람들과 함께 얘기하는 마당 같은 곳을 만들고 싶습니다.(남편)”※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의 취재 지원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사이타마현=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일본의 사립명문 와세다 대학을 나와 일본 증권사에 들어가 연봉 2억 원까지 받았던 적도 있다. 회사를 나와 공유숙박업 성장기인 2016년 에이비앤비를 시작해 4호점까지 숙소를 확장하며 작은 성공도 맛봤다. 대출까지 받아 숙박 사업을 확장했지만 갑작스런 코로나로 모두 처분하는 아픔도 있었다. 일본 현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유튜버 도쿄박사장(39·박태산) 얘기다.사업 기획과 트렌드 분석에 공을 들이는 그는 유튜브 시작도 비교적 빨랐다. 2019년 12월 채널을 개설한 벌써 5년 차 유튜버. 하지만 구독자 수는 아직 3600명 수준. 그는 “유튜브는 꾸준히 영상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사업이 우선시 되다 보니 경영상황에 따라 업로드가 단절되는 기간이 여러 번 있었다”고 아쉬워했다.하지만 그가 일본에서 공유숙박업, 부동산 중개 등의 사업을 하면서 일본의 부동산 상황을 전하는 것은 꾸준히 구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최근 일본의 경제 상황이 좋아지고, 엔화 약세 현상이 이어지면서 일본 부동산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 일본의 부촌 가운데 한 곳인 지우가오카에서 도쿄박사장을 만나봤다. -유튜브를 왜 시작하셨나 “사실 부동산 사업을 하면서 자신의 얼굴과 브랜드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죠. 유튜브를 사업 기회를 확장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했습니다.”-효과가 있으셨나“일본 여행, 관광 정보를 다루기도 하지만 제 채널의 차별점이 있다면 일본 부동산에 대한 정보를 담은 영상이죠. 제 채널의 구독자는 80% 이상이 남성이고, 연령대로는 40대가 가장 많아요. 일본에서 사업을 하시려는 분들부터 당장 집을 구해야 하는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오는 편입니다. 다양한 니즈를 갖고서 유튜브를 보시고, 또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오세요. 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많은 편입니다. 유튜브 자체가 하나의 사업적인 플랫폼이 되는 거죠. 일본 회사들로부터도 협업 제의가 와서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유튜브의 부제가 ‘일본에서 살아남기’이다. 뜻이 뭔가“2003년에 일본에 처음 왔으니 이제 20년이 넘었네요. 저 같은 경우는 일본 대학에 유학을 오면서 일본 생활을 시작했고 지금도 일본에 남아있는 경우죠. 하지만 일본 대학에 유학오는 한국인 학생들은 대부분 졸업을 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요. 일본에 남고, 직접 사업까지 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경우입니다.”-유학을 마쳐도 일본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인가요 “물론 일본 회사에 취직할 수 있죠. 하지만 막상 일본 회사를 다녀보면 외국인으로서 어떤 벽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돼요. 열심히 해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하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만약 일본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면 한국과의 사업 교류가 많은 그런 회사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죠. 본인이 한국인으로서 높이 올라갈 수는 자리가 있는지 그런 것을 확인하는 게 좋습니다.”-일본에서 직장 생활도 하셨죠“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다이와 증권에서 일을 했고, 한국 지사에서 주재원 생활을 한 적도 있었죠. 당시 연봉도 한화로 2억 가까이 받았어요. 어쩌면 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아닐까도 싶어요. 하지만 개인적인 집안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됐고, 일본 현지에서 사업을 하게 됐습니다. 사업은 부침이 좀 있었어요. 2016년 에어비앤비를 시작했는데, 일본이 도쿄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일본에 오는 관광객 수를 늘리려고 하고 공유경제가 확장되는 시기였죠. 당시 사업이 잘 돼서 업장을 4곳까지 늘린 적도 있습니다.”-그러다 코로나를 맞은 것인가“그렇죠. 한창 에어비앤비 사업을 확장할 때 코로나가 찾아와 큰 타격을 입었죠. 그래서 업장을 하나씩 정리했고, 한동안 무직 생활을 하기도 하는 등 어려움이 컸습니다.”-사업 실패나 증권 투자로 수억 원을 잃은 얘기도 동영상으로 올리는데“보통 일본 관련 유튜브라고 하면 맛난 것 먹고 관광지를 소개하는 가벼운 콘텐츠들이 많잖아요. 물론 저도 그런 콘텐츠를 만들 때도 있지만 그 외에 조금 어려운 얘기들도 하고, 이를테면 제 실패담도 해서 구독자들과의 공감대를 넓히고 싶었습니다.”-유튜브 수익은 어떠세요“사실 아직 구독자가 많지 않아 거의 수입이 없는 셈이예요. 하지만 한동안 유튜브를 안하면 ‘박 사장, 어디 자살 같은 거 한 거 아니죠’이란 구독자의 연락도 오기도 합니다. 한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들이 서로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들이 신기하게 느껴집니다.”-일본에서 20년 사셨다,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생각은 어떤 변화가 있나 “제가 처음 일본에 올 때만 해도, 일본 사회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조금 아래다’라고 인식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한류 바람이 불고, 최근에는 BTS 같은 가수들이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면서 상황이 바꿨죠. 사실 젊은 층은 고정관념이 없기 때문에 BTS 등 한류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어요. 또한 연령이 좀 있으신 분들의 생각도 많이 바꿔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한국의 선진성, 그런 것을 많이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일본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줄 만한 말이 있다면 “확실히 한국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생활하며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하지만 일본은 한국보다 템포가 많이 느려요. 좀 괜찮은 식당은 2주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하고, 제가 법인 설립을 하는데도 길게는 한 달 정도 걸리죠. 은행계좌 개설도, 인터넷 설치도 한 달 넘게 걸리는 적이 있습니다. ‘빨리빨리’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답답해 하실 거예요.”-유튜브는 계속 하실 것인가 “물론이죠. 그래도 사업이 주가 될 것 같고, 유튜브는 일본 현지에서 하는 사업을 홍보하는 보조적인 역할이 될 것 같아요. 도쿄박사장이란 유튜브 이름을 브랜드화하고 싶고, 부동산쪽 사업을 키워가고 싶습니다. 일본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한국 사람, 일본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통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의 취재 지원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무진은 어디에 있습니까?”‘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83)은 잠시 생각하더니 흰 종이에 한반도 지도를 그렸다. 지도 위에 서울을 표시하고, 이어 평양, 부산, 순천을 적더니 마지막으로 광주를 표시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각 도시를 포함하는 큰 원을 그리고 ‘무진’이라고 눌러 적었다. 무진은 서울일 수도, 부산일 수도, 그 어느 곳일 수도 있다는 뜻이란다. 1960년대 무진기행을 읽고 감명받은 문청들이 서울역으로 가 무작정 무진행 열차표를 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고 하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김 작가가 23세 때인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한 ‘무진기행’이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2003년 뇌졸중이 발병한 이후 정상적인 대화가 힘들어진 그는 재작년 허리 부상에 이어 지난해 초 장협착증이 발견됐다. 큰 수술을 3번 받아 기력이 급격히 약해졌단다. 이후로는 서울 강북구 번동의 집에서 칩거하다시피 했다고. 하지만 ‘무진기행 60주년 얘기를 듣고 싶다’고 가족을 통해 뜻을 전하자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마침 3일 저녁에 서대문에서 가족 모임이 있으니 좀 일찍 나가 인터뷰를 하겠다는 뜻도 전해왔다. 이날 오후, 지팡이를 짚은 김 작가가 느릿한 걸음으로 광화문 동아일보의 인터뷰 장소로 들어왔다. 아내, 장남과 함께였다. 김 작가는 21세, 서울대 불문과 2학년 때 ‘생명연습’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2년 뒤에 ‘무진기행’을 발표하자 문단은 술렁였고, 이듬해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거머쥐자 문단은 충격을 받았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중략)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무진기행 중에서) 이날 작가는 90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떠도는 적절한 답변의 단어를 찾느라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고선 ‘무진’ ‘안개’ ‘남과 여’ ‘선과 악’ ‘부끄러움’ 등의 단어를 반복해 적기도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장남이 “이런 뜻입니까” 하면 때론 웃으며 긍정했고, 때론 “아니”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안개 속에서 길을 찾는 듯한 대화가 출구 없이 이어졌다. 기자는 12년 전에 등단 50주년을 맞은 김 작가를 필답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안개’가 짙어진 듯했다. ‘무진기행 발표 60주년이 된 소감’을 묻자 작가는 답 대신 종이를 꺼내 ‘뇌졸중’ ‘동아일보’를 연이어 적었다. 뇌 모습을 그리더니 옆에 다시 뇌졸중이라고 적었다. 알 듯 말 듯했다. ‘무진을 오랫동안 사랑해주시는 독자에게 감사하시냐’고 다시 묻자 그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그러고선 그는 갑자기 ‘무진기행’을 봐야겠다면서 책이 지금 있냐고 물어왔다. 문고본은 찾지 못해서 급한 대로 컴퓨터에 저장된 무진기행의 파일을 노트북 모니터에 띄우자 그는 위아래로 손짓을 해가며 자신이 읽고 싶은 부분을 찾게 했다. 그러고선 그는 직접 손을 뻗어 모니터에 올라온 수많은 문장들 사이에서 몇 문장을 반복해 짚었다. 소설 말미, 정확히는 세 문장이었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찢어 버렸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제약회사 간부인 윤희중은 고향인 무진에 내려와 현지 음악교사인 하인숙을 만나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아내의 전보를 받고 급히 상경하게 되면서 하인숙을 향해 연정의 편지를 쓰지만 이를 결국 찢고 그냥 무진을 떠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결말 부분이다. ‘특히 마음에 드시는 부분이냐’고 묻자 김 작가는 환하게 웃었다.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 하며 어렵게 쓰신 부분이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더 환하게 웃었다. ‘무진기행’을 지금도 종종 읽으시냐고 묻자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아내의 전보를 받고 상경한 주인공은 평소 원했던 대로 제약회사 전무가 되었을 것이다. 김 작가에게 무진기행의 결말 이후가 어떻게 됐을지를 묻자 그는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윤과 아내→행복(안개)→부끄러움’ 작가는 아내에게 돌아가 겉으로는 행복하지만 내면에서는 계속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게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는 윤과 같은 삶을 선택하지 않겠냐는 뜻을 비치기도 했다. 김 작가는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을 통해 1960년대 꿈과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삶을 문제적 시각으로 그려냈다. 1964년의 한국 사회와 2024년의 한국 사회.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했을까. 그가 다시 펜을 집었다. 그는 1960년에는 군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군인이 없는 사회가 됐다고 했다. 군인은 군사정권이라는 설명도 추가로 곁들였다. ‘세상이 좋게 변한 것이냐’고 되묻자 그는 이번에는 “그럼”이라고 명확히 육성으로 답했다. 앞서 김 작가의 휴대전화로 인사를 담은 문자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가족을 통해서는 대면 인터뷰 진행이 어려울 수도 있으니 선생님이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미리 전달해주면 좋겠다는 부탁도 전했다. 작가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거의 이틀 만인, 인터뷰 당일 정오쯤에 18줄의 제법 긴 답문이 도착했다. 아쉽게도 대부분 본인의 이력을 다시 기계적으로 언급한 것들이었지만, 이런 부분도 있었다. ‘1966년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 창문사(인세 안 됩니다. 김승옥 화냈다)’ 김 작가 아내의 설명으로는 당시 소설가 황순원의 동생이 운영하는 출판사 창문사에서 첫 단편집을 냈는데 인세를 하나도 주지 않아 당시 남편의 불만이 컸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승옥 부부의 주례 선생님은 황순원 작가였다. 아내는 “황순원 선생님은 동생이 인세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셨을 것이다. 어찌 됐든 황 선생님이 저희의 주례를 서 주셨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며 웃었다. 김 작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위에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가족들은 얘기했다. 하지만 이날도 김 작가는 작은 회색 수첩과 어느 책에서 찢어낸 자신의 이력이 담긴 종이 2장을 가져와서 무언가 생각이 안 나면 몇 분 동안이나 들여다보곤 했다. ‘수첩을 볼 수 있습니까’ 물었더니 작가는 열어봐 주었다. 문장보다는 단어, 그마저도 어떤 연관성을 찾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는 페이지도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김승옥 문학상은 지난해까지 8회 수상자를 배출했다. 등단 10년이 넘은 작가가 발표한 단편 가운데 수상자를 가린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다시 적절한 단어를 찾느라 한참 ‘안개’ 속을 서성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가 2004년 펴낸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책이 지금 없다고 하자 그 책을 펴낸 아현동에 있는 출판사를 지금 찾아가자고 장남에게 말했다. 기자에게도 그 책을 본 다음에 질문에 대한 답을 문자메시지를 통해 보내겠다고 했다. 김 작가의 장남은 “아버지는 이제 어떤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이전 작품들을 다시 읽으며 그것을 찾으려고 하신다”며 “이제 아현동 출판사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감각적인 문장을 찾아다니던 20대의 청년은 80대가 돼서도 여전히 비슷한 자리에서 분투하는 모습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젠 앞서 자신이 적어놓은 글들에 기대어 어떤 출구를 찾고 있다는 것. 그는 여전히 무진의 안개 속에 서 있는 듯했다.황인찬 문화부장 hic@donga.com}

‘곤니치와’ 정도의 간단한 일본어만 할 수 있었는데 덜컥 해외 영업 주재원이 돼 일본에 왔다. 하지만 일본이 좋아져서 주재 기간이 끝나자 아예 퇴사를 하고 일본에서 살며 활동하는 유튜버가 됐다. 특히 일본 친구들과 격이 없는 진솔한 대화를 통해 일본인들의 혼내(本音·속마음)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그의 채널 강점.“일본 관련 유튜브 채널은 주로 먹방, 여행지 소개가 많죠. 저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특히 유튜브에는 굉장히 자극적 소재들이 많은데, ‘평범한 일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구나’하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일본에서 시작한 유튜버 생활을 통해 일본인 친구도 많이 사궜고, 이제는 한 일본인 친구와 동업해 현지에서 부동산중개업에도 나섰다. 유튜브채널 브레드쿤을 통해 MZ 일본인들의 인식과 가치관 등을 소개하고 있는 MZ 세대 유튜버 김형식 씨(31) 얘기다. 도쿄 세타가야구의 UC JAPAN 부동산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한국 회사의 주재원으로 일본에 왔다고 하셨는데, 원래 일본어를 잘하셨나요“아니요. 저는 영어와 중국어는 좀 했지만 일본어는 거의 몰랐죠. 인사말 정도였어요. 일본에서 산 적도 없고 여행을 온 적이 있는 정도였죠. 그런데 한국 기업에서 해외 영업일을 하다가 일본 주재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오게 됐습니다. 사실 미혼이었고 회사에서 제일 어리기도 했고, 해외 생활을 좋아해서 왔죠. 주재원 기간 3년을 마칠 때쯤 일본에서 계속 살면서,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후 취업 비자도 받고 계속 살게 됐습니다.”-일본 생활이 마음에 들었나보죠.“일본이란 나라도 매력적이었지만, 사실 제가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일본쪽에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요. 제가 주재원으로 2017년 9월에 왔고, 그 1년 뒤부터 유튜브를 제작했는데, 일본인 친구들과 같이 즐기는 영상을 많이 올렸거든요. 한국에 돌아가면 이런 영상을 제작하기 힘드니 일본에 남게 됐습니다.”-일본인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관을 소개하는 영상이 많은데“솔직히 7년 전 일본에 처음 왔을 때는 일본에 대해 좋은 이미지만 갖고 있는 건 아니었어요. 특히 주변의 한국 친구들이 ‘조심해라. 뒤통수 맞는다’ ‘앞과 뒤는 다르다더라’라며 일본 생활을 조심하라는 얘기를 많이 해줬죠. 그런데 실제 살아보니까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그런 점을 찾기 힘들어서, 한국인들이 일본인에 오해하는 점 등을 찍어서 소개하곤 합니다.”-오해라면,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까요.“이를테면 일본인은 ‘앞 뒤가 다르다’이란 말을 한국에선 자주 하는데 제가 보기에 일본인이 그러는 것은 어떤 사회생활을 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한 생활방식으로서 약간의 인사치레 같은 말과 행동을 하곤 하는 거죠. 그런 것을 나쁘게만 볼 것인가에 대해선 좀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또한 인간적으로 더 안으로 들어가면, 진짜 친한 사이에 됐을 때는 그런 앞뒤가 조금 다른 행동들도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한일 관련 연애관, 결혼관 차이 얘기도 많이 다룬다. 그런데 주로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 사이에 주로 호감 분위기 있는 것 같던데“사실 제 주변만 봐도 한일 커플이라고 하면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 관계가 대다수인 것 같아요. 그게 어쩌면 어떤 환상 때문이냐 아니면 진짜 서로 잘 맞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이를테면 일본인 커플이 있을 때 남자가 여성에게 문을 열어준다는가 하는 일은 거의 없죠. 하지만 한국 남성은 이런 부분을 보통의 매너로 인식하고 있죠. 아무래도 한국 남성의 이런 평범하고 사소한 배려에 일본 여성이 감동받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한일 MZ 세대를 둘 다 보는데, 가장 다르다고 느끼는 점은“아무래도 결혼과 출산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적어도 제 주변에서는 결혼을 안 하겠다거나 아기를 안 낳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 거든요. 또한 결혼을 하면 아이를 두 명, 세 명 낳는 사람도 적지 않아요. 그런데 한국은 결혼을 아예 안한다거나 결혼을 해도 아이를 안 낳거나 한 명만 낳겠다는 사람이 많죠. 이런 점은 확실히 온도차가 큰 것 같아요.”-왜 그런 차이가 난다고 보시나 “제 생각에는 한국에선 결혼 자체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끼는 것 같아요. 특히 집(자가)이 없으면 어떻게 결혼을 하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데, 일본에서는 서로 마음이 잘 맞으면 작은 방부터 시작하자고 하고, 또한 집 자체를 구매하는 것을 아예 염두하지 않는 사람도 많거든요. 한국은 집을 사기만 하면 오르는 것을 경험했기에 하루라도 빨리 사자는 주의가 많은 반면에 일본은 버블이 터진 이후 집은 자동차처럼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보편적이죠. 이런 집에 대한 한일의 인식차가 결혼이나 출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일본 MZ 세대의 한국에 대한 인식도 변화를 느끼시나“인터넷 세상하고 현실은 좀 다른 것 같아요. 한참 양국 관계가 안 좋아서 한국에선 노재팬, 일본에선 혐한 얘기가 자주 나올 때에도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거든요. 제 주변에서 한국이 싫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못 봤고, 그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해요.”-동영상에 출연하는 일본인 친구들이 굉장히 솔직하게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그런 부분이 있죠. 사실 얼마 전에 한 일본인 친구가 일본의 유명한 남성 예능인이 미투 논란에 휩싸인 것과 관련해 솔직한 견해를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 구독자들이 ‘어떻게 가해자의 편에 설 수 있나’는 등의 댓글을 남긴 적이 있죠. 하지만 그 영상에 ‘좋아요’를 남긴 분들도 적지 않았어요. 한 일본인의 개인 의견으로 본 거죠. 일본인 친구들은 진솔하게 얘기하고, 그것에 대한 이해와 판단은 구독자들이 하셨으면 좋겠어요.”-구독자 20만 명이 바로 코앞이다. 목표가 있다면“예전에는 ‘몇만 유튜버가 되자’ 이런 생각도 있었는데, 사실 목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또한 구독자를 늘리려면 구독자가 보고 싶은 것만을 주로 올려야만 하는데 그렇게는 적어도 지금은 하기 싫거든요. 제 일본인 친구들과 편하게 얘기를 하면서, ‘평범한 일본 사람들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구나’라는 것을 전하고 싶어요. 또한 한국과 일본은 비행기로 2시간 반밖에 안 걸리는데, 하는 일이 잘되서 일본과 한국에 집을 하나씩 마련해 오고 가며 사업을 하고 싶은 것이 소망이예요.”※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의 취재 지원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도쿄=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군대까지 다녀왔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대학을 나왔고 직장도 일본에서 잡아 30년 가까이 일본에서 살고 있는 일본 국적자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하다. 오사카의 어스름한 퇴근길, 후미진 골목 노포를 찾아가 야끼도리(닭꼬치) 한점에 나마비루(생맥주) 한잔을 시원하기 들이키는 순간, 잠시나마 세상 부러운 게 없다. 미간을 한껏 찡그리며 마시는 그만의 ‘찡’한 첫 잔 매력에 유튜브 구독자가 100만 명을 넘은 지 오래다, 유튜브채널 ‘오사카에사는사람들’의 마츠다 아키히로 씨(52) 얘기다. 그런 시원한 첫 잔 그림을 어떻게 만들까.“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한 오후 4시 정도가 되면 이때부터는 물도 안 먹어요. 시원한 첫 잔을 위해서요. 사실 저도 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몰라요. 마실 때 왼쪽 눈을 감는지, 오른쪽 눈을 감는지도요. 그냥 워낙 술을 좋아하고, 음식을 좋아하니까 저도 모르게 그런 행복한 모습이 나오는 것 같네요.”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3월의 어느 오후 오사카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하이볼이라도 한잔 해야되는 거 아니냐”고 농을 건네기도 했다. ‘마츠다 부장’ ‘꽃중년’ 등으로 불리며 한일 관련 동영상 제작에 분주한 그를 만나 유튜브 제작 뒷얘기부터 한일 관계 문제까지 두루 들어봤다. -어쩌다가 유튜브를 하게 됐나? “사실 오사사채널 계정을 제가 만든 게 아니고 제 직원이 만든 거예요. 그리고 2018년 4월인가, 무슨 일본어 발음에 대해 얘기 해달라고 얘기해서 처음 출연을 했죠. 그런데 반응이 좋아 구독자 2만, 10만이 금방 되기는 했는데, 사실 저는 체질적으로 이게 너무 하기 싫은 거예요. 6개월 쉰 적도 있죠. 하지만 직원들이 ‘오래 안 하면 유튜브 수익구조가 무너진다’고 얘기해 계속 출연하긴 했죠. 그러다가 ‘회사원’이란 영상 시리즈가 크게 뜨면서 지금의 채널이 만들어진거죠.”-‘회사원’ 시리즈가 무척 화제였죠? 누적 조횟수 576만회를 기록한 것도 있던데. “재작년 봄이었나요. 원래 술집 가는 영상을 찍기는 했었는데. 그날은 아무런 섭외 없이 ‘그냥 한번 가보자’라고 했어요, 아무런 계획 없이요. 그런 자연스러운 영상에 크게 공감을 해주셨어요. 특히 그때 코로나가 한국에서 확산될 때라 회식도 못하고, 다들 집에서 혼술을 하실 때였죠. 그런 암울한 시기에 ‘저 술집 너무 좋다’ ‘저런 회식 분위기 너무 좋다’ 이런 점들이 굉장히 많이 와 닿으셨던 것 같다요. 제가 그때 ‘대리비 줄테니까 다들 와서 한잔해’ 이런 말들을 했는데 당시 한국에선 듣기 어려운 말이었으니까요.”-지금은 구독자 105만 명 채널의 운영자입니다. 뒤늦게 적성을 찾으신 건가요.“사실 지금도 적응이 잘 안되요. ‘회사원’ 영상 올린 뒤 일주일에 막 10만 명씩 구독자가 갑자기 늘고 한 이후로 주변 상황이 많이 바꿨어요. 공항 가면 사진 찍어달라고, 사인해달라고 하는데 당시엔 해줄 사인도 없었죠. 어디 길거리도 잘 다니지 못하고, 어디 가서 술을 한잔을 해도 다 알아보시니까. 물론 그런 분들이 있어서 제가 유튜브를 제작할 수 있고 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최근 채널과 관련된 논란도 있었죠. 누리꾼을 고소했다는 얘기도 있던데. “채널과 관련해 부정확한 얘기들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떤 프레임을 씌워서 조직적으로 공격을 하는듯했기에 가만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한국에서 사고 접수도 하고, 피해자 진술도 하고 왔죠. 제가 여러 말씀을 드리는 것은 또 오해를 빚을 수도 있어서. 진행 경과를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일본으로 다시 건너와 생활하신 지 30년이 돼가는데, 한국말이 여전히 유창한데.“제가 한국에서 군대까지 다녀왔는데, 일본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국어가 어눌해지면 그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또 제가 일본으로 유학 왔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요. 집에서는 한국어를 쓰죠. 아내가 한국어가 더 편하다 보니까요.”-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인터넷 백과사전 같은데 그런 글이 있던데, 그런 정보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자식이 없습니다. 결혼은 27살에 했는데 애가 안 생겼어요. 둘 다 별 이상은 없다는데, 의학적 도움을 받기까지는 싫었고, 언젠가 자연스럽게 생길 것으로 생각했죠. 지금은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한일 문제 관련 얘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 초중고를 다니셨는데, 차별은 없었나요.“아버지는 일본분이고 어머니는 한국분이예요. 사실 이중국적이란 개념이 비교적 최근에야 생긴 일이고 저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한국인으로 살았죠. 한국 국적이었고, 한국에서 교육받고, 한국인으로 생각하며 보통의 한국 학교를 다녔으니 차별은 없었죠.”-일본인들의 대한 한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그간 변화를 느끼세요.“한국의 K문화가 이미 전 세계적으로 퍼졌는데 당연히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꿨죠. 사실 1세대가 욘사마(배용준)잖아요. 사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K문화의 유행이) 꺾인 적이 없고, 계속 올라오는 것 같아요.”-일본인의 아주 옛날 인식과 비교하면 어떤가요.“제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닐 때, 기숙사에 살았는데 얘네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이 궁금해서 물어보니 대뜸 ‘한국에 자동차가 다니냐? 자전거하고 리어커만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하더라고요. 그게 30년 전쯤 일이예요. 그때도 강남 테헤란로에 차가 막히고, 고층빌딩에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런 것을 잘 모르는 보통의 일본 대학생들도 있었던 거죠. K문화가 정말 인식을 많이 바꿔놨습니다.”-오사사채널처럼 한일 양국 관계를 잇는 콘텐츠가 많아지면 양국 사이 이해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요. “네 사실 한일 관계에 있어서 계속 이렇게 친밀감 있는 영상을 찍고 노출시키면 아무래도 양국 관계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사람말고도 일본에서 기업하시는 한국분들도 안보이는 곳에서 그런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들 하고 계십니다.”-구독자 100만 명을 넘겼는데, 채널의 향후 목표는 무언가요.“구독자가 많아지면서 좀 새로운 시도를 하면 ‘옛날 느낌이 안 난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죠. 그렇다고 맨날 술만 먹고 다닐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매일매일 방향성 고민이 큽니다. 사실 음식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어떤 요리인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또 요리사분과 얘기하는 것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 영상도 찍어 일본에 대한 이해를 돕고 싶고요. 일본에서 기업하시는 한국분들 얘기도 소개해 취업 준비생들에게 정보도 드리고 싶습니다.”※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의 취재 지원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오사카=황인찬 기자 hic@donga.com}

한지로 만든 오색 산천어가 하늘을 날아오릅니다. 1월에 시작될 산천어 축제도 기대되네요. ―강원 화천군 선등거리에서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제33회 일가상 농업부문 수상자에 황금영 순천종돈장 대표, 제15회 청년 일가상에 노순호 동구밭 대표가 선정됐다. 공로상은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받게 됐다.일가재단은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하고 농민·신앙운동을 펼친 일가(一家) 김용기 장로의 복민주의 사상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1989년 설립됐다. 일가상은 인류와 사회의 발전에 봉사한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국제상으로 1991년에 제정됐다. 농업부문 수상자인 황 대표는 1973년부터 50년간 양돈장을 운영하며 순천광양축산농협 조합장을 역임한 축산인이다. 청년 일가상 수상자 노 대표는 발달장애인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환경보호를 위한 사회적 미션을 실천하고 있다고 있다고 재단은 밝혔다. 손 교수는 2013년부터 7년 간 제4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일가상 심사위원장을 네 차례 역임했다. 현재는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시상식은 다음 달 2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밀알학교 그레이스홀에서 열린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거액의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나쁜 아빠’ 2명의 신상 정보가 처음 공개됐다. 여성가족부는 19일 홈페이지에 양육비 미지급 금액이 1억2560만 원인 A 씨와 6520만 원인 B 씨의 이름, 생년월일, 직업, 근무지 등을 올렸다. 양육비를 받지 못했던 이혼한 여성이 법원의 감치명령 이후에도 지급을 외면하는 전남편의 신상 공개를 직접 요청했다고 한다. 아마도 신청자의 가슴은 그동안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신상 공개엔 당연히 얼굴 사진이 나올 법하지만 빠졌다. 근무지도 도로명만 있을 뿐 상세 주소가 없다. 이래서는 한눈에 ‘나쁜 아빠’가 누군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에 앞서 민간단체 ‘배드파더스(Bad fathers)’는 신청을 받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나쁜 아빠’들의 얼굴 사진까지 공개하며 지급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3년간 900여 건의 양육비 지급 성과도 거뒀다. 이 단체는 정부가 직접 신상을 공개하겠다고 하자 두 달 전 활동을 중단했다. 이번에 정부가 얼굴을 뺀 ‘무늬만 신상 공개’에 나서자 “배드파더스만도 못하다”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는 신상 공개에 앞서 10월 양육비 미지급자에 대한 출국금지와 운전면허 정지 처분을 처음 시행했는데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처벌을 받은 사람 대부분이 여전히 양육비 지급을 외면하고 있다. 출국금지는 6개월, 면허 정지는 100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풀리는 만큼 일단 버티고 보는 것이다. 양육비를 계속 지급하지 않으면 이런 처벌을 연장할 수 있다지만 심의 과정 등에만 다시 1, 2년이 필요하다. 이러니 실효성 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여가부가 2018년 양육비 지급을 약속받은 쪽의 부모 2039명을 조사한 결과 73.1%가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여가부의 양육비이행관리원에 도움을 요청한 건수도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2만3184건에 달했다. 하지만 실제 양육비를 지급받은 사람은 10명 중 3명꼴도 안 됐다. 우리 주위에 신상이 공개 안 된 ‘나쁜 아빠’들이 그만큼 많은 것이다. 많은 한부모와 그 아이들이 이혼 과정도 힘들었는데 양육비 때문에 추가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양육비 지급을 외면하는 것을 이혼한 부부의 이견이나 갈등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어린 자녀의 복지 및 생존권을 위협하는 또 다른 아동학대로 봐야 한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 선진국들이 양육비를 강제징수하거나 고발 조치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정부 또한 관련한 법 집행에 있어 더 신속하고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나쁜 아빠’들의 이번 신상 공개를 그 시작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한 해 최대 180일을 복무할 수 있는 ‘장기 비상근 예비군’ 제도가 내년부터 새로 시행된다. 평일과 휴일 구분 없이 하루 15만 원이 지급된다. 근무일을 꽉 채우면 2700만 원을 받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해 30인 미만 중소기업의 평균 초임 연봉인 2772만 원과 얼추 비슷한 금액이다. 예비군으로 반년만 일하면 이 정도 목돈을 만들 수 있으니 일부 전역자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일 수 있다. ▷종전에도 비상근 예비군 제도는 있었지만 연 최대 15일만 일할 수 있는 단기 아르바이트 성격에 그쳤다. 하지만 7일 예비군법과 병역법 개정안이 공표되며 근무 기간이 대폭 늘었다. 180일간의 근무는 한 번에 이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쪼개기 복무’로 이뤄진다. 부대가 우선 근무 기간을 정하지만 대원과 협의해 조정할 수 있다. 정규직 노동자는 지원이 어렵겠지만 배달 플랫폼 노동자처럼 근무 조정이 자유로운 직군은 가능할 것이다. 내년 2월에 처음 선발한다니 조만간 헬멧과 철모를 번갈아 쓰는 ‘투잡 예비군’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비상근 예비군 제도가 도입된 것은 저출산 현상이 심화하면서 현역병 충원에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군 동원사단의 경우 평시에는 소수의 인원으로 유지되다가 전시가 되면 예비군이 충원돼 100% 전력의 부대로 바뀐다. 그런데 평소 이 부대에서 근무하는 현역병 비율이 8% 남짓까지 떨어지면서 전투 대비 태세 유지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자 예비군을 투입해 부족한 인원을 채우는 것이다. 2033년이 되면 한 해 충원 가능한 현역병 인력이 필요 인원인 30만 명을 밑돈다고 하니 예비군 투입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내년에 단기 예비군은 3700명, 장기는 50명 채용되는데 이런 규모가 2024년에는 단기 4500명, 장기 600명까지 늘어난다. 육군으로 시작해 공군, 해군, 해병대로도 확대된다. 포병, 정비, 통신, 보급 등 분야뿐 아니라 예비군이 늘어나면서 중·소령급 참모도 선발돼 부대 체계를 갖추게 된다. 예비군은 군기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오합지졸이란 인식도 있었다. 확대되는 ‘직업 예비군’이 이런 오명에서 벗어날지도 지켜볼 일이다. ▷군은 내년부터 비상근 예비군을 모집하면서 기존처럼 장교와 부사관뿐만 아니라 사병 출신도 받기로 했다. ‘두 번 군대 가는’ 기회가 모든 전역자에게 열린 셈이다. 취업 한파 속에서도 채용 인원이 확대되는 예비군 자리는 괜찮은 중·단기 일자리로 각광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비상근 예비군은 전시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전투에 투입되는 엄연한 군인이다. 사명감 없이 일자리만 쫓다간 개인에게도 국가에도 피해가 갈지 모른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넷플릭스는 중국에 진출하지 않았지만 ‘오징어게임’이 흥행에 성공하자 중국 내 인터넷 게시판에 각종 후기들이 올라왔다. 60여 개의 불법 사이트를 통해 중국 내에서 해당 작품이 버젓이 유통됐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부는 당장 저작권 침해라며 중국 정부에 항의했지만 이후로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인터폴이 이런 K콘텐츠의 불법 유통 단속에 팔을 걷고 나섰다. 한국을 포함하는 국제수사팀을 꾸려 올해부터 앞으로 5년간 국제적인 수사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작전명은 ‘I-SOP(Stop Online Piracy)’. 콘텐츠에 대한 ‘온라인 해적질’을 멈추라는 뜻이다. 이 작전은 지난달 퇴임한 김종양 전 인터폴 총재(60)의 성과이기도 하다. 그를 6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개인 사무실에서 만났다.》 “韓 인터폴에 80억 규모 수사 지원”―인터폴의 K콘텐츠 수사는 처음 아닌가. “그렇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그동안 콘텐츠 불법 유통에 대해 속앓이를 많이 했다. K콘텐츠가 지금 세계적으로 대중화되고 유명해졌는데 제값을 치르지 않는 불법 다운로드나 유통이 많으니 제작자나 연예인들은 정부가 제대로 저작권 보호 활동을 안 해준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하지만 정부가 다른 국가에서 직접 수사를 할 수 없으니 인터폴과 공조에 나선 것이다. 앞으로 해외 기반 서버나 다크넷(폐쇄형 P2P 네트워크 서비스) 등을 통해 이뤄지는 불법 유통 단속에 나선다.” ―인터폴이 의뢰해도 실제 수사는 중국 공안이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하겠나. “인터폴이 특정 국가를 상대로 수사를 강제할 수는 없다. 다만 관련 수사 자료를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수사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각국이 콘텐츠 불법 유통에 대한 문제점을 공유하고 경각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도 이 문제를 아예 외면하거나 묵인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또 이번 수사는 특정 국가가 아닌 전 세계를 상대로, 모든 콘텐츠 불법 유통을 막자는 취지다. 한국이 주도해 시작한 ‘펀딩(funding) 수사’지만 혜택은 전 세계 모든 제작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 ―‘펀딩 수사’가 무엇인가. “회원국들이 매년 분담금을 내지만 이것은 인터폴 운영 자금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로 선진국들이 자국이 관심을 갖는 특정 수사에 대해 돈을 지급해 인터폴과 함께 수사하는 펀딩 수사를 해 왔다. 한국은 앞서 n번방 사건이 있은 이후 ‘온라인아동성착취물’ 범죄, 그리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큰 ‘보이스 피싱’ 등 사이버 경제범죄에 대해 지난해부터 인터폴과 함께 펀딩 수사를 해 오고 있다. 인터폴은 펀딩 수사를 약 130개 하고 있는데 한국이 의뢰한 건은 지난해가 처음이었다.” ―한국이 펀딩한 금액은 얼마인가. “앞으로 5년간 K콘텐츠 등 콘텐츠 불법 유통 방지 수사에 270만 유로(약 36억 원), 지난해부터 3년 동안 각각 온라인아동성착취물 범죄에 200만 유로(약 26억6000만 원), 보이스 피싱 등 경제범죄에 130만 유로(약 17억3000만 원)를 펀딩한다. 해당 수사팀은 한국인 수사관을 포함해 10명 내외로 꾸려지는데 인터폴 내 한국의 역할을 강화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韓 더 이상 테러 안전지대 아냐” 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해외로 도피한 사범은 총 2977명이다. 하지만 최근 2년 동안 송환율은 30%에 그치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 국내에서 적발된 마약사범은 1만8000명으로 최고치를 경신했다. 날로 국제화되는 각종 범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해외 도피자의 송환율이 낮다는 비판이 있다. 인터폴의 적색수배가 제 기능을 못 하는 건가. “지금 인터폴이 적색수배를 내린 사람은 총 6만 명 정도 된다. 매해 각국이 신규 적색수배자로 1만4000명 정도를 요청하는데 한 해 검거 인원은 1만 명 정도에 그쳐 누적 수배자가 늘고 있다. 현실적으로 수배자가 발생하는 만큼 체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한국 경찰은 전 세계 국가 가운데 해마다 첫 번째 혹은 두 번째로 많이 적색수배를 인터폴에 요청하며 범죄자 검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국내 마약 유통 문제도 심각한 것 같다. “일부 국가에서 합법화된 대마초나 경미한 정도의 마약도 국내에서는 불법으로 취급돼 수치가 커 보이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안전한 국가로 불리는 곳이 싱가포르, 캐나다, 일본 그리고 한국 정도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마약이나 총기의 위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나라들이라는 것이다. 국내 마약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불법 총기마저 늘어난다면 한국 사회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국제적인 테러가 발생하지 않았다. 위험성이 적다고 보나. “한국이 주변국들과 아주 평온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인이 될 수도, 어떤 조직이 될 수도 있는데 테러를 통해서 긴장 상황을 유발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단일 민족이 아니고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인종적, 종교적, 그리고 사상적 차이가 있는 사람이 사회적인 이목을 집중시키려 할 수도 있다. 전 세계에서 더 이상 테러의 안전지대는 없다고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한국보다 더 테러 청정국가로 여겨졌던 뉴질랜드에서도 2년 전 총기 난사 테러로 50명이 사망하지 않았나.” ―사이버 범죄 가능성에는 일반인들이 항시 노출된 것 같다. “인터폴이 주로 다루는 3대 범죄는 조직범죄, 테러 범죄, 사이버 범죄인데 그중에서도 사이버 범죄에 대해 가장 관심을 많이 쏟고 있다. 인터폴의 제2청사가 있는 싱가포르에 별도의 사이버국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국경 없는 범죄여서 각국의 공조뿐만 아니라 주요 정보기술(IT) 기업들과도 협력하고 있다. 하지만 범죄 집단의 최신 기술을 따라잡기가 쉽지는 않다.” ―국제 해킹을 특정 범죄 집단뿐 아니라 북한 같은 특정 국가가 나서서 하고 있지 않나. “그렇게 추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북한은 유엔에는 가입했지만 인터폴에는 가입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다. 인터폴 역할에 한계가 있다. 북한이 왜 가입하지 않으려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우리(인터폴)가 가입하라고 권유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북한의 가입을 놓고는 회원국 간 찬반 논란도 클 수 있다.”“경찰 소명의식 예전 같지 않아” ―최근 인천 층간소음 흉기난동 사건에서 경찰이 현장을 이탈해 문제가 됐다. “개별 사안에 대한 언급보다는 전체적인 공권력 집행 상황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경찰관이 적극적으로 법 집행을 할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마련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사건에서는 ‘왜 저렇게 소극적이고, 무능하게 행동하냐’고 하고, 다른 사건은 ‘과잉 진압’이라며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도 많다. 또한 경찰이 물리력을 행사해서 사람이 다치게 되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라며 현장 상황을 되짚어 보기보다는 ‘왜 다치게 했냐’는 결과를 부각시키려 한다. 형사상, 민사상 책임 추궁이 있다 보니 경찰관들이 다소 위축된 부분이 있다. 자신감을 갖고 공권력을 집행할 수 있는 제도와 사회적 분위기 마련이 필요하다.” ―경찰의 소명 의식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게 볼 수 있다. 과거 경찰관들은 여러 가지 하는 일에 대해 어떤 소명 의식이라든지 자부심이라든지 이런 것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경찰을 보면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 된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경찰은 특별한 직장이다. 직장마다 각 조직에 필요한 경쟁력이 다를 것인데 경찰은 무엇이겠나. 위급한 상황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경쟁력 아니겠나.” ―경찰이 어떻게 하면 신뢰를 얻을 수 있나. “경찰이 국민에게 신뢰를 주려면 업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신체적으로 뛰어난 역량도 필요하다. 물론 지급된 진압 장비를 잘 다루는 기술도 키워야 한다. 하지만 결국 일반인보다 뛰어난 육체나 체력이 필요하고, 경찰관 스스로가 이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꾸준히 단련해야 한다.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에 대한 특별 채용이나 가점 제도도 필요할 것이다.” 김종양 전 인터폴 총재△경남 창원 출생(60)△창원 마산고,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행정고시 29회△경정 특채△경찰청 외사국장, 경남지방경찰청장, 경기지방경찰청장△인터폴 집행위원, 부총재, 총재(2018년 11월∼2021년 11월)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내년 2월 4일 개막하는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영국 정부가 외교적 보이콧을 ‘적극 논의’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20일 나왔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19일 “국익을 생각해 판단하겠다”며 가능성을 열어 놨다. 1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외교적 보이콧을 “고려 중”이라고 처음 밝힌 데 이어 동조 기류가 확산되는 듯하다. 이러자 중국 관영매체는 20일 “가식적인 미국 당국자들을 초대할 필요가 없다”며 날을 세웠다. 미중 갈등의 전장이 국제 스포츠 부문으로 넓어지고 있다. ▷미국 등은 신장위구르 자치구, 티베트에서 중국의 인권 탄압 때문에 보이콧을 검토한다지만 사실 이들 문제가 새로운 사안은 아니다.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을 앞두고도 인권 단체를 중심으로 비슷한 보이콧 주장이 제기됐다. 다만 당시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한일 정상 등 80여 개국 정상이 베이징을 찾았다. 이번에 다른 상황이 빚어지는 것은 중국이 이제 미국과 패권을 다투며 세계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 만큼 공동 견제해야 한다는 서방의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일 것이다. ▷외교적 보이콧은 선수단은 보내지만 개·폐회식에 정부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는 조치다. 외교적 보이콧을 해도 경기는 정상적으로 열리지만 제대로 된 ‘화합과 축제의 장’을 연출하긴 어렵다. 올림픽을 찾는 각국 정상급 인사들의 면면과 규모는 대회 흥행의 변수이자 주최국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상수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내년 하반기 3연임을 공식화하려 한다. 중국은 이를 앞두고 올림픽에 이어 7월 청두 유니버시아드, 9월 항저우 아시아경기로 분위기를 띄우려 하는데 이런 구상도 꼬일 수 있다. ▷일본의 고심도 깊어졌다. 일본은 미국, 호주, 인도와 함께 대중 견제 성격의 4개국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에 참여하고 있다. ‘스포츠는 예외’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은 7월 도쿄 여름올림픽에 거우중원 국가체육총국 국장(장관급)을 대표로 한 777명의 대표단을 보냈다. 당시 코로나 위기 속에 대회가 열렸지만 중국은 자국의 역대 올림픽 원정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을 보내며 힘을 실어줬다. ▷한국은 또다시 미중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청와대는 18일 “베이징 올림픽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계기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며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 여부는 정해진 바 없다”고 했다. 정부는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한 종전선언 논의의 진전을 기대해 왔다. 미국의 최종 결정뿐만 아니라 북한 지도부의 참석 여부를 마지막까지 지켜보며 외교적 보이콧에 대한 결정을 미룰 가능성이 커 보인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세계 최초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을 처음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는 끈기 있는 장기 투자자이기도 하다. 2009년 1월 고작 0.0008달러에 비트코인 첫 거래가 시작된 이후 그의 전자지갑에 있는 비트코인은 한 번도 인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현재 비트코인 약 110만 개를 갖고 있는데, 가치가 약 700억 달러(약 82조5000억 원)에 이른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신원은 베일에 싸여 있다. 한 명인지, 여러 명이 한 이름을 쓴 것인지조차 불투명하다. 개발 초기엔 이메일을 통해 공개 글을 쓰기도 했지만 2014년 이후론 종적을 감췄다. 이런 가운데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진짜 사토시’를 가리는 재판이 열리고 있다. 2013년 사망한 미국의 컴퓨터 보안전문가 데이비드 클라이먼의 유족이 “클라이먼과 호주 출신 프로그래머 크레이그 라이트가 바로 사토시 나카모토”라며 이들이 비트코인 공동 개발자임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라이트가 갖고 있다는 비트코인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것인데 재판을 통해 사토시의 실체가 가려질지 관심이 쏠린다. ▷그동안 본인이 사토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 나왔지만 한 명도 제대로 된 증거를 대지 못했고, 결국 사기나 해프닝으로 끝났다. 라이트 또한 2016년 처음 “내가 사토시”라고 나섰지만 이후 발언을 번복하다가 다시 재번복하는 등 오락가락을 거듭했다. 증명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토시의 전자지갑에 비밀번호를 입력해 몇 달러어치만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재판 과정에서 금융 역사에 남을 ‘세기의 이체 장면’을 볼 수 있을까. ▷라이트든, 또 다른 제3자이든 사토시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코인 투자자들은 호기심만큼이나 큰 불안감을 갖고 있다. 사토시가 가진 비트코인 수량은 총 발행량 2100만 개의 5%가 넘는다. 일부라도 현금화할 경우 시세 급락이 예상된다. 비트코인은 가상화폐 시장 총액의 약 43%를 차지하고 있어 다른 코인들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일각에서 ‘사토시의 출금을 강제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이유다. ▷사토시가 비트코인을 만든 시점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 직후였다. 미국 등의 중앙집중형 금융 권력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는 개인 간 거래를 내세운 비트코인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으로 불리며 또 다른 금융 권력이 됐다. 그러나 비트코인의 탈중앙화 가치를 설파했던 개발자가 전체 발행량이 제한된 비트코인을 대량 소유한 채 결과적으로 ‘중앙화’된 것은 아이러니다.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